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나리
작사,곡 : 심수봉
노래 : 심수봉
큐피트 화살이 가슴을 뚫고 사랑이 시작된 날
또다시 운명의 페이지는 넘어가네
나 당신 사랑해도 될까요
말도 못하고 한없이 애타는 나의 눈짓들
세상이 온통 그대 하나로 변해 버렸네
우리 사랑 연습도 없이 벌써 무대로 올려졌네
생각하면 덧없는 꿈일지도 몰라 꿈일지도 몰라
하늘이여 저 사람 언제 또 갈라놓을거요
하늘이여 간절한 이 소망 또 외면할거요.
예기치 못했던 운명의 그 시간 당신을 만나던 날
드러난 내 상처 어느새 싸매졌네
나만을 사랑하면 안될까요
마음만 달아 올라 오늘도 애타는 나의 몸짓들
따사로운 그대 눈빛따라 도는 해바라기처럼
사랑이란 작은 배 하나 이미 바다로 띄워졌네
생각하면 허무한 꿈일지도 몰라 꿈일지도 몰라
하늘이여 이 사람 다시 또 눈물이면 안돼요
하늘이여 저 사람 영원히 사랑하게 해줘요
아~ 사랑하게 해줘요~~
간절하고도 절실하게 숨겨 둔 사랑을 기원하는 사랑노래 <비나리>
평소 차분하고 조용해 보였던 가수 심수봉이 자신의 사랑을 전하려고 노래를 만들었고, 열의 넘치는
모습으로 노래를 불렀음에 뭇사람의 관심을 끌었던 곡, <비나리>
사실 뜨거운 노래 <비나리>는 자기 인생에서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고 만든 청혼가
였다. 심수봉 같이 여리게 보이는 여인도 눈앞의 사랑 앞에서는 용감해 지는 모습에서 사랑의 힘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트로트 가수 심수봉(본명:심민경)은 1955년 충청남도 서산에서 태어났다.
민요채집가이며 국악 이론의 거장으로 이화여대와 숙명여대에세 강의도 했던 환갑 다 된 아버지 심
재덕과, 1.4후퇴 때 26세 처녀 몸으로 3남매와 함께 월남한 어머니 장형복은 가무에 능해 아버지의
제자가 된 인연으로 만났으며, 곧 심수봉을 낳게 됐다. 이렇게 출발된 심수봉의 인생길은 출발부터가 예
사롭지 않아 보였다.
그녀 나이 3살 때 부모님은 헤어졌고, 얼마 후 아버지는 62세 나이로 돌아가셨다.
아이 딸린 젊은 어머니는 재혼했고, 이부(異父) 남동생과 이부 여동생을 낳았다. 배다른 언니와 두 명
의 이부 동생들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가정 환경은, 심수봉에게 원초적 한의 정서를 남기게 됐다.
어린 시절을 충남 서산에서 자란 심수봉은 일찌기 천재적 음악 재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동네에 서산극장 악극단의 풍물패가 지나가면, 자다가도 바로 일어나 맨발로 뛰쳐나갈 정도로 소리
를 좋아했다. 심수봉은 유행가도 기막히게 잘 불러 동네 아줌마들의 인기와 관심 속에 유년을 보냈다.
진작에 딸의 음악 재능을 눈치 챈 모친은 그녀의 재능 발전을 위해 정성껏 지원해 준 것 같았다.
일 예로 모친은 수소문 끝에 서산에 한 대 뿐인 피아노 있는 집을 알게 됐고, 4살배기 딸을 데리고
그 집을 찾았다. 결국 그 집에서 2년간 피아노를 배운 심수봉은 음악의 기초를 닦게 됐다.
당시 음악 책의 악보를 보고 단번에 계명으로 노래를 부르는 아이는 심수봉이 유일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딸래미 음악 교육에 적극적이었던 건, 소질 보인 수봉에게 음악적인 뭐래도
해주고픈 모정의 속심이었다.
