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六章 거성(巨星)과 신성(新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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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대단한데!"
황함사귀는 오밀조밀하게 써진 장부(帳簿)를 들여다보면서
탄성을 내질렀다.
"조금이라도 건질 수 있겠어요?"
"헤헤! 조금이라고 하셨습니까? 이걸 보십시오. 말씀은 보
시고 난 다음에."
황함사귀가 장부를 내밀었다.
적엽명은 장부를 받으면서 형과 형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피곤에 지친 얼굴이다.
적엽명이 비가를 떠나 전가팔웅을 베는 둥 엉뚱한 일을 벌
이고 돌아다니는 동안 청천수는 기억을 꼼꼼히 되살리며 장부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
- 파난부(破卵簿).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잿더미뿐인 비가에 새로운 터
전을 일구자는 여망이 담긴 장부였다.
장부를 작성하는 일은 청천수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
다.
적엽명이 상산암으로 찾아왔을 때, 동생은 미수금이 있을
것이니 재건의 기반으로 삼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적엽명은
그 부분에 대해서 일절 말이 없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대를 갖지는 않은 듯 하다. 사실 청
천수는 불구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무공수련에만 전념했지 가
업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는 등한시하지 않았던가.
청천수는 적엽명이 생각했던 것처럼 가업을 내팽개치고 무
공수련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었다. 나이가 들고 비가를 이어
갈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가업에 조금씩 관심을
보였다.
아버지는 십삼대 해남오지를 선출하는 비무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무공수련에만 전념하라고 말했지만 그럴 수 없었
다.
청천수는 비가보를 드나들었던 사람들, 황담색마와 과하마
가 언제 어디로 반출되었는지를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서 끄집
어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폐허가 되어버린 서고(書庫)에 틀어박혀서 찢어진 종이 한
장도 소홀히 하지 않고 세심히 살펴보았다.
아내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무슨 일이고 뜻대로 순종하는, 자기 목소리는 전혀 낼 줄
모르는 아내가 파난부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천
수는 보고, 생각하고, 기억난 것을 구술(口述)시켰을 뿐.
적엽명이 쳐다보자 청천수가 빙긋 웃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형수는 양볼을 붉힌 채 고개를 수그렸다. 형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갖은 간난(艱難)을 꿋꿋이 참아내는 형수. 모두 피
곤에 지친 얼굴이지만 만족한 기색이 역력했다.
적엽명은 파난부를 들췄다.
- 해남파 본문 한가(韓家)
거래자(去來者) : 장문인 뇌공검 한민.
황담색마 옥상(鈺象)
마가(馬價) : 은(銀) 육십사 정(錠:은덩이)
수가(受價) : 인도시(引渡時) 은 오십 정.
미수(未收) : 은 십사 정.
남은 금액만큼 상등품(上等品)의 용뇌향(龍腦香:목재의 일
종)을 받기로 했으나 지불하지 않았음.
- 석가(石家)
거래자 : 가주 암암검객 석중.
황담색마 팔달(八達)
마가 : 은 오십칠 정.
수가 : 인도시 은 삼십 정.
미수 : 은 이십칠 정.
은 삼십 정은 담도홍(淡桃紅:연분홍) 진주(眞珠) 서른 알로
대체하기로 함. 미수(未收).
……
파난부에 기재된 항목은 삼십여 군데에 달했다.
해남십일가는 모두 포함되었고, 바다 건너 뇌주반도와 광동
성에도 미수금이 깔려있었다.
총 금액은 은 삼백 정에 조금 못 미쳤다.
파난부에 기재된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면 비가보는 결코 몰
락했다고 할 수 없었다. 예전만은 못해도 중오가 견주어 결코
손색없는 재력을 지닐 수 있으리라.
"대단하군요."
적엽명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문제는 합동서(合同書:계약서)겝죠. 합동서가 모조리 사라
져 버렸으니 파난부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오리발을 내밀면 속
수무책입죠. 헤헤! 고얀 놈이라고 곤장을 때릴지도 모르고."
이 부분이 해결해야 할 난관이다.
