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범으로 알려진 오스왈드는, 사실은 CIA의 일급 정보 요원이었다. 오스왈드 그는 지난 1959년 9월, 알렌 덜레스의 지령으로 첩보정찰기인 U2기에 대한 정보를 소련측에 넘기기 위하여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소련에 망명한 CIA의 정예 중의 정예 요원이었다. 이 사실이 바로 케네디 대통령 암살에 CIA가 직접 개입하였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U-2 정찰기
1953년 3월,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죽고 그 추도 연설에서 소련의 새 총리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평화 공존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유럽을 팽팽하게 감쌌던 동서간의 대결 분위기가 얼마간 누그러졌고,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59년 5월, 냉전 시대의 대표적 인물인 미국의 국무장관 존 덜레스가 사망하자 미 대통령 아이젠하워와 소련의 수상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드디어 대화를 시작하였다.
1959년 9월에는 흐루시초프의 미국 방문이 실현되었고, 이어 다시 프랑스 파리에서 4개국 수뇌 회담을 갖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바야흐로 2차 대전 후 시작된 10여 년간의 동서간의 냉전이 종식되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CIA의 알렌 덜레스를 비롯한 워싱턴의 보수세력은 이와 같은 변화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상황을 다시 되돌려놓기 위한 음모를 꾸미게 된다.
당시 미국은 앞선 기술력으로 소련 영토의 상공을 정찰 비행하고 있었는데, 그 비행에 사용되던 첩보정찰기가 바로 U-2기였다. 소련도 그러한 정찰 비행에 대한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미국의 정찰기가 워낙 초고공을 비행하고 있었던 데다가 소련의 기술력이 미국의 기술에 아직은 못미치는 탓으로 대공 미사일을 발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격추시키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미국의 정찰 비행과 그로 인한 자국의 영공 침범에 대하여 소련은 그저 모른 척하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었다. 알렌 덜레스는 바로 그 U-2 정찰기의 비행 스케줄을 소련에 넘기려 한 것이다.
물론 U-2기의 용도가 다한다 하더라도 미국의 전략적 우위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덜레스는 그와 같은 계획을 세울 수가 있었다. 이때 이미 차세대 초음속 정찰기인 SR-71기가 록히드 사에 의해 개발이 완료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알렌 덜레스는 일급 요원인 오스왈드를 통하여 U2기의 비행 루트, 비행 속도, 비행 고도 등이 포함된 정찰 스케줄을 소련측에 넘기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오스왈드는 이 위험한 명령을 아무 이의 없이 받들어 소련으로 망명, 그 정보를 소련 정보 당국에 넘겼고, 소련의 방공군은 여기에 맞추어 대공 미사일의 성능을 조정하여 드디어 1960년 5월에 결국 미국의 U-2기를 격추시키기에 이른다.
SR-71 정찰기
U-2 정찰기 앞에 선 프란시스 게리 파워스(오른쪽). 소련 상공에서 격추되어 포로가 된다.
이 사건은 덜레스가 바란 대로 양국의 화해 무드에 찬물을 끼얹어 동서간의 관계를 악화시켰으며, 4개국 정상 회담이 이로 인하여 무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네바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던 무장 해제와 핵무기 제조 반대 회담도 그 영향으로 모두 백지화 되고 만다. 알렌 덜레스와 CIA는 만족했고 많은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이 동서관계가 다시 과거의 대치 상태로 돌아간 데에 대하여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리 하비 오스왈드는 소련에 눌러앉아 소련군 대령의 조카딸과 결혼하여 살게 되었는데, 다시 2년 후 이번에는 소련의 정보당국에 의하여 미국으로 돌려보내지게 된다. 부부가 함께였다. 오스왈드는 1962년 6월에 소련인 부인과 함께 미국에 돌아왔는데, 그는 미국의 주적국인 소련에 망명을 하였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 정보당국에 의하여 체포되거나 또는 조사를 받거나 한 일이 전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오스왈드가 CIA의 요원이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이후 그는 CIA에 의하여 텍사스 주의 달라스에 자리를 잡고 살도록 배려되었다.
