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서울의 지리적 특성상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도성 한가운데로 물길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선왕조가 도성 안에 있는 수로를 정비하기 전에 이미 자연스럽게 물길이 형성되어 있었다. 서울의 기후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봄·가을에는 건조하고 여름에는 고온다습 하였다.
따라서 청계천은 비가 적은 봄, 가을은 대부분 말라있는 건천 (乾川)이었던 반면,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철 우기에는 조금만 비가 와도 물이 넘쳐 홍수가 날 정도로 건기,
우기에 따라 유량의 변화가 심하였다.
더구나 청계천은 도심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시전행랑과 민가가 밀집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넘치면 가옥이 침수되거나 다리가 유실되고 익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초기 도성건설사업과 함께 배수를 위한 물길을 만드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큰 사업이었다.
개천에 대한 정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태종 때부터였다.
태종은 즉위 초인 1406년부터 1407년까지 자연상태에 있었던 하천의 바닥을 쳐내서 넓히고,
양안에 둑을 쌓는 등 몇 차례에 걸친 정비로 하천의 모습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큰비가 올 때마다 피해는 계속되었다. 마침내 1411년(태종11)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開渠都監)'를 설치하고,
다음 해인 1412년(태종12)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모두 52,800명의 인부를 투입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실시하였다.
주요 하천의 양안을 돌로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 다리를 돌다리로 만들었다.
'개천(開川)'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로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 때의 개천 공사를 계기로 지금의 청계천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태종때 개천공사가 주로 개천 본류에 대한 정비였다면, 세종은 지천(支川)과 작은 세천(細川)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종로 남북 쪽으로 늘어선 시전행랑(市廛行廊) 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시켰다.
이것은 지천의 물이 한꺼번에 개천 상류로 몰려들어 넘쳐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도심의 홍수를 예방할 수 있었다. 1441년(세종 23)에는 마전교(馬前橋) 서쪽 수중(水中)에 표석을 세웠다.
이 표석에 척(尺)·촌(寸)·분(分) 등 눈금을 기둥 위에 새겨, 수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수표(水標)이다.
수표는 개천의 수위를 계수화하여 측정함으로써 사전에 홍수를 예방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세종때 주목할 만한 사항은 청계천의 성격을 도심의 생활하천으로 규정하였다는 것이다.
서울을 조선의 수도로 정할 때 풍수학상으로 서울 둘러싸고 있는 외수(外水)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는 것에 대응하여
도성 한가운데를 흐르는 내수(內水) 청계천이 한강과는 반대로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이 상당히 고려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도성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고,
오늘날과 같은 하수도 시설이 없었던 당시로서 청계천에는 온갖 쓰레기와 오물들이 흘러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청계천의 성격을 두고 풍수학상의 명당수로서 늘 깨끗하게 유지해야한다는 명분론적 주장과
도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더러운 것이 많이 생기므로 이것을 배출할 하천이 있어야 한다는 현실적 주장이 맞서고 있었다.
이 논쟁에서 세종이 후자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청계천은 생활하천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청계천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도성에서 배출되는 많은 생활쓰레기를 씻어내는 하수도로서 기능을 함으로써 도성 전체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고산자교에서 280m이동 청계천판자집 테마촌
세종이후 개천 정비에 가장 큰 힘을 쏟은 임금은 영조이었다.
영조는 자신이 행한 준천을 은근히 중국 고대 하(夏)나라 우(禹) 임금의 치수나 수(隨)나라 양제(煬帝)의 운하정비와 비교하였으며,
탕평(蕩平)·균역(均役)과 함께 자신 80평생 가장 큰 치적으로 내세울 정도였다.
태종, 세종 때 조성된 개천은 이후 영조가 즉위하기까지 약 350여년 동안 주목할 만한 변화는 없었다.
비가 와서 물이 넘쳐 부근민가가 침수되고, 다리가 유실되는 등 크고 작은 사고는 있었으나 이것은 개천에서 흔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태종, 세종 때에 정비한 개천의 하수처리 용량이 당시 도성 인구 10만정도가 쏟아내는 하수를 처리하는데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7·8세기에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우선 임진(1592년)·병자(1636년) 두 차례의 전란을 겪는 이후 많은 유민(流民)들이 도성으로 몰려들어 서울의 인구가 급증하였다. 1657년(효종 8) 약 8만명 남짓한 서울의 인구는 10년 후인 1669년(현종 10)에는 19만 명으로 늘어났다.
인구의 급증으로 생활하수는 개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증가하였다. 더구나 유민들이 생계를 위하여 개천 변에 채소밭을 경작함으로써 수로가 막혀 배수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또한 17·8세기에는 때아닌 이상기온현상으로 대풍, 폭우, 우박, 서리, 눈 등이 끊이지 않았으며,
추위를 이기기 위하여 사람들이 함부로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사용하였다.
