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계 거목 오강(梧岡) 장기봉(張基鳳)
시대 앞서간 풍운의 신문경영인 오강 장기봉
한국최초 다색도 상업신문 창간,‘자유 ·중립 ·공익’ 언론관 정립
-청운(靑雲)의 꿈을 안고 만주로
오강(梧岡)장기봉(張基鳳(이하 오강), 그를 아는 많은 지인들은 오강을 가리켜 약간 파격적이며 기상천외한 성품을 지닌 기인다운 데가 있다고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오강은 엄격한 안동 張씨 가문에서 태어나 만주로 출향해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기까지 범인(凡}人)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기상천외의 기지와 투지가 번득였다.
잘 될 나무는 떡 잎부터 알아본 다던가. 오강은 어려서부터 유난히 신문보기를 즐겼고 일찍이 수신(修身)과 근행(謹行)이 독실했던 조부 通德郞 張仁植공의 슬하에서 3살 때부터 千字文을 시작으로 보통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明心寶鑑 小學을 떼었다. 풍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오강은 부모의 권유로 무엇인가 직업적인 기량을 체득해야 된다는 생각에서 대구공립공업중학교(현 대구공고)를 지망, 토목과를 전공했다. 그 당시 전쟁의 말기라 많은 사람들이 직업적인 기술 분야에 진출하였다. 대구공업중학 토목과의 입시경쟁률이 30대 1이나 된 것은 이런 사회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오강은 그 관문을 무난히 뚫고 입학을 한 것이다.
오강은 그러나 곧 그가 토목학과에 입학한 데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토목학에 대한 지식을 공부했지만 그것이 너무나 실학적이며 동시에 직업적인 면이 과다한 것을 인식하면서 그 자신이 과연 이 직업공부에서 대성할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에 대한 회의(懷疑)가 앞섰기 때문이다. 이런 오강의 생각은 결국 부모의 양해를 얻어 이 학교를 3학년 1학기에 중퇴해 버린다.
오강은 그 후 뜻한 바 있어 만주로 들어가 만주 법정대학을 졸업하고 그곳에서 초등학교 훈도 생활을 하다 8·15 해방 직후 서울로 돌아와 강력한 반공신문이었던 대동신문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 디뎠다.
0-반공기자(反共記者)로 많은 일화 남겨
대동신문 시절 오강은 사장 이종영(李鍾榮)을 비롯하여 부사장 이봉구(李鳳求), 주필 김옥근(金玉斤), 편집국장 김선흠(金善欽), 양명복(梁命福) 황태열(黃泰烈) 박성환(朴聖煥) 등 당대의 민완기자들과 교유하며 법원과 돈암장을 출입하며 이승만(李承晩), 김구(金九), 이시영(李始榮), 유림(柳林), 조소앙(趙素昻), 엄항섭(嚴恒燮)씨 등 고명한 정치인들과 자주 접촉했다. 미 군정청 (지금의 중앙청)을 출입 할 때는 아놀드 러치 장관과 친교를 두터이 했다.
돈암장과 군정청의 겹치기 출입은 오강에게 신문기자로서 광범한 활동과 노력의 여지를 안겨주었다. 야심만만한 청년이나 신문기자로서는 초년생인데도 불구하고 정부의 고관이나 정치 지도자들과 허물없이 대하고 기자로서의 역할과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항상 만족스러운 일이었고 상대방도 오강을 인상 좋게 받아 들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강이 우남 이승만 박사를 처음 만난 것도 이때였다. 대동신문기자로 돈암장, 경교장, 남로당, 전평, 종로서, 법원, 중앙청 등을 종횡무진으로 출입해야 했던 오강이었기에 건국 초기의 우남과의 만남은 신문기자로서 자연스런 대면이었는지도 모른다.
대동신문이 문을 닫자 오강은 중견 기자로 민중일보에 입사 오종식(吳宗植) 김광섭(金珖燮), 이헌구(李軒求)등과 교유했고 연합신문 창간당시엔 사옥도 없고 공장 시설이부족하여 우왕좌왕 하고 있을 무렵 오강은 연합신문 기자의 신분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사무실 임대사용계약을 얻어주는 등 이 신문 창간에 크게 공헌했다.
