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 6일 청림회(1)
오늘··· 어제, 식목일이잖습니까? 나무, 학교에 나무 좀, 심으셨습니까? 나무 심는 거, 음악 듣는 거, 뭐, 도자기, 서예하고 이런 것들은 수행하고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옛날 스님들께서도 나무를 많이 심으셨죠. 그래, 절 주변에 또, 나무를 또 많이 아껴 놓으니까, 어느 대찰(大刹)에 가더라도, 큰, 울창한 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정원을 보면 그 사람의 성품을 알 수가 있는데. 재야로 내려와 가지고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들은 집에 목단이라든지 붉은 꽃도 심지도 않고, 화려한 장미를 가꾸지도 않고 오직 소박한 흰 색 꽃을 심기도 하고··· 그게 다 불교쪽으로 보면 상즉상입(相卽相入)돼 가지고. 정원을 가꿔 놓은 걸 보면, 난초 같은 거···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사명당 스님도 사군자 **, 삼군자 **, 그랬잖아요? 뒤 쪽으로는 대나무를 가꾸고 서쪽 울타리, 서쪽으로 들어오는 길에는 국화, 마당 앞 쪽에는 난초, 동쪽으로는 매화를 가꾸고. 그래서 나무들이 자라는 품새를 보면 사람도 거기에 닮아 가거든요. 절에, 어떤 절에든지 가더라도.
오늘 <약초유품(藥草喩品)> 세 번째 시간입니다, 세 번째 시간인데. 나무를 큰 절에서 많이 가꾸고 꽃을 절에서 가꾸고 그렇게 하는 것은. 제행(諸行)의 무상(無常)을, 다시 말해서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 할까요? 이런 것에 대해 가지고 무언으로 설법하고 가르치는 겁니다. 그래서 “간화오색공(看花悟色空)”이라고. 옛날부터 꽃을 잘 살피면서 색(色)의 무상(無常)함을, 공(空)을 깨친다고 <통도사> <대광륜전>에 가면, 주련도 있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 방 거사(龐 居士) 게송도, 유명한 게 있죠? 그 다음달, 숙제로 해 놓겠습니다. <직지사>가면 선방에도 있기도 하고, 또 저기 다른 절에 가도 또, 있기도 하고 그런데··· 방 거사(龐 居士)··· 어떤 새가, 꽃이 새가 날아 들어와도 무심하고 새도 꽃을 무심하고 그런 것처럼. 꽃을 보면서 또 생멸(生滅)과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무상(無常)한 걸 절로 깨치게 되죠. 큰 절 입구에, <해인사>나 <통도사>에 가면은 아름드리 나무가, 이렇게, 한 대~여섯 사람이 안아도 안을 만한, 그런 큰~ 나무들이, 썩은 대로 가만~히 방치해서 놔둡니다. 그걸 보고 무상(無常)을 깨우치고 공부하는 거죠. 꽃이 화려하게 피었다가 지는 것을 보면서 무상(無常)의 흐름을 절감하게 되고, 그렇습니다.
오늘 비로소 이, <약초유품(藥草喩品)> 세 번째 시간인데. 첫 시간은 어리버리 하다가 진도가 못 나갔고. 두 번째 시간은 대의(大義)만 조금 간추리다가 나가지를 못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지금, 3년째 <법화경>을 하시는 건가요? (예) 3년째···. 그렇더라도 짬짬이 내서 이 <법화경> 7[일곱]권을 갖다가 하루에 다 통독(通讀)을 하면은, 일고, 여덟[7~8]시간이면 충분히 다 읽을 수 있거든요, 천천~히 읽으시더라도. 한 두 번쯤은, 소설책 읽듯이·무협지 읽듯이·만화책 읽듯이, 그런 심정으로 편한 심정으로 한 번쯤, 이렇게 읽는 것이 선근의 복이 좀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가져 봅니다.
오늘 이제 비로소···<약초유품(藥草喩品)>을 오늘 마치겠습니다. 제가 이 농담하다가는 <약초유품(藥草喩品)>을 마치는데··· 좀 양이 많죠? 많으니까 많은 대로, 마치도록, 그리 하겠습니다. 모든 얘기는 각설하고 본문부터 들어갑니다.