이로 인하여 도성 주변에 있는 산들은 거의 민둥산이 되어 조금만 비가 와도 토사가 쓸려 내려와 개천을 메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영조가 즉위한 1725년경에는 토사가 쌓여 하천 바닥이 평지와 같은 높이가 되기에 이르러 준천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준천을 시행하기에 앞서 영조는 수 차례에 걸쳐 그 시행여부를 조정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물어본 다음
1759년(영조 35)년 10월에는 준천을 관리할 기관으로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였다. 1760년(영조 36) 2월 18일 드디어 대역사가 시작되었는데,
이때의 준천은 송기교(현재 광화문 네거리와 신문로 접점 지점)에서 영도교(현재 영미교길) 까지 총 8개 구간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개천에 두텁게 쌓여 있는 토사를 걷어내고 개천의 깊이와 폭을 예전처럼 회복하였다.
무너진 다리를 보수하고, 상류 및 지류는 물론 경복궁,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 등 궁궐 안에 있는 물길도 준설하여 물이 잘 통하게 하였다.
이 준천은 4월 15일까지 총 57일간 시행되었으며,
동원된 인력은 한성부민 15만명, 고정(雇丁-고용인력) 5만명 등 모두 20만명이고, 전(錢) 35,000민(緡), 쌀 2,300여 석(石)이 투입되었다.
준천의 대역사가 진행되는 중에 영조는 수 차례 공사현장을 방문하여 한편은 작업을 독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꾼들을 위로하였다.
또한 준천의 시말(始末)과 장래에 해야할 일을 기록한 『준천사실(濬川事實)』을 편찬하여 이후 개천 준설의 지침으로 삼도록 하였다.
1773년(영조 49) 6월 영조는 다시 한번 개천 정비를 위한 공역을 실시하였다.
1760년 준천을 할 때 물자와 인력이 부족하여 시행하지 못하였던 개천 양안을 석축(石築)을 하는 것이었다. 작업은 훈련원, 금위영, 어영청 등 삼군문(三軍門)이 작업구간을 3개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양쪽 제방에 돌을 쌓아 튼튼하게 하고, 구불구불한 수로를 곧게 바로 잡았다.
또한 양안에 버드나무를 심어 큰비가 올 때도 제방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다.
1773년의 준천은 시작한 지 2개월 후인 8월초 완성하였다. 준천의 역사가 끝나자 영조는 왕세손(후에 정조)와 함께 광통교에 나가 완성된 석축을 살펴본 후,
역부들의 공로를 치하하고, 스스로 「준천명(濬川銘)과 소서(小序)」를 지어 자신이 80평생 동안
한편 영조가 개천 준설을 위하여 대역사를 시작한 것은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구휼의 목적도 있었다. 그것은 곧 두 차례의 전란 이후 생계를 위하여 도성으로 몰려든 유민들에 대한 구휼이었다. 국가에서는 이들을 구휼하기 위하여 도성축조나 준천과 같은 큰 토목공사를 일으켜 이들을 고용하였다.
영조가 실시한 준천 역시도 5만여 명의 고용인력이 투입되었다.
즉 준천사업은 오늘날 공공근로사업(1930년대 말 대공황시 루즈벨트 대통령이 실시한 New Deal 정책)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청계천의 성격을 두고 풍수학상의 명당수로서 늘 깨끗하게 유지해야한다는 명분론적 주장과
도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더러운 것이 많이 생기므로 이것을 배출할 하천이 있어야 한다는 현실적 주장이 맞서고 있었다.
이 논쟁에서 세종이 후자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청계천은 생활하천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청계천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도성에서 배출되는 많은 생활쓰레기를 씻어내는 하수도로서 기능을 함으로써 도성 전체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청계천판자집 테마촌에서 달리기 159m이동 두물다리
성동종합사회복지관 앞
폭 34.8m, 연장 43.8m
풍류교/휘몰아치는 바람, 유니세프 지정 “어린이 다리”
청계천 문화 전시관, 성동종합사회복지관, 세계조각공원(예정)
다리 위치가 과거 청계천 지류가 합류되던 지점으로 두개의 물이 만나는 다리라는 의미이며
다리모양도 서로 만나는 형상으로 되어있음
일제강점기 청계천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변화를 겪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조선 500년 동안 불리어 오던 '개천'이라는 이름 대신에 '청계천'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청계천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때는 정확하지 않지만,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의 하천명칭들이 정리될 때 개정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신문을 살펴보면 1916년경부터는 '개천'이라는 말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대신 '청계천'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조선시대 북촌(北村)과 남촌(南村)의 경계였던 청계천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이른바 '민족의 거리 종로(鐘路)'와 '왜인들의 마을 혼마찌〔本町〕'를 가르는 경계선이 되었다.