연합신문과 오강과의 관계는 이 같은 특별한 인연이 있다. 연합신문을 창간할 당시 공장시설이 부족하여 우왕좌왕 하고 있을 무렵 신문사의 사무실과 공장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역할한 사람이 바로 오강이었다. 오강은 기자의 신분으로 당시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이승만 박사를 찾아가 연합신문사의 사정을 설명하여 그 임대사용계약을 주선해 주었던 것이다. 이렇듯 연합신문 창간에 크게 기여한 오강은 이 신문 정치부차장으로 중앙청을 출입했다.
1. 4후퇴 후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연합신문을 발간할 수 있었던 것도 오강의 힘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홍수처럼 밀어닥친 피란민들로 포화 상태를 이룬 임시수도 부산 시내에 양우정이 2층 건물 한 채를 구해 놓고 피난해 온 사우들과 합숙을 하며 신문 발간의 꿈을 불태우고 있을 때 연합신문에서 함께 일했던 양명복을 만나게 된다. 신문을 임시발간 하기 위해선 당국의 허가가 필요했다. 양명복은 그래서 마침 공보처장직을 겸하고 있는 임병직 외무장관실로 오강을 찾은 것이다. 절친한 친구 양명복 기자로부터 연합신문의 어려운 사정을 전해들은 오강은 즉각 연합신문 임시 발간에 필요한 허가장을 만들어 준데 이어 신문용지 한 트럭분을 구해주어 전란 중 실의에 빠진 언론인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도 했다.
0- 심리작전부 요원으로 6.25참전
6.25 전쟁 중 오강은 많은 일로 바쁜 나날을 보내야했다. 전세는 불리하여 대전까지 후퇴한 오강에게 이미 신문사는 없어졌고 모든 인력이 전쟁수행에 기여 할 비상시국에서 한가로이 피난생활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대전에 진주한 미군이 북진을 하며 적을 저지하려 할 때 맥아더 사령부는 대전의 미 24단이 사령부에 심리작전부를 세우게 되었다 오강은 이때 유근창 육군대위(전 토지개발공사장 전 국방차관) 장지량 대위(전 공군참모총장)와 함께 미 8군의 심리작전부의 한국 측 기획을 잠시 담당했었다.
대구에서 심리작전부는 단장에 제임스 스튜어트(전 미공보원장)를 필두로 한국 팀이 홍보문을 입안해서 인쇄까지 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인쇄물을 동천비행장에서 미군기를 통해 서울과 북한 땅까지 살포하였다.
심리작전부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모여 미군의 전후방 작전에 따르는 민간인과의 각종 관계사항을 주지시키는 중요한 업무를 수행했다. 이곳에서 입안되는 내용은 미군에 의해 동경과 오끼나와 등지에서 그 내용을 인쇄물로 제작, 멀리 이북의 방방곡곡까지 전단으로 살포되었다.
오강은 줄곧 이일을 대구에서까지 맡아 했다. 그때 이들은 대구의 조그마한 인쇄소에서 밤을 새워 전단을 인쇄, 절단하여 다음날 동천비행장까지 날라주었으며 그 전단은 심리전의 일환으로 미 공군에 의해 북한 깊숙이 공중 살포되었다.
이와 같은 일은 글도 옳게 쓸 줄 알아야 하지만 전쟁을 치르는데 필요한 내용을 전후방에 홍보하는 일이었으므로 미국인들은 이를 매우 중요시했었다. 이들은 대전 최후의 날인 8월말까지 심리작전부에서 일을 했다. 이들은 대전에 진주했던 미 24사단장 윌리엄 띤 소장을 충남도청 기자실에서 자주 만났다.
띤 소장과 오강과의 관계는 그가 최후의 미군정장관으로서 군정청에 근무할 때 자주 기자회견을 한 연유로 매우 다정하고 친근하게 지냈었다. 또 주일 대사관에서 일하던 김길준 씨가 띤 소장의 통역관으로서 같이 종군을 하던 관계로 미군정시대에 함께 일하던 기억을 되살리며 자리를 같이 하기도 했다.
