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 주일성수, 십일조에 관하여
I. 한국교회의 전통 새벽기도에 관한 견해
1. 먼저 성경의 가르침에서 새벽기도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대로 예수님께서는 새벽 오히려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막 1:35). 예수님은 자주 조용한 시간에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 5:16),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 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마 14:23,25), 밤 사경이면 새벽 3-6시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기도하신 셈입니다.
한편 유대인들은 기도시간을 정해두고 기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 9시 기도시간"(행 3:1, 10:30)처럼 고정된 기도시간이 있었습니다.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는 것도 좋은 습관이요 전통이지만, 때로는 바리새인처럼(또 많은 유대인처럼) 외식적인 기도가 될 위험도 없지않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과 같이 오랜 시간 교제할 수 있는 장소를 그때 그때 찾아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우선 예수님의 방법대로 각자 자기에게 가장 조용한 시간과 장소를 찾아서 기도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유롭게 시간과 장소를 내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시간과 장소를 정해 놓고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한국교회는 새벽기도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새벽기도는 그 배경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했으나, 추측컨대 초대교회 때 대부분의 신자들은 국문 해독도 어려웠으므로 성경을 혼자 읽고 묵상할 수 없는 아쉬움을 채워주려고 목회자들이 같은 시간에 교회당으로 모이게 하여 성경을 가르치면서 기도하게 한 것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또 그 당시에는 조명 시설도 불편하였고, 남편이나 가족이 다 믿지 않기 때문에 집에서 성경을 읽고 찬송하고 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었으므로 교회당에 모여서 새벽기도회를 갖도록 안내하고 훈련시킨 것은 아주 귀한 구상이며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그러한 혜택을 누리고 있고 유익한 전통입니다.
3.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개선책과 보완책
다만 몇 가지 개선 또는 보완책이 강구되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첫째, 시간이 좀 더 다양하면 좋겠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대부분의 교인이 농사일을 하고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저녁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므로 새벽기상이 용이하였지만, 지금은 새벽 5시 전후가 많은 도시인들, 자영사업을 하는 이들에게는 잘 맞지 않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6시, 7시까지 두 세 차례 새벽기도회 시간이 마련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겠습니다.
물론 교역자들에게는 부담이 더 많아지기도 하지만 여러가지로 연구되면 좋겠습니다. 혹은 공식기도회는 아니더라도 교인들이 자유롭게 6시나 7시에도 와서 기도할 수 있게 하거나 교인들끼리 서로 의논하여 같은 시간에 모여 찬송부르고 성경읽고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는 교역자 없이도 기도회를 할 만큼의 수준이 있는 분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둘째, 새벽기도회의 공적 시간이 끝난 후 전등을 일부 켜두어서 혼자서 성경을 더 읽고 묵상하면서 기도할 분들의 편의를 도모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요즈음은 성경 묵상하는 분들도 많아졌고 또 기도제목들(선교사 소식 등)을 눈으로 보면서 기도하는 분들도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런 도움을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셋째, 교회당에 새벽에 전혀 못 나오는 신자들(주부나 학생 기타)을 위하여서는 각자가 자기 집이나 직장에서 다른 가능한 시간에 꼭 낮기도 시간이라도 갖도록 권장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9시 기도시간"처럼. 이 경우 성경을 어느 것을 읽을 것인지 읽고 어떻게 혼자서 묵상하며 기도 제목을 찾을 것인지 등 간단한 안내 책자가 교회에 의하여 마련되는 것도 좋겠습니다. 물론 시중에 나와 있는 성경 묵상 자료를 사용하면 용이할 수도 있습니다.
네째, 1년간 읽을 성경 본문이 제시된 읽기표 등이 있으면 연초에 전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새벽기도회 때는 물론이고, 교회에 못 나오는 교인들도 집에서 같은 본문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도록 훈련시키면 목회에 도움이 되며 가정 심방 때 확인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4. 결론
영국 같은 나라의 성도들은 각자가 기상하면서 자기 침실에서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새벽기도를 성실히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개인에게 맡기는 일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교회당에 모이게 하여 목회자의 도움을 받게 한 점에서 훨씬 적극적이고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자랑스런 전통입니다.
다만, 새벽기도회에 나오지 않는 많은 교인들이 방치되기 보다는 집에서라도 꼭 기도시간을 갖도록 훈련도 시키고 격려하면 좋을 것입니다. 집에서 개인적으로 할 경우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길잡이 참고 교재가 주어지는 것이 안전할 것입니다.
Ⅱ. 주일 성수와 주일 밤 예배에 대한 입장
편의상 주일성수 문제와 주일밤 예배에 대하여 나누어서 설명하겠습니다.
