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암서원
경북 구미시 수출대로23길 30
(우) 39426(지번) 황상동 416-5
인동(仁同)
동락서원(東洛書院) 을미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장현광(張顯光)
오산서원(吳山書院) 만력 갑술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길재(吉再)
소암서원(嘯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채몽연(蔡夢硯) 호는 투암(投巖),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ㆍ채무(蔡楙) 호는 백포(栢浦), 병랑(兵郞)을 지냈다.
현암사(賢巖祠) 임신년에 세웠다. : 장잠(張潛) 호는 죽정(竹亭), 진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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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재집(立齋集) 정종로(鄭宗魯)생년1738년(영조 14)몰년1816년(순조 16)자사앙(士仰)호입재(立齋), 무적옹(無適翁)본관진주(晉州)
立齋先生文集卷之四十三 / 行狀 / 成均進士竹亭張公行狀
公諱潛字浩源。竹亭其自號也。張氏世居玉山。麗有諱金用。官三重大匡神虎衛上將軍。後世至德寧尹安世,金海府使仲陽父子皆義不事二君。我太祖以有邸舊。降御札屢徵。終不出。遺命並官銜不書碣。府使生本朝掌令脩。掌令生豐儲倉丞俌。丞生通贊孟儲。通贊生忠順衛嫡孫以孝聞。是爲公皇考。妣和順崔氏大司成士老之孫典護軍漢忠之女。以弘治丁巳六月二十六日生公。公生有美質。性高潔孝順。甫離襁褓。已不處汚穢。母夫人疾。見其痛楚。常在側啼號。不隨羣兒遊戲。九歲丁忠順公憂。哀毁服喪如成人。十二始讀經傳。皆爲之手自淨寫。斂袵端坐而讀之。無惰慢色。十六方伯親試士本縣。公作居魁。公以讓長者曰序不敢亂。方伯偉其器量。十八遊京師。就靜庵趙先生學。與白休庵仁傑,成聽松守琛結爲四科友。明年從靜庵於砥平之龍門寺病痘臥。聞崔氏喪。力疾冒雪而奔。廬墓終制。常見鼠汚奠物。泣自責。有頃鼠自斃於床下。己卯靜庵謫綾城。公往拜而歸。及聞其卒。嗚咽不食者三日。移卜幽居于鳳顙洞深處。名其塘曰洗心。臺曰嘯咏。草屋竹籬。唯以書史自娛。甲申晦齋李先生知本縣。禮重甚至曰竹亭主人。飽喫麥飯筍羹。讀味聖賢書。一生淸樂孰過焉。每衙罷杖屨臨訪。或亭或巖。與之講劘經義。亹亹到夜分。有人題其巖曰二賢巖。其迎送之衢。又號爲德衢云。嘉靖辛卯中進士。不待榜而歸。邑宰致門賀。辭以永感而不受。外舅鄭公爲設宴邀之亦不赴。庚子夏旱。草疏論時弊十二條。將上之。旋聞退溪李先生以持平已達於筵中。遂焚之。乙巳爲伸靜庵寃。與館儒合疏。其略曰趙某以豪傑之才聖賢之學。感先王不世之遇。知無不言。言無不盡。徒知有君而不知有身。不幸讒言罔極。倉卒難辨。至於抱恨入地。是豈我先王之意哉。伏願殿下洞燭而快雪之。未幾仁廟大漸。降復職之命。是年尹元衡等搆大獄。戕殺善類。延及者多。公遂稱病歸鄕。因廢擧業。作小齋扁以逍遙。讀書其中。樂而忘憂。絶口不談時事。然每淸宵皓月。撫琴悲歌。以舒慷慨之懷。壬子正月二十六日終于家。壽五十六。三月葬于縣西北卯向原。公自少嗜學。常曰一日不對卷。鄙吝輒萌。淸心之要。只在讀書。雖以母夫人命從事科臼。而其所志不在於是。及得大賢爲師。學業日益進。作進修警心等箴以自顧省。又嘗命畫工摸聖賢遺像揭座右。肅敬瞻仰。如在函丈閒。居常竟日危坐。以俯讀仰思。日用言行。動慕古人。伯氏歿其孤方幼。公常置膝下。不離須臾。出則使人襁負而前。卒致其成立。二弟貧甚。議設宗家祭田。公分自家臧獲以與之。修姓譜以敦門族。揭學規以飭黌儒。創置鄕約法與善惡籍。以峻好惡勸懲之方。收聚童蒙。敎授不倦。從之遊者多知趍向焉。迨其寢疾。手書遺戒十條。以詔家人。又嘗謂門弟子曰士生斯世。不得達施其道。致君民於堯舜。則寧囂囂然處畎畝之中。讀古人書求古人心。安分樂天。以終其年。不亦可乎。若公其可謂有學有德。而庶幾於古之逸民也夫。配延日鄭氏。麗相襲明之後。生員濩之女也。生三男。長曰崑參議。次曰嵂。次曰嵸。參議有六男。曰天翰無嗣。曰景翰主簿。曰光翰。曰
龍翰號岐村。有德行。享于鄕祠。曰