전시 임시정부 청사가 대구의 경북도청에 들어섰을 때 오강의 직책은 역시 연합사령부 심리작전부 근무였다. 외무부에서는 경북 여고에 설치된 미 제5공군의 브리핑을 받고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도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그곳 일에도 몰두했다. 또한 미군이 과연 전의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분석 등 여러 가지로 정부가 해야 할 문제를 입안하기 위해 참여, 탐색, 판단 등 많은 분야에 걸쳐 사안의 호 불호를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0-이승만 대통령 공보비서관으로 활약
오강이 이승만 박사의 눈에 들게 딘 사연도 흥미롭다. 바로 피난지 대구에서 이승만 박사를 극적으로 상봉한 것이다. 어느 날 부산 도청에서 미국 공보원 가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李박사가 멀리서 오강을 알아보고 차를 세운 것이다. 바로 도지사 관저로 오라는 것이 아닌가. (이 박사는 그때 경북 도지사 관저에서 집무를 보고 있었다)
다음날 부산의 도지사 관사로 이승만 박사를 찾아간 오강에게 李대통령은 “다시 서울로 밀고 가야 하니 자네 공보비서 할 줄 알지 신문기자니까---” 라면서 일거리를 맡겼다. 이렇게 하여 오강은 우남과의 피난길 재회가 시작되었고 문서 사령도 없이 대통령 공보비서 직을 맡게 된다. 당장 맡겨진 일은 “철도에 가서 오르내리는 화차가 무엇을 싣고 다니는지 기록해서 직접 보고하는 일”이었다. 기자가 그런 것을 해야 하는가 안 해야 하는가 자문하다가 오강은 李대통령 명령대로 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아침 일찍 신천교에 나가 대구 역을 지나는 상행 하행의 모든 군수열차의 적재 물을 확인 실사했다. 서툴렀지만 수량은 정확히 적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이런 작업이 일주정도 계속되니까 집계가 정확해 졌다. 미군의 군 장비와 전력은 증강되고 있고 미군이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확인할 수 있었다. 하루는 햇볕에 까맣게 탄 청년이 철로 옆에서 무엇인가 적고 있는 모습이 수상했던지 오강을 방첩대로 끌고 갔다. 대단한 곤욕을 치렀다. 증명서도 시효가 지난 연합신문의 것이었으니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그렇다고 대통령을 팔수도 없고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강이 생각한 것은 전쟁 중에 집중한 것이 공보비서의 역할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쟁 때는 무엇이나 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오강은 두문불출 하고 2개월을 관저에서 기거하다시피 열심히 일했다. 일이 너무 많아 늘 수면부족이었지만 일선 방문은 c-47로 거의 매주 이승만 박사를 수행했다. 부산정치 파동 때도 오강은 李박사의 오른 팔이나 다름없었다. 李 박사에 대한 국민 신임 안이 제기 되었을 때 당시 지방의회가 첫 선거로 대표를 선출하는데 거기다가 李박사 파의 승패를 걸어 신임도의 예스 노를 묻도록 했다. 당시의 국회는 전쟁 전에 선출 된 것임으로 이 지방의회선거는 정치적으로 대단한 주목거리였다. 집권자가 낙승한 것은 물론이었다.
0- 미 군정에 입법의원 구성을 제안하다
미 군정하의 정국은 말 그대로 혼미를 거듭했다. 언론은 언론대로 좌우로 갈려 총칼 없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좌익계열에서는 잇따른 좌익 지의 정간에 대처하여 다른 신문을 매수, 제호를 바꾸어 대치하는 한편 군정을 상대로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뿐만 아니라 전평(全評)산하 노조원을 동원하여 철도총파업을 단행하기도 했다. 이 파업 소동으로 대구를 중심으로 한 영남폭동사건이 일어났다. 이런 얽히고설킨 상황에서 오강은 심사숙고했다. 초보적이 나마 입법의원과 같은 기구를 활동시키지 않고서는 도저히 한반도 남쪽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를 이룰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오강(장기봉 기자)의 시각은 급기야 미 군정청 당국에 입법의원 구성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미 군정청 기자 회견장 에서 질문하는 형식으로 제기 된 장기봉기자의 발상은 그 다음 번 기자회견에서 공론화 되었다. 러치 장관은 장기봉 기자가 질문한 내용을 여러 가지로 검토한 끝에 그 합당성이 인정되었고 그런 기관이야말로 평소에 구성코자 한 것이며 이것이 없이는 이 땅에서 미군정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던 것이다. 러치 장관이 입법의원에 대한 포부를 물어 왔을 때 장기봉 기자는 서슴지 않고 그의 소견을 피력했다. 장 기자는 한국시민의 의사를 반영하여 입법을 한다면 한. 미간의 화합을 도모하고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것이며 입법의원의 구성방법을 관선과 민선을 절충하여 군정당국이 알아서 좋을 대로하는 것이 무방할 것이라는 요지의 소견을 밝혔다. 사가(史家)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할지 모르나 이런 기관이 미군정 과정에서 있었다는 자체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또 이것이 우익만이 참여한 입법기관이었다면 그 의미는 많이 감소되었을 것이나 그것이 중립세력에 의해 운영되었다는데 더 큰 의의가 있었다.
