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전]
기자의 후대에 조선후가 또한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 그리고 그 조선후 비(기비)와 그 아들 준(準)이 있었는데 준이 위만에게 멸망당하여 해중으로 도망갔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예전]
기자가 교화한지 40여대를 지나 조선후 준이 왕이라 칭했다.
[기자지](윤두서)
기자 문성왕 부터 준왕까지의 40대 명칭(참고로 한국에 하나밖에 없는 청주 한(韓)씨에서도 똑같음.)
[동사년표(어윤적)]
기자 40여대 후, 조선후 비가 왕이라 칭하였는데, 그 아들 준때에 연나라 도적 위만에게 나라가 망했다. 기자가 후조선 제1대 문서왕이 되고 -중략- 후조선국을 통치했다.
기자에 관한 것만 나온 것
원전 - 내용 - 나라 저자
주역 - 주역의 기자 - 주 문왕
한서 - ㅈ빈의 기자 해석 - 한 반고
논어 - 기자 노예가 되다 - 공자
좌전수소 - 당숙지봉시 기자 - 좌구명
여씨춘추 - 기자궁 깨끗하게 하다 - 진 여불의
상서대전 - 기자를 조선에 봉함 - 한 복생
상서주소 - 기자 구금 해제하다.
사기 주본기 - 기자 구금 해제하다. - 한 사마천
상서주소 - 주 신하가 되지 않겠다.
회남자 - 기자궁 울타리 치다. - 한 유안
회남자 - 미치광이 되어 일신 면하다 - 상동
전국책 - 몸에 옻칠하고 머리 풀어 헤치다.
사기 - 기자 숨다 - 한 사마천
한서지리지 - 조선으로 도망가다 - 한 반고
후산서 지리 - 조선으로 피하다 - 범엽
위략 - 기자 뒤에 조선후 준(準) - 위 어환
삼국지 위지 - 기자 뒤 40여세 준 - 진수
후한서 - 기자 뒤 40여세 준 위만에게 망하다.
구당서 - 고구려 기자신 숭배
사실 이외에 너무 많아서 문제에요. ^^ 다른것 보실려면 얼마든제 coo2.net에서 기자, 기준, 위만으로 검색해 보시면 많이 찾으실수 있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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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부터는 일심의 견해에요.
1. 기준은 누구의 후손이냐?
국사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요.
"조선의 임금인 준왕 때, 위만이 연나라에서 탈출하여 입조를 청했다. 준왕은 위만을 믿고 서쪽 국경을 맡겼는데,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내몰고 스스로 조선왕이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이 국사책에 또 이 준왕의 성이 나옵니다. 기준(箕準 혹은 寄準 둘다 같음)이라구요. 그런데 기준은 후에 한준(韓準)으로도 되엇, 한(韓)씨의 기원이 된다고도 해요.
기(箕, 寄)씨이면서 한(韓)씨라.. 도데체 이 기씨는 어디서 기원이 된 것일까요? 중국이나 한국의 사서들을 보면, "41대를 정하고, 후에 마한왕이 되고 "기자"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죄다 기록하고 있어요.
이런데도 위만이 왕위 탈취한 조선이, 기자의 후손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넌센스라고 생각해요. 모화사상 어쩌고 하면서 은근슬쩍 피할려고 하지만, 사서비교에 있어서 "기준은 기자의 후손"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잡고있어요.
2. 왜 기자조선으로 불리었는가???
1번에 기준이 기자의 후손이라는 것을 눈여겨 보세요. 환단고기에서는 이러한 왜 이렇게 불리었는가에 대한 이유가 나오고 있어요.
단군조선은 2개의 제후국을 두고 있었어요. 중국동북부의 "번조선(번한)" 그리고 한반도의 막조선(마한)"으로 말이에요. 두 조선에선 세습도 했지만, 원칙적으론 단군의 임명을 받는 제후국이었어요.
단군조선의 힘이 약해지자, 단군조선은 서서히 제후국에 대한 힘을 상실하게 되요. 이 때 번한의 왕인 수한(水韓 BC340~BC323)때에 처들어와요. 이 때 수유(須臾, 참고로 수유는 기자의 이름이에요.)의 사람인 기후(箕侯)가 5천인을 데리고 진한, 번한의 사람들과 연합해서 싸와요.