이 불교라는 것은. 조금 전에 오다가 제가 말씀드렸지마는. 어디 학교에서 공부하시는 물리·화학이든지, 수학·영어·일본어·중국어와는 달라 가지고 전공이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반야심경> 한 편. 그 반 페이지도 안 되는 그, 작은 분량이지마는 그런 것이 <법화경> 일곱 권하고도 맞먹을 수가 있고. <금강경> 4구게 하나가 <화엄경> 80권하고도 그 무게가, 전혀 모자라지 않습니다. 그런 걸 볼 때, 불교는 정말 공부하기 쉽거든요. 불교보다 더 쉬운 건 없습니다. 하나의 이치만, 균형만 딱 잡아서 자기의 핵심적인 방향을 잡고만 있다고 하면은, 나머지 경전들은 여지없이 그냥, 다 소화가 되고, 오는 것마다 읽을 수가 있습니다.
비유를 말씀드린다 하면은. 소를 이렇게 집으로 끌고 가자, 그러면. 힘센 소의 소 입갈이라 그러나요, 그, 소 줄, 그거만 잡아가지고 쉽게 데려가지 못합니다. 천하장사라도. 천하장사보다 소가 더 힘이 센데 어떻게 데려 오겠습니까? 소를 딱, 집으로 쉽게 데려 오는 방법은. 소고삐를 딱, 낚아채서 끌고 온다며는 삼척동자, 그 어린 목동이라도 능히 소고삐만 제대로 딱,움켜잡고 오며는 쉽게, 이렇게 집으로 올 수가 있습니다. 이 <법화경>이든지 어떤 경전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로. 핵심적인 얘기. 그러면 <선어록>도 절로 풀리고, <법화경>도 절로 다 풀립니다. 경전, 어렵지 않습니다. 불교보다 더 쉬운 거, 없습니다.
제가 단언하건대. 불교는 3일만 공부하며는. 3일간 공부해 가지고 불교의, 경전의 이치를 모른다, 이러면 축생입니다, 축생. (웃음) 축생이고. 그럼, 3일 동안 해도 안 된다, 이러면. 그건 공부 안 해서 그렇습니다.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번만 마음먹고 시도를 한다, 이러면 단 3일이면 끝납니다. 3일안에 안 끝나며는 제가 혀를 뽑는 발설지옥(拔舌地獄)을 가겠습니다. 3일이면 끝납니다. 혹시 안 끝나시는 분들은, 제 허물이 아니고 다생겁래(多生劫來), 그 분의 허물입니다. 축생으로 가야 될 분이 인간도(人間道)에 잘못 오신 걸로 그렇게 생각 하셔야 돼요. 그래서 옛말에 우이독경(牛耳讀經)이 나오고, 마이동풍(馬耳東風)이란 게 거기서 나오는 거죠. 소한테 경(經)을 아무리 읽어 봐도 안 되잖습니까?
이 강의라고 하고, 법문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재료가 있으면은. 예를 들어서 ‘무’가 한 덩어리 있으면은. ‘무’를 사람들한테 던져 주는 게 아닙니다. 그 ‘무’를 가지고, 어떻게 해서 요리하는 방법을 잘~ 일러 가지고, 양념 쳐 가지고, 사람들한테 그 ‘요리’를 갖다가 내 놓는 것인데. 그런 거를 간파하고. 양념빼고, ‘무’ 원 줄기로, 나는 어떤 요리를 해 나가겠다, 그런 것을 간파하셔야 되요. 예를 들어서 ‘딸기’가 있으며는. 딸기 가지고 쥬스를 만들어 먹을 수도 있고·화채를 만들어 먹을 수도 있고. 그 ‘딸기’를 가지고 생딸기를 먹을 수도 있고·잼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고··· 갖가지 방법이 있잖아요? 그래도 ‘딸기’임에는 변함이 없거든요. 이게, 시럽을 만들든지·잼을 만들든지·화채를 만들든지, 그 요체(要諦)를 잘~ 잡아서 가시면 됩니다. 이 <법화경> <약초유품(藥草喩品)>하다가도 이것이 <반야심경>하고 일맥상통해 있거든요, 다를 게 없습니다. ‘금’이 뭐, 목걸이가 된들 어떻고·귀걸이가 된들 어떻고·반지가 된들 어떻습니까. ‘금’임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어요.