0-유엔대표로 국가홍보에 기여
국제연합(UN)의 전체 가맹국으로 구성되는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유엔총회는 전 회원국으로 구성되며, 각 나라는 5명 이하의 대표를 파견할 수 있다. 1943년 12월 카이로선언에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였고 이는 다시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에서 재확인되었다. 미. 영. 소 3국외상은 그해 12월에 모스크바에서 회동하고 한반도에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 국민은 맹렬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지만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군사령관은 1948년 초에 활동을 개시한 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하였다. 이에 유엔소총회에서는 선거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결의하여 그해 5월에는 남한에서 만의 선거가 행하여졌다. 8월에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우리나라는 1951년 주 유엔 상주대표부를 설치한 이후, 유엔의 규칙에 따라 비 회원국으로 총회에서의 발언은 허용되지 않았으나 각 위원회의 토의에는 참여할 수 있었다.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대표단은 유엔 총회에서 활약하면서 한국이 북한의 불법침략전쟁으로 인하여 엄청난 참화를 입은 점과 공산군의 침략과 만행의 진상을 세계를 상대로 홍보하는 한편으로 북한과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데 주력했다.
제5차 유엔총회에 참석했던 대표단 중 한사람이었던 김동성 씨는 당시 한국대표단의 활동보고서에서 오강(장기봉)이 미 언론계를 통하여 한국의 실정을 시기적절하게 보도케 하여 국가홍보에 기여한 공(功)이 컸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오강은 이 무렵 미국 언론계의 여러 지인들을 만나 한국의 사정을 설명하고 한국의 입장에 동조 해 줄 것을 역설해 좋은 반응을 얻어낸 것이다.
0- 약관 29세에 서울신문 사장
오강이 서울신문 사장에 오른 것은 이승박사의 천거가 주효했다. 그만큼 이승만 박사의 신임이 두터웠다는 증거다. 서울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한 1955년 8월 당시 오강의 나이는 약관 29세로 미혼의 청년이었다. 그가 서울신문 사장으로 취임했다는 뉴스는 당시 조야를 깜짝 놀라게 했다. 서울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한 오강은 정력을 기울여 신문사를 현대화하는 한편 신문의 수지 지수를 개선하여 인기 있는 독자들의 것으로 만드는데 전념하였다. 서울신문에 재임한 기간은 1년을 넘지는 못하였으나 이 신문의 질적 향상과 경영의 정상화를 위하여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 까지 노심초사하며 노력했다. 특히 이 신문이 적자로 허덕일 때 흑자로 끌어 올렸으며 인사관리 면에서도 일의 효과를 높이는 방향으로 인사행정을 정상괘도에 올려놓았다. 당시 서울신문의 수지를 흑자로 전환시킨 것은 그의 피나는 노력의 소산이었다.
0-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과의 각별한 인연
그러던 1962년 어느 날 한국일보를 운영하는 장기영(경제부총리 역임)씨가 그의 영자신문인 코리아타임스를 보다 현대화하고 좀 더 알찬 신문으로 만들기 위해 오강의 자문을 구해 왔다. 장기영씨는 코리아타임스를 보다 현대화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오강에게 코리아타임스의 어떤 직책을 맡아 이 신문을 책임지고 육성해 달라고 요청했다. 오강은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 들여 코리아타임스의 부사장 겸 편집국장으로서 이 신문을 이끌어 나갔다.
코리아 타임즈는 그 당시만 해도 역사와 관록이 있는 유일한 민간신문이었으나 활자를 손으로 뽑고 조판을 하는 등 전근대적인 신문제작 방법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오강은 장기영씨의 요청에 의해 코리아타임스의 시설을 현대화하기 위해 미국의 시카고로부터 M5 타이프, 마겐달러라이너 타이프 등 2대를 자기 돈으로 사들여 한국일보사 일각에 위치한 코리아 타임스사에 설치하여 그것으로 자동적인 조판과 식자를 할 수 있는 시설을 제공하였다. 이로써 코리아타임스는 일약 그 면수를 두 배로 늘릴 수 있었다. 제작 속도도 매우 빨라 코리언 리퍼브릭과 경쟁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이 무렵 한국일보는 1962년 11월 28일 1면 머리기사에 신당, 사회노동당(가칭)으로’ 대서특필했다. 이에 민주공화당 창당 준비를 하고 있던 5․16 주도세력은 박정희, 김종필 등의 사상적 배경과 성향이 의혹을 받고 있던 상황과 맞물려 여론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이 기사를 크게 문제 삼기에 이른다. 이에 당황한 한국일보는 이튿날 1면 머리기사로 작일 보도, 사회노동당 운운은 잘못이라는 컷과 함께 전일 기사보다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해 정정 보도했다. 그러나 최고회의 측은 사장 겸 편집국장 장기영, 편집부국장 홍유선, 정치부장 김자환, 정치부 한남희 기자를 구속했다.
