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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연화도
통영항에서 남쪽으로 24km 해상에 위치하고,북쪽으로 우도,서쪽으로 욕지도가 자리잡고 있는 연화도는 면적 1569㎢, 100여세대가 살고 있는 작은 어촌의 섬이다.
연화도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연산군의 억불정책에 쫓겨 낙도를 찾아 은신한 연화도인이 제자 3명과 함께 연화봉 암자에서 전래석을 모셔놓고 도를 닦으며 살아가다가 연화도인이 죽자 제자들과 섬 주민들이 도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수장하게 되는데 그 순간 도인의 몸이 한송이 연꽃으로 변해 승화되었다"라는 전설에 유래하여 연화도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섬의 형태가 연꽃과 같이 생겨 연화도라 이름지었다고 알려지기도 한다.
또한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연화도 정상의 낙가산 연화봉(212m),보덕암,용머리로 이어지는 산행코스는 많은 이들로 하여금 연화도를 찾게 만들고 있으며 만불상,촛대바위 등 기암괴석이 웅장한 해안절경도 일품이다
시청에서 남서쪽으로 약 18㎞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우도·적도·쑥섬·봉도 등과 함께 연화열도를 이루며, 남서쪽으로 약 4㎞ 떨어진 곳에 욕지도가 있다. 섬의 모양이 연꽃처럼 생겼다 해서 연화도라 했다.
최고봉은 섬 남쪽에 있는 연화봉(212m)이며, 그밖에도 150m 내외의 구릉들이 해안 가까이에 있어 섬 중앙은 분지를 이룬다. 북동쪽과 남쪽에 깊은 만이 있고, 곳곳에 소규모의 돌출부가 있다. 북동쪽 해안을 제외하면 대부분 암석해안을 이루며, 남쪽 해안에는 해식애가 발달해 선박의 출입이 불가능하다. 기후는 대체로 온난하고 비가 많다. 동백나무와 풍란이 자생한다. 주민은 반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며, 농산물로는 보리·콩·고구마·마늘·고추·밀감 등이 생산된다. 특히 고구마는 생산량이 많아 농업협동조합 수매가 이루어지고, 마늘은 부산·마산 등지로 직거래되기도 한다. 연근해에서는 도미·방어·볼락·낙지 등이 잡히며, 김·굴 등의 양식이 이루어진다. 취락은 중앙 분지와 북쪽 만 안의 심리골마을·본촌마을, 동쪽 만의 동두마을에 분포한다. 능선을 따라 우마차로가 나 있으며, 통영항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운항된다. 면적 1.57㎢, 해안선 길이 12.5㎞, 인구 217, 가구 105(2004).
연화사
연화사는 통영시 욕지면 연화리에 위치하고 대웅전,석탑등이 1,300여평의 자리잡고 있으며 이곳의 기원은 400년전 연화도사,사명대사,자운선사등이 이곳에서 수행을 했다.
1998년 8월 고산스님이 창건을 하였고 대웅전,3각9층석탑,요사채2동,진신사리비,연화사 창건비등의 건축양식들이 있고 연일 불교신도들의 방문이 잦은곳이기도 하고 연꽃위에 사찰이 위치하고 있다.
용머리해안(기암괴석이 절경 )
연화도사
한산도 욕지도 사량도 비진도 등은 외지인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만 연화도의 아름다움은 통영인 만이 알고 있는 작은 행복이다. 작은 섬 연화도엔 엄청난 세월의 흐름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한려수도의 중심지인 통영항에서 남쪽으로 24km 해상에 위치한 연화도는 4백여년전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과 불교계의 거승 연화도사, 사명도사, 자운선사 등에 얽힌 전설이 역사적인 사실로 밝혀짐에 따라 전국 승려들이 순례하는 도승지로 임진왜란과 해전법을 연구하는 사학자들의 답사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오는 31일 연화사가 창사식을 가진 후가 되면 더욱 그러할 것으로 예상된다.
통영시 관내 43개 유인도 중 가장 먼저 사람이 살았다는 섬, 통영시 욕지면 연화리 연화도. 총면적 3.41km에 주민 2백94명(93가구)이 어업을 주업으로 고기를 잡고 섬 주위에서 생산되는 패류와 해초류를 채취,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섬이다.
