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 17분, 스페인 북부 휴양도시 산세바스티안의 아노에타구장은 9000여 홈팬의 함성으로 떠나갈 듯 들썩였다. 이천수(22)의 강한 슈팅이 스웨덴 명문 클럽 말뫼의 골망을 강하게 흔들자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장내 아나운서도 들뜬 음성으로 이천수의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며 기쁨을 표시했다.
‘뉴밀레니엄 특급’ 이천수가 드디어 첫 골을 신고했다. 21일 오전(한국 시간) 레알 소시에다드의 홈구장인 아노에타구장에서 프레시즌 네번째 경기로 벌어진 말뫼와의 친선경기에 처진 스트라이커로 선발 출장한 뒤 2-1 결승골을 터뜨리며 각별한 애정을 보여준 팀과 홈팬들에게 프레시즌 첫 승을 선물했다.
비록 정식 리그 경기가 아닌 친선경기였지만 한국인으로는 처음 스페인 무대에 진출한 후 프레시즌 4경기 만에 축포를 쏘아올려 열흘 앞으로 다가온 2003~2004시즌 주전 도약 가능성을 키웠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이천수는 레알 소시에다드가 1-0으로 앞서던 전반 17분 스트라이커 데 파울라가 페널티지역 오른쪽에서 가빌론도의 왼쪽 코너킥을 받아 헤딩슛한 공이 상대 수문장의 손에 맞고 골지역 왼쪽으로 흐르자 달려들며 오른발로 강하게 슈팅해 골로 연결했다.
전반 6분 데 파울라의 선취골 상황에서도 도움성 크로스로 팀이 승리하는 데 견인차가 됐다. 아크 오른쪽에서 이천수가 크로스한 공이 상대 수비수의 머리에 맞고 문전으로 흐르자 데 파울라는 논스톱 오른발 슈팅으로 선제 포문을 열었다. 도움으로 잡히지는 않았지만 페널티지역의 데 파울라를 겨냥한 이천수의 날카로운 크로스가 돋보였다.
레알 소시에다드는 후반 30분에 말뫼의 이제에게 한 골을 허용했지만 전반에 얻은 두 골을 끝까지 지켜 2-1로 승리했다. 네번의 프레시즌 친선경기에서 1승2무1패(승부차기 승패는 무승부 처리)를 기록하게 됐다.
프레시즌 4경기에 모두 출장한 이천수는 후반 30분쯤 홈팬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프리에토와 교체돼 나왔다. 이날 골은 오른쪽 사타구니에 통증이 있어 완벽한 몸상태가 아니었지만 출전을 강행한 가운데 터뜨린 것이어서 더욱 빛이 났다.
이천수는 “첫 골을 터뜨려 기쁘다. 마음을 비우고 경기에 나선 게 골을 터뜨리는 데 오히려 득이 된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레날 다누에 감독도 “이렇게만 해준다면 시즌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며 만족스러워했다.
산세바스티안(스페인) │ 오광춘기자
okc27@
<이천수 인터뷰 "한번 터지면 계속 터진다니까요">
“한번 지켜봐 주세요. 한번 터지면 계속 이어질 테니….”
들뜬 얼굴이었다. 그간의 프레시즌 매치에서 골소식에 애를 태웠는지 “시원하다”는 말로 소감을 대신한 그는 밝은 목소리로 스페인 무대 첫 골의 의미를 되새겼다.
경기 중 상대 수비수에게 차여 오른쪽 종아리에 얼음찜질을 한 채 기자회견장에 들어섰지만 부상에 대한 걱정도 잊은 듯했다. 오히려 “한번 터졌으니 계속 이어질 것이다”라며 잔뜩 호기를 부렸다. 프레시즌 매치에서의 마수걸이 골을 바탕으로 열흘 뒤 프리메라리가가 문을 열면 제대로 골을 터뜨리겠다고 당찬 포부도 내비쳤다.
―기다리던 첫 골을 드디어 기록했는데.
굉장히 (기분이) 좋다. 그동안 계속 골에 욕심을 냈더니 더 간절해지는 것 같아 오늘은 마음을 비우고 경기에 나섰는데 운 좋게 골로 연결됐다. 내심 이젠 골을 넣을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쁘다.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첫 골의 의미는.
한번 터지면 무섭게 골이 들어가는 경향이 있는데 한번 지켜봐 달라. 시즌에 들어가서도 골을 많이 넣을 듯한 기분이다.
―후반에도 페널티지역에서 맞은 결정적인 슈팅이 골대를 넘어갔는데.
시즌 때는 절대 안 놓칠 테니 두고 봐달라.
