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세 박사
마 2:1-12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마 2:1-12 / [아기를 경배하러 온 동방 박사] 예수께서는 헤롯왕 때에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는 헤롯의 통치시절이었다. 그때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찾아와서 물었다. 2)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먼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드리러 왔습니다.' 3) 헤롯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불안해했으며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이 소문을 듣고 술렁거렸다. 4) 헤롯왕은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불러모아 놓고 물었다. `예언자들은 메시야가 어디서 탄생한다고 하였는가?' 5) 그들이 대답하였다.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자 ㄴ) 미가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ㄴ. 미5:2) 6)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비록 유다 족속의 작은 마을이지만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될 나의 사람이 네게서 나올 것이다.' 7) 헤롯은 은밀히 박사들을 불러서 별이 언제 나타났었는가를 물은 뒤에 이렇게 말하였다. 8)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를 찾아보시오. 그리고 아기를 찾아내거든 내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9) 박사들은 왕을 만난 뒤에 곧 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 별이 다시 나타나 그들보다 앞서 가다가 베들레헴에 와서 아기 있는 곳에 멈추었다. 10)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말할 수 없이 기뻐하였다. 11) 그들은 아기와 어머니 마리아가 있는 집으로 들어가서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드리고 보물상자를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12) 그리고 예루살렘에 들러 헤롯에게 보고하지 않고 그대로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하나님께서 꿈에 다른 길로 가라고 이르셨기 때문이었다.
별을 보고 온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아왔을 때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헤롯에게 물었으나 답을 얻지 못하고 결국 별의 인도함을 받아 아기 예수를 만나 경배하고, 예물을 드린 후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시매(1-3) 마태는 예수가 헤롯 왕이 통치하고 있었던 시기에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는 탄생의 역사성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여기 헤롯은 정통 유대인이 아닌 에서의 후손이었으며, 과도한 세금 징수와 각종 건축 부역으로 백성의 원성을 많이 들었습니다. 당시 그는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해 주고 있었습니다(요 2:20). 이때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아서 경배하려고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여기 마고스를 번역한 박사는 당시 현자, 제사장, 의사, 점성가, 예언자, 해몽가 등에 쓰였으며,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별을 보고 왔다고 한 사실을 통해 천문학자로 보입니다. 그들의 방문으로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습니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4-8) 헤롯 왕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는지를 물었습니다. 이에 그들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는 말씀이 있다고 했습니다(미 5:2; 삼하 5:2). 종교 지도자들의 말을 들은 헤롯은 동방박사에게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보내면서 그 아기를 찾으면 자기에게도 말해 주어 경배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언의 말씀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찾아가거나 경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9-12) 동방박사들은 헤롯과 헤어진 후 동방에서 보았던 그 별의 인도를 받아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가 있는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꿈을 꾸고서 그 지시대로 다른 길로 고국으로 갔습니다.
적용: 동방박사들이 어떤 어려움을 극복하고 경배하게 되었는지를 서로 나누고, 당신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나누어 봅시다.
동방의 박사들에게 주어진 어떠한 유익도 없었지만 그들은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예수의 탄생 그 자체가 동방의 박사들에게 최고의 선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97편 1절에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땅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 바다에 떠있는 섬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도 함께 기뻐하자고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자손만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만백성이 함께 기뻐하자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 때문에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은 즐거워하고 바다에 사는 모든 사람들도 기뻐하자는 말씀입니다. (목회 아카이브)
< 설 교 >
다른 길로 간 사람들
마 2:1 / 이필재 목사
오늘 1절 말씀에 헤롯 왕이 등장합니다. 헤롯 왕가와 예수님은 악연의 관계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먼저 헤롯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 이 사람은 매우 정치적이고 잔인하고 처세에 밝은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유대인으로서 로마에 충성해서 출세한 사람입니다. 유대 나라 역사를 보면 헤롯 왕가가 끼친 영향이 대단히 큽니다. 우리나라 역사로 말하면 친일파가 되어서 출세한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의 로마 반대 세력이 일어났을 때 결정적 진압을 한 공로가 있어서 갈릴리 지역에 총독으로 임명이 되었다가 나중에 유대나라 왕으로 승진한 사람입니다. B.C 37년에서 A.D 70년까지 약 100년 동안 아버지와 아들들이 왕을 지낸 왕조가 됩니다. 예수님 탄생하실 때 아버지 헤롯의 나이가 70세였습니다. 예수님 출생 후 3년에서 4년 정도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 후에 그의 아들 아켈라오와 안티바스와 빌립 세 아들이 나라를 삼등분해서 한 지역씩 맡아 정치한 분봉 왕을 지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헤롯 때 태어나셔서 아들 헤롯 때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의 잔인성은 성경에 자세합니다. 오늘 말씀에 동방박사들이 헤롯 왕에게 물은 말 한마디가 큰 불행을 가져왔습니다. 동방박사들이 헤롯 왕에게 질문을 할 때 차라리 “메시야가 어디서 나셨습니까?”라고 물었더라면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이렇게 물은 것이 헤롯 왕의 신경과민 반응을 일으킵니다. 옛날의 왕들은 누구나 똑같은 예민성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이 왕권을 넘보는 놈이 없나 하는 것이 제일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역사에 보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된 아들도 있습니다. 형이나 동생이 처형당한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윗 왕도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하마터면 아들에게 죽을 뻔 했습니다. 우리 역사에 고려, 조선 역사 천년 항상 그러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네팔에 선교 때문에 갔을 때 온 국민이 술렁술렁하고 어떤 사람이 왕가에 8명을 다 총으로 쏴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가까운 친족이 왕위에 올랐는데 결국 그 사람이 죽인 거였습니다. 이런 일은 역사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왕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소리는 “노쇠하셨습니다.”입니다. 그 소리는 물러나라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아주 듣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 동방박사들은 왕한테 와서 왕이 될 사람이 나셨다고 하니까, 더군다나 구체적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자기가 왕인데 또 왕 될 사람이 태어나셨다 하니까 신경이 아주 예민해 졌습니다. 가득이나 살인적 광기를 가지고 있는 헤롯에게 심장을 찌르는 충격파를 던졌기 때문에 인류 역사에 가장 참혹스러운 살인극이 벌어지게 됩니다. 베들레헴 중심에서 그 근방의 모든 사내아이들은 2살 이하 다 죽이라 해서 다 죽였습니다.
그가 죽고 그 아들이 또 왕이 되었는데 안티바스 이 사람도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왕이라는 사람이 자기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살아서 세례 요한이 지적을 했더니 세례 요한을 지금 감옥에 가둔 상태입니다. 헤롯의 생일날은 국경일입니다. 국가 공로자들 모두 한 자리에 모여서 살로메의 춤을 보고 흥분하지 않습니까? 헤로디아는 헤롯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자기 딸 살로메를 로마의 춤 유학을 보냈다가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생일날 춤을 추게 했는데 이 헤롯이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관능미가 넘치는 춤을 보고 완전 흥분을 해서 소원을 물었습니다. “네 소원을 말하라. 뭐든지 들어주겠노라. 나라의 절반까지도 네게 주겠노라.” 그런데 결국 “감옥에 있는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서 내게 주소서.” 그대로 했습니다. 그렇게 좋은 왕의 생일잔치에 그렇게 큰 국가 인물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그런 끔찍한 일을 행하다니 누가 보아도 헤롯 가문의 피는 살인적 잔인성이 흐르는 마귀 계열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도 그 헤롯의 재판으로 빌라도에게 넘겨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대로 로마 사람인 빌라도는 예수님을 무죄 석방하기 위해서 많은 애를 썼던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헤롯 정부에서 죽이라 하는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에게 출생 장소를 정확히 알려준 사람들은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 미가서 5장 2절에 다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도 가보지 않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과 붙어 있습니다. 산 고개 하나만 넘으면 됩니다. 궁금해서라도 가보면 될 텐데 아무도 가보지 아니하고 오직 아기 예수를 축하한 사람은 베들레헴 목자들과 동방박사들 밖에 없었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아기 예수 탄생에 관계된 사람들의 모습을 대강절에 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생명적 위험 부담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이 동방박사들은 그 동방이 도대체 어디인가? 페르시아입니다. 성경에는 파사라고 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지금의 이란 땅입니다. 이란에 가면 성경의 인물들 무덤이 많이 있습니다. 에스더, 모르드개도 다 거기 묻혔습니다. 베들레헴에 관광지로 예수님 출생하신 출생 장소에 커다란 예배당을 하나 지어놨는데, 옛날 페르시아 군대들이 유대 땅 점령할 때 닥치는 대로 다 불살랐습니다. 베들레헴 예수님 출생하신 장소로 진격했을 때 그 기념교회도 불질러버리려고 불을 들었을 때 베들레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여보시오! 이 건물은 절대 여러분들이 상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이 건물은 메시야가 탄생하셨을 때 바로 당신네 나라 박사들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나 경배 드린 거룩한 장소입니다. 이것은 유대 나라 유적지가 아니라 페르시아 당신네 나라 유적지입니다. 그래도 불 지르겠습니까?” 그래서 보존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수도권에서 유적지까지 거리를 계산해 보십시오. 비행기 여행 거리입니다. 차를 타고 가기도 힘든 사막입니다. 사막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낙타를 탔는데 낙타의 걸음걸이는 빠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느라고 이 박사들은 생명을 걸고 찾아온 것입니다. 알타반 박사의 이야기를 우리는 전설같이 다 들었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찾는데 33년 걸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다가 숨이 차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아기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찾아오신 동방박사들의 성탄 축하 행사였습니다. 이들이 드린 이 예물의 본질성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황금은 왕권 상징입니다. 유대인의 왕이 아닌 만왕의 왕이 되시고 하늘나라 왕권 상징입니다. 세 개 모든 나라의 문화가 있습니다. 왕관은 금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절대 권위자로서 영원히 변함없다.” 그런 뜻으로 왕관을 썼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자신의 왕권에 대해서 예언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올 때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리라.” 그런데 이 왕권에 대해서 생긴 오해가 열두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메시야 사역의 이 왕권을 유대 나라 왕권으로 생각했습니다. 헤롯도 그렇게 생각해서 죄 없는 어린 아기들만 죽여 버리는 역사의 비극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 이 황금은 만왕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의 왕권 상징에 대한 신앙 고백적 예물이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유향은 제사 용품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됩니다. 대제사장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백성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영적 권위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죄를 지었을 때 자생 능력으로 죄를 사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시킨 대로 해야만 속죄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는 제사장들이 그 역할을 감당해서 짐승이 대신 인간의 죄를 위해서 희생됨으로 말미암아 죄를 속죄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다 했고, 대속죄인이 되면 지성소에 대제사장이 들어가서 하나님과 중보기도를 해서 온 백성이 지은 죄를 그날에 다 속죄해서 속죄 선언을 하는 제사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때 향을 피워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드린 이 유향은 그러한 예수님의 대제사장권을 상징하는 예물입니다. 그 다음 몰약은 선지자, 예언자 상징입니다. 몰약이라고 하는 물질은 일종의 방부제 역할입니다. 썩는 물건에 대한 예방입니다. 이 선지자와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심령의 상함을 방지하는 사역입니다. 예수님이 몰약을 받으신 것은 선지자와 예언자가 되시는 상징입니다. 이들은 아기 예수 경배라고 하는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페르시아에서 베들레헴까지 와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큰 문제 하나가 발생합니다. 헤롯 왕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헤롯은 아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기를 찾거든 자신에게 알려주는 조건으로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헤롯에게 알리면 아기 예수는 즉시 살해됩니다.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지금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헤롯을 거역하는 일이 쉽게 생각되는지 모르지만 그때 상황은 생명적 위험을 감수해야 됩니다. 헤롯 대왕이 누군데 감히 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이 달린 문제입니다. 낙타를 타고 천천히 이동을 해야 되는 낯선 외국인들은 금방 노출됩니다. 헤롯의 군대가 그것을 못 찾을 리가 없습니다. 지금과 같이 사건 일으키고 자동차로 한 시간에 200리 밖을 도망갈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어떻게 그렇게 헤롯 대왕을 거역할 수 있었을까요? 이들은 이때 생명을 건 것입니다. “이제는 죽어도 괜찮다. 우리가 목표하는 아기 예수 경배는 이제 그 목적을 성취했으니까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그리고 헤롯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른 길로 자기들의 갈 길을 갔습니다. 우리 기독교 진리 수행에 있어서 반드시 따라오는 과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어느 때인가는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찬송을 부릅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 만 따라가오리다.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예수님 자신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러니까 예수를 만나는 자는 처음부터 생명 위험적 각오를 가지고 따르는 것임을 예수의 탄생 과정에서부터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과정에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다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절대적 협조자들 사역이 있었는데 마리아와 요셉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의사 결정이 아닌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예수 탄생 협조자들이 됩니다. 이러한 선택을 불이익적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생명 위험이 찾아오는 선택입니다. 나사렛 동네에 가면 요셉과 마리아가 살던 동네는 이웃집입니다. 그러니까 동네 이웃집 처녀 총각이 결혼 약속을 하고 지금 준비 상태에 있습니다. 아마 그들을 그냥 두었다면,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았다면 결혼해서 행복하게 소시민으로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의사 결정이 전혀 아닌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생명적 위험을 그들이 감수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구약 성경이나 신약 성경에 나타난 유대인의 율법적 성윤리를 알고 계십니다. 창세기 38장에 보십시오. 다말의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혼자 되어 살고 있는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그 시아버지가 들었을 때 당장 하는 말 “끌어다 불살라 버리라.” 수없이 많은 여인들을 불태워 죽였습니다. 이게 유대인들의 성윤리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십시오. 간음하던 여인 끌어다가 돌로 쳐 죽이라 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여인들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러한 성윤리적 상황에서 마리아가 처녀 출산을 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불살라 죽여야 합니다. 임신 발견 즉시 처참한 죽음을 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자신의 그 순결성에 대한 항변을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습니까?”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마리아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참혹한 죽임을 당하는 여인들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에는 다행이도 이슬람교가 많이 전도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녀를 살해하는 일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이슬람 전통 국가에서는 그런 일이 지금도 끝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연애를 하다가 혼전 동침이 발견되면 자기 딸을 아버지가 무참하게 죽여 버립니다. 이것을 명예살인이라고 합니다. 신문에 난 것을 보십시오. 파키스탄에서는 1년에 1,200명의 처녀들이 아버지에 의해서 살해되었습니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해마다 있는 일입니다. 어느 나라나 수백 명씩 있습니다. 보통 아버지나 오빠, 같은 친족들이 죽여 버립니다. 자기 가족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래서 요셉의 보호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요셉이 결혼 전 정혼한 상태에서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 보호함으로 아무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한 말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니라.” 요셉도 마리아도 지금 생명적 위험에서 예수 탄생을 협조하고 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된 일을 위해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렇게 생명적 위험을 각오해야 되었던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이런 성경들이 기록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최초의 제자는 열두 명이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의사 결정이 아닙니다.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시다가 베드로, 안드레, 요한을 보고 너희들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이 불러주셔서 따라간 사람들입니다. 세관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를 보고 너도 나를 따르라고 해서 그가 예수님을 따라서 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 사람들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순교 당해 죽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기독교를 이렇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한쪽에서는 항상 피 흘림의 역사가 계속 됩니다. 그런데 다른 한쪽에서는 그 대가를 놀랍도록 누리는 그런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죄 없이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그 결과 우리들에게 놀라운 혜택이 생겼습니다. 온 세계 누구나 예수만 믿으면 영생이 주어지는 하나님 자녀의 특권이 그로 인하여 생겼지 않습니까? 예수님 제자들의 순교의 피는 기독교회의 기초가 되었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정착되는데 밑거름이 되었단 말입니다. 거룩한 희생이 되었지 않습니까? 청교도는 고통스러웠지만 그 후손들은 엄청난 후광을 누리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누군가는 피 흘려야 누군가 그 혜택을 받는 상대적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정말 축복하시는 사람은 누군가? 혜택자보다도 피 흘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사람들은 이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이고 세상 기준적인 것으로 평가를 한다면 매우 불쌍하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면 희생되고 피 흘리는 사람이 가장 큰 하나님의 축복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교 중 가장 비중이 큰 산상 보훈을 보십시오. 마지막 부분에 뭐라고 합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핍박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이 다 이렇게 살았느니라. 오히려 피 흘림과 핍박의 자리가 더 큰 하나님의 복자라. 그래서 기독교는 패러독스 진리다.” “핍박 받고 죽는데 그게 어떻게 복이 되느냐?” “복이다.” 이렇게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영적 자부심이 있습니다. 어떠한 박해나 불이익이 와도 그 박해나 불이익을 하나님의 상급으로 받아들입니다. 요셉은 불쌍한 사람이었는가? 마리아는 불쌍했는가? 페르시아의 지식인 동방박사들이 무엇 때문에 생명을 걸고 거기까지 왔다가 인생을 어렵게 만들었는가? “그게 복이다. 순교가 다 복이다. 아기 예수를 만나는 한 가지 소박한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 페르시아에서 베들레헴까지, 이란에서 이스라엘까지 그 멀고도 먼 사막의 길을 이동수단으로 그 느린 낙타를 타고 얼마나 많이 걸어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달성했지 않습니까? 생명을 무릅쓰고 헤롯의 명령을 거역한 채 “이제는 됐어! 천사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헤롯의 명령은 거역이다.” 다른 길을 선택해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슨 뜻이 있습니까? 예수를 만난 자는 그 시간부터 다른 가치관의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비록 위험스러운 일이 있다 하여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왔다는 이 기록들은 가장 큰 위엄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보편주의입니다. 유대 나라에도 박사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유대 나라에 더 많습니다.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유대 땅 베들레헴에 가득한데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그 멀고도 먼 페르시아의 동방박사들을 거기까지 오게 하셨습니까? 메시야는 유대인만을 위한 탄생이 아니라는 구원 사역의 보편주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하니까 하나님은 애굽으로 피신시키셨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은 죽이려 하고 애굽은 살려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메시야 탄생은 애굽인에게 구원의 빛이 됨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요나서를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그토록 미워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요나를 보내지 않습니까? 그래서 12만 명의 니느웨 시민이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하나님 구원의 보편주의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유대니즘에 사로잡히고 내셔널리즘, 국수주의가 가득해서 “구원의 백성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뿐이다.” 이것을 다 깨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이게 뭡니까? “내가 전한 이 복음의 역사는 구원의 보편주의다. 온 세계 누구나 다 똑같이 구원을 받는 길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예루살렘뿐이 아니고 유대와 사마리아, 저 땅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빛은 보편주의로 나타나는 것이다. 가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나라의 지구 정 반대편에 있는 우리 한국 사람도 이렇게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시작을 동방박사들이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대강절이라서 아기 예수 탄생을 우리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라크 전쟁 때 미국에서는 온 나라 전체가 노란색 리본을 다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집에도 대문에 노란 리본을 달고, 은행이고 마켓이고 할 것 없이 정부 기관이나 사설 단체나 다 리본을 달고 교회도 십자가에 노란 리본을 달고 사람들도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고 출근을 하고 온 나라가 다 노란색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 빙고라고 하는 청년이 죄를 짓고 뉴욕 감옥에 갇혔습니다. 집에서는 부인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소식이 끊기고 편지가 안 오는 겁니다. 아무리 보내도 아내에게서 편지가 끊겼습니다. 그래서 빙고는 마음의 결정을 하고 ‘아! 마음이 변한 것이다. 그럴 만도 하지. 내가 이렇게 죄를 짓고 감옥에 있으니 나를 기다릴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제 몇 년이 지나고 석방이 가까웠을 때 그는 마지막 편지 한통을 자기 아내에게 보냈습니다. 『내가 이제 몇 월 며칟날 석방이 되어서 집으로 갑니다. 만약 당신이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준다면 마당에 있는 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주시오. 그 리본이 달려있으면 당신이 나를 용서한 것으로 알고 문을 노크할 것이오. 만약 달려있지 않으면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 앞에서 돌아서서 내 갈 길을 외로이 가겠소.』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졸이면서 석방되는 날 자기 집 앞을 도달했을 때 자기가 도달한 마당에 있는 그 나무에 노란 리본이 100개가 걸려 있었습니다. 너무 기뻐서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아내에게 용서를 빌고 아주 행복하게 살게 된 역사가 있습니다. 그 소문이 퍼지기 시작해서 “이라크 시민들의 자유와 세계 평화를 위해서 몸을 바치러 간 미군의 아들들이여! 우리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무사히 돌아오라.” 노란 리본을 모두 다 달았던 것입니다. 지금 온 세계는 크리스마스 불빛으로 반짝이는데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여! 우리 집에도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오시고 이 나라에도 찾아오시고 어디에나 예수 그리스도여! 오시옵소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강절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껍데기 성탄절은 가라!
마태복음 2:1-12 / 류공석 목사
전에 예루살렘에 살 때, 우리집 욕실 한켠에 책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책장 중간 단쯤에 전동칫솔이 고정되어 있었고요. 그런데 칫솔을 꺼낼 때마다 눈에 띄는 책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꽃혀 있어서 그렇기도 하고 책제목이 상당히 강렬합니다. 책 제목이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입니다.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진 영성신학자 유진 피터슨이 다른 사람과 공저한 책인데, 제 개인적으로 유진 피터슨의 책을 좋아하기도 하고 목회신학에 대한 책이라 구입을 했었지요. 그런데 하루는 한국에서 목회할 때 아내가 그 책 제목을 보더니 저에게 힐긋 이러더군요. "하림아빠,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는데?"
'기가 막혀서... 마누라가 이제는 못하는 말이 없구만...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
속으로 생각하면서 못 들은 척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엔 가까이 와서 제 얼굴을 빤히 보면서 "여보, 있잖아,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는데?" 하는 거예요.
"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고? 이 껍데기 사모야!" 그랬어요.
저희 부부 이렇게 삽니다. 서로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그 당시 저의 상태가 그리 썩 좋지 않아서 상당히 찔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목사이고 사역이 있으니까 주어진 일은 했지만 교회내의 안좋은 일들로 그 교회에 대한 회의가 들었던 때였고 '이 교회에 계속 있어야 하나'하는 갈등이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주어진 일들은 어찌어찌 했는데 그 이상은 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다보니 목사로서의 영성도 눈에 띄게 흐트러진 것이 사실이었고요. 아내가 그걸 모를리가 없지요. 책 제목을 보고 장난끼있게 그런 말을 한 것인데, 저에게는 상당히 강한 질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얼마전에 그 책 제목을 보면서 성탄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하누카죠? 우리가 하누카라는 이스라엘 절기 가운데 있지만, 교회력으로 보면 지금이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대강절 둘째 주일이고, 이제 얼마 있으면 성탄절 아닙니까?
이 책을 보면서 그는 생각이 '아, 맞다! 성탄절도 껍데기 성탄절일 수 있겠구나!'생각을 했습니다. 성탄절을 성탄절 되게 하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껍데기뿐인 성탄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요즘 세상을 보십시오. 진정한 성탄절의 모습이 보이십니까? 한국에 있을 때를 기억해보면 해마다 12월이 되면 백화점을 중심으로 화려한 장식도 하고 캐럴도 들을 수 있는데, 정작 예수님과는 별로 상관없는 성탄절, 오히려 산타클로스가 주인인 것으로 여겨지고, 그저 하나의 휴일정도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을 떠나 이스라엘에 와보니까 분명 이 땅은 성탄의 현장인데, 전혀 성탄과는 관계없이 이 계절이 지나가더군요. 다만 하누카란 절기가 성탄절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전쟁중'이라고 합니다. 즉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성탄절은 특정 종교의 교주가 태어난 날이므로 교주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것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름을 크리스마스 대신에 'happy holiday'로 부르자고 주장하는데, 지금 백화점이나 많은 마켓들, 심지어 인터넷 마켓까지도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 '해피 홀리데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반면 이들과 이에 맞서 크리스마스의 이름을 지키기 위한 기독교인들이 있어서 이들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청교도들이 목숨을 걸고 세운 나라, 청교도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미국이 지금 그 모양이니 다른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탄의 현장인 이스라엘에서도, 청교도들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미국에서도, 천만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자랑하는 한국에서도 성탄의 참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지고 그저 즐기거나 하루밤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보내는 휴일 정도로 여겨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 그러니까 첫번째 성탄절 때도 이러한 현상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한 구절이 당시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3절 :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의 헤롯을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다른 헤롯들, 사실은 그의 아들들인데, 그들과 구별하기 위해 '대헤롯'(Great Herod)이라고 부릅니다. 헤롯가문이 신약성경에 등장하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 안티파테르 덕분입니다.
