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쟁이, 미바회
마태 12,14-21, July 18, 2015
************* 김성래 하상바오로 신부님 강론입니다 *********************
여러분,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에서 자주 보는 풍경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불신지옥! 예수천국!” 마이크에 대고 큰 소리로 외치는 사람입니다. 또, 공원이나 번화가에서 자기 교회에 나오라고 물티슈나 커피를 나누어주는 사람들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예수쟁이”라고 사람들은 욕을 합니다.
천주교가 박해를 받던 시대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 신자들은 ‘조상의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했습니다. 제가 신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신자가 아닌 저희 할머니는 ‘결혼을 안 하고 아이를 안 낳는 남자는 제정신이 아니다.“라며 혼을 냈습니다. 할머니에게 저는 ’예수쟁이‘ 였습니다.
천주교신자들을 믿지 않는 사람이 보면 ‘자기인생을 자기와 아무관계도 없는 예수에게 맡기는 사람들’이고, 또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야비하고 물질적인 사람들을 ‘예수쟁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이 ‘예수쟁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쟁이’라는 말에 중요한 ‘예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지난 7월 1일부터 15일까지 10년차 사제를 위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신앙생활 30년, 사제된 지 10년 만에 그동안 배우고 알게 된 예수라는 사람의 일생을 생생하게 손으로 만져보고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 기간에 한 일들과 방문한 곳을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에 가서 다윗의 별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나자렛에 가서는 예수님이 성모님과 요셉의 보호아래서 자란 곳을 방문했고, 요르단강에 가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은 그 물에 손을 담구었습니다. 광야에 가서는 삭막한 사막에서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갈릴레아 호수는 예수님께서 활동한 곳이고 그곳을 거닐면서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예리고와 베타니아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는 예수살렘을 바라보며 예수님께서 우셨던 곳에도 갔고, 잡히시던 날 밤 번민하며 기도했던 겠세마니에도 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의 십자가의 길도 걸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골고타 언덕에도 가 보았습니다.
이번 이스라엘 성지순례의 가장 결정적인 체험은 이 많은 곳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어서 묻히신 무덤에서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셨는데, 이 무덤은 성지순례장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가장 오래되고, 가장 거룩한 곳입니다. 아주 커다란 예수무덤성당 안에 들어가면 작은 경당이 있는데, 거기는 한 사람 정도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습니다. 그 곳에 예수님께서 묻히셨던 돌무덤이 있는데, 하도 많은 사람들이 만져서 돌이 반들반들하게 빛이 납니다. 그 돌 무덤위에는 나무판이 놓여져 있고, 그 위에 예수님 성화가 있고 천정에는 많은 초들이 달려 있습니다.
10년차 사제성지순례를 간 기간 동안 매일 미사를 봉헌했는데, 제 미사당번 순서가 그 예수님 무덤성당에서 돌아왔습니다. 저희는 무덤경당 앞에서 미사를 하는데, 주례사제인 저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 무덤에 분향을 하고, 혼자서 무덤 안에서 성찬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 곳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6개 종교가 그 무덤성당을 나누어쓰는데 가톨릭은 오전에 3시간 정도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사시간도 짧고 강론도 3분만 하라고 했습니다.
강론을 생각해보니,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수라는 한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서 세례를 받고 활동하다가 잡혀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뒤 묻힌 곳이 이곳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의 마지막이고, 그 무덤 앞에 우리는 왔습니다. 죽음이 이곳에 있고, 그 죽음 때문에 우리는 슬퍼해야합니다. 그런데 미사가운데 18명의 동기신부중 눈물을 흘리는 몇몇 동기들의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감격의 눈물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성지순례의 끝이 무덤이 아니고 죽음이 모든 삶의 결말이 아니다’라는 것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그 무덤에서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어떤 것, 곧 예수님에 대한 우리 믿음의 핵심인 부활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예수무덤성당이 성지순례의 끝이었습니다. 예수부활에 대한 성지순례를 할 수 있는 곳은 예루살렘에 없습니다. 예수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방문하는 곳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이런 대화를 하신 것이 요한복음에 있습니다. “저희 조상들은 이 산 에서 예배를 드렷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여인아, 내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 진실한 예배자들은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요한 4.21~23)”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예수무덤성당에서 그 말을 알아들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가톨릭의 성지는 예루살렘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곳은 예수무덤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예수부활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라면 그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믿는 이들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이슬람교는 평생에 한번은 반드시 메카나 메디나의 성지순례를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의무입니다. 하지만 우리 가톨릭신자들은 성지순례가 좋기는 하지만 반드시 가야할 의무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진정한 성지는 믿는 이들의 마음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이 와서 기도하는 이 성모당이 진정한 성지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쟁이라는 말의 부정적인 뜻을 쫓아서 예수가 누구인지 알기위해 이스라엘에 갔습니다만 실제로 예수를 만나는 곳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 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하느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라면,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분이다.’ 라고 오늘 성경에는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그것이 무슨 뜻인가?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자주 부러집니다. 가까운 사람,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하고 상처받습니다. 바랬던 일이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부러지면 아픕니다. 연기만 나는 심지는 또 무슨 뜻입니까? 삶의 목표를 놓치고 실패와 잘못을 반복합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행복을 느끼기 보다는 죄만 짓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부러진 갈대이고, 연기 나는 심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소중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어려울 때 기도할 수 있고, 생각지도 못한 은총에 감사드릴 때도 있고, 벌레만도 못한 우리에게 하느님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기억하고, 돌보고, 사랑하고 있음을, 그래서 내가 구원받았음을 느끼게 해주시는 분, 그분이 예수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예수, 그의 이름에 희망을 겁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의 결론은 예수라는 한사람의 일생을 따라 걸으면서 그분의 삶과 말과 행동을 통해서 바로 이 말씀을 다시금 새기게 되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걷는 길이요, 내가 찾는 진리요, 내가 존재하는 이유, 곧 나의 생명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에 나의 삶, 나의 목숨, 나의 모든 것을 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용기를 얻게 된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다녀오면서 예수쟁이 그것이 나의 이름이 될 수 있고, 또 진짜 예수쟁이가 되는 것이 제가 사제로 또 그리스도교인으로 불리운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들이 나를 손짓하고, 세상이 나를 못 알아들어도, 내가 살아가는 이유, 내가 걷는 길, 내가 찾는 진리, 내가 사는 이유, 곧 나의 생명인 예수에 대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진짜 예수쟁이가 되어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제를 보면서, 여러분도 진짜 예수쟁이로 사는 삶이 두렵거나 힘들지만은 않기를 바라면서 함께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늘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미사이지만 .신부님의 성지순례후 강론은
더 가까이에서 더 또렷한 목소리로
가르치고 계시네요
매일 예수님의 몸을 받아 먹는
나의 모습이 얼만큼 예수님과
닮아있는지? 닮으려고 노력하며
기쁘게 살아가고 있는지?
강론글 감사합니다.
마사 참례 못 해서 아쉬웠는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