10.26사건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1980년 11월 초의 어느 날, 백운택
71방위사단장이 탄 승용차가 육군본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합참본부 최
성택 정보처장에게 전화로 약속을 해둔 터였다.
최성택 소장은 백운택 준장과는 육사 11기 동기로 전두환,손영길,김
복동과 함께 11기 졸업생들 가운데 가장 먼저 별을 단 선두주자의 한 사람
이었다. 그러나 백운택 준장은 항상 그들에게 뒤쳐져 있었고 계급 또한
항시 아래여서 그들과는 다소 소원해져 있었다.
승용차에서 내린 백운택은 바삐 걸음을 옮겨 합참본부 건물로 들어섰
다.
"어이 운택이, 오랜만일세."
최성택은 백운택을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러나 어딘
지 모르게 최성택의 행동은 어색해 보였다. 그는 담배를 꺼내 백운택에게
권하며 물었다.
"그래, 어떻게 지내는가? 힘들지?
"그냥 뭐, 그럭저럭......"
백운택은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며 목을 한번 가볍게 움직였다.
뭔가 답답한 듯 보였다. 연기를 훅 뿜어내며 그는 더 이상 머뭇거릴 수가
없다는 듯 말을 꺼냈다.
"사실은 말이야, 이러다가는 그만 옷을 벗고 말겠어. 도무지 갑갑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백운택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최성택을 나지막이 바라보았
다.
"성택이, 좀 도와주게나."
"글쎄,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나?"
"나도 일다운 일 좀 해봤으면......"
백운택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고 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창 밖의 을씨년한 숲을 향해 눈길을 주던 그는 최성택을 쳐다
보았다.
"성택이, 자네 두환이를 자주 만나지?"
"응?"
최성택은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최성택은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이따금씩 만나고 있었다. 전두환이 육
본으로 오는 길이면 으례히 최성택의 집무실에들렀고, 최성택도 가끔씩
보안사령부를 방문하여 국내외 정세와 시국문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곤
했다.
언젠가는 전두환이,
"내가 보안사령관이 되고 보니 꼭 정치인이 된 듯한 기분이야. 매일 보
고받고 보고하는 내용이 국내 치안문제와 시국분석이니 말이야......"
라고 말하며 자신의 위세가 높아지고 있음을 은근히 자랑했다. 그때 최성
택은 초라해지는 자신의 마음을 가누지 못했었다.
"가끔 만나고 있네만, 왜 그러나?"
최성택은 자신이 전두환만 못하다는 사실에 내심 불쾌하였으나 이내
감정을 삭이며 물었다.
"자네가 두환이에게 내 애기 좀 해줄 수 없겠나?"
백운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요즘 두환이 주가가 계속 오르고 있잖나, 그러니......"
백운택은 말을 해놓고는 곧 후회를 하였다. 최성택의 안색이 갑자기 굳
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지."
성냥불을 치익 그어대는 그는 무감각한 어투로 말했다. 담뱃불을 붙여
물고 나서 최성택은 안색을 바꾸어 백운택을 쳐다보았다. 백운택 또한 최
성택의 그런 모습에서 동기들의 묘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최성택
은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내뱉으며 씨익 웃었다. 백운택의 어눌
한 표정에 위안을 던지는 최성택의 배려였는지도 몰랐다.
"그래, 두환이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무래도 손쉬울 거야, 내가 지금 두
환이에게 전화를 해보지."
최성택은 옆에 있던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렸다.
"날세, 최성택."
"어이구, 최장군께서 웬일인신가?"
수화기에서 호탕한 전두환의 목소리가 왱왱하니 울려나왔다.
"지금 백운택이가 나를 찾아왔어. 요즈음 몹시 침울한 모양인데, 자네
가 기운 좀 북돋아주게나."
"그래? 그 친구 연락도 없더니 웬일이야? 나를 만나고 싶으면 지금
곧 들르라고 해주게나."
"그러지."
최성택은 전화를 끊고는 창가에 서 있는 백운택을 쳐다보며 말했다.
"두환이에게 가봐. 그래도 우리는 30년 친구 사이가 아닌가? 두환이는
의리가 강해. 한번 정을 주면 배반을 하지 않는 한 절대로 그 정을 저버리
지 않아. 가서 의논을 하면 틀림없이 도움을 줄걸세."
"고맙네, 성택이. 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나?"
"별소리를 다 하는구만. 자네 앞가림이나 잘 하게나."
백운택은 재차 고마움을 표하며 최성택의 사무실을 나섰다. 그러나 그
의 뒷모습에서는 찬 바람이 일고 있었다. 백운택 장군은 이후로 최성택
장군을 다시는 찾지 않았다.
한편 보안사 참모회의에서는 허삼수와 허화평을 중심으로 정승화를 내
란음모에 방조한 사유를 들어 참모총장에서 축출하기위한 시나리오를
만들고 있었다.
