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生)”이 “살아 있다”를 뜻하고, “수(水)”가 “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수(生水)”는 “살아 있는 물”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4장 1-3절에 “‘예수가 제자를 만들고 세례를 주노라’는 것을 그 바리새인들이 들은 것을 주께서 아셨을 때에(when).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아니하셨으나 그 제자들이 세례를 베푼 것이라. 그가 그 유대를 버려두셨고, 다시 그 갈릴리 안으로 가버리신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보다 더 많은 제자들을 만들고 세례를 베푸시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을 그 바리새인들이 들었다는 것을 주께서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유대를 버려두셨고 다시 그 갈릴리 안으로 가버리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려고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4-9절에 “그를 그 사마리아를 통해 지나야 하셨으므로. 그러므로 그가 ‘수가’라고 말하여지는 사마리아의 도시 안으로 오셨는데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토지(ground)의 구획에 가까웠으나. 예수께서 야곱의 샘의 근처에 앉으시고 그것이 대략 여섯째 시점이었고. 사마리아에서 여자가 물을 퍼 올리려고(to draw water) 왔으며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셨기를 ‘나에게 마시기에 달라’고 말씀하시니. 이는 그의 제자들이 도시 안으로 가버렸음이니 음식들을 사기 위해서라. 따라서 그 사마리아인(Samaritan) 여자가 그에게 말하기를 “어떻게 유대인인 당신은 나에게 마시게 요구하시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교제하지 아니함이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 여행에서 지치게 되신 예수님께서 그 야곱의 샘의 근처에 앉으셨고 그것이 대략(about) 여섯째의 시점(hour)이었습니다(요 4:6).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셨으므로 목마르시고 배고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지치게 되셨고 피로하셨습니다(요 1:14).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고통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사마리아에서 여자가 물을 퍼내기에(to draw) 왔으며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나에게 마시게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요 4:7).
그가 사마리아를 통하여 지나야 하셨던 이유는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그는 이 여자를 만나시기 위한 목적으로 사마리아를 지나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만나신 것은 그녀가 물을 퍼내기에 왔을 때였습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이 여자처럼 일대일로 개인적으로 만나야 합니다.1)
여러분은 하루에 얼마나 자주 예수님을 일대일 개인적으로 만납니까? 여러분 생각은 세상일로 가득하고 여러분 시간은 세상일에 사용됩니까? 종일 돈 버는 일에 몰두를 하다가 쉬는 시간이 되면 게임하며 보냅니까?
여러 사람과 있을 때에는 예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게 되므로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홀로 떨어져 있는 고요한 순간에 예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므로 고요함 가운데에 예수님을 만나십시오!2)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는 우리를 만나시기 원하시고 만나시기 위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육신을 이루셨는데 “이룰 성(成)” 자를 사용하여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우리를 만나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그는 그녀를 만나시기 위해 사마리아를 통하여 지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만나시기 원하는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만나시는데 그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그의 방법으로 만나시기 위해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우연히 통과하실 때에 이 우물가에 앉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처음부터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나에게 마시게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행에서 지치게 되신 예수님께서 야곱의 샘의 근처에 앉으셨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때에 힘들고 지치게 되신 약함을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때에 창세 이전부터 그가 아신 자를 만나 주십니다. 그의 때에 좋은 소식을 듣도록 만드시고 위로부터 거듭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시간에 그의 방법으로 우리를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다가 우연히 그 샘 곁에 앉으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만나실 목적으로 일부러 그 샘으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그곳에 찾아가셔서 ‘마시게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의 제자들이 도시 안으로 가버렸음이니(had gone away) 음식들(food)을 사기 위해서입니다(요 4:8).
저는 제자들에서 막내인 사도 요한은 남아 있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사도 요한이 남아 있은 까닭에 이 사건을 기록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후에 이 사건을 듣고 기록했을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 여자가 그에게 말하기를 “어떻게 유대인인 당신은 나에게 마시게 요구하시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교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요 4:9).