장기영사주가 구속된 한국일보는 거의 공백 상태에 들어갔다. 오강은 이때 장기영 출감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오강은 장기영 사주를 구출하는 방안으로서 우선 군정의 수뇌부를 찾아 그의 석방을 설득했다. 언론탄압이라는 인상을 대외적으로 줄 수 있음을 역설, 사태의 원만한 해결방법을 제시하고 빠른 시일 내로 장기영 씨를 출감시켜 줄 것을 요구해 성사시켰다. 이 같은 장기영 씨와의 인연은 한국일보가 1967년 화재로 신문발간이 위기에 처했을 때 흔쾌히 한국일보를 인쇄 해주는 우정으로 언론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는 미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0- 동화통신 전무로 경영능력 과시
장기영씨의 출감과 더불어 오강은 동화통신과 인연을 맺는다. 동화통신은 당시 자본금 1천만 원의 주식회사로 1954년에 설립되고 1956년에 미국 AP 통신사와 수신계약을 맺고 이해 4월 창간했다. 그 후 프랑스의 AFP통신사와 계약을 했다가 1960년에 해약을 하고 영국의 로이터 통신사와 새로이 수신계약을 했으며 한편 동화그라프라는 월간 화보를 발간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이 통신사를 경영하고 있던 경북 예천 출신인 정재호 사장으로부터 별다른 공직 없이 잠시 쉬고 있는 오강에게 조용히 만나자는 전갈을 해왔다.
당시 오강은 민완기자로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미 하버드대학 출신이라는 학벌과 화려했던 공직생활에서 얻은 경험 등을 살려 서울신문사 사장으로 그 신문사를 재건한 일로 이미 언론계의 실력자요 거물이라는 세평이 자자했다. 1964년 초 선각자이기도 한 정재호 사장의 돌연한 요청을 받은 오강은 그 동안 격조도 했고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인사를 겸해 찾아갔다.
반가이 맞아 수인사를 하고 난 정재호 사장은 자기가 그 동안 뜻한바 있어서 적지 않은 돈을 들여 동화통신을 운영하고 있으나 수지채산에도 문제가 있거니와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아 계속 투자를 해서 과연 그만한 보람이 있을 것인지 의심스러우니 무슨 방도가 없겠느냐고 문의하면서 차라리 서울신문을 훌륭히 키워낸 전력도 있으니 한번 맡아서 이 난경에 처해 있는 통신사를 바로 세워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결국 동화통신 전무로 입사한 오강은 사세를 예비 진단 한 결과 시급히 손을 대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당장 오랜 타성과 무사안일에 빠져 있는 사원들에게 의욕을 불어넣어야 했다. 편집도 내용의 충실을 기하는 동시에 통신의 생명인 발행시간의 단축 그리고 업무 면에서는 통신료의 인상문제가 시급했다. 그러나 일도양단의 대수술이나 급격한 변혁보다는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것이 순리이고 좋은 방향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정재호 사장의 동의를 얻어 하나하나 개선해 나갔다.
오강은 동화통신에서 개척자 정신을 발휘 동화 통신사로서는 최초로 주일특파원을 외국에 파견해 생생한 뉴스를 공급했다. 로이터 통신이 남산 송신소를 둔 것도 이 무렵 오강의 공이 컸다. 어려운 시기에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동화통신이 나름대로 소임을 다할 수 있었던 것도 동화통신 전무시절의 오강을 아는 사람은 모두가 높이 평가하고 있다.
0-국내 최초 컬러 신문 신아일보 창간
오강이 자유당 말기에 신문발행허가를 얻기 위하여 분주히 노력하였으나 당시의 정치세력에 의하여 거부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언젠가는 기필코 신문을 창간하겠다는 신념에 불타있었다. 오강이 자신의 집에서 활자를 주조케 하는 등 신문사 창립을 서둘렀다는 사실은 그가 신문창간에 대한 집념과 의지가 얼마나 강했었나를 극명하게 엿볼 수 있게 한다.