안티파테르는 유대인이 아닌 이두메 출신, 즉 에돔 출신이었지만 당시 이스라엘의 왕조였던 하스모니안 왕가 내의 권력다툼에서 줄서기를 잘 해서 권력을 쥐게 됩니다. 아버지 안티파테르는 차남 헤롯에게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도록 해줍니다. 그리고 얼마후 아버지가 정적에 독살되고, 얼마 후에는 대규모의 파르시안 유목민들이 쳐들어 오면서 헤롯의 형까지 살해 당하게 되고, 헤롯만 가족을 이끌고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헤롯은 가족들을 사해 변에 있는 천해의 요새 마사다에 남겨놓고 자신은 이집트로 갑니다. 당시 이집트의 통치자 클레오파트라의 주선으로 로마로 가게 되고, 당시 로마의 권력을 두고 경쟁을 했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두 사람의 눈에 들어 원로원의 결정으로 유대지방의 왕으로 임명이 됩니다.
유대인도 아니고 땅도 없었지만 로마는 그를 유대의 왕으로 임명해주었고, 2년후에 그는 이 땅에 들어와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하며 마침내 유대의 왕이 되고 맙니다. 권력을 잡기까지 수많은 위기를 이겨냈고 정적들과의 전쟁을 치뤘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서 잡은 정권이고, 유대인이 아니기에 항상 자신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차에, 느닷없이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헤롯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해서 차지하고 어떻게 지켜온 자리인데... 그 자리를 뺏을 아기가 태어났다니' 이건 너무나도 당황스럽고 위협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이러한 말로 헤롯 뿐만 아니라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헤롯이 유대인의 왕으로 있었지만, 그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합법적인 왕의 후손도 아니었고, 더욱이 유대인이 아닌 외국인이었습니다.
그러던차에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에게 경배하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하고 술렁 거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동하고 그 이후에 아무런 행동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헤롯은 그렇다치고, 헤롯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이라면 적어도 그 진위를 알기 위해서라도 박사들을 만나거나 박사들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 봐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저 술렁거리고 그저 당황하고 그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의 소문으로, 하나의 흥미있는 가십거리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헤롯과 그의 무리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원하는대로 했지요.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인 싹을 제거하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말은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8절)고 했지만 실상 그들이 원했던 것은 경배가 아니라 제거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아래의 남자 아기들을 죽이는 죄악을 범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첫번째 성탄절 때 일어났던 일입니다. 물론 첫번째 성탄절 때 이런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귀한 예물을 가지고 예수님을 경배했고,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천군천사들로부터 주 나신 소식을 듣고 달려가 경배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지 팔일만에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으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을 때 시므온과 안나 두 사람은 평생을 기다려온 메시아를 보고 경배하게 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첫번째 성탄절에는 두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 더 보탠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이것은 지난 2천여년 동안 2천번이 넘게 맞이한 성탄절을 통해 동일하게 있었던 일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 때쯤 되면 소동하는데, 뭔가 있는 듯이 술렁이고 바쁜 것은 같은데, 속을 보면 전혀 예수님과 상관없는 술렁임이고 소동입니다. 또한 이천년 전처럼 전혀 무관심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켠에서는 조용하지만 성탄의 참 의미를 되새기며 인류의 구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며 경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금 절기상으로는 대강절 둘째 주이고, 이제 보름쯤 후면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날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술렁입니까? 술렁인다면 어떤 술렁임입니까? 조용하고 차분합니까? 그렇다면 어떤 조용함 차분함입니까?
아니, 조금 더 직설적으로 물어서, 여러분들에게는 성탄이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참 의미를 아는 그래서 기다려지고 주님께 기쁨과 감사로 경배하는 절기입니까? 아니면 매년 연말에 다가오는 휴일, happy holiday로 다가오거나, 이스라엘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보내듯이 여러분들도 그러하십니까?
결국 성탄은 우리의 자세에 따라, 우리의 마음에 따라 참된 성탄절로 다가올 수도 있고, 껍데기 성탄절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참된 의미의 성탄입니까? 이것을 이스라엘의 절기인 하누카(חנוכה)와 비교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성전이 성전이 아니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주전 2세기 중반에 시라아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렸던 셀류쿠스 왕가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치세 때였습니다.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을 헬라화하는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 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헬라화된 유대인들(헬라파 유대인)과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유대인들(민족주의 유대인)간의 대립과 갈등이 일어나는데, 이로인해서 야기된 사건이 바로 성전을 더럽힌 사건입니다. 그 과정에 대해서는 생략 하겠고, 에피파네스가 최후의 조치로 내린 칙령들이 있었습니다.
에피파네스는 자신의 헬라화 정책을 거부하며 저항하는 유대인들의 비타협적인 태도가 그들의 종교에 있다고 판단을 한 겁니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가 유대인들에게 주었던 특혜들을 폐지하고 사실상 유대교 관습을 금하는 칙령을 공포하게 됩니다.
구약 외경 중에 하나인 마카비 1서 1장 후반부터와 2서 6장에 따르면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칙령들을 내렸습니다. 정기적인 희생제사는 물론이고 안식일과 전통적인 절기를 지키는 것도 금지했고, 율법의 사본들을 파기하라고 명령했고, 어린이들의 할례를 금지했고, 이런 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이교 제단들이 유대 땅 곳곳에 세워졌고, 그 제단들에서 부정한 짐승들이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당했고, 먹지 않으면 사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결국 이러한 정책이 그 끝을 보게 되는데, 바로 주전 167년 12월에 제우스 신의 제사가 예루살렘 성전에 도입되게 되는 것입니다. 제우스를 위한 제단과 신상이 성전 안에 세워졌고, 그 제단 위에서 돼지고기가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니엘서 11:31에서 말하고 있는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 "이었습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이러한 조치들을 통해 유대인들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곧바로 온 유대는 무장 봉기로 들끓게 됩니다. 그중 가장 주도적인 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다 마카비 전쟁입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유다 마카비는 예루살렘에 개선하여 더렵혀진 성전의 정화작업을 착수하게 됩니다. 제우스 제의에 씌였던 기구들은 모두 철거되었고, 더렵혀진 제단도 부수워 버렸고, 그 자리에 새로운 제단이 세워졌습니다.
성전이 모독된 날로부터 꼭 3년이 되는 주전 164년 12월, 정확하게는 유대력으로 키슬레브 월(12월에 해당) 25일에 축제의 큰 기쁨 가운데 성전은 다시 봉헌되었습니다. 그렇게 성전을 재봉헌했다는 의미가 바로 '하누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때는 성전이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 구별되어 거룩하게 세워진 성전이라도 할지라도 그것이 더렵혀지고, 하나님 아닌 다른 우상들을 섬기는 곳으로 사용될 때 그곳은 더 이상이 성전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가르켜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 안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영과 그분의 말씀이 거하시기에 우리는 성전입니다.
그런데, 정말 성전입니까? 정말 성전으로서 합당한 모습이냐 그 말입니다. 아니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때처럼, 성전이 성전이 아니었던 그 때처럼, 더렵혀진 성전으로 있지는 않습니까?
성전은 정결하게 유지되어야하고 구별되어 거룩함으로 유지되어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성전이 더렵혀지면, 성전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아닌 다른 더러움이나 음란이나 우상으로 채워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구절을 대할 때마다 두렵고 떨림으로 기도합니다. 이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내 생각이 나의 무지함이나 교만으로 인한 착각은 아닌지, 행여 내가 성전으로서의 합당하지 못한 모습이라면 긍휼히 여기사 나를 정결케 해주시고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유다 마카비가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 성전을 정화했을 때 일어났던 일을 우리는 압니다. 성전을 정화할 때 성전을 밝히기위해 따로 준비된 오염되지 않은 기름, 올리브 유가 하루치밖에 없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답니다. 하루치의 기름으로 여드레 동안, 팔일 동안 불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누카 때는 촛대를 칠지 촛대인 '메노라'를 쓰지 않고 특별히 아홉개의 줄기가 있는 촛대를 쓰고 그것을 '하누키야'라고 합니다. 이것을 기념해서 지금도 하누카는 팔일 동안 지키는데 날마다 불을 밝히게됩니다. 그래서 하누카를 다른 말로는 "빛의 절기", 혹은 "광명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하루치 기름으로 팔일 동안 불을 밝혔는데 왜 촛대의 줄기가 아홉개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아실 겁니다. 보통 가운데에 있는 줄기인데, 제일 깁니다. 그 가운데 있는 촛대의 이름을 "샤마쉬(שמש)"라고 하는데 그 뜻이 "종,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 촛대를 제일 먼저 밝히고 그 촛대로부터 차례 차례 점화되어 절기가 끝나기 전에 모두 점화됩니다. 가장 중심적이고 중요한 촛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누카가 성탄절과 얼마나 유사한 지를 알게 됩니다. 이 두 절기는 모두 이 땅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두 절기 모두 같은 날짜입니다. 비록 하누카가 음력인 유대력으로 지켜지기 때문에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습니다만 유대력에 따르면 성탄절과 같은 날짜입니다.
또한 이 날에는 특별한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는 성탄 캐럴을 부르고 유대인들은 하누카와 관련된 노래를 부릅니다. 두 사건 모두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두 절기에는 모두 빛이 밝혀집니다.
또한 두 절기에는 '종'(servant)이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는데, 하누카 때는 중앙에 있는 촛대인 "샤마쉬"가(종을 의미), 그리고 성탄절 때는 고난의 종이신 메시야, 예수님께서 중심에 계십니다.
결국 하누카는 성탄절을 상징적이고 예표적으로 보여준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유대교 랍비들이 모르고 있거나 알더라도 거부하고 있을 뿐이지요.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의미는 바로 '빛'이라는 겁니다.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기 위해 팔일 동안 빛이 비추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하누키야에 있는 제일 긴 중앙의 촛대인 '샤마쉬'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8:12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누가복음 2:32에서는 예수님을 가르켜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누카의 촛대 하누키야의 중앙 줄기인 "샤마쉬"가 다른 모든 줄기를 점화시키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과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 즉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 영접하여 믿는 모든 사람에게 빛으로 들어오실뿐만 아니라 빛을 부여해 주십니다.
빛이 무엇입니까? 빛은 어두움을 내어쫓습니다. 빛은 더러움을 밝히 드러내줍니다. 그래서 그 더러움을 보게하고 부끄럽게 하고 그것을 쫓아냅니다. 빛은 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해줍니다. 빛은 생명을 주고 정화시키며 치유해줍니다.
그 빛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빛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 일을 하셨고, 지금도 행하시고 계십니다.
더렵혀진 성전이 다시 성전으로 회복되는데 빛이 필요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역시 성전으로 회복되고, 성전으로 살아가고 성전으로 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빛되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분의 영이신 성령님이 필요하고 그분의 능력있는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하고 변화시키고 거룩하게 하는 능력으로 살아계셔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목사이고 집사이고 성도라고 하는데, 정작 우리 안에 빛되신 예수님이 없고, 그분의 말씀이 없고, 그분의 영이 없고, 예수님을 본받아 살려고 하는 삶의 모습이 없다면 우리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성전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럽고, 우리가 맞이하는 성탄절 역시 껍데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껍데기 성탄절이 아닌 참된 성탄절로 맞이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참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지금의 흐트러지고, 더렵혀지고, 메말라버리고, 미지근하며 아무런 감동도 의미도 없는 모습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무감각해지고 변화되지 못한 그런 모습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 안에 다시금 빛되신 예수님을 모시어 그분의 빛으로 우리의 더러움과 어두움을 내어쫓아내어야 합니다. 그분의 빛으로 우리 안에 있는 영적 무감각과 모든 죄악을 쫓아내고 치유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성전으로 회복될 수 있고, 참된 성탄의 의미를 알아 기쁨과 감사로 예수님을 맞이하며 경배할 수 있습니다.
설교 서두에 껍데기 목회자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말인 알맹이 목회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저는 목회자로서 있어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로서 있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좋은 임지, 좋은 사례, 교회가 커지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그런 것. 속된 말로 뜨는 것? 아니죠.
목회자로서 있어야 할 것은 '내가 예수님의 종"이라는 확고한 소명의식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종이라는 확고한 소명의식만 있다면 임지가 않좋아도, 사례가 안좋아도, 세상적으로 주목받지 못해도, 뜨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종이라는 소명의식만 확고히 살아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참된 목회자로서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종은 주인의 자리에 올라서는 사람이 아닙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헤아려 그 뜻을 행함으로써 주인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의 기쁨이 곧 종의 기쁨입니다. 종은 주인의 양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합니다. 종은 주인의 집을 목숨을 다해 관리하고 이끌어갑니다. 무엇때문입니까? 주인이 종을 사랑하고 있고, 종도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목회자로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껍데기 목회자로 서고 싶지 않습니다. 어떤 곳에서 어떤 목회를 하던 주님의 종으로 묵묵히 맡겨주신 사명들을 감당하는 알맹이 목회자, 예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참된 목회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러한 바램은 모든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뿐인 성도, 그 안에 빛도 없고 말씀도 없고 순종의 삶도 없는 성도는 껍데기 성도에 불과합니다. 알맹이 성도, 참된 성도라고 할 때는 그 안에 무엇이 있어야 하고 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아실겁니다.
우리가 껍데기가 아닌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빛되시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셔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고, 그 빛으로 우리를 깨끗게 하시고, 우리를 치유하시고 다시 살아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빛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빛을 비추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리할 때 우리는 껍데기가 아닌 참된 성도로 거듭날 수 있고, 우리가 맞이하는 성탄절도 참된 성탄절이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참된 성탄절의 의미가 사라진 세상에서, 그리고 성탄의 현장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빛되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 60:1-3)
이 말씀이 우리에게 성육신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에게 빛을 주신 예수님의 그 빛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있고, 특별히 이 땅에 덮혀 있는 어두움의 장막을 겉어내어 예수께서 바로 온 세상의 왕이요, 또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심을 유대인들이 알고 주님께 경배할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내 마음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마 2:1–12 / 박한응 목사
찬 양 : 108, 116, 120, 121, 122, 123.
할렐루야!!
오늘은 온 인류의 구세주시며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성탄절입니다. 이 복되고 거룩한 성탄절에 하나님의 신령하신 은혜와 주님의 은총이 성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그런데 이 성탄절이 되면 제일 먼저 성탄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돈 벌기 위해서 더 더욱 혈안이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백화점과 상점들이 각종 물건들을 쌓아놓고서 손님을 유혹하고 있고 덩달아서 술집들이 매상을 올리려고 야단들을 합니다.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추리도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서글픈 것이 있습니다. 이 성탄절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이신데 예수 없는 크리스마스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카드가 여러 장 날라 왔는데 그 카드의 그림을 보면 우리나라의 무슨 풍경이나 산타할아버지의 수염 난 얼굴과 썰매를 끄는 루돌프 사슴의 그림이 있고 아니면 박사들이 약대를 타고 가는 그림들은 있으나 예수님은 어디에도 있지를 않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성탄절이란 거룩하신 분이 탄생하신 날이라는 뜻입니다. 거룩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만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빙자하여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난 날을 성탄절이라고 합니다. 마호멧교에서는 자기네의 교주인 마호멧이 태어난 날을 성탄절이라고 합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통일교의 교주인 문선명은 자기의 생일을 이 세상에 해와 달이 태어난 날이라고 하여 가장 큰 명절로 지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없는 성탄절은 우리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금년의 성탄절에는 반드시 나의 마음에 예수를 영접하고 나의 가정에 예수를 영접하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날 이른 새벽 머나먼 동방의 바사 나라에서부터 여러 날 동안 걸어서 온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에는 그 박사들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박사들이 가지고 온 예물에 대하여도 아닙니다. 머나먼 박사들에게 수개월 전에 나타나서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박사들을 인도하여 온 별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면서 이 시간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모두 은혜 충만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 멘>
별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여러 곳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창1:16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던 넷째 날에 별을 창조하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창1: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 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②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에 너의 씨가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창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창26: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③단12:3절 말씀에는 세상에서 전도를 많이 한 사람이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단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④그리고 오늘 분문 말씀에서와 같이 동방에서부터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박사들을 인도하여 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밤하늘에 무수히 수놓고 있는 별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하는 것과 성탄을 알리고 박사들을 인도한 별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이 시간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아 멘!>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을 “내 마음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라고 정하였습니다.
다 같이 한 번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내 신앙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내 생활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그러면 이 시간에는 별에 대하여 그 속성과 의미와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1. 별은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이후로 수천 년, 수 만년이 지나오도록 별은 지금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우주의 천문학을 연구하는 천문학자에 의하면 수억 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언제나 캄캄한 밤하늘에 은구슬을 뿌려 놓은 듯 변함이 없이 우리 인간들에게 낭만을 주고 있습니다. 유명한 철학가 소크라테스는 말하기를 “괴로움에 고통당하는 이들이여 눈을 들어서 하늘의 별을 보라”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너무나 변화무쌍합니다. 변질이 너무 잘됩니다. 그래서 옛 말에 이르기를 인심은 조석변(人心은 朝夕變)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변함없이 연초에 다짐하였던 것을 끝까지 잘 추진해 나가야 하며 은혜 받았을 때의 그 결심과 각오를 변치 말고 잘 행함으로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할 것입니다.
2. 별은 항상 변함없이 자기의 자리를 지킵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십시오 무질서하게 아무렇게나 있는것 같아도 모두가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주공간을 돌고 있는 모든 행성들은 1미리 의 착오나 편차도 없이 태양을 중심으로 자기의 자리를 지키면서 자기의 갈 길을 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에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때에는 그 모든 별들과 행성들의 선회하는 궤도를 슈퍼컴퓨터를 동원하여 몇 달 몇 년씩 계산을 하여서 어떤 행성과도 충돌하지 않고 궤도를 돌 수 있도록 쏘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에서 쏘아 올린 인공위성도 자기의 사명을 다하여 명령을 받은 대로 지구 궤도를 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들은 이 별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말할 것 없이 자기의 자리를 잘 지켜야 합니다. 남의 자리를 넘보아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날 밤에도 들에서 양들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천군 천사들의 소리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들려왔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재림하시는 날까지 그 자리를 굳게 지키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수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고 고백한 여호수아와 같이 세상사람 모두가 다 주님을 떠난다 해도 나는 내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별은 항상 신비한 존재입니다.
별은 아무리 연구를 하여도 그 비밀을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태고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천문학자들이 별을 보고 연구를 하여왔어도 별은 언제까지나 신비한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1969. 7. 20. 미국의 암스트롱이라는 우주비행사가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도착을 하여 2시간동안 월면을 걸어 다녔습니다. 지난 2007년에는 우리나라의 이소연 씨가 우주선을 타고 우주정거장에 가서 14일간을 체류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많은 과학이 발달을 해 왔고 미국과 러시아는 경쟁적으로 금성과 화성 등의 별을 연구하려고 우주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과학과 기술로서 아무리 연구해도 그저 추상적인 것뿐이지 아직까지 별에 대하여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인간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고 또 그 별들을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고대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신비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존경받고 동경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항상 마음은 여유가 있고, 그리고 아무런 기뻐할 것이 없는 것 같은데 항상 얼굴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도대체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신비한 면이 있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4. 별은 항상 우리 사람들에게 소망과 기쁨을 줍니다.
세상에는 저 하늘의 별을 보고 싫어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별은 우리 인간들에게 무한한 꿈과 소망을 줍니다. 시인이 별을 보면 시가 읊어지고, 소설가가 별을 보면 한편의 소설이 되기도 합니다. 음악가가 별을 보면 훌륭한 노래가 지어집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낙심한 사람이 저 별을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새 힘과 소망을 얻었습니까?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별을 보면 그 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를 드리고,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에 저 하늘의 별과 같이 축복하리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아브라함의 받은 축복을 소망하게 됩니다.
저 하늘에 무수한 별들은 아무리 검은 구름이 가리워도 구름 저편에서는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여름날 장마 속에서 여러 날 동안 별을 보지 못하다가 검은 구름 사이사이로 별이 보일 때에는 모든 사람이 기뻐합니다.
(행27:20) “여러 날 동안 해도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고 바울은 로마로 가는 길에 유라굴로 광풍으로 인하여 열나흘 동안 별 구경을 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항상 별과 같이 남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아무리 환란의 검은 구름이 우리의 앞을 가린다고 하여도 우리들 본연의 별과 같은 믿음을 잃지 말기를 바랍니다.
5. 별은 사람들의 갈 길을 인도해 주고 때를 알려줍니다.
지금이야 최첨단 전자 장비가 있고 최소한 나침반이 있어서 별 어려움은 없지만 전에는 그렇지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넓은 바다를 여행하든지, 또는 끝없이 넓은 사막을 여행하든지, 또는 산중에서 캄캄할 때 길을 잃었을 때에 사방을 알 수 없고 어디가 동서남북인지를 알 수 없을 때에 북극성은 항상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또 어느 별이 북극지를 알 수가 없을 때를 대비하여 왼쪽에는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이 있고 오늘 쪽에는 W모양의 가시오페아 별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캄캄한 밤중에 깊은 산 속에서라도, 또 넓은 사막 가운데서라도, 망망대해에서도 북극성을 보고서 방향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에 이미 수개월 전에 이방나라인 바사 나라의 박사들에게도 별을 통하여 메시아의 탄생을 알려 주셨고 그 별은 머나먼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박사들을 인도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또한 별은 때와 시기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예>지금이야 누구나 시계를 가지고 있고, 시계 없는 집이 없으며, 집마다 몇 개씩의 시계가 있지만, 예전에는 시계가 없어서 자다가도 밖에 나와서 별을 보고서 시간을 측정하곤 하였습니다.
전에 나의 어머님은 나를 위하여 새벽밥을 해주실 때에 시계가 없어서 꼭 밖에 나와 새벽별을 보고 새벽밥을 하셨는데 날이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은 별을 볼 수가 없어서 그저 한숨 주무시곤 밥을 하셔서 어느 날은 한밤중에도 밥을 먹곤 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별은 우리들에게 때와 시기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때와 시기를 알려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무슨 때를 알려야 하겠습니까? 마지막 말세가 가까이 다가옴을 알려야 하고(벧전4:7), 지금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할 때(막1:15)를 알려야 하며, 또한 은혜 받고 구원을 얻을 때가(고후6:2) 되었음을 알려야 합니다.
6. 동방박사들을 인도한 별은 항상 앞서서 인도하였고 멈출 때에 멈추었습니다.
동방에서부터 박사들을 인도하여 온 별은 항상 박사들의 앞에서 인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대 땅 베들레헴에 와서는 예수님이 누우신 집 위에서 멈추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의 바른 신앙의 생활입니다. 우리들은 항상 앞서서 가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뒤에 떨어지면 따라가기가 얼마나 힘이 듭니까? 마라톤의 경기에서도 한 번 뒤로 쳐지게 되면 다시 앞으로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이 시대에 앞장서서 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으며 또한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멈출 때가 되면 아무리 미련이 있어도 멈추어야 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앞서가는 것만이 운전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멈출 자리에서 잘 멈추어야 합니다. 항상 과한 것은 오히려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자신이 멈추어야 할 것을 알지 못하면 오히려 부덕이 되고 맙니다.
7. 별은 번성케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5:5절 말씀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고 하셨고 22:17절 말씀에는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별은 번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이 아브라함의 가정과 같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번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주님 탄생하신 성탄절을 맞이하여 여러분들의 믿음이 저 동방에서 박사들을 인도하여 온 별과 같이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영원토록 빛나는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① 오늘도 변함없이 저 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과 같이
② 항상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③ 항상 신비한 존재로서
④ 누구에게든지 소망과 기쁨을 주고
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며
⑥ 모든 사람들보다 항상 앞서서 가면서
⑦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과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은 번성하는 축복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동방박사들의 위대한 믿음
>성경본문|
마02장 01절 ~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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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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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한성진목사
>비 고|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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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5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10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동방박사들의 위대한 믿음
마 2:1-12 / 한성진 목사
이 시간에 “동방박사들의 위대한 믿음”이라는 제목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좋다 그러면 대개 온갖 불가능한 역경을 극복하고 나올 때 믿음이 좋다고 말합니다. 오늘 저는 타인이 보기에는 하늘의 별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불확실해 보였지만 자기가 연구하는 분야에 자기 인생과 자기 재산과 시간과 생명까지도 바치다가 아기 예수를 만난 몇 사람을 소개할까합니다. 그 사람들은 바로 동방박사들입니다.
성탄절이 오면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예물을 드리며 경배한 이야기는 대단히 유명합니다. 사복음서에서 마태가 유일하게 마태복음에서 동방박사를 부각시킨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맞이하기에는 불가능한 상황에 있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경배함을 통해서 당시 하나님을 섬기기에 최고의 조건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에게 깨닫게 하고 부끄럽게 하여 회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동방박사들의 믿음 이야기는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럼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1. 동방박사들은 성경도 없었습니다.
