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이곳지방은 일제히 봄방학이 시작되어 아이들은 보너스 휴가로 마음이 한껏 들떠, 벌써 봄 향기를 찾고 있을 겁니다.
얼마 전, 지유 수석부회장님의 ‘학생회시절 추억담을 올려 주십사’하는 부탁말씀도 있고 해서 이때 쯤이면 항상 떠오르는 아름다운기억 일편과 그 소회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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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한겨울 이맘 때 쯤, 고등2학년 때 무턱대고 범어사 총무스님-아마도 시인이신 초연스님이셨는 듯-을 찾아뵙고 학생수련회를 할려니 자리를 내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스님은 범어사에서는 처음 겪는 일이신지라 난감해 하시며 사중에서 제일 넓으나 그만큼 퇴락한 '해행당(解行堂)'-알고 실천하라는 뜻, 보제루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는 돌계단 끝에 자리하고 있음-이란 당우로 저를 끌고 가셨습니다.
얼마나 사용을 하지 않았는지 먼지가 수북하고 문마다 온통 거미줄 투성이고 급기야 그 추운 겨울에 아궁이가 막혀 군불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난감하였지만 산중에 어린 아이들을 받아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는 바로 특공대(물론 이쁜 여학생들도 차출)를 조직, 수련회 이틀 전에 전격투입하여 아주 반들반들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근처 산의 나무조각, 낙엽 등을 긁어모아 문제의 아궁이를 새까만 얼굴로 뚫고는, 이윽고 아름다운 어둠이 내리자 아주 고구마까지 불속에 뭏어 놓고 어른거리는 불 그림자 주위에 둘러앉아 시험 군불을 때고 있으려니 갑자기 벽력이 떨어집니다. 지나가시는 스님이 보시고 "절에서는 젖은 고목 나무를 때면 않된다" 호통을 치시고는 홀연히 사라지셨습니다.
급히 덜 마른 나무덩걸을 끄집어 내어놓고 다시 불을 때어 그 큰방의 아랫목이 더워지는 것을 보고는 자리에 누웠지만 '젖은 나무가 불이 붙으면 화력이 더 좋다는데, 스님이 왜 야단을 치셨을까?'하는 생각이 화두로 딱 달라붙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래 전 입적하신 고암 종정스님의 신년법회에 대표 헌향하는 광영을 누리며, 드디어 70여명의 학생들이 3박4일의 수련회를 무사히 마치고는 지도스님께 '청소하느라 수고했다. 진짜배기 법문들었다'는 칭찬도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 '해행당'은 이제까지 적지 않은 시간을 공부하시는 스님들의 거소로 잘 사용되고 있으니, 아주 가끔 범어사갈 때는 그 때의 기억에 흐뭇함을 조용히 혼자 즐기지요.
시간이 흘러
대학졸업을 앞둔 겨울, 김해 신어산 영구암에서 화엄스님을 모시고 삼칠 단식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스님 방에 꼳혀있는 ‘사미율의’를 빼어 보고는 지난 날의 의문이 툭하고 떨어 졌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미율의’는 정식? 스님인 비구(니)계를 받기 전까지의 기초수행단계인 사미(니)의 기본규범을 설해 놓은 수행지침서이지요.
죽이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 마시지 말라하는 등의 십계를 비롯하여 대중과 함께 사는 법, 밥 먹는 법, 심지어 화장실 가는 법에 이르기까지 수백가지의 규범과 덕목을 세세히 지적하여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규범 중에서 언뜻 이해되지 않는 몇가지가 있습니다.
*밤에 방안에 등불을 켤 적에는 반드시 방문을 닫아야 하며 등불을 들고 밖으로 나갈 적에는 반드시 등피를 씌워야 한다.
*아궁이에 불을 지필 적에는 절대로 썩은 고목나무를 넣어서는 않된다.
*냉수를 마실 때는 반드시 헝겊으로 걸러서 마셔야 한다.
이는, 등불을 보고 날라드는 모기, 나방 등과, 젖고 썩은 나무에 깃들여있는 개미 등 작은 곤충의 생명과, 냉수에 살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미한 생명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몸으로, 머리는 오히려 맑아져 깊은 밤에 이 구절을 읽고는 ‘이렇게 지극한 생명사랑이 있을까?’하는 생각에 머리가 텅 비는 느낌이었습니다.
절에서 예불 모실 때 빠짐없이 울리는 범종과 법고, 운판, 목어를 합하여 사물(四物)이라고 하지요. 범종은 살아있는 이는 물론 죽어 지옥고에 허덕이는 중생을, 법고는 땅위에 기는 짐승을, 운판은 하늘의 날짐승을, 목어는 물에 사는 모든 생명을 위하여 매일 아침 저녁으로 울리는 것이니 이 또한 지극한 생명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그 지켜야할 덕목(계율)의 첫머리에 ‘모든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는 생명사랑을 절대우선가치로 말씀하시는 종교, 사상은 아마도 불교가 유일하지 않을까 합니다.
작금, 황우석박사의 ‘줄기세포특허강탈사건’을 깊숙이 접하는 저로서는 이러한 생명사랑의 말씀들을 되새김질하며, 특정 종교의 소왈 '생명윤리'를 내세워 진정한 생명사랑을 외면하는 그 독선적, 이기적 집단과 그 행태를 심히 우려하는 바입니다.
난자라는 미완의 불완전생명체(세포)를 이용하여 비교할 수 없으리 만치 더 크고 많은 완전한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황우석박사님의 연구가 과연 그들이 말하는 ‘생명윤리’에 반하는 것인지, 나아가 그 이율배반적이고 얄팍한 논리를 앞세워 기득의 권리를 보호하고 더욱 확대할려는 시도가 아닌지 그들 스스로 뼈져리게 반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진리를 찾아 사라쌍수 나무아래 홀로 앉으실 때, 외도들은 ‘얼마나 갈지 두고 보자’고 의심하였습니다만, 부처님께서는 안일과 나약의 마구니를 물리치시고 궁극에 대각을 성취하셨습니다.
하여, 그 진리를 알리시기 위하여 다섯비구를 찾아 홀로 먼 길을 나서심을 시작으로 하여 마침내 그 길 위에서 육신의 생을 거두셨습니다.
작금의 우리의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왜곡된 진실을 밝히는 일 또한 그러하리라 생각됩니다.
이는, 불조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무한자비의 ‘생명사랑’과 ‘바로보기(正見)’ 의 정진에 다름아니기에
청년 불자들은 삿됨은 물리치고 바름을 세우는 破邪顯正의 기치로 나서야 할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自燈明 法燈明
스스로 작은 등불이 되어 진실의 길을 함께 밝히고자 서원합니다.
첫댓글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수행으로 점절되어 있군요. ^^
사심 없이 황 박사일에 전념하고 계신 선배님이 놀랍습니다. 그 밑바탕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있네요.
돌구름,알고 실천이 끝난는지 범어사 해행당이 증발(?) 옜날 철야정진,그러고보니 밤을많이 뚫었네...
진정한 생명윤리란..일부 특정 종교안에 갇힌 교리가 아니라..고통과 신음속에서 치료와 완쾌라는 빛을 갈망하는 수많은 장애인들과 환우들을 위한 덕목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