―팀에 잘 적응하고 있는 편인가.
말도 많이 배우고 완벽하게 적응하고 있다. 선수들이 모두 잘해주고 산세바스티안 시민들도 반갑게 대해줘 든든한 힘이 된다. 올 시즌은 이들을 위해 좋은 성적을 내고 싶다.
―오늘은 니하트 코바체비치가 빠진 가운데 스트라이커로 섰다. 이후 그들과의 경쟁이 불가피한데.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스페인에 왔을 때 어느 정도 적응기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기에 뛰는 게 좋긴 하지만 팀 성적에 보탬이 되는 게 우선이다. 누구 자리를 빼앗으며 팀워크에 분열을 가져오기보다는 팀을 위해 뛰고 싶다. 어느 정도 적응한다면 경기에 뛰는 데 욕심을 낼 수 있겠지만 올 시즌은 리그경기와 챔피언스리그 경기가 많아 자연스레 출전 기회가 올 것으로 본다.
산세바스티안(스페인) │ 오광춘기자 okc27@
<다누에 감독 "이렇게만 해주면 된다">
“이렇게만 해주면 된다!”
웬만해선 웃음을 보이지 않는 레날 다누에 감독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처진 스트라이커로 선발출전한 이천수가 골을 넣으며 능력을 마음껏 보여준 데 대해 만족한 반응을 보이면서 칭찬을 늘어 놓았다. 적극적인 플레이 스타일에도 합격점을 줬다. 선수들과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는 그도 경기가 끝난 후 그라운드를 빠져 나오는 이천수의 등을 토닥거려주며 반갑게 맞이했다.
“이천수는 후반보다 전반이 나았는데,요즘에 힘든 운동을 많이 해서 후반에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고려한다면 당연하다. 전반전에 동료들에게 공을 달라고 적극적으로 주문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계속 이렇게만 한다면 시즌에 들어가도 좋을 것이다.”
다누에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이천수에 대한 평가를 유난히 길게 했다.
이천수는 경기 전 다누에 감독으로부터 “18일 오사수나전과 똑같이 해라. 수비할 때는 스트라이커 데 파울라와 횡으로 나란히 서서 하되 공격할 때는 확실히 처져서 스피드를 이용하라”고 특별 지시를 받기도 했다.
다누에 감독과 함께 현지 기자들도 말뫼전에서 보인 이천수에 활약에 후한 점수를 줬다.
바스크 지방의 유력지 ‘엘 디아리오 바스코’ 이나키 이즈키에르도 기자는 “이천수는 매우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많은 면에서 점점 좋아지고 있다. 특히 오늘 경기에서는 전반전이 후반전보다 나았다”고 평가한 뒤 “처진 스트라이커로서 제구실을 했지만 하프라인 부근까지 내려와서 공을 키핑하는 능력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라디오 산 세바스티안’의 고르카 레이자발 기자는 “오늘 골도 넣고 여러모로 매우 좋았다.지금까지 잘 적응하면서 좋은 인상을 주고 있다. 그가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산 세바스티안|오광춘기자 okc27@
<이천수 첫골 넣기까지>
이천수는 친선경기이기는 하지만 20일 말뫼전까지 프레시즌 친선경기에 네차례 연속 출장해 257분을 소화하며 1골을 뽑아냈다. 스피드가 발군인 점을 이용해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경기마다 두세 차례의 기회를 잡아 앞으로 골소식을 이어갈 가능성이 큰 편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한국에서 연속 경기 골로 화제를 모았던 경험을 토대로 골몰이에 대한 자신감도 피력하고 있다. 지난달 16일 아노에타구장에서 입단식을 치르며 레알 소시에다드의 일원이 된 이천수는 골과 별도로 오스트리아 제펠트에서 2주간의 혹독한 훈련을 거친 뒤 13일 이탈리아 우디네세전을 시작으로 프레시즌 매치에 출전하며 주전경쟁을 벌이고 있다.
우디네세전(90분), 알 알리전(77분), 오사수나전(15분)에 이어 20일 말뫼전에서 75분을 소화한 이천수는 4-4-2전형의 좌·우 미드필더와 처진 스트라이커를 오가며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자리를 찾고 있다.
잘 짜인 레알 소시에다드 공격 라인의 틈을 비집고 선발멤버로 발을 들이기는 다소 버겁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는 상황에서 프레시즌 경기 네번째 도전 끝에 터뜨린 골축포는 비로소 그의 진가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사실 두번째 경기까지 선발출장하고도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하자 주위에서는 다소 냉담한 분위기가 돌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