성경만 있으면 예수님 찾기는 쉽습니다. 성경에는 태어날 곳 베들레헴, 피난 가실 곳 애굽, 자라실 곳 나사렛, 활동하실 곳 갈릴리, 죽으실 곳 예루살렘 영문 밖,,, 다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루살렘에 와서야 서기관들을 통해 왕이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즉 그들은 성경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구전으로 조상적부터 내려온 민24:17 한 구절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리라”는 말씀을 희미하게 나마 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학자들 중에는 이 동방박사들이 바벨론에 끌려갔던 유대인들의 후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바벨론에서 석방될 때 믿음 좋은 사람들은 다 고국에 돌아오고 대부분 믿음 없는 사람들은 그곳에 정착했는데 수백 년이 지난 그들에 종교교육은 심히 열악했던 것입니다. 당시 형편이 그러했듯이 구술로 전해지는 하나님의 이름이나 성경 몇 마디 아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들은 성경 한 구절 붙잡고 믿음 지키며 메시아 왕을 기다리고 그 한 말씀 붙잡고 아기 예수님께로까지 왔던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 66권 모두 갖추고 있고 매일 다양한 형태로 말씀을 듣고 살아가고 있지만 과연 예수님을 얼마나 찾고 있는지 심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2. 동방박사들의 인도자는 하늘의 별 뿐이었습니다.
2절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그들은 천문학자들로서 별을 연구하다가 이상한별을 보고 그들은 왕으로 나신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별을 따라 나섰습니다. 별이 어디로 인도할지 아니면 별이 계속 인도할지 어디론가 사라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실재로 오다가 별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지 않고 아기로 나신 왕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페르시아에서 유대까지는 최소한 2천리 이상 떨어진 곳인데 별 외에는 인도자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성경 박사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 가득했습니다. 랍비가 선생인데 당시 랍비는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랍비들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지 못했고 사람들도 참 선지자가 나타나도 인도받는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주의 종 없이 신앙생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죠.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한 것처럼 양에게는 목자가 절대로 필요한 존재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그래도 낙심치 아니하고 아기 예수를 찾고 또 찾았던 것입니다.
3. 동방박사들이 오는 길은 멀고도 험했습니다.
그들이 살던 동방은 베들레헴에서 수 천리 떨어진 곳입니다. 길도 없고 고속도로도 아니고 험한 광야였습니다. 물도 없고 식량 구하기도 어렵고 교통수단이 발달한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낙타를 타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목적지도 확실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밤에는 별을 연구하고 낮에는 연구한 것을 토대로 걷고 또 걸었습니다. 산으로 인도하면 산으로 강으로 인도하면 강으로 혹은 바다로 혹은 들로 혹은 잘못하여 곁길로 빠진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별이 인도하는 대로 갈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방에서 이스라엘까지 적어도 수개월 혹은 두 살 아래라 한 것을 볼 때 1년 이상 여행해야 하는 멀고 험한 길이었습니다.
동방박사의 이름에 대해 의견이 부분하지만 전설에 의하면 가스팔, 메키울, 발다살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처음에 이상한 별을 발견하고 출발하였을 때 처음에 4명이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알타반 박사는 도중에 무슨 일로 일행과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 일행을 찾아 아무리 헤매어도 찾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예수님을 찾아 헤매다가 30년이란 세월이 지나서 겨우 찾았는데 벤허 영화에서도 보지만 그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모했으면 일생을 찾았을까요? 그가 출발할 때는 청년이었지만 주님을 만났을 때는 백발이 허연 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보세요.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얼마나 됩니까?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8km지점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은 훤히 보이는 가까운 곳입니다. 내리막 길이니 걸어서 한 시간 남잣이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아가 났을까 확인조차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동방박사들을 생각한다면 멀어서 교회 나오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 곳에서 수고하며 교회를 찾는 사람에게 더 큰 상을 주십니다. 동방박사들에게서 배우십시다.
4. 동방박사들이 드린 예물 역시 쉬운 예물이 아니었습니다.
11절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당시 왕에게 드리는 값진 예물입니다. 보통 사람이 준비하기 힘든 값비싼 예물입니다. 보통 정성이 아니고 이런 예물을 준비할 수 있었겠습니까? 경제인도 아니고 선비이니 부자라고도 추측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 예물은 네 박사의 통털어 준비한 전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별 연구에 미쳐도 보통 미친 것이 아니죠.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복 주시면 다 된다고 하지만 아무리 하나님과 대화하는 신령한 믿음을 가졌다 해도 어느 것 하나 호락호락 그냥 되는 것이 있나요? 우리가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것이지요. 특히 정성을 드려야 하는 일에는 우리의 정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렵도록 놔두십니다.
저는 동방박사에 대해서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들의 영성을 제 영혼에서 느끼는 것 같습니다. 불가능한 상황에서 얼마나 기도하고 또 기도했고 얼마나 믿고 또 믿고 얼마나 사모하고 또 사모하면서 이 일을 진행해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는 절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5. 동방박사들을 온갖 시험을 끝까지 이겼습니다.
그들의 어려움은 베들레헴까지가 아니었습니다. 아기 예수를 만나고도 계속 되었습니다. 먼저는 겸손의 시험입니다. 그토록 찾던 메시아가 그 낮고 천한 마구간 말구유에 누웠으니 어찌 경배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아기의 부모는 천한 목수 요셉과 마리아가 아닙니까? 우리가 찾고 찾던 그 아이가 저 아이란 말인가? 회의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왕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극진히 경배했습니다.
다음은 헤롯의 시험입니다. 7-8절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그러나 실상은 아기 예수를 발견해 주면 죽이려는 음모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셨습니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고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왕명이냐? 하나님의 말씀이냐? 왕명은 현실이고 하나님의 지시는 꿈속에 된 일입니다. 왕명을 따르지 않으면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랐습니다. 그것은 아기 예수를 찾는 수많은 역경 속에서 무수한 체험을 하였고 하나님이 주시는 꿈이 현실보다 더 신실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시험을 이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뭐가 두렵습니까? 헤롯왕처럼 무서운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버리면 자기 영원한 생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우리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십시다. 주님을 사랑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먼 곳에서 말씀 하나 붙잡고 별을 따라 그 멀고 험한 곳을 지나 베들레헴에 찾아온 동방박사처럼 위대한 믿음을 가져 아기 예수님께 영광 돌리시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탄 선물
마태복음 2:1-12 / 이필재 목사(갈보리교회)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외부적 분위기를 보면 우리나라와 서구 사회는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한국은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에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지만 미국과 같은 나라는 이때가 되면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으로 매우 찬란한 거리를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살던 마을의 한 동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트리 마을이 있는데 도시 전체가 한 달 동안 한 집도 빼놓지 않고 지붕 꼭대기에서 주춧돌까지, 도시의 가로수 전체를 크리스마스트리로 장식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반짝이겠습니까? 그래서 크리스마스 전후로 한 달 동안 미국 전역에서 그 마을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끊임없는 관광객들이 그 마을을 찾아오는데 저도 두세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온갖 아이디어를 내서 누구의 집이 더 화려한가 경쟁할 만큼 아기 예수, 동방박사, 천사, 산타클로스 등 수없이 아름답게 장식해서 조명을 밝힙니다. 도시 전체가 그렇기 때문에 황홀한 조명 아래서 사람들이 밤새도록 집에 가지 않고 구경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라고 시청에서 전기세를 내주는 재정 지원을 합니다. 전기세가 한 달에 얼마나 많이 나가겠습니까? 그런데 시 정책으로 해마다 트리 장식을 합니다. 수십 년째 계속 하고 있습니다. 제가 마침 어느 집에 갔을 때 그 집 주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크리스마스트리 장식했는지 물었습니다.
"당신 집이 이 마을 전체에서 제일 멋있게 장식을 했는데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그 분의 말이 "우리 가족은 이때만 기다리면서 삽니다. 해마다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우리 집을 왜 오겠습니까? 우리 집 앞에 와서 너무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려고 일 년 내내 아이디어를 냅니다."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아닙니다." "그러면 이것을 왜 하셨습니까?" "좋잖아요." 그래서 서구인들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문화가 예수님 믿는 것과는 아무 관계없이 행사화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그 마을 사람들 중에 교회 나가는 사람들은 10분의 1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행사는 세계에서 제일 화려하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니까 안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볼 수가 있는데 '정말 주님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을'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은 지금까지 지나간 2021번째 성탄절 가운데 첫 번째 크리스마스입니다. 이 최초의 성탄절 행사를 생각하면서 이번 크리스마스도 뜻있게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오늘 말씀 가운데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매우 즐거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우 불쾌한 사람이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 1절 말씀에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헤롯왕은 매우 불쾌한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을 보면 세상의 어떤 목사가 설교하여도 헤롯왕이 아기 예수를 살해하려는 음모가 있었다고 설교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헤롯은 살인을 음모하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됩니다. 왜 살인을 음모했는가? 먼저 성경에 나오는 헤롯에 대해 살펴보면 로마 제국 통치하의 BC 37년에서 AD 70년 사이에 유대 나라를 통치한 가문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헤롯 가문이 유대 왕이 되었는가? 그는 유대인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지만 출세에 얼마나 민감한 능력이 있는지, 가만히 보니까 세상이 이제 로마인의 시대가 되었거든요? 살길이 무엇인가? '민족정신을 외치면서 독립 운동이나 하고 있으면 큰일 나겠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으로서 매국노 같은 길을 걷게 됩니다.
로마인을 위해서 자국 내에서 발생하는 반 로마적 사건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웁니다. 종적이 될 만한 모든 인물은 다 살해해 버렸습니다. 로마를 위해서 유대인으로서 반유대적으로 산 것입니다. 결국 그 공로가 인정을 받아 로마 원로원의 인정으로 왕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당시는 로마인 총독이 있었고 유대인을 대표하는 왕이 따로 있었습니다. 빌라도라고 하는 사람이 총독으로 나와 있는 정치 문화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메시야 탄생하셨다는 온 백성이 기뻐하는 성탄을 왜 살인으로 맞이해야 하는가? 여기서 헤롯의 특성이 나타납니다. 살인마적 광기가 있는 권력형 사람입니다. 먼저 그의 사생활을 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10명의 부인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한 남자가 10명의 부인에게 만족을 준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 부인들의 애정 싸움이 어떠했는가? 우리나라의 궁중 역사에도 수없이 배웠습니다. 불만을 표시하는 아내는 다 죽여 버렸습니다.
두 번째 아내 미리암의 장모가 된 알렉산드라를 끌어다가 가차 없이 처벌하여 죽여 버렸습니다. 10명의 아내 가운데서 출생한 자녀들 간의 권력 승계에 대한 투쟁도 치열했을 것이 당연합니다. 많은 자식 가운데 제일 유력한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볼드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닮아 똑똑하고 출세에 민감하고 아주 잘났습니다. 만만치 않게 2인자, 3인자로 자기 옆에 다가옵니다. 가만히 보니까 아들들한테 자리 뺏길 것 같아 두 아들을 데려다 사형시켜 버렸습니다.
또한 그는 죽기 얼마 전 예루살렘에 있는 존경받는 훌륭한 인물들을 모두 감옥에 가둬버렸습니다. 그리고 명령했습니다. "내가 죽는 날 이놈들도 모두 죽여라!" 이유는 자기가 죽으면 울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자신이 알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함께 죽이면 국민의 애도가 자기에게 올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얼마나 살인마적 악령의 종이었다는 것이 성경에 잘 나타납니다.
아기 예수를 죽이는 일에 실패하자 예루살렘의 두 살 이하의 모든 남자아이는 다 죽였습니다. 역사에 그런 일이 두 번 다시 있습니까?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결국 세례 요한도 헤롯 가문에 목이 잘려 죄 없이 사형당하지 않았습니까? 이 사람은 권력이라는 우상 앞에 굴복해 그 하나만을 위해 부인, 아들을 죽여 버리고 주변에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모두다 죽여 버렸습니다. 이런 살인마적 사람이 헤롯입니다.
오늘 말씀에 그의 교활성이 나타납니다. 박사들을 가만히 불렀다고 그랬습니다. 아주 쉽게 거짓말을 합니다.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교활성이 나타납니다. 낯짝 하나 변하지 않고 출세가도를 달리는 교활한 살인극 연출자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출세가도를 달린 것입니다.
"집권하는 내가 이렇게 버젓이 살아있는데 누가 유대인의 왕이 된단 말이냐?"
헤롯에서 새로 왕이 출현했다는 소식은 또다시 피를 보게 되는 종변의 시작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막는 길은 확대가 되기 전에, 문제가 커지기 전에 아예 처음부터 싹을 잘라버려야 된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결국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는 다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행한 첫 번째 크리스마스 행사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것은 자기중심적 행사가 될 때 불행한 크리스마스가 되는 것입니다. 욕심 채우기 크리스마스! 욕심이 채워지지 않을 때 불쾌한 크리스마스가 됩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성탄절을 다 없애버렸습니다. 그 자체가 괴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헤롯과 정반대 사람들이 맞이하는 성탄절 행사가 나타납니다. 이들의 성탄절 행사는 아기 예수 중심의 크리스마스 행사입니다. 이들을 가리켜 동방박사라고 부르는데 페르시아 제국에서 천문학의 최고 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당시는 메시야 탄생에 대한 예언성이 이웃나라, 주변 국가들에게 알려진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아기 예수를 찾아 수천 리의 길을 왔습니다. 유일한 교통수단인 사막의 낙타를 타고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수없이 당하는 위험의 고비를 넘기고 넘기면서 아기 예수께 선물을 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결국 크리스마스는 예수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성탄의 의미 발견이란 무엇인가? 예수 만나기입니다. 예수를 만나지 못하는 성탄절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세 가지 예물을 드렸다고 했는데, 그 예물 드림의 뜻에서 이번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찾았으면 합니다. 먼저, 황금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왕권을 상징합니다. "당신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실 왕이 되십니다." 그러면 왕이 어떻게 구원하는가? 어느 나라 왕이든지 왕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특권이라는 것이 주워져 있습니다. 어떤 죄를 지은 사람에게도 면죄의 특사령을 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왕이 죄 없다고 하면 없는 겁니다.
아마 이번 성탄절에도 모든 기독교 국가에서는 대통령 특사령을 받고 출옥하는 사람들이 수십만 명이 될 것입니다. 왕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반공포로도 이승만대통령의 한마디로 석방되었습니다. "당신은 온 인류의 죄를 다 사하시고 왕의 권한을 가지셨습니다. 이 황금을 받으시옵소서." 그렇게 황금을 선물로 드립니다. 그 다음에는 유향입니다. 이것은 대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권을 인정하는 선물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지만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의 중보역할로 우리가 하나님 자녀의 특권을 받는 것이고 그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이 유향을 받으시고 우리를 위한 제사의식을 대제사장으로서 해 주소서." 주님의 대제사장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몰약입니다. 이건 무슨 뜻인가? 이것은 방부제입니다. 썩지 않는 물체입니다. 그러면 뭐하려고 예수께 이것을 드렸는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예수님의 몸에 발라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썩지 않는 당신은 생명 불멸의 진리를 가지셨습니다. 이 몰약을 그 상징으로 받으시옵소서."
이것을 선물로 드리기 위해서 이 사람들은 수 천리 사막의 길을 위험을 무릅쓰고 와서 상징적 크리스마스 선물을 예수께 드렸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크리스마스는 성탄 예물을 예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과 우리는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지금 우리가 누구를 찾아가며 무엇을 나누어야 할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간단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일을 한 가지씩 이웃에게 하면 그것이 주님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산타클로스의 역사를 보면 지중해 연안에 케일이라고 부르는 작은 동네가 있었습니다. 그 시골 교회를 맡고 있는 니콜라스 감독이 12월이 되면 큰 주머니를 만들어서 그 속에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물건을 가득하게 준비해 평소 마을 어린이들 보기에 선물 하나 조차도 가져보지 못한 불행한 아이들을 골라서 밤에 몰래 찾아가 그 집 밖에 선물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물건은 절대로 값비싼 물건들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어둠 가운데 있는 아이들에게 해마다 위로 차원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 같이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동네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때만 기다리는 겁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나가보면 틀림없이 자기 집에 소박한 산타클로스의 선물이 놓여있는 것에 큰 기쁨을 느끼면서 나중에는 그 시간을 기다리면서 행복하게 살아갔습니다. 니콜라스는 해마다 몰래 이런 일을 했고 결국 그의 일이 밝혀졌습니다.
그 마을은 니콜라스의 크리스마스 선물 때문에 기쁨이 넘치는 평화의 마을이 되었고 그 소문이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세인트 니콜라스, 성 니콜라스, 거룩한 니콜라스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세인트 니콜라스 부른 말의 발음이 변하여 발전한 것이 산타클로스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찾아가는 작은 행위!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여러 가지 프로그램으로 성탄을 맞이합니다.
우리 교회는 금년에 두 가지를 합니다. 주님의 성탄 축하를 천군, 천사들의 노래 속에 탄생하셨다는 성경 기록에 기초해 복음서의 기록대로 주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음악회를 준비하였고, 고난 받는 형제들의 친구가 되심을 기억하면서 매주일을 착한사마리아인 주일로 지켜 가장 고난스러운 형제들을 돌보는 프로그램을 가지는데, 일생동안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은퇴해서 가족 없이 외로운 생활을 하시는 은퇴 할머니, 여교역자들만 모여서 사는 안식관에 이 겨울 기름이 없어 난로는 못 피운다는 공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해결해주기로 하고 삼주 동안 착한사마리아인 주일을 지키려 하는 것입니다. 니콜라스 감독이 밤을 이용해서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누구도 모르게 행했던 것처럼 교회도 소리 없이 사랑의 선물을 필요한 형제에게 전달한다면 그것이 세인트 니콜라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려는 일의 성격도 다양할 수 있습니다.
세인트 니콜라스와 같이 선물을 나눠주는 데 있을 수 있고, 오랫동안 평화를 이루지 못한 인간관계에 내가 먼저 평화를 보내는 일도 있고, 선교라든가 구제라든가 하는 것은 내가 평생 관심 가져본 일이 없는데 그 작은 부분에 관심을 갖는 일이 될 수 있고, 나눠주는 일이라고는 평생 해본 적이 없는데 나눔의 길을 찾아볼 수 있고, 전도라든가 봉사라든가 이런 것은 내가 해본 일이 없는데 그런 일에 관심과 몸을 바치는 일을 할 수 있고, 불우한 이웃을 찾아가본 적이 없는데 고난의 형제를 찾아서 따뜻한 내 손의 체온을 넘겨주는 일도 있고, 불평, 불만의 소리만 내던 내 언어가 변해 새로운 평화의 언어로 이웃을 대해도 좋습니다.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 주님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찾아가는 크리스마스! 찾아내어서 크리스마스 행사를 하는 사람! 내 마음에 주님이 오실 수 있는 크리스마스! 내가 주님 마음에 들어갈 수 있는 크리스마스!
여기에 50대 나이가 되신 분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스크루지 크리스마스를 읽으셨을 것입니다. 영국의 실제 인물로 지독한 구두쇠인데 재벌이었습니다. 그는 12월 24일 밤 꿈의 세계에서 쇠사슬에 묶여 지옥을 헤매는 친구를 만나게 되고 "스크루지! 자네도 나와 같이 될 걸세!" 그래서 그가 지옥에서 헤매는 꿈을 밤새도록 꾸고 "마음도 물질도 나누지 아니한 죄가 나를 이렇게 괴롭힌다네!" 그래서 그 이튿날 꿈에서 깨어 하나님의 영감으로 받아들여 영국 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자선가가 된 이야기! 그래서 우리와 영국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대한민국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그 이야기가 기록되어 배웠단 말입니다.
가끔 보면 교회들이 무엇을 하지 않고 자체 행사나 성장에만 치우친다는 채찍을 많이 때립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할 말이 있습니다. 의문이 생깁니다. "교회가 무슨 일을 하는지 당신들이 알기나 하십니까? 아니, 교회가 무슨 일을 하는지 교회도 잘 모르는데 밖에서 어떻게 안다고 그런 비판을 하십니까?" 나는 할 말이 당당합니다. 아니, 교회가 하는 일을 바깥에서 어떻게 아느냐 말입니까? 교인들도 모르는데…. 과거에 북한 동포 굶어죽는다고 해서 5년 동안 밀가루 보내기 운동을 했습니다.
교인들에게 밀가루 한 부대씩 다 내라고 하여 기차에 밀가루를 산더미같이 싣고 서포역에 5년 동안 계속해서 했는데 "교회가 무엇을 하느냐?" "뭐하는지 당신들이 봤나요? 여보시오! 갈보리교회도 지금이 12월인데 1월에서 12월까지 지나간 일 년 동안 이웃에 구제와 선교를 위하여 10억을 지출하였소. 이 사회 어느 기업, 어느 공동체가 그렇게 한단 말이오? 그래도 교회들이 하지. 교회가 선한 일 가장 많이 하지!" 솔직히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열심히 합니다.
한 교회가 그렇게 했다면 전체 교회가 한 일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세상은 그래도 교회가 있기 때문에 평화요, 교회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돌아가는 겁니다. 알지도 못하고 교회가 뭘 하느냐 하시니…. "아니, 교회가 뭐하는지 당신들이 무엇을 아십니까?" 인류 역사가 가장 어두워졌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새 역사 창조의 의미로 지난 모든 역사를 정리하면서 예수 탄생을 기준으로 새로운 기원을 정했기 때문에 금년이 2005년이 된 것입니다. 동방박사와 같이 찾아가는 크리스마스, 주님을 만나는 크리스마스, 드리는 크리스마스, 첫 번 크리스마스, 헤롯의 성탄과 동방박사의 성탄 중에서 헤롯을 버리고 동방박사의 길을 택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변함없이 크리스마스를 맞이합니다. 헤롯을 선택하지 말고 동방박사를 선택할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아기 예수를 경배한 사람들
마태복음 2:1-12 / 이종철 목사(빛과 생명의 교회)
저는 어린 시절 교회는 다니지 않았지만 성탄절은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성당이나 교회당에 오색 전등이 켜지면 흥분된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성탄절 이브에 주는 과자나 빵도 좋았습니다. 새벽 송을 도는 누나 오빠들의 불빛이 창문에 비치면 혹시 우리 집에도 들르지 않을까 설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어른이 되었지만 예전과 같은 성탄절의 흥분과 기대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어른이 되어 가면서 어린 시절의 동화 속 환상 같은 것들은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현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어른이 되어가면서 생기는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보다 더 큰 이유는 우리 환경이나 마음이 부유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손안에 가진 불빛이 환하면 하늘의 별 빛을 잘 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할 것입니다. 이제는 더 자극적인 것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심지어 아파트 경비실도 성탄 장식을 하고, 백화점 트리 장식에 비하면 교회당 오색등은 촌스럽기 그지없을 정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도 동일하시지만 문제는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이 좀 더 가난해지지 않으면 옛날에 경험했던 성탄의 감격을 다시 맛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물질적 풍요가 더해질수록 절실히 깨닫게 되는 말씀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입니다. 우리 삶이 주는 풍요로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가는 것보다 우리 마음을 비우고 가난하게 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소나 말의 먹이통인 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아마 나무로된 구유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왕이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메시야였습니다, 하나님이요 주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마땅히 인간들의 경배를 받으셔야만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합니다. 동방박사가 주님께 경배하는 장면은 매우 아름답고 교회학교 연극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낭만을 감싸고 있는 것은 인간의 역겨움과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무서운 살육입니다. 메시야의 출생을 두려워한 헤롯이 베들레헴 근처의 두 살 이하의 유아들을 학살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원하지만 완악한 인간들의 욕심과 무지가 이 땅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종교인의 실패
예수님의 탄생 앞에서 우리는 세 부류의 인간들을 접합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 헤롯 왕, 동방박사가 바로 그들입니다. 이 중 두 부류의 사람이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데 실패합니다. 먼저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입니다. 동방 박사가 예루살렘에 들어와 유대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 있느냐며 소동을 일으키자 헤롯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러서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성경을 찾아가며 정확히 그 위치를 지적합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6)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메시야를 찾으러가지 않습니까? 궁금해서라도 찾아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이미 배부른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애타게 바라던 자들이라면 이렇게 한가하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실상 그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식과 삶이 따로따로인 사람들입니다. 믿는 것과 사는 것이 분리된 사람들입니다. 입술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 차 있지만 실생활에서는 결코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습니다.
이 모습은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장편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대심문관”이라는 장에 실린 내용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종교 재판이 잔인하게 자행되던 16세기 스페인의 세비야 광장에 돌연 그리스도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는 1,600년 전 갈릴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랑 가득한 손길로 군중을 축복하고 병자를 치유하고 심지어는 죽은 여자 아이를 살리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교회 당국자들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습니다. 교회의 권위를 무시한 예수의 행동은 자칫 교권의 위계질서를 해치는 행동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는 이 때문에 체포되었고, 그 날 밤 감옥을 찾은 늙은 대심문관이 그리스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요? 아니, 그리스도든 아니든 상관없소. 어차피 나는 내일 당신을 이단자로 정죄해서 화형에 처할 작정이니까. 오늘 당신의 발에 입을 맞춘 바로 그자들이 내일이면 내가 손가락만 까딱해도 앞을 다투어 당신의 화형 틀에 나뭇가지를 던질 것이오. 대체 왜 다시 왔소? 당신은 모든 권한을 교회에 일임하지 않았소? 우리는 당신이 이미 이전에 말한 것으로 족하오. 이제 다시 새로운 말을 덧붙일 권한이 당신에게는 없는 거요.”
