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낳으리니(1)
마 1:18-25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 1:18-25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눅2:1-7]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태어나셨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같이 살기 전에 성령께서 아기를 갖게 하셨다. 19) 마리아의 ㄱ) 약혼자 요셉은 원칙대로만 사는 사람이라 파혼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조용히 해결하려고 하였다. (ㄱ. 헬라어 원문은 `그 여인의 남편') 20) 요셉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ㄴ) 하나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여자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께서 임신케 하신 아기다. (ㄴ. 헬라어 원문은 `주님') 21) 그러니 마리아가 아들을 낳거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불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실 분이다.' 22)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이 예언자를 통하여, 23) ㄱ)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한 것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다. (ㄱ. 70인역 사7:14) 24) 요셉은 잠이 깬 뒤 하나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나 25)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아들을 낳자 요셉은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지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1장 16절에 대한 설명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법적 정통성을 지닌 분으로서 그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18) 예수와 같은 신비한 탄생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을 하고 결혼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약혼은 동거하지는 않지만 부부로서의 법적 구속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천사가 요셉에게 마리아를 “네 아내”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에서의 약혼 기간은 약 1년 정도입니다. 또한 약혼한 상태에서 남자가 죽으면 신부는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약혼으로 법적 부부가 되고, 결혼식을 통하여서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의 남편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임신했습니다. 마리아의 임신은 요셉과 동거하여 된 것이 아닌 성령으로 잉태되었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을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예수는 성령님의 완전하신 신적인 능력을 통하여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죄와는 상관없이 이 땅에 오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과 다르게 죄와 상관이 없으신 분입니다. 이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된다는 이사야의 메시야 언약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19-25)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잉태한 마리아와 결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요셉에게 약혼한 상태에서 임신한 마리아를 두려워하지 말고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천사는 그녀가 임신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며, 아들을 낳게 될 것이며, 그 이름을 예수로 지으라고 했으며,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녀가 잉태한 자는 구세주 곧 메시아로 오시는 분이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이에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고서 마리아를 데려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고 그녀를 데리고 왔으나 예수가 탄생하기 이전까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아들을 낳았을 때 천사가 지시한 대로 그 이름을 예수라고 했습니다.
적용: 예수의 탄생에는 마리아와 요셉의 전적인 헌신과 순종이 숨어 있었습니다. 당신은 주의 일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순종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죄와 허물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는 존재임에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를 모든 죄와 허물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나요?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임마누엘 예수, 그분을 우리 삶에 모시고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임을 기억하고 기쁨과 감사한 삶을 누리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설 교 >
준비하시는 하나님
마 1:18-25 / 이정익 목사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성경 속에 많은 약속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 많은 약속들 중에서도 가장 큰 약속은 단연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의 약속입니다. 구약성경의 중심은 장차 세상에 예수를 보냄의 약속입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서 내용 중 상당부분이 그런 내용입니다. 그것이 구약성경의 최대의 비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메시야가 오심을 고대하고 준비하고 연구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신약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신약성경의 중심은 약속하신 그대로 예수께서 오심입니다. 실제로 그 예수께서 세상에 오십니다. 오시는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사전 준비를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전 준비를 하십니다. 출애굽을 위해서 80년 전부터 모세를 준비하시고 부모를 준비하시고 미리암을 준비하시 듯이 예수께서 오시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 사람을 사전에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참 치밀하신 분입니다. 준비가 치밀하십니다. 그리고 사전에 필요한 사람들을 준비해 놓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루시는 것을 보면 그 과정에 많은 사람들을 활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시고 전개하시고 만들어 나가십니다. 본문도 보면 예수 탄생을 위해서 여러 사람들을 사전에 준비해 놓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을 보면 오늘 우리들도 주님으로부터 사용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리아를 준비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는데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져 오실 수는 없습니다. 손오공은 어느 날 공중에서 뚝 떨어져 세상에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만화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오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질서를 당신 스스로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는데 당신이 만드신 질서를 통해서 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잉태되는 과정을 거쳐서 세상에 보내십니다. 모든 생명체는 잉태과정을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도 그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려면 한 처녀가 있어야 합니다. 잉태할 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준비된 처녀가 마리아입니다. 하나님은 그 많은 여인들 중에서 마리아를 선택하여 준비시키셨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어느 날 처녀 마리아에게 찾아와 잉태를 고지하여 주었습니다. 18절을 보면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고 하였고 누가복음 1장31절을 보면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그때 시골처녀 마리아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꿈에 환상으로 천사가 나타나더니 “네가 아이를 잉태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시골 처녀의 가슴에 엄청난 파도가 쳤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 순간 깊이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질문하기를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누가복음1장34절)”하고 묻습니다. 당연한 질문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아이를 잉태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엄정한 질서입니다. 그때 천사가 대답합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누가복음1장35절).”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고 성령으로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을 듣고 마리아는 곧 바로 순종하였습니다. “나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리이다(누가복음1장38절).” 이것은 대단한 용기입니다.
사명자나 사역자나 부름 받은 자에게는 이런 용기와 결단력과 신속한 용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때로 너무 신중하고 재삼 두드리고 많이 생각합니다. 그것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일에는 그렇게 우유부단하고 재고하고 따지면 할 수 없습니다. 나라 지도자가 너무 신중하고 생각이 많으면 매사를 재느라고 타이밍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러면 나라가 발전을 못하고 기회를 놓치기 쉽습니다. 기업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때 너무 신중하고 너무 재느라 시간을 끌면 기회를 놓치기 쉽습니다. 기회는 언제나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마리아는 아주 시원합니다. “나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리이다.” 지금 마리아는 정혼한 상태입니다. 정혼한 사람이 남의 아이를 잉태하였습니다. 당시 법으로는 돌에 맞아 죽을 일입니다.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이다” 하고 순종합니다. 그 말은 돌에 맞아 죽을 일이 발생하면 죽겠다는 뜻도 내포된 결단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께서 세상에 태어나게 되신 것입니다. 그 결과 구약성경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탄생을 위해서 마리아를 준비시키셨습니다. 마리아는 순간 주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이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후에 마리아가 얼마나 큰 수모와 아픔과 피난의 삶과 고달픈 인생을 살았습니까. 처녀가 임신을 하고 그 시골동네에서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멸시를 당하고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또 얼마나 아픔을 당했습니까. 그래도 마리아는 끝까지 꿋꿋하게 그 일을 다 해 냈습니다. 마리아의 고뇌와 아픔과 수고는 아무나 할 일이 아닙니다. 오늘 천주교에서 마리아를 숭배하기까지 하는데 이해가 갑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입니다.
요셉 준비
하나님께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는데 중요한 역할자로 요셉을 사전에 준비하셨습니다. 요셉은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요셉이 정혼한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베들레헴은 작은 동네입니다. 작은 동네에 처녀가 임신한 사실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소식은 작은 동네에 순식간에 한 바퀴 돌아버렸을 것입니다. 시골에서 모든 소식의 공급처는 우물가입니다. 아침이 되면 동네 아낙네들이 모두 우물가로 나옵니다. 그곳에서 간밤에 있었던 동네 소식이 긴급하게 타전되는 곳입니다. 요셉도 그 소식을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그 소식을 듣고 상당히 고민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약혼자가 동거 전에 남의 아이를 임신하였습니다. 요셉은 별 생각을 다했을 것입니다. 흥분도 했을 것입니다. 신명기 22장에 의하면 그럴 경우 공개재판을 열어 규명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율법에 주어진 권리이고 자존심을 회복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당시 의로움의 행위였습니다. 규명해서 부정이 발견되면 마리아를 돌로 치는 재판에 회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곧 결심을 합니다. 마태복음1장19절을 보면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아직 동거전입니다. 요셉은 조용히 이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경우 요셉은 마리아에게 이혼증서를 써 주어야 하고 또 위자료도 주어야 합니다. 마리아에게 정신적으로 충격을 주고 인격에 타격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요셉은 조용히 끊고자 했습니다. 그런 요셉을 성경은 의로운 사람(마태복음 1장19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결정은 약혼자 마리아를 배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마태복음1장20절을 보면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십니다. 그때 요셉은 그 중재를 받고 곧 바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하게 된 것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예언이 성취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장차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요셉이 수난의 삶을 살게 됩니다. 마리아와 정혼하고 즐거워야 할 시기에 갈등하고 고민합니다. 그 후 아이가 낳기까지 아내 마리아 곁에 갈 수도 없었습니다. 신혼 초인데 아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였는데 감히 어떻게 곁에라도 갈 수 있습니까.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사람들이 그 아이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 아이를 엎고 애굽으로 피난을 가고 도망을 다닙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그 후로 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길목에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사를 이루시는 길목에는 이렇게 말없이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아무나 하는 것 아닙니다. 조금 말만 들어도 뒤로 물러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금 손해만 보아도 기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아무나 못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나 요셉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는 대 사역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들입니다.
동방박사 준비
마태복음2장을 보면 동방박사들이 나옵니다. 이들이 유대 땅에 옵니다. 여기 동방이라는 말은 해 뜨는 동쪽이라는 말인데 그 당시 해 뜨는 동쪽은 페르시아를 말합니다. 박사를 헬라어로 “마고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페르샤의 사제들이라는 뜻입니다. 넒은 의미로 마고이는 이방세계의 정신적 엘리트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여기 박사라는 말은 고대동양의 지혜자 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당시 천문학을 연구하고 철학과 마법까지 능통했던 사람들입니다. 베들레헴에 온 동방박사들은 3명이라고 하는데 예수께 바친 선물이 세 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주석자는 동방박사가 별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아니고 동방의 세 왕 즉 가르파스(Caspar) 멜쉬오르(Melchior) 발타자르(Balthasar) 라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베들레헴에 와서 예수께 경배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경배하면서 세 가지 예물을 바쳤는데 황금과 유향과 몰약으로 예수께서 왕 되심과 대제사장 되심과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들의 행위는 이사야 60장9절에서 예언된 “먼 곳에서 ... 은금을 싣고 와서 ...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드리려했다”는 예언을 성취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이 동방박사들은 오늘의 이란 땅인 페르시아로부터 예루살렘까지 달려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약대를 타고 노숙하면서 별의 인도를 받고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주석자는 동방박사들이 예수를 만나러 온 날이 태어난 날부터 계산하면 13일째 되는 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12월 25일에 예수께서 태어났으니까 그들이 베들레헴에 와서 예수를 본 날이 13일째 되는 날이면 1월 6일이 됩니다. 그래서 오는 1월 6일을 주현절입니다. 주님께서 공적으로 세상에 나타나신 날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동방의 박사들이 그 멀리에서 찾아와 예수께 경배하고 “당신은 우리의 왕입니다”라고 고백을 하였는데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는 겨우 8Km의 거리입니다. 13일 길을 걸어서 찾아온 사람들이 있는데 8Km 거리에 사는 헤롯도 예루살렘 주민 누구도 장차 메시야가 오리라고 믿고 오실 그날만 기다리던 제사장 바리새인 누구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거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과 뜻이 문제입니다. 옛날 시골에서 살 때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면 거리는 상관도 없었습니다. 수십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고 아예 양식을 지고 가서 숙식하면서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에 기적이 일어났고 병이 치유되었고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고 변화가 일어나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자동차가 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어도 또 교회가 집 주변에 수없이 많아 몇 발자국만 걸으면 갈 수 있는데도 가지 않습니다. 거리가 문제 아닙니다. 동방박사들은 13일 동안 걸어서 예루살렘까지 와서 주께 경배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헤롯이나 유대인들 제사장들은 알지도 못하고 오지 않았다는 것만 문제가 아니고 태어나신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멀리서 알고 찾아와 경배하는데 가까이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하였고 오히려 예수를 죽이려 하였고 예수님은 이집트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구원에서 멀어지고 이방인은 구원으로 가까워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마태복음은 세상에 예수가 오셨는데 반갑게 맞이해야 할 유대인들 제사장들은 그를 핍박하고 죽이려 하여 피난을 가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토록 경멸하던 이방인들은 예수께서 오심을 알고 찾아와 경배를 함으로 그들에게는 구원의 빛이 비추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밝히려고 하나님은 동방박사들을 사전에 준비해 두신 것입니다.
목자들 준비
하나님은 예수 탄생에 역할 하도록 또 목자들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처음 들은 사람들은 목자들이었습니다. 목자들은 당시 그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장 빈천하고 초라하고 뒤쳐진 관심 밖의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외된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처음 듣게 되는 영광을 안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밤에 양떼를 지키는데 주의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났습니다.(누가복음2장8절) 그들이 양을 치던 들은 베들레헴에서 3km 정도 떨어진 빈들입니다. 추운 날 밤 밖에서 양을 돌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날이 12월 25일이었으니까 동지 축제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동짓날이면 일 년 중 가장 어두울 때이고 밤이 길 때입니다. 그래서 밤에 팥죽을 끊여 먹는 날로 명절날입니다. 이 가난한 목자들은 동짓날 축제와 무관하게 양들을 지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갑자기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의 탄생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우신 아기를 보라(누가복음2:10-12).” 그들은 하던 일을 놓고 베들레헴으로 달려가 경배하였습니다. 축복입니다. 당시 그 시대에 가장 천한 직업, 아주 빈천한 부류, 가장 소외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예수께서 태어나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왜 가장 천시되던 사람들에게 알려주셨을까요. 그것은 태어나신 예수께서 장차 어떤 삶과 어떤 일과 어떤 죽음과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상징일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33년간의 짧은 인생을 보여주신 상징과도 같이 사셨습니다. 무시당하셨습니다. 핍박 받으셨습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초라하게 사셨습니다. 비웃음 당하고 업신여김 받았고 조롱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예수를 보내시면서 많은 뜻과 상징과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탄생을 위해서 여러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마리아를 준비하셨습니다. 요셉을 준비하셨습니다. 동방박사들도 준비하였습니다. 그 시대에 가장 빈천한 목자들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밖에 하나님은 여러 명의 엑스트라들도 준비하셨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과 의로운 시므온을 준비하셨고(누가복음2장25절) 주야로 금식 기도하던 안나를 준비하셨습니다(누가복음2장37절). 이 엑스트라들은 모두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주도면밀하신 분이십니다. 철저하게 준비하시고 계획을 세우시고 환경을 조성하시고 역사의 길목을 지키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액션을 취하십니다. 예수는 그렇게 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예수께서 오심으로 준비가 다 끝난 것이 아니고 지금도 여전히 준비하시고 계십니다. 그 준비는 나를 위한 준비입니다. 나의 인생을 펼치시기 위해서 준비하시고 나의 내일을 준비하시고 나의 종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이유는?
마 1:18-25 / 조영식 목사
오늘은 하늘의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두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많은 피조물들 중에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하나님이 사람을 향한 사랑과 관심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아들을 낳는다는 것이 세 번 나오고 있습니다(21,23,25절). 오늘 말씀에서 ‘아들을 낳으리니’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이유를 깨닫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성탄절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첫 번째 이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첫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태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합니다(23절). 하나님은 “아들을 낳을 것이요”를 통하여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사람의 몸을 입어야만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까지도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혹시 무엇이 문제이냐고 의아해 하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그 임마누엘을 알지 못하고 계속해서 함께 해달라는 기도를 해왔던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이제는 하나님께 함께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감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언제까지 하나님께 함께 해달라고 하며, 주님이 임재하여 달라고 기도할 생각입니까? 임마누엘 주님은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히13:8).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제는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두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태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합니다(21절). 하나님은 “아들을 낳으리니”를 통하여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죄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아들의 이름이 구원이라는 뜻을 지닌 예수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죄의 상태가 되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에서 죄가 시작되었습니다(창3:6).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모든 과일을 먹을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창2:16). 그러나 단 하나의 선악과 열매만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창2:17). 여기서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이유는 불완전한 인간이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지 말고 창조주이며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맡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와에게 모든 과일을 먹도록 하신 은혜보다는 하나의 과일을 먹지 말라는 것을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그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모든 것을 주신 은혜보다는 하나를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섭섭함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하나마저도 소유하고 싶은 탐욕으로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하였습니다(창 3:6).
우리도 하와처럼 선악과를 끊임없이 따먹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한 해 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보다는 자신의 원대로 되지 않았던 하나에 섭섭하여 원망하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가정에서도 가족들이 서로 잘해주었던 것보다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았다는 하나에 매여서 섭섭한 마음이 찾아옵니다. 교회에서도 하나님께 받은 많은 은혜보다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한두 개에 마음에 걸려서 신앙의 침체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받고 살아가면서도 무언가 하나에 마음에 걸리면 그것이 선악과가 되어서 하나님께 받은 모든 은혜를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우리의 원대로 되지 않는 하나의 선악과보다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들이 더 많다는 것을 결코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저도 한해를 보내면서 내 원대로 되지 않는 선악과들이 있어서 마음이 상한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금년에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감사하면서 한해를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보다도 하나님의 선악과에 집착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수 없게 됨으로 영생을 잃어버렸습니다(창3:22). 우리도 내 원대로 되지 않는 하나의 선악과에 집착하여 가장 소중한 생명나무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선악과 하나에 집착하여 생명나무를 잃어버린 죄인들을 구원하기기 위하여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모심으로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세 번째 이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세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태는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고 합니다(25절). 하나님이 ‘아들을 낳기까지’를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한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하나의 생명으로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당시에 권력을 잡은 헤롯 왕은 생명을 죽이는 왕이었습니다. 마태는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죽이니”라고 전합니다(2:16). 헤롯왕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어린 생명들을 죽이는 죄악을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나셔서 모든 생명을 살리시는 한 알의 밀알이 되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것은 생명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겼으면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시면서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했던 비유중의 하나가 강도만난 이웃입니다(눅10:25-37).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오다가 강도를 마나서 다 죽어가는 이웃이 있었습니다(눅10:30). 제사장도, 레위인도 강도만난 이웃을 못본채하고 지나쳤습니다(눅10:31,32).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죽어가는 강도만난 이웃의 생명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해 주었습니다(눅10:33-35). 한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에게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은 믿음이며, 선한 사마라인은 살아있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신학생들에게 강의실마다 들어가서 설교하도록 했습니다. 신학생들이 강의실로 가는데 중간에 노숙자들이 붙잡고 도와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설교하는 것이 급하다고 그들을 뿌리치고 강의실에 들어가서 열심히 설교를 했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살리는 생명을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설교했지만, 제자장과 레위인처럼 결국 죽은 신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학생들의 모습이 이중 잣대의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이중잣대는 타인에게는 올바른 것을 요구하면서 자신에게는 이득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중 잣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트롤리의 법칙입니다. AI 인공지능에 맞추어서 자율 주행차량이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자율주행차량이 사고가 난다는 가정 하에서 차량 주인을 살릴 것인지 보행자로 걸어가는 두 아이의 생명을 살릴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모두가 보행자 두 아이를 살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 내가 차량 주인이 된다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결코 쉽지 않는 결정입니다. 조금 편하게 우리는 예수님이 오신 성탄절의 인사를 어떻게 합니까? 즐거운 성탄이라고 합니다. 그 즐거움이 내 것만을 구하고 있다면 이중잣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과 함께함으로 안과 밖의 차이를 허물어갈 때 즐거운 성탄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교회 안과 밖, 학교 안과 밖, 우리 민족 안과 밖의 이주민 등의 차이가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차이가 행동으로 옮겨지면 차별이 되고, 차별이 계속되면 갈등이 되어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게 됩니다. 우리들이 이중잣대의 신앙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이웃과 함께 사랑으로 안과 밖의 차이를 좁혀가는 즐거운 성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임마누엘
마 1:18 / 최정인 목사 / 베톤루치교회
도입 Introduction: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인 인간과 함께하기를 원하신다. God wants to be with men who are His creature.