이것은 곧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차별의 선이 되었다.
먼저 마을 이름에서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청계천 북쪽은 ' 동(洞)'과 같은 전래의 마을 이름을 사용하였지만,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청계천 남쪽은 '혼마찌(本町, 지금의 명동)'과 같은 일본식 지명을 사용하였다.
도로의 확장, 주요 시설물의 신축 등 도시의 기반시설은 주로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청계천 이남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한 신문에는 "북부(청계천 북쪽)일대에는 아직도 원시시대의 그림자가 그대로 남아 있지마는 본정(本町) 일대는 길에 밥이 떨어져도 주워 먹게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정작 청계천 자체는 대한제국 이후 약 10여년 동안 방치되었다.
일본은 청계천(淸溪川, 맑은 물이 흐르는 시내)을 이름 값 못하는 '탁계천(濁溪川, 더러운 물이 흐르는 시내)'이라고 비웃었다.
지난 500년 동안 서울사람들의 생활과 함께 흘러온 청계천은 하루아침에 더러운 하수구로 전락하여, 청산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이 청계천을 정비하기 시작한 것은 1918년경부터였으며, 그
것도 서울에서 청계천이 가지는 상징성이나 보건, 위생 등 서울사람들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성을 인식한 때문이 아니라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조선 식민지배의 중추기관을 청계천 이북으로 이전하기 위한 사전 정비작업의 하나로 시작되었다.
1918년부터 일본은 청계천과 일부 지천에 대하여 바닥을 준설하고 양안에 석축을 새로 쌓았다.
1925년부터는 지금의 종로구 신교동에서 도렴동까지, 즉 청계천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백운동천을 비롯하여 옥류동천, 사직동천 등을 복개하였다.
당시 복개는 하천에 'ㅁ'형의 하수관을 만드는 것으로 이로써 지천들은 물이 흐르는 실개천이 아니라 영락없는 하수구로 전락하였다.
1920년대이후 일제는 여러차례 청계천 복개계획을 발표하였다. 1926년에 청계천을 복개하여 1만평의 택지를 조성하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은 광통교에서 주교정(舟橋町)까지를 철근 콘크리트로 덮어서 1만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이 곳에 택지와 상가, 위락시설을 조성하려는 것이었다.
1935년에는 청계천을 전면 복개하여 도로를 만들고, 그 위로 고가철도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1939년에는 청계천을 덮어 자동차 전용도로를 만든다는 안이 마련되었고,
1940년에는 청계천을 복개하여 위로는 전차, 밑으로는 지하철을 부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청계천 복개구상은 일본 식민정부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치달으면서
조선의 지배를 더욱 공공히 하고, 나아가 서울을 대륙의 병참기지로 육성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들은 재정문제로 인하여 구상에 그치고 말았으며,
실제 복개가 이루어진 것은 1937년 태평로에서 무교동 구간이었다.
한편 일본의 청계천 정비로 인하여 청계천에 있던 많은 다리들이 수난을 겪었다. 광통교의 경우 다리 옆 전차선이 놓이게 되었으며, 다리는 콘크리트로 보강되어 확장되었다.
광통교 교대에는 지름 1m가 넘는 하수관이 묻히게 되었다. 오간수문은 1908년 완전히 헐리었고,
대신 차로와 전차선로 겸용 다리가 놓여졌다. 하량교, 영도교 등 일부 다리는 근대식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으며,
관수교, 주교와 같은 근대식 토목공법을 이용한 새로운 다리도 가설되었다.
두물다리 & 청혼의 벽
1930년대 이후 일본은 청계천 정비를 위하여 여러 가지 계획을 발표하였으나 재원부족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일본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에 모든 물자와 인력을 쏟아 부었기 때문에 청계천 준설을 비롯한 서울의 도시정비사업은 거의 방치되었다.
따라서 1945년 해방을 즈음하여 청계천에는 토사와 쓰레기가 하천 바닥을 뒤덮고 있었으며,
천변을 따라 어지럽게 늘어선 판자집들과 거기에서 쏟아지는 오수로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다.
1949년 광통교에서 영도교까지 청계천을 준설하는 계획을 세우기는 하였지만, 이마저도 1950년 6월 한국전쟁의 발발로 중단되고 말았다. 더구나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 생계를 위하여 서울로 모여든 피난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변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은 반은 땅 위에, 반은 물위에 떠 있는 판자집을 짓고 생활하였다.