이 불교 경전이라는 것은 오직, ‘마음’에 대해서 설파를 해 놓은 것이고. 그 ‘마음’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과 마음의 생멸법(生滅法)과 불생불멸법(不生不滅法), 2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거 아는데 무슨, 3일까지 시간도 너무 많이 드리는 거죠, 사실. 한 30분이면 안 될까요? 30분이면 끝나는 애긴데. 안 들으려고 해요. 뭘 자꾸 세우냐 이러면 자기 고집과 아상(我相)과, 그리고 경험과 지식적으로 자꾸 불교를 접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식과 경험으로 불교 공부를 하려고 달려 들며는. 저 태평양, 저 넓은 바다에 다리를 놓아서 태평양 건너가는 거하고 똑같습니다. 차라리, 자기의 소견을 밝혀서, 작은 돛단배라도 하나 마련해 가지고, 조각배라도. 그래서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간에, 노 젓고 순풍에 돛을 올려서 그렇게 차근~차근 먼 바다 헤쳐 나가는 것이, 실제적으로 그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죠?
그래 <법화경>을 볼 때, 어렵다는 생각을 지금 딱, 버려 버려요. 너무나 재밌습니다. 왜 재밌습니까? 재밌는, 이 강사가 왔기 때문에 재밌을 수밖에 없어요. 박수 함, 치고 하까요? (박수치는 소리)
12. 爾時(이시)에 無數千萬億種衆生(무수천만억종중생)이
자, 열 두 번째. 그 때에 무수한, 천만억종(千萬億種)의 중생들이. 시간이 너무 없기 때문에 앞의 거는 다 보셨으리라 생각하고 진도부터 나갑니다. 천만억종(千萬億種)의 중생들이
來至佛所(내지불소)하야 而聽法(이청법)이러니
다 부처님 처소에 와서 이청법(而聽法)이러니. 법을 들었다. 부처님께서 오라고 다 불렀죠? 부처님께서 불러 가지고 다 모였어요.
여기서, 열 세 번째부터는 부처님의, 진짜로 아는 거, 진지(眞智). 진짜로 아는 명훈가피력(冥熏加被力)를 서서히 설법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이제, 약초(藥草)에 비유해서 설법을 하는 거지요.
13. 如來于時(여래우시)에 觀是衆生(관시중생)의 諸根利鈍(제근이둔)과
여래(如來)께서 관(觀). 관(觀)했다. 중생들의 근기의 이둔(利鈍). 영리하고 우둔한 것을. 제근(諸根)의 이둔(利鈍)을. 중생의 갖가지 근기가 다 다르니까. 그런 영리하고 우둔한 것과.