대심문관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았지만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대심문관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이유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세 가지 시험을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중들은 빵을 원하는데 예수는 돌로 떡덩이를 만드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대신 먹기 힘든 천상의 빵을 약속했습니다. 대중들은 “우리들을 노예로 삼되 빵을 주시는 편이 낫습니다.”고 외첬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믿고 있고 자기들 또한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데 성경의 원래 정신을 가르치는 예수님은 더 이상 불필요하고, 위험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대중들은 권력과 영광을 원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손쉽고도 넓은 길을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 이상과 맞지 않는다고 하여, 나에게 축복을 주시지 않는다고 하여, 지금 살기 편한데 당신 때문에 복잡해지고 싶지 않다고 하여... 우리 입술은 항상 ‘예수’ ‘예수’ 하지만 생활의 중심은 ‘나’이고 ‘물질’이고 ‘세상’이 되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말씀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실상 말씀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세속 권력의 실패
또 한 부류는 헤롯 일파입니다. 헤롯은 메시야에 대한 무관심을 넘어 메시야를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헤롯은 박사들에게 아기를 찾거든 자기에게 고하라고 명령합니다. 겉으로는 그를 경배하려 한다 하였지만 실상은 자기의 권력을 위협하는 메시야를 죽이려는 음모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천사의 지시를 받고 헤롯에게 고하지 않고 다른 길로 돌아가고 아기 예수님도 애굽으로 피신하자 헤롯은 심히 분노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다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헤롯은 메시야를 자기 자리를 위협하는 자로 보았던 것입니다. 헤롯의 권력욕이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간절히 원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세속 권력의 실패입니다. 그들은 평화를 가져다 주는 데 실패합니다. 정의를 실현하는 데 실패합니다. 탐욕에 쪄들었을 뿐만 아니라 무능력합니다. 메시야 탄생을 예언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6-7)
헤롯 왕 뿐만 아니라 모든 세속 권력은 예수님 앞에 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실패는 곧 메시야를 향한 열망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년 『교수신문』에서 올 해의 사자성어를 발표합니다. 우리 시대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데 2016년 올해의 사자성어는 ‘군주민수(君舟民水)’입니다. “백성은 물, 임금은 배이니,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촛불 평화집회와 박근혜 씨의 탄핵 사태에까지 이른 민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민중이 이상 하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2천 년 전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던 예수님은 이제 모든 세속 권력에 대한 심판자이십니다. 세속 권력은 짐승과 같습니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계13:1) 홉스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역설하며 ‘국가론’을 썼는데 그 책의 제목이 『리바이어던』입니다. 영어식 발음이지만 성경에서는 ‘리워야단’ 또는 ‘라합’이라 불리는 바다 괴물을 말합니다. 국가는 괴물이고 짐승과 같습니다. 잘 관리하면 이롭지만 본질상 통제불능의 존재입니다. 헤롯이 바로 그런 짐승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영원한 정의와 평화의 왕입니다.
아기 예수를 경배한 동방박사들
오늘 아기 예수님께 경배한 사람들은 동방박사들입니다. 이들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죽이려 하고 이방인들은 경배하는 기이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동방박사는 ‘매기’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점성술사들입니다. 별들을 연구하다 이스라엘 쪽에 뜬 별을 보게 되었는데 메시야의 별이었습니다. 이들이 별을 발견한 것은 언제였을까요? 그들은 얼마나 먼 거리를 왔을까요? 2장 16절에 보면 헤롯이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다”고 전하는 것을 볼 때, 별은 아마 2년 전부터 비추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짧으면 1년, 길면 2년 동안 별만 보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때는 별이 뜨지 않아 불안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T. S. 엘리엇은 “4월은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황무지>란 시로 유명합니다. 그가 쓴 시 중에 <동방박사의 여행>이라는 시도 있습니다. 짧지만 그 여행 과정의 수고와 동방박사들에게 찾아온 변화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혹독한 추위였습니다,
여행을 하기엔, 그토록 긴 여행을 하기엔
연중 가장 고약한 때였지요.
길은 푹푹 빠지고, 날씨는 매섭고,
바로 한겨울이었지요.
거기다 낙타들은 상처가 나고, 발이 붓고, 고집을 부리며
질척거리는 눈 위에 누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낙타꾼들은 욕지거리에 불평을 하며
도망치고, 술과 계집을 요구했습니다.
밤에는 모닥불도 꺼지고, 쉴 만한 곳도 없었습니다.
도시는 적대적이며, 마을은 불친절했습니다.
동네는 불결하며, 바가지요금을 강요했습니다.
혹독한 시련이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밤을 새워가며 여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토막잠을 자면서.
이 모두가 바보짓이라는 목소리가
우리 귀에는 들려왔었습니다.”
이런 역경과 회의를 딛고 아기 예수를 만납니다. 오랜 수고에 비하면 아기 예수와의 만남은 짧았습니다. T. S. 엘리엇은 “그곳을 발견했습니다. 만족스러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며 단 한 줄로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이런 힘든 노력을 해야 합니다. 힘들게 얻지 않는 것은 감사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시간에서 예수님을 찾기 위해 내어놓은 시간과 노력은 어느 정도나 됩니까? 우리는 모두 동방박사처럼 여행을 떠난 사람입니다. 밭에 감춘 보화를 찾아 나선 사람들입니다.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 시는 엘리엇이 동방박사가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쓴 시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동방박사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일은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다시 한 번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내 나라인 이 왕국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더 이상 편하지가 않습니다.
자기네 신들에게 매어달리는 이교도 천지인 이 낡은 율법 하에서는.
또 한 번 달갑게 죽어야 할까봅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아기 예수를 보고 난 뒤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옛날 즐기던 것들이 무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 낯선 백성들과는 편하지 않다” 이 고백이 얼마나 다가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를 만난 뒤에 그동안 즐기던 것들이 낯설어졌습니까? 자주 가던 술집, 자주 나누던 대화들, 늘 관심 있어 하던 자녀 자랑이나 물질 자랑, 이 모든 것이 덧없는 것처럼 되지는 않았습니까? 한 번 은혜를 맛본 후에는, 한 번 꿈을 꾼 후에는 자기가 누리던 현재의 것들은 낡은 것처럼 됩니다.
동방박사는 보통 세 사람이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성경 본문에는 세 사람이라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른 새찬송가는 ‘동방박사 세 사람’이라는 제목을 ‘동방에서 박사들’이라 과감히 바꾸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 세 가지 선물을 주었다는 점에서 세 사람이라 추측할 뿐입니다. 교회 전설들에서는 이들의 이름까지 언급합니다. 황금 선물을 바쳤던 사람은 멜키오르(Melchior)입니다. 이 사람은 나이가 많았고 백색 머리에 긴 수염을 가졌다고 합니다. 유향을 선물로 드린 사람은 카스파르(Caspar)입니다. 이 사람은 젊고 수염이 없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몰약을 선물로 드린 사람은 발싸자르(balthasar)로 이 이 사람은 거므스레한 얼굴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다 전설들이라서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동방박사가 세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오래 전에 헨리 벤 다이크(1852-1933)라는 분이 『네 번째 동방박사』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네 번째 동방박사의 이름은 ‘알타반’이었습니다. 알타반 또한 친구들로부터 새로운 왕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 서쪽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그 메시야를 경배하러 간다는 말을 듣고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아기 메시야를 경배하기 위해 전 재산을 정리하여 세 가지 보물, 즉 루비, 사파이어, 진주를 준비했습니다.
알타반이 말을 타고 거의 베들레헴 쯤 도착했을 때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자기 앞에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사람을 만났던 것입니다. 마음이 급했던 알타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를 치료하고 낙타에 싣고 주막을 찾았습니다. 주막 주인에게 죽어가는 사람을 맡기며 자기가 준비한 세 가지 예물 중 루비를 꺼내어 주며 그 사람을 잘 돌보아 달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는 서둘러 약속한 지점에 갔지만 세 친구들은 떠났고 예수님도 헤롯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가시고 난 후였습니다. 허탈해하고 있는데 갑작스런 말발굽 소리와 비명 소리 그리고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헤롯 왕이 사내아이들을 죽이기 위하여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알타반은 그 아기를 구하기 위해 남은 두 가지 예물 중 사파이어를 꺼내서 병사들의 대장에게 주었습니다.
알타반은 이제 예물이 하나만 남았습니다. 알타반은 그 진주를 안고 아기 왕 예수님을 찾아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는 찾지 못하고 33년의 세월이 흐르고 맙니다. 그는 이제 순례의 여정을 정리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이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날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알타반은 깜짝 놀라 황급히 골고다 언덕으로 뛰어갔습니다. ‘내가 33년이나 찾아 헤맨 왕이 돌아가시다니... 내 진주를 주고서 구해야지.' 예수님을 만나러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을 때 노예로 팔려가던 한 소녀가 알타반의 다리를 끌어안고 살려달라고 소리치며 애원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바치려던 마지막 보물인 진주를 그 불쌍한 소녀의 몸값으로 주고 그 소녀를 구합니다.
이제 알타반에게는 아무런 예물도 없습니다. ‘이제 왕을 무슨 면목으로 보나!' 걱정하며 걸음을 옮기는 순간 갑자기 예루살렘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이 어두워졌고 집들이 흔들리면서 무너져 내린 기왓장이 알타반을 덮쳤습니다. 70세를 넘긴 알타반은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마지막 힘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새로운 왕 메시아를 만나 경배하려 평생을 찾아 다녔지만 그분을 만나지 못한 채 이렇게 죽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경배하려 준비한 보석들마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기도하는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알타반! 너는 정말 훌륭한 나의 아들이다. 난 이미 너의 경배를 세 번씩이나 기쁘게 받았다. 네가 작은 소자들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니라. 네가 만난 불쌍한 사람들이 바로 나이었느니라.” 알타반이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이 음성을 들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숨을 거둡니다.
알타반은 그 어떤 예물들보다 소중한 사랑과 자기 희생의 예물을 드렸습니다. 여러분의 손에는 어떤 예물을 들고 있습니까? 황금입니까 유향입니까 아니면 몰약입니까? 주님께서는 주님을 사랑하는 당신의 마음을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뜻을 좇아서 이웃의 작은 자들을 섬기는 사랑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예수님을 만나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만나 뵈었을 때 여러분의 손 안에 예물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가장 귀한 예물은 무엇보다 탐욕과 권력을 내려놓은 빈 마음과 사랑의 예물입니다.
성탄절의 의미
마 2:1-12 / 서명성 목사(팔로마교회)
무슨 일이든지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억지로 하게 되고 재미도 없고 당연히 좋은 열매를 기대하기 힘듭니다. 왜 의미를 모를까요? 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도 있고 다른 일로 인하여 너무 분주하거나 지쳐서 혹은 귀찮아서 별로 알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의미를 찾지 못하면 힘이 들 때마다 ‘하나님 왜 나를 낳으셨나요’하면서 불평과 원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탄절이 이교도들의 풍습을 중세 교회에서 도입한 것이기에 기독교인들은 성탄절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그렇듯 하지만 맞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탄절로 지키는 때가 로마 시대에는 태양신을 기념하던 이교적 절기였는데 교회는 태양이 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신이시오 구세주라고 증언하면서 지키기 시작한 것이 성탄절의 기원입니다. 이전에는 태양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그분에게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이 예수님 때문에 생긴 절기면서도 예수님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며칠 전 사무실 용품을 취급하는 가게에 갔다가 크리스마스 카드에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성경 구절이 들어간 카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Merry Christmas’라는 문구가 들어간 카드가 가끔 있었고 'Happy Holiday'라고 쓴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정작 계셔야할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빠진 생일잔치로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교회도 자칫하면 진정한 의미를 모른 채 세상 물결에 휩쓸려 엉뚱한 것을 하느라 분주할 수 있습니다.
성탄절이 주일인 경우가 흔치 않은데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Christmas = Christ(그리스도) + mas(예배)
성탄절은 그리스도의 나심을 기뻐하며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성탄절이 존재하기에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태는 1장과 2장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소개합니다. 1장에서는 족보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알려줍니다. 또한 성령으로 잉태하게 하심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되십니다. 이 임재는 예루살렘을 넘어 이방에까지 예수님 당시를 넘어 세상 끝날까지 이어질 것입니다(마 28:20). 2장에서 마태는 예수님을 왕으로 소개합니다. 유대인의 왕이 되실 뿐 아니라 이방인의 왕도 되심을 보여줍니다. 이 설교를 듣는 모든 성도들이 성탄절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경배와 헌신의 삶을 살기를 결단하며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성탄절을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의 의미를 알려면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1)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다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죄를 질 때마다 짐승들이 죄지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 대신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종교, 철학, 과학 등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오직 초월자이시며 온전한 분이신 하나님에게서만 옵니다. 영원한 위 세상에 계신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의 중보자인 로고스가 아래 세상에 오셔서 물질인 육신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위 세상의 생명인 영생을 죽음의 세계인 아래 세상에서 얻게 하셨습니다. 14절에 ‘독생자’라는 표현은 ‘종류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뜻합니다.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독특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말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실제로 스스로를 낮추셨습니다. 인간이 되어 인간과 함께 사셨습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내어주신 ‘은혜’였습니다. 성육신은 무지로 방황하며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인생들에게 갈 길을 분명히 제시하신 ‘진리’였습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죄 사함 받고 깨끗하게 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의 생명의 빛이 우리의 마음을 비출 때 죄가 드러나고 그 죄를 회개할 때 죄 씻음을 받습니다.
2) 우리의 풍성한 삶을 위하여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목적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할 뿐 아니라 그 생명을 넘어서는 초월하는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에게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십니다. 부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유하게 하신 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세상의 일시적인 만족과 풍요를 바라지 않고 영생을 소유한 자로서 예수님을 신뢰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자녀가 되면 부모의 것을 상속받을 수 있듯이 예수님을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기도에 대한 응답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면서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3) 섬김의 본을 보이시려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은 지배하거나 군림하려 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라 하십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그리스도들의 자세입니다. ‘섬기는 자’를 의미하는 헬라어 디아코노스에서 영어 deacon(집사)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제자들이 본받아야할 궁극적인 섬김의 본보기로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즉, 그분의 탄생, 사역, 죽음은 인류를 위한 섬김이었습니다. 대속물은 예수님이 죄와 죽음의 상태에 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지불하신 보혈의 속전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구원 받는 성도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해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비록 예수님의 죽음이 가지는 대속적 성격까지 본받을 수는 없겠지만 그분의 삶을 본보기로 삼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계속해서 따라가야 합니다.
사람들의 반응
박사들이 별을 보고 먼 길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온 것은 그분을 경배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태어나셨지만 제일 기뻐해야할 사람들이 도리어 뜻밖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 소동을 벌입니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은 창세기에도 나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그때부터 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였는데 그 메시아의 탄생 예언을 직접 받은 유대인들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자칫하면 아무도 모른 채 그냥 넘어갈 뻔 했던 한 아기의 탄생이 별을 관측하던 동방 박사들의 출현으로 온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택하셔서 영적으로 잠자던 자기 백성들을 깨우셨습니다. 이미 오랜 동안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려 온 상황에서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소식은 온 도시를 소동케 할 만큼 big news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소동은 왕을 맞이하려는 준비로 부산한 것이 아니라 왕권이 교체될 때마다 이어지는 전쟁과 혼란의 공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기존의 옛 질서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새 질서 앞에서 언제나 소동하기 마련입니다.
2) 불안해합니다
헤롯왕은 본래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 정부에 의해 임명된 이방인이었기에 왕위에 대한 불안이 항상 있었습니다. 왕위에 대한 집착으로 인하여 이미 자기의 아내, 장모, 세 아들까지 죽인 헤롯이다 보니 유대인의 왕이 났다는 소식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아기 예수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헤롯은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불러 모으고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는지 묻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물었는데 헤롯왕은 그 왕이 그리스도를 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모든 예언에 능통한 서기관들은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떠올립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미 5:2) 헤롯이 더 알고 싶어 조용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습니다. 여기서 ‘묻다’는 헬라어로 미완료형을 사용합니다. 과거 반복을 의미합니다. 박사들에게 반복하여 물었다는 것은 헤롯왕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보여줍니다.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장소를 알기만 하면 당장 사람을 보내어 죽이려고 합니다.
3) 무관심합니다
온 도시가 소동을 벌이는데 별로 동요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누구인지, 그가 어떻게 오실 것인지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입니다.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흥분하거나 그 분을 만나러 베들레헴에 가보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을 찾아 먼 길을 왔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한발자국도 떼지 않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그들 마음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많은 성경지식에도 불구하고 무관심 때문에 오신 메시아를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아예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안타깝지만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많이 듣기는 했지만 진정으로 그분을 만나지 못하고 영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욱 안타깝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성도보다 그렇지 않은 성도에게서 순수한 믿음과 순종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 생활에 익숙한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을 맛보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많은 성경지식을 가지고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마지막 날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많이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 말고,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박사들이 메시아의 탄생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온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의 행동은 메시아 탄생의 의미를 아는 자들이 보여야 할 자세입니다.
1) 마음을 다해 찾아옵니다
박사들은 헬라어로 magoi인데 이는 별을 연구하는 점성가를 가리키는 페르시아 말입니다. 그들을 wise men, 즉 지혜자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별의 변화를 관측하고 하늘의 징조를 찾다가 어느 날 밤하늘에 빛나는 신비한 별을 발견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별의 임자를 찾아 경배하겠다는 열정이 없었다면 굳이 많은 시간과 물질을 들이면서까지 길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신기한 별이 하나 떴다고 잠시 흥분하다가 시들해졌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 출신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박사들이 그 별을 보고 새로운 왕의 탄생을 알았고 그래서 먼 동방에서부터 그 왕에게 경배하기 위하여 왔다는 점입니다. 교통, 숙박, 안전 등이 열악한 당시 상황에서 예루살렘까지 오기까지 많은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더구나 세 사람만 여행하는 것은 위험하기에 큰 떼를 이루어 함께 왔을 것입니다. 박사들이 언제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막 태어나서 구유에 누인 날이 아니라 태어난 후 제법 시간이 지났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나중에 헤롯이 부하들을 명하여 아이가 난 때를 기준으로 하여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은 다 죽이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이 헤롯 왕이 유대 땅을 다스릴 때에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박사들이 주목한 별은 온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 별은 암흑과 무지와 불안 속에서 신음하고 있던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키고 영원한 자유와 행복을 주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소망의 별이었습니다.
2) 예물을 드립니다
박사들이 왕궁에서 나오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 별을 따라 갑니다. 그들을 인도하던 별이 어느 집 위에 멈춰섭니다. 박사들은 크게 기뻐하고 기뻐합니다. 지난 몇 달 동안 들인 수고는 수고로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별의 임자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들을 흥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집에 들어갔더니 과연 그 아기가 그의 어머니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감격하면서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준비해 온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 예물들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놓고 다양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10장에 보면 스바 여왕이 솔로몬에게 예물을 드릴 때 금 120달란트를 드렸습니다. 금은 예부터 왕에게 드리는 예물인고로 예수님이 왕이심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향은 유향나무에서 나는 희고 향기로운 진액으로 제사장들에게 드리는 예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로 오신 대제사장입니다. 몰약은 죽은 시체에 바르는 것입니다. 몰약을 아기 예수께 드리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이심을 상징합니다. 박사들이 어떤 의도로 예물을 준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자기들이 드릴 수 있는 가장 귀한 것들을 준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별의 임자를 찾아 온 것은 무엇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3) 말씀에 순종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하나님은 꿈을 통하여 여러 차례 계시하십니다.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헤롯은 아이 있는 곳을 알거든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 헤롯의 말을 따를 것인가 그들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별의 인도를 통하여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헤롯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박사들은 올 때와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비록 그 길이 멀리 둘러가는 길이었을지라도 불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펄쩍 뛰었습니다. 그런데 박사들이 한 가지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무심코 한 행동을 인하여 많은 어린 생명들이 죽었습니다. 별을 보고 오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별에서 눈을 떼고 자기들의 경험을 의지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니 당연히 왕도에서 날 것으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이 던진 그 말 한 마디로 인하여 예수님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사내아이들이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온전한 순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자녀가 된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참다운 경배자와 그릇된 경배자의 차이는 그 중심에 누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경배자는 하나님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며 자기 안에 있는 잘못된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치료받으며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반면에 그릇된 경배자는 자기가 중심이 되어 자기 편의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성탄절은 주님만이 주목을 받으셔야 하는 날입니다. 온 교회가 주님의 기쁨을 구하는 예수님의 참된 생일잔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 즉 피 흘려 죽음으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신 그분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먼저 우리 마음의 보배합을 열어야 합니다. 물질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과 정성을 아울러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헌신은 주님이 기억하시는 헌신이 되고 향기로운 예물이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대열에 함께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성탄의 의미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자칫하면 믿는 사람들조차 이 의미를 생각지 않고 그저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 재미있게 보내는 날로 보내기 쉽습니다. 두주 전 샌디에고 교역자 협의회에서 가진 송년의 밤 행사 중에 가진 월례회에서 멕시코 티후아나에 여러 나라 출신 난민들에게 추운 겨울에 대비하여 따뜻한 담요를 보내는데 성금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회장을 비롯한 목사님들이 티화나를 방문하여 담요를 전달하였습니다. 내년에는 우리 교회도 선교회 중심으로 진정한 성탄의 의미에 부합되는 섬김을 가져야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성탄절에 저와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참다운 경배자들의 모습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지만 이제는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 중에 기다립니다.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과 삶의 중심에 모시고 주님을 겸손하게 따라가는 신앙의 여정을 계속해야 합니다. 성탄절의 의미를 바로 알고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그리고 풍성하게 체험하는 21세기의 동방박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신실한 소수자
마 2:1-12 / 김영봉 목사(워싱톤교회)
Merry Christmas!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성탄절을 맞아 교우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지난 주, 예배가 끝난 후 어느 교우께서 지나가시면서, "다음 주에는 베들레헴이겠죠?"라고 말씀하십니다. 속으로 '이크, 들켰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절에 맞추기 위해 베들레헴 이야기를 오늘까지 미뤄두고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빵집'이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7 마일 정도 남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입니다. 현재는 팔레스틴 자치 지구에 속합니다. 그래서 도시 경계에 높은 장벽이 서 있고, (사진1) 장벽 사이에 검문소가 있어서 통과할 때 철저한 보안 검색을 받습니다.
저희 일행은 버스를 타고 검문소를 지나 좁은 언덕길을 따라 '예수 탄생 교회'(The Church of the Nativity)를 향해 올라갔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제 눈에 들어오는 베들레헴의 분위기는 삭막하고 스산했습니다. 마치 죽어있는 도시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예수 탄생 교회'에 가까와질수록 활기가 느껴지기는 했습니다만, 왠지 마음이 움츠려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베들레헴에 얽힌 아픈 역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베들레헴은 특별한 곳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키고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들을 베들레헴에 있는 라헬의 무덤에 집결시켰습니다. 바벨론까지의 멀고 먼 행군을 베들레헴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그 사건을 두고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주가 말한다.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 (렘 31:15)
야곱의 아내 라헬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머니인 셈입니다. 사슬에 묶여 포로로 잡혀가는 자손들을 보고 라헬이 통곡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육신적인 시각에서 보면 라헬은 죽어서 말이 없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라헬이 자손들의 불행을 보면 얼마나 슬퍼하며 우는지, 위로 받기조차 거절했다고 합니다. 슬픔이 너무도 크면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의 유아 학살 사건입니다. 로마 황실의 허락을 받아 유다를 다스리고 있던 헤롯 대왕은 장차 유대인의 왕이 될 사람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지역에 사는 두 살 이하의 남자 아이들을 모두 살해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베들레헴의 인구가 얼마였는지 모르기 때문에 추측하기 어렵습니다만, 적어도 몇 십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한 순간에 아들을 잃은 부모들의 통곡으로 베들레헴은 또 한 번 진동했을 것입니다.