천변을 따라 어지럽게 형성된 판자촌과 여기에서 쏟아내는 생활하수로 청계천은 더욱 빠르게 오염되어 갔다.
엄청난 양의 하수가 도심 한가운데를 흐르면서 발생하는 악취로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큰 고통을 받았으며,
도시 전체의 이미지도 크게 손상되었다.
1950년대 중반 청계천은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나라의 가난하고 불결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슬럼지역이었으며,
위생 면에서나 도시경관 면에서 청계천을 그대로 두고 서울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기초적인 생활필수품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웠던 당시 우리 나라의 경제상황 속에서 청계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우면서도 유일한 방법, 그것은 '복개(覆蓋)'였다.
진청계천은 1955년 광통교 상류 약 136m를 복개한 것을 시작으로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복개되기 시작하였다.
1958년 5월∼1961년 12월 광교에서 청계6가 동대문운동장까지,
1965년∼1967년 청계 6가에서부터 청계8가 신설동까지, 1970년∼1977년 청계 8가에서부터 신답철교까지 복개되었다. 고가도로도 건설되었다. 광교에서부터 마장동에 이르는 총 길이 5,6km, 폭 16m의 청계고가도로가1967년 8월 15일 착공되어 1971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청계천 주변에 어지럽게 늘어선 판자집은 헐리고 대신 현대식 상가건물이 들어섰으며,
토사와 쓰레기, 오수가 흐르던 하천은 깨끗하게 단장된 아스팔트 도로로 탈바꿈하였다.
시원하게 뚫린 복개도로와 고가도로위에는 자동차가 쏜살같이 달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서울의 가장 부끄러운 곳이었던 청계천은 근대화·산업화의 상징으로 서울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반면 청계천 복개로 주변에 살던 많은 사람들은 봉천동, 신림동, 상계동 등으로 강제로 이주를 당하여 또 다른 빈곤의 상징인 달동네를 형성하였다.
또한 광통교와 같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도 함께 훼손되었다.
변청계천이 복개 이후 약 40년이 지난 오늘날 청계천은 도심산업의 중심지로서
도로 양편으로 공구상, 조명가게, 신발상회, 의류상가, 헌책방, 벼룩시장 등 크고 작은 상가들이 밀집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복개도로와 고가도로에는 하루에도 수십만 대의 차량들이 지나 다닌다.
그러나 더 이상 청계천을 서울의 자랑거리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서울에서 가장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청계천 주변을 낙후시키고, 서울의 이미지를 해치는 주범으로 지적 받고 있으며,
청계고가도로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는 근대화·산업화의 상징이 아니라 개발시대의 무지가 낳은 흉물로 인식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청계천만큼 지난 50년 동안 서울의 역사를 분명하게 농축하고 있는 곳은 없다.
1950년대 말 쓰레기와 오수로 뒤덮인 불결과 빈곤의 상징에서, 60·70년대는 성공적인 산업화·근대화로 상징되었으며,
80·90년대는 공구, 인쇄, 의류 등 도심산업의 중심지임과 동시에 소음·혼잡·매연 등으로 도 .시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2003년!. 지난 40년간 덮여있던 청계천이 다시 열리는 '복개(復開)'가 구체화되고 있다. 이제 청계천에는 새로운 시간의 단층이 한 겹 더 쌓이게 될 것이다.
두물다리에서 달리기 314m이동 무학교
무학로(청계9가)
폭 34.8m, 연장 43.6m
햇살의 이미지를 모티브로 반영
성북천 합류부 터널 분수, 문화쉼터(예정)
조선 개국초에 이 도로의 종점지역인 왕십벌 지역에 도읍을 정하려고
태조 이성계를 따라 地相을 보러 다니던 高僧 無學大師에서 유래한 무학로의 이름을 인용
사업기간 : 2003년 7월 ~ 2005년 9월
사업의 공간적 범위 : 청계천로(태평로 시점 ~ 동대문 ~ 신답철교) 및 삼일로와 그 주변 5.84km
사업의 시간적 범위 : 기준년 2003년, 중기 목표 2008년, 장기 목표 2013년
사업비 : 착공 전 청계천복원사업에 소요되는 공사비를 산정한 결과 349,423백만원이었으나 실제 공사가 진행 되는 과정에서 설계변경, 물가변동, 추가과업의 실시 등으로 인해 2005년 현재 386,739백만원이 소요 되었다.
