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에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연산군묘 -2-
2. 연산군묘, 그리고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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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부인 거창 신씨의 묘 (사진 좌측이 연산군의 묘)
1) 연산군묘를 둘러보며
1506년에 일어난 중종반정은 연산군의 12년 집권에 확실한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 사건인 동시에 이복형제인 연산과 진성의 희비가 교차되는 사건이기도 했다.
12년동안 권좌에 앉아 조선 팔도를 호령해 오던 연산군은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추종하던 일부 훈신 세력들의 정변으로 실각하였고, 이복 형의 강력한 왕권에 눌려 눈치만 보면서 전전긍긍해 하던 진성대군은 훈신들의 추대와 모후인 정현왕후의 왕위 계승 허락으로 11대 임금으로 보위에 올라 두 형제는 그야말로 일순간에 천당과 지옥을 오고가게 되었던 것이다.
반정으로 폐위된 폐주는 즉시 연산군으로 봉해져 강화 교동으로 유배되었는데, 이후 폐주는 연산군이라 하여 역사에 기록되었고 우리가 불리우는 연산군의 칭호는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반정이라는 정변으로 인해 실각하여 교동으로 유배된 지 얼마되지 않아 연산군은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역질에 의해 죽었다고 하였는데, 역질보다는 다른 병에 의해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어쨌거나 이복 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이었지만 한때 왕위에 있었던 자신의 형을 위해 후히 장사지낼 것을 명하고 있는데, 당시의 상황을 중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교동 수직장 김양필·군관 구세장(具世璋)이 와서 아뢰기를,
“초6일에 연산군이 역질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죽을 때 다른 말은 없었고 다만 신씨를 보고 싶다 하였습니다.”
하였다.【신씨는 곧 폐비다.】 상이 애도하고 중사(中使) 박종생(朴從生)을 보내, 수의를 내리고 그대로 머물러 장례를 감독하도록 하고,
“연산군을 후한 예로 장사 지내라.”
전교하였다. 또 의정부(議政府)와 모든 부원군(府院君) 이상, 증경 정승(曾經政丞), 육조 판서(六曹判書), 한성부 판윤, 예조 참의 이상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는데, .. (중략).. 계하기를,
“연산군의 상사는 마땅히 왕자군의 예를 사용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중략).. 예관(禮官)을 보내 본도 감사·도사(都事)와 더불어 염장(斂葬)하는 여러가지 일을 곡진히 조처하여 왕자군(王子君)의 예로 강화에 장사지내게 하고, 수행 시녀는 3년, 수행 방자(房子)는 백일 동안 복을 입게 하는 한편, 조석 상식(上食)과 삭망전(朔望奠)은 백일만에 그치게 했으며, 수행 내관은 백일 기한으로 서로 교체하여 왕래하면서 담복(淡服)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주상(중종)은 소선(素膳)으로 수라를 올리게 하고 경연을 정지하였다.
- 중종실록 (중종 원년(1506) 1월 18일자)-
이렇게 외지에서 부인을 보고 싶다는 말을 남긴 채 쓸쓸히 숨져간 연산군이지만 처음에 죽고 묻힌 장소와 정확히 언제 묻혔는 지에 대해서는 기록에 언급되지 않았던 까닭에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다만 부인 신씨의 건의로 경기도 양주군 해촌, 즉 지금의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으로 옮겨 묻히게 되었는데, 연산군의 부인 신씨는 연산군보다 30여년을 더 오래 살다가 중종 32년인 1537년에 세상을 떠나 양주 연산군 묘 옆에 묻히게 되어 지금과 같은 쌍분의 형식이 되었다. 이때에도 중종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후히 장례를 치룰 것을 명하였음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방학동 산에 나란히 자리하게 된 연산군과 신씨의 묘소는 다른 왕릉과 달리 왕릉보다 격이 훨씬 낮은 일반 왕자군의 묘소로서 석물들이 조영되었는데, 이는 광해군과 그 부인 유씨의 묘도 마찬가지다. 연산군이나 광해군 모두 실덕(失德)으로 폐위되어 군으로 강봉되고 그 묘소또한 일반 묘로 격하되었기에 그렇게 조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연산군 재위 12년 동안 보여준 연산군의 강력한 위세와는 판이하게 연산군 묘역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초라해 보였다. 세워진 석물도 그렇거니와 주변의 모든 것들이 권력을 잃고 쓸쓸하게 죽어간 연산군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전체적으로 초라하고 쓸쓸한 느낌이 든다는 점을 부인하기 힘들 것 같다.
반정이라는 정변으로 폐위되어 권력을 잃고 쓸쓸한 최후를 맞았기 때문이어서 그런지 세삼 냉정한 권력과 권력 무상이라는 말들이 절로 떠오를 수 밖에 없을 듯한 분위기를 연산군묘는 연출하고 있다. 게다가 연산군 묘 주변에는 연산군의 사위, 후궁조씨의 묘역도 자리하고 있어 얼핏 보면 왕실의 묘역이라기 보다 일반 민가의 선영에 온 것과 같다는 느낌마저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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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묘 좌측에 시립하고 있는 문인석 2쌍
1991년에 사적 362호로 지정된 연산군과 부인 신씨의 묘 앞에는 비가 설치되어 있는데, 정면에 <연산군지묘> 측면에 <정덕 8년 2월 22일 장> (조선 중종 8년(1513) 2월 20일에 해당됨) 이라 새겨져 있고, 부인 신씨에는 <거창신씨지묘> 가 정면에, <가정 16년 (조선 중종 32년 (1537) ) 6월 26일 장> 이라 새겨져 있다. 그밖에 석물로 문인석 2쌍과 망주석 1쌍이 자리하고 있고, 묘소 앞에 장명등이 각 1개씩 설치되어 있다.