鳳翰號㝏翁。有學問及忠義。享于鄕祠。
曰鴻翰判官。主簿一男曰乃貞。光翰二男曰乃節縣監曰乃迪判事。岐村一男曰乃亮司僕寺正。㝏翁一男曰以兪生員。判官四男曰慶曼贈參議,曰慶暹,曰慶最,曰慶昱。自玄以下多不錄。乃者公之八世孫敬穆氏。持公遺事及旅軒先生所撰碣銘而來。示余言曰。吾先祖享於
賢巖書院。今已三十五年。而尙闕狀行之文。子盍勉諸。余以非其人辭不獲。且念公之行已得大賢而揄揚之。無復餘蘊。則此特備禮依文而已。初非待我輕重者。故遂爲之撮其大綱而序次如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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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헌집(遊軒集) 장석룡(張錫龍)생년1823년(순조 23)몰년1908년(순종 2)자진백(震伯)호유헌(遊軒), 운전(雲田)본관인동(仁同)초명용규(龍逵)시호문헌(文憲)
遊軒先生文集卷之八 / 記 / 竹林精舍記
郡城西數里地有竹林。卽竹亭張先生幽居舊址也。晦齋李先生宰本郡。每衙罷。命駕臨話。家有竹林。林有盤巖。以待來賓。李先生謂曰。竹林主人。飽喫麥飯笋羹。常看聖賢書而味之。一生淸樂。無過於此也。逐日追遊。竟晷而還。時人謂其巖曰二賢。先生歿。仍設俎豆於此地。號以賢巖書院。與吳山東洛兩院巋然幷峙。殆至三百有餘年。先生學問之邃。造詣之精。先祖文康公詳言於墓誌。而鄕黨之尊慕。後學之矜式。愈久而愈深。不幸撤院。而苾芬馨香之地。徒見山高而水長。其在羹牆之慕。彷徨而悽愴者。果何如哉。諸雲仍與鄕章甫謀鳩財拮据。始刱建數架。扁曰竹林精舍。顧余耄洫。固不敢記其萬一。而有一言勉之者。不但以表遺址肎舊堂。爲能盡其誠。各自講明詩禮。篤襲孝悌。讀先生之書。慕先生之志。無負先生之謨訓也。
회재집(晦齋集) 이언적(李彥迪)생년1491년(성종 22)몰년1553년(명종 8)자복고(復古)호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본관여주(驪州)시호문원(文元)
성종 22 1491 신해 弘治 4 1 11월 25일, 慶州府 良佐村에서 태어나다.
중종 19 1524 갑신 嘉靖 3 34 6월, 모친의 봉양을 위해 仁同縣監이 되다.
중종 21 1526 병술 嘉靖 5 36 7월, 사헌부 지평으로 소환되다. ○ 8월, 병조정랑으로 慶尙道御史가 되다. ○ 10월, 이조정랑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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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헌집 제9권 / 묘지명(墓誌銘) / 통정대부 훈융진병마 첨절제사 옥산 장공 묘지명 병서 〔通政大夫訓戎鎭兵馬僉節制使玉山張公墓誌銘 並敍〕
금상〔철종〕의 신유년(1861, 철종12) 3월 10일에 절제사(節制使) 옥산 장공(玉山張公)이 병으로 집에서 죽으니, 그의 아들 유량(有良)이 나에게 장례를 치렀음을 알려주고 묘지명을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다. 나는 공과 이웃해 살아 공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또 선친과도 교분이 있었으니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공의 휘는 두빈(斗斌)이고 자는 유헌(惟憲)이다. 시조는 휘가 금용(金用)이니 고려 시대에 상장군이었다. 11대를 지나 휘 안세(安世)는 부윤(府尹)을 지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그로부터 6대 뒤에 죽정(竹亭) 선생 휘 잠(潛)은 조선조 중종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조정암(趙靜庵)을 좇아 배웠으며 이회재(李晦齋)와 잘 지내 사류(士類)들에게 추중을 받았는데, 현암서원(賢巖書院)에 제향 되었으니 이분이 공의 10대조가 된다.
