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만다라>, <길>, <집>, <꿈>과 대하장편 <국수(國手)>(전5권), 소설집 <피안의 새>, <오막살이 집 한 채> 산문집 <현대사 아리랑>, <김성동 천자문> 등으로 유명한 작가 김성동(金聖東) 선생님이 2022년 9월 25일 오전 7시 30분경 타계하셨다. 향년 75세. 유족으로 아들 재현과 딸 서현, 누님 김정동이 있다.
빈소는 충주 건국대병원 장례식장(충북 충주시 국원대로 82) 5호실에 마련되었으며, 장례는 한국작가회의, 한국문인협회 등이 공동주관하는 <소설가 김성동 선생 한국 문인장(文人葬)>으로 치르기로 했다.
발인은 9월 27일(화) 오전 9시, 장지는 충주시 목벌동 <하늘나라>로 정해졌다.
9월 26일 오후, 홍일선 시인, <탑골>의 한복희 씨 등과 함께 충주 건대병원 장례식장 빈소로 조문을 가려고 한다.
어느 날 김성동 선생은 “소의 인민성, 대중성, 쇠잔등처럼 넉넉한 ‘조선사람 마음’을 찾아가라”는 뜻에서 나에게 ‘우촌(牛村)’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셨고, ‘문학을 하는 눈’을 얻으라는 뜻에서 ‘득안(得眼)’이라는 서예작품(김성동의 서예는 TV 진품명품의 감정사 김영복으로부터 ‘당대 10대 신필(神筆)’이라는 찬사를 받음)을 써주기도 했다.
또한 지난 2006년 솔출판사에서 제3시집 <당산철교 위에서>를 펴낼 때 ‘김성동 특유의 조선 문체’로 써준 발문(“동학군이여, 영원하라”)을 받기도 했으니, 내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주신 게 분명하다.
아, 돌이켜 보니 지난 2019년 4월 김성동 작가를 모시고 강원 정선으로 여행가서 윤기묵 시인, 강기희 작가와 만나 즐거운 한때를 보냈고, 지난해 10월에는 한복희 씨와 새로 이사한 충주의 아파트를 찾아가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건만, 하룻밤을 유숙하지 못하고 떠나온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땐 아프다는 말씀도 없었는데… 20대 대선이 끝나고 나서 한번 놀러 오라고 전화를 주셨건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늘 돌연 부고를 접하니, 참으로 황망하기 그지없구나. 한국현대사의 뼈아픈 상처와 고난을 고스란히 간직했던 김성동이라는 작가.
분단체제가 야기한 가계사적 비극과 '연좌제'라는 족쇄 속에서 김성동은 1964년 서라벌 고교를 중퇴하고, 이듬해 출가했다가 1976년 늦가을, 12년간의 절집 생활을 청산하고 작가가 되기 위해 하산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1978년 <한국문학 제3회 100만원 고료 신인상>에 중편소설 <만다라(曼陀羅)>가 당선된 김성동은 등단하자마자 문제의 그 불교소설로 문단 안팎에 큰 관심과 화제를 몰고 왔다. 1979년 이근배 시인이 운영하던 ‘한국문학사’에서 장편으로 개작 출간한 김성동의 장편 <만다라>는 100만부 판매라는 밀리언 베스트셀러를 기록했고, 1981년 임권택 감독 연출, 안성기 주연으로 영화화됨으로써 그는 일약 한국문단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정각(正覺) 혹은 전중(前中), 때론 이니지비(履泥知非)이라는 아호를 즐겨썼던 김성동 선생을 내가 처음 만난 건 1980년대 중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 시절이었다. 어느 날 서울 불광동 자택으로 이영진 현준만 채광석 강형철 등 몇몇 문인들과 찾아갔을 때 시를 쓰는 이 아무개라고 통성명을 했더니 “아, 시인의 얼굴이 아닌데, 소설을 한번 써봐.”라고 권하셨고, 나보다 11살 위였지만 '선생님'이라는 호칭보다는 '형님'이라고 부르며 그를 따랐다. 그 후 자실과 작가회의 근처에서 전중 김성동 형님을 모시면서 2박 3일, 혹은 3박 4일 날밤을 세우기도 했고, 종로 인사동 인근의 여관방에서 죽치고 술을 캘 때는 ‘술을 사다가 공급하는’ 시봉역을 게을리 하지 않은 탓에 ‘호위총국장’이라는 직책을 받기도 했으며, 학력별무의 ‘무쯩 인간’이라는 동병상련 때문인지 내게 각별한 애정을 주셨다.
그 어느 날 서울을 떠나 김해 백룡암, 영동 영국사, 인제 백담사, 남양주와 양평 우사암과 진부를 거쳐 양평 청운면 가현리 비사난야(非寺蘭若)를 거쳐 최근 작고하기까지 충주시내 아파트에서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삶았던 김성동이라는 작가. 특히 그는 내포지방의 조선말 문장을 탁월하게 구사한 작가로서 명천 이문구 선생과 함께 그 명성이 자자했던 분이다. “내 문학은 사실상 문학성을 가미한 다큐다.”라는 생각을 지닌 김성동 작가는 분단체제의 비극이 야기한 피맺힌 역사의 복원과 당신의 일가족이 참담하게 겪어야했던 한국전쟁의 상처를 온몸과 온넋으로 갈무리하면서 이를 문학화하고자 신명을 바치셨던 분이다.
김성동 작가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의 복심비선이자, 이관술의 <경성콤그룹>의 일원으로도 활동했다. 아울러 해방후 <전국농민동맹> 충남위원장과 남로당의 대전충남지역 문화부장을 지낸 부친 김봉한 선생은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대전 골령골에서 무참히 처형당했고, 김성동의 모친은 인공시절 ‘조선민주여성동맹’ 위원장으로 활동한 탓에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유년-청소년 시절, 김성동은 할아버님 밑에서 한학을 배웠다.
김성동 작가가 최근 펴낸 <민들레 꽃반지>(2019, 솔 출판사, 요산문학상 수상작), <눈물의 골짜기>(2020, 작은숲 출판사)라는 소설집에는 “남한은 물론 북한조차도 기억해 주지 않는” 남로당의 주요 인물들(박헌영 이현상 이관술 이재유 등)과 김성동 가족의 뼈아픈 현대사, 그 집안 가족 이야기가 잘 형상화돼 있다. 1998년 <시와 함께>라는 잡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기도 했던 김성동 선생이 2004년 계간 <시작> 가을호에서 김지우 작가와 인터뷰할 때 했던 그 말씀은 지금도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시를 보면 눈물이 나야 합니다. 시인은 없고 시만 많아진 요즈음의 시단의 세태가 몹시 안타깝습니다. 시인은 많더라도 시는 적게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당만 작두를 타는 게 아닙니다. 시인도 작두를 타야 합니다. 시인의 작두는 시를 이뤄내는 시심이고 시정신입니다. 부디 시에 대한 외경심, 순결성, 염결성을 갖고 시를 아껴 쓰기를 바랍니다. 시정신이 오롯이 살아있는 시가 몹시도 그리운 때입니다.”
아, 우리들의 따스한 형님이자 참 문학의 스승이었던 작가 김성동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
첫댓글 김성동(金聖東)님의 극락왕생을 축원합니다. ...()...
고인의 극락왕생를 축원합니다
아~~ 가셨군요. 우리와 함께 하여 풍요롭게 하여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