그 뒤에 기후가 병권을 차지하고나서, 수한이 죽자, 스스로 왕이 되요. 단군조선은 그냥 "중국 침략에 대해 방비 잘하세요"하고 왕위를 인정해줘요. 이제 번조선이 왕위임명제가 아닌, 세습제로 나아가는 발판을 잡은 때가 이 때에요.
환단고기에서 나오는 기후(箕侯)의 뒤로부터 기준까지의 왕위를 쓰면 다음과 같아요. 기욱(箕煜), 기석(箕釋),기윤(箕潤), 기비(箕丕), 기준(箕準)까지에요. 아마 기비나 기준은 익히 들어본 이름일 거에요.
때문에 기자조선의 시작은 이 때부터로 보고 있어요. 물론 "기자조선세계" 청주 한씨의 족보에 나오는 기자의 40대 왕위설은 후대에 기자조선을 높이고자 사용한 것 같에요.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지어서 그 태조 이전의 조상들에 대해 시호를 높인것처럼 말이에요.
첫댓글1. 논어에 공자가 "기자가 동쪽에 가서 살았다"라는 언급은 있지만.. 동쪽 어디라는 말은 없습니다.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면 공자가.. 조선이라는 명칭이 아닌 두리뭉실하게 동쪽으로 갔다!! 라고 말했을리는 없죠. 따라서 논어의 전거는 기자동래설의 근거로 삼을 수 없습니다.
사기에 보면 ['만'은 연나라사람이며, 성은 '위'씨로 조선을 쳐서 스스로 왕이라 했다.]라고만 되어있지.. 조선의 왕이 기씨인지 단씨인지 언급되어있지 않습니다. 위만이 찬탈한 조선의 왕위가 원래 기자의 후손들이 이은 자리였다면.. 사마천이 그것을 언급하지 않을리가 없죠. 역시 기자동래설의 근거가 못됩니다.
위에 언급하신 출처들에..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왕이 되었다거나.. 조선후로 봉해졌다!) 라는 기술은 한서지리지 이전에는 없습니다. 기자가 활동했을때보다 약 1000여년이 지난 후에 뜬금없이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위략에서는 조선후, 삼국지위지에선 아예 왕이 된것처럼 각색이 됩니다.
2. 은-주의 강역문제에서.. 은나라나 주나라나.. 황하중류지역을 중심으로 강역이 정해져있었습니다. 장강이남이나 현재의 하북성이북으로는 오로지 다 야만족으로 취급했고.. 춘추 5패중의 하나인 초나라마져도 오랑캐취급을 받았으니.. 춘추이전의 은말~주초의 시기에 지금의 만주 혹은 한반도까지 지리적 개념이 확립되
3. 따라서.. 동쪽으로 갔다라는 언급이나.. 은-주당시의 지리적 개념에 기초해서 이해해보자면.. 기자는 실존인물이며 주나라의 봉함을 피해 동쪽으로 간것은 사실일겁니다. 다만 그 동쪽이 만주나 한반도가 아닌.. 산동지역 어디쯤이 아닐까하는 견해가 많습니다. 산동지역을 언급하는 이유는 "1969년에 역시 산둥성
좌검우도님의 유추 - "기자가 간 곳은 산동성지역 어디쯤이다"라는 것은 일심도 동의해요. 일심이 올려놓은 자료에서도 산동성의 서화라고 해요. 문제는 위의 글에서도 써놓았지만, 한반도의 평양을 "기준, 위만"조선의 근거지로 보면, 당연히 좌검우도님의 말처럼 구라가 되는 셈이에요.
첫댓글 1. 논어에 공자가 "기자가 동쪽에 가서 살았다"라는 언급은 있지만.. 동쪽 어디라는 말은 없습니다.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면 공자가.. 조선이라는 명칭이 아닌 두리뭉실하게 동쪽으로 갔다!! 라고 말했을리는 없죠. 따라서 논어의 전거는 기자동래설의 근거로 삼을 수 없습니다.