헤롯 대왕에 대해 잠시 소개하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활동하실 때 갈릴리를 다스리고 있던 분봉왕 헤롯(Herod the Tetrarch)의 아버지입니다. 헤롯 대왕은 유대교를 신봉하기는 했지만 혈통으로 유대인은 아니었습니다. 혈통을 중시했던 유대인들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37년 동안 왕으로 군림했던 헤롯 대왕을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헤롯 대왕은 끝도 없는 야심과 잔인성으로 유명합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고 마다하지 않았고, 가까운 친척을 살해하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로마 황실에 아부하기 위해 그리고 로마의 권력을 모방하기 위해, 그는 유대 땅에 로마식 도시를 건설하고, 곳곳에 별장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별장으로 만든 왕궁을 보면 그의 권력욕이 얼마나 컸고, 또한 자신의 권력을 지키느라 얼마나 불안에 떨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헤롯 대왕의 죽음에 대해 웃지 못할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는 병으로 죽었는데, 자신의 죽음을 두고 슬퍼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다 전역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자식들에게 유언을 내립니다. 자신이 죽는 순간에 그 사람들을 모두 살해하라고. 그렇게 하면 자신이 죽었을 때 곡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계산했던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 자식들이 그 유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헤롯 대왕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동방박사들이 찾아옵니다. 별을 관찰하며 운명을 점쳤던 점성가들입니다. 그들이 찾아와 유대인의 왕이 될 아기가 태어났다고 했으니, 헤롯 대왕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3절에 보면, "헤롯 왕은 이 말을 듣고 당황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내로라는 율법 교사들을 모아 놓고 문의했고,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냅니다. 그리고는 "가서, 그 아기를 샅샅이 찾아보시오.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할 생각이오"(7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속셈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를 만나 경배한 후, 동방박사들은 천사의 지시를 받고 헤롯 대왕을 만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자 헤롯 대왕은 베들레헴만이 아니라 그 주변 동네까지 그리고 새로 태어난 아이로부터 두살까지 모든 남자 아이들을 살해하도록 명령합니다. 작은 암세포를 발견하고는 위의 절반을 도려내는 것처럼, 불씨의 가능성을 완전히 도려내려 한 것입니다. 과연 헤롯 대왕다운 발상이고 또한 헤롯 대왕다운 명령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을 탓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 땅에 태어나서 그 어린 아이들을 희생되게 했느냐? 왜 하나님은 그 많은 아이들이 희생되도록 내버려 두었느냐? 그럴 듯한 질문처럼 보입니다만, 알고 보면 질문의 방향이 뒤집혀 있습니다. 이 유아 학살의 책임은 헤롯 대왕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한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 올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요즈음 우리는 북한에서 일어난 일들을 지켜 보며 치를 떨고 있습니다.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고모부를 공개 처형한 그 젊은 지도자의 모습을 지켜 보며 우리는 심란함을 느낍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빛은 섬뜩합니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할지 염려가 되고, 또한 그가 자신의 권력욕에 눈이 멀어 어떤 도발을 할지 걱정이 됩니다. 아버지 일 주기 기념식에 서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저는 '탐욕'(greed)을 보았습니다.
이번 순례 여정 중에서 가장 자주 생각한 것이 인간의 탐욕 혹은 욕심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인간의 탐욕의 산물이었습니다. 가이사랴에 세워진 로마식 경기장과 극장 그리고 건축물들(사진 2), 므깃도에서 본 수 없는 전쟁의 흔적들(사진 3), 마사다 요새에 세워진 헤롯 대왕의 별장(사진 4), 그리고 제라시에 남아 있는 로마식 건축물의 잔해들(사진 5)을 보면서 저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인간의 탐욕의 끝은 어디인가?
오늘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긴 '전쟁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만 해도 그렇습니다. 한국 전쟁 이전까지 평균 5년에 한 번씩 전쟁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60년이 넘도록 전쟁 없이 살고 있습니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후, 지역적인 작은 전쟁은 있었지만 세계 전쟁은 반 세기가 지나도록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전쟁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저같은 사람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행운아라 할 수 있습니다.
전쟁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서 탐욕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거나 과거보다 덜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군사력으로 다른 나라를 점령함으로써 탐욕을 충족시키는 것이 과거의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다른 방식으로 탐욕을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현대판 므깃도는 뉴욕의 월스트릿일 수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탐욕이 그곳에서 충돌하고 또한 해소됩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판 므깃도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크고 작은 욕심들이 가정을, 교회를, 회사를 그리고 나라를 파괴시키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목격하고 있습니다. 인간사란 결국 크고 작은 욕심들이 서로 얽히고 설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얼마 전, 교우 한 분이 제게 조정래 작가의 <정글만리>라는 소설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지 지난 주, 눈에 갇혔을 때 그 소설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 소설의 한 대목에서 작가는 제가 느끼고 있는 동일한 느낌을 등장 인물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중에 김현곤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역사란, 중국이나 유럽이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 서로 죽이고 죽은 것의 기록의 전부예요. 인간의 역사를 생각하다 보면 인간이란 결국 이런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인가 하는 회의에 빠질 때가 가끔 있어요. (2권, 228쪽)
작가들은 등장 인물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곤 합니다. 이것은 한 등장인물의 말이지만 작가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이번 순례 여정을 통해 뼈저리게 체험한 진실을 소설에서 만나게 되어 참 반가웠습니다. 너무 비관적인 표현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역사에 위대한 일을 이룬 사람이란 대부분 탐욕의 정도가 그만큼 큰 사람이었고 또한 그 탐욕을 이룰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탄절에 너무 우울한 이야기를 해서 참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입니다. 작년 이맘 때 일어난 일을 기억하십니까? 2천 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일과 유사한 일이 샌디 훅 초등학교(Sandy Hook Elementary School)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세상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더 커졌고, 탐욕을 충족시키는 방법은 더욱 교묘해지고 또한 은밀해졌습니다. 이것만을 생각하면 조정래 작가가 말한 대로 인간은 참으로 별 것 아닌 존재요 인간의 역사 또한 별 의미가 없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읽은 말씀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크고 작은 탐욕으로 얽히고 설켜 돌아가는 것이 세상사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렇게 얽히고 설켜 아무 방향도, 아무 원리도 없이 돌아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것 배후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 진실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오늘의 이야기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은 헤롯 대왕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를 그의 탐욕에 내버려 두면서도 역사의 방향을 이끌어 가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을 창조하면서 자유 의지(free will)를 주시기로 결정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악의 가능성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갈지, 하나님에게 등지고 자신의 욕심이 따라 살아갈지, 인간의 자유 의지에 맡겨 놓으셨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손을 떼고 팔짱 낀 채 지켜보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은 역사를 인도해 가십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듯, 헤롯 대왕이 선택하고 결정하는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 같지만, 중대한 지점에서 항상 일이 틀어집니다. 왕으로 태어난 아기를 살해하려고 동방박사들에게 거짓말을 했지만, 동방박사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그를 피해 귀국해 버립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차린 헤롯 대왕은 잔인한 유아 살해를 통해 불행의 씨앗을 철저히 제거하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이집트로 피신한 후의 일입니다. 헤롯 대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중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성탄을 축하한다는 것은 바로 이 진실을 확인하고 선포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헤롯 대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은 힘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순종하는 소수의 사람들이라는 것! 지금의 현실은 힘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 같아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만들어져 간다는 것! 이 진실을 믿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믿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악인들이 득세하고 악인들의 마음대로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의 정세를 보면,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어린 지도자와 불의한 권력자들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압니다. 북한의 동포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길을 마련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 불의한 권력의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믿습니다. 북한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개인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다 보면 때로 악으로 똘똘 뭉친 것 같은 사람과 얽힐 경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힘은 강하고 나의 힘은 약할 때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들을 겪어야 합니다. 억울함은 더해 가는데 그 억울함을 풀 길 없을 때, 우리는 낙심하고 절망하고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또한 불평하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주인은 그 악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메시지를 정말로 믿는다면, 우리는 동방박사처럼 그리고 요셉처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따라 행하는 '신실한 소수자'(faithful minority)에 속하기를 기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자신의 탐욕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재력을 가진 사람이나 권력을 가진 사림이 자신의 탐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그것을 사용한다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런 힘이 없어도 상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가진 것이 하나 없어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편을 택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 큰 일을 이루십니다.
그렇게 '신실한 소수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베들레헴의 한 언덕 위에 세워진 '예수탄생교회'(사진 6)에서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탄생교회'는 지난 주에 소개한 '성묘교회'와 유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후 132년에 유대인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로마 황제 하드리안이 골고다 언덕에 비너스 신전을 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베들레헴의 한 언덕 위에 미의 여신인 아도니스 신전을 세웁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언덕에 있는 동굴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100년도 되지 않아서 그런 전통이 생겼다면, 그곳이 실제로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로부터 약 200년 후, 예수님의 발자취를 밟기 위해 팔레스틴에 왔던 콘스탄틴의 어머니 헬레나가 아도니스 신전을 허물고 기념교회를 세우게 합니다. 그것이 '예수탄생교회'의 시작입니다. 헬라나가 지은 교회는 약 200년 후에 파괴되었지만, 약 200년 후에 다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서 있는 '예수탄생교회'는 무려 1,400년이나 세월의 풍상을 겪고 살아남은 것입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제단에서는 미사가 드려지고 있었고, 순례객들은 촘촘히 늘어서서 예수께서 탄생했다는 동굴로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사진 7). 얼마나 사람이 많던지, 멀고 먼 순례를 했던 동방박사의 심정이 아니면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마침내 지하로 통하는 좁은 통로로 들어가니, 그곳에도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셨다는 자리 바닦에 은으로 별을 만들어 놓았는데(사진 8), 그것을 만져 보려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성묘교회'에서와는 달리 저는 그곳에서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보이는 모습들이 하나같이 눈에 거슬리기만 했습니다. '겨우 이것을 보자고 그 지루함을 견뎠나' 싶었고, 마치 그 별이 무슨 성물이나 되는 듯이 만지고 비비고 입을 맞추는 사람들의 모습도 거슬렸습니다. 어떤 여인은 가지고 있던 핸드백을 그곳에 슥슥 문지릅니다. 그 핸드백에 돈이 가득 찰 것을 기도했을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쉽게 미신으로 둔갑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탄생교회'에 대한 기억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로 들어가는 문(사진 9)입니다. 그 거대한 교회로 들어가는 문의 높이가 1미터 20센티밖에 되지 않습니다. 원래는 그 문이 높고 넓게 지어졌는데, 말을 타고 드나드는 것을 막기 위해 좁고 낮게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곳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누구나 혼자서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상징입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 앞에 홀로 서서 겸손히 머리 숙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그분 앞에 홀로 서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누구에게는 심판이 되고 누구에게는 구원이 됩니다. 그것이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그 때가 오기 전에 우리 스스로 그분 앞에 나아가 홀로 서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고개 숙이고 고백해야 합니다. 당신은 나의 왕이십니다라고. 당신은 나의 주인이십니다라고. 당신이 나의 전부이십니다라고.
이 고백이 진실할 때 매일 주님과 동행하며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매일 주님과 동행할 때에만 그분이 주시는 구원이 무엇인지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살 때 우리는 주님이 찾으시는 신실한 소수자가 되어 동방박사처럼 혹은 요셉과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습니다. 식욕도 없고, 잠을 자는 것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매일의 일상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중, 실력 좋은 의사를 만나 원인을 발견했고 또한 약도 처방 받았습니다. 약병을 받아들고는 "아, 이 약이 나를 구원할거야!" 하고 기뻐합니다. 그는 약병을 식탁에 올려 놓고 매일 그 약병을 바라보면서 고백합니다. "너야 말로 내 병을 치료할 구원자다." 하지만 그렇게 고백만 할 뿐 약을 먹지 않습니다. 고백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병이 깊어져만 갑니다. 지쳐 허덕일 때마다 그 사람이 생각합니다. "그 의사가 한 말은 다 거짓말이었나? 저 약도 소용이 없네."
제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 보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 이야기가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원자라고 알고 있는 것과 그 앞에 홀로 서서 고개 숙이고 고백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과 실제로 주님과 함께 매일 동행하며 사는 것도 전혀 다른 일입니다. 매일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데까지 가야만 그분이 주시는 구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은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혹시 사람들 틈에 끼어 멀리서 예배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분이 과연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 온 동방박사들처럼 그분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분 앞에 홀로 서서 머리 숙여 "당신은 진실로 저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고백대로 매일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성탄에 그와 같은 믿음의 도약이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분 앞에 홀로 서서 고개 숙여 그분을 왕으로 모셔 들였습니까? 또한 매일 그분과 동행하기 위해 힘쓰고 계십니까? 잘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한 번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십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의 악의가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역사를 빚어 가는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매일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은 바로 이 신실한 소수자에 속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진실하게 머리 숙이고 그분을 왕으로 고백하고 또한 그렇게 매일을 살아감으로 우리의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주님이 오신 이유
마 2:1-12 / 김도완 목사
부러움의 이유
크리스마스만 되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음을열어주는101가지이야기’라는 책에 실린 실화입니다. 뉴욕시에 사는 조는 큰 부자였던 형으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로 빨간 스포츠카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그 차를 타고 출근한 첫 날 조는 차를 자랑하느라 하루 종일 일은 하나도 못 한 것 같았습니다. 퇴근하려고 회사 주차장으로 내려왔더니 한 눈에도 서있는 차들 사이에서 확 뜨이는 자기 차를 열 살 남짓한 꼬마아이가 앞뒤로 오가며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차 아저씨 꺼예요?’ ‘그럼. 아저씨 형이 큰 부자라서 이 차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줬단다.’ ‘와, 정말 좋겠다.’ ‘너도 이런 차 사주는 형이 있었으면 좋겠지?’ ‘아니요. 저도 동생에게 이런 차를 사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이의 말을 들은 조는 순간 조금 당황했습니다.
‘너 이 차 한 번 타볼래?’ ‘정말요? 그럼 저희 집까지 태워다주실 수 있어요?’ ‘그럼, 이 차가 얼마나 빨리 너희 집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주마.’ 허름한 동네에 있는 아이의 집에 도착하자 조금만 기다려줄수 있느냐고 말하곤 아이가 집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가족들에게 자기가 얼마나 멋진 차를 타고 왔는지 자랑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한 조가 차에서 기다리는데 아이는 예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동생을 업고 나왔습니다.
한 눈에도 엎혀있는 아이의 동생은 다리가 불편한 장애아임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 아이는 동생에게 조의 차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타미, 내가 반드시 약속할게. 형이 돈을 많이 벌어서 너에게 이런 멋진 차를 사주고 말거야. 그럼 너는 어디든 갈 수 있어. 조금만 기다려. 형이 꼭 약속을 지키고야 말거야.’ 그 순간 조는 형언할 수 없이 벅차 오르는 무언가와 더불어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는 두 아이를 태우고 허드슨 강변으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드라이브를 즐겼습니다.
주기 위해서
이 꼬마아이 때문에 조가 느꼈던 감동과 부끄러움을 함께 느낀 이가 저만은 아니겠지요? 조처럼 우리는 받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하고 할 수만 있다면 더 받으려 하고 왜 더 받지 못 하는가 불평하곤 합니다만 이 아이처럼 예수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큰 행복이라 가르치셨고 더 주려 하셨고 생명까지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행 20:35) …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 성탄절이 있다는 것도 큰 의미라 생각됩니다. 이 성탄절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깨닫고 구하여야 하는 것은 ‘올 한 해 나는 얼마나 많이 받았나’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주었나’여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가족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나누었나, 동료들에게 얼마나 많은 친절을 베풀었나, 이웃들에게 얼마나 많이 나누었나, 원수들에게 얼마나 많이 용서를 베풀었나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런 기준으로 올 한 해를 돌아본다면 올 해 여러분은 몇 점이나 되는지요? 시간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하루이틀이 모여 한달이 되고 한달두달이 모여 한해가 됩니다. 그리고 한해두해가 모여 인생이 됩니다. 인생이 긴 것 같지만 이렇게 돌아보는 한 해를 몇 십번만 반복하면 우리 인생이 끝납니다. 인생이 끝날 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평가하실 것입니다. 세상은 얼마나 많이 받았나로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얼마나 많이 주었나로 평가하십니다. 그 때 여러분은 몇 점이나 받을 자신이 있는지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더 기뻐하는 성도가 되기를 결심하는 이 성탄절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낮아지기 위해서
성탄절에 오신 주님의 모습은 그 자체로 메시지입니다. 지극히 높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귀한 보좌를 버리시고 서민들이 자는 여관에도 자리가 없어서 말구유에 누우신 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높고 존귀한 분으로 계시려 했다면 굳이 이 땅에 내려오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은 주님이 높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낮아지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낮아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최근 지인들이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SKY캐슬이란 드라마를 추천해 주어서 조금 봤습니다. 자녀들을 명문대학에 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SKY캐슬이라는 고급타운하우스의 상류층 주민들을 다룬 드라마인데 그들의 태도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혈통과 학력, 부와 명성에 자부심을 가지면서 반면 가난한 서민들을 멸시한다는 것인데 극중 인물들은 그 스카이캐슬에서의 풍요롭고 귀족적인 삶을 대물림하기 위해서는 자녀들도 최고명문대학에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대놓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의 허영 뒤에는 그 부귀와 풍요를 잃고 추락하면 어떻게 하나 라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낮아질까봐 두려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면 할수록 더욱 낮아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어른들을 위한 동화인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을 보면 애벌레의 탑 꼭대기까지 올라간 애벌레들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다른 애벌레들을 밀어 떨어뜨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다른 애벌레들을 떨어뜨리고 그 자리를 지키던 애벌레들 역시 얼마지나지않아 밑에서 올라온 또 다른 애벌레들에 의해 밀려 추락합니다. 높아지려는 자는 추락합니다. 낮아지려는 자는 높아집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그 어떤 이들의 말보다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주님 당신의 삶으로 이 진리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낮은 곳으로 내려오셔서 이 땅에서도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곳 십자가까지 내려가셨고 그 결과 지극히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빌 2:8)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이 성탄절에 지극히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신 주님을 본받아 더욱 낮고 겸손한 마음을 품고 섬기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살리기 위해서
주님은 이 땅에 오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죽어가는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둑은 마귀를 가리킵니다. 마귀는 생명을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합니다. 마귀의 역사를 우리는 매일 신문을 통해 봅니다. 살인과 폭력, 전쟁과 테러, 탐욕과 음란, 환경파괴와 자연재해 등으로 세상에는 죽음의 역사가 끊이질 않습니다. 그 와중에도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 세상과 역사와 문명을 지탱시켜오고 있습니다. 태양과 자연과 우주는 자연에 생명을 낳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사람들 안에 생명을 낳습니다. 예수님은 이 영적 전쟁의 한 가운데 죽음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생명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사용하신 방법은 당신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으로써 살아나시고 죽음으로써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또한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죽음으로서 세상을 살리라는 가르치셨습니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내가 죽으면 형제가 삽니다. 내가 죽으면 구역이 삽니다. 내가 죽으면 교회가 삽니다. 내가 죽으면 세상이 삽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죽은 우리를 살리십니다. 이것을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내가 살기 위해 살아가는 이들인가요, 세상을 살리기 위해 살아가는 이들인가요? 죽음으로 세상을 살리기 위해 이 성탄절에 오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죽기를 두려워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메시야와 헤롯왕
마 2:1-23 / 배영진 목사
오늘은 메시야와 헤롯왕에 대하여 설교하려고 합니다. 내일 모레 성탄절은 VIP들과 함께 성탄축제로 보내기 때문에, 저는 오늘을 성도끼리 드리는 성탄예배로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헤롯왕을 집중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는 메시야와 박사들을 살폈는데, 마태복음에서 동방박사와 헤롯왕은 양극단으로 완전히 대조됩니다. 메시야의 탄생을 알게된 박사들과 헤롯왕은 완전히 대조되는 두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예수께 경배가 목적입니다. 오늘 1절에 동방박사들은 페르시아의 점성가들입니다. 메시야 별을 발견하고 너무 놀라고 기뻐하고 태어나신 메시야께 경배하자. 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이 낙타타고 3개월 걸립니다. 헤롯왕은 그 아기를 죽여 없애라! 어떻게 하든지 그 아기를 죽여 없애려고 혈안이 됩니다. 영어성경에는 The child! 그 아기에게 경배하거나, 그 아기를 없애거나, 성탄, 예수님 탄생메시지는 둘 중 하나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2장 전체에서 헤롯왕이라는 단어가 아홉 번 나옵니다. 그만큼 성탄과 헤롯왕은 관련이 깊어요. 헤롯왕의 모습을 살펴보면 헤롯왕의 이미지는 매우 뚜렷합니다. 헤롯은 철저하게 ‘어두움의 세상주관자’의 이미지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헤롯은 메시야를 없애는 미션을 가진 세력입니다. 하나님 아들이 이땅에 태어났어? 그러면 죽여야지! 반드시 죽이겠어! 메시야의 싹을 자르자는 것입니다.
3절 보면 헤롯왕이 당황했다고 나옵니다. 왜 당황했는가? 메시야의 탄생소식을 들어요. 갑자기 페르시아에서 박사들이 헤롯궁전에 도착했고, 우리는 ‘유대인의 왕’이 태어나신 것을 알고 왔다고 하면서, 그 분이 지금 어디 계십니까? 이 말을 듣고 헤롯이 당황해요. 헤롯왕은 다윗의 자손이 아닙니다. 에돔출신입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이죠. 왕권에 대한 정통성이 없어요. 헤롯은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으로 정치적으로 혼란한 것을 틈타서 로마황제에게 아첨하여 분봉왕이라는 직함을 얻습니다. 다윗자손도 아니어서, 정통성이 없는 왕인데 술수가 많고 꾀가 많아요. 아첨과 술수와 줄타기로 왕이 됩니다. 그래서 그가 한 일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줍니다. 그게 헤롯성전입니다. 구약시대 솔로몬성전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망하고 불탔죠. 70년 바벨론포로에서 돌아온 후 학개선지자가 나와서 이스라엘이 힘을 모아 두번째 성전을 지었는데 좀 작고 초라했죠. 그래서 헤롯이 왕이 되자마자, 이스라엘에 환심을 얻기 위해 성전건축에 힘을 쏟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주 안좋은 소식을 들은 겁니다. 다윗의 자손 메시야가 태어난 거예요. 페르시아의 점성가들이 머나먼 길을 여행하여 헤롯궁전까지 와서 이 소식 들은 거예요. 당황합니다. 3절, 헤롯이 대제사장, 율법교사들, 성경전문가들을 다 궁전에 부릅니다. 메시야가 어디에서 태어나느냐? 성경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다 알아요. 베들레헴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기 대제사장 율법교사 이들 중, 아기 경배하러 간 사람이 없어요. 우리가 여기서 놀라워해야 하는 것은 아무나 아기예수의 탄생을 보고 경배하지 않아요. 우리가 오늘 성탄예배를 드리며, 이땅에 오신 예수님을 경배하게 된 것이 기적입니다. 성경에 정통한 자들이 메시야 탄생소식에 맨먼저 달려갈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를 해보면 알아요. 조금만 설득하고 섬겨주면 나처럼 예수님 믿을 것 같이 보여도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대제사장, 율법교사들, 메시야의 탄생소식을 듣고, 거기가 베들레헴인 것을 다 알아도, 경배하러 아무도 안갑니다. 여러분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난 도대체 어떻게 예수님 믿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오늘 성탄메시지에 반응이 둘중 하나입니다. 그분을 예배하든지, 아기를 죽여 없애든지! 그 아기에게 경배하라, 아니면, 그 아기를 없애버리라! 7절, 헤롯을 잘 보세요. 헤롯은 박사들에게 아주 호기심이 많습니다. 별이 언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자세히 묻습니다. 박사들이 대답합니다. 우리가 페르시아에서 별을 관측했는데 그 별은 메시야의 별이고, 우리가 모두 결정을 했습니다. 저 별을 따라서 가보자. 그 아기에게 경배를 하러 가자!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대답합니다. 8절 보세요. 헤롯이 말합니다. 가서 아기를 샅샅이 찾아보고 찾으면 내게 알려달라. 그 다음 뭐라고 해요? 나도 그 아기에게 경배하겠다! 경배했나요? 아닙니다.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여러분, 아무나 성탄절에 경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 모레 성탄축제에 우리가 VIP를 초대합니다. 그분들이 반응하여 온다면 자기 뜻대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지 아니하시면 그 성탄축제 못옵니다.