비가는 그 누구에게도 잔금 요청을 하지 못한다. 비가주가
죽고 은을 담아놓았던 보궤가 사라진 날, 합동서도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같이 사라졌다는 편이 옳다. 합동서는 보궤
속에 들어있었으니까.
"받을 수 있을까?"
청천수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받을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적엽명은 단호하게, 시원하게 대답했다.
"이랑,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받겠다는 것인지……?"
황함사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엽명의 자신의 방까지 뒤따라온 황함사귀를 보며 씩 웃었
다.
"방법을 모르겠어요?"
"헤헤! 이건 정말 곤란해서."
"호귀에게 은 오십 정만 융통해 달라고 하세요. 그걸 서너
번에 나눠서 들여오는 겁니다."
"그럼……?"
"이건 어차피 받지 못할 돈이에요. 갚으려고 했으면 진작
갚았겠죠. 비가가 그토록 어려워졌는데도 손길조차 내밀지 않
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분합니다. 시중 잡배들이라면 몰라
도, 검 이외에는 탐욕을 버려야 할 사람들이……"
황함사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돈은 받지 못한다. 그런 걸 알면서도 청천수에게 미수금 장
부를 만들게 했다.
청천수가 할 일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래야 그는 상산암에
서 내려올 것이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 세상에
서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처럼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일도 없을 테니까.
과연 그랬다.
사귀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목부들은 말을 돌본다 집을 수
리한다며 하루 종일 쉬지 못한다. 화화부인과 취영도 할 일이
많다. 집안일도 바깥 일 못지 않게 많으니까.
청천수에게 미수금 장부라도 만들게 하지 않았다면 그는 다
시 외톨이가 되었으리라.
"음……! 알겠습죠. 그럼 호귀에게……"
황함사귀는 흐뭇한 마음으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화문이 마음에 걸리는데…… 누가 도와주는 것
이……"
적엽명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한백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지금 화문이 맡은 일은 혼자 하게 내버려둬야
합니다. 누가 옆에 있다는 것이 발각되는 날에는 어둠 속에
숨어있는 쥐새끼들이 더욱 꼭꼭 숨어버립니다."
"화문이 다치지 않을까 염려스러워. 성격마저 급한 사람이
니."
"후후! 어쩌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지도 모릅니다."
"전화위복?"
"취채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노노가의 창기인데……"
"수귀가 붙여준 창기들 중 한 명인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화문이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받아…… 들여? 화문이? 창기를?"
"성격이 맞는다. 이 여자라면…… 이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
다."
"하하! 하하하하!"
적엽명은 오랜만에 통쾌하게 웃었다.
화문은 자유분방한 성격이다. 무엇에 얽매이는 것을 죽기보
다 싫어한다.
언젠가 적엽명이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런 성격에 어떻게 군
대에 들어왔냐고, 답답해서 어떻게 견디냐고, 중원 천지를 마
음껏 떠돌고 싶지 않냐고. 화문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러고
싶지만 중원에서는 마음껏 싸울 수 없다. 군율에 얽매이는
것이 답답하지만 싸움을 마음껏 할 수 있지 않은가.
화문이 여자를 얻었다는 것은 축하해 줄 일이다. 세상사람
들의 편견으로 보면 종오품(從五品)직까지 오른 사람이 겨우
창기를 맞아 들이냐고 할 수도 있다. 체통이 안 선다고 할 지
도 모르고, 늙기도 전에 노망(老妄)부터 났다고 말할 지도 모
른다.
허나, 화문이 직접 고른 여자라면, 자신에게 맞다고 생각했
다면 누구보다 다정한 한 쌍이 될 수도 있으리라.
"잘 됐군. 그것 봐. 내 고향에 오니 여자도 찾게 되잖아?
그러지 말고 그대도 골라보지 그래?"
"때가 되면……"
한백은 묘한 여운을 남기며 말머리를 돌렸다.
"걱정은 되지만 화문은 혼자 일하게 내버려두십시오. 혼자
가 아니니 위험도 훨씬 덜할 겁니다."
"음. 그러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계속 우화 쪽을 뒤져보시겠습니까?"
