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伊川)공과 사위 심약해(沈若海)의 가계(家系)
(註)이천(伊川)이라는 호칭은 이천도호부사(종3품.도호부의 수장)를 역임하였으므로 이르는 호칭이다.
이천도호부는 현 강원도(북한)에 속한 이천군.
이천공 배홍록(裵弘祿) 1586-1643.할배의 자는 응보(膺甫)이며 분성군의 13세이다.
증조부는 덕행으로 명성이 있었던 은일학자 임천공 배학(裵鶴)이며 조부는 좌찬성 증직된 인재공 배영(裵渶)이다. 아버지는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지를 지낸 모정공 배대유(裵大維1563-1632)이며 어머니는 남평문씨 나주목사 옥동 문익성(文益成)의 따님이다. 외숙은 사헌부 장령 문려(文勵), 성균 진사 문활(文劼)이다.
형은 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 설서,사헌부 감찰을 지낸 양지재 배홍우(裵弘祐)이다.
(註)증조부 임천(林泉)공 배학(裵鶴)은 신재 주세붕, 남명 조식, 명암 이중등과 서로 왕래하며 교류하여 명망이 높았다.학행으로 영릉창봉에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계구당(戒懼堂)을 지어 자제 교육과 학문에 힘썼다. 영산의 도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조부 인재(忍齋)공 배영(裵渶)은 처사로 향리에 은거하여 망삼당(望三堂)을 건립하여 자제교육에 힘썼다. 박재 김뉴(金紐),현감 신희수(辛希壽),삼일당(三一堂) 신일(辛馹),창주 곽간(郭趕)등과 교류하였으며 아버지의 절친한 벗이자 고을의 유현인 명암 이중(李中)선생을 기리는 鄕儒立石碑銘을 지었으며 향풍 진작에 이바지하였다. 아들의 귀로 인하여 좌찬성에 증직 되었다.
인재공은 영산 교동에서 세거하였는데 후일 1500년 중반 무렵 도천으로 이주하여 터전을 마련한 도천입향조(道泉入鄕祖)이다.이후 도천은 분성배씨의 대표적인 집성촌이 되었다.
*아버지 모정(慕亭)공은 임진왜란에 창의하였으며 생원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을 거쳐 좌부승지 병조참지를 역임하였으며 망우당 곽재우 모계 문위 동래교수 노개방 등과 교류하여 친분이 두터웠다. 당대의 명필로 일컬어졌으며,도동서원 사액현판, 덕천서원 편액, 남명 조식 신도비명, 등을 썼다.
*형 양지재(養志齋) 배홍우(裵弘祐)는 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 설서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였으며 여헌 장현광이 지은 한훤당 김굉필의 신도비의 글씨를 썼다.
*외할아버지 옥동(玉洞) 문익성(文益成)은 신재 주세붕 남명 조식의 제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나주목사를 역임하였으며 합천의 도연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저서에 옥동집이 있다.
-이천공 교지-
1612년 장사랑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1618년 웅천현감, 이천도호부사 역임하였다. 병법에 뛰어났으며 활을 잘 쏘아 명궁으로 일컬어졌다. 간송 조임도, 구옹 양신용, 진해군수 류박, 칠원군수 남훤, 영산군수 김희열, 한천 이속과 교류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은거하여 거문고를 타며 유유자적 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담박하고 정이 두터워 지우들의 존중을 받았다.
(註) 간송 조임도1585-1664와는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이천도호부사 재임시 고향에 있는 벗 간송 조임도를 위하여 술과 편지를 보냈는데 간송이 감사의 시를 지어 보내기도 하였으며 이천공이 돌아가시자 만사와 제문을 지어 애도하였다.
謝裵伊川送三亥酒
배이천이 삼해주를 보낸 것에 사례하다.
故人情重記貧交
친구는 정이 깊어 가난할때 사귄 친구를 기억하여
遠送春醪慰寂寥
멀리서 봄에 빛은 막걸리를 보내 적막함을 위로하네
一酌陶然忘世事
한 잔 술에 취해 세상일을 잊으니
落花飛散雨蕭蕭
꽃잎 떨어져 흩날리고 비는 쓸쓸히 내리네
-澗松集 詩 七言絶句-
挽裵伊川
배이천의 죽음을 애도하다.