오강은 신문제작의 모든 기재를 주조기와 자모 및 활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사에서 몽땅 가져다 썼기 때문에 시설 면에서는 국제수준을 자랑할 만 했다. 그 규모는 듀플렉스사 제(製) 윤전기 6대를 비롯하여 홀더 2대 포마 1식 연판기 2대(유명한 우드사 제) 그리고 연판용 전기로 대형 1기, 연판 윤전용 콤베이어 1대 등이었다. 윤전기가 지하 급지 식이었다는 것이 한국에서는 처음이고, 이 지하 급지 식으로 인연해서 용지를 자동적으로 연결하는 장치 같은 것이 모두 윤전기에 부착되어 있어 인쇄 공장으로서 당시의 한국 수준에서 본다면 월등하게 앞서 있었다. 더구나 부수가 많든 적든 6대의 윤전기는 32페이지를 한꺼번에 찍어 낼 수 있었고 그것은 그 홀더를 통해 시간당 10만 부 이상을 발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진과 사진 제판 시설은 그 당시 일본의 레트 식 분사 부식기를 처음으로 도입했기 때문에 사진이 잘 빠져서 선명했다. 사진기 역시 새로운 것을 많이 들여와서 사용했기 때문에 신아 일보의 사진은 ‘살아 있다’ 또는 액션적이라는 등의 호평을 많이 받았다. 이는 사진을 대담하게 크게 써서 효과를 내는 등의 제작 편집 면의 특성에도 있었지만 이런 사진 기재의 성능이 우수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신아일보가 컬러 신문을 창간하자 국내 언론사들이 당황한 나머지 이 방면에 눈을 뜨게 되고 시설투자 의욕을 북돋게 된 것은 한국 언론계에서 비단 1개 신문의 창간이라기보다도 동업 계에 많은 변혁을 촉진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0-‘자유· 중립 ·공익‘ 언론관 정립
1965년 5월 6일 오강은 신아일보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대판 8면으로 된 창간 특집호는 1면을 박정희 대통령이 보내온 ‘정론 환발 국리민복’이란 휘호로 장식하고 발행인 장기봉 사장이 직접 집필한 창간사는 ‘독립 성실을 지키는 상업신문으로 진리의 촛불을 밝힌다.’는 다짐으로 주목도를 높였고 ‘방청석’ 난을 마련 정가의 모든 일에 시시비비주의로 나가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창간 준비 과정에서 윤임술 초대 편집국장(전 부산일보 사장)을 비롯한 편집 스탭들은 무언가 새로운 신문의 기치를 높이 들어 과시하자고 대담한 기획을 하고 있었다. 첫날 일약 10만 부를 찍어서 서울시내에 많이 뿌렸다. 동시에 열차 시간에 맞추어 2판 3판을 이미 조직된 지방으로 발송하였다. 이날부터 매일 빠른 속도로 1판을 가급적 11시 45분에서 12시 이전에 쇄출, 발행하여 처음부터 가장 빠른 가판 신문으로서의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심어 주기 시작했다.
컬러 인쇄로 한국 신문 사상 금자탑을 이룬 신아일보의 창간호가 전국에 배포되자 이에 대한 평가가 쇄도했다. 대체로 잘 되었다는 평가와 함께 상업신문을 표방 한 신아의 장래에 모두들 주목했다. 특히 창간사에서 강조한 ‘자유롭고 중립적이며 언제나 공익을 염두에 둔 신문’을 만들겠다는 독자와의 약속에 큰 기대를 거는 분위기였다.
창간호에 대한 반향은 의외로 컸고 좋았다. 전국 각 지방에서 전화 혹은 서면을 통해 계속 좋은 신문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과 편달이 답지했다. 젊은 층에서 즐겨 찾는다는 독자층의 경향도 각 지사 지국에서 알려왔다. 보다 더 좋은 신문을 내는데 힘쓰고 있는 신아의 창간 멤버들은 이 모든 찬사와 격려와 편달에 고무하며 배전의 용기를 북돋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공장시설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다색도 인쇄를 시도할 만큼 도하 신문사중에서는 월등했고 일관작업이 가능했다.