- 도시기본계획, 도심부관리기본계획 등 상위계획을 바탕으로 청계천 복원과 연계한 개발기본구상 수립
무학교에서 달리기 346m 이동 비우당교
새말길
폭 26.5m, 연장 44.5m
뉴타운의 미래지향적 이미지 반영
성동청소년회관
조선 세종 때 대표적인 청백리로 알려진 하정 유관선생 댁이 이 다리 근처였는데,
그의 청렴함은 비가 오는 날에도 방안에서 우산을 받쳐들고 비를 피했을 정도였다고 하여 유래한 이름임
무학교에서 달리기 346m 이동 비우당교
비우당교에서 달리기 304m 이동 황학교
난계로(청계8가)
폭 30.6m, 연장 45.0m
황학동 도깨비 시장의 장소성 반영
벼룩시장, 중구구민복지회관, 우산각 어린이공원, 동대문도서관
옛날 이곳 논밭에 황학(黃鶴)이 날아왔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됨
황학교에서 달리기 312m 이동 영도교
영미교길
폭 26.2m, 연장 30.1m
전통 대청양식을 도입한 아치교
동묘공원, 종로 문화의 집, 숭인공원, 벼룩시장, 종로구민회관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 그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이곳까지 나와 서로 영영 이별하였다
하여 영이별다리 혹은 영영건넌다리라고 전해지는 전설에서 유래된 교량명 - 숭인동 234번지와 상왕십리 748번지 사이 현 동묘(東廟, 숭인동 22번지) 남쪽 청계천 하류에 있던 다리이다.
동대문 옆에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어서 동대문 방면에서 왕십리 쪽을 가려면 영도교를 건너야만 되었기 때문에 이 다리의 교통량은 몹시 빈번하였다.
그리하여 성종은 절의 중들을 동원해서 살곶이다리(전곶교, 전관교)와 함께 이 곳에 돌다리로 중수(重修)하고 어필(御筆)로 ‘영도교’라 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그 규모가 크고 특징이 있었으리라 보인다. 한편 이 다리에 얽힌 전설로는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세조 4년, 1458) 그의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가 이 곳까지 나와서 서로 영영 이별을 하였다 하여 ‘영이별다리’ 혹은 ‘영영건넌다리’라고 전해진다.
그 후 정순왕후 송씨는 지금의 청룡사 새절승방에 있던 정업원(淨業院, 현 숭인동 17번지)에 들어가서 시녀 셋을 데리고 일생을 불도(佛道)에 바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도교의 돌다리는 고종초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헐어다가 석재로 썼기 때문에 이 때 없어졌다 한다.
그 뒤 나무다리가 놓여졌으나 가끔 떠내려 갔는지 그 옆에는 ‘띠엄돌’이라고 해서 개천 바닥에 돌을 띠엄띠엄 놓아서 이것을 밟고 건너게 한 때도 있었다.
청계천 풍수해 대책
기 간 : 1.1~12.31까지 연중 실시 (市 수방대책기간 : 5. 15 ~ 10. 15)
청계천은 버들치를 비롯하여 피라미, 잉어 등 어류 서식이 가능한 맑은 물이 흐릅니다. ★단, 대장균, 탁도 등이 음용수 기준에 미달하여 먹는 물 사용 불가
청계천엔 이런물이 모입니다.
구 분
청계천 유지용수
비 고
수 량
40,000(㎥/일)
야간 및 동절기 등 탄력적 공급
다산교에서 달리기 303m 이동 맑은내다리
동평화상가 앞
폭 13.5m, 연장 26.3m
나비의 힘찬 비상을 아치구조와 크로스 케이블로 조화시켜 힘찬 도약 연출, 패션 중심의 상징성 부여
신발도매상가, 평화시장, 인쇄전문상가, 애완동물 골목, 문구완구 골목, 중고물품 벼룩시장
청계천을 순 우리말로 바꾼 이름으로 청계천을 상징할 수 있는 다리 명칭으로 결정
※ 지도상의 각 표시부분이나 아래 명칭을 클릭하시면 해당 정보를 자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
맑은내다리에서 달리기 251m 이동 오간수교
흥인문로(청계6가)
폭 59.9m, 연장 22.9m
사각지대의 공간을 녹지로 조성하여 끊어진 남북 노지축을 연결하며, 동대문과 연계한 옛 성곽 복원
동대문, 장춘단공원, 동대문운동장, 국립극장, 밀레오레, 두산타워
동대문에서 을지로 6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다리이다. 홍예문(紅霓門)으로 다섯 칸으로 되었다 하여 "오간수다리" 또는 "오간수문" 이라 하였다
- 이 다리는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 나가는 지점에 놓여 있던 다리이다.
즉 서울에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다섯 개의 아치형으로 된 구멍을 만들었고,
그 위로 성곽을 쌓아 올렸으며, 아치 모양의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성벽 안쪽으로 장대석을 연결하여 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가 동대문 옆의 오간수문을 설치한 다리이므로 오간수다리라 불렀다.