Ⅱ-Ⅰ. 주일 성수에 대한 입장
1. 안식일의 신학적 의미
안식일의 신학적 의미는 교파나 학자에 따라 각이한 견해가 있기도 하였지만 현재까지 크게는 두 가지의 입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1) 창조규례(creation Ordinance)에 따른 해석 - 특히 청교도들과 미국 Westminster교수들, 2) 구속사적 해석 - 칼빈과 기타 구속사적인 해석을 지지하는 학자들.
창조규례를 이해함에 있어서, 아담의 범죄와 타락 이전에 주신 계명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사건과 관계 없이 영원한 계명들이라고 해석하는 분들은, 노동법, 생육법, 결혼법, 안식일법들을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에 의한 회복이나 완성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어서, 지금도 문자적으로 그 계명(규정)들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구속사적인 해석을 취하시는 분들은, 아담의 타락 이전에, 아니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범죄를 예견하고 계셨고,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재창조할 작정(경륜)이 서 있었다고 봅니다(엡 1:4, 2:9,11; 롬 16:25). 그래서 창조규례들도 그리스도의 구속사건과 함께 완성되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결혼법과 생육법도 신약에서는 새로운 의미와 원리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결혼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해석할 때(엡 5:22-33) 창 2:24(타락전의 규정)이 엡 5:31에서 거론되면서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5:32).
생육법에 있어서도, 창 1장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결혼해서 많은 자녀를 낳아야 하고 그렇게 해서 땅에 충만해야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마 19:12)고 하시면서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마 19:11)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고전 7:1),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전 7:8),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고전 7:40)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물론 혼인을 금지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딤전4:3).
안식일 규정도 성경 자체가 구속사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신 5:12-15 중에서 특히 15절을 보면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결국 노동에서의 휴식이나 안식은, 애굽의 노예 생활과 고역에서의 안식과 해방으로 재해석되고 있고, 이는 죄와 사탄의 얽매임에서 해방되어 안식을 누릴 것을 충분하게 암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8년동안 귀신들렸던 여자를 낫게 하실 때에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눅 13:16)고 강하게 회당장에게 반박하였습니다.
출 31:13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 즉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거룩하게 하시는 구속행위의 표징이라고 하셨습니다.
겔 20:12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안식일 규정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의미는 첫 창조된 인간들 재창조하시는 사건 곧,구속사건을 설명하기 위하여 표징으로 제정하신 날이라는데 있습니다.
이를 더욱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 요 5:17-29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셔서 아버지께서 안식하셨다는 생각에 정면으로 도전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안식일에 쉬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안식일(또는 주일)에 더 많은 일을 하십니다. 우주를 운행하시고, 수 많은 생명(어린아이)이 태어나게 하시고, 특히 수많은 생명을 죄에서 해방시켜 구원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아래와 같이 주장하십니다. 요 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이것은 안식일에 그렇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칼빈은 이 부분에 대하여 자세하게 주석을 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그의 에스겔 주석에서도 예레미야 주석에서와 같은 식으로 안식일을 성결과 거룩의 표로 해석하고 있다. 안식일은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질 성결의 상징인 영적 안식의 예표가 되는 사실이 거듭 강조되어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일이 단지 외형적 상징이 됨과 동시에 영적 신비를 함께 갖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안식일은 보이지 않는 은혜의 보이는 표이기 때문에 성례이다'(에스겔주석 2권 p.302).
"20절을 주석하면서 칼빈은, '그러기에 우리는 안식일을 중생의 성례(a sacrament of regeneration)라 부른다'고 하였다"(동산 p.311. 신학지남 통권 207호. 박희석 교수의 글 '칼빈의 안식일 신학' p.95에서 인용).
따라서 안식일 계명은 안식년이나 희년이나 다른 여러가지 절기 계명과 함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성되면서 그 의식적인 부분들은 폐지되어야 하고, 본래 그림자인 안식일 계명이 나타내려고 하던 참된 의미(실체)가 살아나면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골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칼빈의 견해도 찾아 봅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에 따르면, 구약에서 아주 강하게 지켰던 영적 휴식의 일부인 안식일의 의식적 요소(ceremonial element of the Sabbath)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안식일의 의식적 요소는 지금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필요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인하여 이 계명의 의식적인 부분들이 폐지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자신이 진리의 본질이셨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는 모든 형상들(figures)이 사라져야 한다'(기독교강요 p.397).
"그리스도의 초림 때 이스라엘에게 약속되어진 이 영적 안식의 본질은 완전히 성취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안식일이 신약시대에는 폐지된 것이며,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신학지남 207호 p.96).
