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1교에서 그대로 가정천을 따라가면 물소리길이지만, 잠시 물소리길을 버리고 정창손묘를 찾아간다
우의정과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의 묘는 예전과 달리 물소리길이 변경되면서 만나지는 못한다
도중에 체험농원이 있어 들러본다
오밀조밀하게 잘 꾸며 놓았다
잠시 쉬며 차나 음료수라도 한 잔 할까 하였으나
아무도 없다
한 바퀴 돌아보고 다시 나왔다
저 멀리 정창손 묘가 보인다
정창손의 묘역은 원래 광주군 방이리(현 송파구 방이동)에 있었는데, 그가 죽은 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폐비 윤씨사건에 연루되어 부관참시되고 신도비와 석물이 파손되었다
1506년(중종 1)에 신원되어 묘역을 개장하고 석물을 다시 세웠으며, 1623년(인조 1)에는 신도비를 다시 세웠다
정창손과 부인(청주 정씨)의 묘역은 따로 떨어져 있었으나 방이동의 도시계획으로 1970년 종중에서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면서 하나의 봉분으로 합장하고 이전의 석물과 새로 제작한 석물을 함께 배치하였다
석물은 묘비 2기, 문인석 2쌍, 신도비 1기, 석양 1기가 남아 있으나 이전작업으로 묘역의 모습이 심하게 변하였다
정창손은 조선초 청백리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시대의 유교적 도덕률에 충실했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아무런 이유없이(4불가론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위화도회군으로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까닭에 명분이 필요했다
명분은 백성들에게는 비대해지고 타락한 불교를 억압하고,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인정받고, 중국으로부터는 유교를 국교로 하고 스스로 신하의 나라임을 강조하여 인정받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이 어쩔 수 없이 택한 일종의 전략적 이념이었다
그러나 세대가 지난 어느날 그 이념은 정념이 되고 시대의 도덕률이 된다
무조건 중국에 대하여 사대하고,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의 원칙에 따라 현재의 왕에 충성하는것이 시대의 최고의 도덕률이 된다
정창손도 그랬다
우리만의 글인 한글창제를 끝까지 반대하다 투옥당하고, 다시 복직되어서는 불교숭상을 반대하다가 다시 좌천되었다
세조 때는 단종 복위를 함께 논의한 동료들을 세조에게 고변하여 최고의 관직(영의정)까지 올랐고, 성종 때는 연산군의 생모를 폐출하는데 앞정섰다
그 결과 그는 갑자사화에 연류되어 부관참시를 당하나, 시대의 이념의 충실한 청백리로 녹선되어 사대부들에게 추앙되었다
그는 미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시대의 이데오르기와 도덕률에 최고로 충실했다
무조건 시대의 이념과 도덕률에 충실한 것과, 최고의 선을 지향하고 미래를 내다보고 행동하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최고의 충신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인물이다
1994년 4월 20일 경기도문화자료 제55호로 지정되었다
돌아 나와 차도를 따라 걸어가면 이준경묘가 나온다
이준경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할아버지(이세좌), 아버지(이수정)가 연루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유배생활을 하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사화를 겪으면서도 영의정까지 올랐고, 억울한 인재들에게 등용의 기회를 주는 등 국정을 위해 힘썼다
1585년(선조 18) 건립한 묘비는 마모가 심하여 수원대학교 박물관으로 이관하였고 현재는 비문을 그대로 옮겨 놓아 근래에 세운 것이다
양호당 이덕열은 이준경의 아들이다
이준경의 묘
이덕열의 묘
첫댓글 경치도 좋고 볼거리가 많아요 ~
무더위지나면, 살살 다녀봐야겠어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