오스왈드 증거만큼이나 확실하게 CIA가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에 직접 개입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또 다른 매우 강력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1963년, 케네디의 저격이 일어났던 달라스 시의 당시 시장이 2년 전에 케네디에 의하여 CIA 부국장 자리에서 해임당한 찰스 카벨의 친동생인 얼 카벨(Earle Cabell)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카벨이 직위에서 해임당한 분풀이였을 것이다 하는 단순하고도 막연한 짐작 이외에 보다 확실한 증거가 있다.
얼 카벨
먼저 거사 장소로 텍사스 주의 달라스가 선택된 이유를 살펴보기로 한다. 음모자들이 달라스를 암살 장소로 선택한 이유 중 첫 번째는 케네디의 흑인 공민권 정책에 대한 남부 주민들의 반감을 이용하고자 함이었다. 케네디는 흑인에게도 백인과 똑같은 권리를 인정해주는 법안을 만들려 하고 있었고 이는 미국의 남부 보수 사회로부터 격렬한 반대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보수적인 정치 풍토를 가진 달라스라면 일의 뒤처리가 더 쉬울 것으로 생각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극우 인사에게 혐의를 떠넘길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의 인권 상황은 흑인과 백인이 같은 대학교에 다니지 못할 만큼 심각한 수준이었다. 1960년대 초의 미국 이야기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텍사스의 유지들인 석유업자들이 그들과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세 번째 이유는 달라스가 속해 있는 텍사스 주가 현직 부통령인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의 정치적 근거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달라스가 선택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도시의 시장인 얼 카벨이 그들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1963년의 달라스 시장, 얼 카벨은 케네디에 의하여 CIA 부국장 자리에서 쫓겨나 당시 부호 하워드 휴즈(Howard R. Hughes)의 상담역으로 있던 찰스 카벨의 친동생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달라스 시장이 그들의 사람이었던 것이 어째서 CIA가 개입되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되는 것일까?
원래 달라스 시에서의 유명 인사의 시가행진 루트는 시 한가운데 있는 메인 스트리트를 따라 곧장 직진하여 행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번의 케네디 대통령의 퍼레이드 루트는 시장 얼 카벨의 직권에 의하여 곡선 루트로 바뀌어져 있었다. 이와 같은 시가행진의 루트 변경은 그들의 작전에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한 포인트였다. 왜냐하면, 목표가 직진하고 있을 때에는 제1차 사격이 빗나갔을 경우, 목표 차량이 가속하여 달려버리면 도저히 목표물을 따라 맞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변경된 루트에는 거의 U-턴에 가까운 좌회전을 해야 하는 장소가 있었으며 따라서 이때 퍼레이드 차량들은 매우 감속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이 순간이 바로 사격을 위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CIA와 마피아가 작전의 전반부, 즉 가짜 히트맨인 오스왈드의 준비 등에서 암살 그 자체까지를 맡았던 데에 비하여 FBI는 작전의 후반부인 사후 처리를 주로 담당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그룹들의 임무가 적극적인 성격의 것이었던 데에 비해 FBI의 임무는 소극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이 사후 처리 또한 작전의 최종적인 성공에는 매우 필수적인 요소였다. 매끄럽게 사건의 수사를 진행하여 자신들에게는 전혀 혐의가 가지 않도록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FBI가 케네디의 제거에 가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죽음을 원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에 대답하기에 앞서, 먼저 이 질문은 왜 존 에드거 후버가 케네디를 제거하려 했을까로 바꾸어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후버는 당시 이미 39년째 FBI의 국장으로 재임하고 있어 FBI 내에서는 신과도 같은 대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에드거 후버가 케네디를 없애려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첫째로는 말 그대로 후버가 케네디 형제를 미워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원래 케네디 이전의 전임 미국 대통령 중 FBI 국장인 에드거 후버를 싫어하지 않았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특히 후버와 사이가 안 좋았던 사람은 해리 트루먼이었다. 트루먼 대통령과 후버는 CIA의 창설을 둘러싸고 갈등을 보인 적이 있었는데 트루먼이 전임인 루즈벨트 대통령의 구상에 의하여 1944년부터 시작된 CIA의 창설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가자 후버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것을 저지하려 하였다. 정보를 혼자 독점하고자 한 욕심, 권력욕 때문이었다. 1948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후버는 어떻게든 트루먼 대통령을 재선시키지 않으려고 대통령의 자리에 두 번째로 도전하는 공화당 후보, 뉴욕 주지사 토마스 듀이를 적극 지지하여 그의 당선을 위해서 열심히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이 트루먼이 당선된 일도 있었다.
