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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화로 구워 먹는 불고기인 야키니쿠는 주로 평안도 지역에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한 재일동포 식품학자에 따르면 1930년대 후반부터 오사카의 한국식당에서는 갈비(야키니쿠)와 냉면을 전문적으로 판매했다고 한다. 더불어 평안도 지역의 냉면도 같이 판매했다고 한다. 수필가이자 언론인이었던 故 조풍연 선생이 개화기 서울풍속도를 그린 ‘서울잡학사전’에서도 일제 강점기 때 서울의 갈빗집에서 냉면과 함께 갈비구이를 판매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여러 해 전 우연히 만난 나이 지긋한 미식가가 “불고기를 먹고 냉면을 먹는 것이 최고의 음식”이라고 이야기를 했던 것도 기억난다. 예전에 고향이 평안도인 장인어른께서 유명한 평양냉면집 불고기와 냉면을 사주셨던 기억도 새록새록 남는다. 단, 그 유명 냉면집의 불고기 냉면은 가격이 무척이나 비싸다.
외식업계의 진짜 전문가들만이 아는 속설이 있다. 한국의 외식 아이템 중 식당 업주 입장에서 가장 매력적인 아이템이 고깃집인데 이와 더불어 냉면도 많이 판매하는 곳이 최고의 식당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반대로 해석하면 갈비집이나 불고기집과 같은 고깃집에서 냉면을 제대로 구현하는 곳이 별로 아니, 거의 없다는 이야기로 해석된다. 갈빗집 <봉피양>은 돼지갈비가 유명하지만 손님들이 이 집에 오는 이유 중 많은 부분은 냉면이 차지한다. 사실 <봉피양> <삼도갈비> <배꼽집> 등을 제외하고는 고깃집에서 수준급 냉면을 구현하는 곳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 10년 전 어느 고깃집의 전단지를 기획해준 적이 있다. ‘불고기의 추억’이라는 헤드라인 카피 아래 불고기와 냉면으로 아주 심플한 전단지를 만들었다. 주말 매출이 3~4배 정도 신장할 정도로 전단지 효과가 컸다. 지금처럼 SNS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주로 나이든 손님들이 불고기와 평양냉면을 먹으러 많이 몰려왔다.
물론 이것은 필자의 주관적 관점이기도 하다. 여기서 냉면은 비빔이 아닌 물냉면을 뜻한다. 고기를 먹고 나서 시원하고 쨍한 육수로 마무리하는 ‘선육후면’은 분명 최고의 식도락임이 분명하다.
슴슴한 한우불고기와 시원한 물냉면의 앙상블
얼마 전 서울 삼청동 한우식당 <만정>에서 불고기와 냉면을 먹었다. 모던한 인테리어가 기존 고깃집들과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이 식당 업주는 여성으로, 높은 디자인 안목을 보유했다. 메뉴가 다양한데 우리 일행은 부담 없는 불고기를 주문했다. 요즘 한우 가격이 정말 부담이 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불고기는 200g 2만5000원인데 순수한 고기 무게다. 불고기가 나왔다. 2인분인데 양이 푸짐했다. 채소 등이 많이 올라갔지만 정량 준수가 지닌 위력이다. 불고기 양념은 즉석에서 무친 즉석양념이다. 그래서 그런지 고기 색이 선명하고 신선해 보인다. 채소가 많이 들어간 웰빙형 불고기인데 식당 불고기 맛이라기보다는 가정용 홈메이드의 맛이 난다. 양질의 식재료를 사용한 결과다. 불고기 양념이 슴슴하지만 적당한 감칠맛에 잘 넘어간다. 단맛을 절제한 양념이 입에 맞는다.
우리의 지론은 어설픈 생고기 등심보다 이런 불고기가 더 맛있다는 사실이다. 낮술이지만 가볍게 소주도 한 잔했다. 요즘에는 ‘삼겹살=소주’지만 1980년대까지 ‘불고기=소주’가 일반적인 ‘소주등식’이었다. 그랬던 불고기가 이젠 삼겹살에 완전히 추월당했다. 불고기를 다 먹고 나니 배불렀지만 냉면을 주문했다. <만정> 업주가 “냉면에 자신 있다”고 해서다. 그렇지만 우리 일행이 좋아하는 평양냉면은 아니었다. 냉면을 진짜 좋아하는 사람 중 대다수는 ‘평양냉면파’다. 평양냉면이 아닌 함흥냉면이었지만 이 집 냉면장이 50년 경력의 조리장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냉면과 비빔냉면을 같이 주문했다. 물냉면은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이 집 냉면 육수는 적당한 육향과 시원한 맛이 교차하는 수준급이었다. 소위 말하는 냉면의 쨍하는 맛이 있다. 육수는 한우를 사용한다고 한다. 면발이 좋았지만 조금 면이 굵었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야금야금 먹은 것이 어느 덧 냉면 한 그릇을 다 비웠다. 불고기 양이 많아서 약간 과식이었지만 기분 좋은 식사였다. 일행이 주문한 비빔냉면도 유명 함흥냉면 전문점 못지않은 맛이었다. ‘50년 경력의 냉면장’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냉면 가격이 8000원이라는 점도 마음에 든다. 서울 시내 4대문 안에 불고기와 냉면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식당은 다섯 손가락 이내다. 그런데 유명 식당은 가격이 참으로 비싸다. 서민들이 먹기에는 부담스럽다. 한 달 식비가 꽤 되는 필자조차 유명 냉면집에서 불고기 냉면을 먹는 일이 연중행사일 정도다. 지난 연말에도 유명 냉면집에서 불고기와 냉면을 먹었지만 그것도 어쩌다 먹은 것이다.
저명한 외식인이 불고기 전문점을 요지에 다수 전개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 레스토랑은 가격은 차치하고 맛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서울 삼청동은 외국인이 많이 오는 지역이다. 이런 지역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수준급 냉면과 불고기를 먹을 수 있는 식당을 한 곳 발굴해서 다행이다. 이런 불고기 냉면을 외국인에게 추천하고 싶다. 더욱이 삼청동은 운치가 있는 지역이다. <만정>에서는 고기를 먹는 손님에게 와인 콜키지 무료 행사를 이번 봄에 한다고.
전언한 것처럼 불고기 냉면 맛도 좋지만 식당의 분위기도 차분하고 세련된 곳이다. 불고기에 와인을 마시고 냉면으로 마무리하면 근사한 식사가 될 것이다.
<만정> 서울 종로구 삼청로 124-2, 02-733-1392
* 지출 비용(2인 기준) : 한우불고기 2만5000원(1인분)x2인분 + 냉면 8000원x2인분 + 소주 4000원 = 7만원
첫댓글 여행....맛집...좋아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