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11 / 믿음보다 감사가 먼저 (요15:16)
교회학교에 가는 아이에게 엄마가 200원을 주며 100원은 하나님께 드릴 헌금이고 100원은 예배 끝나고 오면서 더우니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사 먹으라고 했습니다.
교회 가는 길에 아이가 동전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까부르면서 ‘헌금, 아이스크림. 헌금, 아이스크림’ 하다가 그만 동전 하나를 떨어뜨렸는데 이게 그만 하수구에 빠져버렸습니다.
어떻게든 꺼내 보려고 한참을 애쓰던 중에 아이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교회로 발걸음을 돌리면서 아이는 남은 동전 하나를 손에 꼭 쥐고는 혼자 말로 중얼거리기를 “에이! 헌금이 하수구에 빠졌네.”라고 했답니다.
아이의 욕심 때문이라며 웃고 넘길 수도 있는 얘기지만 종종 어른 중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와 ‘내가 하나님과 함께한다.’의 차이를 잘 모르는 분이 계신 것 같습니다.
얼핏 들으면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여러분은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말은 매사에 하나님께 주도권이 있다는 말이고, 내가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말은 모든 것에서 내가 우선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어느 집에 진돗개 한 마리와 똥개 한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진돗개는 입만 벌리면 하는 말이 ‘우리 주인은 내게 먹을 걸 주고 보호해 주고 쓰다듬어 주고 안아 줘. 우리 주인은 하나님 같아.’라고 하는 반면에 똥개는 ‘우리 주인은 내게 먹을 걸 주고 보호해 주고 쓰다듬어 주고 안아줘. 아마 내가 하나님 같은가 봐.’라고 했답니다.
뉘앙스가 좀 다르지요? 진돗개와 똥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첫째는 ‘감사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자기 삶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가의 차이, 즉 지금의 만족함이 주인 때문이라 생각하는지 아니면 자기 때문이라고 여기는가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도 그러합니다. 내 삶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또한 지금의 상황이 좋아지기를 기대한다면 누구 때문인지를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삶의 주도권을 맡길만한 신을 찾으려 하고, 그 신이 자기 삶을 만족하게 해 주리라 믿으며 살아들 갑니다.
이런 이유로 세상에 만들어진 것이 종교입니다. 따라서 종교는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요?
기독교는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좀 헷갈리시겠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종교는 ‘사람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오셨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믿는 거지만 기독교는 ‘에브리데이 믿음!’이어야 하는 겁니다.
물론 외견상 믿는다는 것에서는 둘 다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특징은 ‘믿은 후에 감사’입니다. 때문에 감사할 일이 없거나 원치 않는 일이 계속될 경우라면 믿음은 가능할지 몰라도 감사가 있을 여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순서가 다릅니다. 기독교는 ‘감사 후에 믿음’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만족하는 것과는 별개로, 또한 감사할 일이 없고 원치 않는 일이 계속될 경우라 해도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먼저 나를 찾아와 주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도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생각해 볼 것이, 하나님은 왜 나를 찾아와 주신 걸까요?
나를 구원하시고 내게 복을 주시기 위해 그리하신 겁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나를 찾아와 주셨음을 감사할 수 있으면 우린 하나님이 내게 은혜 주실 것도 믿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감사 후에 믿음’이라는 순서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 중에서도 기독교를 종교처럼 믿으려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즉 믿은 후에 감사하려고 합니다.
그런 분들은 원하는 일이나 만족할만한 일이 있게 되면 자기들의 믿음이 좋아서 그런 줄 압니다. 그 결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심중에 교만이 자리하게 되고, 그리 교만해지다 보니 그다음 일이 뜻대로나 원대로 되지 않으면 당황해하거나 하나님께 서운해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원하는 일이나 만족할만한 일이 없게 되면 자기들의 믿음이 없거나 부족해서 그렇다고 생각해서 자기도 모르게 소심해지거나 근심과 낙심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렇듯 기독교를 종교처럼 믿는 분들의 특징은 믿음 전은 물론이고 믿으면서도 감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먼저 나를 찾아와 주신 것이기에 ‘먼저 복 받고 믿는 것’이고, ‘먼저 응답받고 기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일반 종교와는 달리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가장 큰 특징은 나를 택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아셔야 할 것이, 기독교의 감사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기에 내가 많은 것을 가졌느냐 잃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기독교의 감사는 선택적인 게 아닙니다. 보이는 결과 앞에서 내가 감사할지 말지를 정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아도 지금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 주심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닌 말로 하나님이 함께하심부터 감사하지 못한다면 백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잊어서도 안 됩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게 되면 성경은 무섭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이 시간에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몰라서 인생이 찢어지고, 신앙이 찢어지고, 사업이 찢어지고, 가정이 찢어진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요?
더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살면서도 감사가 믿음보다 우선이라는 사실을 모르기에 단지 문제가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복을 받기 위해 믿음의 열심을 내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가 예배를 드리고 집에 가다 보니 거지 아이가 빵 가게 앞에서 진열장 안쪽의 빵을 들여다보며 침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아이를 데리고 가게로 들어가서는 맛있어 보이는 빵을 이것저것 골라주었는데 볼이 미어터지도록 빵을 먹는 아이를 보다가 우유도 사줄 요량으로 ‘얘야 맛있니?’라고 물었더니 아이가 빵을 움켜쥐더니 눈까지 부라리며 ‘몰라요.’하곤 도망을 가더랍니다.
아이에게 우유까지 사주고 싶었던 신자는 ‘허! 그놈 참!’ 하며 돌아섰다고 합니다.
더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뿌리치고 다시 세상을 향해 돌아서는 철부지 신자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을는지요?