그녀는 예수님이 유대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입견(先入見)’이라는 한자는 ‘먼저 드는 견해’를 뜻하는 말이며, ‘선입관(先入觀)’이라고도 하는데 ‘먼저 드는 관점’을 뜻하는 말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하여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고정적인 관점입니다. 그 대상을 알기 전에 이미 그 대상에 대하여 먼저 판단 내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선입관에 사로잡히면, 그 대상을 올바로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남자와 여자라는 선입관을 넘어서 이 여자에게 말을 거신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살아 있는 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4장 10절에 “하나님의 선사품과 내가 누구인 것을 알았으면, 그대는 그에게 요구하였고 그가 그대에게 살아 있는 물을 주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사품(gift)”이라는 단어(도레아)는 “선물”(gift)을 뜻합니다. “주다”, “하사하다”는 동사(디도미)에서 유래한 명사입니다. “선사품”이 뭐냐면 “사(賜)”가 “주다”, “하사(下賜)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선물로 주는 것을 “선사품”이라고 하겠습니다. “선사품”은 다른 말로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하셨고 그녀에게 대답하셨기를, “만일 그대가 하나님의 선사품과 그대에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그대는 그에게 요구하였고 그가 그대에게 살아 있는 물을 주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4:10).
“하나님의 선사품”은 함축적 의미로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냅니다.3) 하나님의 선물은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구원은 사람이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천국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지 사람이 자기가 아무리 착한 일 많이 하고 선한 일 많이 하고 한 달에 천만 원씩 가난한 사람 도와주고 그래도 천국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오직 천국은 하나님의 선물로, 은혜의 선물로, 믿음으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물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대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았더라면,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내가 구원자, 구원할 수 있는 구원의 주,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대가 나에게 요구하였을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살아 있는 물,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살아 있는 물”은 저수지의 고인 물과 반대됩니다.4)
“생수”는 “흐르는 물”(running water)로도 번역되었는데(레 14:5-6), 흐르지 아니하는 물은 썩습니다(Stagnant water is bound to corrupt). 흐르는 물은 썩지 아니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물”, 즉 “생수”가 됩니다.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은 마시면 배탈 나던지 심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 마시면 큰일 납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물,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살아 있는 물입니다. 또 지하에 흐르는 물을 지하수라고 합니다.
마트에서 파는 생수는 지하에서 나온 물입니다. 생수 회사가 땅을 깊게 파 가지고 지하에서 흐르는 물을 병에 담아 파는 것입니다.
생수는 지하에서 흐르는 물이라는 것입니다. 지하에서 흐르는 물은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에는 온갖 불순물이 섞여 있습니다. 이것이 땅에 떨어지면 흙과 자갈과 돌을 통과하면서 불순물이 걸러지고 맨 마지막에 깨끗한 물만 남습니다. 이것이 지하수입니다. 이것은 정수기의 원리와 같습니다. 정수기에 여과기, 영어로 필터를 거치면서 불순물이 걸러지고 깨끗한 물이 되는 것입니다. 지하수도 이런 원리로 지하에 깨끗한 물이 흐릅니다.
사람들이 옛날에는 지하에 흐르는 물을 땅을 팠습니다. 땅을 몇 십 미터를 파면 지하에 흐르는 물이 판 바닥에 고입니다. 그것을 그릇으로 퍼 올려가지고 그것을 마시고 그것을 집에 담아 가서 요리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우물 물에는 지하수가 고여 있는 것이고 물을 퍼 올리면 퍼 올린 만큼 다시 우물물이 채워지기 때문에 항상 신선한 물을 마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그대가 나에게 요청하였더라면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듣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 여자가 말하기를, “주여 당신은 물을 긷는 그릇을 가지지 아니하고 그 우물은 깊으니 그러므로 어디서 당신이 그 살아 있는 물을 가집니까? 당신은 우리의 조상 야곱보다 크지 않으니 그가 우리에게 우물을 주었고 그와 그 아들들과 그 가축 떼가 그것에서 마셨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물”은 땅을 파서 지류로부터 공급받는 우물입니다(요 4:11).5)
수고를 통하여 얻는 물에 “우물”(well)과 “수조”(cistern)가 있는데,6) 물을 길어 올리는 수고를 하여야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이 “우물”은 땅속에 흐르는 “샘”에 의해 물을 공급받았을 것입니다. 여행자는 물을 긷기 위해 가죽으로 만든 도구를 지니고 다녔을 것인데 이러한 도구를 지닌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까운 도시로 떠나갔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께는 그 우물의 물을 길 수 있는 도구가 없었습니다.7)
예수님께서 생수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니까, 이 여자는 문자적으로 알아듣고 '당신은 그릇을 가지지 아니하였는데 당신이 어디서 그 생수를 가집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앞에 요한복음 3장에 나온 니코데모와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적으로, 영적으로 말씀하셨는데 니코데모는 문자적으로 들어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이 여자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생수를 주시겠다니까 이 여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알아듣고 당시은 그릇도 없는데 것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께서 야곱보다 크지 아니한 것을 말합니다(요 4:12). 그녀는 예수님께서 야곱보다 크신 분이심을 아직은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가 말씀하셨기를 “이 물에서 마시는 모든 자는 다시 목마를 것이나. 내가 줄 물에서 마신 자는 결코 그 영원 안으로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나, 내가 줄 물은 그 안에 영원한 생명 안으로 솟아나는 물의 샘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4:13-14).