구약성경의 최대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중심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세상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세상은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인 인간과 함께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 부부에게 찾아오신 것을 보아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죄가 개입하게 되었고, 하나님과 인간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최대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다시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사모하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훨씬 더 큰 힘은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하시려는 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이 대강절을 기리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 놀라운 사건을 다시 돌아보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금년도 대강절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마태복음 1:18-25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임마누엘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but before they came together, she was found to be with child through the Holy Spirit.” (18-19)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8 This is how the birth of Jesus Christ came about: His mother Mary was pledged to be married to Joseph, but before they came together, she was found to be with child through the Holy Spirit.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하는 복음서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입니다. 누가복음 훨씬 더 마리아를 중심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태복음은 훨씬 더 요셉을 중심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지난주일에 갈라디아서 4:4에서 본 대로 예수님은 여자에게서 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나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이 과정에서 요셉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요? 단지 요셉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을까요?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This is how the birth of Jesus Christ came about:)라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마태는 이미 16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and Jacob the father of Joseph, the husband of Mary, of whom was born Jesus, who is called Christ.) 마태는 그의 복음서 1장의 앞부분에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먼저 소개하고 있습니다. 2절부터 15절까지의 모든 탄생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지는 계보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아버지 이름은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1장의 족보에서 “낳았다”를 의미하는 단어가 서른아홉 번이 사용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다.” “이삭이 야곱을 낳았다.” “야곱이 유다를 낳았다.” “유다가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 이런 식으로 기술해서 16절까지 옵니다. “야곱은 요셉을 낳았다, 마리아의 남편인. 그리고 그녀에게서 예수께서 태어나셨다. 그분은 그리스도라 불리신다.” 이 표현을 잘 보면 마태가 강조해서 표현해 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1) “야곱이 요셉을 낳았다.” 아버지가 자녀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영어는 보통 아버지가 자녀를 얻을 때는 동사 “beget-begot-begotten”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자녀를 낳을 때는 “bear-born-born”을 사용합니다. 야곱이 요셉을 낳았다고 할 때는 그러니까 “begot”를 쓰겠죠. 이미 이렇게 39번을 이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2) 그런데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라고 절대 기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요셉은 마리아의 남편이다.” 즉 “야곱이 낳은 것은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이다.”라는 거죠. 예수님은 요셉에 의해서 잉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력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에 의해서 마리아에게 잉태되실 당시에 마리아는 법적으로 요셉과 정혼한 상태였습니다. 정혼은 우리로 말하자면 약혼과 비슷한 것인데, 약혼보다 훨씬 법적인 효력이 강한 것이었습니다. 결혼을 통하여 정식 부부가 되기 전까지 서로의 성적 순결을 지킬 뿐만 아니라, 그 둘 사이에서도 성적인 접촉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실 때에 그냥 동정녀가 아니라, 요셉과 정혼한 동정녀 마리아를 택하신 것입니다. 아마 마리아가 그냥 동정녀라면 혼자 아이를 길러야 하는 상태 즉 싱글 맘(single mam)이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또는 마리아가 요셉과 이미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여인이라면, 그녀를 통해서 예수님이 오신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인지 요셉의 아들인지 불분명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정혼한 상태인 요셉은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한 자기 아내를 돌보고, 또 그 순간부터 예수님이 태어나 자라실 때까지 기르는 아버지(nursing father)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3) “그리고 그녀에게서 예수께서 태어나셨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실 때, 이렇게 남자로서의 요셉은 성적으로 어느 역할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이신 성자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은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부터 아무런 오염됨이 없이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인성을 받으실 때, 성령께서 마리아로부터 원죄가 예수님께 전달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성으로서는 죄를 범하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와 같은 상태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담과 하와가 그랬듯이 죄의 유혹은 받으셨지만, 죄를 범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원죄와 자범죄가 없으시기에 우리를 위한 대속의 희생제물이 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18절의 뒷부분을 보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His mother Mary was pledged to be married to Joseph, but before they came together, she was found to be with child through the Holy Spirit.) 누가복음에 보면,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그녀에게 잉태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주의 여종으로서 믿음으로 순종한 후, 바로 갈릴리 지방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 지방으로 그녀의 이모부인 제사장 사가랴, 그리고 이모인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엘리사벳의 잉태 소식을 알려주었을 때, 마리아는 이모를 방문하여 이모를 축하하면서 또한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소식도 나누기를 원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석 달 정도 지내다가 다시 갈릴리 지방 나사렛 동네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여행에 요셉이 함께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이미 정혼한 처녀로서 자기의 몸에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주의 여종”으로서 순종할 때, 자기의 정혼 대상인 요셉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고, 이러한 사실을 바로 알리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브리엘을 자기에게만 보내어 하나님의 일을 하시려고 할 때, 마리아는 이 일을 위하여 요셉에게 하나님이 먼저 알리시거나, 마리아의 부모에게 먼저 알리셔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어 이러한 모든 것을 알려주셨듯이, 자기와 이제 곧 결혼할 요셉에게도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 모든 것을 알려주실 것을 믿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날은 하루하루 지나가고, 마리아의 몸에는 예수님이 잉태되어 자라고 있는 것이 드러나게 되어, 이제 요셉도 자기 정혼 대상자인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에서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이라는 표현은 마리아와 독자인 우리는 이 사실을 알지만, 아직 요셉은 모르는 그런 내용이었죠. 자, 이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죠? 19절입니다.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19 Because Joseph her husband was a righteous man and did not want to expose her to public disgrace, he had in mind to divorce her quietly.
마리아와 정혼한 남편인 요셉은 자기 아내가 될 마리아가 자기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임신을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신앙과 인격으로 의로운 사람이며 정확한 사람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오늘날 일부 종교에서 하듯이 명예 살인을 하기라도 했을까요? 아니면 동네방네 끌고 다니면서 부끄럽게 함으로써 자신의 분풀이를 했을까요?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아마 이 시점에서는 자신은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았지만, 아직 이웃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셉이 선택하고자 했던 것은 이 사실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마리아의 부모에게나, 동네나, 이웃에게 알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조용히 마리아와의 정혼 관계를 파혼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 정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죠? 마리아는 다시 싱글 맘으로 예수님을 낳아 길러야 하는 거죠. 마리아는 이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요셉과 자신 사이에 어떻게든 개입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런 상태에 놓이기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런 경우에 있기도 하는 거죠. 마리아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겠죠?
2.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Joseph son of David, do not be afraid to take Mary home as your wife, because what is conceived in her is from the Holy Spirit.” (20-23)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0 But after he had considered this, an angel of the Lord appeared to him in a dream and said, "Joseph son of David, do not be afraid to take Mary home as your wife, because what is conceived in her is from the Holy Spirit.
요셉은 자기가 하려고 하는 것을 먼저 말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마리아와도, 혹은 부모와도 상의하거나 고민을 나누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이 일을 마음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이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요셉이 잠을 자는 사이에 주님의 사자, 주님의 천사가 그의 꿈속에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이 천사는 가브리엘일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입니다. 그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1) “다윗의 자손 요셉아”(Joseph son of David): 요셉은 그냥 요셉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물론 다윗의 자손인 남자와 다윗의 자손인 여자가 정혼한 사이인 경우가 요셉과 마리아만이지는 않았겠지만, 하나님은 이 커플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가장 놀라운 일을 하시는 하셨던 것입니다. 메시아, 즉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는 예언은 구약성경에 많이 주어졌던 것이고, 천사가 요셉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를 때, 그 예언은 그 예언이 이루어지기에 적법한 사람 중에 요셉도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2) “네 아내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do not be afraid to take Mary home as your wife,): 정혼 기간이 마치고 정식 아내가 되는 마리아를 맞아 결혼 관계에 들어가는 것,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부부로서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천사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요셉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을까요? 자기 아내가 될 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임신을 했고, 그리하여 부모와 동네와 이웃에게 받을 멸시와 조롱과 손가락질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고, 그것을 두려워했기에 마리아와의 관계를 조용히 끝내려고 했던 거죠. 그러나 천사는 요셉에게 아내 마리아 데리고 오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왜 그렇죠?
(3)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because what is conceived in her is from the Holy Spirit.): 무슨 말씀입니까? “요셉아, 네가 혹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듯이, 마리아는 부정한 관계를 통하여 임신한 것이 아니란다. 마리아에게 잉태된 분은 성령을 통하여 그렇게 된 것이란다.” 어떤 남자, 요셉도 그 누구도 아닌, 성령에 의해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한 것입니다. 그러니 마리아를 의심하거나, 내치거나 하지 말고, 따스한 마음으로 마리아를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마리아가 신앙으로 결단을 내리는 것 이상으로 요셉도 이 천사의 말을 받아들이기에는 역시 마리아와 버금가는 신앙의 결단이 있어야 했던 것임을 성경은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의 모든 과정에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를 통한 탄생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하나님으로서는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 사람으로서는 저와 여러분과 동일한 사람, 그러나 죄는 없으신 분임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사람의 아들로 여인의 태중에 잉태되어 탄생하시고 자라나실 수 있느냐는 생물학적, 과학적 질문은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기에 이것도 당연히 하실 수 있다는 것으로 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는 유일하고도 분명한 방법이 이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1 She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you are to give him the name Jesus, because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천사는 더 나아가 요셉에게 마리아에게 성령으로부터 잉태하여 태어날 이가 남자 아이일지, 여자 아이일지를 말해 줍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말해주는 겁니다. 오늘날에는 태중의 아이들에 대하여 99.99%의 확률로 미리 말할 수 있지만, 100년 전에만 해도 그렇지 않았죠. 천사는 마리아에게 태어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라고 말해줍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 혹은 “호세아” 혹은 “이샤”의 헬라어 형태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Jehovah saves)입니다. 왜 이름을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로 불러야 합니까? “왜냐하면 그분이 그분의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실 분이시기 때문이다.”라는 거죠.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실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천사는 요셉에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을 찾으셔서 그들을 죄와 사망과 심판과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을 백성으로 하는 하나님의 왕국을 이루시려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받아야할 가장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이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2 All this took place to fulfill what the Lord had said through the prophet:
천사는 이제 마리아와 요셉을 통하여 이루어질 이 모든 일은 그냥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이름의 의미는 예수(이샤)와 거의 비슷해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Jehovah is salvation)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사모하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이미 700여 년 전부터 미리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3 "The virgin will be with child and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they will call him Immanuel"--which means, "God with us."
이사야 7장에는 아시리아의 침략과 공격에 풍전등화와 같았던 유다에 하나님의 구원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하여 이사야와 히스기야 왕과 유다 백성이 빠진 곤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한 처녀를 지목해 주면서, 그 처녀가 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Ἐμμανουήλ; עִמָּ֫נוּאֵ֫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라 지을 것이라고 예언해줍니다. 한 처녀가 정혼하고, 결혼하고,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잉태하고, 낳으려면 최소한 2-3년 정도 걸리죠. 하나님의 구원이 이제 그 아이가 탄생할 때 정도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의 예언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탄생을 기다라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곧 메시아, 즉 그리스도, 구세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아들로 탄생하여 오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예언의 말씀이죠. 임마누엘이라는 예수님의 별칭은 그 안에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의지가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저와 여러분과 함께하시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오심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함으로써, 우리는 성령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부 하나님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가정의 가족, 하나님의 왕국의 백성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하십니까? 아멘?? 아멘!!
3.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But he had no union with her until she gave birth to a son. And he gave him the name Jesus.” (24-25)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4 When Joseph woke up, he did what the angel of the Lord had commanded him and took Mary home as his wife.
이 꿈을 통하여 요셉의 모든 의심은 사라졌습니다. 그는 아마 마리아에게 이 모든 일을 설명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도 역시 요셉에게 모든 일을 설명했을 겁니다. 이제 마리아는 요셉의 집으로 와서 부부로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 사역의 한 가운데 있는 것임을 깨닫고, 믿고, 순종하고, 하루하루를 살아내었습니다.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25 But he had no union with her until she gave birth to a son. And he gave him the name Jesus.
요셉의 놀라운 점은 그가 비록 아내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서 정식 부부로 살기 시작했지만,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을 때까지는 부부관계를 철저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리아의 입장에서나 요셉의 입장에서나 마리아의 태중에 계신 분이 성령으로 잉태된 분으로서 자신들이 철저하게 조심해야 하는 입장임을 분명히 알고 그렇게 순종했던 것입니다. 이제 때가 되어서 마리아가 아들을 낳았고, 요셉은 천사에게 들은 대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물론 당시에 예수라는 이름은 아주 인기 좋은 이름 중의 하나였습니다.
또한 이 구절의 행간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태어난 이후로 요셉과 마리아는 보통 부부처럼 그들 사이에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도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을 때까지는 요셉과 정혼한 상태의 동정녀였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동정녀로 산 것은 아님을 분명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사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 이후로 네 명의 아들과 최소한 두 명 이상의 딸을 낳았고, 그 남동생들의 이름은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론 Conclusion: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당신과도 함께하시는가? Jesus who is God with us also is with you?
이렇게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서 마리아의 역할과 요셉의 역할, 마리아의 신앙과 삶, 요셉의 신앙과 삶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낳아 기르셨듯이, 요셉이 성령으로 임신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시는 때에 보호하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 하였듯이, 저와 여러분도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주님의 자녀로서의 신앙과 삶을 통하여 주님을 드러내고 증언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계십니까? 마리아와 요셉에게 신앙과 결단이 있었듯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님을 증언하고 드러내는 신앙과 결단을 분명하게 하는 이 대강절 기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에 성령으로 예수님이 함께하심으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임마누엘 하시려고
마 1:18-25
성탄의 계절, 따뜻한 이웃이 있어 행복하게 느끼는 자들이 많습니다. 어제 사랑의 쌀 나눔 행사가 있었는데, 어떤 이는 받아서 행복을 느끼고, 어떤 이는 주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탄의 계절에 기억할 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도 인생들에게 행복을 주시기 위함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무슨 피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요 믿는 자의 심령에는 Happy가 흐르고 있는 줄 믿습니다. 오늘은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나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임마누엘 하시려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불행의 길에서 건져 행복의 길(구원)로 이끄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21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보는 대로 예수라는 이름은 그 자체가 “구원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모세의 후계자였던 여호수아 역시 그 이름의 뜻이 구원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구원자입니까? 그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로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말할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요 놀라운 사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래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매우 흡족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즐거움의 동산인 에덴에 살게 하시고 행복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귀한 행복을 잃어버리고 고통과 금심 속에서 살게 됨은 물론 사망에 이르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죄 때문에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죄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죽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영생의 복, 평강의 복, 즐거움의 복 둥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축복이 회복되는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은 정말 모든 인류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임마누엘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은혜 중에 은혜요, 축복 중에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23절을 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몇 가지 섭리를 보게 됩니다. 첫째로 처녀 잉태는 죄 없는 인간으로 오시어 죄인을 대신하여 죽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지혜임을 볼 수 있고, 더 나아가 예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깊숙이 담겨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믿는 자들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내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금방 그 말씀을 잊어버리고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늘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확인시켜 주시고자 아예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누군가가 내 곁에 있어도 마음이 편하고 행복한데,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심을 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2.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 삼으심도 임마누엘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사 우리를 성전 삼으셨습니다. 언제나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신약 시대에 있어서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 성전이다. 그리고 성전들의 모임이 교회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16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 삼으신 이유는 언제나 우리 안에 임마누엘로 계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 우리가 성전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좌정하시는 곳이 바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믿는 자들 안에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서 승리하려면 먼저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정체성을 확실히 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답게 영으로 살아야 하며, 세상에 나가서는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영적 리더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성전 삼으신 진짜 목적은 우리로 이 땅에 우주적 교회를 세우라는 것임을 알고 모두가 합력하여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주적 교회는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땅 끝까지 나가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 삼으신 이유는 언제나 우리와 임마누엘 하시어 그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려는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10절에도 보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예수께서 죽으신 깊은 영적 의미 역시 자기와 영원초록 함께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3. 예수님은 인생들로 하여금 두려움에서 자유케 하시려고 임마누엘 하셨다.
히브리서 2:14-15절에 보면"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믿는 자들 안에서 임마누엘 하시어 마귀와 죽음의 그늘로 부터 자유케 하려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땅에 태어 날 때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였으므로 육신을 통하여 태어난 인생은 누구나 죄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죄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육의 사람은 결국 마귀의 영향아래 놓여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이 예수를 영접함으로 예수가 그들 속에 들어가면 바로 그 즉시로 마귀 사탄은 떠나게 되고 예수께서 그 자리에 좌정하시어 주인이 되므로 그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면 죄와 죽음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비로서 이 모든 것들로 붙어 자유함을 얻게 되므로 마음의 평안이 임하고 세상을 이길 능력까지 갖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은 예수께서 임마누엘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뿐 아니라 성전 삼으시고, 모든 세상적 두려움에서 자유를 주시고, 또한 우리를 성령의 능력자로 살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1:7-8절에 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 은혜 받기 전과 은혜 받은 후, 성령 받기 전과 성령 받은 후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사실 우리의 삶을 보면 예수 믿기 전이나 예수 믿은 후나 똑 같이 시련이 오고 염려, 고통, 질병은 물론 경기가 어려우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동일하게 파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것은 예전에 이런 것이 오면 극히 두려웠는데, 예수를 안 이후에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게 되므로 극히 담대해져 있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됩니다. 예수 안에 있다 보니, 영생 안에 있다 보니,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살다 보니, 이길 수 있는 능력 생기고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 감사합니다. 그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고,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영적 힘을 갖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의롭게 살다 핍박을 받아도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하늘에 속한 자의 삶을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가 임마누엘하시면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나 고통이 와도 담대해 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만 해도 그는 큰 환난 중에서 담대할 뿐 아니라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승리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시편 23:4절에 보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역시 이 땅을 사는 동안 많은 시련과 환난이 온다 할지라도 다윗과 같이 임마누엘의 능력 안에서 복음으로 주변의 문제들을 이기고 어려운 환경 등을 잘 극복함으로 예수께서 이미 우리 안에 허락하신 행복을 누리며 행복을 나누어 주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
마 1:18-25 / 이은규 목사(성암교회)
지난 금요일 아침에 친구에게서 카톡이 한 마디 날아 왔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전화할까? 라는 글이었습니다. 참 좋은 내용이 글이 담겨 있어서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립니다.