이 오간수문은 물길이 잘 빠져가기 위해 가설한 것인데
조선시대에는 도성 안에서 죄를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 달아나든가 혹은 밤에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사람들의 통로로 곧잘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 예로 명종 때 전국적으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의 무리들이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를 부수고 도망갈 때도 이 오간수문을 통해 달아났었다.
이 다리는 1907년 일제가 청계천 물이 잘 흘러가도록 한다는 미명하에 오간수문을 모두 헐어버릴 때 함께 사라지고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되었다가 후에 성곽이 훼손되는 것과 함께 오늘날에는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마전교와 오간수다리 사이에는 조선시대 때 청계천의 하상을 준설하고 여기에서 나온 흙들을 쌓아 인공적으로 만든 산인 가산(假山)이 있었다.
청계천은 도성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흘러 중량천과 합류한 다음 한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따라서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남쪽 성벽 아래에 개천 물이 도성 밖으로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수문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오간수문이었다.
오간수문 조금 남쪽에는 이간수문(二間水門)라고 하는 수문이 있었는데, 이것은 남산 남소문동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성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만든 수문 이었다.
오간 또는 이간이라고 하는 것은 수문의 수를 말하는 것이다. 오간수문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하지 않으나, 조선초기 한양에 도성을 수축할 때 물길을 고려하며 성벽 아래 수문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오간수문은 크기가 5척이나 되었으며, 각 수문마다 쇠창살로 만든 철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것은 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함과 동시에 외부에서 이 수문을 통해 함부로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명종 때의 의적(義賊)으로 알려진 임꺽정이 이 오간수문을 통하여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오간수문은 외부사람들이 도성을 몰래 드나들 때 이용하던 주요 통로가 되었던 모양이다. 오간수문은 튼튼한 철문으로 되어 있었지만, 오랜 기간동안 제대로 준설을 하지 않았으므로 거의 제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쇠창살에 나뭇가지 등 부유물이 걸리고 거기에 토사가 쌓여 수문을 거의 막아 버린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임시 방편으로 2척의 나무문을 별도로 만들어 사용하였으나 영조 때에 이르러서는 이것마저도 개폐를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오간수문의 기능을 회복하는 일은 개천 준설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1760년 영조는 개천을 준설하면서 먼저 수문 앞에 쌓여 있는 토사를 걷어내었다.
그리고 나무문도 다시 철문으로 교체하여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하였으며, 주변에 버드나무를 심어 토사가 쓸려 내려와 다시 수문을 막는 일이 없도록 영구적인 조치를 하였다.
이로써 오간수문은 원래 기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조는 이 오간수문에 여러 차례 행차하여 역군들이 준설하는 것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영조가 이 오간수문에 행차하여 개천바닥을 처내는 일꾼들의 모습을 그린 「준천도」(1760년)를 보면 다섯 개의 수문과 수문마다 설치된 철문, 그리고 수문 앞에 놓여 다리의 모습이 선명하다.
또 주변에 심어 놓은 버드나무도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버드나무가 우거진 오간수문은 이후 도성 안에서 이름난 봄 놀이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오간수문이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은 1907년이었다.
1907년 중추원 참의 유맹(劉猛) 토목국장은 청계천 하천수가 원활하게 소통되고 토사가 쉽게 흘러 내려가도록 한다는 명문으로 수문(水門)을 뜯어버렸다.
또 다음 해인 1908년 3월에는 훼손되어 방치된 성벽을 처리하고, 시가교통을 원활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동대문 부근 성벽과 함께 오간수문 (五間水門)의 성벽까지 헐어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콘크리트로 근대식 다리를 놓았다. 이로써 오간수문의 원형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오늘날사람들은 '오간수문'이라는 이름 대신 '오간수교' 또는 '오간수다리' 라고 부르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맞지 않다.
성벽을 지키거나 수문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물을 건널 수 있도록 수문과 수문 사이에 긴 돌을 놓아 사람들이 건너다닐 수 있도록 하였으나,
오간수문의 원래 기능은 이름 그대로 물이 빠져나가는 수문이었으며 다리가 아니었다.
명칭 또한 조선왕조 500년 동안 '오간수문'이라고 불렀지 '오간수교'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
오간수문을 오간수교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일제에 의해 오간수문이 헐리고 콘크리트로 된 근대식 다리가 놓인 다음부터였다. 일제강점기에 오간수문은 시내 전차의 주요통로 였다.
1921년 6월 동대문에서 광희문간 전차 노선이 신설되면서 오간수교 위에 전차가 다릴 수 있는 철교가 놓이게 되었다.