야곱에서 샘의 물은 다른 물처럼 일시적으로만 목마름을 없앱니다.8) 이 물에서 마시는 모든 자는 다시 목마를 것입니다(요 4:13).
우물에서 물을 퍼 올려서 그 물을 마시면 만족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만족이 오래 갑니까? 집에 가면 저녁이 되면 또 물 마셔야 됩니다. 내일 되면 또 물을 마셔야 합니다. 이 물을 마신 자는 이 물을 마셨다고 영원히 안 마셔도 됩니까? 아닙니다. 집에 가서 또 목마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물이 그렇지 않습니까? 물을 마셔도 또 다시 마셔야만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갈증을 느끼게 되고, 또 물을 마셔야 갈증이 해소됩니다.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채울 수 없습니다.9)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것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나에게 갈증이 없을 것이야 갈망이 없을 것이야 하고서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손에 넣으려고 하고 노력해서 손에 넣게 되는데 처음에 그것을 가질 때는 기쁘지만, 다시 새로운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옷 또는 내가 원하는 차를 사면 그것이 잠시 만족을 줍니다. 그러나 그 만족감이 영원히 가지 않습니다. 다른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유행이 바뀌고 새로운 제품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돈 벌어서 휴대폰 샀는데, 10샀는데 조금 있으면 12 나오고 13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사람에게 영원히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수천억을 가질지라도 하나님을 떠난 자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0억을 가지면 만족할 줄 알았는데 10억을 가져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100억을 가지면 만족할 줄 알았는데 100억을 가져도 만족할 수 없어서, 1000억을 가지면 될 줄 알았는데 1000억을 가졌어도 불만족스럽습니다.
사람 평생 그렇게 세상 것들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전에 찬송가 149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를 불렀잖습니까? 세상에 속한 욕심은 헛된 것입니다. 이 세상 것들은 나에게 영원히 만족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것들은 아무리 채워도 나를 만족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없을 때에는 그것을 가지면 만족할 것 같지만, 정작 가지면 그것도 나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실 물에서 마신 자는 결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나 그 안에 영원한 생명 안으로 솟아나는 물의 샘이 될 것입니다(요 4:14).
예수님께서 목말라 하는 이 여자에게 우물을 파서 얻는 우물물이 아닌 자연적으로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5절의 “물”과 “성령(Spirit)”은 같은 대상을 가리킵니다. “물”은 깨끗하게 하는 성령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요한복음 4장 10절의 “살아 있는 물[生水]”도 역시 성령님을 뜻하는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에서 마신 사람은 결코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님께서 영생을 위해 솟아나십니다(요 4:13-14).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주실 때 성령님께서 그 사람 안에 거주하십니다. 성령님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시면서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히 샘솟습니다.