어린 나이 때부터 보인 심수봉의 음악재능의 원천은, 대대로 국악을 한 집안의 내력에서 찾을 수
있겠다. 심수봉의 증조부 심팔록은 피리 거장이었고, 조부 심정순은 판소리 대가였으며 아버지 심재
덕은 국악 이론의 명문가로 여대등에서 국악 강의도 했었다. 큰아버지 심상건은 인간문화재로 가야금
명인이었고, 막내 고모 심화영은 승무 무형문화재 보유자였다. 이들 외에도 집안에 국악을 한 다수의
어른들이 있었다 한다. 수봉의 모친 장형복은 가무에 능해 아버지 심재덕의 제자되어 배우게 됐다.
이처럼 그녀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국악을 했던 집안이었고, 대를 이어 내려온 집안의 국악 내력은 심
수봉의 핏줄로 연결돼 예능 유전자로 흘렀으니, 그녀 역시 음악과는 뗄 수 없는 팔자를 타고날 수 밖에
없었다.
정상에 우뚝 선 가수가 되기까지 심수봉도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었다.
평화와는 거리 있었던 그녀의 유년 시절. 3살 되던 해 헤어지게 된 부모, 헤어진 뒤 62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아버지. 재혼을 하게 된 어머니는 몇년 후 파경을 맞았고, 2학년 된 수봉이를 데리고 서울로
가게됐다.
몸이 약했던 그녀는 친구들과 귀신놀이 장난을 심하게 하다가 '뇌신경 인프레'란 병을 얻게 됐고, 정상적
교육이 불가해 휴학 후 요양을 하기도 했었다. 중학교 진학 후엔 이단 신흥 종교에 빠진 어머니 따라
그녀도 덩달아 빠지게 됐는데, 신흥 종교의 광적인 예배와 따르는 소음과 혼돈은 그녀에게 심한 두통을
주게 됐다. 이번에도 휴학을 하고 인천 무의도란 섬에서 요양 생활을 하게 됐다.
하루는 해변가에서 모르는 대학생 오빠의 부르는 노래 가사와 치던 기타 소리에 충격과 환희를 느끼게
됐고, 이때 무슨 악기래도 배워 연주하며 노래 하고픈 욕구에 시달리게 됐다. 결국 어머니에게 부탁해 마련
한 기타와 교본으로 연습을 하게 됐고, 다행스럽게도 건강도 회복하게 됐다.
이후 뒤늦게 인천에 있는 인화여고로 진학한 심수봉.
어느날 TV에서 여성 드러머의 연주 모습에 자극받아 음악학원을 찾아 정식으로 드럼을 배우게 된 그녀.
이때 듣게 된 그녀 소식에 당시 미8군 아나운서를 하고 있었던 배다른 큰 언니가 손민영 악단의 드러머를
소개시켜 줬다. 그에게 지도 받은 그녀는 아마추어 재즈경연대회에 출전해 입상할 만큼 실력도 늘었다.
음악계에서 괜찮은 드럼주자로 이름나기 시작했고, 로큰롤 보컬 그룹 '논스톱'의 드럼 주자로 미 8군 전
용 클럽 무대에 서게 됐다. 이후 남자 드러머 선배의 조언 받아 재즈피아노로 전향한 그녀는, 1973년 여고
졸업 후 이태리 고급 레스토랑 '라칸티나'에서 아르바이트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유명 밴드 마스터 엄토미로 부터 개인 파티에 가서 피아노 반주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됐다. 심수봉은 그 파티에 가서 엔카 몇 곡을 불렀고, 수고비로 이태리 레스토랑에서의 봉급 5만원의 4배
인 20만원을 받았다.
그 개인 파티는 청와대 박종규 경호실장이 주최한 비밀 사교 모임 연회였다.
그것을 시발로 몇차례 비밀 사교모임 연회에 가게 됐고, 그 인연으로 1975년 궁정동 안가까지 노래하러
가게 돼 박정희 대통령과의 첫 대면을 하게 됐다.
