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책임
- 미하일 바흐찐의『말의 미학』에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개개 요소들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단지 외적인 연결로만 결합되어 있을 뿐 의미의 내적 통일로 충만되어 있지 않을 경우, 그 전체를 기계적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전체의 부분들은 비록 나란히 놓여 있고, 또 서로 접촉하고 있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서로 이질적이다.
인간 문화의 세 영역인 학문과 예술과 삶은 그것을 자신의 통일성으로 결합하는 개성 속에서만 통일성을 얻는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은 기계적이고 외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일은 실제로 대단히 자주 일어난다. 예술가와 인간은 순진하게 또 대개는 기계적으로 하나의 개성 속에서 결합된다. 인간은 '일상사의 소동'에서 마치 '영감과 감미로운 음향과 기도'의 다른 세계로 들어서듯 창조 행위 속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 예술은 너무나 뻔뻔스럽고 자만에 빠져 있으며, 너무나 감상적이고, 당연히 그런 예술은 따라잡을 수 없는 삶에 대에 눈곱만큼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 우리에게 예술이 무슨 소용이야?" 하고 삶은 말한다. "그건 예술이란 것이고, 우리에게 있는 건 일상사의 산문이라구."
인간은 예술 속에 있을 때에는 삶 속에 있지 않고, 삶 속에 있을 때에는 예술 속에 있지 않다. 그것들 사이에는 어떤 통일성도 없으며, 개성의 통일성 속에서 내적으로 서로에게 속속들이 스며들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개성을 이루는 요소들의 내적 결합을 보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책임의 통일이다. 내가 예술에서 체험하고 이해한 모든 것이 삶에서 무위로 남지 않게 하지 않으려면 나는 그것들에 대해 나 자신의 삶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책임은 죄과와도 결합되어 있다. 삶과 예술은 서로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죄과도 떠맡아야 한다.
시인은 삶의 비속한 산문성이 자신의 시 탓임을 기억해야 하며, 생활인은 예술의 불모성이 엄격한 요구를 제시할 줄 모르는 자신의 어설픔과 삶의 문제들에 대한 자신의 진지하지 못함 때문임을 깨달아야 한다. 인격은 전적인 책임성을 가져야 한다. 개성의 모든 요소들은 그저 삶의 시간적 연속 속에서 나란히 배열되는 것을 넘어서, 죄과와 책임의 통일 속에서 서로에게 속속들이 스며들어야 한다.
무책임을 정당화하기 위해 '영감'에 의지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삶을 무시하고, 그 자신이 삶에게 무시당하는 영감은 영감이 아니라 사로잡힘이다. 예술과 삶의 상호관계, 순수예술…… 등등에 대한 모든 오래된 문제들의 거짓이 아닌 진짜 의미, 그 물음들의 진정한 파토스는 그저 삶과 예술이 서로의 과제를 가볍게 해주고, 서로의 책을 벗겨주려는 데 있을 뿐이다. 삶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창조하는 것이 더 쉽고, 예술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예술과 삶은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 안에서, 나의 책임의 통일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
첫댓글 인간은 예술속에 있을때 삶속에 있지않고 삶속에 있을 때에는 예술 속에 있지않다. 이 말은 결국 예술가들은 예술을 삶으로 부터의 도피처로 삼고 있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