연화포구를 둘러싼 사방이 기암절벽으로 형성되어 용머리, 소섬, 촛대바위 등 푸른 바다와 어울러진 자연경관이 빼어난데다 연화도사가 수도했다는 서낭당(실리암)과 도승들이 부처처럼 모셨다는 전래석 「둥근 돌」 등 도승들의 유물이 산재해 있어 남해안의 절경과 사적들을 함께 감상할 수 있고 섬 주위에도 낚시도 즐길 수 있어 새로운 관광섬으로 부각되고 있다.
또 3년전 부터 불교도량인 연화사가 건립되면서 볼거리는 더욱 많아지고 있다. 연화사 대웅전의 본존불인 아미타여래불과 좌우협시불, 대웅전 앞 마당의 사찰창건비명과 스리랑카에서 직접 모셔온 석가여래 진신사리 창건공덕비, 8각9층탑도 새로운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하다. 더구나 이 사찰의 창건주는 한국불교계에서도 유명한 고산스님이어서 법문을 배우러 오는 이가 줄을 이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통영시가 추진중인 미륵도 관광특구 개발사업과 병행, 연화도를 중심으로 비진도, 욕지도, 두미도, 추도, 매물도 등 주변 섬들에 대한 한려수도권 개발사업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더우기 연화도는 상봉인 연화봉(해발 210m)에서 바라보면 소지고와 매물도, 죽도, 홍도, 욕지도 천황봉이 한눈에 들어오고 맑은 날에는 일본 대마도가 선명하게 바라보여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흥취를 돋구어 주기에는 손색이 없다. 연화도의 역사는 전남 순천 승주향토지의 기록을 토대로 지난 80년 이후 향토사료 수집가들에 의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승주향토지에 수록된 연화도의 역사는 조선 24년 이 충무공이 순천부 좌수사로 있던 시절, 이 지역에 산재한 많은 섬들 중 이곳에만 사람이 살고 있었고 이 충무공이 관장하는 좌수영에 예속되어 있던 섬이었다.
4백여년전 이 섬에는 연산군의 억불정책에 쫓겨 낙도를 찾아 은신한 연화도사가 비구니 3명과 함께 연화봉에 암자를 짓고 전래석(둥근돌)을 모셔놓고 도를 닦으면서 살아 왔다는 것.
그후 연화도사가 타계하자 비구니들과 섬 주민들은 연화도사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바다에 수장하니 도사의 몸이 한송이 연꽃으로 변해 승화하였다고 하여 이때부터 이 섬을 연화도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연화도사를 봉양하던 비구니들이 떠난 후 도사의 불심을 계승하기 위해 이 섬에 들어온 사명대사(본명:임승규, 승명:유정)가 연화도사의 뒤를 이어 서낭당에서 수도했는데 사명대사의 행방을 찾아 전국을 헤매다 찾아온 대사의 누이 임채운(승명:보운)과 속세에서 대사의 약혼녀였던 황현옥(승명:보련), 대사를 짝사랑하다 수도승이 된 심설정(승명:보월)등 세 비구니가 함께 수도하다가 사명대사가 섬을 떠나버린 후에도 도를 닦으며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섬 주민들은 이들 세 비구니를 일컬어 자운선사라고 불렀고 자운선사는 일찍이 득도하여 만사에 형통했다고 한다.
이들은 도심을 통해 미구에 임진왜란이 발발할 것을 예측하고 이순신 장군을 만나 거북선 건조법, 해상지리법, 천풍기상법 등 우리 수군의 대책을 알려 주고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에도 그들이 몸소 이순신장군 슬하 장족의 한사람으로 해전에 참가하여 옥포승첩과 한산대첩을 이룩하는데 공헌했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역사적인 기록은 지난 75년 전남 순천 문화원이 발간한 승주향토지에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는데 현재 연화도에는 이 기록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둥근 돌과 서낭당 석굴 등 유물들이 주민들에 의해 보존 관리되고 있어 사명대사와 자운선사들의 호국지심을 증명하고 있다.