한편 1975년 학비를 벌려고 도쿄호텔에서 노래 부르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우연히 그곳에 들리게 된
나훈아씨가 그녀 노래를 듣고 그녀에게 가수의 길을 가게끔 강력하게 추천을 해줬다. 또한 나훈아씨와의 듀엣 앨범
을 준비하다가 여러 문제로 인해 그만 무산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경우를 접하면서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앨범이라도 하나 내고 그만둬야겠다는 오기에, 제 2회 mbc
대학가요제(1978.9.12)에 출전하게 됐다.
명지대학교 (이 학교 입학 전에 숙명여대 작곡과에 지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3학년 재학생( 24세, 사정으로 진
학이 몇 년 늦었다) 으로 대학가요제에 출전한 심수봉. 당시 대학가요제에 참여하는 대학생들은 포크나 록을 선호했던
시절이었음에도, 그때까지 자신이 연마했던 재즈도 마다한 채 통상적 가요에 재즈를 가미시킨 트롯곡<그때 그사람>
으로 도전한 심수봉. 대학가요제의 심사기준은 대학생의 덜 다듬은 풋풋함 이었지만, 심수봉은 자작곡인 <그때 그사람>
을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당시로서는 이변이라 할 퍼포먼스를 보인 것이었다. 기존의 대학가요제 성향에 익숙했
던 관계자들과 관중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당시 그녀의 노래를 접한 모두는 심수봉의 대상을 예견했지만, 의외롭
게도 수상은 하지 못했다. 심사위원의 의견은 여타 참가자들의 음악에 비해 그녀의 음악은 너무 프로처럼 보일 정도로
간극의 폭은 상당했기에 그런 의외의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그때 그 사람>으로 수상은 못했지만, 그 곡으로 정식 가수로 데뷔했고, 큰 주목도 받게 됐다. 1979년 지구레코사
의 권유에 그동안 몹시 원했던 독집앨범을 냈고, 그곡은 엄청난 인기를 얻은 히트곡이 되었다. 이 곡으로 그녀는
mbc 1979년 10대 가수상과 kbs 신인가수상을 수상하면서 단숨에 연예계 정상에 올랐다.
당시 함께 mbc 대학가요제에 참가했었던 참가자로는 노사연,배철수,임백천 등이 있었다.
한편 대학가요제를 통해 가수 데뷔한 후부터 본명인 심민경 대신 아는 스님이( 현재 그녀는 크리스찬이지만 그
이전에는 불교도였었다.) 지어준 법명인 심수봉을 예명으로 쓰게 됐다.
심수봉에겐 끔직한 운명의 날인 1979년 10월 26일
심수봉 개인적 입장에선 생각도 하기 싫은 저주받은 날이라 하겠다.
이날도 여느 때처럼 심수봉은 궁정동 안가에서의 연회에 불려 갔고 (이번이 박정희 대통령과의 3번 째 만남이었다.)
여기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게 된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목격하게 됐다.
심수봉은 합동수사 본부장이었던 전두환측에 의해 10.26사건 때의 동석을 이유로 갖가지 혹독한 조사를 받았고,
급기야는 정신병자로 몰려 정신병원에 한달씩이나 감금 되기도 했다. 조사 결과 그녀는 무혐의로 풀려 났지만,
신군부측으로부터 ' 심수봉의 얼굴을 보면 박 전 대통령을 떠오르게 한다' 는 이유로 방송금지 처분을 받았다 (1981년).
결국, 심수봉은 데뷔 직후 박정희 시해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데뷔 곡으로 얻게 된 달콤한 인기와 영광을
채 누리지도 못 한 채, 정치성 굴곡에 갇혀 고초만 겪게 됐고, 이로 인해 여자로서의 누릴 행복도 누려보지 못 한
채로 굴욕의 시간을 겪어야만 했었다.
10.26시해 사건으로 겪은 신군부측의 조사와 감시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폐해진 심수봉. 그런 그녀는 어머니의
소개로 심리학자 '한기석'을 만나 심리적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러다 치료 과정에서 애정이 생겨 둘은 동거 끝
에 결혼하게 됐고, 첫 아들(한승현)을 낳았다. 그러나 그에게 철저히 속았음을 알게 된 그녀는 결혼 1년만에 이혼했다.