토마스 듀이의 대통령 선거 운동
모든 대통령들이 다 에드거 후버를 미워했음에도 그를 해임시키거나 그의 권력을 제한하려고 들었던 대통령은 또한 한 사람도 없었는데 이는 에드거 후버가 가진 비밀정보들 때문이었다. 후버는 FBI 조직을 이용하여 고위 정치인들에 대한 정보 파일을 만들어서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이 바로 그의 힘의 원천이었는데 놀랍게도 여기에는 대통령의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파일의 내용은 추잡스러운 것들이 대부분으로 예를 들자면 그 속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영부인인 엘리노어 루즈벨트(Eleanor Roosevelt) 여사의 혼외정사 건, 트루먼 대통령과 캔자스시티의 보스인 토마스 팬더개스트와의 검은 관계, 린든 존슨 부통령이 과거 1948년의 텍사스 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겨우 87표 차이로 힘겹게 승리하였던 것이 사실은 투표 조작을 통한 부정이었다는 사실 등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었다는 뜻이다. 후버는 이러한 비밀정보를 이용하여 워싱턴의 고위 관료들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가 있었고 심지어는 대통령까지도 협박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엘리노어 루즈벨트
케네디의 복잡한 여자관계는 후버에게 막대한 양의 정보를 가져다주었고, 물론 후버는 이것을 가지고 케네디를 협박하는 데에 마음껏 사용하였다. 케네디는 어쩔 수 없이 후버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으나, 1964년이 되기만 하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었다. 케네디는 196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이 재선되기만 하면 후버를 제거할 수 있는 훌륭한 찬스가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64년 12월이 되면 공무원으로서 후버가 정년퇴임의 연한이 되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케네디는 자신의 의중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으나 후버는 케네디의 재선이 곧 자신의 권력의 끝이라는 사실을 역시 잘 깨닫고 있던 중이었다.
그리고 또한 케네디의 자유스러운 여자관계에 대하여 후버는 일종의 질투와 함께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도 생각된다. 동성연애자였던 후버는 원래 젊었던 시절에는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였지만 여자들로부터 별로 인기가 없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러한 후버에게 미인인 부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한 전혀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즐기고 있던 케네디는 강력한 질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보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던 후버에게 케네디의 화려한 여성 편력은 용서할 수 없는 도덕적인 타락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원래 존 F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와 에드거 후버의 관계는 그렇게 사이가 나쁜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정치적 성향은 매우 비슷한 것이어서 조셉 케네디는 후버를 좋아했고, 시간이 지나며 후버의 권력이 커지게 되자 점차 그에게 아부하는 모습까지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그의 아들들인 존과 로버트 형제가 한 사람은 국가의 수반이 되고, 또 한 사람은 후버의 직속상관이 된 후부터 후버와 케네디 가문의 사이는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로버트 케네디는 대통령인 형에 의하여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친동생에게 법무장관이라는 큰 지위를 맡긴 데 대해 대통령이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로버트 케네디는 변호사였으며 일찍부터 상원 조사위원회 등에서 법률고문으로 일한 적도 있어서 법무장관의 직무를 수행하기에 그리 자격이 모자란 사람은 아니었다. 젊은 법무장관은 취임 직후부터 후버가 그토록 그 존재를 부인해 온 조직범죄단에 대한 수사를 강화하려 하였고, 이어 FBI 국장의 대통령 독대를 금지하는 등 후버의 비위를 거스르는 일을 계속 진행해 나가, 시간이 지날수록 에드거 후버가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에 대하여 가지게 되는 반감은 깊어만 갔다.