13절을 보면, 헤롯은 그때부터 뭘 준비했는가? 특수부대를 불러 작전명령을 발동합니다.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태어났다는 그 소식을 들었어요. 그것이 굿 뉴스, 복음이었어요. 복음을 듣고, 성탄메시지 소식을 듣고 뭘 해요? 명령을 내립니다. 아기를 찾아 죽이라! 9절부터 장면을 살펴보면, 크게 대조적 장면이 나옵니다.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갑니다. 별의 인도를 받으며 집에 도착하니 너무 기뻐합니다. 아기가 있는 집으로 들어갑니다. 모두가 엎드려 경배합니다. 페르시아에서 베들레헴까지 3개월에 걸쳐서 목적은 한가지, 그 아기에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보물상자를 꺼내어 귀한 예물을 아기 예수께 드립니다. 그 시간 헤롯은 뭘 합니까? 특수부대를 보내요. 군사들이 베들레헴에 속속 도착합니다. 아기를 찾아 죽이라! 13절, 하나님의 천사가 요셉과 마리아에게 급히 나타나 말합니다. 지금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한다! 이집트로 피하라! 그날 밤 요셉과 마리아가 급히 아기를 품고 이집트로 도피합니다. 16절을 봅니다. 베들레헴에서 두 살 미만의 아기들! 아기들을 다 찾아냅니다. 아기들을 다 죽입니다. 베들레헴 대규모 영아학살 사건입니다! 베들레헴에 피비린내가 나는 밤, 아기 엄마들이 크게 통곡하는 소리, 애곡하는 소리가 멀리멀리 퍼졌다고 했습니다. 잃은 어미들이 위로받기를 거절했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예언의 성취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동시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 그 아기를 찾아 경배하거나, 아기를 찾아 없애거나! 이것이 2천년 전에만 있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늘도 똑같습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어떤 부류는 성탄절에 예수께 경배합니다. 어떤 부류는 아기 예수를 성탄절에 없앱니다. 오늘 장면은 구약 출애굽역사에 유사하게 나오고 신약 요한계시록도 유사하게 나옵니다. 출애굽기 1장을 보면 바로왕이 모세를 죽이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의 출생은 이스라엘의 구원자의 탄생입니다. 그때 바로왕이 히브리인 태어난 남자아기는 반드시 죽이라, 영아학살명령입니다. 바로왕이 히브리 산파들에게 명령합니다. 남자아기를 받으면 즉시 나일강에 던져라! 그런데 하나님이 아기 모세를 살리십니다. 기가막히게 구원하십니다. 모세 어머니 요게벳이 아기모세를 나일강 갈대상자에 띄워요. 그렇게 해서 살아납니다. 그때 많은 히브리 아기들이 나일강에 던져져 살해당합니다.
신약 요한계시록은 어떤가? 흑암의 세력이 메시야 아기를 죽이려는 공격이 기록됩니다. 계시록 12장, 사도요한의 눈에 그 아기 탄생을 둘러싸고 하늘에 큰 싸인이 나타납니다. 한 여자가 아기를 낳는 모습이 나오는데 거기 거대한 붉은 용이 그 아기를 기다립니다.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 개 달린 붉은 용은 사단을 상징합니다. 여자가 아기를 해산하면 삼켜버리려고 기다려요. 마침내 한 아기가 태어나고 그 아기는 ‘장차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고 되어있습니다. 아기낳은 여자가 붉은 용의 공격을 대비하여 광야로 피합니다. 광야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이 거이 있어요. 거기서 아기를 양육하며 때를 기다립니다. 이것이 오늘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이집트로 피하여 헤롯이 죽을 때까지 때를 기다리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때 사도요한은 하늘에 큰 전쟁이 터졌다 그래요. 하늘에 미카엘 천군사령관과 붉은 용이 크게 싸웁니다. 그러다 붉은 용이 패배합니다. 사도요한은 그 붉은 용이 미카엘에게 패하여 하늘에서 쫒겨나 떨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붉은 용의 이름을 사단이라 했는데 붉은 용은 옛 뱀이라고도 하고, 마귀라고도 합니다. 여러분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우주적 영적 전쟁입니다. 이 땅에 메시야가 탄생할 때 얼마나 엄청난 영적싸움이 있었는가 말합니다. 태어난 사단이 죽이려 하고, 광야로 피신하고, 군사들이 출동하고, 하나님이 아기를 보호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마어마한 하늘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군대가 마침내 사단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하는 장면입니다. 이것이 메시야의 탄생과 관련하여 엄청나게 벌어지는 하늘의 영적 전쟁입니다. 사단은 아기 예수를 없애려고 혈안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 아기를 보호해주십니다. 천군 미카엘이 사단의 공격을 마주하여 싸웁니다.
우리 주님이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뭐라고 하셨는가? 지옥의 문이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 마귀의 목표는 딱 하나! 오늘 헤롯왕이 아기예수를 꼭 찾으려는 목표도 딱 하나입니다. 예수를 죽이라, 예수를 없애라! 이것이 사단의 음모인 것입니다. 예수를 너희 삶의 중심에서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아마 2천년 역사중에 오늘날 21세기 들어 마귀가 아주 엄청나게 활동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들어 성탄절 이 축제 시즌의 중심은 예수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탄절 이미지는 요즘 청년들은 달콤한 연애, 그리고 성탄절은 송년회, 선물, 파티, 아이들은 산타클로스, 어떻게든지 마귀의 세력은 성탄의 중심이 예수가 아니게 합니다. 예수가 중심이 아니면 뭐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오늘날도 사단의 세력, 흑암의 세력의 목표는 한가지로 집약됩니다. 성탄절에 주인공 예수를 없애라! 헤롯의 명령입니다. 성탄절에 예수가 주인공이 되자. 예수님의 탄생은 곧 우리를 위한 대속이 목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그것이 복음이죠. 그런데 마귀의 음모는 뭡니까? 예수믿는 신자라도, 그 중심에 예수를 없애는 것입니다. 마귀는 본래 사람들이 예수를 못믿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런데 혹시 믿어버리면, 포기하는가?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가 신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예수가 없게 합니다. 그래서 그 믿음이 게을러지고 영적으로 나태하게 만들려고 마귀는 엄청 일합니다. 그가 비록 예배를 드리는 신자가 되어도, 그 예배의 중심이 예수님, 십자가가 아니도록 만들어버립니다. 메시야 예수를 네 삶에서 제거하라! 이것이 헤롯왕이 내린 명령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예수가 그 사람 중심에 있지 않도록, 예수가 그 성도 삶의 변두리에 있게 하면 성공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예수가 중심이 아닌 삶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을 보세요. 동방박사들이 메시야를 만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오지않습니다.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 주님의 천사가 박사들에게 나타나 박사들에게 지시를 합니다. 박사들이 깨달았습니다. 아 헤롯은 아주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여러분 사단은 광명의 천사같이 자기를 위장합니다. 마귀가 지금도 우리에게 와서 속삭이는 것은 뭐냐? 나도 예수께 경배하겠노라고 해요. 하지만 여러분 마귀가 예수님께 경배할 리가 없어요. 박사들이 주님의 지시를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아요. 자기나라로 돌아갑니다. 16절, 헤롯이 이 소식을 보고받고 화를 냅니다. 왜 분노했을까요? 정확하게 학살타겟을 알려고 했어요. 헤롯은 정확하게 그 장소를 알아 군사를 풀어 아기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박사들이 돌아가버려서 그 마귀의 음모, 사단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거예요.
오늘 이 본문에 나타난 사건,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의 스토리는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창세기 3장 15절에 약속하셨던 그 메시야, 그 여자의 후손이 이제 태어났는데 이 성탄 메시지를 대할 때, 두 가지의 반응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할 것인가? 제거할 것인가? 오늘 동방박사와 목자들은, 아기예수를 경배하고 별의 인도를 보고 정말 기뻐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내 삶에 오심을 영접하고, 그분이 내 삶에 중심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헤롯은 그 반대입니다. 어찌하든지 성탄, 태어난 그 아기 예수를 죽여 없애버려야 한다! 예수님이 활동하실 때도,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어찌하든지 예수를 없애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무력화시키고, 복음이 중심이 되지못하게 하려는 시도가 엄청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나를 보세요. 천사들을 얼마나 긴급히 보내시는지를 보세요. 하나님의 천사 멧신저는 가브리엘입니다. 본래 엔젤, 앙겔로스는 전령입니다. 맨 처음 마리아에게 보내셔서, 네가 아기를 잉태했다, 그 아기 이름은 임마누엘로 하라! 요셉에게 가브리엘 보내셔서, 네 아내 마리아가 잉태했다, 네 아내를 반드시 데려와라! 별을 보내셔서 동방박사들에게 경배하러 오게 하십니다. 별을 아기가 태어난 집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박사들에게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일러주십니다. 요셉과 마리아에게 천사 보내서, 지금 헤롯이 아기를 죽이려하니, 이집트로 피신하라! 고 하십니다. 절대 그 아기를 헤롯의 손에 붙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19절, 헤롯이 죽은 뒤에 천사를 보내셔서 이제 돌아가라, 아기를 죽이려는 자들이 죽었다! 하나님 정말 바쁘십니다. 왜 이렇게 많이 일하실까요?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메시야 예수를 살려내야 하니까요. 그래야 복음, 굿뉴스가 마련되는 것이죠. 왜 이렇게 일하실까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 십자가와 부활, 복음을 듣고 대속을 믿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어요. 하나님은 그 일을 쉬지 않고 하십니다. 절대 헤롯의 손에 아기예수를 붙이지 않습니다.
오늘 성탄을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두 부류로 딱 나뉠 것입니다. 성탄의 주인공이 예수님인 사람들, 그들은 기쁨으로 성탄을 경배하는 박사들 편입니다. 성탄의 주인공이 예수가 아닌 사람들, 예수를 성탄에서 배제시키는 헤롯왕의 편입니다. 지금도 헤롯의 후예들은, 계속해서 예수의 이름을 없애려 합니다. 예수그리스도, 그 이름을 사람들의 삶중심에서 제끼려고 합니다. 마귀는 너무나 열심히 이 일에 성공합니다. 예수는 점점 삶의 뒤켠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가? 예수님께 경배합니다. 내 삶의 중심으로 모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예배, 내 삶의 중심이 되시게 해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처럼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아기예수께 반드시 경배하겠다는 믿음이 귀합니다.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내 삶에 중심을 차지하시도록 경배하는 것, 이것이 성탄의 참된 의미입니다.
동방에서 베들레헴까지
마 2:1-12 / 이동주 목사
오늘 본문 말씀 중에는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날 밤에 머나먼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를 하며 가지고 온 예물을 드리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간 주시할 것은 그들이 가지고 와서 아기 예수님께 드린 황금과 유향과 몰약도 중요하지만 그 박사들의 국적과 출발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박사들이 출발한 곳은 성경에 동방이라고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동방은 파사 나라입니다. 파사는 페르시아라고도 불렸으며 오늘날에는「이란」을 가리킵니다.
페르시아 즉 파사 제국은 이스라엘 유다 민족이 바벨론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갔다가 70년이 되어서 돌아올 때에 4개월이나 걸려서 돌아온 아주 먼 거리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동방박사들이 출발하여 베들레헴까지 오기에는 아주 먼 거리이며 그들이 약대를 타고 왔다 할지라도 적어도 2개월 이상은 걸렸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2개월 이상 별을 보면서 찾아가는 길이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별은 낮에는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밤에만 길을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시간에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온 그들의 여정을 살펴보면서 그들의 여정이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님을 찾아가는 신앙의 여정이라고 믿고 우리들이 예수님을 찾아가는 새로운 희망과 신앙생활의 지표를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1. 먼저 동방박사 그들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시대의 운명을 연구하는 천문학자들입니다. 그들은 누구의 명령에 의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어떤 영달이나 명예를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진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잠들고 온 세상의 삼라만상이 모두 잠든 밤에 그들은 자신들이 해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탄생하시기 전 적어도 수개월 전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동방의 박사들에게 한 별을 통하여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날 밤 들에서 양을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군 천사를 통하여 구주의 탄생을 처음으로 알려 준 사건을 통하여 무엇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까?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유다의 총독 가이사 아구스도가 명령을 내려서 모든 유대인들이 호적을 하려고 고향을 찾아가고 이때를 놓칠세라 돈 벌기에 혈안이 된 장사꾼들의 아우성 소리로 가득 찬 베들레헴에 아기 예수가 탄생된 것을 하나님은 목자들에게 알려주시고 수개월 전에 동방의 박사들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들의 처지나 환경이 어렵고 고달파도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예수님을 찾아온 박사들은 처음에 이상한 별을 발견하였을 때에 그 별은 곧 새로운 큰 왕의 탄생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믿고서 그 왕을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차음에 4명의 박사들이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캐츠피, 밀초어, 팔다사, 그리고 알타반 이와 같이 4명의 박사들이 출발을 하였으나 알타반 박사는 도중에서 일행과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 일행을 찾아 아무리 헤매어도 찾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예수님을 찾아 헤매다가 30년이란 세월이 훨씬 지나서 겨우 예수님을 찾았는데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현장에서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내용을「벤허」라는 영화를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2. 박사들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믿음에 모험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일생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별을 보며 정말 새로운 왕이 탄생된 곳이 어디인지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또 그들의 신념대로 정말 새로운 막강한 왕이 태어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찾아 나서기는 하였어도 어디까지 가야 하며, 또 자기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대로 모험을 강행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 성도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새로운 믿음의 세계에 대한 도전과 모험을 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그 자체가 미지의 세계입니다.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이 바로 믿음입니다. 신앙생활은 안일 무사하면 안 됩니다. 어제가 그랬으니 오늘도 그렇고, 작년에 그랬으니 금년도 그렇고, 금년에 그랬으니 내년도 그렇게 지낸다면 이것은 죄악입니다.
죄악 중에 가장 큰 죄악은 "될 대로 돼라" 고 하는 자포자기와 안일무사주의적 사고방식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도전하고 끊임없이 모험하는 그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의 이와 같은 믿음을 오늘의 우리들은 본받아야 합니다.
3. 그들은 어둠을 헤치고 갔습니다.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은 로마의 제국 하에서 탄압과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시대였습니다.
(1)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시대가 소망은 보이지 않고 낙망과 절망의 어두움의 시대였습니다.
(2)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부패하고 타락한 어두움의 시대였습니다.
메시아의 탄생에 대하여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하여 당시의 율법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될 것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믿음은 어두움의 세상이었습니다. 선지자의 예언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먼길을 걸어 찾아온 박사들의 방문을 받고서야 그들은 충격적으로 메시아의 탄생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3) 박사들은 동방에서부터 유대나라까지 인도한 별을 밤에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밤에만 어둠을 헤치고 걸었던 것입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그리고 골짜기를 지나서, 사막을 횡단하며 국경을 통과하는 여행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도둑들의 위험도 있고 맹수들의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박사들은 시대적인 어두움도, 종교적인 어두움도, 자연적인 어두움도, 그들의 불타는 열정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앞이 캄캄합니까? 소망과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캄캄한 밤과 같습니까? 그 어두움을 헤치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과 모험적인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의 정치적 어두움을 헤치고, 종교적인 어두움도 헤쳐 나갈 때에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아 멘>
4. 그들에게도 실수가 있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갔다가 고난을 당한 것처럼 동방에서부터 온 박사들은 헤롯이 있는 예루살렘 왕궁을 찾아간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왕이 태어나면 당연히 왕손의 혈통을 통해서 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수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른 것입니다.
(사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만 자기들의 기준에 맞춰서 생각하고 결정을 합니다. 이와 같이 박사들의 판단 착오로 실수로 인하여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는 두 살 아래의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학살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실수가 이와 같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5. 박사들이 바른 길을 다시 찾았을 때 잃어버렸던 별이 다시 나타나서 그들의 길을 인도해 주었습니다.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피조물은 아무도 자신할 수가 없고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실수를 깨닫고 돌이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윗이 어떻게 해서 전무후무한 성군이란 칭호를 얻고 하나님이 이르시기를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행 13:22) 고 했겠습니까? 그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실수를, 죄악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시 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박사들은 헤롯 왕궁으로 갔다가 다시 나왔을 때 그들을 동방에서부터 인도해온 별이 다시 나타나서 베들레헴으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할렐루야!!>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길을 버리고 세상길로 가고 세상의 권세와 명예와 부귀에 이끌려 잘못 갔다가도 돌이켜 회개하면 하나님은 다시 인도해 주시고 축복해 주심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6. 드디어 아기 예수를 만난 박사들은 경배하며 가지고 온 예물을 드렸습니다.
우리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하나님께 경배하며 예물 드려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예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극치입니다. 믿음 생활의 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와 감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입니다. 예배 없는 신앙이 있을 수 없고 감사 없는 신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모이기를 힘쓰며 하나님께 감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행 2장의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항상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며 떡을 떼며, 하나님을 찬미하며 감사의 생활을 하였습니다.(행 2:46)
우리의 구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즉 죽음이 내 앞에 닥치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핑계로도, 그 어떤 말로도, 합리화시킬 수 없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게을리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이것만이 올바른 신앙이며 믿음의 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에게 눈물로 부탁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배는 생명과 바꾸면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일제 치하에서 우리의 성도들이 신사 참배를 반대하며 목숨 걸고 예배를 지켰습니다. 또 공산치하에서도 예배를 지키다가 순교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소한 일에도 값없이 이 예배를 팔아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나라 마니교도들인 박사들도 몇 달을 걸어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경배하였는데 오늘의 우리들은 너무나 좋은 환경과 좋은 여건 속에서도 제대로 하나님께 경배의 제단을 쌓지 못한다면 어찌하겠습니까?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최대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삼상 2:30)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시 122: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고 하였습니다.
7. 박사들은 예수님께 경배를 한다음 천사의 지시를 따라 헤롯에게 가지 않고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마 2:12)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천사의 지시는 곧 하나님의 지시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꿈에 천사가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을 통하여 본국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곳에는 가지도 말고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하나님의 계명에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시 1:1-2)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앞에 두 가지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요, 또 하나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는 길은 좁은 길이요, 고난과 역경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반드시 가야 하는 길입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오늘 이 시간 우리가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은 바사 나라의 동방박사들이 오직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 어려운 여정을 감수한 결과 그들은 온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 이 땅에 탄생하신 메시아를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의 우리들도 신앙생활이 아무리 어렵고, 내가 가는 길이 힘들고 괴롭다고 하여도 참고 견디면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앞으로 전진하는 믿음으로 힘쓰고 노력한다면, 분명히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 멘>
베들레헴에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에 울려 퍼지던 천군 천사들의 청아한 합창소리가,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날에 천사장의 나팔소리로 다시 울려 퍼지게 될 것입니다. 그날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날입니다. 그날까지 오직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성탄절에 대한 네 가지 반응
마태복음 2:1-11 / 안창국 목사
I Wish your merry Christmas~. Merry Christmas!!
울면 안돼. 울면 안돼. 산타할아버지가 우는 애들엔~.
요즘에는 거리에 나가보면 여기저기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장식되어 있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물론 요즘엔 인터넷 카드로 보내는 경우도 많이 있기 때문에 실제 우체국을 통해서 보내지는 카드는 많이 줄어들었습니다만 그래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분주하긴 여전합니다. 하긴 옛날에 비해서는 비교적 차분한 듯 합니다만 그래도 성탄절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선물을 할 것인지, 무슨 선물을 받게 될 것인지 마음이 설레이고 괜히 크리스마스 이브 때에는 어떻게 하면 근사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시즌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어떤 선물을 준비하셨는지요? 또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내려고 계획하고 준비하고 있는지요?
아무튼 크리스마스 시즌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든, 다니지 않는 사람이든 연말연시(年末年始)와 연결되어 마음이 들뜨고 나름대로 근사하게 보내려고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백화점이나 거리의 상점들, 그리고 음식점들도 크리스마스로 한껏 분위기를 돋우고 있고 인터넷 사이트를 둘러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여기저기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를 엿보게 되면서 어쩌면 오늘날에는 크리스마스의 참된 의미가 상실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입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죄에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날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날로 크리스마스를 지키게 된 것입니다. 사실 크리스마스라는 말 자체도 Christ라는 말과 Mas라는 말이 합성된 말입니다. Christ는 그리스도, 즉 인류를 쥐에서 구원할 메시아를 의미하는 헬라어 크리스토스(Cristo,j)라는 말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Mas는 라틴어의 Mass에서 나온 말인데 이 mass라는 말은 경배, 예배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흔히 카톨릭에서 사용하는 “미사”라는 말도 이 mass에서 나온 말이지요. 다시 말하면 Christmas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고 예배하는 날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가끔 크리스마스 시즌을 지날 때마다 어린 아기들의 돌잔치가 생각납니다. 보통 돌잔치를 하면 사실은 그날 첫 생일을 맞이한 아기가 주인공인데 처음 사진을 찍을 때에만 아기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 이후에는 잔치 상의 음식을 먹느라 아기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이 저희들끼리 즐기고 놀다가 잔치가 끝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사실 돌잔치의 아기는 그 날이 더 피곤할 것입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마치 그러한 돌잔치 같다는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예수님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어디론지 사라져버리고, 예수님께는 관심이 없고 저희들끼리 선물을 주고받고, 카드를 주고받고, 저희들끼리 그 분위기에 취해서 크리스마스 시즌을 흥청망청 보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보내는 크리스마스의 현실입니다.
오늘 읽어 드린 성경본문은 초창기 크리스마스의 모습을 잘 스케치하고 있는 장면 중의 하나입니다. 그 유명한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와서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는 장면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성경의 본문에는 동방박사들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요. 여러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한 아기가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접한 여러 사람들의 반응은 서로 상당히 다른 것을 살펴 볼 수가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헤롯 왕의 반응입니다.
그 당시 유대를 다스리고 있었던 헤롯 왕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로부터 뜻하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탄생했다는 소식입니다. 궁궐 안에서는 아기가 태어나지 않았는데 유대인의 왕이 탄생했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현재 자신이 유대의 왕인데 자기도 모르는 새로운 왕이 탄생했다니 당연히 긴장하게 되었지요. 물론 헤롯은 그러한 속마음은 감춘 채로 8절에 보면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가로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12절과 16절을 보면 헤롯의 속마음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왕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인생의 계획도 스스로 세우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컨트롤(control)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지배받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헤롯이 왕으로서 다른 왕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들은 나 외에 다른 것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 외에는 자기 위에 다른 권위를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만이 자기의 왕입니다. 자기의 조종자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자기의 인생의 계획을 스스로 세우고 있지요? 청소년들은 어떤 대학, 무슨 과에 갈 것인지, 또 젊은이들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 어떤 사람과 데이트를 하고 결혼을 할 것인지, 결혼한 사람들은 아이는 몇을 낳을 것인지, 자녀교육을 어떻게 시킬 것인지, 돈을 어떻게 벌고 관리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인생을 살 것인지… 등의 모든 계획을 스스로 결정합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의 왕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나 외에 나를 다스리고 간섭할 다른 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이라고 부릅니다. 그것도 왕 중의 왕(King of Kings)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예수님을 만주의 주(Lord of Lords)라고 부릅니다. 가장 높은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참다운 주인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예수님을 자주 주님이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 외에 다른 것을 왕으로 삼지 않으려는 우리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철저하게 배척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상당한 적대감을 나타냅니다. 그런 절기는 없어야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이라는 것에 대해서 심한 반감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철저한 반기독교적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헤롯왕이 나타낸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매우 적대적이고, 반감을 가진 반응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메시아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죽여서 없애려고 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 두 번째는 일반적인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에 계시는지에 대하여 묻는 동방의 박사들의 질문을 듣고 예루살렘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3절을 볼까요?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은 소동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큰 소동이 났습니다. “아니, 왕이 탄생하셨다고?”하며 온통 난리였습니다. 소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가면서 시끌벅적했을 것입니다. “왕이 탄생하셨대”하며 한창 시끄럽게들 반응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호외도 뿌려졌겠지요. 9시 뉴스의 톱뉴스로 등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의 반응이 없습니다. 그저 한때의 소동으로 끝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이 어디인지 몰라서도 아니었습니다. 5절, 6절을 보니까 서기관들에 의해 아기 예수님이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동안 뜨겁게 반응했지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예루살렘 백성들의 모습은 오늘날의 사회와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요즘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어 얼마나 요란합니까? 크리스마스 캐럴에, 카드에, 선물에 온통 크리스마스 특수를 맞이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연말연시만 되면 한번씩 큰 소동이 일어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소란스럽기만 했지 대부분 아기 예수님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경배하지 않습니다. 그저 저희들끼리 즐기고 분위기 내는 것뿐입니다.
3. 세 번째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반응입니다.
동방박사의 방문에 당황한 헤롯 왕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메시아가 어디서 나올 것이라고 예언되었는지 묻습니다. 4절부터 6절을 볼까요? “왕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헤롯 왕의 질문에 구약성경 미가서 5장 2절의 말씀을 통해 유대 땅 베들레헴에 메시아가 탄생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내었습니다. 대제사장이라면 당시의 유대교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서기관들은 일종의 성경학자들입니다. 모두다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식적으로는 완벽했습니다. 그런데 역시 그 이상은 그 어느 것도 없습니다. 사실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메시아의 탄생을 듣고 그 탄생한 곳이 어디인 줄 알았다면 신속하게 그곳으로 달려갔어야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성경을 통해 예언된 메시아를 손꼽아 기다려왔던 자들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달려가지도, 그리고 예수님께 경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지식이 지식으로만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그러한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해박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의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탄절이 바로 그러한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아마 그러한 문제가 성경퀴즈 문제로 나온다면 거의 대부분이 정답을 맞힐 것입니다.