"아니. 우화는 상관없어."
"성급히 단정을 내리시는 것은……"
"성급한 단정이 아니야. 우화가 대력검을 얻었다면 일을 저
지를 필요가 없어.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대력검 정도의 검보
를 얻으면 세상을 얻은 듯 기쁘겠지. 우화가 살수를 고용한
것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아. 살수를 통해서 진정한 해남파
의 힘을 저울질하는 거야.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지
만. 우화는 해남파 고수들을 상대할 수 있다고 믿는 거겠지."
"음……!"
한백은 두 말없이 동의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 아니면 믿지 않는
다. 꼼꼼한 성격이랄까? 그러나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나서야
건너는 성격은 때때로 일을 더디게 만든다.
지금이 그렇다. 한백도 우화가 장군들을 죽인 범인은 아니
라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그러면서도 우화를 들먹인 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의혹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적엽명이 파악하는 부분은 세 가지다.
근래에 막대한 자금을 사용한 사람이나, 자금이 필요한 사
람.
여족인들을 소리 소문 없이 뇌주반도로 이동시켜 일을 시킬
수 있는 사람.
해남도에 파견한 장군들을 간단히 죽일 수 있는 무공을 지
닌 사람.
해남도에서 세 가지 조건에 부합된 곳은 세 군데다.
우화대, 해남파, 관부.
우화에 대한 첫 번째 의혹은 해소되었다.
황함사귀가 우화대의 영역이 넓어진 것을 확인해 주었으니,
그 부분은 믿어도 된다.
의혹이 가시지 않는 부분은 두 번째와 세 번째이다.
우화의 말을 생명처럼 믿고 따르는 여족인들이니 두 번째는
생각할 필요도 없고, 세 번째…… 대력검이 있지 않은가.
대력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적엽명은 확인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감자밭에 잠복해 있던 여족인 십여 명, 그들은 적엽명에게
자신의 무공 정도를 말해주었다.
"그럼 이제 남은 곳은 관부와 해남파인데……"
한백은 말끝을 흐렸다.
두 군데 모두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
적엽명도 말이 없다.
노장군은 상세한 말을 일러주지 않았다.
적사장군의 피살 가능성을, 그리고 변복(變服)을 하고 해남
도에 들어가라는 명령만 내렸다.
"적사장군님은 유배된 장군이십니다. 과거에는 어땠을 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한 장군님을 누
가……?"
"해남도 자체 문제네."
"무슨 말씀이신지?"
"적사는 우연히 무엇을 알았던 게야. 그래서 피살당했지."
노장군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았다. 적사
장군은 나이 예순이 넘었지만 병사(病死)할 정도로 건강이 나
쁘지는 않았다.
어찌된 일일까?
노장군은 의문을 접어두었다.
유배지 중에서도 해남도로 유배됐다면 정객(政客)으로써의
생명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뿐만 아니라 늙어 죽을 때까지
사면(赦免)도 받지 못하리라.
죽음보다도 더한 절망과 외로움이 적사장군을 일찍 죽게 만
들었는지도 모른다.
노장군은 해남도로 시종(侍從)을 보냈다.
유배된 적객(謫客)들은 죽어서도 변변한 묏자리 하나 차지
하지 못한다. 구덩이를 파고 관도 없이 파묻어 버리면 그만이
다.
죽었을망정 눈이라도 편히 감게 하고 싶었다. 단지 그것뿐
이다.
"유배된 자일망정 죽은 다음에는 죄가 사(赦)해지는 법, 좋
은 관을 사고, 봉분도 올려줘라."
그것이 시종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되었다.
시종은 해남도에 도착하는 그 날, 피살당했다.
경주자사가 보내온 서신에 의하면 자신을 만나러 오지도 않
았다고 한다.
경주자사는 관원이다. 관원이 죄인의 봉분을 만들어 줄 수
는 없다. 그래서 봉분 위치나 알려주라고 협조 서신을 보냈는
데, 답장은 사망서(死亡書)였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두 번째 시종을 보냈지만 결과는 마
찬가지였다.