또 연화도사가 연화도의 영원한 번창을 기원해 주기 위해 손가락으로 썼다는 富吉財(부길재)란 글자가 연화봉 아래 넓은 반석 위에 역력히 남아 있어 전설처럼 전해오던 역사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연화도의 역사적인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연화도에서 사명대사와 보운, 보련, 보월 네사람이 처음 상봉했을 때 지었다는 시를 승주향토지는 소개하고 있다.
괴담-연화도 도깨비
우리 나라의 남해에 위치함 섬중 연화도란 섬이 있는데 지금은 관광지로 어느정도 알려져 있지만 예전에는 육지와 교류가 적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섬은 최근에 까지 도깨비 같은 신비한 존재에 대한 목격담이 많았다고 합니다 1982년경 섬의 주민들이 밤에 물고기를 잡고 있을 때 였습니다..
그날따라 물고기가 잡히지 않아 의아해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돛을 단 배가 엄청난 속도로 이쪽을 향하는 것입니다.
"저기 머꼬 밴거 가튼데"(저게 뭐지 배인같은데)......
"머시 저리 빠리노 바람도 코빼기도 안부는데 우찌 배가 저리 빠리단 말고"
그날은 바람이 부는 날도 아니였는데 작은 돛단배는 엄청 빨랐고 더 황당한건 그렇게 빨리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물살이 전혀 없었다는 겁니다..
섬 주민들은 불안한 마음이 들어 배의 바짝 엎드렸습니다..
그 배는 주민들이 탄 배를 스쳐 가던가 싶더니 갑자기 멈췄다고 합니다..
주민들이 고개만 살짝 내밀고 쳐다보니 그 배엔 어마어마 하게 큰 키를 한 사람이 서 있었는데 머리는 산발하고 벌거벗은 몸엔 뻣뻣한 털이 나있었다고 합니다..
그 정체불명의 존재는 고개를 두리번 거리고 있었는데 연신 쇠를 긁는 듯한 괴음과 함께 비린내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잠시후 배는 다시 움직이더니 어디론가 향했고 주민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도깨비의 소행 같은 요상한 일은 많았다고 합니다..
한번은 소가 이유없이 3마리 죽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원인을 알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섬에 놀러온 2명의 도시 사람이 마을 뒤 바닷가에서 밤늦게 낚시를 하러 갔는데 자정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민박 주인이 걱정되서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해 그들을 찾도록 했는데 마을로 오는 언덕 중간에 쓰러진 체 발견 됬는데 온몸에 타박상을 입고 있었고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치료하고 육지에 연락해서 병원으로 데려가게 했는데 다행히 그들은 무사 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말로는 섬으로 오는 길에 누군가 자꾸 그들의 옷을 잡아 당겼고 화가 나서 욕을 했는데 갑자기 돌들이 날라와서 그들을 두들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섬 주민들 말로는 그들이 쓰러진 곳 어디에서도 돌 조각 같은건 없었다고 합니다..
연화도 특산물
전복
해삼
고등어
굴
멸치
풍란
소라
100% 자연산 욕지도 참소라로 해녀가 하나씩 직접 건져 올린 것입니다.자연 청정해역에서 자란 참소라를 욕지도에 오셔서 직접 구경하세요. .
고구마
줄기는 길게 땅바닥을 따라 뻗으면서 뿌리를 내린다.줄기 밑쪽의 잎자루 기부에서 뿌리를 내는데, 그 일부는 땅속에서 커져 덩이 뿌리인 고구마가 된다.고구마는 흉년에 재배하기 알맞은 구황작물로 원래 가뭄이나 척박한 황토성 토질과 경사가 심하여 물빠짐이 양호한 곳에 적합한 작물이다.
생선회
생선은 종류에 따라서 육질이 단단한 어종과 연한 어종으로 구분되며, 단단한 육질로 고급 생선 횟감인 복어, 넙치, 돔, 전복 등은 근육중에 콜라겐 함량이 많고, 연한 육질인 참치, 방어 등은 콜라겐 함량이 적다.
김
해태(海苔)라고도 한다.연화도 앞바다의 암초에 이끼처럼 붙어서 자란다.길이 14~25cm, 나비 5~12cm이다.