干城之具勇兼人
나라를 지키는 재능은 다른 사람보다 배나 용감하고 뛰어났으나
再佩銅章心豈伸
두 차례 고을원을 지냈으니 어찌 뜻을 펼쳤으랴
樂在邱園安性命
즐거움이 전원에 있어 본성을 편안히 하였고
夢驚槐蟻謝風塵
꿈에서 무상한 부귀공명에 놀라 세속을 피하였네
公能許我交情厚
공께서 나를 허락하여 사귀는 정 두터웠고
我亦多公族分親
나도 공을 중시하여 친족의 정분 친밀하였네
虀露悲歌那忍聽
상여소리 슬픈 노래 어찌 차마 들으랴
曉星殘月涕沾巾
새벽 별 지는 달에 눈물이 수건 적시네
-澗松集/詩/七言律詩-
묘소는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 중독산(中獨山) 을좌(乙坐)이며 배위 영산신씨 합폄(合窆)이다. 묘소에는 상석과 무인석이
세워져 있다.
배위는 영산신씨는 판관 신박(辛礡)의 따님이며 현감 신희수(辛希壽)의 손녀이다. 외조는 진사 박이문(朴而文)이다.
(註)이천공의 장인 신박(辛礡)은 판관 신희수(辛希壽)의 아들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보성군수를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시 의병으로 활약하여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된 문암 신초(辛礎)의 동생인데 신초는 이천공의 고모부이기도 하다. 즉 신초는 이천공의 조부 인재공 배영의 사위이다. 창녕 영산의 분성배씨는 선대로부터 같은 고을의 영산신씨와 중첩혼을 맺어 세의가 매우 두터웠다.
영산신씨의 외조 진사 박이문(朴而文)은 합천출신으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학행으로 천거되었던 복재(復齋) 박양좌(朴良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성주배씨 별좌 배은(裵垠)의 딸이다. 동생은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을 역임한 용담(龍潭) 박이장(朴而章)이다.
후배위는 의령남씨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을 지낸 남홍술(南弘述)의 딸이다.
슬하에 3남3녀를 두었다.
장남 경선(敬善)은 군기시 주부이며 차남 경신(敬宸), 3남 경양(敬暘)은 통덕랑이며 사위는 찰방 심약해(沈若海), 송지적(宋知迪),별제 박수일(朴守一)이다.
(註)이천공의 장자 배경선의 배위 창녕성씨는 成允孝의 딸이며 처남은 望道齋 成屹이다.
성흘의 아들은 成夏長이며 사위는 이조좌랑 朴宗胤이다.
*박종윤은 내암 정인홍의 문인 안음현감 박정완의 손자이며, 사헌부 장령 박광선의 아들이다. 박원갑에게 출계.
성윤효의 종형은 成天祚(관찰사 곽월의 사위),진주판관 成天祉(덕계 오건의 사위),도사 成天祺,현감 成天裕(교리 박민준의 사위)이며 사촌 처남은 망우당 곽재우의 동생인 참봉 곽재지(郭再祉)이다.
*곽월은 망우당 곽재우의 아버지.
-이천공의 첫째 사위 심약해(沈若海)-
심약해(沈若海)1611-1660.
자는 백함(伯涵).본관은 청송이다.
조상의 덕으로 자여도찰방 역임하였으며 배위는 분성배씨(1610-1669)로 이천도부사 배홍록의 따님이며 문과 병조참지 배대유의 손녀이다. 슬하에 자녀가 없었으며, 서자는 탁(濯)이며 서녀는 무과 송시보(宋時普), 박경휘(朴景徽)에게 출가하였다.
(註) 宋時普1650-? 본관은 여산.1672년 무과. 아버지는 무과 통훈대부 전옥주부 송주형(宋周亨).
청송심씨 심약해(沈若海)의 가계(家系)
심약해 직계 가계도
11대조 沈德符 좌정승.청성백.시호는 청안.
배위는 청주송씨,인천문씨 낭장 門必大의 딸. (註)영의정 심온의 아버지 정도로 알려져 있으나 여말선초에 손꼽히는 거물이었다. 위화도 회군 때 조민수, 이성계 바로 뒤의 3인자였으며 고려 군부에서 최영과 이성계 다음가는 존재감을 지녔다. 흥국사 9공신으로서의 작위에서도 이성계와 더불어 둘뿐인 백작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군이었다. 여기에 동생 심원부가 이제현의 제자로 신흥 유신쪽에도 인맥이 풍부했기에 고려말 온건파와 급진파 모두 그를 영입하려 애썼다
-안효공 심온의 묘-
출처 청송심씨대종회
10대조 沈溫 영의정.청천부원군.시호 안효. 배위 순흥안씨 좌의정 安天保의 딸. 청송심씨 안효공파의 파조.