허삼수 대령은 부산고를 거쳐 육사 17기로 졸업한 후 휴전선 관측장
교로 4년간 복무하고 난 1965년부터 보안사령부에 배속되어 조사와 수사
부문의 베테랑으로 잔뼈가 굵어 있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79년 3월 1
사단장에서 보안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김복동 장군의 추천을 받아 X군
단 보안부대장으로 있던 허대령을 보안사 인사처장으로 전격 발탁하였
다. 허삼수는 67년부터 3년간 주월사령부 보안부에서 사이공 담당 대공분
실장으로 근무할 때 보안부대장이 김복동 장군이었던 인연으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휘하에 들어간 것이었다. 전두환은 허삼수를 보안사 인사
처장에 기용하자마자 인사숙정을 지시하였고 허삼수는 솜씨있게 기구 축
소작업을 벌여 전사령관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포항고를 마치고 육사 17기로 졸업한 허화평 대령은 육군 대학을 수석
으로 졸업한 후 대대장과 사단 작전참모 등을거쳐 특검단 검열관으로 재
적중에 전사령관의 비서실장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허화평 대령은 10.
26사건의 범인인 김재규 전중앙정보부장의 신병을 인수한 뒤 김재규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실력을 발휘하여 전두환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었
다.
이들은 육사 동기였고 매우 절친한 사이였지만 성격은 아주 상반되었
다. 허삼수가 날카롭고 강한 이미지라면 허화평은 부드럽고 이지적인 분
위기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전두환의 측근으로 기가 막히게 호흡을 맞추
었다.
이들은12.12거사의 지도자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옹립하기로 하고
모의를 확대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이학봉 중령,장세동 대령,권정달
대령 등 영관급 장교와 노태우 9사단장, 박준병 20사단장 등 장성급의 합
류하였다.
한편 최성택 장군의 도움으로 보안사령부를 찾아간 백운택 장군은 전
두환 사령관을 형님이라고불렀다.
5.16 직후 육사 생도들의 혁명지지 퍼레이드를 성사시킨 공로로 박대
통령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면서 청와대, 중앙정보부, 육군본부 참모총장
의 전속부관 등 중앙 핵심부서에서 근무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가까운
동료나 유능한 후배들의 진급 문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백운택도 전두환의 후광을 받은 사람 중의 하나였다.
"형님, 반갑습니다."
"그래, 얼마 만인가?"
"조금 오래되었습니다. 요새 바쁘시죠?"
"응, 조금 바쁘네, 그런데......"
"형님, 그때 생각 납니까?"
"언제?"
"저희 육사 동기중에서 수석으로 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한 김성진 말
입니다."
"허허,그 사람은 왜?"
"일선에서 잠시 소대장을 한 다음 59년부터 70년까지 줄곧 육사교관을
했지요. 그 친구는 머리가 좋아서 교관으로 있으면서 서울대 사학과를 수
료하고 미국 일리노이대를 거쳐 플로리다 대학원에서 기계공학박사 학위
를 받을 글자 그대로 학구파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머리가 좋은
데도 장군진급 심사에서는 번번히 누락되었지요. 군인은 역시 일선을 누
비는 보병이어야 한다는 고집스러운 인식이 심사위원들에게 있었기 때문
이지요. 이때 형님께서 심사위원으로 들어가는 선배 장군을 붙잡고 '현
대전은 과학전이 아닙니까? 형광등 아래에서 첨단과학을 활용하여 신병
기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두뇌도 필요한 것입니다.'라며 김성진 대령을
장군으로 승진시켜줄것을 간청하여 진급이 되지 않았습니까?"
전두환은 백운택의 말이 흐뭇한 듯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또'전쟁에는 주먹도 있어야 한다. 나중에 적의 진지에 태극기를 꽂아
야만 완전한전쟁에 승리할 수 있다. 백운택은 학구파는 아니지만 용기가 있는
군인이 아니냐?' 하며 상관들을 설득하여 저도 별을 달 수 있었던 거 아
닙니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백운택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당시의 상황들을 떠올리며 전두환에게 감
사를 표시하였다. 전두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백운택에 대한 충성도를 가늠
하고 있었다. 이내 그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운택이 자네가 나를 위해 해줘야 할 일이 있는데."
"형님, 무슨 일이든 맡겨만 주십시오. 단 한 번에......"
"우리는 지금 정승화 총장의 연행을 구상하고 있는데......"
전두환 장군은 백운택에게 거사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한편 보안사 참모들은 거사 날짜를 12월 12일로 잡았다. 굳이 이날을
택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12월 12일은 장군 진급자 발표일이었
다. 때문에 보안사를 통해 진급확정자 명단을 미리입수만 할 수 있다면
특정인의 장군 진급을 축하한다는 구실로 거사의 장애가 될 것이 확실한
정총장 계열의 장태완 수경사령관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회식에 초청하
여 발을 묶어둘 수 있다는 이유가 첫째였다. 또한 12월 12일이 김재규 사
건의 사실심리가 끝나는 날이기 때문에 이날을 정총장 강제연행의 데드
라인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두번째이유였다.
12월 8일 노태우9사단장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의 연행을 결의 하는 자리에서 12일이 거사하기에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최종 결정을 지어놓고 있었다.
이른바 '생일집 잔치'는 이렇게 해서 12월 12일 오후 6시 30분경 경복궁
제30경비단 단장실에서 열리게 되었다.
첫댓글 허..어디서 이런 글을...전 사실 역사를 공부하면서도 근현대사는 관심이 없어 전혀 안보았는데..지금 읽어보니~ 흠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