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
새벽6시.
이제 막 틔어오는 여명을 짊어지고 항구로 향한다.
새벽 이슬을 머금은 山河는 더없이 조용하다.
가벼운 침묵이 새벽공기에 가득하다.
車窓에 어리는 가을풍경은 정결하고 맑다.
포구이기에는 너무 크고 항구이기에는 너무 작은 바닷가에 도착한 시간은 6시 50분.
거쎈 파도가 몰아친다.
이상하다.
바람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데 웬 파도?
300여톤급의 페리호가 파도를 가르지만 벅찬 것 같다.
뱃전에 부딛친 파도가 배 안까지 튄다.
모두들 말이 없다.
여기 쯤일 것이다.
10여년 전에 298명의 목숨이 비명횡사한 곳이.
그날도 파도가 엄청났다지?
삼각파도에 맞아 페리호가 뒤집힌 곳이?
격포항을 출발한 배가 위도라는 섬에 도착한 시간은 7시 50분.
육지와는 14.4km가 떨어진 자그만 섬이다.
위도,식도, 치도. 상왕등도, 하왕등도 등몇개의 섬으로 이루어 졌으며
인구는 약 1700여명.
10월 3일.
개천절(開天節)이다.
하늘이 열린 날이란다.
단군 할아버지가 장가간 날이란다.
곰처녀에게 말이다.
우리나라의 샤머니즘(토속신앙)의 극치를 이룬 단군설화(檀君說話)다.
황당하지만
神은 언제나 神秘를 먹고 살기에 비밀을 줄 수 밖에 없다.
아무튼,
단군 할아버지 덕택에 나는 특근을 하고 몇푼의 돈을 더 버는 셈이다.
밤에는 낚시를 나갔다.
파도는 거쎄어도 낚시는 되었다.
바닷장어 몇마리.장대. 돔. 등 등.
모두 놓아 주고 거쎈파도를 정면으로 받으면서 서있었다.
10월 4일.
동료 하나가 불미스러운 일로 인하여 섬을 떠났다.
어쩌면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무척 성실하고 마음도 좋은 녀석인데...
그래서 내가 무척 아끼는 녀석인데...
그가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사고는 없었을 것이다.
그랬던가.
악마가 인간에게 올 시간이 없을 때는 술을 권한다 했던가..
오후에는 산 기슰에서 일했다.
어느 연인 한쌍이 내 옆에 차를 세우더니 이렇게 묻는다.
여기에 <핵 페기장>의 예정지가 어디라예?
예?
경상도에서 왔군.
바로 저깁니다. 저 능선 아래쪽입니다.
그 곳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을 뒤로하고 있으며 정 남향이라 따뜻하다.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바다 멀리에는 영광의 원자력 발전소가 있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 유명한 선운사의 뒷산이 보인다.
동백꽃과 풍천장어로도 이름이 나있다.
조금만 더 고개를 돌리면
大詩人 서정주의 생가가 있다.
<국화옆에서>의 詩와 <冬天>이란 詩가 아슬하다.
그 옆에는 현 고려대학을 창건하고 동아일보를 창간한
김성수씨의 생가도 보일 듯 하다.
어찌됐거나,
이곳은 명당자리같다.
이런 곳에 <핵>이라니...
물리학에서 보면
핵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문명에는 아주 유익하지만 그렇지만 재앙을 담보로 하고 있다.
만약 전기가 없다면?
문명은 다시 100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계바늘을 꺼꾸로 돌려야 하는 참담한 비극이 재현될 것이다.
문명의 전진을 이어 가자면 핵이 필요한데 그러나 핵은
핵폭탄이 되거나 핵이 불안전한 상태로 새어 나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어쩌자고 퀴리부인은 우랴늄을 발견했단 말인가.
이곳의 섬 주민은 의외로 조용하다.
보상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 <부안>은 온통 시위로 뒤덮혀 있고 전투경찰로 가득한데
이곳에는 그 무시무시한 구호로 가득한 프랑카드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며칠 전에 본 프랑카드 하 나.
부안 출신의 목가적詩人 신석정(辛夕汀)씨를 기리는 단체의 현수막 같았는데
詩的인 구호가 너무 인상깊었다.
*** 사람 구름 비 눈은 머물 수 있어도 핵은 머물 수 없습니다.****
10월 5일.
일요일이다.
神이 내어 준 안식일이다.
오늘도 일을 한다.
여전히 바람이 거쎄다.
춥다.
벌써 겨울을 느껴야 하는가?
어선 한 척이 뒤집혔다는 우울한 소식이 들린다.
10월 6일.
잠시 쉬는 시간에 동료들이 바닷가의 조약돌 밭을 뒤진다.
꼭지돌(?)을 찿는단다.
농담들이 오간다.
흐메나~ 이 꼭지돌은 꼭 우리 마누라 것과 같네?