그런데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잘 다니는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습니다. 알기는 잘 알지만 그것이 자신의 삶으로 부딪히지는 않습니다. 그저 머릿속의 지식으로만 끝납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님께 경배하고 자신을 드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 다니는 청소년과 청년들도 크리스마스에 같은 젊은이들끼리 어울려 all night을 하면서 선물교환하고, 캐럴을 부르고, 재미있는 게임을 하고, 새벽에 새벽송을 도는 것으로 크리스마스 행사를 치릅니다. 그리고 정작 성탄절 아침 성탄축하예배 때에는 꾸벅꾸벅 좁니다. 서로는 선물교환을 하지만 정작 예수님께는 그 어느 것도 드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진정으로 축하하고 기뻐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생신을 빙자한 저희들끼리의 축제일 따름입니다. 혹시 우리의 모습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4.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동방박사들의 반응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아마 페르시아 지역에서 별을 연구하는 점성술가들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동방박사 세 사람이라고 말하는 데 성경에서는 정확한 인원수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라고만 소개되어 있습니다. 아마 그들이 예수님께 드린 예물이 세 가지이기 때문에 세 명일 것이라는 짐작을 할뿐입니다. 어쨌거나 이들은 별을 연구하다가 유독 한 별을 보고 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유대 땅에 범상치 않은 인물이 태어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인물은 단순한 인물이 아님을 깨닫고 그들은 여행을 준비합니다. 별을 따라서 이동을 합니다. 그리고 유대 땅까지 옵니다. 왕이 태어났으니 당연히 궁궐에서 찾는 것이 쉽겠다 싶어서 헤롯의 궁궐로 찾아 갑니다. 그리고 궁궐에 들어가 묻습니다. 2절을 볼까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은 목적을 “그에게 경배하러 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조언을 듣고 곧바로 베들레헴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乳香)과 몰약(沒藥)을 예물로 드립니다. 이 세 가지 예물은 당시의 풍습으로는 왕에게 드리는 예물이었습니다. 황금은 고귀함을 의미하여 왕으로의 고귀한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고, 유향은 아라비아 지방의 관목에서 채취된 향기로운 송진으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의미합니다. 몰약은 시체를 염하거나 마취제로 쓰이는 것으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온전히 아기 예수님께만 그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헤롯의 말을 듣기보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나아올 때에도 별을 따라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고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순종하여 돌아갔습니다. 12절에 보면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동방박사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우리의 반응은 바로 이러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이 땅의 왕으로 오신, 그리고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육신을 입으시고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날은 무척 기쁜 날입니다. 이 날은 기뻐해야 합니다. 함께 즐겨야 합니다. 잔치를 벌여야 합니다. 서로 축하 인사를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오셨듯이,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께 귀한 선물을 드리듯이 친구들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선물을 나누어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고 함께 기뻐하며 축하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진정한 의미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크리스마스는 아기 예수님의 생신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인공이신 아기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기 예수님께 축하 인사를 드려야 하고, 경배를 드려야 하고, 예수님을 높여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노래해야 합니다. “Happy birthday to you~. dear Jesus Christ~.”
자, 이제 우리가 기다리던 크리스마스가 되었습니다. 이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준비하고 맞이하시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펴본 네 부류의 사람들 중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 사람으로 이번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있습니까? 부디 동방박사들처럼 예수님께 경배하며, 예배하며, 예수님께 축하를 드리는,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삼는 크리스마스 절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도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면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절기를 함께 보내면서 참된 의미의 크리스마스 절기를 지내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자, 우리 옆에 있는 분들께 인사를 할까요? “Merry Christmas!!” 여러분들도 기쁜 성탄과 복된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2000여년 전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독생자 아기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이제 그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주님 탄생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절기가 되었는데 이번 크리스마스는 예수님께 진정으로 경배하는 크리스마스 절기가 되게 하옵시고, 그래서 참된 의미의 크리스마스로 보내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보고 이 땅의 참된 평화와 기쁨으로 오신 예수님의 참 사랑을 경험함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는 크리스마스 절기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모든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새로운 성탄절
마 2:1-11 / 고흥식 목사
성탄절이 되면 사람들이 다 기뻐합니다. 그래서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즐거워합니까? 그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어떤 죄인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형수로 결정 났습니다. 그가 죽는 날 밧줄이 목에 걸려져 마지막 초읽기에 들어 갔습니다. 단 몇 초 후면 집행되는 순간에 멀리서 말 발굽 소리가 들립니다. “사형을 중지하라”고 외치면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죄인을 무죄 석방시키라는 왕의 친서를 가지고 사형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이 죄수는 풀려났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상상못할 일입니까? 이처럼 우리 모든 인류는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의 사면장” 을 가지고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죽음에서 살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도 죄송한 것은 그와 같이 사면장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있을 곳이 없어서 육축들이 거하는 말구유에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좋은 방, 따뜻하고 편안한 방은 다 누군가가 쓰고 있어서 예수님께는 드릴 방이 없었습니다. 사실 성탄절은 우리에게는 큰 기쁨이지만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는 매우 슬픈 날입니다. 왜냐하면 독생성자를 최후에 우리에게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내어 놓는 날이 바로 오늘 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돈 많고 권세 있는 사람들이 누추하게 태어났습니까? 그렇게 태어 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선 이 땅에 많은 선지자와 예언자를 보내셨지만 사람들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최후로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 권세있는 분이 낮고 낮은 마구간에 태어 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맞이 할수 있습니까? 우리의 심령이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깨끗한 마구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내 생애의 새로운 성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시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날은 온 세계가 다 정신 없이 바쁜 날이 되었습니다. 첫째 천사들은 이 메시지를 전하기에 바빴고, 하늘의 별들이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지역에 양치는 목자들이 구유에 놓인 예수를 보기 위하여 지금 오고 있습니다. 그때에 하늘은 바라보고 있었던 천문학자들이 별을 연구하다가 특별한 별을 발견하고 그 별의 주인공을 찾아서 예루살렘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왜 이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오게 되었을까요 ? 그 정답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1. 별을 보고 찾아오다(2)
별을 본것입니다. 별은 많은 사람이 다 볼수 있건만 , 특별히 그의 눈에 저 동방박사들의 눈에 그 별이 정확하게 보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시를 바로 알수 있는 사람 하나님은 누구나가 다 알수 있도록 하셨건만 그 계시를 볼수 있는 눈은 한정된 사람만 볼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 계시를 보여 주었을까요?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라고 보여 주신 것입니다. 박시들은 왕으로 나신 이에게 경배하기 위해 수 천리 멀리 떨어진 메스포타미아 지역에서 이 별을 보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을 유대인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거리 불문이고, 하나님의 은혜는 시간 불문 입니다. 오랜 시간을 걸려 왔어도 오히려 가까운 시간 짧은거리에 있었던 사람과 비교 할수 없는 사랑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은혜가 동방의 박사들이 사모 했던 그런 모습처럼 우리 속에 임하길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의 별 ”을 보고 왔다고 하였습니다.(1) 별을 보고 그 별의 메시지를 받고 싶어서 별을 따라 온것입니다. 별을 본 사람은 많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별을 따라온 사람은 소수 였습니다. 이 별은 하나의 메시지의 그림자 입니다. 별은 본질은 무었입니까? 주님이십니다. 본질을 찾아서 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나보고 싶어서 왔고, 별의 메시지를 듣고 싶어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사막을 지나 유프테스, 티그리스강을 건너 강도의 위험, 추위와 더위 등의 위험을 뚫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온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에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무슨일을 하시겠습니까? 어려움을 극복하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성탄 될줄 믿습니다.
“유대인으로 나신이가 어디있느뇨”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묻는 사람마다 아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에 실망할수 있겠습니까? 수천리를 왔는데 아무도 왕이 나신 소식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신앙 생활은 사람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해야합니다. 많은 사람이 메시아를 외면 할수 있습니다. 시대와 역사를 초월해서 예수님을 시원찮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인생 전존재를 걸고 주님을 찾는 자세가 귀한 것입니다.
2. 아기보고 경배하다(11)
메시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때 동시에 지시해준 별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성탄절이 되면 별들은 나타납니다. 별들은 많지만 주님 앞에 가면 별들은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만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번 성탄절에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성탄의 본질인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기를 보고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하였습니다. 이 성탄절에 우리가 봐야 할 것을 아기 예수님입니다. 만약 주님을 보지 못하고 크리스마스 트리의 별만 본다면 슬픈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을 바라보는 귀한 성탄절 되시길 축원합니다.
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경배 했습니다.(11). 우리가 경배해야할 대상은 이 만물에 있는 금과 은과 각종피조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합니다.(눅4:8) 우리는 많은 사람들 존경합니다. 위인들과 이땅에 존경 받을 만한 정치가도 있고 철학가도 있습니다. 여러 아주 유명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존경받을 만한 대상은 되지만 경배 받을 만한 대상은 안됩니다. 우리가 경배해야 할 대상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크리스 마스는 christ 와mass의 합성어 입니다. 영국의 고어로 본다면 cristes maesse로 그리스도만을 예배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이 말의 의미처럼 이번 성탄절에는 오직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귀한 절기가 되길 축원합니다.
3. 예물드려 경배하다(11)
보배합을 열고 황금,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신학적으로 깊이 연구를 안해도 황금은 그 당시 아주 소중한 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향과 몰약을 향유로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 당신 신분이 귀한 높은 사람은 길을 떠날 때 지금 같이 화패나 수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비싸고 소중한 것을 몸에 지녀야 됩니다. 이것은 비상 경비로 혹시 집에 돌아갈 경비가 부족하면 이것을 팔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황금, 유향,몰약을 자기를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다 드렸습니다. 주님이 사용되길 원했습니다. 성탄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흘셔서 나에게 구원에 길을 열어 주시고 영생의 기쁨을 주신 주님 앞에 우리는 무엇을 드릴것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며, 성령에 인도하심에 따라 살수 있으며,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보답할수 있을까? 황금이 없다면 당신의 몸을 드리십시오. 유향이 없다면 당신의 사랑을 드리십시오. 몰약이 없다면 내 일생을 드리십시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 드리는 우리의 헌신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려 경배하고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나의 생명의 주여! 나를 위해 다시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 내 인생 당신앞에 바치길 원합니다.내 자신을 받아 주옵소서 .
그때 동방박사들이 본 별은 이제 다시 우리가 볼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별이 가르쳐준 주님은 우리 옆에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영적인 여행을 똑바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서 경배하고 모든 사람에 그 분을 증거하고 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 또 하나의 별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 성탄절에 수 천리를 여행하며 바랐던 동방박사들 그 열정과 경배와 예배의 모습을 내가 갖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 언젠가 내 인생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지나게 될것입니다.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지나고 내가 주님 앞에 서야 할 때 우리는 어떻게 고백할수 있겠습니까 ?
이번 성탄절에는 우리의 신앙이 새롭게 태어나고 경건한 헌신을 결단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메리크리스마스!”
박사들의 크리스마스
마 2:1-11 / 문기태 목사
젊은 남녀가 배를 타고 뱃놀이를 하다가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둘 다 호수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죽었고 여자는 살아났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남자는 돌머리라 무거워서 빠져죽었고, 여자는 골이 비었기 때문에 가벼워서 살아났답니다.
정보와 지식의 홍수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박사하면 무조건 우러러 보았는데 요즘은 박사도 흔해서 별로 우러러 보지도 않습니다. 박사실업자도 많습니다. 요즘 특히 박사들이 서로 거짓말을 하였다. 논문이 가짜라고 옥신각신하는 마당에 박사라고 존경받기도 신뢰하기도 어렵게 되엇습니다.
성경에도 박사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애굽에 박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왕의 측근에 머물며 왕에게 국정을 자문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꿈을 꾸고 해석을 의뢰하였는데 풀지 못하고 전전긍긍하였습니다. 그때 요셉이 나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정확하게 꿈을 해석하였고 그 결과 애굽은 칠년 대 가뭄의 재앙을 지헤로운 요셉의 지도력으로 쉽게 풀어가게 되었습니다. 또 다니엘서에 보면 바벨론시대에도 박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역시 비슷한 지위에 있으며 왕의 자문을 하였는데 왕의 꿈을 알아맞추지 못해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니엘이 나아가 하나님의 계시로 꿈을 알아 맞추고 해석까지 정확하게 해주어 위기를 넘깁니다. 그러자 느브갓네살왕은 다니엘을 박사들의 어른으로 삼았습니다. 신약시대에도 박사들이 등장합니다. 신약에는 유일하게 마태복음에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만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멀고 먼 다른 나라의 동방박사들이 어떻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알고 예수님께 경배하고 찾아 왔는지는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변에 있는 많은 유대인들을 제쳐두고 이름도 모를 동방박사들을 인도하셔서 주 나심을 알리고 영광을 받으셨는지도 신비로운 일입니다. 오늘 성탄절을 맞아 말슴을 깊이 묵상하며 이런 신비를 하나씩 벗겨보고자 합니다.
당시에도 박사급의 지식과 지혜가 탁월한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박사라고 다 진짜 진리를 알고 있고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무늬만 박사지 어리석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공연히 쉽게 할 수 있는 말을 알아듣지 못할 말로 어렵게 떠들며 자신의 지식의 깊이를 과장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부정직한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속이며 자신의 능력을 대단한 것처럼 위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학위가 몇 개냐? 어디 출신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 진리를 터득하였느냐? 정말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냐?가 중요합니다.
1. 가짜 박사를 경계하라.(3-8)
본문에는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이야말로 박사급입니다. 성경박사들입니다. 이들은 성경을 다 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4절에 보면 헤롯왕이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막힘이 없이 "유대 땅 베들레헴입니다."하고 대답합니다. 나아가 그 이유를 구약 미가 5장 2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네게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나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정도면 성경 박사라고 불러도 되지 않습니까? 당시에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이처럼 공부를 많이 하여 성경지식이 뛰어나고 막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가짜박사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위한 지식은 많이 소유했으나 그 지식을 삶의 자리로 끌어내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명색이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이 다른 백성들보다 탁월하다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먼 나라에서 이방인들까지 경배하러 찾아왔는데 서기관과 제사장들은 예수님께 경배하러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바빴는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쩌면 헤롯왕의 시선이 의식이 되어 눈치보다가 가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지식은 죽은 지식입니다. 가치가 없습니다.
오늘날도 가짜 박사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요즘 교인들은 설교시작만 하면 그 다음은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를 예측하고 앉아 있습니다. 설교를 수도 없이 많이 들어서 성경을 꿰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탄절같은 절기가 되면 목사는 설교준비가 더 힘듭니다. 왜냐하면 다 아는 이야기를 또 하려니 보통으로 설교해가지고는 귀기울여 들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전도하다면 교회다니가다 중단한 사람들을 흔히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도 성경 박사입니다. 자기는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 이야기, 홍해바다 이야기, 동정녀 마리아 이야기 등 전도자를 공격할 레파토리가 수도 없습니다. 요즘은 교회문턱에도 안 가본분들중에도 술좌석의 안주거리로 성경이야기를 들어서인지 다 박사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 나오지 않는 남편이 교회 나오는 아내보고 '야, 내가 너보다 성경은 더 많이 안다'고 큰소리친다고 합니다. 전부들 박사입니다. 그것도 성경박사입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가짜박사들입니다. 왜? 그 지식은 죽은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성경의 지식이 나에게 어떤 선물을 가져다 줍니까? 감사와 기쁨, 평안과 확신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까? 산 지식을 소유한 사람은 성경을 알면 알수록 이런 긍정적인 변화가 수없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무거운 굴레로 만들어 우리를 속박하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벗겨주려고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확신가운데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천국을 맛보며 살도록 진리의 말씀으로 다가오신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는 헤롯왕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헤롯은 정치학 박사입니다. 그는 부당한 방법으로 왕이 되었습니다. 본래 유대의 왕은 다윗의 후손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이방인의 피가 섞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권력의 맛을 본 헤롯은 로마정부에 아부를 하여 왕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꾀가 많고 집념이 대단했으면 당시 많은 관료들과 야심찬 정치인들과의 경쟁을 이기고 유대의 왕이 되었을까요?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헤롯은 유대교에 대하여도 잘 알고 잇었으며 피정복민인 이스라엘 민족의 생리에 대하여도 환하게 꿰뚫고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하자 즉각 불러들여 자세한 것을 알아보기 시작합니다. 최대한의 정보를 수집하는 정치가의 재빠른 행보를 눈여겨보며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헤롯은 이 정보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는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자신이 앉은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조치를 재빨리 취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재빨리 정보를 수집하고 이 상황이 나에게 이로우냐? 해로우냐?를 계산해서 이익을 지키기 위해 약삭빠르게 행동할 뿐입니다.
오늘날도 말슴을 들으면서도 손익계산이 빠른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철저히 손해보지 않으려는 계산속에 성령의 감동조차도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절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성령님의 지시를 거절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해 듣고도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자신에게 손해가 되지 않을까?를 먼저 따지다가 주저하고 포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젊은 때 열심히 예수믿자고 권면하여도 예수 잘 믿는 것을 청춘의 낭비라고 생각하여 이 다음에 은퇴하면 예수믿겠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예배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하여 예배를 자주 빠집니다. 또 어떤 이는 하나님께 재물을 바치는 것을 재물의 낭비라고 생각하여 하나님께 인색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헤롯은 동방박사들을 통해 주 나심의 소식을 먼저 들었으며 서기관들을 통해 정확한 출생장소의 비밀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큰 복과 은총을 받을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자기 자리가 위태로와 질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하고 예수님의 제거 계획을 세웁니다. 헤롯은 탁월한 정치가였지만 그도 역시 진리에 대하여는 가짜 박사였습니다. 따라서 불행한 최후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진리를 알기를 원하면 이해타산적인 습관을 내려 놓으십시오.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만이라고 계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은 언제나 가장 좋은 것입니다. 사단이 손해라고 속삭여도 속지 마십시오. 손해보는 것 같아도 결국 큰 유익을 만납니다. 그리고 진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2. 진짜박사를 본받으십시오.
이들은 알게된 진리를 확신하고 생활에 그대로 적용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본래 하늘의 별을 연구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들을 페르시아의 천문학자들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천문학자가 아니고 점성술사들입니다. 별들을 통해서 나라와 왕 또는 개인의 운명을 점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또한 당시에 왕의 자문을 담당하는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굉장한 지식과 권력 영향력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왜 하나님은 본래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별을 바라보며 진리를 추구하는 이런 사람들에게 중요한 진리를 보여주셨을까?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가까운데 사람들을 놔두고 그 먼데 사람에게 계시를 주셨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1) 동방박사들은 계시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에 사는 이들이 당시에 어떻게 하나님을 알았을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BC 587년 유다왕국은 완전히 망했습니다. 그래서 잘 나고 똑똑한 많은 젊은이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 젊은이들중에는 지혜와 지식을 인정받아 바벨론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다니엘입니다. 단2장에 보면 다니엘은 바벨론 온 도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모든 박사들의 어른이 되었습니다. 오늘로 치면 총리와 국정자문위원장을 겸직한 것입니다. 그런 다니엘의 영향력이 박사들에 크게 미쳤음을 자명한 일입니다. 아마도 세월이 제법 흘렀지만 다니엘의 영향으로 박사들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지속적으로 전래되어 성경에도 관심이 많은 이들이 아직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성경과 하나님에 관하여 조금 알고 있으나 이들은 알게 된 진리에 따라 즉각 반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위직과 안락한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왕을 찾아가는 결단은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별을 통해서 계시된 진리 왕이 나셨다는 사실 그리고 서기관들을 통해 듣게된 진리, 왕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는 사실을 듣고는 즉각 찾아가서 만나고야 마는 실천적인 자세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진리에 반응하는 자세를 귀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특별계시를 주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들은 말씀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반응하십니까? 얼마나 즉각 반응하십니까? 하나님은 계시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진리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게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2) 동방박사들은 예배의 부름에 능동적으로 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2절에 보면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라고 말합니다. 그 먼곳을 달려온 목적은 오직 하나, 왕을 향한 경배입니다. 예배를 위해 아주 먼 곳을 마다않고 찾아 왔습니다.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중에 성탄절 예배를 위해 가장 먼 곳에 오신 분은 누구입니까? 멀다는 것은 실제 거리뿐 아니라 여러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대가를 지불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런 말을 하는데 공감이 가더군요.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데 집가까이 있는 학교를 고집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부산으로, 서울로 보내고, 심지어는 미국까지 보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는 예배를 경험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예배를 경험하기 위하여 교회에 가는 것은 왜 멀다고 핑계하고 그렇게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동방박사들을 택하여 계시를 주시고 수 천리 먼길을 인도하신 이유는 오늘 현대인들에게 예배를 드리러가는 교회당이 멀다는 불평을 잠재우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재임스패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우리를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이끌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죽은 것이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여러분을 날마다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이끌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 감격스런 예배를 드리기 위해, 최고의 경배를 드리기 위해 그분앞에 엎드립니까? 더 가까이, 더 간절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까?
3) 동방박사들은 최고의 헌신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11)
그들은 마리아가 아닌 아기 예수께 경배했습니다. 하나님만이 경배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그냥 절하지 않고 예물을 드렸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쳤습니다. 이것들은 박사들이 왕에게 바칠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며 최선의 선물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선물을 받는 날입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선물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선물을 받기만 하는 날이 아니고 선물을 하는 날입니다.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최선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우리가 드릴 최선의 선물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인색한 마음을 내려놓고 감사와 사랑으로 나의 최선을 드림으로 헌신된 삶을 표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여러분 모두 진정한 지혜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겉으로만 박사가 아닌 진짜 박사, 지혜와 슬기가 넘치는 박사,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박사가 되기 바랍니다. 진짜 박사는 진리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진짜박사는 예배의 부름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진짜 박사는 최선의 헌신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악한 때에 예수님을 찾아야
마 2:1-12 / 이종윤 목사
테러와 전쟁, 정치 불안과 경기침체 등으로 온 세상이 어두워진 듯 하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시대도 오늘과 같이 어두운 시대였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가난과 상실감, 위기감과 질병으로 억눌리던 시대였다. 아내와 아내의 조부, 어머니와 처남, 심지어 자신의 세 아들 마저 살해한 헤롯은 점점 더 극악무도한 집권자로 변해갔다. 이러한 어두운 시대에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다.
Ⅰ. 주님 만나는 일을 방해하는 이들(협조적 방해꾼들)
예수님은 한 해가 끝나는 12월, 그것도 밤이 가장 깊은 시간에 인간 세상에 오셨다. 할일을 다해놓고 한 해의 끝을 기다리는 시간에 오신 것이다. 아무도 희망을 갖지 않는 시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오신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쇠잔해 가는 역사관을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아침에서 시작하여 저녁으로 끝이 나는 일반역사관과는 다르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창1:5) 기독교의 역사관은 어둠, 좌절, 절망에서 새벽을 뚫고 몸을 비틀어 환희와 영광으로 솟아오르는 태양처럼 상향 궐기하는 역사인 것이다.
주님을 만나는 일의 첫 번 째 방해꾼은 헤롯왕이었다.(협조적 방해꾼)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마2:2)라고 물었을 때, 헤롯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물었다. 그리고 ‘아기를 찾거든 내게 고하여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마2:8)고 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협조적 방해꾼’이었다. 악한 일을 많이 한 헤롯은 메시아가 오시는 것을 두려워했다. 또한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했다. 자기 욕심에 빠져 두려워하는 이에게 믿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다음은 무관심한 제사장들이었다. 이들에게 종교는 하나의 사업(business)이었고, 삶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이들은 메시아가 나실 곳을 알고 있었으나 행함이 없는 죽은 신자였다. 오늘 우리에게는 행동하는 지식인이 필요하다. 세상은 예수님을 찾는 일을 돕지 않고, 오히려 방해를 한다. 메시아를 찾는 일에 종교지도자들이 오히려 방해한다. 이들의 관심은 그리스도보다 사회사업, 정치, 건물, 인권, 정의, 민주주의에 있다.
Ⅱ. 주님을 찾는 이들
매 805년마다 목성(Jupiter)과 토성(Saturn)은 가깝게 접근한다. 1년 후엔 화성(Mars) 역시 합류한다. 이 사건이 주전 6년 또는 7년에 있었다. 그러나 이 세 별이 완전히 함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별은 혜성(Comet)이었다고 한다. 또는 변광성(갑자기 태양의 일천 배 내지는 일억 배가량의 빛으로 밝게 빛나는 별)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동방의 박사들은 많은 방해물을 제치고 아기 예수를 만났다. 그리고 엎드려 경배했다.(마2:11) 성경은 이들이 별의 인도를 받았다고 전한다.(마2:2)
박사들을 인도한 별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천계의 징조였다. 하나님은 목자들에게 천사를 보내셨고(눅2:9), 성전에 있는 시므온에게 성령을 보내셨듯이(눅2:29-32), 동방의 박사들에게는 하나님의 별을 보내신 것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온다. 때로는 책으로, 때로는 친구의 인도로, 또 때로는 라디오나 TV의 메시지를 통해서도 나아온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방법과 과정은 다양하기 때문에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늘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 것이다.
