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오늘 미 미사의 은총으로 여러분들 가정과 여러분 개개인 모두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풍성히 내려가기를 축원합니다.
또 영이 아프신 분들, 육이 아파 병상에 누워계신 분들도 하느님이 의사가 되시고 또 치유자가 되시어,
끊어져 있는 신경 이어 주시고, 풀어져 있는 뼈 붙여 주시고, 항암으로 고통받는 분들의 암 뿌리까지
성령께서 깨끗하게 캐내시어 다른 곳으로 전이 안 되고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인류가 생긴 이래 인류가 하느님께 묻는 말 중, 가장 많이 묻는 것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이것은 평탄할 때 하는 말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 때만 하는 말입니다.
“왜, 하느님, 당신은 악을 내버려 두십니까?”
소위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세상에 선보다 악이 더 판을 치는 것을 봐라. 하느님이 있다는 것을 못 믿겠다.’
‘하느님이 있다면 이 세상의 그 못된 인간을 왜 그대로 놔두시나?’
‘악이 제거되지 않는 것을 봐서 신은 없다.’
‘선한 사람들이 고생하고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는 사람들이 떵떵거리면 잘 사는 것을 보면
어찌 하느님이 있느냐? 대답을 좀 해 봐라.’
예수님 시대에도 이것이 궁금했어요.
‘왜 저 로마 사람들은 우리를 와서 괴롭히는가?’
‘병든 사람들은 한평생 땅만 파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비참하게 죽어야 하나?’
‘다 착한 사람들인데 하느님, 설명 좀 해주세요. 그러면 제가 확실히 믿겠소.’
이런 질문은 이방인들만 하는 것이 아니죠.
우리 신자들도 이런 생각에 잠길 때가 있어요.
예수님 전에도 이 질문은 있었고, 예수님 때에도 이 궁금증이 있었죠.
예수님이 답을 알려주셨는데도 지금도 하늘을 향해 이 질문을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 세상에 왜 악과 선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것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선명하게 계속 알려주고 있지요.
오늘 예수님은 ‘왜 이 세상에 악이 있고, 왜 악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지, 그리고 나중에 어떻게 하실 것인지’
에 대한 설명을 밀과 가라지의 비유로 설명하시죠.
예수님은, 예수님 앞에 앉아서 설명을 듣는 사람들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을 갖고 이야기하신 겁니다.
유대 땅에 가라지(식물명: 독보리)는 생긴 것이 얼핏 보면 밀과 비슷해요.
또 수염도 나 있고, 보리와도 비슷한데 보리는 아니에요.
요즘 잔디도 보면, 정말 잔디와 비슷한 잡초가 있어요.
잡초가 살기 위해 잔디와 비슷하게 변화되는 거죠.
예전 배티에 있을 때 순례 온 자매님들이 봉사하고 싶다고 하시어,
성당 옆 잔디밭의 잡초 뽑기를 부탁드린 적이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나가서 보니, 잔디만 다 뽑고 잡초는 그대로 두셨어요.
‘아이고, 인제 그만 집에 가세요.’
부탁한 제가 잘못한거죠.
악과 선은 참 교묘하게 섞여 있어요.
악은 혼자 있으면, 금세 드러나기에 반드시 선 가운데 들어가서 위장을 해요.
보호색으로 색을 바꾸고 선처럼 행동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속는 거죠.
분별력이 없으면 악을 등에 지고 살면서도 선과 산다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가라지라는 이 잡초는 다 자라서 누렇게 되기 전에는 구별이 매우 힘듭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가라지를 뽑으려 들다가 잘못하면 아까운 밀까지 뽑아버릴 위험성이 있는 거죠.
또 이삭이 패서 구분이 가능할 때도 농부는 안 뽑아요.
종들이 가라지를 뽑자 해도 주인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그럽니다.
왜? 농부는 땅밑의 모양을 알고 있어요.
가라지라는 놈이 보통이 아니라 죽을 때 절대 혼자 안 죽어요.
자기의 뿌리를 밀 뿌리에 칭칭 감고 있어요.
그래서 잡초를 잡아당기면, 멀쩡한 밀까지 같이 뽑혀요.
농부는 경험으로 땅밑 모양을 알기에 때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추수 때가 되면 어떻게 한다고 해요?
둘이 엉겨 있어 가라지를 뽑아서 밀이 같이 나와면 뿌리를 쫙 찢어,
가라지는 단을 만들어 불에 태워버리고 밀은 곳간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조금 기다리라고 종들을 달래는 모습이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농사짓는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에, 이 이야기를 하니 농부들은 바로 알아들었죠.
‘맞아, 추수 때까지 내버려 둬야 해. 잘못하면 농사 망쳐. 저놈들 그냥 안 죽어.’
또한 예수님은 추수꾼인 하느님께서는 최후 심판 때에 모든 악을 없애버리시는 심판주이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성경에 보면 ‘자는 동안에 원수가 덧뿌렸다’라고 나오죠?
좋은 씨를 못 자라게 하는 부정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세례를 받고 착하게 살려 해도, 착하게 못 살게 만드는 환경들이 있지요.
‘내 마음 안에 분명히 세례 때 좋은 씨가 뿌려졌는데, 내가 왜 이렇게 악하게 변하지,
왜 이렇게 화가 치밀고, 못되어졌나?’하며 스스로 가슴을 칠 때가 있어요.