몸은 긴 타원모양 또는 줄처럼 생긴 달걀 모양이며 가장 자리에 주름이 있다.몸 윗부분은 붉은 갈색이고 아랫부분은 파란빛을 띤 녹색이다. 10월 무렵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겨울에서 봄에 걸쳐 번식하고, 그 뒤는 차차 줄어들어 여름에는 보이지 않는다.
문수암
문수암(文殊菴)을 창건했다는 의상대사(義相大師)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다른 것은 몰라도 남해의 쪽빛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청량산(淸凉山) 능선이 굽이굽이 치며 뻗어가다가 끝자락에서 깎아지른 듯 위태로워 보이는 수직 암벽의 정상 부근에 절터를 정했던 마음을 헤아려 보고 싶다. 설화에 따르면 현몽(現夢)으로 터를 결정했다는데, 터무니없이 엉뚱한 나래를 펴고 생각에 잠겨본다.
크고 작은 섬들이 바다 위에 점점이 떠있는 다도해(多島海)의 장관을 한 눈에 담을 산자(山姿) 수려한 기암절벽의 산비탈에 절터를 정했던 유별난 안목에 대하여 우매한 상상을 즐긴다. 그가 고승(高僧)이라고 해도 바닷가 태생이거나 요산요수(樂山樂水)에 달관했으며 자연의 조화를 깨우쳐 진정한 풍류객의 반열에 이르러 범상치 않았을 것으로 유추된다. 왜냐하면 적어도 1300 여 년 전에 험한 산골짝으로 호랑이가 득실거렸을 법한 외진 바위산 가파른 비탈 꼭대기에 절을 안치할 생각을 한 사실을 두고 하는 얘기이다. 이런 조건이면 절을 짓는 불사(佛事)는 고사하고 맨몸으로 기어오르기도 힘겨운 험준한 암벽이 틀림없지 않은가.
언젠가 데면데면한 조우로 어쭙잖게 첫 친견례(親見禮)를 치렀던 문수암을 다시 찾아 나선 길이다. 내가 사는 마산에서 통영으로 향하는 14번 국도를 달리다가 고성(固城)을 알리는 표지판을 따라 우회전하여 고성읍으로 향한다. 읍(邑)에 들어서면서 오른쪽에 버스터미널을 끼고 계속 직진하면 된다. 이렇게 앞으로 직진하면 진주(晋州)와 사천(泗川)을 가는 33번 국도로 들어서 대략 9km를 달리다 보면 '문수암'은 좌회전하라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이 때부터 왕복 각각 일차선 시골도로를 이십분 가까이 구불구불 산 속으로 파고들며 골짜기의 위쪽을 향해 달리다보면 산중턱에 넓은 주차장과 상가(商家) 몇 채가 나온다. 여기에 왼편으로 가면 보현사, 오른편으로 가면 문수암이라는 엉성한 안내판이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 갈 수도 있고, 사람이 들끓는 계절이 아니라면 암자 바로 아래까지 차를 타고 갈 수도 있다. 한편 북쪽에서 찾아오는 경우는 '대진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다 '고성' 나들목에서 고성 방향으로 빠져나와 14번 국도로 들어와서 몇 분 달리면 역시 고성읍으로 진입한다.
암자의 턱 밑의 좁다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불과 몇 분만에 가파른 바위 절벽을 가로막고 성벽처럼 버티고 있는 요사(寮舍) 채이면서 수련장으로 쓰이는 큰 건물 앞에 이른다. 이 건물은 너무 가파른 비탈에 바다 쪽을 향하여 위치하고 있어 처음 대하면 위태롭다고 생각되며 암자의 본 채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평소에 걷기를 게을리 한 사람은 여기에 이르면 숨이 차고 다리가 후들거릴법하다. 이럴 경우 요사 채 정면을 지나 오른쪽 옆으로 나있는 돌계단을 따라 오르다가 암반을 타고 내려와 식수대(食水臺)에 고여있는 석간수를 한 바가지 떠서 마신다면 금상첨화의 휴식이 되리라. 이 때 옆에 세워진 암자의 유래를 소개하는 안내판을 읽으면서 숨을 돌린다면 일거양득(一擧兩得)이 될 성싶었다.