방송출연 금지된 연예인이 된 그녀는 밤업소를 나가게 됐고, 이때 도움주던 사업가 '박진섭'과 재혼해 1984년 딸
(박성희)을 얻었다. 하지만 그 결혼도 6년만에 빛과 여자문제 등의 문제로 파경을 맞게 됐다. 두번의 결혼과 이혼
을 겪으며 연속된 사람의 거짓과 속임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던 그녀는 한때 대인기피증을 앓기도 했다.
한편 그 와중인 1984년에 방송 활동 금지가 풀리면서 발표한<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히트 됐고, 재기의
힘이 돼주었다. 그러나 이듬해 발표한 <무궁화>가 국민을 선동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방송된지 하루만에 금지곡이
되고 만 불행을 겪게 됐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그해 발표한<사랑밖엔 난 몰라>가 큰 히트를 쳤고, 이후 꾸준한 콘서트와 음반 발매를 하게
되면서 완벽하게 재기에 성공한 모습을 보여 줬다.
노태우 정부(1988 ~ 1993) 를 거쳐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방송활동 재개에 들어간 심수봉. 그의 일환
으로 1993년부터 2년간 MBC라디오 프로그램 ' 심수봉의 트로트 가요 앨범'의 DJ를 맡게 됐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더이상의 만남은 없을 거라는 그녀에게 새로운 사랑이 오게 됐는 데, 그 사랑은 심수봉
이 진행하던 그 프로그램의 담당 PD 김호영이었다. 당시 김PD는 상부로부터 어렵게 모셔온 분이니 잘해드리라는
당부에, 본인도 맡게 된 프로에 대한 일 욕심도 보태져 진행자 된 심수봉을 신경써 잘 대해 줬다.
사실 힘겹고 외로운 시간을 지냈던 심수봉은 그런 그에게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가정을 갖고 있는 유부남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본 그는 연하에 아들 하나 둔 이혼남이었다. 같은 아픔을 가졌음에 심수봉의 애틋함은 점차 커
져만 갔다. 그가 차지하는 마음이 커지면서, 짝사랑 비슷한 애정이 생긴 심수봉은 친한 지인들에게 그를 향한 자신
의 속마음을 털어 놓게 됐고, 지인들은 그녀의 속마음을 김PD에게 전하게 됐다. 하지만 전해 들은 김PD는 자신에겐
그런 마음이 없다는 대답을 했다.
그의 부정적인 반응을 전해들은 심수봉은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를 향한 절절한 마음은 점점 더 커져만 갔고, 결국
은 본인의 절실한 사랑을 고백한 사랑 노래<비나리>를 만들게 됐다. (가사가 너무 애절한 가슴 아픈 사랑노래인 <비
나리>엔 이 남자만을 꼭 잡고자 하는 심수봉의 집념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 미남이 보기엔 - 아직까진 <비나리>는
정규 앨범이 되기 전 이었다.)
결국 비오는 어느날 김호경 PD는 심수봉에게 얘기를 나누자고 했고, 차가 없던 김PD는 심수봉의 차로 집앞까지
갔다. 이때 차 타고 오는 중 말 한 마디 없었던 그는 내릴 즈음 나 때문에 만든 노래가 있다고 하니 그 노래를 들어
보고 싶다고 했다. 이에 심수봉은 갖고 있던 반주용 음원인 MR(Music Recorded)을 틀어 놓고 직접 노래를 불러 들려
줬다. 노래의 가사에 담긴 심수봉의 속마음에 감격했는 지 연달아 8번씩이나 청해 노래를 듣고는 결혼하자고 말했고,
이에 심수봉은 좋다고 답했다.
1995년 가슴 시린 사연 많은 41세 심수봉은 지금의 남편인 라디오 방송PD 김호경씨와 결혼했다.
이후 심수봉은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됐고, 뒤늦게나마 한 여인으로서의 진정한 행복을 만끽하게 됐다.