그 다음부터 사람이 파견되기 시작했다.
노장군의 직감에 무엇인가 알지 못할 무엇에 적사장군이 포
함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니까.
노장군은 무엇인가 조금 더 알고 있는 듯 하다.
"근래에 들어서 거액의 돈이 필요하거나 쓴 사람이 있다면
요주의 인물로 생각하게. 큰돈이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돈."
변복을 하고 운남까지 손수 찾아온 노장군은 그 말만을 남
기고 밤길을 걸어갔다.
"관부부터 건드려 보지."
적엽명은 결단을 내렸다.
"역시 적사장군의 묘소입니까?"
적엽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암살 당할 위험이 높습니다."
"하루 빨리 해결해야 돼. 내가 해남도에 머무는 기간이 길
면 길수록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 내가 위험할 수도
있고."
두 말하면 잔소리다.
전가주가 몸소 검을 뽑았다.
극히 위험한 상태. 전가주가 비무를 청해온다면 거절할 명
분이 없고, 누가 이길지 모르는 상황이다.
가급적이면 전가주가 비가보에 도착하기 전에 일을 끝내고
해남도를 떠나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비가보 재건이라는 커다란 벽이 가로막
고 있다. 적엽명을 그 일 또한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에. 전가
주가 도착하기 전에 일을 끝낸다는 보장도 없다. 현재 상황으
로는 구름 속에 가려진 신룡(神龍)을 찾는 격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아니. 그동안 적객으로 온 분들의 수발은 수귀가 들었어.
일을 시작하는 것은 수귀가 온 다음에."
"그가 올까요?"
"올 거야."
수귀 탄은 그 날 저녁에 비가보 대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왔구나."
"그래."
"저녁은?"
"아직."
"그럼 먹어야지. 준비하는 동안 차 한 잔 할래?"
"아니. 나 혼잔데 번거롭게 준비는…… 내가 가서 찾아먹고
오지."
수귀나 적엽명이나 우화에 대한 말은 서로 자제했다.
감자밭에서 있었던 어색한 대화도 잊어버린 듯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선 채로 밥과 나물을 한데 섞어 우걱우걱 쑤셔 넣은 수귀는
다시 적엽명을 찾았다.
"대력검은……"
"그만! 됐다."
"……?"
"이해한다. 무인을 배치한 것도, 네가 그런 말을 한 것도,
우화가 직접 나오지 않은 것도. 그리고 내 볼 일은 마쳤으니
까."
"우리…… 옛날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벌써 돌아왔잖아?"
"그래."
"하하!"
"하하하!"
적엽명과 수귀는 두 손을 꽉 잡았다.
혈배를 든 것은 형식일 뿐이다. 하지만 혈배를 들면서 혈육
이 섞인 것 이상으로 서로를 아끼자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서로가 살아온 길은 달랐지만, 현재 처해있는 상황도 다르고,
물러서라 하면 물러설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사귀와 적엽
명은 이미 한 형제인 것이다.
적엽명은 사흘 동안 기다리기로 했다.
그동안은 우화를 만나기 위해서 발자취를 지웠지만 비가보
에 돌아온 이상 전가주를 떠돌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어멋! 왜 그래? 해남파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는데?"
호귀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적엽명이 동문서답 식으로 물었다.
"여기는 걱정하지마. 내가 하는 일이잖아. 청천수 오라버니
가 아픈 몸을 동의에 의지하고 밤낮으로 심혈을 기울인다고
소문내 놨으니까 해남파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거야."
"오라버니? 점점 징그러워지는군."
황유귀가 송충이라도 만진 듯 부르르 떨며 놀려댔다.
"어머머! 웬 상관이야?"
호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유귀도 입을 열었다.
"네가 알아보라고 했던 일 있잖아?"
"……"
"한족은 도무지 모르겠어. 웬만하면 알 텐데 이건 마치 두
꺼운 철벽으로 막아놓은 것 같아. 누가 일부로 말야."
호귀와 수귀는 황유귀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지 못했다.