(註) 소헌왕후의 아버지이며 세종의 장인.
9대조 沈澮 영의정, 청송부원군,시호 공숙.
배위는 원주김씨 지중추부사 金連枝의 딸.
8대조 沈湲 판관,증 좌찬성. 배위 전주이씨 원산군 李義坵의 딸.의안대군 李和의 증손.
7대조 沈順門 장령,증 영의정. 배위 평산신씨 사헌부 감찰 申永錫의 딸.
(註)처 외숙은 충정공 許琮과 문정공 許琛.
-충혜공 심연의 묘-
출처 청송심씨대종회
6대조 沈連源 영의정. 청천부원군. 시호 충혜. 배위 경주김씨 좌찬성 金璫의 딸.
(註) 동생은 기묘명현 심달원, 좌의정 심통원이다.
5대조 沈鋼 영돈령부사.청릉부원군.시호 익효.
배위 전주이씨 전성군 李薱의 딸. 효령대군의 5세손.
(註)인순왕후의 아버지이며 명종의 장인.
고조부 沈仁謙 온양군수. 증 좌승지.배위 전주이씨 정랑 이발영의 딸.
(註) 동생은 동서분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병조판서 심의겸이다.동생 심의겸의 차남인 조카 심엄이 대를 이었다.
증조부 沈엄.옥과현감.증 영의정.청천부원군. 생부 심의겸.배위 능성구씨 좌찬성 具思孟의 딸.
(註) 구사맹은 원종(정원군:인조의 친부)의 장인이며 인헌왕후의 아버지이다.
아들은 호조참판 구성, 병조판서 구굉.
조부 沈光世 休翁,교리, 배위 창원황씨 판서 黃愼의 딸. 저서 해동악부.
(註) 동생 심정세는 永昌大君의 어머니 仁穆大妃의 아버지인 延興府院君 金悌男의 사위이며
인조의 이종 사촌 형.
부 沈檼 진사.증 이조참판. 배위 양주조씨 호조판서 趙存性 손녀.
(註) 처조부 趙存性은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의 조부.
沈若海 찰방. 배위 분성배씨.
묘소 김해 생림면 마사리
-청송심씨 심약해 가계-
청송심씨는 경상북도 청송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며 시조는고려 충렬왕 때 문림랑(文林郞)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역임 심홍부(沈洪孚)이다.
심약해는 청송심씨 안효공파(파조 심온) 에 속하는데 가계를 살펴보면 조선의 개국공신 심덕부의 아들이며, 세종의 장인으로 영의정을 지낸 심온(沈溫1375-1418)의 10세손이며,명종대에 영의정을 역임하고 명종 묘정에 배향된 충혜공 심연원(沈連源1491-1558.심온의 현손,우의정 심통원의 형)의 6세손이다. 명종의 장인으로 권신 이량의 세력을 축출한 영돈영부사 익효공 심강(沈鋼1514-1567)의 5세손이며, 고조는 온양군수 심인겸(沈仁謙)이며, 증조는 옥과현감 심엄으로 심엄의 생부는 동서분당시 서인의 수장이었던 대사간 심의겸(沈義謙1535-1587)이며, 백부 심인겸에게 출계 하였다. 심엄의 장인은 인헌왕후의 아버지 좌찬성 능안부원군 구사맹(具思孟)이며 사위는 한문 4대가의 한 사람인 택당. 이식(李植)이다. 조부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소재로 한 악부시인 해동악부(海東樂府)의 저자 교리 심광세(沈光世1577-1624)이다. 조부 심광세는 호조판서 황신(黃愼)의 사위이며, 인조의 이종사촌이다. 아버지는 진사 심은(沈穏)이며 어머니는 양주조씨이며 인조의 계비 장열왕후의 큰아버지 조종원의 따님이다. 조부는 관찰사 조존성(趙存性)이다.