늦게나마 뒤늦게 찾은 행복에 축하를 전하며, 그 행복 영원하길 기원하고픈 심정임을 표현하고 싶었다.
사실, 심수봉은 대한민국 대중 가요사에 보석같은 존재다.
70,80년대 대중가요를 논할 때 심수봉을 빼고 논하기는 어렵다.
심수봉은 그만큼의 영향력을 지닌, 시대를 주름잡은 불세출의 가수요 트로트의 여왕이었다.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음악 재능을 보였다는 심수봉.
피아노, 기타, 드럼등 여러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음악적 재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그의 노래는, 대부분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을 했다. 그래서 그녀는 대한민국 1세대 싱어송라이터 ( singer song writer, 노래를 부르면서 작사나 작
곡도 겸하여 하는 사람) 라는 평을 받았고, 그에 합당한 인정과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격 갖춘 심수봉은 여타
트로트 가수와는 다른 진정한 트로트 아티스트(artist, 여러 작품을 창작하거나 표현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라 하
겠다.
비음을 기막히게 잘 쓰는 그녀에겐 더불어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감성도 있다.
그녀에겐 흔들림 없이 선율을 장악하는 비음 섞인 떨림도 있다.
구슬픔이 담겨 있는 애잔한 음색에, 천부적으로 켜켜히 쌓여있는 한국적 한이 담겨 있는 목소리를 가진 심수봉.
속으로부터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천상의 목소리로 힘겨워하는 많은 이들을 위로해주며, 오래도록 듣게 되기를
진정 바라는 마음이다.
1세대 트로트 싱어송라이터로서 대한민국 가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심수봉은 CJ ENM ( CJ 오락, 판촉 이정도
로만 알아도 상관없음)이 주최하는 음악 시상식인 2009년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 (Mnet Asian Music Awards)에서
첫 번째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2018년(문재인 정부 : 2017~2022)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後 記
1) 어느 비오는 여름밤에 유튜브 뒤지다 우연히 듣게 된 심수봉의 <비나리>
그날 따라 유다르게 가슴 깊이 파고든 심수봉의 애절한 노래소리
그 소리에서 축축한 물기운을 강하게 느낀 쓸데 없고 번지수 틀린 미남의 감성
그런 후 한참지나 또 비오는 날 저녁에 반복해 듣게 된 <비나리>
듣고 나서 바로 심수봉의 내력을 찾아 훓어 봤다.
탄생부터 세 번씩 결혼하기 까지의 인생 역정을 대충 훓은 후 제대로 알기위해 그녀를 파기 시작한 미남.
여기저기 자료는 많았지만 부실한 내용에 그 마저도 틀린 자료 투성이었다.
그래도 그런 자료들을 참고해 가며 제대로 글로 옮기는 데 적지않은 시간이 제법 걸렸다.
심심풀이 삼아 읽어들 보시고, 혹시라도 나름의 의견이 있을 시 과감히 올리시길 진정 바라겠소
2) 인생 출발부터 원만치 않아 보인 심수봉
하지만 神, 아니 그의 친가쪽 조상님들은 그녀에게 오랜 세월 대대로 연마해 축적된 음악 재능을 아낌없이
선물했다. 그것도 고품질로 ~~~
살아보니 쓸만한 재능을 하나라도 물려 받을 수 있다면, 인생살이에 큰 도움이 될 텐데 말이다...
그런식으로 생각해 보면 주어진 인생도 복불복인 면이 제법 있는 것 같기는 하다.
나에게도 받았으면 하는 부러워 했고 원했던 재능이 있었다.
늦은 나이에 밝히기엔 계면쩍은데 그 재능은 수리쪽 ( 특히 수학 능력 ) 재능인 데, 중고등시절
수학때문에 엄청 고생했고,속도 무척 상했고,그리고 수학 때문에 운적도 있을 정도로 엄청 속상했던
때도 있었다^^ 수학에 대한 원망은 그 이후로도 아쉬임으로 남아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에 이해 못 할 존재가 있어 내게 의아심과 스트레스를 줬던 이가 있었다.