요사 채 오른쪽 측면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오르다 석간수로 목을 축이며 숨을 돌리고 우측에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작은 암반 언덕에 울타리가 있고 입구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계단에서 내려서 입구를 살펴보면 청담대종사(靑潭大宗師)의 사리탑(舍利塔)이다. 사리탑을 확인하고 계단으로 올라와서 몇 걸음 내딛으면 옹색하게 앞을 가로막는 종무소(宗務所)가 있다. 이 앞에서 왼쪽으로 조금 오르면 우측으로 스님이 기거하는 건물과 문수암 본 채와 작은 앞마당이 있다. 이 문수암 본 채는 언제 봐도 불자들이 불공을 드리거나 참배하는 모습이 경건해 보인다. 거기다가 문수암 본 채의 마당 한쪽에 자리한 노거수(老巨樹)인 느티나무는 묵묵히 이 절의 역사를 웅변하는 존재의 지킴이 같기도 했다. 또한 스님들이 거처하는 건물 왼쪽으로 철제 난간을 잡고 어렵게 오르내려야 할 비탈 위쪽에 자리잡은 작은 각(閣)이 있었는데, 현판이 없어 무슨 용도인지 알길 없었다.
문수암의 불문(佛門) 쪽 갈래는 조계종이고, 속세의 가름으로는 '경상남도 고성군 상리면 무선리 산 134'에 자리하고 있다. 이 터에 절이 들어서지 않았다면 어느 누가 꿈엔들 이곳을 기억하랴. 풍수지리에서 암반 층은 혈기(穴氣)가 세기 때문에 명당이라고 해도 보통 사람은 제대로 다스리기 어려우리라. 이런 연유에서 암반의 드센 혈기를 누르고 절을 지어 부처를 안치시킴으로써 천년암(千年庵)으로 의연하게 빛나고 버텨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승에서 삶이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산동네 언덕빼기의 가파른 계단보다도 경사가 심해서 현기증이 일고 복(福)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을 것 같은 바위절벽에 위태롭게 자리한 절에 무슨 축복으로 천년의 세월을 거뜬하게 뛰어넘었는지 알 길 없다. 범인들이라면 한해도 살지 못하고 버리고 떠나 흔적조차도 찾기 어려운 험준한 바위너설이 아닌가.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하고 있다.
의상조사가 남해 보광산(지금의 금산(錦山))으로 기도하러 가던 길에 상리면 무선리 어느 촌락에서 유숙하게 되었는데 비몽사몽간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내일 아침에 걸인을 따라서 보광산보다 무이산을 먼저 가보라”고는 홀연히 사라져 잠을 깨니 꿈이었다.
날이 밝아 과연 한 걸인이 나타났는데, 급히 밥상을 갖다주며 무이산의 주소를 물었더니 무이산에 간다 하기에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걸인을 따라 무이산 중턱에 오르니 눈앞에 수많은 섬들이 떠있고,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에 웅장한 다섯 개의 바위가 오대(五臺)를 형성하고 있어 마치 오대산의 중대를 연상하게 하였다.
이때 그 걸인이 중대를 가리키며 "저곳이 내 침소다" 라고 말하자 한 걸인이 또 나타나서 두 걸인은 서로 손을 잡으며 바위 틈새로 사라져버렸다.
의상조사는 석벽 사이를 살펴보았으나 걸인은 보이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석벽 사이에는 천연적인 문수보살상만이 나타나 있는 것을 보고 의상조사는 홀연히 깨달은 바, 꿈속의 노승이 관세음보살이고 두 걸인이 문수와 보현 보살임을 깨달았고 의상조사는 무이산을 두루 살펴보고는 “이곳은 족히 사자를 길들일 만한 곳이며 이곳이야말로 산수 수도장이다” 라고 예찬하고 문수단을 모아서 문수암을 세우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데 지금도 석벽 사이에는 천연의 문수상이 뚜렸이 나타나 보인다.