박윤선 박사는 아래와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히 4:4-11의 말씀에서 '안식'이란 것이 하나님께서 취하시는 천국의 복을 의미한다'(Grsheide). 따라서 인류도 그 날을 지킴으로 땅에서 하나님의 안식의 나라와 교통하게 되고, 그 나라를 소망으로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곱째 날을 복주사'란 말씀이 역시 그 뜻이다.
그는 온 인류로 하여금 안식일에 하나님께로 나아와서 영적 안식(예배와 말씀을 통하여)에 이르기를 원하신다"(신학정론 6권1호. 주일 성수와 십일조 문제 p.146).
이 글에서 "하나님의 안식의 나라"라는 설명을 하셨는데, 그 나라는 영적으로 이미 지상에 임하여 있으며, 가시적인 교회나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안식일을 교회론에서 다루어야 할 면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교회론적으로 접근하기에 앞서서 구속사적으로 또는 구원론적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위의 글에서 "하나님께로 나아와서 영적 안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셨는데, 그 영적 안식은 "예배와 말씀을 통하여"라고 교회론적 내지 예배론적으로 접근하기에 앞서서 기독론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과 안식을 누림"과 구원론적으로 "거룩한 백성이 됨" (출 31:13; 겔 20:12)으로 접근하면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그림자"(골 2:17)라고 한 것입니다.
창조규례로 보는 입장에서도 이와 같은 영적 안식이나 구원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영적 안식을 "날을 지키는 행위" 안에서 찾으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칼빈은 분명히 의식적 부분은 폐지되었다고 설명한 것은 중요한 이해라고 하였습니다.
2. 안식일의 완성과 의식적 부분의 폐지 여부
구약의 여러가지 율법, 예를 들면 제사법, 절기법, 할례 등에 있어서, 그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등장과 함께 그 본래의 뜻은 완전히 드러나서 완성됨과 동시에 그 의식적 부분은 폐지되었다고 하는 해석에 있어서는 거의 의의없이 일치된 견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십일조와 안식일 계명만은 그 의식까지 지키려고 하는 의도는 타당성이 없습니다. 폐지되면 같이 폐지되어야 하고 지키려면 다른 절기와 의식법도 다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단(개혁측)의 예배모범에서 십일조는 신약시대의 헌금 제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정리해 둔 것은 명쾌한 성경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나 주일성수가 교회론적으로는 중요한 계명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론적으로 장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창조규례라든지 구약법에 의지하여 구약시대에 맞게 해석하지 않는 것이 정당합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아직 구속사가 그리스도의 초림에도 이르지 못한 것처럼 되기 때문에 반드시 깊이 연구하여 구속사적인 해석, 신약적인 해석을 먼저 정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칼빈의 해석만 따를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칼빈이 '날자'에 집착하는 것을 경고한 점은 귀담아 들으면서 다시 순수하게 복음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도록 시도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기독교강요 p.399 참조).
개혁주의 신행협회(한국의 보수교단 교수들과 목사님들로 구성됨)에서 집필 간행한 신학사전에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제 4계명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이후로는 폐지된, 의식법의 일부로 본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안식일 준수는
첫째로, 이스라엘에 국한되었으며, 안식일 준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로서 오는 표징으로(출 31:13,17)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과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날(신 5:12-15)로 주신 것이었다.
둘째로, 십계명에서 우리는 원리적인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즉, '주의 날'은 안식과 예배의 원리를 견지하며, 첫날에 예수의 부활하심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그들의 새 창조와 속박에서의 구원을 상기시키며,
셋째로, 십계명은 구약과 불가분리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반면, 우리는 은혜 언약 아래 있다.
넷째로, 안식일 준수가 기독교인들에게는 의무로 말씀된 곳이 없다(골 2:16,17 참조). 이 외에도 바나바(주후 74), 이그나티우스, 저스틴, 이레니우스, 클레멘트(194), 터툴리안, 유세비우스(주후 315)도 안식일 엄수주의를 반대했다"(동사전 '주일' 항목 p.656).
3.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에서 주일 문제를 다룰 때 안식일과 주일의 상관관계가 위의 개혁주의 신행협회의 신학사전 만큼도 조심스럽게 충실히 다루어지지 않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마 청교도의 영향 탓인 듯합니다. 그들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웨스터민스터 표준서들에서도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는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주일)로 바뀌었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부활과의 관계가 더 충실히 다루어지지 않은 채로 '주일'에만 관심을 두고 설명되어진 아쉬움이 있습니다(대요리문답 116문, 소요리문답 59문).