당시는 매달 시험을 치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관심 있으면 그들의 성적은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이해 못 할 존재는 상대적으로 쉬운 과목 성적은 보통 정도 였었는 데,희한하게도 수학 성적은
아주 좋았다. 나로서는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해서 하루는 그 친구에게 물어 봤다.
보기엔 평소 공부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유독 수학 점수만 높게 받는 비결이라도 있냐고 물어 봤다.
이때 열 받고 속상한 대답이 나왔다.
자기는 평소 별도로 공부하는 것도 없으며 자기에겐 수학이 그저 쉽게만 여겨진다는 의외의 대답.
아마도 그에겐 수리 재능이 주어진 것 같다.
이 인간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로 갔고,당시 전교생이 720 여명 였었는 데 이 인간만 교대로 진학했고,
같은 선생 만나 잘 지내고 있다. ( 이런 말하기에 X팔린데 당시 선생은 별 인기없던 시절이라 고득점자들의
관심에서 벗어났던 때이었다.^^)
심수봉 음악재능 애기하다 엄한 친구까지 끌어 들이고 말았네~~ 미안타 그 친구야^^
3) 심수봉 노래를 듣다 보면 이 여자는 물 기운으로 가득찬 것 같다.
심수봉 노래에는 저변에 눈물이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반복해 듣다 보면 가슴 한 가운데서 솟는
눈물을 한없이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 ^^
어쨌든 심수봉 노래의 참맛을 느낄라면 한여름 비오는 밤에 듣기를 강력하게 권하는 바이다.
그것도 한 잔 기울이면서 말이다.
4) <비나리> 가사 첫 구절 첫 단어로 로마신화의 사랑의 신 큐피트까지 호출 한 걸로 봐서,
심수봉의 다급하고도 애절한 속마음을 가히 짐작할 만 하겠다.
처음으로 진정한 사랑을 느낀 남자인 현 남편 김호경씨를 어떻해서라도 반드시 잡고 말겠다는 집념을
의미한 듯한 큐피트의 화살^^
그 화살에 맞은 적은 몇 번 있었는데 (?^^), 제대로 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5) 각자 마다 나름의 사정과 사연을 지닌 채로 살아가고 있다.
길고 긴 삶을 살아가면서 모든 일이 뜻한 대로 풀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생살이가 결코 쉽지만은 않은 긴 여정이라는 것을 모두는 잘 알고 있다.
6) 나름의 느낀 걸 글로 옮기다 보니 어설픈 소설흉내 내는 것 같기도 했고, 질 낮은 다큐멘터리를 쓰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었다.
비록 어설픈 소설 흉내를 내던, 아니면 저품질 다큐멘터리를 흉내 내던 읽을 이들을 생각하며 성의 없는 글 쓰
기는 애시당초 없었다고 생각한다.
7) 아들래미가 입대일을 며칠 남긴 채 원고 타자를 쳐 줬다.
이 점 고맙게 생각하고 그의 건강한 군생활을 재삼 기원했다.
하지만 생긴 걱정거리에 벌써부터 골치가 아린다.
그동안 몇푼 잔돈으로 회유하며 타자치는 것을 맡겼건만,이제 그런 인물이 당분간 국가에 불려가게 됐다.
그러나 그까짓 것 하며 일소에 부치련다.
왠 배짱?
배짱까지는 뭘,왜 있잖아,이 없으면 잇몸이란 명언 말이다.
비참한 타자 실력을 달래가며 더 긴 시간과 더 큰 수고를 뒀다 어따 쓰겠나^^
8) 심수봉의 노래를 무척 좋아했었다.
예전 노래방이라도 가게되면 빼놓지 않고 불렸던 그녀의 노래들...
개인적으로 그녀의 노래중에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곡은 1987년에 발표했던 <사랑밖엔 난 몰라>이다.
가사속의 그런 사랑도 무척 바라고 염원했고 세상만사에 대한 사랑도 극하도록 하고는 싶었는 데....
