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굿플레이스’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자기밖에 모르던 한 여인이 갑자기 죽어서 눈을 떴는데 천국에 가게 되었다는 설정에서 시작됩니다.천국에서는 각자에게 맞는 사람들과 이웃으로 살 수 있게 해 주고 취향에 맞는 집과 환경을 제공해줍니다. 그런데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공 엘리너는 우크라이나에서 봉사하던 변호사가 아니라 가짜 약을 노인들에게 사기 쳐서 팔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주인공은 자신이 천국에 오게 된 것에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그러나 사기꾼이 선한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개 버릇 남 못 준다고 평생 사기만 치던 이 여인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엘리너는 평소처럼 예쁜 여인을 기린 같다고 무시하고 파티장에 있던 새우를 훔쳐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다음 날 기린들이 길거리에 뛰어다니고 새우들이 날아다니는 등의 소동이 벌어집니다. 이 모든 것은 엘리너가 남을 흉보고 음식을 훔쳤기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엘리너는 착해져 보기 위해 쓰레기 청소 봉사를 맡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처럼 놀고 싶어서 쓰레기들을 구석에 감춰놓고 놀기를 즐깁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쓰레기 비가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이기적인 행동이 모든 사람을 괴롭게 만든다는 설정입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독재자가 탄생하면 그 사람이 자기 가족만을 위해 재산을 모을 때 다른 수많은 사람이 굶주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드라마는 엘리너가 그곳에 적응하기 위해 착해지는 과정을 엮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상에서 이미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천국으로 들어오면 그 사람 때문에 천국이 지옥처럼 변할 수도 있습니다.천국에서는 잘못된 행복의 기준을 가진 이들이 살 수 없습니다. 그 기준이 다른 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천국에 가는지 지옥에 가는지는 이 세상에서 내가 선택한 행복의 기준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천국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 예수님께 몰려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이며 윤리적인 문제보다는 현재를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것인가만을 생각하는 기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에 지배받으면 그리스에, 로마에 지배받으면 로마인들에게 복종하며 현세에서 잘 살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인들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만약 사후세계가 있다면 이들에겐 큰일입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 나뉘어 있다고 말하는 예수님께 크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걸고넘어지려 하는 것은 결혼 문제입니다. 모세의 법이 형이 자녀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와 다 함께 살았던 한 여인이 죽으면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이 옳으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들은 천국은 분명 행복한 곳이니 결혼을 당연히 해야 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의 모든 관계가 의미 없어진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천국에서 성모님은 여전히 예수님의 어머니이실 것입니다. 다만 새롭게 결혼의 문제가 거론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천국에서의 유일한 행복은 하느님의 존재가 될 것이고 다른 모든 것들은 그 행복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두가이들이 지극히 현실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결혼이 행복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고 천국의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예수님에게는 그들이 그런 행복관으로는 천국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잘못된 행복관으로 천국에 들어오면 남의 여자를 빼앗으면서까지 자신이 행복해지려 할 것이기 때문에 다시 지옥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유일한 행복의 기준이 성령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는 시간이 ‘기도’이니, 행복을 누리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 기도가 되지 않으면 아직 천국에 들어올 행복의 기준을 갖추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두가이와 같은 현세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 세상의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행복의 기준을 성령으로 둘 줄 알아야겠습니다.
학교에서 방정식을 배울 때입니다. 1차 방정식은 답이 하나입니다. 그러나 차수가 올라가면 답이 여럿이 됩니다. 2차 방정식은 2개의 답, 3차 방정식은 3개의 답이 되고 N차 방정식은 답이 N개가 됩니다. 여러 개의 답은 1차 방정식의 눈으로 보면 틀린 것 같지만 N차 방적식의 눈으로 보면 1개의 답은 없습니다. 동양의 사상도 인간의 질문에 답을 하고 있으며, 서양의 사상도 인간의 질문에 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다를 수 있지만, 서로 틀리다고 할 수 없습니다.
중용(中庸)에서 중은 희로애락이 발현되기 전의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 기쁨과 슬픔의 중간이 아닙니다.분노와 즐거움의 중간이 아닙니다. 중은 가운데나 평균이 아닙니다. 모든 감정이 드러나기 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중은 천하의 근본이 됩니다. 영성신학에서도 중용(Indiferentia)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단명을 택할 수도 있는 것이 중용입니다. 이 역시 희로애락의 감정으로는 도달 할 수 없는 영적인 길입니다. 중용에서는 교육을 통해서 희로애락의 감정을 넘어서는 도를 찾으며 그 과정을 화(和)라고 합니다. 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신독(愼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신독을 통해서 중용에 이르면 하늘의 기운을 얻고, 도를 찾아 화에 이르면 땅의 기운을 얻습니다. 하늘은 시간의 영역입니다. 땅은 공간의 영역입니다. 그러기에 중용에 이르면 하늘과 땅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물론 하늘과 땅은 자연재해를 통해서 변화를 수반합니다. 그러나 내가 중용의 삶을 산다면 자연재해 앞에서도 내 삶의 가치를 능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중용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이 조화롭다고 해도 내가 그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인간의 능력과 재능은 인간이 중용의 삶을 살 때 하늘과 땅을 능히 풍요롭게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중용의 삶을 살지 못하면 하늘과 땅에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이러한 삶은 중용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도를 통해서 조화를 이루는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유대인의 관습에는 형이 사망을 하면 동생이 형수와 함께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7형제가 형들이 먼저 사망해서 형수와 살았다면 부활해서 형수는 누구와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하였습니다. 이 또한 고정관념에 갇힌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이 세상에서의 삶과 원칙은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애벌레는 2차원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나비가 되면 3차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차원의 삶에서는 전혀 상상 할 수 없는 것들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눈앞의 것만 볼 수 있고, 느린 속도로 기어야 하는 애벌레와 하늘을 마음껏 날 수 있는 나비는 전혀 다른 차원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한다는 것은 이렇게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서에서 이야기 하는 부활은 무슨 의미일까요?
첫 번째 의미는 ‘일어난다.’라는 뜻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고통에서 즐거움으로,어둠에서 빛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는 부활의 의미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기에 불의한 죽음을 당한 이들을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구약성서의 마카베오기는 부활에 대한 믿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를 하는 어머니와 아이들은 부활에 대한 믿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티아티스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제사를 거부하고 순교를 합니다. 이 또한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죽음 이후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부활의 신앙은 지금 이곳에서의 충실한 삶을 이야기 합니다. ‘불신과 편견’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민족과 계층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성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부활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랑으로 지금 이곳에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증언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우리들 또한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뜻을 우리들 삶의 자리에서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