오강이 창간한 신아일보의 사시 ‘자유 중립 공익’은 오강의 신문관을 극명하게 대변하고 있다. ‘자유(自由)’는 민주주의의 기초로서 자유로운 논지로 정론을 편다는 것은 자유언론의 정도이므로 이 자유는 어디서나 위축될 수 없다. ‘중립(中立)’은 정확한 판단과 사실의 전달 면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로서 어떠한 편견이나 왜곡을 불허한다. 신문은 그 역할만큼의 이익을 사회에 주지 못한다면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됨으로 언제나 국리민복을 위해 앞장서야 한다는 점에서 ‘공익(公益)’을 세 번째 사시(社是)로 정한 것이다.
이 사시는 바로 신아일보 창업주 오강의 신문철학이며 신아일보의 입각점을 분명히 밝힌 독자와의 약속이었다. 신아일보는 특히 신문 이외의 어떤 방계 사업도 없었고 오직 신문 만에 의한 신문운영을 목표로 하였다. 경영면에서는 탁월한 관리체제와 인사 면에 있어 철저한 소수정예주의를 채택함으로써 타사의 반밖에 안 되는 인원을 가지고도 내용이 알차고 가장 빠른 신문을 내 놓아 가판시장을 석권했다.
신문 내용면에서도 오강은 파격적인 기획으로 독자들의 주목도를 높였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를 총망라해 불고 있는 종교계의 신풍을 해부한 이 기획 보도 ‘종교계’ 각종 리셉션을 취재, 사진과 함께 참석인사들을 일일이 소개한 ‘사교계(社交界)’, 신아일보 독자를 배가시키는데 적지 않게 기여한 ‘독자 룸‘, 군사정보분야에서 다른 어떤 신문보다 앞선 보도로 독자들은 물론 군 당국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군사부 신설, 소비자 보호 운동을 선도했던 ’소비자 가이드’, 등은 지금도 언론가에 화제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오강은 한국 음악계에도 선풍적인 바람을 일으켰다. 세계적 음악의 巨星 쥬세페 디 스테파노를 비롯 제임즈 마크라겐, 에리자베드 슈바르츠코프, 샌드라 워필드 등을 초청해서 이 땅의 음악인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예술성을 소개한 것 등은 저명한 음악 평론가들로부터 ‘흥행성이나 수익성을 초월한 문화창달이라는 의의와 창조적 가치에 중점을 둔 파이오니어적 노력의 결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0-비운(悲運)의 신아일보 강제종간
그러나 오강이 창간해 운영해오던 신아일보는 한창 웅비의 나래를 필 무렵인 1980년 11월 25일 당시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조치로 강제 종간돼 경향신문으로 흡수 통합됐다.
오강이 밝힌 당시 상황을 본인이 직접 밝힌 기록으로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통한의 나날을 보냈는지 짐작이 간다. 바로 그 진상을 오강이 밝힌 ‘치욕의 기무사 수사실’과 88년 12월 국회청문회 속기록을 중심으로 요약해본다
“버티기를 한 너 댓 시간 버텼는데 그 상대방하고 예기가 안 되니까 내가 참 느끼는 것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위압적인 그런 태도로 있었고 복도에서는 아주 심하게 큰 고함으로 서빙고로 모시라고 하는 얘기도 하는 것 같고 또 뭐 그런 것 백장 찍어 봐야 내 본의가 아니니까 또 자유로운 상황에서 내가 내 의사에 의해 가지고 한 것이 아니니까 내가 찍어 주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또 말은 안 찍으면 못 나설 상황이었습니다. 내가 사실은 한 1주일이고 2주일이고 버텨 보려고도 생각을 했는데 그 사람하고는 얘기가 안 되고 사령관을 만나자고 그랬더니 사령관이 지금 강원도에 출장을 가고 없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라도 있을 것 아니냐 했더니 밤이 늦어서 다 퇴근했다 그러니 뭐 얘기할 사람도 없고 그래서 너 댓 시간 버티다가 그 사람이 그것을 꾸민 사람이 아니니까 내가 그렇게 해 놓고 찍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간에서 그 종이에 서명한 것 밖에 없다고 이러는 데 나오는데 또 종이를 한 장을 도 주어요. 그것은 무엇이냐 여기에 다녀갔다는 소리는 절대로 입 밖에 못 내게 하려고 또 한 장 찍으라고 그래요. 그래서 그것은 네가 대신 찍으라고 했더니 무슨 말씀이냐고 찍는 김에 다 찍으시오 그래서 찍고 나왔습니다.“( 신아일보 실록 ‘치욕의 기무사 수사실’ 참조)
