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 그 모든 것의 시작(마무리)
홍경남
≪소작의 땅≫을 마치고 황금성, 김경희, 문말순, 그리고 김영숙 형까지 모두 졸업하였다. 내가 ‘황토’의 가장 큰 형이 된 것이다. 1979년 3월 공산성에 올랐을 때 누런 황사가 금강을 희미하게 가리고 있었다. 황사를 내 눈으로 의식하며 본 첫 순간이었다. 그만큼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엄청난 허전함과 막막함이 밀려왔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1학기에 무엇을 하며 살았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동기인 유대학, 한상룡과 많이 싸웠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날 뿐. 나와 같은 과 동기인 유대학은 명석하고 재주가 있었다. 춤사위도 품이 좋아 말뚝이 춤도 잘 추었다. 다만 살아온 날이 쉽지 않았던 듯 풀리지 않는 상처가 많아 보였다. 그 상처는 자주 거칠게 드러났고 나는 그런 일들을 품어낼 아량과 힘이 없었다. 한상룡은 수없이 헤매고 수업을 빠지더니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누동학원으로 들어갔다. 박정희 유신 정권은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구속하며 날뛰고 있었고.
그 와중에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특히 대학신문사 학생들이나 ‘황토’와 인연이 닿은 몇몇 동기 후배들과 가끔 만났다. 확장주의 미국에 대한 저항과 혁명의 외침을 담은 ≪들어라, 양키들아≫ 필사본을 그 중 누군가가 구해 왔고, 의논 끝에 인쇄하여 배포하기도 하였다. 프레이리의 ≪페다고지≫와 이반 일리치의 ≪학교 없는 사회(탈학교의 사회)≫ 같은 진보 교육론을 어디선가 구해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던 것이 그때였던가 싶다. 리영희 선생의≪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서 엄청난 생각에 빠져들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현장 교육실습도 있어서 바빴던 1학기는 그렇게 어정쩡하게 흘러갔다.
4학년 가을 마지막 정기공연 작품을 구하지 못하고 헤매다 결국 천승세의 ≪만선≫으로 결정이 났다. 계순옥, 정수국, 김행곤, 배인정, 양봉석, 이광현, 김용현, 이대열 등 후배들이 연극의 주역이 되었다. 처음으로 후배들의 연습과정을 지켜보면서 내가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무대를 만들기 위해 후배들과 함께 금강 백사장에서 커다란 그물을 짜던 일은 생각난다. 그때 단역인 무당 역을 맡아 공주 일대의 무당을 찾아 굿을 어떻게 하는지 물었더니 돈이 제법 드는 진짜 굿을 하라 해서 줄행랑을 치고서 얼치기 무당 역을 하느라 진땀을 빼기는 했다. 후배들이 주역이 된 ≪만선≫은 처절하고 아름다웠다. 구포댁을 연기한 배인정은 그때 연극에 미친 듯이 몰입하더니 발령을 포기하고 졸업과 함께 영화를 공부하겠다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몇 해가 지나고 연락이 닿아 인정이를 만났을 때는 이미 영화인이 되어 ‘노동자 뉴스’를 제작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금강을 휘돌아가던 상록원에서 후배들과 뒤풀이를 하고 있었던가. 마침 한쪽에서는 신문사 후배들이 술자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민기의 ‘친구’가 흘러나왔다. 아마도 주인이 우리를 알고 있었던 듯. 우리도, 저쪽에서도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마침내 술자리는 합석이 되어갔다. 그 시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함께 하는 학생으로서. 그때 함께 있던 후배 중에 1980년 학생회장을 맡게 된 장재인도 있었다. 한편에서는 본격 탈춤 동아리인 ‘한삼’도 만들어졌다. 또 ‘금강’이라는 사회과학 모임이 만들어져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0ㆍ26이 터졌다.