‘아버지에게 친한 친구 한 분이 계셨답니다. 늘 형제같이 지냈던 친구라고 하네요. 그런데 이 친구 분이 87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기 한 시간 전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답니다. “친구야! 나 먼저 간다!” 당시에 거동이 불편했던 아버지는 그 전화를 받고 그냥 눈물만 뚝뚝 흘리셨습니다. 나 먼저 간다는 그 말 속에는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도 들어 있었겠지요.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도 들어 있었겠지요. 그 전화를 받은 아버님은 일어날 수가 없으니 그냥 눈물만 뚝뚝 흘리고... 그리고, 정확히 한 시간 후에 친구 분의 자제로부터 아버님께서 운명하셨다는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내가 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나 먼저 간다고 작별인사를 하고 갈 수 있는 친구... 나에게 그런 친구 한 사람 있다면 그래도 그 삶은 괜찮은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얘기를 하면서 선배는 ‘너는 누구에게 전화를 할 건데?’ 하고 묻습니다. 그 질문에 나는 너무 많은 것인지, 너무 없는 것인지 즉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전화를 해서 “친구야! 나 먼저 간다!” 해줄까? 내가 먼저 가서 자리 잡아 놓을 테니 너는 천천히 오라고 누구에게 전화를 해 줄까?’ 친구도 좋고, 선배도 좋고, 후배도 좋습니다... 당신은 누구에게 전화를 해서 삶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시겠습니까?
내 마음에 꽃 한송이, 사람 하나가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으면 잠시 삶의 발걸음을 멈추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가까운 곳에 아름답고 소중한 벗들이 많은데, 우리는 그것을 못 보고 끝없이 다른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까지 내 곁을 지켜 주었던 사람, 앞으로도 오랫동안 내 곁을 지켜줄 사람... 그 사람이 지위가 높든 낮든, 그 사람이 가진 것이 있든 없든, 바로 그 사람이 내가 누구보다 소중하게 대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운명할 내 친구가 떠나는 그 순간에 나를 찾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도록 오늘도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크리스마스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생각이 나시는지요? 아마도 요즘은 좀 뜸해졌지만, 거리에서 들려오는 캐롤이라든지, 서로가 주고받던 크리스마스카드 같은 것이 우리에게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준비했다가 슬그머니 전해주는 것도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경제가 어렵다고 해서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작은 선물하나 준비해서 전달해 주는 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크리스마스에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이제 곧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속에서 성경의 기자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토대로 해서 주님이 세상에 태어나신다는 것이 담고 있는 소중한 의미를 잘 전달하여주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여기시는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담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의도는 참으로 신비하고 우리의 상상과 기대를 넘어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에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v.23) 이제 곧 태어나게 될 아기... 그 아기는 아주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두 젊은 남녀를 통해서 세상에 오게 될 것입니다. 그 아기의 이름을 하나님은 이미 정하여 놓으셨습니다. 예수라고... 히브리인들의 전통적인 발음으로 하자면 ‘여호수아’이지만, 그것에 익숙하지 못한 이방인들도 잘 부를 수 있도록 예수라고 한 것인데... 여기에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 담겨 있지만... 당시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참 많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기다리고, 온 세상이 떠들썩하게 기념하는 한 아기의 출생... 이것은 어찌 보면 다른 많은 아이들의 태어남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아기의 탄생이 그토록 중요하고 소중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려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다름 아닌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여기에 담겨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크리스마스에 주고받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선물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성탄절에는 이렇게 하나님을 선물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찾아 오셨습니다.’
어쩌면 이 선물은 사람들에게 그다지 반갑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좋으면서도 좀 부담스럽지 않으신가요? 아마 결혼하신 여성들에게는 아주 엄격하고 무서워서 가깝게 다가가기도 힘이 들고, 말 한 마디 붙이기도 어려운 시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할까요? 이런 분을 모시고 그분 곁에 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참 어렵고 힘이 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하였습니다. 정작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상에 오셨지만... 이스라엘은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 소식을 먼저 알아차린 것도 이스라엘의 학자들이 아니라 동방의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기뻐하기보다는 경악하였습니다. 온 예루살렘에 발칵 뒤집혔습니다. 진짜 메시야가 오다니... 이제 우리들의 시대는 끝이로구나... 당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헤롯왕은 심지어 아기 예수를 죽이려하지 않았던가요? 누구나 다 하나님이 오시기를 기다린다고 말은 하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를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감동적이고 희망이 되는 이야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누리는 커다란 기쁨 중의 하나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우리를 지으시고, 끝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 내려오시다니... 그리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니... 이것처럼 살면서 소중하고 마음 든든한 일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나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하여 새로운 안목으로 바라볼 수가 있게 됩니다. 아마도 우리가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웠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 주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제단에 켜진 대강절을 밝히는 초라고 생각합니다. 초가 하나씩 켜질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점점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이 촛불이 주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을 이어주는 빛이 되고,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비추어주는 등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더욱더 행복하게 풍성하게 오늘을 살게 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 하신 일... 그것은 자기를 버리고 비우시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빌립보서에 소개된 초대교인들이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통해서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빌2:6) 물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개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친히 세상에 오셔야할 필요성을 느끼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골을 메우시기 위한 뜻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일단 자기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 19장에서도 보는 것처럼 원래 하나님은 인간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분이셨습니다.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특별한 약속을 맺으실 때에도... 하나님은 시내 산 기슭에 경계선을 정해 놓으시고는 아무도 그 선을 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출19:12) 이렇게 인간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던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시게 된다는 것... 거기에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고수하던 원칙들을 허물어뜨리고 버리는 결단이 없이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비움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빌2:7) 아마도 비움이란 버림보다 한걸음 더 나간 상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버린다는 것이 자기의 원칙이나 행동양식을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면... 비운다는 것은 자기와는 전혀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말하는 것이니까요.
오늘 성탄절을 앞에 두고 우리가 읽어야 할 하나님의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버림과 비움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지키시던 원리와 존재양식을 스스로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들과 가까이 계신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가 구체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일인 것인지... 그것을 알게 하시려고 스스로를 버리시고 비우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깊고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입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나와 소통하기 위해서 이제껏 자기가 고집하던 모든 삶의 원칙이나 행동양식을 포기하였다면... 그리고 나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 보려고 자기를 완전히 비웠다면... 이것은 참으로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지금은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 목사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몸이 약해지다 보니 한 교회에 오래 있지를 못하고 점점 더 시골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에 있던 교회가 강원도 화천이었는데, 저도 그를 찾아가다가 ‘이거 그냥 북으로 넘어가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깊은 산골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친구가 기뻐하면서 전화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가르치던 교수님이 그 산골까지 자기를 찾아오셔서 하룻밤을 머물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자가 병마와 싸우며 목회를 하는 그곳을 꼭 찾아오고 싶었노라고...
저도 그 교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로지 공부밖에는 모르시고 학교와 집 밖엔 모르시던 분인데... 그분이 그토록 바쁜 틈을 내어서 화천의 깊은 골짜기 가시기 위해서는 그가 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버리고 비움이 없이는 할 수가 없는 일이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을 해보니 제 마음 가운데에도 깊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버리고 비운다는 것... 사실 이것은 그동안 우리가 가져왔던 마음이나 살아가는 방식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거의 정반대라고도 하겠지요. 요즘 세상 속에서 이렇게 산다는 것은 나를 완전히 포기하는 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마음이고...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바라시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성탄절을 맞이하기까지 단 며칠만이라도... 채우고 소유하기에 급급하던 마음을 버리고 자기를 비우려하는... 그리고 그 빈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가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행위 속에서 읽을 수 있는 마음은 ‘받아들임’입니다. ‘너희들은 버려진 존재가 아니다. 너희들이 살고 있는 곳은 버려진 땅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받아들여 주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주님의 오심을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고통 받던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 옛적에는 주님께서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을 멸시 받게 버려두셨으나...’(이사야9:1a) 이런 세상이 있었던 것이지요. 힘 있는 이들에게 멸시받고 희망을 찾을 수가 없어서 마치 버려진 땅과 같은 세상... 빛이 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둠에 파묻힌 것과 같은 땅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세상과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제 그들을 향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이사야 9:2)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친히 하나님께서 그 어두운 땅을 찾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더 이상 버려진 곳이 아니라 나에게 아주 사랑스럽고 소중한 곳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결코 무시하거나 버려진 사람들이 아니다. 나에겐 아주 한 사람 한 사람이 아주 소중하다... 내가 이 어두운 세상과 여기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나의 사랑하는 백성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친히 세상에 오시는 행동 속에 담겨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성탄절이나 새해가 되면 대통령이나 지도자들이 일부러 오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을 찾아가거나 하면서 그들을 격려해주고, 그것을 언론에서 크게 보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걸프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을 때, 부시 대통령이 멀리 중동까지 날아가서 미군의 병영을 방문해서 병사들을 격려하던 일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 때 대통을 맞이하면서 병사들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아! 나도 미국의 국민이로구나... 비록 이곳이 힘들고 위험하기는 해도... 우리가 모두에게 잊혀지고 버려진 땅에 있는 것은 아니로구나...’ 하는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람에 되셔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 그 속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시고 받아들여 주신다는 마음이 여기에는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좀 부족하고 모자라다고 하여도... ‘너는 나에게 참으로 사랑스럽고 소중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들을 받아 들여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머물러 있는 곳이 혹시 세상에서는 관심을 잘 갖지 않는 버려진 곳과 같은 곳에 서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인정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따스해지고... 주변이 밝아지지는 않으시는지요?
너를 받아들이려하는 마음... 네가 좀 부족하고 맘에 썩 들지는 않더라도 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할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 주시고... 소중히 여기시며 따스한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내가 만나는 너와 나누려 할 때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마음도 더욱 밝아지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더욱 활기에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크리스마스가 되려면 한 열흘도 남지 않았는데... 그동안 우리가 그런 일을 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버려진 것 같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나와는 멀리 떨어져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보는 것입니다. 나와는 생각이 다르고... 사는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려 해보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밝고 환한 빛을 좀 전해보는 것이지요. 그럴 때 우리의 삶이 더 풍성해지고 세상도 더 밝아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 그것은 또한 우리와 삶을 나누시고 함께 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세상을 감시하거나 시찰하는 존재로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명령만을 내리는 존재로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려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기쁨과 슬픔... 아픔과 고통... 절망과 희망을 더불어 나누는 분으로서 세상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예수가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어떻게 계셨을까? 하는 것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사람들이 예수를 불렀던 별명을 통해서 그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들...’ 예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불리기도 하셨습니다. ‘포도주를 즐기고, 먹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별명도 얻으셨습니다.(누가복음 7:34) 그런 것을 보면 예수님은 정말 사람들과 함께 하시고 어울리시기를 좋아 하신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한 식탁에서 먹는 것에 대하여 차별을 두어서 이방인들이나 그들이 생각하기에 천하고 죄에 얽매인 사람들과 한 식탁에 앉는다든지 어울리는 것을 아주 싫어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서슴없이 세관에 일을 보던 세리를 부르셔서 자신의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리가 너무 좋아서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죄인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열었을 때, 예수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시고 그 자리에 참여 하셔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셨습니다. 아마도 예수가 얻으셨던 점잖지 못한 별명들... 그것은 보이지 않게 사람들 사이에 드리워진 장벽을 허물어뜨리고 스스로 가장 낮고 천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함께하려 했던 그의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에게 주어진 거룩한 호칭과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은 사실은 전혀 어울리거나 서로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만 나타난 아주 특이한 현상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왜 그렇게 처신을 하느냐고? 도대체 어울릴 사람이 없어서 이런 사람들하고 어울리는가? 하고 비난을 받으셨을 때... 예수는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병든 사람들에게는 필요하지 않은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가2:17)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을 한 번 생각해 봅니다. 그 예수님의 가슴은 얼마나 따스한가? 그 사랑의 품은 또한 얼마나 넓은 것인가? 그동안 그들이 세상에서 받았던 소외감과 아픔을 다 감싸주고도 남을 만큼 풍성하고 넉넉한 것입니다. 이렇게 너를 소중하게 여기며, 한 인격으로 대하여 주는 그 곳... 거기가 바로 예수가 꿈꾸셨던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함께하는 즐거움이 이번 성탄절에는 우리들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누군가가 내게로 다가와서 나에게 기쁨을 주고... 나를 위로해주고 나를 특별한 존재로 대해주고... 그것을 가다리지 마십시오. 하늘에서부터 주님이 내려오셔서 친히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너를 소중히 여기고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아낌없는 사랑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체면이 구겨지고, 사람들에게서 비난을 듣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 주셨습니다.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여러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어제는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나이 지긋한 두 남자를 만났습니다. 도움을 청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송도가 인심이 좋다길래 왔습니다...’ 이런 농담까지 곁들이면서 말이지요. 약간의 도움을 드리고는 그동안 보관해 두었던 목도리도 하나씩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돌려보내려고 하는데... ‘목사님 기도 좀 해주세요...’ 양손을 그분들의 어깨에 얹고 기도를 드리는데... 가슴에서 무엇인가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찾아가서 함께 해 주어야할 사람은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우리가 감히 바라지도 못한 일인데...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들 차례라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 가운데 담겨진 주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그것을 전하려 하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이 건강하고 의로운 사람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며 그들과 삶을 나누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셨던 것처럼... 그것이 바로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며 우리가 추구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언의 성취
마 1:18-25
한 사람이 산길을 가다가 계곡을 가로지르는 줄다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만일 줄다리가 끊어지면 생명을부지할 수 없을 만큼 계곡은 깊습니다. 게다가 아무래도 줄다리는 약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줄다리를 무사히 건너게 해주신다면 제가 갖고 있는 재산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하고 마음을 다짐하면서 서서히 건너기 시작합니다.
삐꺽거리는 다리의 중간쯤 왔을 때, 그는 마음을 바꿉니다. “하나님 제가 갖고 있는 재산의 절반을 틀림없이 바치겠습니다.”로 수정되었습니다. 이제 거의 맞은편 언덕으로 가까이 왔을 때 그는 “끝까지 건너면 제 재산의 1/4을 바치겠습니다.” 라로 바꾸었습니다. 이윽고 무사히 건너자 땀을 닦으며 “하나님, 그런 약속은 없는 걸로 하겠습니다.”하며 스스로 약속을 깼습니다.
사람은 약속을 깨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은 약속을 지키지 않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성경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어떻게 이루셨는지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약속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예언들이 기록되어 있고 그 예언들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종말 예언이 남아있습니다. 종말에 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예언을 했습니다.
인류의 종말을 예언한 영국의 조지 오엘은 [1984년]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핵무기와 탄도탄의 개발을 예언했는데 그대로 적중했습니다. 그러나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이 사회주의로 변하고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라는 예언은 빗나갔습니다. 조지 오엘은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지구가 포연에 휩싸일 것이라는 공포로 스코틀랜드의 작은 섬에서 은폐된 생활을 하였습니다. 오엘은 그 섬에서 불안에 떨면 [1984년]을 집필했던 것입니다. 그는 비관론과 우울증으로 육체와 정신이 점점 황폐해져 갔고, 결국 47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7월 세계의 종말이 온다는 마지막 예언도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세계의 수많은 점성가, 점술가, 예언가, 각종 긴다난다 하는 사람들의 예언은 부분적으로 일치된 것은 있지만 결정적인 사건들에 대한 예언은 적중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요셉에게 한 천사의 말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21-23절 말씀은 예언의 말씀이 성취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의 성취 속에서 그 의미를 깨닫고,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께서 처녀의 몸에 잉태되어 탄생하신다는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못 믿겠다고, 신화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 처녀의 몸을 빌어 태어나셨다는 탄생사실을 믿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셨다는 창조를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하시고자 하시면 못하실 것이 없음을 믿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늘과 궁창과 땅과 바다와 거기에 있는 해와 달과 별과 공중의 새와 땅의 생물과 바다 속의 생물들을 모두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정도 능력이 없으시다면, 어찌 그런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마리아의 몸에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이 잉태되게 하시는 일은 사실 하나님께는 너무도 쉬운 일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 천사를 통해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35절에,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37절에,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믿음으로 대답합니다. 38절에,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세상도 창조되었는데, 한 생명이 잉태되는 것을 못하실 리 없으시다는 마리아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성경에는 크게 네 종류의 생명 탄생의 방법들이 나옵니다. 안셀름이라고 하는 신학자는 [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는가]라는 책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는 방법에 대해 네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 생식의 법칙에 의해서 잉태되는 방법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를 통해서 여자의 몸에 생명이 잉태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남자나 여자 없이 생명을 만드시는 방법입니다. 아담을 창조하신 방법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흙으로 빚어 아담을 만드시어 생명이 되게 하셨습니다.
셋째는 여자를 배제한 채 남자만을 통해서 사람이 태어나는 방법입니다. 하와와 같은 경우입니다. 아담이 잠들었을 때에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여자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아담은 흙으로 만들었고, 여성은 뼈로 만들었다는 것 때문에 그릇으로 말하면, 남자는 토기그릇이고, 여자는 본차이나와 같아 우월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넷째는 생산 능력이 없는 남자와 여자에게 신적 능력을 불어넣어 주심으로 사람을 낳게 하신 방법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은 일이 그렇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도, 이미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를 넘어서서 상식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낳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사건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사건은 아닙니다.
이런 사실을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평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우주를 설계하여 존재하게 하고, 지금도 매순간 그 우주를 지탱하고 있으며 물리적 세계를 지배하는 자연법칙 자체의 원천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일입니다.
교우 여러분, 창조주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탄생하신다는 예언을 성취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을 우리의 기준으로 측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섬기십시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못하실 것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놀라운 일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2.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탄생하시는 분은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 탄생은 곧 메시야 탄생 예언의 성취입니다. 본문 말씀 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 이사야 7장 14절에 예언된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메시야 출생이 처녀의 몸을 빌어서 오신다는 예언 즉 자연적인 임신에 의한 출생이 아니라, 인간의 계획과 통제를 넘어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과 그 분이 이 땅을 구원하시는 메시야이시다는 예언 성취가 담겨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창세기 3장 15절의 최초의 메시야 예언의 말씀과 같은 맥락의 예언 말씀입니다. 이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성경 전체를 볼 때에 단 한 사람만이 ‘여자의 씨’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머리를 상하게 할’ 이라는 예언은 사탄의 힘을 부수는 메시야 사역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4장 4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고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말씀합니다.
예수님 탄생 2,000년 전 경에,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 지역에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의 후손을 통하여 메시야가 나타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17) 또한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의 12아들 중 유다지파의 후손에서 메시야가 출생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다지파의 후손인 이새의 아들 다윗의 후손 중에서 메시야가 태어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삼하7:12-16, 렘 23:5)
메시야 출생에 관한 예언은 처녀에게서 출생하리라는 예언뿐만 아니라, 미가서 5장 2절에는 이 세상의 여러 땅 중에 아주 작은, 1,000명도 살지 않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다는 출생 장소 예언이 나옵니다. 예언대로 요셉과 마리아가 그곳에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호적 하러 그 곳에 갔다가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우연의 일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 두 가지는 우연의 일치가 있을 수 있지만 수많은 예언이 일치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구약성경에는 중요한 메시야 예언이 60여 군데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또한 대략 270여 군데의 문맥에서 메시야에 대한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구절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예언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이 예언들은 메시야가 오실 것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는 1,000년에 걸쳐 기록된 구약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예언 가운데 8개의 예언이 한 사람에게 정확하게 들어맞기 위해서는 10의 17제곱분의 1이라는 확률이 있어야 합니다. 10경분의 일이라는 확률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10경개의 동전 중 하나에 표시를 해 놓고 사람이 눈을 가리고 마구 돌아다니다가 그것을 찾을 수 있을 확률입니다. 불가능한 확률이지요. 그만큼 수많은 예언이 정확히 한 사람에게서 이루어진 경우는 예수님 외에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많은 곳에 메시야 예언을 하셨고, 그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어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예언의 성취자이시며, 그분이 예언을 이루신 메시야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메시야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21절 말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3절 말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죄로 말미암아 인간 세상에 미움과 다툼과 온갖 고통과 슬픔과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오게 되었습니다. 이 죄의 문제를 누가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요즘 그 리더십이 다시 평가받는 징기스칸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세종대왕이 해결해줄 수 있습니까?