피정받고 눈물 콧물 흘리면서 은혜를 받고 성령 충만에서 살려 하면,
마귀가 나쁜 씨를 뿌려 그 은혜를 전부 시궁창 속에 빠뜨려요.
주일미사에서 영성체하고 기쁜 마음으로 일주일 살려 하면, 웬걸, 나가자마자 누가 시비 걸어요.
좋은 씨를 못 자라게 하는 주변 환경이 너무 많아요.
분명히 그 나쁜 씨를 내가 뿌린 것은 아닐 겁니다.
농협 가면 잡초씨를 팝니까? 안 팔아요.
하지만 농사짓는 분들이 한여름 내내 싸우는 것은 잡초입니다.
잡초 뽑고 뒤돌아보면 또 올라와 있고, 어떻게 생긴 거예요?
밤중에 원수가 뿌리고 갔다고 하셨어요.
좋은 씨를 올바로 성장 못 하게 하는 원인은 많습니다.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그 과거의 상처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절대로 좋은 씨가 성장하여
열매를 맺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살게 됩니다.
우리 마음 속에 가득 찬 악습, 무지, 교만, 욕심들!
어찌 보면 마귀가 뿌린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갖고 있는 상처들입니다.
이런 상처가 있을 때는 올바른 성장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있으면 괴롭고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하느님께 나아가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빛이 들어오면 먼지는 드러납니다.
안 보이던 곳이 보여요.
어떤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악습, 무지, 교만, 욕심 이런 것을 가지고도 하느님께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가까워지게 하시려는 그런 의도도 있습니다.
이것을 역설적이지만 ‘악의 신비’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은 악을 가지고도 내가 얼마나 악 앞에 약하고 하느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가를
계속해서 드러내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29절에서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히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연약한 밀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시는 자비로운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는 헤아려 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선과 악은 어떤 때는 확연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속에 늘 선과 악이 같이 있기 때문이죠.
악은 바로잡을 수 있고 선으로 바뀔 수 있음을 하느님은 아시기 때문에, 성급한 판단이나 단죄보다는
인내를 요구하시는 겁니다.
종들이 와서 빨리 잡초를 뽑자 했을 때, ‘내버려 둬라.’ 합니다.
종들은 답답했을 겁니다.
후딱 뽑아버리면 추수할 때 일거리가 줄어 들 텐데, 왜 주인은 그냥 두라 하나?
식물의 시계에서는 백 년이 지나도 잡초가 밀이 될 확률은 없습니다.
밀은 밀대로 살고, 잡초는 죽을 때까지 잡초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서는 지금의 나의 삶이 가라지 같아도, 회개하면 밀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성인이 들어와서 성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 아니죠?
죄덩어리 인간들이 와서 성인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교회 안에는 밀이 된 잡초도 있지만, 계속 잡초로 머무는 사람도 있죠.
또, 어떤 때는 밀이 되었다, 어떤 때는 잡초가 될 때도 있어요.
제가 ‘성당 다니며 사람보고 다니면 죽을 때까지 수십 번 냉담한다.’했죠?
하느님을 보고 다녀야지, 사람보고 다니면 또 상처를 받는다는 거죠.
믿었던 대모한테 상처받고, 믿었던 대녀한테 상처받고, 믿었던 신부님한테
상처받고. 믿었던 신자한테 상처받고. 이러면 신자 생활 못 합니다.
지금은 잡초지만 나도 밀이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끊임없이 도움을 청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 제자들은 이 세상에 미운 사람, 나쁜 사람, 악이 자기 곁에 있다고 너무 조급해하지 맙시다.
오히려 겨자씨와 누룩이 되어야 한다고 오늘 복음에서 알려 주고 계십니다.
밀가루 반죽이 부풀어 오를 때까지 그 속에 들어가 없어지는 누룩처럼 되어야 하고,
교회라고 하는 커다란 나뭇가지가 자라 선인과 악인을 모두 회개시켜
그 나뭇가지에 깃들게 하도록 싹을 틔워야 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선인과 악인의 판단은 오늘 복음의 나온 것처럼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것이고,
교회 안에 있다고 하는 그 사실만으로 구원받았다는 기준이 안 된다는 겁니다.
세례를 받았지만, 비신자처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신앙의 행위가 동반되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세례받은 비신자, 이방인이라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은 더 이상 구원자가 아닌 심판주가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할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너와 너의 가정이 지금 밀보다는 잡초에 가깝다 하더라도,
또 너의 지난 나날이 밀스러운 것보다는 가라지스러운 게 훨씬 더 많았다 하더라도,
바로 지금, 이 순간 회개하여 내가 내미는 손을 잡는다면
너는 성인 성녀가 될 것이라는 거죠.
바오로 사도가 처음부터 그 위대한 사도였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처음부터 성인이었습니까?
교회의 우뚝 솟은 성인들을 보면, 하느님을 만나기 전과 후는 천지 차이입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정말 잡초도 그런 잡초가 없었어요.
그러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는 밀이 되는 겁니다.
식물 세계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영의 세계에서는 잡초가 밀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분들이 성인이 됐다면 나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확신하고, 주눅 들지 말고,
비록 잡초 같은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괴로워하지 말고,
하느님 앞에 회개하고 통회하고 그분이 내미시는 손을 잡고 천국을 향하여 갈 때는,
우리 모두 성인 성녀가 될 수 있음을 믿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