증조부의 휘는 태일(台一)로 승지(承旨)에 증직되었으며, 조부의 휘는 성한(成漢)으로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언극(彦極)으로 진영장(鎭營將)을 지냈으며 80세까지 장수한 덕택으로 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받았는데, 이분으로 인하여 3대의 벼슬이 추증되었다. 첫 번째 어머니는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수경(守慶)의 따님이고, 두 번째 어머니는 여산 송씨(礪山宋氏)로 두주(斗柱)의 따님이다. 공의 생부는 통덕랑(通德郞) 휘 언국(彦國)이니, 곧 동지중추부사공의 형이다. 생모는 공인(恭人) 선산 김씨(善山金氏)로 하건(廈健)의 따님이다.
공을 건릉(健陵 정조의 능호) 기유년(1789, 정조13)에 낳았다. 겨우 7세에 생부의 상을 당하였는데, 슬퍼하여 몸이 여윔〔哀毁〕이 마치 성인(成人)과 같았다. 성장하여서는 또한 재주가 있어서 비록 문사(文詞)를 일찍 성취하였으나 무관이 바로 세업(世業)이었기에, 마침내 붓을 던지고 무과 시험을 보았으나 여러 번 낙방하였다. 이 때 공은 남에게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기의 도리를 극진히 하였는데, 동지중추부사공이 알아차리고 말하기를 “만일 효성스럽다면 마땅히 보응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더니, 과연 순조 갑오년(1834, 순조34)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다.
부모님의 봉양을 위하여 황해도(黃海道) 중군(中軍)과 전라도(全羅道) 중군(中軍), 그리고 장기 현감(長鬐縣監)과 통우후(統虞侯)를 지냈는데, 모두 치적의 명성이 있었다. 세 임금을 차례로 섬김에 은총이 더욱 융성하였다. 이미 연로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거처함에 임금께서 특별히 훈융진병마 첨절제사(訓戎鎭兵馬僉節制使)에 임명하시자, 공이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한 곡을 노래하였다. 어머니께서 살아 계신 이유로 조정에 가서 임금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돌아왔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병이 들어 죽었으니 향년 73세였다. 인동부 북쪽 옥계동(玉溪洞) 뒤 간좌(艮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공은 질박하면서도 곧았고 자애롭고도 믿음직스러웠으며, 강직하고도 반듯하고 효성스럽고도 우애로웠다. 여든의 어버이를 봉양함에 맛있는 음식과 살진 고기가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형과 조카들을 대함에 너와 나의 구분이 없었으며, 이것을 인척과 빈붕(賓朋)들에게 적용함에 반드시 정성스럽고 흡족함을 다하였다. 오직 의리에 맞지 않으면 준엄하게 물리쳐 용납하지 않았던 것은 본성이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창녕 조씨(昌寧曺氏) 윤탁(胤鐸)의 따님으로, 신해년(1791, 정조15)에 태어나 을해년(1815, 순조15)에 죽었다. 묘소는 인동부 서쪽 양촌(楊村) 뒤 자좌(子坐)에 있다. 외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이 유량(有良)으로 지금 부장(部將) 벼슬을 하고 있다. 둘째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순천 김씨(順天金氏) 종권(宗權)의 따님으로 정사년(1797, 정조21)에 태어나 기미년(1859, 철종10)에 죽었다. 묘소는 인동부 서쪽 한천곡(寒泉谷) 묘좌(卯坐)에 있다. 외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이 유룡(有龍)이다. 부장(部將) 유량은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주익(周翼)으로 지금 무과에 급제하였고, 차남은 승택(升澤)이며 삼남은 규택(奎澤)이고, 두 딸은 정세용(鄭世容)과 윤택규(尹宅逵)에게 각각 시집갔다. 유룡(有龍)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은 우익(宇翼)이고 차남은 어리다.
명은 다음과 같다.
효도는 복을 정하고 / 孝可定
치적은 최고였네 / 治可最
하늘이 보답하여 / 天以報
후손을 창대하게 하리 / 俾昌大
[주-D001] 현암서원(賢巖書院) : 경북 구미시 황상동에 있다. 1761년(영조37) 지방유림의 공의로 장잠(張潛)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중 1871년(고종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최근에 복원하였다.[주-D002] 중군(中軍) : 각 도의 수군절도사를 보좌하는 정3품 당상관 벼슬, 곧 순영중군이다.[주-D003] 통우후(統虞侯) : 통제영(統制營)에 딸린 우후(虞侯)로 정3품 벼슬이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