석가, 공자, 마호메트, 소크라테스, 세계의 많은 현자들의 가르침은 훌륭합니다. 귀담아 듣고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자 메시야가 되지 못합니다. 죄의 문제의 근원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죄를 줄일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안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의 죄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다른 사람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사람들이 많이 모인 집 안에서 가르치시고 계신데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이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으니가 지붕을 뜯어가지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즉시 중풍병이 나았습니다. 아니, “네 병이 낳았느니라.”라고 말씀해야 하는 데, 왜 죄가 사하여졌다고 말씀하십니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병의 원인이 죄 때문이고, 예수님께서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 사함의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이시며,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메시야이시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주장은 신약성경의 복음서, 즉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수없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오늘 본문 말씀에, 처녀 잉태 예언이 성취되었고,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이름의 뜻 즉,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다는 말씀과, 이사야서의 예언의 말씀대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뜻,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도덕적으로 훌륭했다든지, 심오한 가르침을 주었다든지 하는 일반 세상 사람들의 평가를 뛰어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얼토당토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은 거짓말쟁이라, 종교 사기꾼이라고 말합니다. 심한 사람은 예수님이 미치광이라고 말합니다. 정신분열환자였다고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쏙 빼버리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너져 내립니다. 의미가 없습니다.
조쉬 맥도웰은 저서 [목수 예수]라는 책에서 “그는 거짓말쟁이인가?” 질문을 하면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주장을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서 거짓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면서 의도적으로 그의 제자들과 주변 인물들을 속인 것입니다. 그가 거짓말을 했다면, 그는 또한 위선자이기도 합니다. 자신은 지독한 거짓말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직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더 나아가서 그는 미치광이이기도 합니다.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자신에게 맡기라고 강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거짓을 말했다면, 그는 또한 악마의 화신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결국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은 그가 매우 어리석은 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렇게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존재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어찌 좋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단순히 위대한 도덕 선생으로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던지, 아니면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던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결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인간들을 구원하러 오신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구세주로 믿던지, 아니면 거짓말쟁이요, 정신이상자처럼 취급하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는 생명을 주러왔다.” 이런 말씀을 믿든지 거짓말이라고 하든지 선택해야 합니다.
C. S. 루이스라는 캠브리지 대학교의 교수이며, 세계적인 석학이며, 지성인의 대표입니다. 한 때 예수님을 인정하지도 믿지도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택하였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그를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믿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못 잡아 죽여서 안달이 났던 사울이 예수님을 빛으로 만난 후, 왜 그렇게 180도 변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증거 하게 되었을까요? 왜 예수님을 만난 세리 삭개오가 삶이 변했으며,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과의 잠깐 동안 대화하고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증거했을까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로마의 군병들의 그 로마가, 그토록 기독교를 탄압하고 박해하여 수많은 신앙인들을 원형경기장에 잡아다가 맹수의 밥이 되게 하고, 화형을 집행할 때에,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왜 신앙을 버리지 않고 기꺼이 죽음을 맞으면서 찬송하며, 환희에 찬 얼굴로 순교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핍박과 박해하던 로마가 나중에 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을까요?
세계 곳곳에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변화를 받았습니다. 도둑질하던 사람, 살인했던 사람들이 변화를 받았고, 알코올중독자들이 치유를 받았고,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자신의 영혼이 병들어 있던 사람들이 변화되었습니다. 노예를 잡아다가 팔던 사람이 변화하여 405장 찬송 가사를 만들었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창조를 믿고, 동정녀 탄생을 믿고, 수많은 성경의 기적들을 믿고, 과학적으로 그것이 가능하다는 학문적 입장을 증거 하는 창조과학회를 왜 만들었을까요? 그들이 똑똑하지 못해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마음에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이시며,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에 소망이 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성취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 성취를 보고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 하나님의 예언이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예언이 이루어질 때에 놀라지 말고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이루어진 예언을 분명히 믿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루어질 예언을 믿고 준비해야 합니다. 앞으로 남은 예언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의 예언이 남아있습니다. 성탄을 준비한다는 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예언은 성취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역사입니다. 인류의 역사의 방향은 하나님의 예언의 완성으로 가고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이 예언자의 예언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었고, 그것이 자기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진실 되게 성경의 예언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을 통해서 위대한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탄의 신비
마 1:18-25 / 이상호 목사 / 세광교회
어제는 아주 특이한 시집 출판기념회에 다녀왔습니다. 임실에 사는 이병창목사(진달래교회 뫔수련원)가 '메리 붓다마스'라는 시집을 냈습니다. 성탄절날 절에 사는 스님이 '메리 크리스마스! 교우들에게도 평화와 안부를 전해주세요"라는 인사를 받게 되었답니다. 교우들이 우리는 석가탄일 때 무어라 인사를 해야할까요? 하는 토론이 벌어져 '메리 붓다마스!'라 하면 되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시집 제목부터 색다른 출판기념회는 내용 또한 이채로웠습니다. 창과 장단이 있고, 춤과 노래가 있었으며 시와 관련하여 관계된 사람들이 직접 한 편씩 낭송하는 시낭송회로 이어졌습니다. 저 역시 '양지'라는 필명을 얻게되어 참석하고 왔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성탄이 다가옵니다. 그동안 성탄의 주연은 언제나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성탄을 주제로 한 명화를 보면 어머니는 온화한 모습으로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요셉은 곁에 서 있거나, 아예 등장하지 않은 작품도 있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아버지 요셉이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요셉은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고(마 1:19), 정조가 분명한 사람이고(마 1:25), 책임감이 강한 가장이었습니다(마 2:14, 21).
성경은 성탄을 예비한 또 한 사람의 아버지 사가랴를 소개합니다. 아들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어둠의 시대를 밝힐 등불을 예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들의 출생을 맞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가랴의 찬가(눅 1:67∼79)는 하나님이 열어가시는 구원의 역사를 노래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무심했습니다. 성탄을 기다리며 우리는 믿음의 아버지들 속에서 신실함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2월 25일 성탄절이 공식적인 교회절기로 교회력에 제정된 것은 354년에 로마 교회의 리베리우스 교황에 의해 제정되었을 뿐, 성경에는 그 날짜가 없고 오히려 12월이 아니라 초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12월 25일은 절기상 동지(冬至)와 가까운 날로서 로마에서는 농사의 신을 경배하는 축제가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빛이라 하셨으므로 태양에 비유되어 비록 근거는 불신자들의 민속종교에 있었으나 좋은 면만 받아들여서 이 날을 주의 탄생일로 삼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곧바로 1885년부터 성탄절을 지켜지게 되었습니다. 성탄의 성경적인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성도들은 제대로 알고 이 시즌을 지내야 할 것입니다.
1. 예수님의 탄생은 성령으로 신비한 탄생입니다.
성령은 불신자가 모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탄생하신 예수를 제대로 알 리가 없습니다. 모르고 성탄을 축하한다는 말은 거짓말이 됩니다. 종교의 한 문화적인 축제로 알고 술마시고 노래하고 노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의 성탄은 성령으로 이루어진 지극히 신비한 사건이었습니다.
18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20절,'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그러므로 예수의 탄생은 여러 타종교의 교주들이나 보통 인간들의 출생과는 전혀 근본적으로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믿음이 건실한 집안의 딸 마리아가 경건한 요셉과 정혼하고 아직 동거하기 전에,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성령으로만 가능한 신비한 사건입니다.
정혼(약혼)한 상태는 법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약혼보다는 더 엄숙한 관계였고, 간음한 일 없이는 결코 파혼할 수 없는 사실상의 기혼 상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19절에, 요셉과 마리아의 둘 사이를 남편과 아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략 1년 정도의 정혼 기간을 가지는데, 바로 그러한 상태에서 남편이 사망하면 그 여자는 자동적으로 과부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엄청난 상황 앞에 마리아도 요셉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의 말씀으로 성령으로 잉태하심을 믿고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탄생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역사적으로 내 삶의 상식에서 혹은 도덕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성령으로 우리를 감화하시면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을 잉태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감화가 없이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참된 믿음을 가지려면 마리아와 요셉같은 긴장과 고민이 따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성령의 신비적 사건인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도 일상의 생활에 엄청난 충격이어야 합니다. 고민과 긴장이 따라야 정상입니다. 상식으로 예수를 이해하지 말고 성령으로 믿어지시기 바랍니다. 믿을 때에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2. 예수님은 왜 오셨습니까?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뚜렷합니다.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했을 때에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성령의 잉태와 함께 아이가 세상에 탄생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를 함께 일러주었습니다.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문화로만 아는 자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진정한 이유를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우리들의 죄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불교에는 자비는 있으나 영생은 없습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부활 영생 약속을 위해 오셨습니다.
요 6:38-39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저희 죄에서, 여기서 죄(하말티아)란 하나님의 법에서 떠나 올바른 행위의 과녁에서 빗나간 모든 부도덕과 죄의 행위들을 총칭합니다. 이 죄악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수아란 발음에서 유래했다고는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고, 당시에 예수란 이름을 가진 자들이 성경에 더러 나옵니다. 구원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과연 내세의 천국과 지옥을 알고 예수의 성탄을 즐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런 예수의 존재로 안다면 술마시고 즐기는 크리스마스가 안될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 죄를 위하여 오신 구속의 제물이십니다.
알고 보면 엄숙하게 받아들이며 그의 성탄을 경건한 마음으로 맞이해야 하는 우리들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다리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 앞에서 행한 감사의 경배를 보십시오. 지금 사람들이 떠들고 노는 수준인가! 경건한 자세로 구주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3. 또한 예수님은 역사의 중심으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구약 성경에서 예언된 대로 출신 가문과 처녀 잉태 그리고 정확한 장소까지 예정된 탄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신 것은 그를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역사적인 대 변혁을 주도하게 하셨습니다.
역사는 주님이 오신 이전과 이후, 서기 전, B.C와 서기 후, A.D를 갈라놓는 역사의 중심이 되시고 주도자로 부상되셨습니다.
예수를 영접하게 된다면 삶의 전 생애의 목표와 방향이 혁명을 가져와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는 지금까지 세상 속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본문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면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바울은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탄생을 기릴 때, 무엇이 달라져야 합니까? 사람 사이에서 즐거움이 찾고 겨우 육신적으로 연약한 자를 돌보는 정도에서 성탄의 바른 의미를 찾을 것이 아니라, 그것도 있어야 하지만 진정한 변화! 진정한 삶의 역사적 의미가 변하는 대 역사적 큰 사건의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성탄은 곧 우리들의 새로운 탄생, 곧 중생의 시대를 가져와야 합니다. 예수는 그 귀한 목적으로 이 세상에 탄생하셨는데, 우리는 아무런 변화가 없이 전혀 새롭게 태어나는 거듭나는 사건이 없다면 백번 성탄절이 돌아오면 뭐하겠습니까?
아무쪼록 이번 성탄절기는 성탄의 신비를 깨닫는 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새롭게 거듭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귀한 목표대로 우리 속에 예수님을 잉태하고 새 시대를 열 수 있는, 그래서 진정한 새해 2023년도를 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원자 예수
마 1:18-25 / 정근두 목사
저희 교회에 나오신 이웃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신앙생활은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구원자로 보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생생한 이야기를 방금 읽었습니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옛 약속을 기록한 구약성경과, 새 약속이 담긴 신약성경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펼쳐서 맨 처음 나오는 책이 마태복음입니다. 마태가 쓴 이 복음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와 누가가 기록한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같은 사건이지만 상세한 부분은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요셉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고, 누가는 마리아의 관점에서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한 쌍의 연인들이 사랑이 무르익어서 결혼을 하게 되면, 남자는 남자대로의 이야기가 있고, 여자는 여자대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데이트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금씩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의 입으로 전달된 이야기를 같이 들어봅시다.
대개 유대인은 정식 결혼을 하기까지 세 단계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첫째는 약혼입니다. 당사자들이 어릴 때에 약혼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같은 동양인이어서 그런지 옛날 우리 풍습과 비슷합니다. 부모끼리 마음이 통하면 ‘자네 딸하고 우리 아들하고 나중에 결혼시키자’고 말하며 약혼을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중매자가 나서서 약혼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약혼을 하는 과정이 있고 나서 정혼 절차가 있습니다. 약혼 당사자들이 결혼할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에 이제 약혼을 재확인하는 절차입니다. 이 때 당사자들 중에서 남자나 여자나 원치 않으면 그 약혼은 파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정혼을 하게 되면 남편과 아내로 불립니다. 결혼식은 아직 안 했지만 ‘아내’와 ‘남편’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그 때부터 부부가 되지만 실제로 부부로 지내지는 않습니다. 이 정혼단계를 거친 뒤에, 일 년이 차면 정식 결혼을 합니다. 정혼한 지 일 년이 되면 아내를 데려옴으로 정식 결혼이 성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는 잠자리를 같이 하는 부부로서의 모든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와 요셉은 정혼한 사이입니다. 그래서 19절은 “그 남편 요셉”으로 부르고 있고 20절에는 “네 아내 마리아”로 부르고 있습니다. 몇 달만 있으면 결혼할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이 오늘 우리가 읽은 사건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결혼을 하셨습니까? 중매입니까? 아니면 연애입니까? 그것도 저것도 아닌 절충식입니까? 어떤 식으로 결혼을 하셨든지 요셉의 입장을 생각해보십시오.
정혼을 하고 결혼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남편 요셉이 겪은 충격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럴 리가 없어 마리아가 어떤 여자인데’ 그렇지만 날이 다르게 나타나는 아기를 가진 표시는 요셉을 고민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마리아와 잠자리를 같이한 적이 없는 요셉은 마리아의 부정(不貞)으로 밖에 결론 내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꿈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현실 앞에서, 요셉이 마리아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의 호의는 가만히 관계를 끊는 일입니다. 드러내지 않고 파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혼자 고민하면서 은밀히 이 정혼 관계를 파기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너무나 생생한 지시를 꿈에 받습니다.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니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20~21절)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났을 때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꿈이지만 너무나 분명한 천사의 지시였기에 요셉의 고민은 그 순간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밀물처럼 밀려드는 기쁨과 확신이 요셉을 찾아 왔습니다. 확신 가운데 주의 천사의 분부대로 했습니다.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다만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동침치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오신 이웃 여러분, 여기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기는 예사 아기가 아닙니다. 그는 인류에게 약속된 구원자이십니다. 죄 가운데 고통 하는 인류에게 보낸 하나님의 구원자이십니다.
처녀에게서 잉태됨으로서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라는 예언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예수님이 태어나기 수백 년 전에 이스라엘의 한 선지자 이사야는 우리의 구원자가 처녀에게서 한 날 잉태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가 처녀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사람들 사이에서는 남자와 관계를 하지 않고 여자가 아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을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아의 표로서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처녀의 몸에서 잉태되셨습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그래서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되풀이될 수 없는 일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잉태한 일 외에는 여자가 혼자서 아기를 가졌다는 것은 항상 의심받아야 합니다.
그가 보통 사람과 다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이 기적을 가능케 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마리아로 하여금 아기를 갖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거듭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8절을 보면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다시 20절을 보십시오. “. . .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했습니다.
물론 오늘 처음 초대받은 여러분으로서는 쉽게 믿기지 않는 사건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은 시대마다 이 진리를 고백합니다.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분이십니다.
믿어지지 않는다고요? 당연하지요! 당사지인 마리아 자신도 처음 이 소식을 전달받았을 때에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 1:34)라고 오히려 따지고 물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천사가 대답하기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그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눅1:36) 이 천사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기독교인이 무엇을 믿는지를 밝힌 사도신경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고 이 진리를 분명히 고백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처녀 마리아에게 이 아이가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성경책 맨 첫 구절을 믿으면 이 사실도 믿을 수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처녀의 몸에서 아이를 가지게 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령으로 잉태된 그 아기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을 함께 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예, 하나님이 보낸 특별한 구원자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특별한 방법으로 그 아들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그 시작부터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구원자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 약속을 지키셔서 아기가 태어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태어난 아기를 죽이려고 하는 헤롯왕의 손으로부터 구출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동일한 성령님의 역사가 여러분의 마음에 역사할 때에 의심이 사라지고 전능자 하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잉태된 순간부터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영의 역사였습니다.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역사할 때에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의심을 쫓아내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게 하고 천지를 창조하신 그 분을 아버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합니다.
신앙의 참 의미는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기원을 믿을 때 깨달아집니다. 예수님이 초자연적으로 마리아의 태속에서 잉태되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삶을 여러분은 하나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일 수 있습니까? 어떻게 사람이 물위로 걸어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나사로야, 나오너라”는 한 마디에 죽은 지 나흘 된 청년 나사로가 살아납니까? 예수님의 성령잉태를 믿어야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하신 기적들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가 하신 일뿐만 아닙니다. 그의 주장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내세운 주장을 수납할 길이 없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 이런 주장을 하신 그를 받아드리기 위해서는 그의 초자연적인 잉태를 믿어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면 그는 결코 인류의 사대 성인(聖人)이 아니라 희대의 사기꾼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오신 것은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구원이란 인간이 아닌 오직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질 때에만 안전합니다. “그녀에게서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니라” 이 천사의 설명 앞에 요셉의 마음은 열렸습니다. 그래서 분부대로 잠에서 깨어나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드렸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다음 아들이 태어나자 지시받은 대로 그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왜 예수라고 지었을까요?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예수라는 이름을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 그 복된 이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이름의 뜻은 ‘구원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 분은 구원자로서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부터 건져내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구주로서 믿어지기 이전에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수긍이 가야 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하나님의 뜻을 개의치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떠나서 자기 길을 걷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고 한 해 한 해를 살아온 것이 죄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의 근원입니다.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온통 쏟아놓지 않을 때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거리에서 노작거리는 것이 죄가 아니라 인생이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지 아니할 때 그것을 성경은 죄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십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를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모든 형태의 삶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마음을 쓰지 아니할 때 그것이 죄입니다.
그것이 죄라는 것을 발견하기 전에는 여러분은 항상 자신을 볼 때에 여러분 스스로 만족할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항상 만족할 것입니다. 언제나 그럴듯해 보일 것입니다.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온 마음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셨습니까? 이 죄악된 삶에서 건지시는 분으로 예수님은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해 보셨습니까? 이웃을 자신처럼 돌보지 못한 삶이 죄인의 삶입니다. 항상 제일 좋은 것은 내 것으로 먼저 챙기는 것, 그것이 죄인의 삶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본래적인 모습에서 떠난 삶입니다.
서로 돕고 아끼고 살도록 하나님은 인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좋은 것 있으면 자기 호주머니에 챙기기 바쁜 것이 죄인이 하는 짓들입니다. 더불어 공동체를 만들어 살도록 의도하셨습니다. 하지만 담을 쌓고 내 이익을 내세우는 것이 죄인의 삶의 모습니다.