그리고 후버가 암살 음모에 가담하게 된 이유에는 이러한 사실들과 함께 역시 랜스키로부터의 협박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랜스키는 후버가 그의 심복부하인 클라이드 톨슨과 한 동성연애자 파티에서 함께 성행위를 하고 있는 사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마이어 랜스키, 프랭크 코스텔로 등이 후버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큰소리를 치고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였다.
랜스키는 금주법 시대에 갱들과의 동업으로 떼돈을 벌었으며, 일반 사람들에게는 재벌이자 자선 사업가로 알려져 있는 루이스 로젠스틸(Lewis S. Rosenstiel)로부터 그 성행위 사진을 입수하였는데, 로젠스틸이 그 사진을 입수한 경위는 그 자신 역시 동성연애자로서 후버와 톨슨의 그 사진이 찍히게 된 그룹 섹스 파티에 함께 참석하여 사진을 찍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루이스 로젠스틸
후버는 이와 같은 약점 때문에 로젠스틸을 위한 입법 로비를 하게까지 되는데, 재고 위스키에 대한 면세 기간을 늘려주는 것이 그 내용인 1958년의 포랜드 법안(Forand Bill)이 바로 그것이다. 포랜드 법안은 일반인들의 생활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법령이었으므로 그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매우 적으나, 이 법안의 통과로 인하여 발생한 루이스 로젠스틸의 이익은 엄청나, 그의 주류 회사 창고에 가득 쌓인 재고 위스키에 대한 면세 연한이 12년으로 연장되며 생긴 직접적인 이득 이외에도, 이로 인한 그의 회사의 주가 상승으로 단 하루만에 3,300만 달러에 해당하는 거액의 이익을 챙길 수가 있었다. 이 법안의 통과를 위한 로비로 당시 상원의 민주당 원내총무였던 린든 존슨은 로젠스틸로부터 50만 달러를 받았으며, 다른 많은 유력 정치인들에게도 로비 자금이 건네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FBI가 대통령의 암살 사건에 깊게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는 무엇일까? 여기에도 역시 확실한 물증은 없으며, 오직 정황증거들만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인데, 우선 첫째는 에드거 후버가 케네디의 죽음으로 인하여 큰 이익을 보았다는 것이다. 즉, 후버는 1964년 12월로 만 70세의 나이가 되어 FBI 국장직으로부터 물러나야 했으나, 케네디의 후임인 존슨 대통령에 의하여 1964년 5월부터 FBI의 종신국장으로 임명된다. 즉, 에드거 후버는 나이가 들어서 죽는 그날까지 FBI의 국장 자리를 유지한다는 뜻이다. 후버의 FBI 재직 40년을 기념한 특별 대통령령 제10682호에 의한 것이었다. 미국의 주요 권력기관 중의 하나인 FBI의 국장직 임기가 종신이었다는 것은 한번 다시 음미해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케네디의 암살 후 그 사건의 자세한 경위를 밝혀내기 위하여 존슨 대통령은 국가의 원로들로 구성된 한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 위원회의 이름은 위원회의 수장 이름을 따서 보통 워렌 위원회(Warren Commission)라고 불린다. 워렌 위원회는 전속의 수사기관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FBI와 CIA가 제공하는 정보를 가지고 판단만을 하였는데, 특히 이 위원회에 대하여 거의 독점적으로 정보를 제공한 기관은 바로 FBI로, 위원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FBI는 많은 올바른 정보를 감추거나 왜곡된 정보를 흘리는 방법으로 워렌 위원회의 판단을 그릇된 방향으로 몰고 갔으며, 또한 에드거 후버는 그들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였다.
워렌 위원회의 멤버는 모두 7명으로 연방 대법원장 얼 워렌(Earl Warren), 민주당 소속의 조지아 주 상원의원 리처드 럿셀(Richard Russell), 공화당 소속의 켄터키 주 상원의원 존 셔먼 쿠퍼(John Sherman Cooper), 민주당 소속의 루이지애나 주 하원의원 헤일 보그스(Hale Boggs), 민주당 소속의 미시간 주 하원의원 제럴드 포드(Gerald R. Ford), 전 CIA 국장인 알렌 덜레스, 변호사이자 전 OSS 간부였던 존 맥클로이(John J. McCloy)의 7인이 바로 그들인데, 후버가 협박을 한 것으로 알려진 위원은 제럴드 포드와 헤일 보그스의 두 사람이다. 특히 제럴드 포드는 그전부터 후버에게 그의 일신상의 약점을 잡혀 FBI를 위한 협조 활동을 적극적으로 해왔다고 한다.