이천공의 사위 심약해의 가계는 선대로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가세가 매우 번창하였는데, 직계에서만 정승 5명, 왕비 2명, 봉군 6명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註)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 문종과 세조, 안평대군등 세종의 8남 2녀의 어머니.
개국공신 심덕부의 손녀이며 청천부원군 심온의 장녀이다.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 순회세자의 생모이자 선조의 적모. 소헌왕후의 부친 심온의 6세손이며 영돈령부사 심강의 딸이다.
이천공의 따님인 분성배씨가 어떤 연유로 청송심씨 집안의 심약해와 혼인이 이루어지게 되었는 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여러 기록을 참고해 보면 선대의 인연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천공의 사위 심약해의 조부 심광세와 심약해의 장인 이천공의 아버지 즉 심약해의 처조부 참지공 배대유는 서로 교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 시기 출사하여 같은 시기 조정에서 근무한 인연이 있으며 심광세의 장인은 호조판서 황신인데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유배 되었다가 배소에서 졸하였다. 광해군이 사제문을 내렸는데 이 사제문을 모정공이 지었다.
(註)1613년 2월 19일. 심광세는 부교리에 임명되고 모정공(배대유)은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같은 해 8월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경상도 고성으로 정배.
慕亭集/賜祭文/黃愼賜祭文
심약해 집안은 대대로 서울에 거주하였는데 조부 심광세가 계축옥사때 경상도 고성으로 유배되었다가 이후 해배되어 밀양으로 이주하였는데 이후 그의 후손들이 밀양에 정착한것으로 보인다.
(註)밀주지와 밀주징신록에 따르면 교리 심광세가 밀양에 처음 정착하여 오래지 않아 다시 서울로 돌아갔으며 그의 손자 심약해는 밀양 삼랑에 정자를 지어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는 기록이 보인다.
심광세는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등극하자 1624년 교리에 제수 되었는데 이로인해 상경한 것으로 보인다.
심광세 이후 밀양에 세거하였던 심약해 집안과 영산 도천에 세거하였던 이천공 집안과의 지리적인 조건 또한 통혼에 있어 필요 조건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으로 보았을 때 심약해의 조부 심광세와 심약해의 처조부인 모정공(배대유)은 분명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교류와 우호적인 관계가 바탕이 되어 통혼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심약해의 배위 분성배씨는 심약해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두지 못하여 계대가 단절되어 두 가문의 인연은 지속되지 못하였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당시는 같은 학맥이나 당파적 관계내에서 통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천공의 집안 당색은 북인(대북)이었고 사위인 심약해의 집안은 북인과 대척점에 있던 대표적인 서인의 명가였다.
(註) 이천공의 가문은 북인에 속했는데 북인은 화담 서경덕,남명 조식의 문인들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남명 조식의 제자들이 주축이되었다.
이천공의 증조부 임천공은 북인의 종주인 남명과 교류하였으며 아버지 모정공은 남명을 사숙하였으며 남명의 고제 내암 정인홍,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광해군 시기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후대 내암이 역적으로 몰려 죽자 생존의 방편으로 내암과의 관계를 부정하거나 드러내지 않을려고 하는 문중적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지만 당시의 통혼과 교류를 보면 남명학파 북인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부정할 수 없다.
더욱이 이천공의 형 양지재 배홍우의 장인은 예문관 대교 유진정(柳震楨)인데 유진정의 외삼촌은 북인의 영수인 내암 정인홍이였다.
심약해의 가문을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고조 심의겸이 동서분당시 서인의 영수였으며, 증조 심엄의 장인은 서인에 의해 추되된 인조의 외조인 능원부원군 구사맹이며, 사위는 서인 강경파인 송강 정철의 제자인 택당 이식이다. 조부 심광세의 장인은 서인의 종주인 율곡 이이의 제자인 황신이었다.
(註)심약해의 조부 심광세는
북인(대북)이 영창대군 및 서인, 남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며 작은할아버지 심정세는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사위로 연좌되어 형을 받고 죽었으며 심광세의 장인 판서 황신 또한 유배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당시 혼인은 사대부들의 총체적 가치가 반영된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었다. 그 가운데 정치적, 당파적 입장은 통혼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조선중기 당쟁이 심화된 이후 당색이 다른 대척점에 있던 두 가문이 당파적 입장을 초월하여 통혼한 드문 사례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