옴마나~ 이 돌은 탱탱하게 생겼구마. 처녀 것이 틀림없제?
으히히히히~요놈의 돌은 디게 못생겼다. 니 마누라 것이지?
꼭지돌은 여인의 젖가슴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가만히 살펴보니 영낙없는 여인의 젖가슴이다.
둥굴게 자리하다가 끝 부분은 젖꼭지와 흡사하게 전혀다른 색깔로
형태를 갖추고 있으니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 참으로 용타.
그런데 희안하게도 여자 관광객이 제일 많이 주워 간단다.
참으로 별꼴이다.
나는 관심없다.
나는 곱게 다듬어진 조약돌에서 시간의 흐름과 세월의 흐름을 읽는다.
얼마나 많은 세월동안 파도에 씼기었기에 저토록 곱게 다듬어 졌단 말인가.
태초에는 사나운 바위나 돌맹이였을 것이다.
그것이 저토록 곱게 다듬어 지다가 모래가 되고 그리고는 뻘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수억 또는 수십억년의, 세월이 씼기워 간 현장에 있는 것이다.
문득
류시화의 싯귀가 생각난다.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냐고
물안개처럼
몇겁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왜 이 詩人은 물안개라는 명징한 물질명사에서
몇겁의 인연을 사랑으로 승화시켰고
더더구나 세월과 부합시켜 쉽게 부서진다 했을까.
오! 詩人이여!
사랑이 영원하지 못한 것은 세월탓이라네.
무엇이든 영원한 것은 없는 것!
사랑도 저 조약돌처럼 곱게 다듬어 지다가 끝내는
모래가 되고 갯뻘이 된다네.
그래서 사라지는 아름다움도 모두 사랑의 몫이라네.
10월 7일.
섬에 들어 온지 벌써 6일째다.
눈만 뜨면 바다가 보이고 파도 뿐이지만
육지로 가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아직 내 보호가 필요한 어린 아들녀석이 맘에 걸리지만
내가 만약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여건만 주어 진다면 여길 떠나고 싶지 않다.
여기는 조용하다.
더없이 평화스럽고 여유롭다.
혼란스럽지 않고 바쁘지도 않다.
천천히 바다를 누비는 저 고기잡이 배들.
등대는 여러개 있으나 불은 밝히지 않는다.
불을 밝히지 않아도 밤은 오고 그리고 새벽도 온다.
배가 바위에 부듣쳐 침몰하는 것도 없다 했다.
오후 5시.
예정보다 하루 빨리 일을 끝냈다.
모두가 열심히 일한 결과다.
이제 한시간 후면 이 섬을 떠난다.
바닷가에 나갔다.
맨발로 모래위를 거니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다.
밟히는 모래의 감촉이 부드럽고 정답다.
모래위에 써놓은 글들이 가득하다.
관광객이거나 낚시꾼들이 단체로 놀러 왔다가 써놓은 것 같다.
Elcondo pasa. 철새는 날아가고.
그렇군.
오고 가는 것이 어디 철새뿐이랴만
사랑마져도 철새의 생리를 닮았다는 사실에 잠시 회의를 느낀다.
바람은 바다 멀리로 부터 불어 온다.
바람은 아마도 히말리아의 고봉을 넘어서 중국의 거대한 黃河江을 건넜을 것이며
서해바다를 지나 이곳까지 왔을지도 모른다.
저기 저 돌섶에 핀 들국화도, 神이 제일 좋아 한다는 코스모스꽃도
바람이 전해주는 먼 이역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제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은
작별의 시간을 위하여 정갈하게 즙을 모은다.
그것들은 새로운 탄생을 위하여 자신을 태우는데
나는 누구를 위하여 자신을 태울까나.
그토록 간절한 그리움까지도 가슴 저 깊은 곳에 묻어야 하며
누군가를 위해 한 편의 詩를 쓰는 것도 사치인데
나는 누구를 위하여 이 가을을 노래하고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위하여
묘비명을 준비할거나.
떠날 시간이다.
바다 속으로 잠기는 노을이 그리움처럼 서럽다.
장엄하고 비장하다.
바다가 피빛이다.
저벅저벅 저 노을 속으로 걸어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다.
아득하고 침전된 저 빛깔.
原始의 저 빛깔에 내 혼을 송두리체 태우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돌아가야 한다.
권태롭고 나른한 내 둥우리에는 나를 기다리는 어린 아들이 있다.
유일한 희망이고 위안이며 나를 힘겹게 버티게 하는 초롱한 눈망울이 있다.
그녀석을 위해서라도 나는 나의 슬픈 종극(終劇)의 뇌관을 유예시켜야 한다.
자... 그러면 안녕. 섬이여! 노을이여!
***** 이 글은 작년 가을에 잠시 섬(島)에서 일하다가 쓴 글입니다.
지금은 봄이라서 감각에 맞지 않을 것이나 그러나
그냥 올리니 이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