내가 졸업하고 나서 1980년에는 새롭게 부활한 학생회와 함께 대학의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후배들은 80년 봄 ≪구리 이순신≫을 교내 시청각실에서 공연하였다. 학생회장이 된 장재인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광주에 가서 마당극 공연을 함께 보며 새로운 세상과 우리 문화에 대한 꿈을 꾸며 신명에 부풀기도 했다. 그 해 4ㆍ19 이후 계엄령 철폐, 구속된 민주 인사의 즉각 석방, 노동 3권 보장, 교수 협의회에 의한 학장 직선 등 정치와 학내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지는 이른 바 ‘공주(서울)의 봄’을 맞았다. 그러나 5ㆍ17 신군부의 구데타로 전국의 학생운동 대표들이 체포 구속되면서 공주사대에서도 학생회장 장재인을 비롯한 정관영, 김관제 등 4~5명이 구속 제적당하고 그들의 삶도 뿌리 뽑히거나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광주항쟁 전후에 사회과학 모임 ‘금강’ 식구들인 이상헌, 정선원, 이성근, 최연진 등 7명 쯤은 엄청난 고문 끝에 실형을 받거나 불구속 재판을 받는 고초를 당했다 한다. 고난의 세월을 걸어간 후배들 중에 벌써 세상을 떠난 이도 서넛이나 된다. 그때 일로 떠난 것은 아니라 해도 그 때 일들이 그들에게 남겼을 상처가 죽음의 원인이 아니라 할 수는 없다. 고 장재인, 고 최연진, 고 이성근. 그들의 아픔과 끈질긴 싸움, 또한 절박한 삶의 벼랑에서 겪어야 했던 일까지도. 그들의 열망과 뜨거움을 나는 얼마나 아는가. 글을 쓰며 후배들한테서 자세한 내용을 들으니 마음이 너무나 아프고 지금까지도 비통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80년대 중반까지 대학사회 민주화와 교원적체문제 해소 등의 현안과 관련된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다. 군부독재 타도, 학사징계 철회, 구속학생 석방 등을 요구하며 점거농성 중 분신을 시도하던 양봉석은 구속 제적당한 뒤 재입학하여 26년 만에야 졸업했다고 한다. ≪만선≫에서 도삼이 역을 했기에 우리는 양봉석을 흔히 도삼이로 부르곤 했다.
졸업과 함께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으로 발령받은 나는 5월 광주의 소식도 그나마 미국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위크’지를 통해 어찌어찌 알게 되었지만 확인할 길도, 믿을 수도 없었다. 사대 정문 앞에도 탱크가 놓였고 휴교령이 내려졌다. 후배들이 겪었을 그 절망적인 상황을 짐작하기 어렵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후배들은 남원으로 판소리를 배우러 떠났다고 했다. 우리 몸짓과 함께 우리의 소리를 익히는 것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잘 되지도 않는 소리를 온종일 질러댔다고 한다. 남원과 전주에서 살던 한상균 형은 전부터 판소리에 깊이 심취하여 동편제 소리를 배웠고 우리가 모일 때면 ‘백발가’나 ‘심청전’ 한 대목을 구성지게 부르곤 했다. 그런 장면이 있었으니 우리 소리에 대한 관심은 당연히 후배들한테로 이어졌겠지.
80년 가을에 후배들은 동학혁명을 소재로 한 ≪산국≫을 올렸다. 또 겨울에는 계순옥, 정수국의 졸업 축하 공연으로 김민기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이 퐁세 신부님 공소에서 이루어졌다. 어렵게 구한 녹음테이프로 자기들끼리 안무와 동작선을 짜서 연습했다는 ≪공장의 불빛≫은 엄청난 감동을 주었다. 멀리서 공연을 보러 달려온 졸업생들은 눈물을 흘리며 후배들과 얼싸안았다. 축하공연에 대한 화답으로 계순옥과 정수국은 ≪육혈포 강도≫를 공연했다. 두 사람의 소리와 캐릭터의 조화도 기가 막혔다. 그리고 81년에는 드디어 ≪땅풀이≫ 공연이 이루어졌다.
