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端의 追憶 #92,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Ⅱ)
부산 초량의 산복도로 위쪽 가난한 동네에 살고 있던 어떤 할머니 한분이 저승사자에게 이끌리어 염라대왕앞에 도착하니 아직 올때가 안 되었는데 잘못 데리고 왔다고 하면서 다시 돌려보내더라는 것이다. 저승에서 이승으로 다시 나올때는 반드시 어떤 다리를 통해 강을 건너온다고 옛 사람들은 말해 왔다.
할머니께서 그 다리를 건너오는데 다리밑에 있는 키가 자그마하고 초라한 행색의 개장수 한사람이 할머니를 간곡히 부르더라는 것이다. 할머니께서 멈춰서서 개장수를 바라보니 꼭 드릴말씀이 있으니 잠간만 뵙고 가시라고 하는 것이었다. 할머니께서 개다리끌 다리밑으로 내려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이승으로 다시 돌아가시거든 내 아들을 만나서 말 한마디를 꼭 좀 전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저승 개다리끌 다리밑 그 개장수의 사연인즉,
나는 얼마전까지 이승에 살았던 S그룹의 회장인데 내가 이승에 사는동안 개같은 짓을 너무 많이 해서 저승길도 제대로 다 못가고 여기서 이렇게 개장사를 하고 있다고 하면서 보아하니 할머니께서는 이승으로 다시 돌아가시는듯 하니 이승에 가시거든 내 아들을 꼭 만나 나처럼 ‘개같이 살지 말라’고 꼭 좀 전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이승으로 다시 나가시더라도 내 아들을 만나기가 심히 어려울텐데 그래도 어떻게 하던지 꼭 좀 내 아들을 만나서 전해달라고 아주 극진하게 신신당부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는 이승으로 다시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다시 살아난 임사체험(臨死體驗)이었다.
다시 살아나신 할머니께서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소생해서 극진하게 받았던 그 신신당부를 잊을 수 없어 서울로 올라가 S그룹의 웅장한 건물 출입 현관앞에서 그 아들회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니 건물의 젊은 보안요원은 아연 실소할 수 밖에 없었다.
아들을 만나기가 심히 어려울 것이라던 저승 개다리끌 다리밑 S회장의 말대로 사옥의 현관문을 통과하는것 조차 불가능했다. 몇날 며칠을 쉬지않고 찾아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광경을 마침 어느날 출근하던 아들회장이 목격하게 되었고 보안요원을 불러 사정을 물어보게 되었다.
그 보안요원은 당연히 할머니를 미친 사람 취급했지만 아들 회장은 할머니의 행색을 보건데 미친사람 같지는 않았던지라 어떤 사연이 있다고 짐작되었던지 자기 방으로 모시고 오라고 분부를 내리게 되었다. 아들 회장의 방에 들어선 할머니께서는 저승에서의 일을 설명하고 선대 회장을 만났던 이야기를 하면서 직계가족을 다 불러모아야 그 자리에서 선대 회장의 부탁말씀을 전하겠다고 했더란다.
그래서 마누라와 아들딸들을 불러 모아서 그 할머니를 통한 선대 회장의 부탁말씀을 가족들이 전해듣게 되었는데 ‘개같이 살지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는 말씀을 그렇게 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후 그들이 정말 개같이 살지 않았는지는 정확히 알길이 없으되 지상(紙上)을 오르내리는 그들의 생활상은 우리가 다 아는바와 같다. 1990년대 당시 세간에 회자되던 ‘믿거나 말거나’식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바구 한토막이다.
바로 그 시절, 1990년대 세칭 동방교의 창립 교주 노광공의 둘째 아들인 세습 2대 교주 노영구는 자신의 신병치료차 인도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그는 당시 미국에 살면서 몇 사람의 동방교 맹신도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몸종같이 부리고 그들의 수종을 받아가면서 국내의 세칭 동방교를 원격조종하고 있었는데 자칭, 타칭 우주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던 그에게도 파킨슨병의 치료는 불가능했다. 얼마나 좋은 병원을 찾아다녔겠으며 좋다는 약이라면 무엇이던 못 챙겨 먹었겠는가, 그 발버둥의 끝자락으로 인도까지 찾아가지 않았을까. . .