한 마음으로, 함께 살아가도록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하셨습니다. 서로가 서로 돕는 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하며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며 사는 삶의 방식은 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참된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인정하고 주님께 나오면 용서함을 받습니다. 그 때에 예수 그 이름이 복된 이름으로 여러분의 귀에 들릴 것입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메인 죄의 사슬에서 여러분이 벗어나시기를 원하십니다.
스스로의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이웃도 없이 사는 여러분에게 새 삶을 주시려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자만심의 노예가 되어서 사는 인생을 구출하시려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섬길 하나님도 모르고, 찬양할 하나님도 없이 사는 여러분을 참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예수께서는 여러분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 이름은 여러분을 또한 여러 가지 죄의 결과에서부터 건져내십니다. 여러분의 방황하는 삶에 안정을 주시는 분이 예수 그 분이십니다.
죄로 인해서 불안한 삶에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 그 아들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의미 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참 삶의 의미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 분이 오셨습니다. 허무한 삶에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 분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를 깊이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부디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여러분의 삶에 모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좋은 선물들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의 복된 구원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에 여러분 모두가 같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제 조용히 눈을 감고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특별히 잉태되신 분이요 그러기에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약속된 구원자라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잉태되고 특별한 복을 받은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우리의 구원자의 이름을 살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십니다. 우리를 죄악된 삶의 굴레에서 구출하시기 위해서 그는 오셨습니다.
스스로의 죄악된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이웃도 없이 사는 우리를 해방시키려 오셨습니다. 거기는 만족이 없습니다. 거기는 감사가 없습니다. 거기는 평안과 기쁨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의도하신 보람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감사와 찬송이 있는 새로운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위해서 보내신 구원자 예수를 영접하십시오.
구원자 예수님을 영접하면 방황하는 삶에 안정을 주십니다. 불안한 삶에 평강을 주십니다. 의미 없는 삶에 새로운 의미를 주십니다. 허무한 삶에 하늘의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구원자 예수님을 영접하면 여러분의 관계가 새로워 질 것입니다. 서로가 소중한 이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돌봄의 대상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웃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풍성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의 결단을 호소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를 영접하십시오.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서 마련한 최고의 선물 구원자 예수를 모시기만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좋은 것들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껏 살아온 것을 고집하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지금 돌아서기만 하면 만사가 달라집니다. 죄 사함과 평안을 누리고 사는 것이 황홀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한 번의 선택은 이 세상과 영원한 내세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구원자 예수님을 만나보십시오. 그러면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성령으로 잉태되고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님을 모시십시오. 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냅니다.
이제 마지막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를 만나면 생명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를 만나면 사랑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가장 놀라운 선물이신 예수님을 만나면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주저하지 마시고 함께 기도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질 것입니다. 이제 저를 따라서 한 마디씩 기도합시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 구원자 예수를 소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구주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구원자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모셔 들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심을 감사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 죄 값을 담당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를 다스려 주시고,/ 나를 주님이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구원과 사랑의 이름, 임마누엘
마태복음 1:18-23 / 배 혁 목사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주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그 과정부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곧 성령으로 잉태하게 됩니다.
마리아의 임신 사실은 그녀와 약혼한 요셉에게는 아주 당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임신한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아닌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마리아와 헤어지고자 했습니다. 이 때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셔서, 마리아가 임신한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요셉은 마리아와 헤어지지 않고, 그 아이를 낳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천사는 마리아나 요셉 모두에게 그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미리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육신적인 부모가 재어 준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그 아기의 이름을 알려 주심으로 아기 예수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려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라고 하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여호수아’입니다. 그 뜻은 “여호와는 도움이시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 ‘여호수아’ 라는 이름이 후에 ‘예수아’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라는 히브리 이름이 예수님 당시에 헬라어로는 ‘이에수스’ 입니다. 한국말로 ‘예수’는 ‘이에수스’를 번역한 말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거리에서 ‘이에수스’라고 부르면 몇 사람이 동시에 돌아 볼 만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의 사람들이 얼마나 여호와의 구원을 소망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소원에 응답하셔서 구원자 예수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요셉에게 나타난 주의 사자는, 요셉에게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말한 후에, 또 다른 이름 하나를 알려 줍니다. (그 이름이 무엇인가요?) 그 이름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의 또 다른 이름인 “임마누엘”입니다.
이사야 7:14절에,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서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처녀에게서 한 아이가 태어나서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은 임마누엘과 관련되어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임마누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임마누엘’ 은 히브리어인데, ‘임’은 ‘함께’ (with), ‘마누’는 ‘우리와’ (us), 그리고 ‘엘’은 ‘하나님’ (God)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건이요, 그것이 곧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여러가지 정의를 할 수 있겠지만, 오늘 말씀을 보았을 때에, 진정한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상태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당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알려 주시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케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와 함께 하시며 그를 복되게 하시고 구원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가는 야곱의 모습이 나옵니다. 야곱은 그때 자신이 철저하게 혼자이고 절망적인 상태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꿈 중에 야곱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창 28:15)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야곱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경험하는 인물이 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의 구원은 사람이나 물질의 소유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그 상태는 구원의 상태가 아니라 아직 죽음의 상태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만날 때에 그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구원자를 찾습니다. 가까운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더 심각한 상태이면 911을 찾기도 합니다. 돈이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여기고 돈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고, 그 사람들 중에 자신을 어려움에서 구해줄 사람들이 많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진정한 구원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곧 죽어서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은 곧 죽어서 하나님이 안계신 영원한 죽음,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구원받는 삶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데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죄인된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구원을 이루고자 열심을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민족보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밤낮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날마다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심으로 광야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함을 피부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는 것을 대단한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자신들을 광야로 데리고 와서 고생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당할 때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가나안 땅이 아니라,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곤 했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애굽 신들에게 돌아가겠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그들에게 구원이 됨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지도자 모세는 달랐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구원은 하나님과 함께 하심에 달렸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중재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하나님은 그 일로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하지만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수도 있고, 진멸하실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진노케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멸할까 하여 그들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모세는 출애굽기 33:15절에, “주님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옴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비록,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서 그들에게 진노하시지만, 그래도 그 백성들이 구원받을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에 가능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을 간구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도록 그분을 모시고, 그 뜻에 순종하면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아기 예수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요한복음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지만, 그 근본에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땅의 사람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함께 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이 세상 사람들을 만드신 것은 그들과 사랑을 나누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동산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시지만, 이를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와 함께 하시고자 하셨지만, 그들과 멀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숨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후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숨게 되었습니다.
제가 고향 교회에서 믿음생활 할 때에, 한 권사님께서 자기 아들이 어디갔는지 없어졌다고 걱정하시면서 찾으셨던 일이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께서 아이를 찾지 못하시고, 집에 들어오셔서 누우시려고 이부자리를 장롱에서 꺼냈는데 그 아이가 그곳에서 자고 있더랍니다. 그 아이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엄마한테 잘못한게 있어서 혼날까봐 장롱안에 숨어있다가 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사람끼리도 갈라지게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함께 있지 못하도록 갈라 놓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멀어지는 삶을 살아가도록 합니다. 곧 구원과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 목적… 죄짓게 하는 것은 갈라놓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소홀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서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죄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끝내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시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시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 성탄의 계절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더욱 경험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는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을 통해서 확증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임마누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너희들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데, ‘파라’는 ‘곁에서’, 그리고 ‘클레토스’는 ‘훈계하다. 위로하다. 돕다.’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곧 성령님은 우리 곁에 함께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하셨던 일들을, 그대로 행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도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여전히 임마누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어둠의 죄의 간격을 넘어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주님의 구원의 구원을 이땅에 이루셨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순서입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이 성탄의 계절에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짐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함으로, 주님과 함께 하기를 기뻐하며, 주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와 임마누엘
마 1:18-25 / 배영진 목사
우리 교회는 매년 성탄절에 우리 vip들을 초청하여 함께 축하잔치로 진행합니다. 올해도 매우 중요한 분들, vip들이 이렇게 함께 예수님 생일잔치를 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사실 성탄절은 젊은이들에게는 가장 낭만적인 씨즌이고, 우리 어린아이들에게는 멋진 선물 받는 날로 되어있습니다. 유치원에서 성탄절 하면 누가 생각나요? 물어보니까 어린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산타클로스요! 메리크리스마스는 산타 할아버지가 오시는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이 춥고 각박한 세상에서 기독교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가족끼리 연인끼리 모여 즐거운 행사를 하고 선물 주고받고 이런 것이 더없이 좋다고 생각도 합니다. 산타 할아버지도 다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좀 오늘 특별한 뜻이 뭔가를 알고 모였으면 합니다. 성경은 2천년 전에 우리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은 사실 좀더 깊은 뜻이 있다고 말합니다. 산타나 양말이나 낭만이나 선물보다 더 깊은 뜻은 뭐냐? 오늘 두가지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나사렛의 목수 요셉에게 메시야 탄생 메세지를 전해줍니다. 그리고 두 개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뭐죠? 하나는 예수이고 또 하나는 임마누엘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름 두 개만 기억하시면 오늘 진정한 성탄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첫째 이름은 예수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무슨 뜻인가? 21절에 천사 가브리엘이 요셉에게 말합니다. 네 약혼자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텐데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 사실 요셉은 아직 마리아와 결혼을 안한 상태였고, 마리아는 지금 처녀입니다. 그런데 처녀 마리아가 임신을 한 거예요. 요셉은 엄청 고민했습니다. 그 아기가 내 아기가 아니예요. 같은 동네 나사렛에서 다 알고 지내는 사이인데, 이 사실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마리아의 입장을 고려하여 조용히 파혼을 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들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아들을 낳으면 그의 이름은 예수!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뭐냐? 그가 자기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죄에서 구원한다!
다시 말해서 왜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야 했는가?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셨는가? 그것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려고’입니다. 사람이 죄에 빠져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두 종류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내가 죄인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죄인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죄인이다 이것을 인정치 않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것인가 부인할 것인가 이 문제만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완벽히 하나님의 법을 지킬 능력이 있었다면 예수님이 굳이 이땅에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은 이땅에 33년을 사셨는데, 마지막 3년을 공생애라고 합니다. 그 3년동안 예수님이 한 곳에 목표를 두고 사셨습니다. 한번도 시선을 뗀 적이 없습니다. 뭔가? 십자가입니다. 나는 십자가 위에 올라가서 조롱받고 모욕받고 침뱉음 받고, 못박혀 죽는다, 이 목표에서 흔들리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탄절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서 모든 고통을 받으신 후에, 마지막으로 십자가위에서 하신 말씀이 뭐냐하면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 뭘 다 이루었다는 뜻인가? 우리 죄값을 그분이 대신 지불하시는 일을 다 성취했다! 우리가 죄인인데, 죄를 지으면 죄값을 치르잖아요? 그 죄값을 예수님이 대신 치르시는 일이 십자가였어요. 그 일을 하러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죄인인데 예수님이 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대신 죄값을 치르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나를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이 오신 날이어서 기쁜 것입니다.
둘째로 23절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한번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 이순간에도 우리와 같이하심을 뜻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임마누엘, 나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옛날 구약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텐트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나도 너희와 함께 한다 라는 뜻으로 성막, Holy tent를 만들어 거기 함께 계셨어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고 사니까, 하나님이 나도 너희와 함께 하리라 그래서 성전을 만들고 거기 거하셨어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내가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오신 것은 두가지 이름에 뜻이 있습니다. 내 죄값을 대신 치르시고 나를 깨끗이 해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라는 이름의 뜻입니다. 임마누엘은 뭐냐? 내 삶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돌보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낙심하고 우울하고 좌절하고 힘들고 포기하고싶고, 다 놓고싶고, 살고싶지 않고, 내가 도무지 방법이 없을 그 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무개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포기하지 마, 절망하지 마! 내가 있다! 이것입니다. 그는 풍요로우신 분이지만 우리의 가난함을 인하여 가난하게 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시려고! 그래서 우리의 가난함에 부요함을 더하여주시려고, 결국 예수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임마누엘이지요.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께 이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분은 왜 오셨는가? 두가지 이름, 예수!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임마누엘! 우리 인생의 어려움과 연약함 중에 함께해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구원은 죄 문제를 해결해줍니다. 우리의 절망과 좌절을 이겨내게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불후의 명곡에서 에일 리가 윤복희의 여러분을 불렀습니다. 그 가사를 이제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힘들고 거친 인생에 함께해주시려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예수 탄생의 구속사적 의의
마태복음 1:18∼2:6 / 손상률 목사
온 세계 최대의 명절인 성탄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죄와 죽음 아래 얽매인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가 성탄을 축하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충만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다윗의 자손 요셉에게 나타난 천사 가브리엘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하고(마1:21), 나실 아기의 이름과 그 뜻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구원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우연히 된 일이거나 갑자기 만들어진 사건이 아니고 주권자 하나님의 원대하신 경륜에 의하여 되어진 일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경영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시조 아담이 범죄한 이후부터 자기 죄로 멸망 받게 될 인간을 구원 하고자 하는 그의 계획을 발표하였습니다(창3:15). 따라서 지구상에 전개되는 인류의 역사는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구속사(救贖史)를 빼어 놓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하신 성탄절의 의미를 단순한 이웃 사랑과 자기 희생의 박애 정신으로만 이해 하려는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이르는 성경 계시를 통하여 그리스도 탄생의 구속자적인 의의를 되새겨 보면서 하나님의 의도에 맞는 성탄 축하를 하여야 하였습니다.
Ⅰ. 동정녀(童貞女) 탄생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 경영에 있어서 최대의 이벤트(Event)는 아무래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사건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요1:14).
(1) 육신을 입고 오신 것.
여기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의 도리를 예언하면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여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사7:14). 이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세상 속에 들어오는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1:18).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으로서 그대로 계셨더라면 역사 속에 들어올 수 없었고 사람들과 상종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의 실제는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필요에 의하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몸을 가지고 세상에 나게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2:6-8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라고 하였습니다.
(2) 영원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그의 하나님이신 본래의 성품이 훼손되거나 제한되지는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13:8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과 영원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육신의 몸으로 세상에 계실 때도 그의 신성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그대로 행사되었습니다. 그것은 전지성(全知性) 전능성(全能性) 편재성(遍在性)을 말하는데, 전지성은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1:48)고 하신 것처럼 보지 않고도 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능성은 그의 행하신 이적과 능력들이 증명합니다. 그리고 편재성은 제자들이 문을 닫고 앉아 있는 방의 가운데 서서 계셨고(요20:26), 같은 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 가시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셨습니다(눅24:15).
(3) 동정녀 탄생의 신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신경」을 통하여 "그 외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심과 동정녀 탄생은 기독론의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 시점이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定婚) 한 상태였을 뿐 동거한 일이 없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잉태하였다는 말을 들은 요셉은 황당하였을 것이고 이로 인하여 고민하였습니다(19-20절). 이 때 천사 가브리엘이 요셉에게 현몽하면서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하고 의문을 풀어 주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편 당사자인 마리아에게도 이와 같은 일이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하고 거부하였으나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에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승복하였습니다(눅1:34-38).
만일 예수님께서 동정녀의 몸이 아닌 자연법에 따라 탄생하셨다면 그의 신성과 무죄성은 보존될 수 없었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완전한 구주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9:28에는 예수님을 죄와 상관없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Ⅱ.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일
B. C 8세기 선지자 미가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하고 그 때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미5:2).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헤롯 왕궁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하고 물어오자 헤롯의 명을 받은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구약의 이 성경을 찾아내고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였음을 일러주었습니다(마2:1-6).
누가복음 2:1-5에는 이 때 가이사 아구스도가 전국에 호적령을 내렸는데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그의 정혼한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에 갔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마리아는 해산할 날이 가까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1) 베들레헴의 역사성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가장 먼저 이름이 떠오르는 지명은 「베들레헴」입니다. 그곳에는 A..D 4세기 콘스탄틴(Constantinus) 황제의 모후인 헤레나(Helena) 여사가 세운 예수님 탄생 기념교회가 있는데 지금도 세계도처에서 모여오는 성지 순례 객들에게 예수님 탄생의 유적지로 각광을 받는 곳입니다.
이곳 베들레헴은 야곱의 아내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난산 끝에 죽어 장사지낸 곳입니다(창35:19). 이스라엘에 왕국이 수립되기 전 엘리멜렉의 가족이 살았던 곳이었고(룻1:1), 다윗의 조상이 된 보아스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돌아온 후 보아스와 결혼을 하여 다윗 왕가를 탄생케 하였는데 룻기 4:21-22에 "…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곳 베들레헴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로써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몰락해 버린 엘리멜렉의 가정이 보아스로 인하여 회복되는 내용입니다. 룻기 2:20에 "…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기업을 무를 자"란 「잃은 것을 회복시켜 주는 자」 또는 「구속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말씀은 레위기 25:25에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명시된 기업을 무를 자의 법을 「고엘」( )이라고 하는데 이 원리가 대가를 지불하고 회복시켜 주는 제도로써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교리를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2) 거룩한 약속의 성취
마태복음 1:1이하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하고 예수님의 족보를 이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을 부르사 선민의 조상을 삼으시고 그의 후손 가운데 인류의 구주가 나실 것을 암시하였습니다(창22:18). 또 그것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유다 지파요 다윗의 자손이라고 명시하였습니다. 창세기 49:10에 보면 야곱이 이스라엘 자손의 장래를 예언하면서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홀"이나 "치리자의 지팡이"는 왕권을 말합니다.
이 예언대로 유다 지파에서 다윗이 왕으로 세움을 입었고 그 뒤를 이어 자자손손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다윗의 왕통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사11:1-2).
이처럼 베들레헴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그 곳 출신 다윗의 왕위 계승이라는 구약 계시의 내용으로 볼 때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것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성취된 것을 증거합니다.
Ⅲ. 성탄과 관련된 사건들
복음서 가자들 가운데 마태와 누가는 제각기 다른 각도에서 예수님의 탄생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가령 마태복음에는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고 나신 왕을 찾아서 예루살렘에 왔다고 하였습니다.
한편 누가복음에는 베들레헴 들녘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천사들의 말을 듣고 외양간으로 찾아가서 아기 예수께 경배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대표적인 설화입니다.
(1) 박사들의 방문
마태복음 2:1-2에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별"이란 그리스도의 출현을 나타내는 계시의 별임을 의미합니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 메소보다미아 지역 출신인 이 박사들은 하늘의 별을 보고 천문과 시대를 예언하는 점성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라고 한 민수기 24:17의 계시를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하고 나신 왕을 찾았습니다. 당시의 헤롯왕은 박사들의 방문과 뜻하지 않는 왕의 출현을 들었을 때 매우 충격을 받았거나 당황했을 것입니다. 이방인인 그 박사들이 하늘에 나타난 별을 보고 그 주인공이 왕이라고 말한 것도 우연한 일일 수 없습니다. 계시록 22:16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광명한 새벽 별"이라고 하였습니다. 계시록 19:16에는 "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11에 보면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2:9-10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2) 천사들의 성탄절 메시지
누가복음 2:8-9에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천군 천사의 출현에 두려워 떨고 있는 목자들에게 천사는 크리스마스 메시지를 발표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10-11에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마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세상에 가장 먼저 알려주고 천사들은 그 성탄의 소식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이야말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어나 종족이나 국경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Good News)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죄와 죽음 아래 놓여 있는 모든 사람에게 구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마1:21).