보통 문인석과 무인석, 석호, 석양, 석마 등 왕릉에 조영될 필수 석물들이 여기에서는 생략되고 있는데, 임금의 자리에서 폐위되어 군으로 강봉되었다가 죽었기 때문에 일반 왕자의 묘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다만 문인석이 2쌍이라는 점에서 같은 형태로 조영된 광해군묘와는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2) 묘를 둘러보며 생각하는 연산군
연산군은 조선왕조 518년 27 임금 가운데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임금이었다. 강력한 왕권을 꾀하고자 했던 태종이나 세조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을 정도로 그의 왕권은 매우 강했고, 거의 전제군주에 가까웠을 정도로 권력을 행사했다. 특히 두차례의 사화(무오 - 갑자 사화) 를 통해 사림과 훈구를 철저히 탄압하여 유일무이한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그의 전제군주적 성격은 여러 면에서 감지되고 있는데, 임금에게 간언을 행하던 사간원 및 홍문관 과 정치 토론장인 경연을 왕권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폐지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거추장 스러운 유교적 관행을 싫어하여 안순왕후와 소혜왕후의 국상시 역월 단상제 (1일을 1달로 계산하여 3년상을 치루는 일) 를 실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전제군주적 왕권 강화는 도리어 훈신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정상적인 유교 정치가 아닌 패도를 넘어선 실정이라 훈신들은 본 것이다. 또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킨 것에 대해서는 국왕으로서의 도리에 어긋난 잔혹한 통치행위이었으며, 성균관을 없애 유흥을 벌인 것 또한 유교를 이념으로 삼는 국왕의 통치 자세에 크게 어긋난다고 보았다.
사실 연산군의 전제 군주적 왕권 강화는 자신의 입지만 강화하여 독재에 활용하고자 했을 뿐 도리어 역효과만 불러일으켰는데 결국 자신의 독재에만 활용하고자 했던 그 자체가 연산군의 한계 였던 것이다. 그러한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1506년에 반정을 맞이하였는데, 반정은 이러한 연산군의 실정을 규탄하는 훈신들의 정치적 평가였던 셈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어리석은 일이지만 연산군이 강력한 왕권을 토대로 측근들을 포진시켜 개혁과 민생 정치에 주력해 나갔다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 지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산군은 자신의 독재에만 활용하는 데 강력한 왕권을 구사했을 뿐 측근들을 키워 중용하거나 그 측근들을 내세워 자신들의 정치로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오히려 앞서 언급한 대로 연산군은 강력한 왕권을 자신의 독재와 입지 강화에만 힘쓰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실정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연산군의 통치 행태에 대해 훈신들은 반발하여 1506년의 중종 반정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이후 연산군은 폭군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오늘날까지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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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풍미한 연산군의 묘와 묘비
3) 에필로그 - 연산군을 재평가해야 할 이유-
필자는 연산군을 옹호하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 다만, 그에 대한 폭군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에 대해서는 이제 재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을 뿐이다. 인물에 대한 평가에 부정적인 면이 있다면 반드시 긍정적인 면이 있는데, 연산군은 지금껏 긍정적인 면이 발견되지 못한 채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에 재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연산군은 폭군으로만 알려져 있고 백성들에게 많은 고초를 주었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승자측이 기술한 일기(연산군일기)의 기록만을 놓고 자세히 검토해 본다면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연산군의 모습 (주로 폭군의 이미지가 되겠지만..)과는 사뭇 다른 면모도 많이 발견되고 있는 점등을 고려해서라도 연산군에 대한 재평가는 한번 쯤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어쨌든 연산군은 한 시대를 풍미하다 31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연산군 한 인물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극히 중립적이다. 무작적 좋거나, 무작정 싫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필히 우호적인 것만도 아니다. 그도 한 시대를 이끌어 간 인물이기에 단점이나 부정적인 면도 있을 것이지만 장점이나 긍정적인 면도 필히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 시대를 살다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연산군의 묘를 둘러보면서 세월앞에 영원한 권력은 있을 수 없으며, 권력 앞에 영원한 승자 또한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새삼 실감하게 한다. 강력한 왕권을 쥐고도 자신의 독재와 입지 강화에만 활용하다 폐위되어 쫓겨난 연산군을 접하면서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이제 그 연산군묘가 오랜 침묵을 깨고 7월 11일 이후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다. 비공개를 유지하다 역사와 문화에 대한 많은 관심, 특히 흥행 대작 '왕의 남자'의 높은 인기와 관심의 여파 속에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는 것이다.
왕의 남자라는 최고의 흥행 영화를 통해 연산군을 널리 각인 시킨 만큼 연산군에 대한 극히 부정적인 생각도 재평가를 통해 다시금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연산군묘를 둘러보면서 느낀 필자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