더욱이 오간수교 바로 옆, 즉 지금의 동대문종합시장 자리에 전차차고가 자리하고 있어서 오간수교는 다른 어떤 곳보다도 전차의 왕래가 많았다.
1926년 6월 오간수교는 다시 한번 확장되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장례행렬이 장지인 유릉(裕陵,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갈 때 이 오간수교를 건너가게 되었다.
따라서 장례행렬이 건널 수 있도록 두 간 반(약 4.5m)이던 다리를 네 간 반(약 8.2m)로 확장하였다.
가산은 자연적으로 생긴 산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산으로 조산(造山)이라고도 한다.
가산을 만드는 이유는 자연경관을 일상 생활공간 주변에 가까이 두고 즐기고자 하는 옛 사람들의 바램에서 비롯되었으며,
궁궐이나 도성 안에 큰 연못이나 하천을 조성할 때 파낸 흙이 쌓여 인공 산인 가산이 되기도 하였다.
경복궁 교태전 뒷산인 아미산(峨嵋山)이나 경회루 연못 가운데 있는 섬이 그 예이다.
또 풍수학적으로는 땅의 기운이 허한 곳에 지기(地氣)를 북돋우기 위하여 가산을 만들기도 하였다.
1398년에 종묘 앞쪽의 지세가 허하다고 하여서 흙으로 산을 쌓은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청계천 주변에는 오간수문 안쪽에 가산이 있었는데, 하나는 개천 북쪽에, 하나는 개천 남쪽에 가산이 있었다.
이 가산은 1760년 영조 때 개천을 준설하면서 하천바닥에서 파낸 흙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1760년 2월 개천 준설을 할 때 개천바닥과 양 제방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토사가 하천바닥에 쌓여 있었다.
그러나 하천바닥에서 파낸 토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하여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날과 같은 운반수단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엄청난 양의 토사를 멀리 옮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하천 바닥에서 퍼낸 흙은 부근에 있는 낮은 가로에 쌓거나 질퍽한 큰 도로를 메우기도 하였으며,
빈터나 폐가를 매입하여 쌓기도 하는 등 형편에 따라 적당히 처리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준설이 끝날 무렵인 1760년 4월 영조는 당시 원로 대신인 유척기(兪拓基, 1691∼1767)에게 개천 준설공사의 성과를 묻게 되었다. 이 때 유척기는 준설로 생긴 토사를 그냥 개천의 양안(兩岸)에 방치해 두면, 비가 올 때마다 쓸려 내려와 다시 개천을 메우게 되어,
모처럼 실시한 대역사가 헛되이 되어 버리므로 거액을 들여서라도 이 토사를 다른 곳으로 운반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유척기의 지적에 따라 영조는 개천에서 준설한 수백만 석의 토사를 오간수문 부근 양안으로 옮겨서 쌓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개천 양안에 커다란 흙더미가 생겼는데, 이것이 가산이다.
마치 조그만한 꽃섬이었던 난지도가 1970년대말부터
서울에서 발생하는 모든 쓰레기들을 받아들이면서 높이 90m, 넓이 53만평의 커다란 산이 되었던 것에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때 만들어진 가산은 물론 난지도처럼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당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산으로서는 상당히 컸다.
1770년 이후 발행된 고지도를 보면 오간수문 안쪽 개천 양편에 가산(假山) 또는 조산(造山)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산은 청계천변에 살고 있는 거지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거지들은 가산에 토굴을 파고 생활하였으며, 그들의 우두머리인 꼭지단( 帥, 개수)을 이곳에서 선출하였다.
한편 거지들에게는 뱀을 잡아 파는 권리가 부여되었는데, 뱀잡이를 땅꾼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들이 가산에서 땅굴을 파고 살았기 때문이다.
가산은 특별히 기초를 다져서 쌓은 것이 아니라 그냥 흙은 한 곳에 모아 놓은 곳에 불과하였으므로 비가 오면 조금씩 깎여 내려가기도 하였고,
반대로 개천을 준설할 때마다 토사가 다시 쌓이기를 반복하여 완만한 언덕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가산에 나무와 화초를 심게 되었는데,
1914년에 서울의 지명을 새로 정할 때 가산에 심어놓은 꽃향기가 좋아서 이 곳을 방산동(芳山洞)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가산 역시 인구가 늘어나고, 근대적인 도시시설이 들어서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북쪽의 가산은 광무(光武) 2년(1898)에 그 자리에 전차 차고가 들어서면서 대부분 훼손되었으며,
남쪽 가산은 1918년경에 현 국립의료원 자리에 조선약학교(朝鮮藥學校)가 들어서고,
1921년에는 그 서편에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가 들어서면서 모두 헐렸으며,
그 흙은 종로의 도로 정비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남쪽 가산터는 청계천 6가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국립의료원을 거쳐 방산동 일대이고,
북쪽 가산터는 동대문종합상가가 들어서 있는 곳이다.