精進懈怠(정진해태)하사
또 부지런~히 정진(精進)하고. 정진(精進)이라고 할 때의 ‘정[精]자(字)’는 ‘고울 정[精]자(字)’잖아요. 이 정진(精進)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탐·진·치(貪嗔癡)가 들어올 틈이 없도록, 아~~주 미밀 관조하면서 밀고 나가는 그런 상태를 정진(精進)이라고 합니다, 정진(精進). ‘고울 정[精]자(字)’, ‘나아갈 진[進]자(字)’. 한발~·한발. 1mm~·1mm씩. 사람이 회복되며는, 몸이 회복될 때 좁쌀만큼 좋아지는 거, 그런 걸 ‘정(精)’이라 그래요, ‘정(精)’. 그 ‘정(精)’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며는. 곡식을 까 가지고 백미(白米)상태가 된 거 있잖아요? 도정(搗精)해 가지고. 도정(搗精)해 가지고 껍데기가 안 남잖아요? 껍데기가 안 남고 알맹이만 있으면 어때요? 쌀이 곱잖아요. 벼로 있을 때는 거칠죠. 콩깍지 씐 것은 거칠잖아요? 그런데 콩 알맹이는? 아주 곱지 않습니까? 고런 걸 정(精)’이라 그러고. 마음을 써더라도 탐·진·치(貪嗔癡)라는 거친 껍데기가 다 떨어져 나가고 아주 정미(精美)로운 마음, 순수한 마음으로 밀고 나가는 것을 정진(精進)이라고 그렇게 됩니다. 정진(精進)의 다른 말이 불퇴전(不退轉)이죠, 불퇴전(不退轉). 뒤로 퇴전(退轉), 전도몽상(顚倒夢想)이 된다든지, 물러나든지, 이런 거는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진(精進)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또, 해태(懈怠). 아까 해태 사이다 얘기 했는데, 천연 사이다. 해태(懈怠). 게으른 사람도 있어서
隨其所堪(수기소감)하여 而爲說法(이위설법)하야
그 소감(所堪). 감당할 바. 그 근기의 무게를 지탱할 만큼의 그것을 따라서. 코끼리한테다가 비스켓 줘 봤자, 소화가 될똥말똥, 입에 풀칠도 하겠습니까? 개미한테 양식을 주면서, 콘테이너 하나 주면서 “개미, 너 부지런하제? 짊어지고 가라.”하면서 콘테이너 맡겨 놓으면, 개미가? 깔려 죽어뿝니다. 근데 법문을 설하시더라도 다 마찬가지. 이위설법(而爲說法)하야. 위하여 설법하여
種種無量(종종무량)하사 皆令歡喜(개령환희)하야
종종으로 무량하야. 개령(皆令). 모두로 하여금. ‘령[令]자(字)’는 하여금, 사역 동사죠. ‘하여금 사[使]자(字)’ ‘하여금 영[令]자(字)’ ‘장[將?]자(字)’도 그런 게 있고. 모두들로 하여금, 환희, 기쁘게 해서
快得善利(쾌득선리)어든
아주 통쾌하게 좋은 이익을 얻게 하시거든.
14. 是諸衆生(시제중생)이 聞是法已(문시법이)에
이 중생들이 시법(是法). 이 법을. 문(聞). 듣고는. ‘이[已]자(字)’는 종결사죠. 다 들어 마쳤다, 이거야. 이 법을,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는.
現世安隱(현세안은)하고
현세(現世)에 안은(安隱)하고. 지금 사는 현재에 편안~하고.
後生善處(후생선처)하며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며. 여기는 뭐, 현세(現世)·후생(後生), 이렇게 했지마는 삼세(三世)를 꿰뚫어 보는 거죠.
以道受樂(이도수락)하고
도(道)로써 즐거움을 받는다. 어떤 사람은 돈으로써 즐거움을 삼기도 하고·어떤 이는 명예로써 즐거움을 삼기도 하고, 하는데 여기서 이 중생들은, 도(道)로써 수락(受樂)이라. 즐거움을 삼는거 같애요.
亦得聞法(역득문법)하며
또한 이 법을 들으며
旣聞法已(기문법이)에 離諸障礙(이제장애)하고
이미 이 법을 또 듣고는. 어떻습니까? 모든 장애(障礙)를 떠나고.
於諸法中(어제법중)에 任力所能(임력소능)하야
그 모든 법 가운데에. 모든 법 중에, 설법하신 그 법 중에서. 역량이 능한 바에, 자기 역량이 미치는 만큼. 앞에는 ‘감[堪]자(字)’썼지마는. 감임(堪任), 하잖아요? ‘견딜 감[堪]자(字)’, ‘맡을 감[堪]자(字)’ ‘맡을 임[任]자(字)’. 똑같은 뜻인데 단어의 반복을 피해서 앞에는 ‘견딜 감[堪]자(字)’를 하고, 여기서 ‘견딜 임[任]자(字)’를 써 놨어요. 뜻은 똑같애요. ‘감임(堪任)한다’ 그러지요? 뜻은 똑같습니다. 영어나 국어나 한문이나 다 마찬가지예요. 단어의 반복을 피하는 것은 그 뜻을 한층 더 강조하기 위한, 강조용법 중의 하나지요. 이런 거 하니까, 학교 수업 하는 거 같습니까? 고래 해 놓으면 또 낫지요?