먼산에 잔설이 듬성듬성 보이는 신들의 땅 인도의 야산 외진곳 암굴같은 곳에는 벼라별 잡신같은 신선(?)들이 요가에서 흔히 보는 기괴한 동작을 한 채로 기거하고 있는곳이 수두룩하다. 부처님도 출가하여 여느곳 보리수 나무밑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도를 통하지 않았던가, 이곳 신선(?)들은 지나가는 행인이 보이면 멀찌감치 손짓으로 여행객을 부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면 서투른 영어로 말하기 시작한다.
내가 당신을 만나려고 여기서 기다린지 너무 오래 되었다. 왜 이제 나타났느냐, 자네의 아버지를 내가 잘 안다. 자네의 아버지는 전생에 나의 친구였느니라, 나는 황금궁전에 살면서 지구를 관장하는 바바지신의 몇 번째 제자였느니라, 내가 전생에서부터 자네를 만나기 위해서 이승으로 넘어와서 지금까지 수십년, 여기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너무 늦게 나를 찾아왔으니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던 보상을 해 달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일생은 앞으로 순탄치 못하게 내가 막아버릴 것이니라. . . 뭐 이런식이다.
이런 신선(?)들 하고 입씨름해서 이길려고 하는것은 달걀로 바위치기요 불도져앞에 삽질이며 그야말로 도사앞에 요롱 흔드는 격이다. 얼른 5불이나 10불짜리 달러 한 장 앞에 놓고 도망치는게 상수다. 우 하 하 하. . . ‘믿거나 말거나’식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추리 한토막이다.
이땅의 창조주 하나님(?)이요 재림의 구세주라고 그동안 쉬지않고 줄기차게 신도(성민)들에게 세뇌시켜왔고 수없는 이적기사를 행했다고 주장하던 동방교의 창립 교주 노광공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그의 둘째 아들 세습 2대 교주 아브넬 노영구가 1990년대 어느날 소사 집회에서 정식 선포를 하여 선을 그어놓고 뚱딴지 같은 인도 바바지신의 수석제자라고 난데없이 떠벌렸고 그것을 믿고있는 세칭 동방교 신도들의 이바구가 하도 기가막혀서 긴가민가 하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증언해준 초가삼칸님의 댓글을 읽고 추리소설 한번 써 보았다.
아브넬 노영구의 당시 인도 여행에는 '김O배'국장이 동행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모국어인 한국말조차 어눌하던 아브넬 노영구에게 어슬프나마 김국장의 통역이 필요했을는지도 모르겠다. 아브넬 노영구는 신병치료차 갔던 이때의 인도여행에서 또 다른 신선(?) 세분을 만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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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칭 동방교의 교주 노광공의 사망시간은 7시53분이 아니다. 이승을 하직하는 그의 옆을 지키고 있던 세칭 동방교의 간부 신도들이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평소에도 입혼(세상을 떠나기전에 흔히 있는 혼수상태를 말하는 듯)이 가끔 있었고 그때마다 또 깨어났으므로 또 입혼(혼수상태)인줄 알고 기다렸는데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운명시간을 정확히 모른다는 이야기다.
사망을 확인하고 바로 근처에 거주하고 있던 둘째 아들 노영구를 불렀는데 그때 흰옷입은 세사람이 나타나 노영구와 문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밖에서는 영등포에 사는 노영구의 삼촌 노관평(노광공의 친동생)이 재산문제 때문에 세칭 동방교의 간부들과 서로 다투다가 문을 ‘쾅’ 소리내어 닫고 나가는 바람에 성령(?)이 놀랬는지 그때 성령이 떠났었다고 한다.
수 년후에 그의 처와 미국으로 도피하여 한국의 세칭 동방교를 원격조종하고 있던 2대 교주 노영구가 그의 신병 치료차 1990년대의 초반 어느 시기 인도의 심령술사들을 찾아 갔을때 거기서 그 성령(?)을 다시 만나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참 소설같은 이야기...