9) 비나리의 의미
비나리는 소원을 비는 축원의 뜻을 지닌 '빌다','비나이다'의 명사형의 단어다
예전에 마당굿을 마친 후 풍물패의 풍물재비가 고사 상 앞에서 부르는 소리로 알려져 있다.
첫댓글 어떤 주제에 대한 철중이의 연구결과를 읽는 것 같다. 마치 대중음악평론가가 작성한 칼럼같다고나 할까! 어떤 이의 위인전를 읽는 것도 같고ㅡ
그 노력에 경의를 표하면서 앞으로도 더욱 좋은 내용을 기대해 본다.
마음 한 편에는 너무 내용이 깊은 글로 다른 이들이 글 남기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고ㅡ
쓰면서도,그리고 다 쓰고 나서도, 흡사 심수봉의 자서전 혹은 일대기를 쓴건 아닌지
본인도 의아스럽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가능하다면 심수봉씨를 단독으로 만나 흡사 유명 일간지의 연애 전문 기자처럼
인터뷰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상상을 이번 글을 쓰면서 하긴 했었는 데~~~
어쩌랴~~늘 가진 주제(현실) 이상의 상상을 하게되니~~~
상상하는 사람도,옆에서 보게된 사람에게도 더이상 불가로 괴롭히는 걸 그만
둬야 할텐 데.....
상수야,늘 보여준 성의에 그저 고맙다는 표현만 반복하는구나~~~
그래도 고맙다는 표현이외 다른 방식을 시도한적도, 또 실제로 해본적도 없어서~~~^^
무언가를 사는걸 무척이나 싫어하는-중고교시절 참고서도, 대학때 교재도 안 산- 이넘이
카셋트테이프를 갖고있는, 수봉누님의 일대기를 올렸구나.
삼십언저리때부터 무척이나 좋아했던 사람인데..노래 몇곡외엔 생각보다 아는 것이 없었네
미나미, 한번 꽂히면 참 열심히도 찾아보고 이해하고 공감을 위한 재미진 썰을 풀어주는 구나.
미나미를 통해 알게 된 그 이의 인생역정이 가뜩이나 씰씰한 비오는 오후, 할 일없는 이넘에게
몇가지 깨우침을 준다.
-행복 정량제의 법칙 : 저 높은 곳에 계신 그 어르신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양의 행복만을 주시는가 보다
그이에게 보석같은 재능과 무어라 말할수 없는 음색을 선물하더니, 평안과 사랑이란 걸 원천징수하셨던듯..
-씨도둑은 없다 : 심팔록 어르신 혹은 파악안되는 그웃대에서 비롯된 재능이 몇다리 거쳐서 분명하게
울 수봉누님에게 등기배송.
-큐피드의 화살 의 유용성 : 사실 언젠가 심선생의 결혼 비슷한 기사를 보고 그 상대방에 대해 측은지심을
슬쩍 가졌던 적이 있었다. 저런 간절함이 깃든 화살의 힘이란 것도 모른채..
미나미도 몇번인가 맞았다는 그 화살..
먼지쌓인 다락에서 찾아서 더 늦기전에 함 쏴봐야 안되겠나?!
동기 카페가 시작된 이후,그리고 10여 년전 원주 모임에 참석을 시작으로 미남의 동기회 모임의
정상적 참석과 참석기를 작성한 이후부터 쓰게된 나름의 글에, 빠짐없이 댓글을 작성해주며 오늘날
까지 보여준 그 관심과 성의에 거듭 감사를 표하고 싶다.
단순한 댓글보다는 뭔가를 지적하고, 그 이상가는 뭔가를 제시해주곤 했었던 정남에게도 그저
고맙다는 말로만 표현하게 됐으니 이걸 어쩌누~~~^^
이번에도 세가지 깨우친 바를 제시했는데,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 다 맞는 말이고,흘러온
세월의 내력과 경륜의 실제가 만들어 낸 살아있는 진리라 하겠다.