80년 제주 ‘수눌음’ 극단이 공동 창작한 ≪땅풀이≫는 제주에 불어닥친 부동산 투기 바람에 맞서 공동체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풀어가는 내용이다. 무엇보다 이 공연은 그동안 우리가 실현하고자 했던 마당극이었다. 밤에 직접 제작한 횃불을 들고 한 공연은 어느 한 군데 막힘도 없이 수많은 관객들과 주고받고 호흡하며 장쾌하게 이어졌다. 풍자와 해학이 가득하여 보는 내내 신명이 넘쳤다. 후배들이 판소리와 우리 춤사위를 익히며 오래 애쓴 결과물이었다. 79년 결성된 탈춤 동아리 ‘한삼’ 단원들이 ‘황토’와 함께 하고 있는 모습이 특히 보기 좋았다. 후배들은 80년대 뜨거웠던 민주화 운동에 힘을 합하며 함께 하고 있었다. ‘한삼’ 단원이었던 김신회와 박상대는 지금까지도 우리와 한 식구처럼 만나며 살아가고 있다.
후배들이 뜨거운 80년대를 통과하는 동안 졸업 동인들은 학교에서 씨름해야 했다. 계순옥은 한돌의 노래 ‘못생긴 얼굴’을 가르쳤다가 계급 갈등을 조장하고 아이들을 의식화시킨다는 명목으로 갑자기 다른 학교로 강제 전보를 당하기도 했다. 이미 졸업한 다른 형들도 비슷한 갈등과 고민을 겪고 있었다. 누동학원에서 아이들 글쓰기 지도를 하며 아이들 글을 실어 소식지를 펴 내던 황시백, 최교진 형도 학교에서 수없는 벽에 부딪히면서도 아이들과 끊임없이 만나고 연극을 하며 마음을 나누고 있었다. 한상균 형은 남원고등학교에서 ≪토막≫을 공연하였고, 황시백 형은 속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만선≫과 ≪소작의 땅≫을 무대에 올렸다. 최교진 형도 아이들과 함께 ≪토막≫ 연극을 했다. 어려운 형편에 제 월급을 털어가며 아이들과 함께 한 일이었다. 저마다 바빠서 소식을 다 듣지 못했지만 다른 동인들도 여러 방면으로 혹은 연극으로 아이들과 함께 하려 노력했음을 나중에 조금씩 들을 수 있었다.
내 첫 발령지 일동종합고등학교는 상과와 인문과가 섞여 있었는데 보충수업은 물론이고 밤수업까지 무려 7과목에 한 주 33시간의 수업을 해내야 했다. 아이들을 군대식으로 잔인하게 때리는 장면을 수없이 목격하며 “아이들에게 그렇게 심한 체벌을 해야 하나요? 체벌로 뭐가 바뀔까요.” 말 한마디 했다가 당장 공동체를 해치는 부적격교사로 낙인찍혔다. 선배 교사들이 ‘겁도 없이’ 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장면이 또렷이 떠오른다. 학교는 그야말로 ‘침묵의 문화’가 지배하는 곳이었다. 3년 뒤 경기도 광주군과 부천의 중학교로 옮겨갔지만 학교 현장은 어디나 다를 바 없었다. 겨울이면 기온이 영하3도 아래로 내려가야만 조개탄 난로라도 피울 수 있다는 규정에 묶여 손이 곱는 교실에서 떨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미칠 것 같았다. 출근하면 교실에 난로 피워달라고 꿈쩍도 않는 행정실장(당시 서무과장)에게 달려가 싸우는 것이 일이었다. 교무회의 시간에 별것도 아닌 작은 요구를 했다가 다시 낙인찍히고 학교장이 새로 전입한 교사들에게 나와 가까이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는 말을 그 선생님한테서 들었다. 내 수업을 감시했고, 교실게시판에 붙인 책 소개글과 백두산 천지 사진을 찍어서 교육청으로 보냈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았다. 내 일이기에 일부를 말할 뿐이고 다른 동인들도 비슷하거나 더한 일들을 겪었다.
졸업 후 몇 년은 가끔씩 모였지만 결혼과 출산을 거치며 쉽게 만나지 못했다. 침묵의 학교에서 외로웠던 우리는 저마다 지역의 뜻 있는 교사들과 소모임을 시작하였다. 나도 인천 YMCA 교사회에 나가며 교육현장의 문제들을 토론하며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다 ‘민중교육지 사건’이 터졌다. 교육현장의 문제를 파헤친 부정기 간행물 ≪민중교육≫을 발행한 교사들을 좌경용공으로 몰아 검거하고 구속 파면시켰지만 오히려 그것을 시작으로 교사운동이 더 크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함께 한 최교진 형이 긴 시간 어려운 과정을 거쳐 발령받은 학교에서 파면되었다. 그리고 졸업 동인들은 저마다 전국교사협의회, 이어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하여 교육 민주화를 외치며 싸웠다. 그러다 해직을 앞둔 1989년 여름 명동성당 단식 농성장에서 만났다. 배고픔을 안고 우리는 “밥을 안 먹으니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하며 웃었다. 많은 동인들이 해직되었고, 형편 상 학교에 남은 동인들도 마음은 늘 함께 했다.
