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코 운명론자가 아니다. 사람 운명이 사주팔자나 전지전능한 조물주에 의해 미리 각본대로 정해져 있다기보다는 각자의 노력과 처신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전체 조직에 촘촘히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 공장의 톱니바퀴처럼 거대한 운명에 이끌려 살다가 끝나야 하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허망할 것인가.
그런데, 내가 사주팔자를 보는 집을 찾은 적이 있었다. 대학 시절 일이었는데, 검사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할 때였다. 사업에 어려움을 겪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사주쟁이를 찾아가 듯이 내 경우도 그러했다. 인생이 나에게만 매정하게 틀어져 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행운의 여신이 나만 미워하고 있는 것일까 하며 혼자서 괴로워하던 무렵이었다.
대학입시에 이어진 진로 문제 때문에 생긴 고민이었다. 서울법대에 떨어지고 후기로 성균관대학에 들어갔던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나는 당연히 서울법대에 합격해야만 했다. 대전고교에서 전체 석차가 7등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고교 동기생 가운데 서울법대에 합격한 친구가 8명이나 되었는데도 나는 어이없게 떨어지고 말았다.
서울법대 떨어지고 방황하던 시절 찾아간 역술가 백운학씨 “장차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갈 운세”
성균관대학으로 진학했지만 너무 실망이 큰 나머지 학교 수업을 빼먹기 일쑤였다. 책상에 앉았어도 공부가 될 리 없었다. 그렇게 방황하던 시절, 느닷없이 사주팔자 관상쟁이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찾아간 것이 백운학씨였다. 그때로서는 장안에서 가장 유명한 관상쟁이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역술가 백운학씨.
그렇다고 거창하게 무슨 숨겨진 운명이나 계시를 찾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용하다는 그가 과연 나에게 어떤 말을 해줄 것인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그만큼 개인적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백운학씨가 들려준 얘기 가운데 아직 기억에 남아 있는 부분이 있다. “학생은 사법고시 공부에 매달리면 쉽게 합격할 수 있고, 장차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갈 운세”라는 한마디다.
물론 그가 고시공부 얘기를 꺼내지 않았어도 나로서는 고시에 매달릴 입장이었다. 하지만 우연한 일치였는지, 서울법대에 들어갔던 고등학교 친구들이 모두 고시에 실패하고 결국 그 가운데 한 명만 합격했는데, 그나마도 나보다 2년이나 뒤졌다는 점에서 운명의 조화는 우리가 쉽게 넘겨짚기 어려운 것이 분명하다.
내 생각이나 의지와 관계없이 이뤄진 일들 적지 않아
그때의 점괘가 맞아 내가 검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을 것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백운학씨가 나 말고도 수많은 학생들에게 고시공부를 권유했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렇지만 그렇게 점괘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고시에 합격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떠나서도 내가 지금까지 법조인으로 살아온 궤적을 살펴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의 신이 나를 지켜보면서 이끌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막다른 골목에 처했다가는 길이 뚫리고, 깜깜한 밤중 허허벌판에서 길을 잃었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곤 했었던 느낌이다. 내 생각이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뤄진 일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전에 삼성물산에 들어갈 뻔했던 사례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당시 사법시험에서 워낙 제한된 인원만을 선발하던 터라 시험에 통과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해마다 최종선발 인원이 기껏 50~60명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일단은 취직해 놓고 돈을 벌면서 연차적으로 사법시험에 응시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른 직장 후보가 삼성물산이었다. 당시로는 삼성전자가 없었고, 삼성물산이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계열사였다. 다행히 신입사원 공채에 응시해 필기시험에서 우등으로 붙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면접시험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던 것이다.
삼성물산 필기시험 우등으로 붙고도 면접에서 떨어진 사연
면접장에는 지원자가 3명씩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는데, 나란히 앉은 옆 사람에게만 질문을 던지고 나에게는 아무런 질문도 없었다. 나는 우등으로 필기시험에 붙었으니까 면접에는 당연히 통과하는 것이겠거니 여겼다. 그런데 면접이 끝날 무렵 이병철 삼성 회장이 고개를 돌리더니 나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소파에 깊숙이 기대어 앉아 있다가 마지막으로 불쑥 던진 얘기였다. “자네는 군대나 가야지.” 사실상 불합격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아들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붓글씨를 쓰고 있는 고 이병철 회장(왼쪽).
당시만 해도 삼성그룹 면접시험에는 관상쟁이가 한 명씩 붙어 앉아 지원자들의 인상을 살피며 합격 여부를 최종적으로 가린다는 소문이 나돌 때였다. 그때 앞에 앉아 있던 면접관 가운데 누가 그 소문의 관상쟁이였는지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필기시험을 우등으로 통과하고도 떨어진 것을 보면 면접에서 낙제점을 받았던 게 틀림없다.
그때 내가 삼성물산에 들어갔다면 지금의 위치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곰곰 생각해 본다. 아마 사법시험을 진작 포기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검사의 길로는 영영 들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뒤늦게 운명론자의 입장으로 돌아섰다는 것은 아니다. 인생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역시 각자의 노력과 의지라는 게 흔들리지 않는 내 믿음이다. 뜻하지 않은 행운이 따를 수도 있고, 때로는 액운이 낄 수도 있지만 각자의 의지에 따라 그 모습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심지어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 그 단적인 증거다.
누구나 자기의 운명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과장을 섞어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내 경우도 그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 소개했듯이, 내가 서울지검장에 발탁됐던 과정 자체가 그러했다.
돌이켜보면 검찰 초년병 시절에도 그런 예외적인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다. 실제로 나의 검사 생활에는 돌출적이며 즉흥적인 요소가 적잖이 따라다녔다. 예상하기 어려울 만큼 변수가 많았다는 얘기다. 검사시보 때부터 그러했다. 내 인상 자체도 그렇게 평범하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