(3) 천군들의 새벽송
누가복음 2:13-14에 보면 "홀연히 허다한 철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그 시간 베들레헴 하늘에 철군과 천사가 등장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영물들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순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천군 천사는 하나님의 부리시는 영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는 일에 수종 들고 있습니다(히1:14).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내려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천군들에 의해서 이 세상에 가장 먼저 크리스마스 새벽송이 울려 퍼진 것입니다. 노래의 내용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였습니다.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역은 하나님 아버지의 구속사적 경륜을 이루어 드리는 것으로써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 뿐이니라 이 세상 인류 가운데는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 구원의 기쁨과 평강을 안겨주는 최상의 축복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성탄의 의미를 바로 알고 기뻐하심에 동참하는 모든 사람이 함께 누리는 특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성령 충만한 성탄
마 1:18-21 / 이규왕 목사
믿음이라는 말이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성경을 기록하기 이전부터 인간 관계 속에서 사용되어지던 말을 성경이 빌려 쓴 것입니다.
흔히 세상에서 사람들이 믿음을 말할 때 그 근거는 눈으로 보여 지고 귀로 들려지고 손으로 잡혀지고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어질 때 가장 신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처럼 사람들이 믿음의 절대 조건을 과학적 근거라고 말하지만 알고 보면 그 과학적 근거조차도 과학자를 신뢰하는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믿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줄기세포가 다 죽고 지금은 없다고 하는데도 황박사를 불신하는 소수보다는 다수의 국민이 황 박사를 신뢰하고 좀더 기다려 보자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대인들이 말하는 믿음조차도 과학적 결과치가 아니라 그 결과 치를 만들어내는 과학자에 대한 신뢰가 더 우선되어지고 있는 것은 이처럼 과학 세계조차도 믿음이 먼저이지 과학적 실험 결과가 먼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실 이전에 믿음이 전제되면 그러한 믿음은 맹신이 아니라 그 믿음대로 되어지는 과학적인 결과를 산출해 낸다는 것입니다. 그 같은 믿음이 바로 오늘 성경 본문에서 마리아와 요셉의 믿음인 것입니다.
1. 세리 마태의 증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와 다른 본질적인 차이는 도덕적으로 월등하거나 성품이 고상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뢰하고 있는 진리가 불신자들이 신뢰하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진리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와 더불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진리는 역사적인 사실의 일부를 근거로 청취자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부풀린 대하드라마가 아니라 철저하게 역사적 진실을 생명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되었다는 절대 진리를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신구약 성경 중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증거가 바로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1장 뿐입니다.
그것은 평소에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의 친분 관계가 어떠하였을까? 하는 것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에서 아기 예수가 어떻게 태어나셨는가 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이기도 하지만 장본인인 마리아에게서 직접 청취한 사실임에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 본문인 것입니다.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 1: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사람이 어떤 직업에 오래 동안 종사하게 되면 그 나름대로 독특한 습관이나 성격이 형성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직업이 무엇인가를 보게 되면 대강 그 사람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저자의 본래의 이름이 레위요, 직업은 가버나움 세관에 앉아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였습니다. 세리의 신분으로 예수님을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를 저자인 본인 자신이 마태복음서에 밝히고 있습니다.
(마 9: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 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이처럼 마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로마 식민지 치하에서 세리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으로 자기 집에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버릴 정도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나사렛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셔서 한곳에 정착하여 돈을 버시는 대신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오르내리시며 복음을 전하시는 일을 우선으로 하셨다면 경제적으로 무슨 여유가 있으셨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예수님이 자신을 향해 "나를 좇으라" 는 분부를 하셨을 때 망설이거나 거절하지 않고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부귀권세와 더불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일어나 주님을 좇았다(마 9:10, 막 2:14, 눅 5:27, 28)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직업을 바꾼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며 더구나 돈이 잘 벌리는 직업을 포기한다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가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 돈방석을 포기하였다는 것은 그가 돈의 가치보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가치를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결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돈과 계수에 민감한 세리라는 직업에 길들여진 마태는 매사 적당히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작은 것까지 소홀히 하지 않고 매우 세밀하게 챙기는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이 그의 기록인 마태복음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이 여러 제자들 앞에서 말씀하신 산상 보훈의 말씀을 마태복음에 상세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와 같은 마태는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열두 제자로 선택함을 받을 정도로 예수님의 신임을 받았고 예수님의 신뢰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예수님께 그에게 붙여준 이름인 마태 즉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성경의 저자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어야만 그가 기록한 마태 복음의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게 되며 성경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지 않고 그가 기록한 동정녀 탄생의 기사를 우리가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가 어떻게 마리아가 처녀로 있을 때 아기 예수를 잉태하였다는 것을 알았겠습니까? 그것은 마리아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는 특별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였던 마태는 동정녀 탄생이 자기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평소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의 자주 만남의 과정을 통해서 직접 청취한 사실을 성령의 감동을 따라 기록한 것이 바로 마태복음이며 오늘 본문인 것입니다.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오늘 우리가 동정녀 탄생을 목격하지 못했고 우리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고 믿기 어려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경험한 마리아에게서 직접 들은 증인의 기록인 마태복음을 통해서 더욱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탄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2. 의사 누가의 증언
세상에 최고라고 하는 돈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신실한 제자 마태가 기록한 동정녀 탄생의 기사가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거하는 증언하는 또 한 사람은 누가복음의 저자 의사 누가입니다.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눅 1: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의학적으로 볼 때 처녀인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잉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의사 출신인 누가는 유한한 인간은 할 수 없을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성령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음을 믿는 성령 충만한 의사였습니다.
의사의 입장으로는 동정녀 탄생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이해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누가는 자신의 지식을 내세우며 동정녀 탄생을 부인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누가복음서에 증거하였습니다.
(눅 1: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눅 1:30)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눅 1: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의사 누가가 동정녀 탄생은 인간이 주도한 일이라면 믿을 수 없지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도하신 일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심을 믿는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똑같은 말이지만 누가 말하는가에 따라 그 말에 대한 신뢰도가 좌우되어집니다. 종종 국경일에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여 메시지를 하는 경우와 국무총리나 장관을 통해 대독하게 할 때에 그 메시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동정녀 탄생에 대한 기사를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마리아에게서 듣고 마태복음에 기록한 것도 믿을 만한 것이지만 의사 출신인 누가가 누가복음에서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기록한 것을 통해 더욱 신뢰가 가는 것입니다.
(눅 1: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눅 1: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이처럼 첫 성탄인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의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렇게 탄생하신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부모의 죄의 영향을 받지 않고 거룩한 몸으로 세상에 오신 인류의 구세주의 요건을 완벽하게 갖추신 유일한 구세주임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성인군자일지라도 인류의 조상 아담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선하게 태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증거를 흔히 어린 천사 같다는 아기에게 누가 가르쳐 주지 않은 부패한 속성이 내재하고 있음을 보고 놀라고 실망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구원이 필요한 존재이지 남을 구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전에는 부모에게서 태어나지 않고 존재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부모에게서 태어나지 않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부모의 죄의 오염됨이 없이 세상에 태어나신 구세주이심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 예수님의 제자 마태와 누가복음에서 의사 출신 누가가 더불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의 배경으로는 그와 같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믿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던 시대입니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는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하신 일이라면 얼마든지 믿을 수 있고 또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3. 마리아와 요셉의 증언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에 대해서 마태와 누가의 기록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서에 나타난 마리아와 요셉의 증언이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세상 사람들과 다름이 없이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어왔던 사람입니다. 그러한 마리아와 요셉에게 난데없이 하나님이 사자인 천사를 보내어 약혼만 하고 아직 동거하지 않은 마리아에게 아기를 잉태할 것이라는 예고를 받았을 때 마리아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하는 것을 보면 마리아가 아기 예수가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었다는 말이 사실인가 아닌가 하는 진위를 판가름할 수 있습니다.
(눅 1: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이는 장본인 마리아조차도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말을 오늘 우리들처럼 믿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의 반응입니다. 마리아가 자기와 관계가 없이 임신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 그가 많은 고민을 한 것이 오늘 성경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 1: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여기서 ‘가만히 끊고자’라는 말은 요셉이 마리아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상실했다는 말로 이제 파혼을 하여 마리아가 가고 싶은 대로 떠나보내려고 굳게 결심하였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리아를 잉태하게 만든 원인 제공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요셉으로 말미암아 마리아가 잉태된 것이 아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두 사람은 남남이 되고, 마리아는 당시 문화적 배경으로 볼 때 부정한 여인으로 판명되어 동네 사람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게 될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인류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처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셔야만 하는데 만일 마리아와 요셉이 그것을 거부한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시기 위해서는 마리아와 요셉의 동의가 절대로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도 요셉도 그것을 수용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이 주의 사자를 마리아와 요셉에게 보내어 동일한 메시지를 들려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눅 1: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눅 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이는 마리아와 요셉이 믿지 못하는 이유가 동정녀에게 아기 예수가 잉태하는 일이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면, 그 일을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실 만큼 전능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시고자 한다면 못할 것이 없지 않는가 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마리아와 요셉은 인간이 가능한 것만 믿고 불가능한 것은 믿지 못하는 믿음인가 아니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것인가 선택을 하여야만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리아와 요셉이 똑같이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의 전능하심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물론 그 순종의 길은 많은 오해와 고통이 동반되는 것이었습니다.
(눅 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눅 1: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 1: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그 결과 가고 오는 세계의 만민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세주되심을 믿음으로 죄와 고통과 죽음에서 구원함을 받는 놀라운 축복을 받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가 세상에 오시는 통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오직 하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의 역사를 의심 없이 그대로 믿고 순종한 것 외에 다른 원인이 없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사람 마리아와 요셉을 통해서 아기 예수를 성령으로 잉태하게 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마리아와 요셉처럼 믿고 순종하는 사람을 이 시대의 축복의 통로로 삼고자하시는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1)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님의 전 생애는 성령이 늘 함께 하시는 생애였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의 머리위에 임하셨습니다.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2) 공생애 내내 성령을 힘입어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갖가지 기적을 행하시도록 예수님과 더불어 역사하셨습니다.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생애는 이처럼 성탄에서 부터 으로 시작하여 성령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3) 예수님만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도 또한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말씀이었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면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첫 단계가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세상에 오신 성탄의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오늘 우리처럼 지극히 평범한 서민이었으면서도 아기 예수가 오시는 축복의 통로 역할을 하게 된 원인이 오직 하나 성령의 능력을 믿고 말씀의 성취를 믿는 성령의 역사를 믿는 성령 충만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복음을 듣는 가운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부모의 죄의 영향력을 받지 않은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믿고, 내 안에 왕으로 모셔드리고, 마태나 누가처럼 다른 사람에게 성탄의 주님을 증거 함으로 그도 나처럼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믿어 구원을 받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다 되시기 바랍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마 1:18-21 / 홍문수 목사
성탄절이 다가오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게 있습니다. 성탄절 날 혹시 눈이 내리지 않으려나?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문에서도 기상청의 예보를 서둘러 전합니다. 금년에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다 ... 혹은 금년에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되기는 틀렸다 ...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죠. 왜 사람들은 그토록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는 걸까요? 아마 그건 성탄절의 낭만적 분위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그 자체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금년 성탄절에 눈이 오면 참 좋겠습니다. 목석처럼 무뎌지는 우리 도시인들의 감성을 터치해 주는 함박눈이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예수 믿고 처음 맞이했던 성탄절이 기억납니다. 눈이 펑펑 내리던 성탄절 이브에 자정 예배를 드리고 밤새 새벽송을 돌았습니다. 집집마다 들러 성탄 찬송을 부르며 축복했습니다. 그때의 감격은 지금도 제 마음 속에 한 폭의 그림으로 남아 생각만 해도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낭만적인 분위기가 단순히 사람들끼리 어울려 즐기는 낭만이라면 엄밀히 말해 성탄절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탄의 참 뜻을 되새기는 가운데 마음 속에 솟아나는 기쁨과 평안만이 성탄절의 진정한 영성이요 감성인 것입니다.
제가 성경을 쭉 읽어 보니까 성탄절은 항상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눈이 내려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신 유대 베들레헴에는 1년 내내 눈이 오지 않는 곳입니다. 그럼에두 불구하고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의 목적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러 오셨습니다. 우리의 더러운 죄를 사하시고 눈처럼 희게 해 주시려고 오신 겁니다. 사1:18 말씀 보면 그 속죄의 은총이 얼마나 놀라운지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아무리 추악한 죄악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하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 보혈의 은혜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속죄’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카파르’인데 ‘덮어버리다’ 이런 뜻입니다. 마치 눈이 오면 땅 위의 모든 추한 것들이 다 덮여서 하얗게 되는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절은 항상 십자가와 오버랩 시켜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신 말구유와 예수님이 달려 돌아가신 갈보리 십자가를 겹쳐서 생각해야 됩니다. 십자가 없는 성탄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성탄 없는 십자가도 있을 수 없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대속의 십자가를 위한 성탄이기에 성탄절은 항상 ‘화이트 크리스마스’인 것입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성탄의 목적을 다시 한번 재확인하시고 속죄의 은총에 감격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하나님 아들의 이름 : 예수
지난 주일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요셉이란 청년과 정혼을 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정혼은 정식으로 결혼해서 동거하기 전 약 1년가량 지속됐습니다. 바로 이 기간 중에 마리아가 잉태를 했으니 인간적으로 보면 야단이 난 겁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요셉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합니다. 그러다가 내린 결론은 조용히 파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파혼이 되어도 결국은 알려질텐데 문제가 복잡합니다. 마리아는 사생아를 잉태한 여자로 낙인찍혀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한 후에는 사생아라고 놀림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안될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자(=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셔서 적극 해명해 줍니다. 결국 요셉은 오해를 풀고 마리아와 결혼을 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태어나기까지 순결을 지키며 동침하지는 않았죠.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났을 때 마라아의 잉태에 대해 해명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합니다. 무엇입니까? 얘수님의 이름을 예고한 것입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란 이름은 본래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으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즉 구원자, 구세주(Savior)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대개 아버지가 생후 8일째 할례의식을 베풀면서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이름을 붙여줍니까? 천사를 통해 하나님이 직접 지어주셨습니다. 나중에 예수님 생후 8일째 요셉이 예수라고 명명하지만 사전에 하나님이 지어주신 것을 재확인한 것뿐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이 그 아버지이심을 나타내신 겁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이름 속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왜 이 죄악 세상에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셨는지 그 목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 즉 ‘속죄’입니다.
[2] 속죄의 은혜 : 죄로부터의 구원
예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동정녀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가 없고 의로우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은 것은 인간의 죄값을 대속함으로 죄에서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아니라면 죄의 권세(=영향력) 아래 세상에서 고통 중에 살다 내세에는 영원한 지옥에 떨어져 형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탄은 예수님이 죄의 영향력에서 인간은 구원해 내기 위해, 해방시키기 위해 인간으로 오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와 더불어 예수님의 성탄을 통해 속죄의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요19:30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다 이루었다!” 이 말씀입니다. 이것은 본래 ‘다 지불했다’ ‘빚을 청산했다’는 뜻입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에 대한 죄의 권세와 영향력을 제거해주셨다는 것입니다. (cf.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 ”)
구체적으로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은 대표적으로 다음 세 가지를 포함합니다.
①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 인간이 죄를 지으면 무엇보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그 고통은 얼마나 큰지 항상 마음을 짓누르게 됩니다. 이런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면 아무리 세상에 다른 것들을 추구하고 소유해도 늘 마음에 불안과 고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마음에 평안과 기쁨, 자유를 맛보려면 죄 사함을 받아야 됩니다.
다윗의 예를 통해 죄로 인한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왕입니다. 돈도 있고 향략도 마음대로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한 고통으로 몸부림을 칩니다. 그는 남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하고 그 죄를 숨기고자 그 남편 우리야를 죽입니다. 그후 아무도 그에게 책임을 묻는 사람이 없지만 스스로 죄책감으로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후일 나단 선지자의 직언으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기까지 그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그의 시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은 후에는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시32:1~5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얼마 전 방송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어떤 분이 20여 년 전 자전거포에서 자전거 한 대를 훔쳤답니다. 그런데 20년 만에 20만원 봉투를 자전거포 주인에게 갖다 주고는 사라진 겁니다. 그동안 얼마나 양심에 가책과 고통이 있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것을 갚은 후 얼마나 시원했을까요? 죄로 인한 양심의 고통을 나는 사람입니다. 그 고통에서 벗어난 기쁨은 맛본 사람만 압니다. 그런데 큰 죄를 짓고도 양심을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그런 인간은 영영 죄에서 벗어나는 기쁨을 맛보기 힘든 자들입니다. 자기 죄를 고백할 줄 아는 사람이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대선 자금 문제로 야단인데 차떼기로 100억인가 150억인가 꿀꺽 삼켰다고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보다 적지만 받아먹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도 고백은커녕 양심의 가책도 안 느끼는 자들의 모습을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인간들은 구제 불능입니다. 죄를 인정하고 고백할 줄 아는 사람에게 죄 사함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우리가 죄를 인정하고 해결하려 해도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죄값을 직접 갚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갚아지질 않습니다. 예를 들어 죄를 한 번 짓고 선행을 두 번 한다고 해서 죄가 상쇄되는 게 아닙니다. 죄는 여전히 있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우리 죄를 사하시되 완전하게 사해 주십니다.
시103:12 보면 우리에게서 죄과를 완전히 제거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그랬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책감에서 해방된 겁니다. 때때로 다시 죄에 빠진다 할지라도 자백하면 언제든지 사함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요일1:8~9 참조) 사43:25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기억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만일 나의 전 생애 과정을 사람들 앞에서 스크린에 비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기가 막힐까요? 온갖 죄악들이 다 드러날 때 어떻게 그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 자리에 차마 앉아있을 수 없습니다. 도망쳐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된 모습들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마치 영상 기사가 비디오 촬영을 한 후 나쁜 장면은 다 지워버리고 좋은 장면만 편집해서 작품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남긴 오점, 과오를 다 지워주신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정말 놀랍고 신이 납니다.