(이단의 추억 # 25, 신생활이라는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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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적어나가다 보니 그의 형 '김O배' 라는 사람이 생각이 난다. '김*배'의 친형으로 동생은 상대, 형은 약대출신으로 그의 형제는 모두 서울대 출신 엘리트다. 수재그룹인 그들이 어떤 경로로 세칭 동방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들은바가 없으나 종교는 학식이나 지능과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
통일교도 초창기에 이화여대 교수들이 대거 들어와 붐을 일으켰다고 하지 않던가. 또 다른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에도 현직 검사가 신도로 있어 수사에 애를 먹었다는등, 그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서울대 약대출신 '김휘O'는 노영구가 2대 교주로 있던 어느 시절 김국장으로서 불리면서 세칭 동방교의 행정업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그후 인삼과 관련한 논문제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당시의 세칭 동방교 분위기가 인삼을 연구하고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앉아있을 만큼 정상적이지 못한 시절이었는데 어찌 박사학위를 취득했는지는 아리송한 일이다. 박사학위 취득후로는 김박사로 불리웠는데 2대 교주 노영구가 산기도를 다녀오라고 종용했으나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그 말을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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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소리를 들어가면서 세칭 동방교의 자금을 쓰면서 목에 힘을 주고 다녔으니 교주로서는 경고를 줄 필요가 있었던 모양이고 아마도 세칭 동방교의 행정업무에서 손을 떼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던듯 한데 업무핑계로 지시를 이행하지 않고 불복하더니 결국 행정총괄업무를 모두 뺏기고 세칭 동방교에서 퇴출되고 말았는데 그는 퇴출되어 나가면서 한보따리를 챙겨서 나갔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이제 정신을 차리고 어디서 약국을 차려 인생 본업에 충실하고 있을까.
(이단의 추억 # 33, 거액도난사건,
일가족음독사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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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넬 노영구는 인도 여행중에 미국에 살고있던 장인의 별세로 처갓집에 초상이 나는 바람에 급히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요 그의 아들이라면 이땅의 장인이 세상을 뜨는 일쯤은 얼마든지 뒤로 미룰수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런 일쯤은 미리 알고 있어야 되지 않겠으며 또 세칭 동방교의 용어대로 설령 ‘위도 각도’가 바뀌었다 할지라도 전지전능의 신통력으로 장인의 별세를 좀 뒤로 미루던지 인도여행을 좀 미리 하던지, 일의 선후를 미리 조정했어야 되지 않았을까. . .
세칭 동방교의 창립교주 노광공은 세 번 이땅에 왔는데 한번은 인도, 또 한번은 우리가 익히 아는데로 한국에 왔다고 한다. 전생에는 인도에 살았던 도인이었다고 한다. 그 어르신이 인도에서 도인이었을때 나도 그 어르신의 제자였다고 주장하는 세칭 동방교의 목사(?), 허무맹랑한 이단사설에 함몰되어 목사(?)라고 보기에는 의식수준이 의심스러운 얼빠진 인사도 있다.
세칭 동방교는 그런 곳이요, 그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스스럼없이 말해도 그냥 통하는 곳이다. 아브넬 노영구가 인도에서 어떤 도인을 만났을때 자기 아버지(노광공)에 대해서 물으니 아주 잘 안다고 하더란다. 그래서 바바지신의 수석제자라고 둘러 대었을까. . . ‘여호와 이레’ 노광공이 이땅에 올때마다 아브넬 노영구는 세 번 모두 그의 아들로 따라 왔다고 한다. 영원한 부자지간임을 엄청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세 번중에 두 번은 인도와 한국이라고 말하는데 또 한번은 어디라고 전혀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2천년전에 이스라엘땅에 왔었노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야 스토리가 맞아 나가지 않겠는가, 그러나 2천년전 이스라엘땅에 오신 그분께서는 한점 혈육이 없으셨으니 어째 그분의 아들로 그때도 따라 나왔다고 또 말하기가 낯 뜨거웠는지도 모르겠다.
하 하 하 . . .
첫댓글
기독교는 윤회를 부정하는데, 하나님과 성령님(노광공과 노영구)은 윤회를 주장하고 있어서 참 해괴한 일이다. 차라리 불교와 흰두교의 한 종파라고 말해도 될듯하다. 쯧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