워렌 위원회의 멤버들
워렌 위원회의 수장인 얼 워렌 대법원장은 1948년의 대통령 선거 시 토마스 듀이의 런닝메이트였으며, 꼭 그러한 이유가 아니었더라도 에드거 후버나 리차드 닉슨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원래 가까운 사이였던 사람이고, 제럴드 포드 위원은 하원의원 중 가장 CIA와 친한 사이로 평판이 나있던 사람이었으며, 알렌 덜레스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존 맥클로이 위원은 석유 회사인 스탠다드 오일 사의 오랜 고문 변호사이자 록펠러 재단의 이사, 유나이티드 프루츠 사의 이사 등의 직함을 가지고 있어 대기업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었으니 이와 같은 위원들로 구성된 워렌 위원회가 후버의 FBI로부터 정보를 공급받았을 때, 그들이 케네디의 암살 사건에 대하여 어떤 결론을 낼지는 불을 보듯 환한 것이었다.
특히 알렌 덜레스 전 CIA 국장의 경우에는, 일찍이 케네디 대통령이 피그만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를 CIA 국장직에서 해임시킨 바 있었는데, 신임 존슨 대통령은 케네디 죽음의 내막을 조사하는 조사위원회의 위원 중 한 명으로 다시 그를 불러들인 것이다. 케네디에 의해 CIA 국장 자리에서 밀려난 사람이 케네디의 죽음에 대하여 조사하게 되었을 때, 얼만 공정하게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을지 의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알렌 덜레스는 후에 존슨 대통령에 의하여 국가 안전보장위원회(NSC)의 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한다.
워렌 위원회의 위원 중 한 사람인 헤일 보그스 하원의원은 후버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워렌 위원회 내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과 관련이 꼭 있다는 것은 아니나 보그스 의원은 닉슨 대통령 재임시이던 1972년 10월, 그가 탄 비행기가 캐나다 상공에서 행방불명됨으로써 영원히 실종되어버리고 만다. 보그스 의원은 차기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기에 가장 유력한 사람이었다. 하원의장은 대통령 유고시 계승 서열 2위인 큰 영향력을 가진 자리이다. 그가 만일 살아있었더라면 미국 하원의 의장이 되어 정가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으리라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추측이다.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무성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하여 출발한 워렌 위원회는 10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저격은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이었으며 당시 대통령의 뒤쪽에 위치한 한 건물 6층에 대기하고 있던 리 하비 오스왈드가 3발의 총탄을 발사하여 그 중 1발이 대통령에게 맞아 그의 목숨을 빼앗을 정도의 치명상을 입힌 후, 대통령의 몸을 관통하여 다시 앞좌석에 있던 코널리 주지사에게 상처를 입혔던 것이라고 발표한다. 그리고 저격의 배후에 아무런 음모도 없었으며, 암살 동기는 소련에 망명을 한 적까지도 있는 공산주의자가 오스왈드가 자유주의자인 케네디 대통령을 혐오하여 순전히 혼자 생각으로 그를 암살한 것이라 하였다.
FBI는 처음부터 대통령의 암살을 오스왈드 단독범행으로 결론을 내려놓은 뒤 여기에 다른 모든 증거와 상황을 꿰어 맞추려 노력을 하였고, 이러한 시도 뒤에는 지난 40년간 FBI의 국장이었던 존 에드거 후버가 자리하고 있었다. FBI가 암살 사건에 관한 각종 기록과 증거를 조작하였다는 데에 대해서는 여러 많은 연구가들의 조사, 발표가 있었다.
첫댓글 후버가 FBI 종신 국장이었다는 건 미국이란 나라에서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