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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타게 수잔을 찾아서(desperately seeking susan)’. 미국의 여성 감독 수잔 세이들먼이 연출한 영화다. 주인공은 뉴저지주의 ‘정숙한’ 주부 로버타(로잔나 아퀘트)와 애틀랜타에 사는 ‘헤픈’ 여자 수잔(마돈나). 어느날 지루한 일상에 지친 로버타는 신문에서 ‘애타게 수잔을 찾습니다’라는 광고를 보고 강한 호기심을 느낀다. 수잔을 찾아나선 로버타는 정말 그녀를 만나고, 일련의 소동 끝에 자신을 수잔이라 착각하는 지경에 이른다. 로버타와 수잔, 수잔과 로버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여성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마침내 ‘한몸’이 된다. 자아찾기의 끝, 이들은 서로의 모습에서 자기 내부에 숨어 있던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하는 데 성공한다. 한몸, 혹은 한정신이 품고 있는 극단의 두 성향. 대개의 사람이 그중 하나를 자신의 얼굴로 선택해 살아가는 건 그 편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간혹 우리는 둘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함이 없이, 그리하여 일견 모순되고 맥락 없어 보이지만 그 자체로서 실존이요 완성인 압도적 인간을 만난다. 물론 거기에는 그를 단지 자아분열적 인간으로 폄훼할 수만은 없게 만드는 강렬한 재능, 자존감, 치열성이 있다. 누가 뭐래도 ‘그 자신’인 존재 앞에서 사람들은 종종 분노나 당혹감, 혹은 끝 모를 찬탄의 염을 느낀다. 도올() 김용옥(金容沃·53)은 우리에게 바로 그런 사람이다. 지난 두 주일, 애타게 그를 찾았다. 도올을 찾아나선 길에 만난 것은 늙고 어리며, 천재(天才)이자 천재(賤才)이고, 스승인 한편 학생이며, 투사인 동시에 간부(奸夫)이자, 열정 그 자체이면서 철인(哲人)인 수많은 얼굴, 얼굴들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도올이 그중 어느 하나도 애써 숨김없이 모두 ‘나’임을 드러내놓고 산다는 점이었다. 그 역설과 모순이 만들어내는 혼돈의 아우라 속에 분명 그가 있을 것이었다. 진면목(眞面目)이 있을 것이었다. 애타게 도올을 찾아서, 인간의 마을을 헤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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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의 장막, 매스컴의 장막 | ||
대중(大衆)은 도올을 어떻게 만나는가. 이전의 그는 ‘글’이었다. 40여 권에 달하는 저서와 각종 기고를 통해 그는 비교적 소수의 지식인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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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고집·탐구욕·집중력 | ||
도식적이지만 사람 얘기를 풀어가는 데는 아무래도 편년체가 제격이다. 도올은 48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다. 4남2녀 중 막내였는데 장형 김용준 박사(金容駿·74)와는 21세, 형제 중 넷째인 누이 김숙희 전 교육부장관(金淑喜·64·재임기간 93년 12월~95년 5월)과는 11살 차이가 난다. 김용준 박사에 따르면 도올은 “어머니가 오래 병을 앓다 38세 무렵 어렵게 본 막내”, 그러니까 늦둥이다. 노산에 난산이 겹쳐 겸자를 써 겨우 ‘끄집어냈다’. 조금은 특이한 눈매도 “노산 탓”이라는 것이 집안 사람들의 중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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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과 두려움의 대상 ‘엄마’ | ||
‘내 맘에 꼭 맞는 것, 내 눈으로 보기에 완성된 어떤 것이 아니면 참을 수 없는’ 도올의 취향은 유교의 가르침 중 특히 예(禮)를 강조하는 학문 세계와도 얼마간 관련이 있는 듯하다. 도올은 고려대 교수 시절 즐겨 학생들의 혼례를 기획하고 연출했다. 85년 11월에는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에서 열린 부모의 회혼례 행사를 자못 화려하게 치렀다. 도올은 저서 ‘여자란 무엇인가’에 그 과정을 장장 10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덧붙인다. “노동운동하시는 분들은 대뜸 너무 부르주아틱하다고 욕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날 초대된 모든 사람들로부터 일푼의 축하금도 받지 않았다…. 禮는 禮인 것이다.” 지극한 예(禮)는 도올에게는 곧 놀이요 예술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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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의 나르시즘 | ||
도올은 사석에서 가족 얘기를 잘 안 한다. 예외가 있다면 어머니다. 그와 가까이 지내온 사람들은 도올로부터 어머니와 관련한 일화 두세 가지쯤은 꼭 들어 알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도올의 마음은 존경, 그리고 두려움이다. 김용준 교수도 “용옥이 마음 속에서 어머니는 여전히 두려운 존재일 것”이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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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다! 저거다! 저거다!” | ||