이것이 곧 속죄의 은총인 것입니다. 부디 이 성탄절에 속죄의 은총을 확신하시고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②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 : 죄는 우리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유혹하며 지배합니다. 일단 죄를 지으면 죄의 지배를 받으며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깊은 죄악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요8:34 (예수님의 말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아무리 대단한 장사라도 죄의 지배력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이기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피흘려 죽은 예수님! 그분이 죄를 무력화시킵니다. 그리고 성령을 우리 심령에 보내주셔서 그 능력으로 죄를 이기게 해 주십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어느 크리스천 변호사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전과 5범 청년의 변론을 맡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려서부터 도둑질을 하다가 이번에 또 식칼을 들고 강도질을 하다 붙잡힌 겁니다. 변호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여러 번 하다 걸렸서 이제 잘못하면 청송 감호소 가서 평생 햇빛 보기 힘들텐데 인생 이렇게 살아도 되는건가?” 그 청년이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습니다. “이제 이 짓 그만 둬야죠. 저도 가족들과 오순도순 살고 싶어요.” 이어서 그 변호사가 어떻게 하다 이 지경이 됐나 물으니까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어머니 지갑에서 몇 백원씩 꺼내다 그 버릇이 자꾸 커진 겁니다. 바늘 도둑이 소 소둑 된다더니 딱 맞아요 ( ... ) 남의 물건 볼 때 두 가지가 마음 속에서 싸우죠. 하나는 갖고 싶다는 것, 또 하나는 이러면 못 쓴다는 것 ... 그런데 번번이 져요. 고쳐 보려고 해도 잘 안돼요.” 죄의 지배력에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확인시켜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십자가를 의지하며 성령의 능력만 의지하며 죄를 극복하기 바랍니다.(갈5:16~17 참조) 우리가 결단하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 성탄절에 죄를 이기는 십자가 보혈의 능력을 구하시고 늘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③ 죄의 저주로부터 벗어나는 것 : 죄는 영적인 바이러스입니다. 인간의 영혼을 좀먹고, 육체를 망가뜨리고, 결국에는 영원한 사망으로 끌고 갑니다. 죄로 인하여 생기는 모든 현상들이 죄의 저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대속으로 우리를 죄의 저주로부터 구원해 주십니다. 우리응 거기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5:24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대로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사는 동네가 완전히 달려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활동 영역이 바뀌었습니다. 슬픔에서 기쁨으로, 패배에서 승리로, 걱정과 근심에서 평안과 확신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뀐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검은 먹구름이 뒤덮인 인생을 살아가던 우리가 이제는 황금빛 태양 아래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부디 이 말씀 붙들고 이제는 저주 아래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아래 살아가는 복된 인생 되시기바랍니다.
이제 며칠 후면 성탄절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번 성탄절은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눈이 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예수님의 성탄과 십자가 대속으로 ‘속죄의 은총을 입은 영혼이 깨끗게 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말입니다. 아무쪼록 이런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시고, 남은 생애 주님 안에서 자유와 기쁨, 승리와 축복으로 충만한 저와 여러분의 인생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죄에서 구원 하신다
마 1:18-21 / 김상복 목사
예수님이 나신지 2천 년이나 지났는데, 오늘 이 아침에도 세계 인구의 1/3이 여전히 그분의 탄생을 기뻐하며 그분을 구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경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북쪽 시골에서 태어나셨습니다. 30~33세까지 3년 동안 이스라엘에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분을 보통 ‘랍비’라고 불렀는데, 그 당시 많은 랍비들이 전국을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지금 제 나이의 절반도 안 되고 옷도 한 벌밖에 없던 가난한 젊은이로 이스라엘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제자로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전 세계 사람들의 호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분의 순교정신 때문일까요? 하지만 예수님만 순교하신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종교와 사상을 위해 순교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동정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일까요?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예수님 당시의 요세푸스라는 역사학자가 ‘유대인들의 고대사,’ ‘유대인들의 전쟁사,’ 자서전 ‘나의 인생’ 등 책 3권을 남겼는데 거길 보면 예수님의 시대상황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하고 나섰다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유명한 사람이 바코츠바인데, 자기가 메시아라고 떠들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까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 때문에 동정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인류 역사상 훌륭한 인물들이 - 종교지도자, 철학자, 현자들이 - 많았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과 사상가들은 진리를 찾아서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려 하는데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진리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석가모니는, 모든 생존이 다 고(苦)요 고는 욕심에서 오고 욕심을 여덟 가지 방법으로 다 제거하면 해탈하게 된다는 자기가 발견한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이 가르쳐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리를 가르쳐준다 하시지 않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다”(요11: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인생의 진리 한 가지를 가르쳐주시거나 마음의 평안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아무리 마음에 평화가 있어도, 인생을 마치면 지옥에서 마귀와 함께 영원히 고통을 당하거나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로 오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선교사로 가는 것,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른 분이 세상에 없습니다. “나를 믿는 것보다, 나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나를 아는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일은 없다.” 즉 예수님이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이요, 그분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용서하는 방법, 용서받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 선언하시며 용서해주셨습니다. 하나님 밖에는 죄를 용서할 자가 없는데 자기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이런 죄를 범하지 말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 이분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가 탄생을 축하하는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입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방법을 가르쳐 주신 분이 아니라 예배를 받으신 분입니다. 자기를 경배하라 하셨고 자기 앞에 모두 무릎을 꿇고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기 때부터 사람들의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예수님께 엎드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여!” 고백하며 경배했을 때 예수님은 “왜 나에게 경배하느냐? 하나님께만 경배해야지” 라고 하시지 않고 그 경배를 당당하게 받으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도 요한이 자기에게 나타난 천사를 보고 놀라 엎드려 경배하려 하였습니다. 그 때 천사가 경배받기를 거부하며 말했습니다. “나에게 경배하지 마시오. 내가 인간보다는 더 높고 위대한 천사이긴 하지만 난 하나님이 아니니 절대로 내게 경배하지 마시오. 일어나시오. 당신과 나는 같은 동역자요.” 한편 헤롯 대왕은 목소리가 얼마나 좋았던지 모두들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했습니다. 헤롯이 연설을 하면 사람들이 “아, 저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가!” 할 정도였습니다. 이에 교만해진 헤롯이 “아! 내가 정말 하나님인가 봐!” 하고 하나님인 척하다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죄 있는 인간이 하나님처럼 경배를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경배를 받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사람들이 자기 앞에 엎드려 경배할 때 서서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라고 고백하였을 때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성전과 안식일, 모세오경(토라)이 중요했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보통 충격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거짓말을 했거나 실제로 하나님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만약 거짓말이라면 거짓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20억의 인류가 따르겠습니까? 실제로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요, 성전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채찍을 들고 성전 안에서 돈 바꾸는 자들을 몰아내어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모세와 함께 계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1500년 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광야를 다닐 때에 예수님이 그와 같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느니라”(Before Abraham I am)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예수님은 자기가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입니다. 그분이 바로 2천 년 전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기 전에 여섯 번이나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음을 당할 것이며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당시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이 많았고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십자가에서 다시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셨고, 제자들 500여명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습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 예수님은 어떤 진리를 가르치거나 하나님 만나는 방법을 안내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만나게 해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누군지를 분명히 알고 믿고 이해하고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 한마디를 깨닫고 ‘아, 그 말씀 괜찮다!’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괜찮은 말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죽는 자는 살 것이요, 살려 하는 자는 죽으리라”처럼 알쏭달쏭한 말들도 있어요. 이 말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 문제입니다. 그분이 대답이요, 그분이 생명이요, 그분이 영생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생활 속에서 죄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권위는 과거 어떤 종류의 권위와도 다르다고 제자들이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두려워한 적이 없었고, 죄를 범하고 죄의식 속에서 헤맨 적도 없었으며, 잘못을 저지르고 후회하면서 낙심한 적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여러분과 저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어떤 문제? 죄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문제들 중에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육체적, 심리적, 정서적, 환경적 문제들이 있지만 그 모든 문제들의 중심에는 죄가 있습니다. 죄를 가슴에 품은 인간이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문제보다 죄의 문제가 제일 큰 것입니다.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정치적, 사회적, 환경적 문제는 물론 건강의 문제까지 해결될 것입니다. 죄 속에 빠져 헤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죄 속에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문제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학식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오래 전에 제가 미국 중부의 한 도시에 살 때의 일입니다. 이웃에 사는 의과대학 교수 한 분이 자기 아내를 자동차로 치어 죽이려고 했습니다. 제가 아는 분인데, 인물도 참 좋고 의학박사 학위에 갖출 것을 다 갖춘 교수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아내를 죽이려고 했으니 온 동네가 소란스러웠습니다. 다행히 그 아내가 죽지는 않았지만 저는 그 일로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 점잖은 분이 어떻게 자기 아내를 자동차로 밀어버리나? 어떻게 박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나?’ 저는 그 때 30대 초반으로 막 목사가 되어 사람을 잘 몰랐어요. 인간의 죄는 교육, 학위, 사회적 지위와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지금은 제가 알지요. 그럴 수가 있지요. 인간의 가슴 속에 박힌 죄성은 인간을 파멸로 몰고 갑니다. 고통과 미움을 불러일으킵니다. 죽음을 초래합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예수’라는 단어가 ‘구원자’(Savior)라는 뜻입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입니까? 인간의 가장 심각하고 보편적인 문제, 즉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의미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보면 지옥 가는 사람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혹시 여러분이 거기에 들었는지 보세요. 들었다면 정신 차리고 빨리 나가야 됩니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첫째로,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겁쟁이를 말합니다. 왜 겁쟁이입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벌벌 떨면서 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아,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굳건한 믿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지옥의 유황불에 안 들어갑니다. 믿음이 있어야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조금만 어떻게 되어도 겁이 나서 굿하는 사람들은 지옥에 갑니다.
둘째로, 믿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영생을 믿지 않고, 예수를 믿지 않고, 죄 사함과 부활과 영생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불과 유황 못에 들어갈 것입니다.
셋째로, 흉악한(abominable)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혐오하시는 부류입니다. 이런 자들 중에 동성애를 행동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abomination’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깨뜨리고 여자와 여자가, 남자와 남자가 성행위를 하면서 부부라고 떠드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민주주의는 동성애를 괜찮다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남자와 남자끼리, 여자와 여자끼리 결혼해도 된다고 법으로 정하고 있어요. 한국에서는 이와 같이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법이 절대로 만들어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동성애의 경향이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성애의 경향을 행동으로 옮기는 자들이 흉악한 자들입니다.
넷째로, 살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바로 살인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증오하고 배척하며 사는 사람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갈 것입니다.
다섯째로, 음행하는 자들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아내와 자식을 두고 간음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고도 주일에는 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지옥 갈 일을 계속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다니요.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우리를 죄에서 구하러 오셨지 죄 속에서 살라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여섯째로, 술객들입니다. 즉 귀신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무당들, 무당을 섬기는 사람들,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우상숭배자들이 지옥에 들어갑니다.
일곱째로,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입니다. 사기꾼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예수님께서는 이런 죄인들을 변화시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새 삶을 살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21절). 어떻게 구원하시나? 친히 우리의 죄를 그 몸으로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그 보혈로 아까 보았던 여러분의 모든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다 용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을 때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한 번에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와 죄 사함을 주셨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아까 제가 나열했던 죄들 속에 사셨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그 가운데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왜 여기 부르셨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여러분의 죄를 사해주셔서 여러분이 죄로부터 완전히 회개하고 새사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가정에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식구들이 다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성을 깨끗하고 정결케 만들어주십니다. 여러분이 회개할 때마다 예수님의 피가 깨끗이 씻어줍니다. 찬송할 때마다 정결케 해줍니다. 예배드릴 때마다 새롭게 만들어줍니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점점 변화됩니다. 재미있다고 따라다니던 죄가 싫어지기 시작합니다. 죄를 멀리하게 되고 죄와 싸우게 됩니다. 우리의 가슴이 예수님 때문에 점차 깨끗해집니다.
예수님은 또한 여러분을 마음속의 죄의식으로부터 해방시켜주십니다. 죄의식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자기를 처벌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순간 내 가슴에 고통과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창피하고 수치스럽습니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나?’ 자기를 정죄하고 죄의식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죄의식이 있다면, 오늘 아침 예수님께서 그것을 제거해주시기 원하십니다. 해방시켜주시기 원하십니다. 예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달라고 기도하면 예수님께서는 용서해주시고 죄의식을 없애주십니다.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일고 죄 사함을 받은 감사가 가슴에 넘치면서 우리는 죄를 점점 멀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옛날에는 죄성을 가지고 혼자 살면서 온갖 죄를 다 범했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인정하고 믿는 그 순간부터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여러분과 언제나 같이 하셔서 죄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죄는 힘이 있어요. 마귀가 우리보다 세지요. 세상이 우리 보다 셉니다. 내 죄성이 나보다 셉니다. 사도 바울도 “내가 선을 행하고 싶은데 왜 안 되나? 내가 악을 행하고 싶지 않은데 왜 악이 튀어나오나?” 고민하다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고 절규하였습니다. 인간은 죄를 알고 죄에서부터 건짐 받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죄의 세력을 파괴하십니다. 이제부터 우리 가슴속에 살아계신 예수님이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도록 기도할 때마다 도와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결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육신의 사망뿐 아니라 영원한 사망입니다. 둘째 사망, 즉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어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많은 현자들과 철학자, 사상가들이 우리에게 인생의 진리 한두 가지를 가르쳐 줄 수는 있지만, 예수님만이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 사함 받고, 죄의식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의 죄성이 점점 정결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주시며 영원한 자유를 주십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 의미입니다.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아직도 죄가 여러분을 거느리고 있다면, 이 시간 예수님께로 오십시오. 피해 다니지 마세요. 핑계대지 마세요. 못 본 척한다고, 없는 척한다고, 거짓말 한다고 죄가 없어집니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죄 사함으로 나아오십시오. 죄 사함을 받으십시오. 죄의 결과로부터 해방을 받으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아멘.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마 1:18-25 / 김기석 목사
∙혁명의 씨앗이 담긴 노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세상 곳곳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듯 위기에 처한 사람들, 그리고 외로운 이들과도 함께 하시길 빕니다. 차마 성탄의 기쁨을 노래하기 어렵습니다. 4년 넘게 비닐하우스 일하던 캄보디아 노동자 속헹 씨가 영하 18도의 혹한에 난방이 되지 않는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자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의 원인이 간경화증이라는 보도를 보았습니다만 어쨌든 무정한 세상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셈입니다. 조금 더 잘 살아보고 싶어 찾아왔던 이 땅에서 그의 꿈은 무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억울함을 풀어달라며 여전히 차가운 거리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공의와 정의가 무너질 때 의인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게 우리의 적나라한 현실입니다. 그러하기에 더욱 주님을 우리 가운데 모셔야 합니다. 우리 삶의 지향을 바로 하고, ‘아벨‘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들을 귀히 여길 수 있는 세상을 열기 위해서라도 주님을 우리 중심 가운데 모셔야 합니다.
부활절에 이어 성탄절까지 비대면 예배로 드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FM 라디오는 성탄절기에 맞는 곡들을 선정하여 내보내고 있지만, 일상의 자리에서는 성탄 분위기를 느낄 수 없습니다. 5명 이상 모임이 금지되고 있기에 그 쓸쓸함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어쩌면 첫 번째 성탄절의 분위기가 이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유대인들은 아기들이 태어날 때면 마을 악사들이 그 집 주위에 둘러서서 환영의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은 달랐습니다. 환영받지 못한 탄생이었습니다. 산모가 몸을 누일 곳조차 없었습니다. 그 황량하고 외롭고 두려운 밤이 떠오릅니다. 세상의 구원자는 그렇게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의 빛은 그런 어둠을 찢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누가복음은 목자들이 한 밤중에 천사와 하늘 군대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고 말합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눅2:14). 주님이 태어나신 시간이 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교회 전통은 오랫동안 주님 탄생의 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 거룩한 밤 O Holy Night‘, ‘거룩한 밤 고요한 밤’이라는 곡이 대표적입니다. 독일어로 성탄을 나타내는 단어는 바이나흐튼Weihnachten입니다. ‘성스러운 밤‘이라는 뜻입니다. 밤은 어둠의 시간, 불확실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침묵의 시간, 집중된 시간, 성숙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성탄절 하면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 하늘에서 들려온 노랫소리, 아름답고 목가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부른 노래에는 실은 혁명의 씨앗이 담겨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변방에서 태어난 아기가 로마의 평화라는 거짓 평화를 깨뜨리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평화는 군사력에 근거한 평화였습니다. 로마 시인 비르길리우스는 서사시 <아이네이드>에서 로마의 평화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오 그대, 로마인이여, 힘으로 나라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평화의 길을 부과하고, 정복된 자들을 살려주고, 거만한 자들은 짓밟는 것이 그대에게 맡겨진 일이다.“(리차드 A. 호슬리, <크리스마스의 해방>, 손성현 옮김, 다산글방, p.64에서 재인용)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이들을 짓밟는 것을 소명으로 여기라는 말은 얼마나 두려운 말입니까?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무엇을 주고 빼앗는 것은 로마인의 결정에 달려 있고,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굴복하는 것은 신들이 미리 정해 놓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황제의 절대권력은 결과적으로 그를 신적 존재로 격상시켰습니다. 베들레헴의 외로운 밤에 태어난 예수는 그런 황제가 다스리는 세상에 정반대의 질서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성탄절은 바로 그런 칠흑같이 어둠을 찢고 별 하나가 탄생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름이 곧 소명
요셉과 마리아는 어둠을 찢고 그 빛이 도래하도록 한 통로였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이들에게 당신의뜻을 전하기 위해 꿈이라는 또 다른 현실을 사용하실 때가 있습니다. 꿈에서 우리는 비합리적인 경험을 하곤 합니다. 꿈에서는 저도 수영선수처럼 넓은 호수를 자유롭게 오가기도 하고, 아무리 달려도 지치지 않습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꿈을 통해 메시지를 전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제부터 벌어지는 사건은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혹은 불필요한 사건이라는 뜻일 겁니다.
천사를 통해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소식을 들은 요셉은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습니다. 마태는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소개합니다.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지만 많은 것이 생략된 표현입니다. 요셉도 번민의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배신을 당했다는 쓰라림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기 분을 주체하지 못하며 길길이 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설핏 든 잠결에 그는 천사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주저하지 말고 마리아를 맞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는 이어 아기의 이름을 두 가지로 일러줍니다. ‘예수’와 ‘임마누엘’이 그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름 속에 이미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주님의 운명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펼쳐 새끼들을 받아 업어 나르듯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인도하셨다(신32:11)고 고백했습니다. 이사야는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불 속을 걸어가도 동행하며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사43:2). 시편 시인은 “내가 비록 죽음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시23:4)라고 고백했습니다. 임마누엘이신 주님은 땅에 내려와 인간의 동행이 되신 분이십니다.