만일 그 설명대로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는 주일이 안식일이라고 해석한다면, 단순히 요일만 바꾸는 것으로 결론짓기보다 왜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그렇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더 연구하고 설명하여야 하며, 그렇게 한다면 안식일의 의미는 구속사적으로 잘 드러났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셔서 죽으셨고, 그 죽음과 죄의 속박에서 부활하셔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 가셨고 자기 백성의 왕이 되셔서 그 백성에게도 참 안식을 주셨다고 해석한다면,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동시에 구약의 안식일 제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성취되면서 막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 주일에 모이는 주일 예배가 발전하게 된 경위 등은 Paul K. Jewett가 쓴 '주일의 참 뜻'(개혁주의신행협회간행).
4. 주일과 교회 예배
주일은, 물론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고 구원과 해방과 안식을 누리게 된 사실을 감사하면서 완성될 안식을 소망하는 뜻 깊은 날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주일에 모여 그 구원과 안식을 새롭게 맛보면서 함께 예배드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현재의 모습인 교회를 제도적으로 세우셨고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셨으며, 모여서 말씀을 배워야 하고 교제하여야 하고 또 흩어져가기도 하면서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명령하셨으므로 교회는 당연히 모이는 날이 있어야 하고 제도와 조직이 있어야 합니다.
그 교회의 모임은 언제 얼마나 자주 모여야 하는지 규정으로 정해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모였습니다(행 2:46). 그리고 주님이 부활하신 날(주일) 저녁에도 모였습니다(행 20:7).
물론 점차 주일 모임이 교회법에 의하여 정착되어 왔고, 초대교회 때는 공휴일이 아니어서 낮에는 일하러 다니고(특히 노예신분의 신자가 많았기 때문에) 저녁에만 예배드리러 모이다가, 4세기에 공휴일이 되면서 자유롭게 종일 모이게 된 것 같습니다(Paul Jewett의 '주일의 참뜻').
어쨋든 중요한 것은 교회가 세워졌고, 교회는 모여야 하고 모이기 위해서는 시간과 장소를 정해야 하고, 사사로운 일을 억제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교회론적인 주일 예배와, 안식의 참 뜻인 그리스도의 구속사건과 부활사건이 주일이라는 날에 잘 결부된 것은 다행한 일이며 뜻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토요일이던 안식일이 신약시대에는 주일로 바꾸어서 지켜야 한다는 해석은 우연히 그렇게 해석할 만큼 연결이 된 것 같지만, 성경이 그렇게 지시하고 있거나 신학적인 가르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5. 주일성수에 대하여
주일이 안식일 제도의 단순한 날짜의 변경으로 인한 날이라면 주일 성수라는 이론을 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완성되었고 실현되었으므로 안식일 성수는 끝난 것입니다. 이미 안식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어느 날에 특별히 안식할 이유가 없어진 셈입니다. 또 이미 언급한대로 구약의 제도나 의식법이 신약시대에는 폐지되었기 때문에 안식일 법도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론적으로 우리는 예배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일을 예배일로 정한 이상 이날에 우리의 일들을 쉬고 교회 모임에 참석해야 함은 당연합니다. 이 경우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되느냐고 묻는다면 성경에서는 아무런 규정이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고, 예배드리는 일과 교제하는 일과 전도하는 일 등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시간이나 행사나 모임을 약속할 수 있고 약속을 서로가 지키도록 노력할 일입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나 교파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다만 청교도들의 영향을 받은 교회들은 구약의 안식일 법까지 따르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청교도의 영향을 아직 받고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는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주일을 안식일처럼 성수하고 있지 않으며 예배시간이나 교회봉사는 성실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주일성수를 안식일 규정에 따라 하도록 가르치다보니, 농경사회가 아닌 산업사회에서 주일성수가 힘들고, 또 신정국가인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고 세속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주일성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도들이 주일성수의 가르침을 아예 포기하고 무시하는 좋지못한 폐단이 생긴 것 같습니다.
사실 교역자들은 주일성수를 못하고 있고, 많은 교회에서 주일을 범하고(?) 있기 때문에 하루속히 주일성수에 대한 신학적 정리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구약에도 지키려면 연기도 내어서는 안되고, 종들에게 일을 시켜서도 안되고(집을 보게 하거나 공장이나 회사의 당직을 시키거나) 차를 타고 교회에 오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론적으로 예배일로 가르치면 타당성있게 설명하고 또 강조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참고서적 :
칼빈.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4계명 해석.
박희석. 칼빈의 안식일 신학. 신학지남 207호. 1985. 가을호.