그 사람 안에 성령님께서 계시지 않는 불신자들은 이것저것 추구하나, 아무리 그러한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가도 그 영혼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영과 육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육체는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고 옷을 입어야 살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물질적인 것들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육체의 필요는 채우겠지만 영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영혼에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구멍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을 아무리 가져도 하나님이 아니면 그 구멍을 채우지 못하기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가질지라도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그 영혼에 하나님의 빈자리가 있으므로 항상 목마릅니다. 저 지옥에 사람들은 물이 없어서 갈증을 느끼지만 그것보다 더한 갈증은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됨으로 인한 갈증입니다. 그것 때문에 지옥은 영원히 목마른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의 영을 채워주실 때에 우리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生水)를 주시는 분이시며 그분께서 주시는 생수(生水)는 생명(生命)을 주시는 성령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갈망을 일으키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수만 가지 방법을 통하여 갈망을 일으키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채워지지 않은 영적 빈자리가 있습니까?10)
우리가 이 세상에 보이는 물질, 보물. 온 세상의 보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신의 영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영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이 온 세계를 얻고 그 영혼을 해를 입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사람이 그의 영혼의 교환으로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막 8:36-37).
그런 가치가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보물, 모든 권세, 모든 영광을 다 가져도 영혼을 잃어버리면 그것보다 더 손해 보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괴테라는 사람이 쓴 『파우스트』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 보면 어느날 악마가 주인공 파우스트에게 찾아옵니다.
‘야. 파우스트, 너 나에게 너의 영혼 팔아, 너 영혼 나에게 줘, 그러면 내가 너에게 모든 것 다 줄게, 이 세상에 있는 보물 다 줄게, 너 지금 늙었잖아, 너 지금 늙었는데 너 영혼 팔면 너 젊은 돌려줄게, 그리고 모든 돈 다 줄게.'
사람이 젊고 잘생기고 돈 많으면 여자들은 자연히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들도 다 줄게, 세상의 명예, 영광, 권력 다 줄게, 너 나에게 영혼 팔래, 여러분 영혼 팔겠습니까? 다 준다는데. 그런데 파우스트는 영혼 팔았습니다. 젊음을 되찾고 세상에 있는 모든 보물을 다 가지고 몇 십 년을 누리면서 살면 무슨 소용입니까? 세상에서의 삶은 100년도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원은 말 그대로 영원입니다 만년도 아니고 십만 년도 아니고 억년도 아니고 영원,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영원한 세계를 존재하면서 지금 살았던 100년 기억이나 나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복음”(고린도전서 15장 1-3절)이라는 설교에서도 언급했듯이 ‘방탄소년단’이라는 가수 그룹에게 ‘피 땀 눈물’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내 피 땀 눈물 다 가져가, 내 몸 마음 영혼도’라는 가사를 가진 노래인데 ‘내 몸 마음 영혼 다 가져가고, 부와 영광을 달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방탄소년단은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고 제일 유명한 가수가 된 것이나, 그 영광 오래갑니까? 이제 군대에 가야 되고 그룹이 해체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젊음은 영원히 유지되지 않고 그들의 인기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부와 명예 유명한 인기를 가졌다고 그것이 나의 영혼을 맞바꿀 그런 가치가 있냐는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가져도 내 영혼이 가장 귀중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영혼, 영혼에 해를 입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부를 다 가져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부를 끌어 모으고 70년 80년 살았습니다.
나중에 늙고 나서 돈 많이 벌고 나서 예수님 믿을게 그때 예수님 찾습니까? 찾지 않습니다. 평생 자기 습관이 있는데, 나중에 머리도 희미해지고 치매가 걸려서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그럴 때에 어떻게 예수님을 찾겠느냐는 말입니다. 젊을 때에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을 가지고도 우리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없습니다.11) 육체의 필요는 채워 줄 수 있겠지만 영혼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없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을 다 가져도 영혼이 쉴 수 없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사람이 몸이 아프면 침대에 누워도 쉴 수 없습니다. 100억 짜리 아파트에서 1억 짜리 침대 위에 누워도 아프면 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죽으면 영원히 지옥 불에서 고통 받을 때에 1초라도 쉴 수 있겠습니까? 물 한 방울 없는 고통스러운 지옥에서 어떻게 쉴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 쉼을 찾을 때까지 결코 쉴 수 못합니다.12) 하나님 안에서 휴식을 취할 수 없다면 그 무엇 안에서도 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님을 통하여 가능하게 하시는 모든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가장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옵니다.13)
그 안에 참 만족과 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 있는 물은 생명을 주는 물이기 때문에 “생명수”라고도 말합니다. “생수”는 “생명수”고, “생명수”는 “생명을 주는 물”입니다.