사기에 보면 ['만'은 연나라사람이며, 성은 '위'씨로 조선을 쳐서 스스로 왕이라 했다.]라고만 되어있지.. 조선의 왕이 기씨인지 단씨인지 언급되어있지 않습니다. 위만이 찬탈한 조선의 왕위가 원래 기자의 후손들이 이은 자리였다면.. 사마천이 그것을 언급하지 않을리가 없죠. 역시 기자동래설의 근거가 못됩니다.
위에 언급하신 출처들에..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왕이 되었다거나.. 조선후로 봉해졌다!) 라는 기술은 한서지리지 이전에는 없습니다. 기자가 활동했을때보다 약 1000여년이 지난 후에 뜬금없이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위략에서는 조선후, 삼국지위지에선 아예 왕이 된것처럼 각색이 됩니다.
후대에 갈 수록 그 위치가 상승하는 것은 다분히 상상이 가미된, 혹은 어떤 목적하에 진행된 위작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기자동래설의 원전이 될만한 사서에서조차 조작 혹은 변조의 가능성이 농후한데 그 뒤에 언급되는 내용들은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_-;;
2. 은-주의 강역문제에서.. 은나라나 주나라나.. 황하중류지역을 중심으로 강역이 정해져있었습니다. 장강이남이나 현재의 하북성이북으로는 오로지 다 야만족으로 취급했고.. 춘추 5패중의 하나인 초나라마져도 오랑캐취급을 받았으니.. 춘추이전의 은말~주초의 시기에 지금의 만주 혹은 한반도까지 지리적 개념이 확립되
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한 지리적 개념이 존재하던 은말~주초의 시기에.. 은나라사람인 기자가 그 먼 만주나 한반도까지 갔다! 라는 설정 자체가 소설적인 센쓰일 따름입니다.
3. 따라서.. 동쪽으로 갔다라는 언급이나.. 은-주당시의 지리적 개념에 기초해서 이해해보자면.. 기자는 실존인물이며 주나라의 봉함을 피해 동쪽으로 간것은 사실일겁니다. 다만 그 동쪽이 만주나 한반도가 아닌.. 산동지역 어디쯤이 아닐까하는 견해가 많습니다. 산동지역을 언급하는 이유는 "1969년에 역시 산둥성
. 1951년에 산둥성 황(黃)현 남부촌(南埠村)에서 출토된 8점의 기기(器), 1969년에 역시 산둥성 옌타이(烟臺市)시 남쪽 교외지역에서 출토된 기후정(侯鼎)" 등의 유물등이 출토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자가 피해간 위치는 위치는 사서에서도 나오고 있어요. 다만 여기에 일심이 안올렸을 뿐이죠. 기자가 간 곳에 대한 사서의기록을 올려놨어요 ^^
좌검우도님의 유추 - "기자가 간 곳은 산동성지역 어디쯤이다"라는 것은 일심도 동의해요. 일심이 올려놓은 자료에서도 산동성의 서화라고 해요. 문제는 위의 글에서도 써놓았지만, 한반도의 평양을 "기준, 위만"조선의 근거지로 보면, 당연히 좌검우도님의 말처럼 구라가 되는 셈이에요.
본문에서도 말하지만 기자문제는 정통성 문제 때문에 계속 걸려요. 기준, 위만을 정통으로 놓고, 평양을 지금한반도로 비정해야 하면 "기자를 외면"해야지 되요. 하지만 반대로 단군조선의 후신을 "기준, 위만"으로 놓지 않고, 북부여ㅡ고구려로 놓으면 문제는 쉽게 풀려요.
한무제에 점령당한 우거왕의 평양을 한반도의 평양으로 놓지 말고, 재야에서 주장하는 당시의 요서(지금의 난하서쪽)지방으로 비정하고, 한반도와 만주는 그대로 북부여-고구려의 강역으로 비정해놓고 보면, 적어도 아예부정할만한 성격은 안된다고 봐요.
은의 기자가 서화에 와서 몇백년이 지나고 후손인 기후(箕侯)부터 기준(箕準)까지 번조선의 왕으로 등극되어 기자조선으로 불리어졌다. 라고 하면 심각한 정통성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