곤고한 세월을 보내는 이들은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같아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사라에게 쫓겨나 광야에서 방황하던 하갈은 울부짖는 아들 이스마엘을 보며 깊이 절망했습니다. 하갈은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비통한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우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소설가 이승우 선생은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이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땅의 신음소리는 하늘에서는 가장 큰 소리. 못 들을 수 없다.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숱하게 내보냈던, 언어가 되지 못한, 될 수 없었던 신음소리를 그분이 친히 듣고 있었다는 말이 그녀의 내부에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들었습니까, 당신이? 그녀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울었다.“(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p.71)
천사는 비통하게 울고 있는 하갈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이를 안아 일으키고, 달래어라.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창21:18). 하나님이 눈을 밝히시자 하갈은 그곳에서 샘을 발견했습니다. 하갈은 물을 길어 아들에게 먹였습니다. 샘은 이미 그곳에 있었지만 절망의 어둠이 그 샘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들으시는 하나님, 보시는 하나님,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시간 속에 들어와서 고통 받는 인류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임마누엘이신 주님은 세상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동행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절박한 처지의 나환자, 청각 장애인, 시각 장애인, 보행 장애인, 굶주린 무리, 불결하다고 취급받던 사람들, 이방인 곁에 늘 함께 계셨습니다.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개그맨 조세호씨에게 한때 ‘프로불참러’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어느 날 가수 김흥국씨가 “너 000 결혼식에 왜 안 왔냐?“고 힐난조로 묻자 그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제가 알지 못하는 사람인데요”라고 대답했다지요? 이 어이없는 상황이 개그의 소개가 되어 다양하게 변주되면서 그는 프로불참러라는 캐릭터로 한동안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제가 이런 우스갯소리를 하는 까닭은 ‘프로불참러‘라는 말이 제 양심을 찔렀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계신 곳은 세상의 궁벽진 곳, 그늘진 곳, 아픔의 자리이건만 우리는 한사코 그런 곳을 피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쾌적하고 안전하고 편안한 곳만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부재중’ 팻말만 내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마음이 아뜩해집니다. 2천 년 전에 이미 세상에 오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십니다. 매년 성탄절을 기념하는 것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사건을 현재화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워드 서먼이라는 분의 ‘크리스마스의 과제’라는 시가 바로 그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천사들의 노래가 조용해질 때
하늘의 별들이 사라졌을 때,
왕들과 왕자들이 편안히 머무를 때,
목동들이 그들의 양때에게로 돌아갔을 때,
크리스마스의 과업은 시작됩니다.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고치며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며
나라들을 다시 세우며
사람들 가운데 평화를 가져오며
마음에 음악을 만들어냅니다.“
(로사 신현림 엮음, <아일랜드 축복 기도>, 사과꽃, p.79)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외로운 이들에게 따뜻하고 정감어린 엽서를 보내거나 마음을 담은 작은 선물이라도 보내보십시오. 그늘진 곳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번거롭고 마음이 내키지 않을지라도 일단 아픔의 자리에 한번쯤 들러보십시오.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이들이야 다른 이들의 존재가 그렇게 소중하게 다가오지 않을지 몰라도, 고독한 이들에게는 누군가가 건네오는 평안의 인사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을 겁니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이들이야말로 성탄의 종을 울리는 이들이라 하겠습니다.
∙다리 놓는 사람
주님이 오심을 기뻐하는 이들은 이제 스스로 주님의 동행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원하시는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세우신 까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그들을 내보내어서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며,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막3:14-15). 척박한 역사의 대지에 하나님 나라의 꿈을 심고,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풀어주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이들의 소명입니다. 그 소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라는 말 속에 그 답이 있습니다. 비전을 함께 나누는 이들이 곁에 있어야 우리는 쉽게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고립되었다는 느낌이야말로 절망의 뿌리입니다. 홀로 있는 시간도 물론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좋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그 꿈을 공유하는 이들과 자꾸 만나야 합니다. 그 꿈을 엮어야 비전이 되고, 비전이 구체화될 때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당장 처리해야 할 일에 급급해서 영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못합니다. 영혼은 끊임없이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우리를 자꾸만 갈라서게 만듭니다. 꽤 많은 이들이 세상과 자기를 연결하는 다리가 끊겼다고 느낍니다. 그 분리된 느낌이 곧 소외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가 되신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허무시어 서로 통하게 만드셨던 것처럼 우리도 ‘다리 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다리를 놓을 수 있을까요? ‘사랑의 수고’(살전1:3)를 해야 합니다. 사랑은 ‘하나 되게 하는 힘’입니다.
성탄절은 우리에게 사랑의 모험을 시작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의 과제 앞에 서 있습니다. 고난 받는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 곁에 다가서고, 더 이상 억울한 죽음이 발생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진력해야 합니다. 그 쓸쓸했던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기억합니다. 예수님을 외롭게 하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통해 땅의 신음소리가 줄어들기를, 또한 주님의 평화가 세상에 스며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메시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
마 1:18-21 / 이정선 목사
예수의 탄생과 관련된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우선 예수의 어머니가 된 마리아의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겠지요? 마리아는 결혼을 앞둔 처녀였습니다. 여자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눈앞에 두고 환상과 설렘 속에 행복을 꿈꾸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찾아와서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결혼을 앞둔 처녀가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유대의 관습과 종교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거나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는 일입니다. 설령 죽임을 면한다 하더라도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던 꿈은 산산조각이 나는 것입니다. 평생을 손가락질 당하고 더러운 여자 취급을 당하며 외롭고 슬프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의 설명을 듣고, 그렇게 태어날 아기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서 세상을 구원할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하기로 순종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포기한 것입니다. 위대한 일에는 반드시 큰 희생이 요구됩니다.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유익을 얻고 의미 있는 일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감당하기 어려운 희생이나 헌신을 요구받은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내가 어느 정도 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부담스럽지 않은 한도 내에서 헌신하고 희생하지만, 못하겠다고 거절한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거절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려는 복되고 위대한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수 있습니다. 만일 마리아가 하나님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거절했더라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메시야의 탄생에 차질이 생겼을 것입니다.
메시야의 탄생이라는 위대한 일을 위하여 희생을 요구받은 사람이 또 있습니다. 마리아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던 요셉입니다. 그는 조금 있으면 새신랑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을 앞둔 남자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혼녀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표현을 씁니다. 호세아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 때에 저희가 산더러 우리를 가리우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호 10:8). 요셉은 온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불행한 사람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얼마나 분하고 슬펐을까요? 그런데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일을 없던 것으로 하고 조용히 관계를 끊으려고 했습니다. 만일 요셉이 이 일을 폭로하고 자기 연민과 분노에 사로잡혀 감정대로 행동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 또 차질이 생겼겠지요.
하나님은 모든 일을 인간과 동역하십니다.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단 말이에요. 우리도 그렇습니다만, 같이 일하기에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맞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일하시기에 요셉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들과 함께 일하십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의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은 많은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야, 힘들어서 너랑 같이 일 못하겠다.’ 이러시지는 않을까요? 내가 나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께 내 마음을 내드릴 때,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맞추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갈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일하실 수 있게 됩니다.
천사로부터 마리아가 낳게 될 아기에 대해 설명을 들은 요셉은 또 한 번 믿음으로 그 메시야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헌신하기로 결정합니다. 사실 메시야가 오시는 데 있어서 요셉의 역할은 한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가정 안에 태어나시게 하고, 또 어린 시절 그를 해하려는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는 일 등을 요셉이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예수께 있어서 아버지로서의 요셉의 역할은 필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모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예수의 육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서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계시고, 그 관계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아버지의 자리에 있는 것은 오히려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어린 시절 이후에는 요셉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요셉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가 일찍 죽었으리라고 추측됩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메시야를 위하여 자기 인생을 그렇게 희생으로 드린 사람입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성전을 찾아온 마리아에게 시므온이 이렇게 말합니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눅 2:35a). 마리아는 삶으로 자기 인생을 메시야에게 드렸고, 요셉은 죽음으로 자기 인생을 메시야에게 드린 것입니다.
메시야를 위해 희생한 것은 그들뿐만이 아닙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정확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페르시아에서 온 점성술사들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입니다. 예부터 페르시아에는 별을 관측하고 연구하는 점성술이 발달했습니다. 요즘도 타로 별점을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별의 변화가 인간 세상의 일들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사람들은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위대한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별이 떨어지는 것은 운석이 대기권에 진입해서 공기와의 마찰에 의해 타는 현상일 뿐입니다. 그것과 위인의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별을 보고 왕의 탄생을 안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페르시아의 점성술사들은 어떻게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이 태어나신 것을 알았을까요? 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페르시아에서 발달된 점성술의 지식을 이용하셔서 그들이 왕의 탄생으로 믿을 수 있는 별의 움직임을 만드셨고, 그 박사들이 먼 여행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 박사들에게 왕의 탄생을 알려주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박사들은 왕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에 합당한 반응을 하였습니다. 왕께 드릴 예물을 준비해서 먼 길 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왕을 찾았습니다. 뜻밖에도 그 왕은 예루살렘 왕궁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마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생각했던 왕이 아닙니다.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보다, 진짜 왕을 찾으러 가야겠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준비해 온 예물을 드리고 그 아기에게 경배를 드렸습니다.
이 왕을 만나 경배하기 위해 얼마나 오랜 여행을 했을까요? 또 예물을 준비하기 위해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을 것입니다. 메시야의 탄생을 알리기 위해 그 박사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야의 탄생 즈음에서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희생이 또 있습니다. 베들레헴 지경의 아기들입니다. 박사들에게 속은 헤롯은 베들레헴 지경의 모든 아기들을 죽였습니다. 그들 중에 메시야로 태어난 아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아기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죽었습니다. 자기들이 죽는다는 것도 모르고 죽었을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의 탄생이라는 복된 일에 왜 이 아기들은 희생을 당해야 했는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방해하려는 악한 세력이 있게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 아기들이 자원해서 선한 일을 위해 희생한 것은 아니지만, 선한 일 때문에 희생 당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메시야를 대신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순교자의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선한 일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보고 참고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성탄절입니다. 그 기쁜 사건 배후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희생 때문에 메시야가 오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로 오신 예수께서도 희생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오늘 이 복되고 기쁜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어떤 희생을 드릴 수 있는지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결단이 이루어지는 오늘 성탄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탄절의 참된 의미
마 1:18-23 / 박인걸 목사
크리스마스(Christmas)는 기독교의 명절로서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절기이다. 다른 말로는 성탄절기라고도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ass)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현재는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 문화적인 행사로 발전하였습니다. 성탄절은 부활절과 함께 가장 중요한 축제이자 교회력 절기인데,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성탄일 전 약 4주일을 대림절로 지킵니다. 이는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며 성탄주일을 준비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서방교회(로마 가톨릭, 성공회, 개신교)에서는 매년 12월 25일입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율리우스력의 12월 25일에 해당하는, 12월 25일보다 13일 늦은 1월 6일이 크리스마스입니다. 크리스마스 전날은 크리스마스이브라 하며, 일부 나라에서는 다음날을 복싱 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기독교와 서구 문명이 퍼지면서 크리스마스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기리는 명절이 되었고, 대한민국에서도 공휴일로 정해졌습니다. 이슬람교를 믿는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오만, 아랍에미리트 같은 아랍 국가들에서는 성탄주일이 공휴일이 아닙니다.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로 처음 지키기 시작한 것은 4세기의 일입니다. 본래 로마에서는 하루해가 가장 짧았다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12월 25일을 "태양의 탄생일"로 보고 이날을 축제일로 삼아 농업을 주관하는 Saturnalia라고 불리는 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것은 주후 274년 Aurelian 로마황제에 의하여 되어진 일이며 북구라파에서는 이전부터 "태양이 다시소생"하는 동지(冬至)를 크게 기념하는 축제(Festival)를 전통적으로 지켜 왔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를 "세상의 빛"(요 1:9)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빛"의 탄생입니다. 로마에서 이교도들이 12월 25일을 "태양의 탄생일"로 정한 것과 기독교에서 "세상의 빛"이 탄생한날을 12월 25일로 결정한 것은 이교도들의 "태양의 빛"과 기독교의 "세상의 빛"을 일치시킴으로 기독교를 이교도들에게 더욱 의미 있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사용한 그 시대를 기록한 역기(力記)를 보면 주후 336년 전에 이상과 같이 결정해서 지킨 것을 알 수 있고, 이날(12월 25일)을 교회력의 첫날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들은 크리스마스가 태양신을 숭배한 날이므로 가짜라고 하기도 하지만 예수님 탄생 날자가 12월 25일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 의미와 신앙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분문에 보면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배경설명이 있고 그날 천체의 징조와 박사들의 방문과 천사들의 노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를 통하여 아기 예수님이 탄생 할 때 당황한 요셉의 심리적 고통과 의심의 해소 내용도 자세하게 기록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헤롯의 유아 학살과 어린 예수의 애급 피란 등의 이야기 들이 마1-2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성탄절의 참된 의미입니다. 오늘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받겠습니다.
(1) 신이 인간이 된 사건입니다.(마 1:18-20)
“ 예수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드러났더니. 저에게 잉태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성령은 주의 영, 여호와의 영, 거룩한 영을 지칭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 하나님의 역사로 인한 탄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처녀 마리아의 몸에 임하였고 하나님의 영이 마리아로 하여금 임신을 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나듯 혹은 단군이 곰과 환웅의 결혼에 의하여 태어나듯 신화적 사건이 아니라 신이 인간의 몸을 통하여 사람으로 오신 역사적 사건인 것입니다.
왜 신이 인간으로 와야 했을까요? 이 문제를 조직신학적 입장에서 해석하면 복잡합니다. 복음적 입장에서 간단히 소개한다면 죄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며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한 인간(창1:26)들이 죄로 인하여 타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구원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약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우리나라가 6, 25때 한국전쟁으로 북한에게 완전히 적화통일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유엔 16개국 정상들은 자기네 나라의 젊은 청년들을 우리나라에 파병하였고 그들을 죽어가면서 북괴군과 중공군과 싸워 우리나라를 위기에서 구원해 냈습니다. 만약 그들이 원조 물자나 보냈거나 얼마의 돈이나 보냈다면 우리나라는 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군인들이 직접 와서 생명을 걸고 싸워서 우리나라를 위기에서 건져 준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동맹이라고 합니다.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는 여러 가지 신학적 설명이 있습니다만 가장 큰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위하여 친히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죽게 하였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을 죄악 가운데서 살려주신 것입니다. 성탄절을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절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을 통하여 일하십니다.(마 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이 일을 가만히 끊고자 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자신과 약혼한 여자가 임신하였다는 사실을 알고도 요셉은 입을 다물고 아내와 뱃속에 어린 아기를 살리기 위하여 조용히 그 문제를 지으려 하였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만약 악한 사람과 마리아가 약혼한 사이라면 약혼남이 입을 벌려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면서 마리아는 나쁜 여자라며 법정에 고소를 하였다면 예수님은 마리아와 함께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없는 말까지 지어서 퍼트리고 자신의 이익과 입장을 위해서라면 상대방의 인격이나 재산 같은 것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 의인들을 통하여 일해 오셨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노아는 당대에 의로운 사람이었더라.”(창6:9)“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의로 여기시고”(창15:6)고 하였습니다. 욥은 동방 땅에 의로운 자였습니다.(욥1:1)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축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축복하시고 악인은 망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의 소원을 들어 주시고 의로운 자와 함께 하시며 의로운 자를 구원하시고 의로운 자의 등불은 꺼지지 않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앞에 절대적 의인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다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새롭게 창조함을 받아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의인을 찾아 그들을 통하여 일하여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인을 불러 의롭게 만들어 그를 통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이사야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 들어가도 하던 중에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 스랍천사들의 예배 장면을 목격하고 너무 놀라워 자신은 이제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너무나 큰 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천사를 시켜 화저로 핀 숯불로 더럽다고 하는 이사야의 입을 지져 성결하게 한 후에 선지자로 사용하였습니다.(사6:1-6)그런가하면 호렙산에서 불타는 떨기나무를 구경하던 모세를 하나님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5)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새로운 사람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사용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의롭거나 의롭게 만들어 사용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우리 죄를 위하여 죽게 하시고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성령과 말씀으로 의롭게 하여 하나님과 가족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일에 동역 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의 일꾼들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성령이 여러분을 믿음 안에서 의롭게 하여 사용하시기를 축복합니다.
(3) 구약 성경말씀이 이루어진 일입니다(마 1: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여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이상은 동정녀에 의한 예수님의 탄생 예언입니다.“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2)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탄생할 것이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이 애급으로 피란 것을 호세아가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호11:1)유아학살이 예언 되어 있습니다.“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렘31:15)나사렛 귀환(사11:1)가버나움 사역(사9:1-2)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슥9:9)유대인들의 배척(시118:22-23)그리스도의 수난(시22:6)유다의 배반(시41:9)엍옷을 제비뽑기(시22:18)창에 옆구리 찔린 일(슥12:10)죽으심(신21:23)부활(시16:10)승천(시68:18)등등 예수님의 전 사역이 구약에 이미 예언 되었고 그 예언이 이루어진 사건이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오늘 본문에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하심이라.”(마1:22)는 말씀의 배경은 남왕국 유다의 왕은 아하스 때 일입니다. 아람왕 르신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베가 임금과 동맹을 맺고 유다를 침공하였습니다.(사7:1)이렇게 되자 아하스 임금은 물론 유대 백성들의 마음은 바람에 날리는 가랑잎 같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이사야 아들 스알야숩을 아하스에게로 보냅니다. “적들이 절대도 남 왕국 유다를 해치지 못할 것이니 겁을 먹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아하스가 그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네가 나에게 징조를 구해 보라”고합니다. 그래도 아하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남 왕국 유다의 구원을 외쳐도 도무지 아하스가 믿지 못하자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하스 임금을 구원해 주겠다는 최후의 통첩, 최후의 확약 같은 말씀입니다. 처녀가 아들을 낳는 것 같은 기적을 베풀어 남 왕국이 망하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람의 르신과 북 왕국의 베가의 동맹은 깨지고 유대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임마누엘 탄생 예언은 그 시대에 국한 된 예언이 아니라 700년 후에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었고 그 예언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완성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과 그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 앞으로 오실 재림들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났거나 우연히 생겼거나 어떤 소설가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대한 플렌 속에 있었던 사건이며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한 사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닮은 인간들이 타락 했을 때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얼마나 치밀하고 정확한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시며 또한 우리들을 구원하는 일이 하나님께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계획도 이렇게 치밀한 가운데 이루어 졌다는 사실입니다.
(4)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건입니다(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임마누엘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는 뜻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돈보다, 집 보다, 옷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부모가 함께 살면 돈이 없어도, 옷이 없어도, 가난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없으면 그 아이들은 사랑에 굶주리고, 고독하고 쓸쓸하고, 두렵고, 기쁨이 없습니다. 어린이들에게는 부모가 최고입니다.
우리의 영혼에 가장 중요한 존재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돈도, 명예도, 세상 권세도, 출세나 성공도 우리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죄에서 건져 주시고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세상의 각종 재앙과 두려움에서 건져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 반석, 요새,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산성이 되십니다(시18:2)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시27:1)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하여 오신 사건이며 주님의 승천 이후에는 성령님이 우리와 임마누엘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지금도 우리 심령 안에 내주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고전3:16)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저의 경험으로 보면 가난할 때도 함께 하시고, 병들었을 때에도 함께 계시고, 무서운 광야 사막 같은 도시 한 가운데 버려진 것 같을 때에도 함께 하시고, 내일에 대한 확신이 없어 수없이 방황할 그 때에도 주님은 여전히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개척의 현장에서 고민하고 낙심할 때도 주님은 함께 하셨고, 무거운 빚을 지고 몸부림치며 괴로워 할 때도 주님은 저와 함께 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미움을 받고, 무시함을 당하고, 배척함을 당할 때에도 주님은 함께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기뻐할 때도 주님은 함께 하시고, 내가 행복할 때에도 주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도 주님은 함께 계시고 내가 천국에 가는 그날 까지 함께 계실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여러분 각자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다 버리고 온 세상이 여러분을 버려도 주님은 버리지 않습니다. 아니 더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위로하시고, 동정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니다.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얼마나 좋은 날입니까? 성령께서 여러분 심령 안에 들어와 좌정하시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함께 하시다 천국 가는 그날 주님은 함께 천국까지 동행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