궁금하지만 묻지 않았다. 황함사귀와 유소청은 일의 전말을
알고 있지만 아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비가에 관계된 일 이
외에는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화를 만나자고 한 사건, 그리고 화문에게 창기 대여섯 명
을 붙여달라고 부탁한 일 정도가 드러났을 뿐.
"해남파 쪽인가?"
"아니, 전부야. 한족 전부."
"음……!"
듣고 있던 한백이 침음성을 터트렸다.
해남도를 벗어나서 죽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여족인뿐이
라면 사주(使嗾)를 했다고도 할 수 있겠는데 한족도 그렇다면
일이 심상치 않다. 노장군은 이렇게 큰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제일 먼저 해남도에서 누가 죽었는지 죽은 사람들부터 파악
해야 된다고 말한 사람은 한백이다.
그는 적엽명이 뇌주반도로 들어서기 직전, 그 말부터 했었
다.
해남도에 파견된 사람들은 녹녹치 않은 무공을 지녔다. 그
중에 객사한 사람들만 추려낸다면 아무리 비밀스럽게 숨겨진
조직이라도 윤곽을 드러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아이들과 노인, 아녀자도 포함해야 한다. 그들과 같이 죽은
청장년은 대상에서 제외해도 된다.
그들이야말로 진짜 운이 없게 객사한 사람들이니까.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비밀조직의 힘이 예상보다 크다는 것
외에는 알아낸 것이 없다. 상대는 적어도 여족인의 반을 흡수
하고 있다는 우화대와 맞먹는 조직임이 틀림없다.
"됐어. 이제 그 일은 그만 파고들어."
"그만?"
"더 파고들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워."
"까짓 목숨이야……"
"하나뿐인 목숨이지."
"……"
"내게 변고가 생기더라도 모두 지금 말했던 대로 해주기 바
래."
"너야말로 하나뿐인 목숨을……"
"무인이니까. 이제 와서 말이지만 나는 한 번도 무인이라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어. 해남도를 떠나있던 지난 팔 년 동안
에도."
모두 숙연한 분위기에 짓눌려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적엽명은 전가주와의 비무에 필승의 자신이 없는지 자신이
죽었을 때를 대비해 세세한 것까지 부탁했다.
호귀는 노노가를 감은성에서 백사구로 옮기기로 했다.
백사구를 사람들이 들끓는 도읍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루
를 옮겨놓는 것처럼 좋은 것이 없었다.
노노가를 아는 사람들은 불원천리 달려오리라.
백사구는 점점 사람들이 불어나게 되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객잔(客殘), 다루(茶樓), 음식
점……
우선 그 정도만 되어도 비가를 건드리기 위해서는 뚜렷한
명분이 필요하다. 사람들의 이목처럼 무서운 것은 없으
니까.
황유귀는 비가 주위에 노방을 설치하기로 했다.
청천수가 입을 열지 않아 어떻게 당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암습에 이은 연수합공이 아니면 그토록 처참하게 당
했을 리 없지 않은가.
뚜렷한 명분 없이 비가를 건드리기 어렵다면 살수를 보낼지도
모른다.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청천수지만 비가를 버티고 있는
기둥, 청천수와 무공을 모르는 아녀자 셋만 제거한다면 여족인
인 사귀는 손을 떼어야만 하리라.
수귀 탄은 당분간 비가에 머물기로 했다.
황유귀가 아무리 노방을 설치해 놓는다 하더라도 해남파 무
인들이 급습한다면 약간의 시간만 지체할 수 있을 뿐 막지는
못한다. 그 시간 동안 탄은 청천수를 비롯한 비가 일가족을
도피시켜야 한다.
황함사귀에게는 마방 관리를 부탁했다. 황함사귀라면 믿고
맡겨도 좋으리라. 천여 필에 이르는 말들을 관리했던 사람이
니.
한백에게는 어떤 부탁을 했을까?
모른다. 일행이 대청으로 들어왔을 때 적엽명과 한백은 이
미 이야기를 끝낸 상태였다.
끄르릉……!
적엽명의 발밑에 엎드려 있던 염왕이 으르렁거렸다.
묵직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읽을 탓일까……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