그 영광의 왕자께서 죽으신 그 놀랄만한 십자가를 내가 관찰하는 때에 나의 가장 값진 이익을 내가 세나 잃고 나의 자랑 위에 경멸을 쏟습니다. (찬송가 149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영어 1절 가사 번역)
지금까지 내가 자랑으로 여긴 것을 다 경멸하고 멸시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돈, 나의 권력,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모두 다 멸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크리스트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 6:14).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찬송가 149장 2절)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수’ 외에 우리의 필요를 채우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는 때에 생명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 물의 샘은 생명과 활력과 능력이 있으며 우리 안에서 일합니다.14)
그래서 그 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 그 전에는 죄를 즐겼지만 이제는 죄를 멀리할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이 성령의 능력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면서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과거는 무엇입니까? 구원의 과거는 ‘칭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법원에 갔을 때에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 망치로 쾅쾅쾅 세 번 두드리십니다. 아 이 사람은 죄가 없어, 이 사람은 의로운 사람, 의인이라고 칭하시는 이것이 칭의입니다. 내가 죄가 있어도 내가 사람을 죽였어도 하나님께서 법원에서 ‘너 죄 없어 너 의인이야’라고 하시면 나는 의인인 것입니다. 벌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예수님께서 죗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나는 죄 없다고 판정되는 것이고 이것이 과거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과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고, 현재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성화의 과정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때에, 미래에 우리가 ‘영화’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몸을 주실 때에 우리는 완전히 영화되어서 천국에서 죄를 범하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우리는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령님의 생수가 우리 속에서 샘솟습니까?
진짜 신자와 가짜를 구분하는 방법은 성령의 열매의 유무에 의합니다. 생명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문제며 열매는 안에서부터 나와야만 합니다. 열매를 인위적으로 붙이지는 못하며 열매는 생명에서부터 나옵니다.15)
열매는 그 안에서 자라나오는 것입니다. 열매는 밖에서 갖다가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사과 사 가지고 나무에다가 테이프로 떨어지게 않게 붙인다고 그게 사과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무를 겉에서 붙이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그 나무의 생명력을 통해서 그 열매가 맺히고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열매는 밖에서 붙이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자라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겉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내면이 중요한 것이라고. 저 바리새인들은 겉모양, 어떻게 해야 돼, 겉모양만 열심히, 일요일에는 일하면 안 되고, 그리고 또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해야 되고, 겉모양만 열심히 꾸몄습니다. 그것은 사과 사 가지고 나무에다가 테이프로 돌돌 감아서 붙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사람이 내면이 변하고 내면에 새로운 생명을 받고, 그럴 때에 그 새로운 생명의 그 생명력이 열매를 열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 평화의 열매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겉으로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에서 그 생명력으로 자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열매를 맺는 복된 구원영생교회 성도들이 다 됩시다!
1) Lloyd-Jones, 『생수를 구하라』, 31.
2) Lloyd-Jones, 『생수를 구하라』, 32-33.
3) G. R. Beasley-Murray, 『요한복음』, WBC 성경주석 36, 이덕신 역 (서울: 솔로몬, 2001), 208.
4) G. K. Beale·D. A. Carson 편집, 『누가·요한복음』,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시리즈 2권, 우성훈·배성진 옮김 (서울: CLC, 2012), 544.
5) Gerhard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시리즈, 송다니엘 옮김 (서울: 토브북스, 2021), 166.
6) 박정식, “사마리아 여인(요 4장)의 정체성에 대한 연구”, 『신약연구』 제7권 제3호 (2008): 429. (421-450)
7) Andreas J. Köstenberger, 『BECNT 요한복음』, BECNT 성경주석, 신지철·전광규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7), 213.
8) J. Ramsey Michaels, 『NICNT 요한복음』, NICNT 성경주석, 권대영·조호영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22), 311.
9) Lloyd-Jones, 『생명수』, 전의우 옮김 (서울: 규장, 2010), 73.
10) Lloyd-Jones, 『생수를 구하라』, 56-57.
11) Lloyd-Jones, 『생명수』, 83.
12) Lloyd-Jones, 『생명수』, 84.
13) Lloyd-Jones, 『생명수』, 86-87.
14) Lloyd-Jones, 『생명수』, 124-126.
15) Lloyd-Jones, 『생명수』, 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