신군부의 언론사통폐합조치는 88년 서울올림픽 개최 후 5공청문회에서 그 진상이 낱낱이 폭로되었다. 우리나라 의정 사상 처음으로 언론 청문회가 열린 것도 이때였다. 언론청문회는 88년 11월 21일 22일과 12월 12, 13일 31일등 5일간에 걸쳐 열려 TV로 생중계되었다. 하지만 이 당시 동아 조선 중앙 한국 등 4개 신문의 사주 들을 불러 마지막 청문회를 개최, 사주들이 언론인 강제해직에 관련됐는지 여부와 통폐합 건의설 등을 추궁했으나 사주들의 한결같은 부인으로 진실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0-오강 일대기 신아일보 기념관에
오강이 신아일보 강제 폐간 이후 신문 복간을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는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 하루아침에 신문사를 빼앗긴 허망함 속에서도 오강은 뒤처리만은 철저히 깨끗이 하겠다는 생각만은 버리지 않았고 신 군부와 친숙이 있다는 지도급 인사들을 조용히 찾아 자신의 억울한 입장을 설득하며 힘써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강이 만난 사람들은 모두 오강과 오랫동안 우정을 나눈 사이었지만 모두 오강의 입장을 십분 이해는 한다면서도 전두환에게 접근하는 것을 겁먹고 아예 손을 설레설레 흔들며 사절하는가 하면 심지어 오강과의 만남 자체를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오강과 친분이 두터웠던 와싱턴 포스트 지의 그레임 함 회장 뉴욕타임스사의 샬즈버거 2세 회장, 스크립 하워드 신문계 회장 잭 하워드 회장 US News & World Report 편집국장 겸 주필 M. Stone등은 오강의 이런 억울한 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이들은 한국 언론 상황의 심각한 위기에 대해 우려했고 레이건 대통령에게 이런 사실을 환기시켜 한국의 언론자유 회복을 위해 적극 나서 줄 것을 권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바로 1985 한국을 방문했던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국회 연설이었다. 당시 레이건 대통령은 국회연설에서만이 아니라 한미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등 세 번씩이나 한국의 언론자유 회복에 대해 언급했지만 5공 정권의 반향은 레이건 대통령이 선거를 의식해 그런 발언을 한 정도로 경시했다는 후문이다.
오강은 신아일보 강제종간 이후 허망한 나날을 보내며 언젠가는 빼앗긴 신문을 되찾겠다는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그런 설욕의 기회로 인도하기보다 2008년 8월 28일 이승을 하직해야하는 운명을 담담히 맞게 했다. 향년 80세 유족으론 부인 安南得여사와의 사이에 2남 1녀 장남 학준은 주식회사 신아일보 사장, 한국일보 부국장 겸 산업부장을 지낸 차남 장학만은 신아일보 기념관(서울시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402호)에 오강 장기봉선생 기념실을 꾸미고 오강의 언론관을 재조명하는데 정열을 쏟고 있다.
<참고문헌>
*신아일보 사사(2005년 5월 신아일보기념사업회)
*오강 장기봉 선생문집(2005년 5월 신아일보기념사업회)
*한국언론인물사화(2010년 10월 대한언론인회)
*대한언론 2010년 10월호(대한언론인회)
*석양에 노을진 여정(2017년 도서출판 태봉 정운종 지음)
*오강 장기봉 평전(2021년 도서출판 태봉, 정운종 편저)
<관련사진>
*88년 11월 22일 국회 언론 청문회에서 증언하는 오강(오른쪽 두 번째)
© 오강 장기봉(1927년-2018년) 약력
* 1927년 1월 11일 경북 안동 출생, 2018년 8월 28일 별세(향년 82세)
* 하버드 대학 대학원
* 대통령 공보비서관
* 유엔총회 한국대표
* 코리아타임스 부사장겸 편집국장
* 한국일보 편집국장, 동화통신 전무
* 서울신문 사장
* 신아일보 창업주
* 상훈 : 세계언론인상, 국민훈장 모란장
* 저서 : 생산성 향상과 경제 개선, 백만장자가 되는 길
© 필자 정운종 약력
* 신아일보 논설위원
* 경향신문 논설위원
* 민주평통 운영위원(동 간사)
*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겸 상임이사
<대한언론인회 2021년 발행 '언론계거목'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