Ⅲ.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한다.(사55:6~7,렘29:13,습2:3,암5:6) 그러나 또한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롬3:11) 이 두 말씀은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이러한 모순을 해결해 주신다. 자력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우리가(롬3:11)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마음에 선한 소원함을 심어주셨기 때문이다. 동방의 박사들은 먼 나라에서 유대 땅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출발하기 오래 전에 하나님은 하늘나라에서 지상으로 영광의 보좌 앞에서 비천한 마굿간으로 오셨다. 하나님은 가까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맺는말
우리는 동방의 박사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세상의 왕이며 구주로 알고 있다.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를 찾아와서 경배하고, 예물을 드렸다. 그리고 다른 길로 돌아갔다.(마2:12) 우리는 만날만할 때에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사55:6)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야 한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이 시대가 악하다고 낙심 말고 동방의 박사들처럼 예수를 찾아 경배하자.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마 2:1-12 / 권오서 목사
들어가는 말
성탄을 맞이한 사랑하는 춘천중앙교회 성도 여러분에게 성탄의 기쁨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앞뒤좌우 분들과 성탄의 인사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성탄의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크리스마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믿는 성도들이야 아기 예수님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어떨까요? 한번 준비된 영상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상 - 2분 30초 / 인터뷰 - 크리스마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여러분들이 보셨다시피, 세상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날입니다. 하얀 눈과 산타 할아버지, 그리고 성탄 카드, 선물, 술자리,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약속 정도가 떠오를 뿐, 그날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날인지에 대한 생각은 없습니다. 굳이 세상 사람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Godpeople에서 성탄절을 맞이해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가장 부각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를 보면, '트리, 산타클로스, 루돌프'가 37.8%, '연인, 미팅, 데이트'가 (13.2%), '이벤트, 공연'이 9.6%, '선물, 카드'가 5.8%, '후원 및 불우이웃돕기'가 7.3%였습니다. 단지, 25.5%만이 '예수님, 교회'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오늘날의 성탄절은 '예수님 없는 성탄절'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더 이상 성탄의 의미가 퇴색되거나 왜곡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탄의 본래 의미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선물이나 카드를 주고받아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 자체가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탄의 기쁨을 배가시키기 위해서는
1. 순수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동방박사와 헤롯왕은 매우 대조되는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순수함입니다. 동방박사는 매우 순수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여러분, 이 사람들이 어디서부터 왔습니까? 동방. 동방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이 동방이 적어도 이스라엘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타국이었고 먼 길이었으며, 예루살렘으로 오기까지는 지형적으로 볼 때에는 위험한 요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어떠한 사심도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사람과 자신들의 삶이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여러분, 돌잔치가 있다가 아무 집이나 갑니까? 가까운 친척이나 친한 친구 집에나 가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찾아가지 않습니다. 또 찾아갈 때에는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됩니까? 언젠가 내가 잔치를 열었을 때, 찾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동방박사들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다는 것은 '뭔가 바라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들이 바라는 것이 있었습니까? 어떠한 대가가 지불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탄을 맞이하게 되었는데도 별로 기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순수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벌써 12월만 되면 어떻습니까? 거리 곳곳에서는 캐롤송이 흘러나오고,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물품들이 게시됩니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 특별 할인 잔치를 한다면서 돈 버는 데에만 몰두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떻습니까?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가진 사람들의 성탄은 풍요롭고, 없는 사람들의 성탄은 한없이 초라합니다. 성탄절이 지나고 나면 아이들이 저마다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 자랑합니다. "나는 이번 성탄에 PS2를 선물로 받았어!", "난 핸드폰을 선물로 받았어!", "나는 장난감을 받았어!"라며 자랑합니다. 그러면 선물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의기소침해집니다. 아이들만 그렇습니까? 부모님들도 없는 돈 털어서 아이들 선물 사주고, 부모님께 선물 사드려야 하기에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부모들은 "제발 성탄절이 없었으면"하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성탄절이 선물 사주는 날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탄절은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선물을 주고받는 날이 아닙니다. 성탄절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함께 예배하는 날입니다. 물론, 성탄절에 선물을 주고받아야 관련업종에서 일하는 분들도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선물을 주고받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그 선물이 내 자녀들에게만 한정되고, 부모에게만 한정되고, 나와 친분이 있는 분들에게만 한정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선물은 선물을 받는 사람이 그것을 갚을 수 없을 때에 의미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선물을 받고 나서 값을 계산해서 그에 상응하는 선물을 주었다고 합시다. 기분은 좋겠지만, 사실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라는 선물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아 거기에 상응하는 것을 드릴 수 있다면 구원의 감격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돈 주고 구원을 살 수 있는 것이라면, '내가 돈 주고 산거야!'라고 말하면 그만입니다. 착한 행실로 구원을 살 수 있다면, '내가 착한 행실을 했기 때문이야!'라고 말하면 그만입니다. 구원받은 감격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순수함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나올 때에 황금과 몰약과 유황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무슨 대가성이 있는 선물이었을까요? 나중에 예수님께서 자라면, 그래서 뭔가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인물이 되면, 그때 좀 기억해달라는 부탁이 담긴 예물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순수한 선물이었습니다. 무슨 대가를 바라보고 드린 것이 아닙니다. 같은 유대민족도 아니었습니다. 같은 나라에서 사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대가를 바란다 하더라도 해줄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성탄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순수함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 것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떤 대가를 바라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헤롯왕 앞에서 "유대인의 왕으로써 나신 이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는데, 이때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은 메시야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동방박사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메시야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올 것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메시야를 기다렸기 때문에 그들은 순수함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순수함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기 예수님께서 바로 나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신 분이심을 고백할 때, 내 삶을 회복시키실 분이라는 사실을 믿을 때, 나의 연약한 것을 강하게 하시고, 나의 병든 것을 고치시고, 나의 아픈 것을 치유하실 분으로 믿고 나아갈 때 순수함을 잃지 않고 성탄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2.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헤롯왕으로부터 아기 예수가 어디에서 태어났을 것이라는 정보를 얻고 궁에서 나옵니다. 바로 그 순간 별이 그들을 인도해서 아기 예수가 있는 곳으로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여러분, 그때 이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0절 말씀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어떻다고요? 기뻐했습니다. 반면에 헤롯왕은 어떠했습니까?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근심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이가 어디 있느뇨?'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의 왕위가 위태해질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쁨은커녕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성탄의 의미가 왜곡되고,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가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스스로 기쁨을 잃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상당수의 사람들이 기뻐할 줄을 모릅니다. 기쁜 일이 있는데도 기뻐하지 못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늘 불안해하기 때문입니다. 언제 직장을 잃게 될지. 언제 사업에 실패하게 될지. 언제 건강을 잃게 될지. 갑자기 어떤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 이렇듯 현실의 삶에 얽매어있다 보니, 기뻐하지 못합니다. 올무가 너무 많습니다. 이 일을 하려고 하면, 저 일 때문에 걱정이고, 저 일을 하려고 하면 이 일 때문에 걱정이고. 걱정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기쁨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의 일부를 맡기는 것으로는 온전한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온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는 삶의 전부를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라 하실 때에는 전부를 맡기라는 것이지, '건강은 네가 알아서 하고, 재물은 내가 채워주마!'-이런 식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부를 맡아주실 만한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삶의 일부를 맡기기 때문에 더 초조하고 불안해하고 염려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힘 있는 사람에게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지 마십시오.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사람에게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지 마십시오. 재물에게도 맡기지 말고, 명예에게도 맡기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께만 맡겨야 합니다. 맡긴다는 것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일들을 실행할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그는 형들에게 의해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때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사람의 심정을 생각해보셨습니까? 또 어떻습니까?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이 일로 해서 요셉은 억울하게 누명을 씌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주인으로부터 신뢰를 잃은 것입니다. 이제까지 주인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신뢰를 잃고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울분에 휩싸이지 않았겠습니까? 감옥에 갇혔을 때, 술관원과 떡굽는 관원장을 만납니다. 그들을 도와줍니다. 그는 술관원에게 앞으로 잘 되면 자신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2년이 넘도록 아무런 소식도 없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은 얼마든지 불안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쯤 감옥에서 나갈 수 있을까, 억울한 누명을 언제쯤 떨쳐버릴 수 있을까 수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요셉이 어떻게 됩니까? 결국은 풀려납니다. 그냥 풀려납니까? 이전에 그가 섬기던 보디발보다도 더 높은 지위에 오릅니다. 왕 다음으로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셉은 숱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자신의 전생애를 맡겼습니다. 행위를 맡기었고, 생각을 맡기었고, 감정을 맡기었습니다. 관계를 맡길 수 있게 되었고, 시간을 맡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자신이 어떠한 직업을 가지게 될지 그 모든 것을 맡기었습니다. 맡긴 결과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귀한 삶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전생애를 맡긴 사람이 축복을 누립니다. 기쁨을 누립니다. 행위를 맡기십시오. 생각을 맡기십시오. 감정을 맡기십시오. 관계를 맡기십시오. 시간을 맡기십시오. 직업을 맡기십시오. 내 삶의 통치자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지시함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읽다보면,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에게 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헤롯왕에게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곳을 알려주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성도 여러분,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성탄의 기쁨이 온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 자체만으로는 기쁨이 될 수 있었겠지만, 그 후에 어떠한 일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점에서 반쪽 기쁨 밖에는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헤롯에게 가지 않고 본국으로 갔기에 아기 예수의 안전이 보장될 수 있었고, 그 이후에 건강한 아이로 자라고, 또 어른이 되어 제자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십자가의 길을 온전히 감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탄의 기쁨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동방박사들처럼 지시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12절 말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요즘 현대인들은 누군가에게 지시받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 사람들일수록 그렇습니다. 지시받는 것을 무시 받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아이들이 지시받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부모의 지시를 받지 않는 자녀가 어떻게 됩니까? 매사에 부모의 말이라면 귀를 닫는 자녀는 잘못된 길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사서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생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고생을 하면서 잘 견뎌내면 문제 될 것이 없지만, 만의 하나 깊은 좌절감에 빠지게 되면 '왜 나는 이 모양 이 꼴이지!'하며, 더 이상 회복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군인은 혼자 있을 때는 약한 존재입니다. 군인이 큰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뭉쳐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각개각진 해서는 안 됩니다.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군인으로써의 용맹을 떨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 때는 주께로부터 오는 담대함을 얻어 마귀를 대적하며 승리할 수 있겠지만 두려워하며 명령을 어기게 되면 곧 멸망하게 된다. 담대함은 곧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나가라 할 때 나갈 수 있고 멈추라 할 때 멈추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지시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지시함을 거부하고 죄를 지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지시함을 따라 살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셨기에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시함을 받아들인 때, 하나님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하는지 귀담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과 단절되었었던 관계가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또한, 성탄의 기쁨이 배가 될 줄로 믿습니다.
결 론
2021년 성탄절만큼은 예수님께 돌려드립시다. 성탄절은 주님의 날입니다. 더욱이 이번 성탄절은 주일이지 않습니까? 성탄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순수함을 회복하십시오. 세상풍조에 물든 성탄은 이제 벗어버려야 합니다. 성탄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선물을 드리고자 한다면, 사랑을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주십시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를 경배했던 동방박사의 모습을 본받읍시다. 또한 기쁨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방박사는 별의 인도를 받는 것 자체를 기뻐했지만, 헤롯왕은 자신의 지위를 잃을까 불안해했습니다. 여러분의 전생애를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기쁨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지시함을 받으십시오. 우리의 삶속에 성탄의 기쁨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시함을 받아야 합니다.
2021년 성탄절을 맞이해서,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순수함을 회복하고, 기쁨을 회복하고, 지시함을 받음으로서 성탄의 기쁨을 배가시킬 수 있는 축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와 헤롯
렘 31:15-17 마 2:13-18 / 이정익 목사
오늘은 마태복음 서두를 본문으로 하여 읽었습니다. 마태복음 서두를 보면 아주 끔찍한 보고서(2:16)가 등장합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 중 주연은 예수와 헤롯입니다. 헤롯은 당시 유대를 통치하던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온 왕입니다. 이 둘의 악연이 성경에 자세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수백 년 동안 세상에서 기다렸던 그 왕 메시야가 탄생하신 것입니다. 하늘에서 왕이 태어나니까 세상에서는 세속의 왕이었던 헤롯이 필사적으로 저항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옴으로서 세상과 대치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세상에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는 곳 마다 대치가 이루어졌습니다. 복음화를 이루는 과정을 보면 반드시 이 대치가 이루어집니다. 개인에게도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국가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본문은 그 대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에 불화를 주려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동방에서 박사들이라는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페르시아에 거주하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입니다. 그들은 메시야의 태어남을 고대하며 연구하던 사람들입니다. 메시야가 태어나게 되면 하늘에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천체의 변화를 연구하던 중 계시를 받고 특별한 별의 움직임을 따라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메시야가 태어나면 예루살렘 그리고 왕궁쯤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의심하지 않고 왕궁으로 가서 왕이 태어났다는데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헤롯이 흥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놀랐을 것입니다. 그 후 헤롯은 왕이 태어났다는 말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인류 역사상 있을 수 없는 끔찍한 짓을 벌리게 됩니다. 헤롯은 동방박사들이 다녀간 시점으로 해서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 살고 있던 가정에서 두 살 이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헤롯
이 헤롯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에는 헤롯이라는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헤롯(Herod)은 가문을 말하고 Family를 말합니다. 즉 “헤롯가”라는 뜻입니다. 해롯가는 BC37 ~ AD70년 사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을 다스린 왕조입니다. 이런데 이 헤롯 왕조의 가계가 아주 복잡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헤롯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여러 헤롯들 중에 증조부가 되는 큰 헤롯 소위 헤롯 대왕입니다. 이때 헤롯대왕의 나이가 70 쯤 되었다고 했습니다. 왕이 될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엄청 충격 받았습니다. 이 헤롯은 과대망상의 병까지 앓고 있었습니다. 왕권교체에 따른 정변이 일어날까 봐 아내와 두 아들과 5명의 유능한 참모들까지 처형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사들이 왕이 태어났다고 하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16절을 보면 두 살 미만 사내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살해된 아이들이 대략 14,000명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헤롯은 참 무지한 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대인의 왕은 정치적인 왕이 아니고 죄의 속박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는 메시야임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가 불행을 불러옵니다. 그때 헤롯 자신의 아이들도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이미 예레미야 31장1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예레미야는 기원전 670년경에 활동하던 예언자이니까 수백 년 전에 이미 이런 사실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 헤롯은 예수와 악연이 깊습니다. 예수님은 출생순간부터 십자가에 달려 죽는 순간까지 이 헤롯 대왕과 그의 아들들에게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추종자들은 헤롯의 아들들과 손자들에게 계속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예수와 헤롯은 악연이었고 숙명이었고 두 사람은 왕권에 대해서도 서로 충돌하였던 사이였습니다. 예수의 신적 왕권과 헤롯의 인간적 왕권과 치열하게 충돌하였습니다. 헤롯 대왕은 BC 37- BC 4까지 기원전에서 기원후로 넘어가기 직전까지 로마시대의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친 로마적인 왕이었습니다. 당시 헤롯은 장군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정치가 마르크 안토니우스의 눈에 들어 유대의 왕으로 봉해졌습니다. 당시 왕은 로마가 인정해야 가능했습니다. 헤롯은 로마의 묵인 하에 국내정치나 외교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헤롯은 기원전 73년에 이두메 사람 안티파터와 아랍족장의 딸인 크프러스 사이서 태어났습니다. 이두메는 에돔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이두메는 유대인들이 경멸하고 멸시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이 안티파터는 유대인의 왕이 되려고 애쓰던 왕자들 중 하나인 히르카너스를 추종하던 중 내전이 일어납니다. 히르카너스와 안티파터는 당시 유력한 장군 카이사르 편에 가담하여 승리한 후 공로를 인정받아 히르카너스는 왕이 되고 안티파터는 뒤에서 실권자로 있습니다. 그때 안티파터는 15세인 아들 헤롯을 갈릴리지역 집정관으로 임명하고 그 후 헤롯은 갈릴리 지역의 영주가 되었습니다. 이를 분봉왕이라고도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이 헤롯을 극심하게 싫어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고 이두메 사람 즉 에돔 사람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의 어머니는 아랍여자였습니다. 당시 유대법에는 유대인 이방인만 개종이 허락되었는데 이들이 유대인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에 헤롯은 로마로부터 인정받아 승진하여 분봉왕에서 유대인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 헤롯은 줄타기 외교에 수완을 발휘하여 로마에 환심을 사서 왕권 유지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헤롯은 기원전 23년에 골란고원 등 넓은 지역을 헤롯에게 맡기기까지 했습니다. 이제는 전 유대인의 왕으로 로마로부터 계속 영지를 늘려가고 있었습니다.
예수와 헤롯의 관계
우리는 성탄절만 되면 예수와 헤롯의 악연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자마자 헤롯이 죽이려 했고 그래서 피난하여 망명생활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헤롯 대왕은 예수님이 태어나자마자 죽이려 했고 그의 아들 헤롯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는데 재판으로 일조했고 그 손자 헤롯들은 제자들이 복음 전파하는데 많은 장애를 주었습니다. 이런 헤롯에 대해서 예수는 성경 누가복음19:12-15에서 그를 언급하기까지 했습니다. ‘어떤 신분이 귀한 사람이 먼 나라에 가서 왕으로 임명받고 돌아오려고 떠났다. 그는 자기 종 열 명을 불러서 각각 열므나씩 주면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 돈으로 장사하라”, 그러나 그 종들은 그를 미워하여 사절단을 그의 뒤로 딸려 보내어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이 되기를 윈치 않습니다”하고 말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으로 임명되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얼마나 이문을 남겼는지 알아보려고 종들을 불러 모았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여리고에 가셨을 때에 여리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당시 여리고에는 헤롯의 겨울 궁전이 있었습니다. 헤롯은 그의 죽음을 그곳에서 맞이하였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헤롯의 이야기인줄 알았습니다. 헤롯은 로마로 가서 왕권을 받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왕권을 받아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오병이어 사건 직후 이 시대의 대안은 예수밖에 없다고 해서 실제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요 6:15). 당시 바리새인들과 헤롯이 이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둘은 평소에는 원수지간이었지만 예수를 잡아 죽이는 데는 한통속이 되어 대치하였습니다.
기원 전 4년
시대적으로 보면 기원전 4년은 역사적인 해입니다. 이 헤롯은 기원전 4년에 여리고에 있는 겨울 궁전에서 죽었습니다. 그해 헤롯 가문은 유대인들과 아주 질긴 악연을 가진 해입니다. 악은 죽을 때 발버둥 치게 됩니다. 해가 질 때 갑자기 어두워집니다. 그래서 그 시간을 땅거미라고 부릅니다. 귀신 나갈 때 몸을 만신창이를 만들어 놓고 나갑니다. 헤롯이 죽을 때를 전후한 기원전 4년은 역사가 몹시 뒤틀렸던 시기입니다. 가장 어두웠던 해이고 역사가 가장 소용돌이치던 해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태어나셨고 헤롯은 태어난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일로 어린 아이들 14,000명이 학살당하여 죽습니다. 또 헤롯은 죽기 직전 당시 에세네파 거주지인 쿰란에 있던 수도원을 악의적으로 방화하고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합니다. 에세네파는 예수 시대에 바리새파 사두개파와 3대 파벌을 형성하였던 한 파입니다. 에세네라는 말은 “경건한 자”란 뜻입니다. 그들은 재산을 공유하고 농업을 중시하며 독신주의로 은둔의 삶을 살았던 청결주의들입니다. 쿰란지역에 동굴을 파고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리던 사람들입니다. 당시 헤롯이 이렇게 병든 사람입니다. 또 후계자 문제로 가족들끼리 싸움이 시작되자 죽음을 앞둔 헤롯은 왕권이 불안하여 자기 아들 둘을 죽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헤롯은 죽을 때까지도 왕권에 대해 도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아구스도 황제는 헤롯의 아들이 되느니 헤롯의 돼지가 되는 편이 낫겠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죽을 때가 되자 그의 선생들인 유다스와 말티아스가 학생들을 사주하여 성전꼭대기의 황금 독수리 상을 치우도록 했습니다. 십계명 상 우상이고 죄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고 헤롯이 병상에서 일어나 두 선생과 제자들을 잡아 산채로 불태워 죽였다는 것입니다.
헤롯은 평생 마음에 한을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자기를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복수하고자 했습니다. 유언장에 유대인 귀인 1천명을 예루살렘에 모이게 하여 여리고에 있는 전차 경주장으로 인솔하여 놓았다가 자기가 임종하자마자 학살하라고 군인들에게 명령을 하달시켜 놓았습니다. 헤롯은 자기가 죽으면 울어줄 사람이 한사람도 없을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귀인 1천명이 죽었다고 사람들이 통곡하게 될 때 그 통곡이 자신을 위한 통곡으로 사람들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시대가 이렇게 어두웠던 그 시기에 예수님이 탄생하십니다.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 듣고 오늘 이란 땅에서 예루살렘까지 기쁨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헤롯은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너무나 놀랐습니다.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왕은 나밖에 없는데 나의 왕권에 도전하는 자가 태어났다니 그 소식은 헤롯의 마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은 그 때를 기준으로 하여 두 살 이내의 남자 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2장이 주는 증언입니다. 헤롯은 죽기 직전 미쳐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빛과 어둠은 공존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오면 어둠은 100% 거부하고 저항하고 반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나는 빛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예수를 반대한 것입니다. 세상은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직장에서 양심껏 활동하고 소신껏 행동해 보십시오. 모두 싫어합니다. 따돌림을 당합니다. 오늘 이 시대도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직도 이 세상은 빛을 싫어합니다. 내 안에 예수가 오시는 것도 주저합니다. 한동안 갈등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겨내야 평안해 집니다. 이것은 모든 공동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가정에 이 빛이 오면 그곳에 한동안 갈등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사회에서도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집은 유교로 찌들었던 집안입니다. 우리 집에 이 복음이 들어온 후 제사제도를 바꾸는데 상당기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사회에서나 국가에서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와서 복음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했고 핍박받았습니까. 천주교에서는 초창기 복음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제사제도 때문에 순교한 사람들이 1만 명에 이릅니다. 그래서 전도가 힘든 것입니다. 이 빛이 두려운 것입니다. 이 빛을 받아들이는데 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나라도 주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복음화가 어려운 것입니다. 어둠의 생활에서 빛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빛이 세상에 왔으되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함이라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라(3:19).” 그래서 빛이 비취면 반드시 그곳에는 저항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시대분별입니다. 기원전 4년은 암흑시대였습니다. 그 시대가 얼마나 어두웠으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내려 보내셨겠습니까. 그래서 그 시대에는 두 부류가 공존해 있었습니다. 하나는 메시야의 오심을 고대하고 기다렸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에세네파 사람들이고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수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거부자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리새인들이었고 헤롯 같은 사람들입니다. 헤롯이나 바리새인들은 모두 예수가 오신 줄을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에 알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번복하지 않고 계속 거부하였습니다. 이 두 부류는 서로 원수지간이었지만 예수를 거부하는 데는 한통속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은 그 시대를 분별해야만 하는 의무가 주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에게도 이런 본분이 주어진 사람들입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지도자들과 신앙인들이 그 길을 찾지 못하였으니 그 시대인 들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시대분별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지도자들과 종교인들 몫입니다.
세 번째는 소명감입니다. 사람은 소명의 존재입니다. 태어날 때 각자 소명을 받아가지고 태어납니다. 하나님은 아무 의미 없이 사람을 세상에 보내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무의미하고 한가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세상에 오신 사명입니다. 헤롯은 그 시대에 백성들을 섬기라고 세운 치리자입니다. 그 시대를 염려하고 백성의 삶을 안내해야 하는 사명이 주어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두 그 사명을 망각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고 아이들을 죽이고 권세에 과대망상까지 지니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이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이 헤롯이 많아서 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촌에서는 아이들을 학살하듯 죽이는 권세자들이 있습니다. 북한이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굶어죽거나 말거나 권세에 과대망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리아가 그렇습니다. 자기 백성을 향하여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습니다.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 사람들이 오늘의 헤롯입니다. 모두 소명을 잃었고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헤롯을 만난 것이 불행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 중요한 시대에 앞을 보지 못하고 오신 메시야를 보지 못하고 그 시대를 방황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그렇게 어둡고 타락했기 때문에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게 오시는 주님을 고대하고 맞이하는 시간이 대림절이고 성탄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