Paul Jewett. 주일의 참뜻. 서울:개혁주의 신행협회.
신학사전 서울:개혁주의신행협회.
Ⅱ-Ⅱ. 주일밤 예배에 대한 입장
주일 예배의 중요성이 인식되는 한 주일밤 예배는 아무런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새벽기도회가 성도들에게 여러가지로 도움이 되듯이 주일밤 예배도 그렇습니다. 예배를 여러 번 자주 본다고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교회마다 그 교회의 형편 때문인지 예배시간과 장소에 있어서 여러가지 안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처럼 주일 낮에도 모일 수 없는 경우에는 밤에라도 모여야 할 것입니다. 이부교대 근무 공장에서 일하는 공원들이 많은 교회에서는 낮예배를 두 차례 모이기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소가 협소한 교회는 낮예배도 여러 차례 나누어 모이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교통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밤에 다시 교회에 모이기 어려운 교인들을 위하여 저녁 대신 오후에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주일학생들은 거의 모든 교회에서 오전과 오후에 모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밤에 예배를 드려야 주일 성수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원래 구약 안식일 법대로 하면 안식일은 모이지 않고 집에서 쉬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주일성수는 쉬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모여야 하다보니 어려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저녁예배도 교회론적으로 설명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 예로서, 수요일 저녁예배나 새벽기도회도 교회론적으로 설명하면 정당하지만 주일성수처럼 설명하면 수요일에 나오지 않아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왜 모이느냐하는 점이며,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성도들과 교제하는 것보다 놀러 다니고 취미활동이나 사업에 더 관심이 있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복음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훨씬 더 잘 가르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기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사람에게 주일성수나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바른 방법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참 신자가 아닌 구경군들이나 원입교인이나 가라지들 때문에 교회의 일들을 율법적으로 많은 제도를 운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큰 손실과 피해일 것 같습니다.
Ⅲ. 십일조에 대한 견해
먼저 박윤선 목사의 해석을 소개합니다.
(1) 대한예수교 장로회 헌법주석 pp.111-114, '십일조 헌금문제'
(2) 대한예수교 장로회(개혁측) 예배모범 부록(내용이 같은 것으로 보아서 박윤선 목사의 글로 생각했읍니다).
(3) 신학정론 6권 1호, '주일성수와 십일조 헌금문제', pp.148-151.
(4) 신학정론 4권 2호, 김영철, '십일조의 성경적 의미' pp.334-347.
예배모범 부록 수록
저는 위의 글들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1. 십일조 제도는 구약의 제도였고 의식법이었습니다.
2. 그리스도가 오시면서 십일조를 사용하던 레위인과 제사장제도가 끝나버렸으므로 십일조 제도도 폐지되었습니다.
3. 십일조의 근본정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실현되어야 합니다.
4. 우리는 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기 때문에 내 수입만이 아니라 소유전체(10/10)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5. 그 소유전체(10/10)를 언제나 하나님의 지시나 요구에 따라 바쳐야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6. 하나님의 요구에는 교회운영비, 전도비, 구제비, 교육비 등이 중요한 부분들임을 인정하고 그런 일에 힘써 사용(헌금)해야 합니다.
7. 나 자신이나 내 가정에 필요한 것도 하나님의 의사에 따라 지출하여야 합니다.
8. 십일조란 명목을 유지하면서 십의 십 개념을 넣어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십분의 일에 집착하기 때문에 저희 교회에서는 십일조 헌금 명목을 사용하지 않고, 그때 그때 필요한 것들을 알려서 성심껏 헌금하게 하고 있읍니다.
9. 교회에서는 '헌금'이란 단일 명목으로 수입해서 경상비에 지출한 후 매월 결산보고를 주보에 보고합니다. 그리고 공동의회에서 그 보고를 받고 심의하고 예산이나 지출 내용들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10. 모든 헌금은 반드시 교회를 경유하여 바치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자기들이 관심있는(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교회나 선교사역이나 구제에 자유롭게 직접 지출(헌금)하도록 권장합니다.
다만 무기명으로 하도록 하기 위하여 가급적이면 무기명으로 교회에 내게하고, 교회에서는 그 헌금의 지목대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1. 선교비나 구제비나 특별항목이 제시되기도 하면, 그 때는 그 명목으로 헌금이 바쳐지며, 그 헌금은 그 명목에 지출합니다.
12. 모든 헌금은 무기명으로만 하도록 가르치고 실시하고 있습니다.
13. 자세한 설명은 예배모범의 부록에 너무나 일치하기 때문에 서술하지 않고 그 글을 대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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