김용옥 교수 집을 방문했을 때 어머니 홍여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홍여사는 아흔 넘은 나이에도 단아하고 기품이 넘쳤다. 또한 온유하고 정결해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어른이었다. 고령 탓일까, 막내아들 도올을 화제 삼으려 했지만 이야기는 내내 맏아들, 김용준 박사 곁만 맴돌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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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날 작두를 탈 것이다” | ||
그는 자신의 이런 지적 희열 상태를 ‘무병(巫病)을 앓는 것’으로 보았다. ‘나는 내 자신을 때때로 광인으로 생각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도올에게 강의는 일종의 내림굿이다. ‘그날 나는 교단 위에서 미쳐버릴 것이다. 그리고 작두를 탈 것이다. …그러면 나의 몸은 가뿐해질 것이다’. 이렇듯 거부할 수 없는 열정과 에너지의 폭발은 일생을 두고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의 젊은 날은 충동적 열정에 힘입은 결단, 그 뒤를 잇는 무지막지한 실천의 연속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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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위해 논리를 창안하다 | ||
정씨는 “도올이 논어 대신 조선왕조실록을 강의했어도 그에 대한 논쟁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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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 안의 열두 살 소년 | ||
‘도올 지지자 되기’를 가로막는 또 다른 장벽은 ‘자기망상적’ 언동과 어린아이 같은 치기다. 과도한 자화자찬이 좋은 예. 우주보(宇宙寶)로 자처하거나 자신을 ‘20세기에 살면서 플라톤이나 예수를, 러셀이나 사르트르를 우습게 알고 있는 철학자’로 지칭하기도 한다. “서태지가 원한다면 그를 만나줄 수도 있다”는 말을 하는가 하면, 한 달 배워 겨우 아리랑을 연주하는 수준의 아쟁 실력을 TV 강의를 통해 당당히 선보이거나, ‘지금도 깡패 서너 놈은 상대할 수 있다’며 흥분한 중학생처럼 주먹 자랑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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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친구를 만나는 건 끔찍한 일” | ||
도올을 무장해제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칭찬이다. 고려대 교수 시절 그의 강의를 들은 L씨(37)는 이런 일화를 소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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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거짓말이라 그럴 거야” | ||
그런데 도올의 이런 인간적 약점들이 무조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넘치는 열정과 격렬한 자기 표현은 전염성이 크다. 하물며 도올처럼 남다른 지력과 고도의 쇼맨십, 쉬 따라잡기 힘든 성실성을 겸비한 인물임에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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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고려대에 남았더라면…” | ||
도올의 ‘뜻을 세우면 반드시 이루고 마는’ 치열성은 한의대 진학에서도 잘 나타난다. 김용준 교수는 “78년 보스턴에 있는 용옥이한테 갔는데, 귀국하면 한의학 공부를 할 거라고 해 말린 기억이 있다”고 말한다. 82년 귀국한 도올은 정말 경희대, 원광대 한의학과 진학을 추진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고려대 교수란 자리는 차선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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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를 열망하는 아웃사이더 | ||
온통 혼란과 모순이던 도올 김용옥은 그를 가린 장막 하나하나를 걷어갈 때마다 점차 피 돌고 근육 단단한 한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顯現)했다. 가장 큰 발견은, 맥락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그가 실상은 일관된 원칙과 원대한 계획하에 살아온, 대단히 치열하고 치밀한 사람이란 점이었다. 도올의 기행과 폭언과 말장난과 ‘대중추수주의’에는 하나같이 나름의 이유와 명분이 있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무당’이고, 늘 ‘현재형’이며, 감정적이고, 때로는 짜증나는 인간임을 잘 알 뿐 아니라 이를 당당하게 긍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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