관리기준
청계천에는 사시사철 물이 흐르는 생태하천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 12만톤의 맑은 물을 공급합니다.
이는 한강원수를 2등급 이상의 수질로 정수 처리한 공급용수로 하천수심을 평균 40cm로 유지 관리하고있습니다.
- 청계천 본류 관리기준(환경부 고시에 의거 BOD기준 3이하로 관리) ☞ 환경부고시 제2006-227호(07.1.10) 『중권역별 수질 및 수생태계 목표기준과 달성기간』 ☞ 환경부고시 제2008-21호(08.1.30) 『수질 및 수생태계 목표기준 평가 규정』 ☞ 환경부 수질측정망 운영계획(2011.7.1) - 공급용수 관리기준(환경정책기본법시행령 수질 및 수생태계 하천 생활환경 Ⅱ등급)
01
pH
수소이온지수 : potential of hydrogen
물의 산성이나 알칼리성의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로서 중성에 가까운 6.5~8.5가 적정함
02
DO
용존산소: Dissolved Oxygen
물속에 녹아있는 산소의 양, 수중 유기물이 늘어나면 산소가 소비되어 그 양이 줄기 때문에 수질오염을 측정하는 지표로 측정값이 높을수록 수질은 양호함
03
BOD
생물학적산소요구량 : Biochemical Oxygen Demand
물속에 있는 유기물의 오염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로, 물속에 들어 있는 유기오염물질을 미생물이 분해하는데 필요한 산소의 양으로 측정값이 낮을수록 수질은 양호
04
SS
부유물질: Suspended Solid
일정한 양의 물 속에 부유하고 있는 물질의 양으로 측정값이 낮을수록 물이 맑게보임
05
COD
화학적 산소 요구량 : Chemical Oxygen Demand
물의 오염정도를 나타내는 기준. 유기물 등의 오염물질을 산화제로 산화 분해시켜 정화하는데 소비되는 산소량으로 측정값이 낮을수록 수질은 양호함
06
T-P
총인Total Phosphorus
인화합물의 합계, 하천, 호소 등의 부영양화를 나타내는 지표로 측정값이 낮을수록 녹조발생이 적음
07
총대장 균군
Total Coliforms
총대장균군 자체는 인체에 유해하지 않지만 분변오염의 지표가 되며
사람과 동물의 장내에서 기생하는 대장균 및 대장균과 유사한 성질을 가진균을 총칭하며 측정값이 낮을수록 수질은 양호함
오간수교에서 달리기 261m 이동 버들다리
통일상가 앞
폭 17.0m, 연장 23.3m
사교에 따른 보행자 동선을 위해 차보도 분리 파골라 설치로 도심 속의 정원 연출
전통재래시장 (평화,동화,광의,덕운시장), 헌책 골목, 중구구민회관
과거 오간수문 상류에 왕버들이 많았었다는 데서 명칭을 인용하였으나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재검토 권고로 공식명칭 사용 보류
동.식물 현황
구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평균 종수
계
421(516)
573(707)
626(762)
631(788)
654(864)
581(727)
식물이입종(식재종)
268(95)
312(134)
308(136)
314(157)
300(210)
300(146)
어 류
23
19
25
27
25
24
조 류
33
29
36
34
37
34
저서성대형무척추동물
39
26
53
39
29
37
육상곤충
46
174
192
206
248
173
포유류
4
4
4
4
6
4
양서.파충류
8
9
8
7
9
8
참 고 사 진
버들다리에서 달리기 187m 이동 나래교
평화시장 앞
폭 6.0m, 연장 22.8m
나비의 힘찬 나래짓을 이미지화 하였으며, 3차원 아치와 케이블로 나비형상화 유도
의류종합 동대문시장, 평화시장
나비가 날개를 활짝 편 형상의 다리로, 동대문 의류상권의 중심지역에 위치하는 교량. 인근 동대문 의류상권이 세계 패션 1번지로 비상하는 의미를 담음
나래교에서 달리기 210m 이동 마전교
훈련원로(청계5가)
폭 40.5m, 연장 21.6m
빛의 마을(창선)과 우마(牛馬 )시장의 유래표현을 위해 전통문살모양의 조명과 청동말(馬)상 배치
훈련원공원, 한국기독교기념관, 묵정공원, 동대문시장, 대학로권 연결
인근 옛교량 명칭으로, 다리 부근에 우마(牛馬)를 매매하는 마전(馬廛)이 있었던 것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