마지막 큐피트의 화살,그 화살을 제대로 쏴보기를 응원하는 듯한 그 말,그 말 듣게됨은
틀림없이 미남의 오늘밤 불면의 원흉으로 날뛸 것 같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 마음의 여유를
갖기조차 쉽지않은 이 삭막한 시절
에 한때 너무 좋아했고 지금도 여전
히 좋아하고있는 가수와 그 가수의
노래를 이렇게 들려주어 진심으로
감사하네~
복 받으시게^^
여전히(?) 웅큼한(밝은 면으로) 구석이 남아 있을지도 모를 승호의 은근한 너스레~~~
거의 40 여년 만의 승호는 그 40 여년 전에 비해 엄청날 발전과 변화를 이제사
보고 느끼게 된 것 같기도 하고~~~
분명한 건 그의 선한 품성과 자잘한 속임없는심성이 여전하다는 것~~
어제(7월 21일) 카페의 글을 보고 보낸게 확실해 보인 그가 보낸 세글자 메세지 " 알았네 "
그로부터 처음으로 받아 본 세글자 메세지가 의미하는 바를 모르겠으니, 카페 본문에 그
내용을 답글로 표하는 걸 요구했더니(폰 메세지로),금일자로 이렇게 답글로 세글자로 된
메세지의 실 내용을 올렸다.
더 이상의 의문과 의심은 필요치 않을 것 같다.
위의 증명된 그의 솔직한 대응을 보며 그의 만사도 그럴 것이란 생각이 미남의 속심에 새겨졌다.
그런 미남의 마음이 차후의 변화로 바뀌지 말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승호,난 아직도 프랑스 지중해 동부 해안에 위치한 도시국가인 유럽 귀족과 부유한 이들의
놀이터인 모나코,그중에서도 몬테카를로에 가기를 꿈꾸고 있다네~~~~^^
@미남 여전히 응큼한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는 나의 첫인상을 이제는 벗어나려
하는데도 그 또한 쉽지않음을 다시
한번 느끼네^^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니 언젠간
이루어지지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대해보네.
그날을 기대하며 열심히 달려
가세^^
@만득이(승호) 꿈이라....
꿈 중의 하나일 수도 있겠다.
007영화 시리즈 중 < 카지노 로얄 > 속의 배경중의 하나로 등장했었던 "몬테카를로"
카지노로도 유명한 Monaco 에서도 가장 부티나고 물 좋은 카지노가 위치한 명소인
"몬테카를로". 호사스럽고 멋지게 꾸며진 건축물에 등장 인물들도 하나같이 귀족같이
여유스럽게 보이고,사방에서 유혹스런 자태와 미모를 과시하는 듯한 미녀 무리들~~~
그 미녀들의 미모 감상하기에도 하루해는 너무 짧겠다~~~
여유있어 보이는 미모와 차림새의 마담이 능숙하게 따라 주는 시원스런 삼페인~~~
따라준 샴페인을 한모금 마시며, 세련된 마담을 녹일듯하게 바라보는 촌스런 모양새의
미남이라~~~저 인간이 삽시간에 털려 벌거숭이로 바뀌기엔 한밤도 너무 짧겠다
옆에서 미색에 녹아 집 팔고 땅 팔고 마련해 온 꼬랑내 나는 한 밑천을 빨리는 미남을
보면서도 어쩌지도 못 한채,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승호~~~
어쩌랴 이미 털린 입장 되버린 승호 입장이라~~~모종의 조치도 취하지 못한 승호의
안타까움~~~
그래도 사지에 힘이 남았을 때 찿았으면 그아니 좋을쏘냐!!!
우선 본인이 작성한 글에 대한 댓글을 올려주신 여러분들의 성의에 우선 감사의 인사부터 올립니다.
늘 생각이 부족하고 기량이 모자란 글을 정성껏 읽고 살핀후, 부족하고 아쉬운 점을 찾아 일일히
지적해 주신 여러분의 관심과 정성에 그저 고맙고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좀더 발전된 기량과 세련된 문구로 보여주신 정성에 걸맞은 문장으로 답함으로 인사드릴 그 날을
앞당길 수 있게, 책임있는 모습을 하루빨리 보이고 싶은 마음은 크나 그날을 장담 못함을 어찌하려는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