현재 문수암 본 채의 오른쪽 뒤편 석굴에는 문수보살상이 확연하게 보인다고 해서 수많은 기도 혹은 불자들이 찾아와 친견하려고 한다. 신심이 돈독한 불자의 눈에는 잘 보이는지 모른다. 하지만 세속에 찌들고 탐욕으로 총기가 흐려진 때문인지 나의 눈으로는 여느 돌과 문수보살상이 전혀 구별되지 않아 안타까웠다. 애를 태우며 계속 기웃거리는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불력(佛力)이 높아 보이는 처사(處士)가 열심히 손을 들어 가리키며 설명해도 보살상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예리함을 잃어 무딘 내 눈에는 손가락만 대들보보다도 크게 보였다.
이런 저런 구경과 상념에 잠겼다가 문수암 본 채 앞 뜰 한쪽에 비켜서서 눈 아래 펼쳐진 다도해의 아름다운 수면 위에 가을 햇볕이 곱게 내려앉아 은빛 세상을 연출하는 장관에 얼이 빠져 말도 잊고 황홀경에 젖어있었다. 함께 찾았던 아내도 청자 빛 가을 하늘과 만산홍엽이 활활 타오르는 단풍과 다도해 수면 위에서 부서지고 깨지며 연출되는 신비로운 조화(造化)와 빼어난 경승(景勝)에 압도되어 그 자리에서 돌부처라도 된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간단치 않은 천년의 풍상(風霜)을 의연한 기개를 잃지 않고 반석 위에서 묵묵히 지켜보면서, 세속의 풍진이나 몹쓸 바람이 불어와 도량을 더럽히려면 청정한 바닷물에 헹구거나 티 없는 바람으로 정화시켜, 참된 불성(佛性)과 법력(法力)을 지켜왔기에 부처의 영험이 내려 작은 암자가 영원의 수(壽)를 누리고 있으리라.
고구마 뺏대기 고구마 뺏대기. 말랐다 말랐다 고구마 뺏대기.
경상도 남녘지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기억이 새로워질 고무줄놀이용 노래다. 노랫말 속에 나오는 뺏대기라는 말은 당연히 남녘 경상도에서만 통용되는 절간고구마의 지방말로 전라도에서는 빼깽이라고 부른다. 생고구마를 모양대로 얇게 썰어서 햇볕에 말리면 형태가 삐뚤빼뚤 비틀어져 버리는데 그 모양새를 빗대어 일컫게 된 이름씨다.
고구마는 미래 지향적 참살이 음식
고구마를 주식으로 하자면 장기 보존을 해야 하는데 수분이 70퍼센트가 넘는 고구마를 장기 보존하자니 얇게 썰어서 말리는 방법, 즉 뺏대기(절간고구마)를 만드는 수밖에 없었고, 이 뺏대기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죽 아니면 범벅이었는데 다른 구황 먹을거리들과는 달리 뺏대기죽은 달고 구수한 맛이 있어 봄철 보릿고개를 넘기는 데 매우 요긴한 양식으로 쓰였다. 그나마 뺏대기가 많이 들어가는 범벅은 한 철에 한두 번 특별식으로 먹었고, 뺏대기 한 줌에 울콩 한 줌, 좁쌀 한 줌을 곁들이고는 물을 한솥 그득하게 부어 끓이는 멀건 죽도 초근목피로 며칠을 견딘 다음에나 먹을 수 있던 귀한 음식이었다.
사찰 옛 음식을 찾아다니던 중에 남해 섬지방의 작은 암자들에서 이 고구마 뺏대기죽과 범벅을 추천받은 적이 있어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막상 취재를 나서려니 절집들마다 공양간 사정이 여의치가 않다. 고구마의 생산량도 많거니와 맛이 좋기로도 소문난 경상도 남해 욕지도의 절집과 전라도 해남 인근 절집들을 찾아보았으나 줄을 잇고 있는 참배객들의 기도 바라지로 도저히 짬을 낼 수 없단다. 고구마 뺏대기죽을 제대로 끓이려면 뺏대기 익히는 데만 두세 시간이 족히 들기 때문이다.