전채린 선생님은 전교조 결성과 해직 무렵에도 우리를 격려하려고 농성장에 자주 들르셨다. 어쩌다 서울로 선생님을 찾아뵙거나 대전이나 어디서 모일 때마다 선생님이 사주신 밥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고. 어느 때는 우리를 선생님 댁으로 불러 모아 손수 밥을 지어주셨다. 학교에 다닐 때나 졸업을 한 뒤나 선생님은 우리의 정신적 지주이셨고, 늘 우리와 함께였다. 당뇨와 합병증으로 고생하며 때마다 한움큼씩 약을 드시고 손수 주사를 놓으시면서도…. 선생님은 본래 말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실천으로, 애정 어린 통찰력으로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몇몇 동인들은 이오덕 선생님이 이끄는 ‘한국글쓰기연구회’에서 만나기도 했다. 글쓰기를 하며 아이들의 참마음과 만나려 애쓰기도 했고, 전국의 다른 선생님들이 하는 것을 보고 배우며 고민을 나누었다. 그러면서도 대체로 해마다 동인들과 만났던 것 같다. 복직 후의 학교와 세상은 점점 너무나 크게 달라졌다. 5년 전 아이들과 함께라고 확인할 수 있었던 공감대를 갖기 쉽지 않았고. 그래도 우리가 어떻게든 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사를 위해 인천집을 정리하다가 운봉공고에서 아이들과 함께 공동창작한 연극 대본을 발견했다. 아이들의 현실과 목소리를 담은 ≪엘리베이터≫와 ≪비상구≫라는 작품이었다. 그때 우리와 함께 작업한 극단 ‘한강’의 백현주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가끔 보았고, 이란희는 영화감독이 되었다. 아이들과 무엇이라도 해보려고 나도, 다른 동인들도 몸부림쳤다.
황시백 형은 속초와 고성의 학교를 오가며 양양의 작은 마을 사잇골에 터를 잡았다. 집을 짓고 땅을 얼마쯤 마련하여 동무들과 함께 살아갈 작은 공동체를 꿈꾸며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황 형이 자리잡은 곳으로 몇몇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농사를 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서툴게 얼마 안 되는 결실로도 행복해하며. 그렇게 꿈이 조금씩 이루지려는데 황 형은 병을 얻어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갔다. 황 형의 죽음, 그리고 뒤 이은 홍경전 형의 죽음은 우리에게 지금도 회복되었다 할 수 없는 큰 후유증을 남겼다. 이제 누구든 갈 수 있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
세월이 지난만큼 전교조를 채우는 사람들도 달라졌고 우리는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학교 현장에서도 퇴임을 맞았다. 세상은 빠르게 달라지는데 오늘의 젊은 세대가 처한 상황은 예전보다 더 힘들어진 것 같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휩쓸고 세상은 쉽게 나아지지 않는다. 좀더 나은 교육환경을 만들고자 우리도 나름대로 애쓰기는 했는데…. 지금도 저마다 살고 있는 곳에서 작은 것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다가오는 세상은 새로운 세대의 몫이니 이 시대의 주인공들이 해법을 찾을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우리는 지금도 가끔 만난다. 벌써 40년이 넘은 인연이다. 만나면 이야기 나누고 노래하고 춤도 춘다. 생각해 보면 평생의 스승이신 전채린 선생님을 만났고, 대학에서 누구하고도 바꿀 수 없는 좋은 형과 아우들을 만났고,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함께 고생하기도 했다. 그리고 살아오면서 서로에게 배우고 영향을 주었듯이 서로의 마무리를 함께 지켜볼 수 있겠지. 무엇보다 사는 곳은 다르지만 함께 있다는 것,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다. (2022. 7. 16)
첫댓글 경남이 수고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