목회를 하며 여러 교인을 상대하다 보니 예수님을 믿는데도 ‘안달형’이 있는가 하면 ‘배짱형’이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안달형은 열 가지 잘되다가도 한 가지 작은 고난이라도 만날라치면 그것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합니다. 때론 불평하다 시험에 듭니다. 그리곤 그런 자리에서 도무지 나오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반면에 배짱형은 열 가지 어려움이 있다가도 한 가지만이라도 회복되고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하나님은 배짱형 신자로 인해 영광 받으시고 기뻐하시지만 동시에 안달형 신자를 향해서는 안타까워하시며 기어코 복 받게 하시려고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역사하십니다.
혹 여러분이 배짱형 신자라면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계속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안달형 신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내 복 받게 하시기까지 역사하신다는 사실도 믿으셔서 이제라도 감사하는 믿음으로 돌아서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결코 환경이나 외적인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남 때문에 내가 불행하단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세요.
통상 사람들이 자기 소유를 나타낼 땐 ‘내 거, 내 집, 내 소유….’ 등과 같이 소유물 앞에다가 ‘내’자를 붙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오직 하나만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그 앞에 ‘내’자를 붙일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우리가 그 앞에 ‘내’ 자를 붙일 수 있는 유일한 하나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내 소유물이란 뜻은 아닙니다. 단지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려면 오직 하나님만을 ‘내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내 하나님으로 믿을 수만 있으면 세상 모든 것이 다 내 것이 될 수 있음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에겐 믿음 이전에 나에게 찾아오셔서 ‘내 하나님’이 되어 주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일지라도 감사로 시작하는 믿음만이 감사로 결론 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옛말에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들 합니다. 따라서 어디서건 근심만 심어놓으면 그분 인생은 가는 곳마다 근심만 수확할 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저기에다가 감사를 뿌린 사람은 어디서고 반드시 감사를 수확하게 됩니다.
이런 결과는 그리스도인이라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서의 ‘감사는 복 받는 연습’이고 ‘불평은 망하는 연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복을 내가 만들 수는 없어도 내가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자니 우린 복 받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복을 받게 될까요?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을 믿되, 그 하나님이 이미 나와 함께 계셔 주심을 ‘먼저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문제를 인정하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문제보다, 먼저 하나님이 내게 와 계심을 인정하는 것이 먼저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은 하나님이 역사하시기를 믿는 게 믿음입니다.
예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읽은 내용인데 어떤 그리스도인이 배가 표류 되어 일행 3명과 함께 무인도에 남게 되어 급한 대로 움막을 짓고 불을 피우고 여기저기로 양식을 구하러 다니다가 밤이면 구조되기를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움막에서 좀 멀리까지 수색을 갔다 와보니 움막 안에 피워 놓은 불씨로 인해 움막이 홀라당 불에 타버렸습니다.
다들 낙심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만은 그 자리에 무릎 꿇고 ‘하나님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런 화재가 있게 하실 리가 없습니다. 불이 난 것에 감사합니다. 그다음은 하나님이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했는데 얼마 후 섬으로 배 한 척이 다가와서 사람들이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구조선 선장이 말하기를 ‘불을 피우시기를 참 잘하셨습니다. 그 불과 연기를 보고 멀리서도 이렇게 구조하러 올 수 있었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움막에 불이 난 건 불행인데, 그 불행조차 감사했던 그리스도인에게는 불이 났다는 불행 때문에 구조될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만약 여러분이 표류 된 섬에 있어 지금 불타버린 움막 앞에 서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이라면 어땠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런 화재가 있게 하실 리가 없다.”고 했던 그리스도인의 고백을 배우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고백에서 ‘화재’ 대신 여러분의 ‘문제들’을 대입해 보세요. “하나님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일’이 있게 하실 리가 없다!”를 믿으신다면 나에게 있는 문제가 실패든 가난이든 괴롬이나 고난이든 간에 우선은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다음엔 ‘이런 일’을 놓고 하나님이 해결하고 처리해 주시기를 기도하세요.
우리가 그런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면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도 반드시 믿음대로 역사해 주십니다.
믿음은 단순한 기대가 아닙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다고 할 경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해결되게 해 주세요.’라거나 ‘하나님. 이 문제가 이렇게 저렇게 해결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기도하게 된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왜 기도하게 된 걸까요?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기도하게 된 겁니다. 다시 말해 기도하게 된 이유는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가 우리로 기도하게 만들었고, 문제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게 됐다면 그 문제는 우리에게 오히려 감사할 조건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제부터의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문제로 인해 기도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이 해결되게 해 주세요.’라고 하거나, ‘하나님. 이 문제로 인해 하나님을 찾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해결되게 해 주세요.’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의 기도와 비교해 보면 달라진 하나가 눈에 띄지요?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린 알고 믿어야 합니다. 물고긴 물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물에서 살아갑니다. 그래도 물이 있기에 살 수 있습니다.
육지 생명체들도 공기가 있는지 없는지엔 관심 없이 살아갑니다. 그래도 공기가 있기에 숨을 쉬며 살아갑니다.
이렇듯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계신지 아닌지를 모른 채 혹은 관심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저나 여러분이라면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셔서 나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감사할 게 없다고 하지 말고 여러분의 믿음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 주심에 대한 감사에서부터 출발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로 시작하는 믿음만이 감사로 결론 나게 되는 것이기에 이제까지 믿었어도 되지 않았던 일들이 있다고 하면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일이 있게 하실 리가 없다.”는 믿음으로, 우선은 나로 하나님을 찾게 하고 기도하게 만들어준 그 문제들로 인해 감사하시면서 그 문제보다도 먼저 내게 오셔서 나와 함께 계셔 주시는 하나님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엔 반드시 복이 따라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는 여러분 모두가 먼저 감사하는 믿음을 가지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은혜와 복을 다 받아 누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