몇 년째 토종 사찰음식을 찾아다니면서 느낀 것은 한 삼사십 년만 거슬러 올라가면 오신채와 동물성 식재료를 안 쓰는 것 외엔 승속의 음식이 다를 것이 없었다는 것인데 그나마 시절 변화에 흔들림이 없는 절집에서 옛 먹을거리와 옛 조리방식을 고수해오다 보니 우리 토종 음식이 모두 사찰식 음식으로 변하여 남겨진 감이 없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제 절집 공양간도 사정이 달라지고 있다. 젊은 수행자들의 입맛도 이유가 될 것이지만 기도객들의 바라지할 일이 늘어나면서 공양간 살림을 속인들이 맡게 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세간의 습에 익숙한 젊은 공양주들이 사찰의 전통 음식을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천천히 온전하게 만들어야 되는 조리 과정 자체를 기피하기 때문이다. 온갖 식재료가 넘쳐나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그래서 잊혀가는 사찰음식이 늘고 있고, 뺏대기죽과 같이 시간이 많이 드는 음식은 잊혀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묻혀버리고 있는 사정이다.
고구마를 장기 보존하면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지혜로운 조리법
명품 고구마 생산지로 소문난 욕지도의 경우, 고구마가‘좋은 음식’으로 각광받고 있는 시대 추세에 맞춰 뺏대기죽을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 다시금 집집마다 뺏대기죽을 끓이고 있는 데 비해 오히려 절집에서는 재 지낼 음식 만드느라 뺏대기죽 끓일 시간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워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데 드디어 고성 문수암의 공양주가 시연을 허락해 주었다. 절 공양간 살림을 맡은 지는 오래 되지 않았지만 젊은 시절 시댁에서 뺏대기죽을 많이 끓여보았다며 일단 시간은 만들어보겠으니 뺏대기를 직접 구해 오라고 했다. 지금 사정에 절집에서 뺏대기를 만들어놓았을 리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림 같은 다도해의 운치 어린 풍경이 훤히 조망되는 지혜의 문수암에 다다르니 이건 또 무슨 조홧속인지 후원 마당에 뺏대기가 한 덕석 말라가고 있는 중이다. 공양주 보살이 올겨울 신도들에게 뺏대기죽을 맛보여드리려고 일부러 만들어놓았다는 설명이다. 그러구러 뺏대기죽은 순조로이 만들어졌다. 후원 뒷마당에 내걸린 무쇠가마솥에 그득히 뺏대기를 안치고 장작불로 두세 시간 은근하게 고는 옛날식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뺏대기와 울콩을 두 시간을 넘게 고아 좁쌀 한 줌을 넣고 다시 죽을 끓이는 과정은 온전하게 재현되었다. 혹시나 싶어 설탕을 넣지 않고 맛을 보니 단맛은 예전 뺏대기에 비해 좀 떨어지지만 구수한 맛은 오히려 나은 것 같다.
어렵사리 재현해본 뺏대기죽이 문수암에서만이라도 그 맥을 유지해나가기를 빈다. 미국 나사에서 우주 음식으로까지 선정한 미래 지향적 먹을거리인 고구마를 장기 보존하면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지혜로운 조리법을 이대로 묻어놓을 수는 없으니까.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쌍계사의 말사인 문수암은 고성군 상리면 무선리 무이산에 있는 암자로서 신라 성덕왕 5년(서기 706년) 의상조사가 창건했다. 창건 이후 이 암자는 수도 도량으로서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고, 산명이 수려하여 삼국시대부터 해동의 명승지로 유명하였으며 특히 화랑도 전성시대에 국선 화랑들이 이 산에서 심신을 연마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중창 및 중건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현존하는 암자는 사라호 태풍때 건물이 붕괴된 뒤에 지은 현대식 건물이고, 일반 신도들의 성금으로 1973년에 이 절에서 수도한 이청담(李靑潭)의 사리를 봉안하여 세운 청담 대종사 사리탑이있다.
석벽에는 문수(文殊), 보현(普賢) 두 보살상이 나타나 있으므로 문수단(文殊壇)이라 이름지었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은 석각이고,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은 두자 일곱치 크기의 목각으로 되어 있다. 기암절벽이 암자 뒷편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산정에 오르면 남해안 한려해상국립공원의 크고 작은 많은 섬들이 마치 군산봉처럼 부침하고 있는 절경을 조망할 수 있어 등산객과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는 신라의 고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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