조금 앞으로 이렇게 돌아본다, 이러면. 수기소감(隨其所堪)에. 그 근기에 따라서, 그 근기에 따라 가지고 감당할 걸 준다, 그러는데. 근기라고 하는 것은. 좀 지루한, 교리학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자, 주목해 주세요. 근기라고.
성문(聲聞)은 어디에 기대서 자기의 공부를 합니까? 4제법(四諦法), 고(苦)·집(集)·멸(滅)·도(道)에 기대서 하고.
연각(緣覺)은? 12연기(十二 緣起)에 기대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보살(菩薩)은? 6도(六道). 6바라밀(六波羅蜜)을 의지해서 공부를 하게 되지요.
여기서 이제장애(離諸障礙)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이 보통 3악도(三惡道)에, 지옥·아귀·축생에 헤매던 중생들은 그 악도(惡道)를 벗어나기 위해서 포고발심(怖苦發心)이라. 고통을 두려워해서 발심(發心), 발심(發心)을 내게 되면은. 지옥에 안 가려고 발심(發心)을 하게 되면 그 상태를 우리는, ‘신심(信心)을 갖추게 된다.’고 그럽니다. 신심(信心)이 돈독해 지면은. 포고발심(怖苦發心)해서 계행(戒行)을 철저하게 지키면 어떠냐 이러면. 천상(天上)까지 날 수가 있습니다. 불교 안 믿어도 됩니다. 마음 안 깨쳐도, 천상(天上) 나는 것은? 10선법(十善法)만 익히면 됩니다. 계율(戒律)만 잘 지키면 된다는 거죠. 그렇게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근데 그걸 쪼금, 벗어나서 이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려고 그러면. 천상(天上)에 태어난 데서 성문(聲聞) 정도의 깨달음 정도, 얻으려고 하면. 4제법(四諦法)을 공부해서 진제(眞諦)·속제(俗諦), 고(苦)·집(集)·멸(滅)·도(道)를 공부를 하면서. 4제법(四諦法)은 뭡니까? 8정도(八正道)를 통해서 열반을 증득하는 거잖아요, 그렇지요? 고성제(苦聖諦)와 집성제(集聖諦)를 타파하고 8정도(八正道)를 통해서 자기의 그, 니르바나[Nirvana, 열반(涅槃)]를 성취하는 단계를 4제법(四諦法)이라 그럽니다. 고러한 사람들은 이제 어느 정도, 발심(發心)이 처음에 출발이 됐죠. 그, 신심(信心)이 완벽하게 갖춰져서, 갖춰진 사람들이 수행하는 방법이 4제법(四諦法)입니다.
근데 그, 4제법(四諦法)을 더 깊이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12연기(十二 緣起)를 관하게 됩니다, 12연기(十二 緣起). 그리 되면, 거기서 연각(緣覺)의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는데, 그 때 사람들이 내는 마음을. 제일 밑에는 포고(怖苦), 고통을 두려워해서, 공포스러워해서 발심(發心)하는 것이고. 그래서 계율(戒律)만 잘 지키게 되고, 이러다 보면 신심(信心)이 갖춰지게 되고, 그 신심(信心)이 완전무결해 지면 발심(發心)을 하게 됩니다.
발심(發心)은 조금 늘여서 얘기하면, 어디에 대한 발심(發心)이냐?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 그러죠, 발보리심(發菩提心). 깨달음에 대한 발심(發心)을 하고.
그 발보리심(發菩提心)을 조금 더 늘여서 얘기하면, 아뇩다라삼먁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다, 이렇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대해서 마음을 발한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여기서 조금 전에 얘기했던 것도 그런 거예요.
모든 악업장(惡業障)을 떠나게 되면은 사람은, 사람은. 인도환생(人道還生)이라든지 천상(天上)에 태어나게 되고.
그 다음에 현실적으로 눈앞에 보이는 그런 업장(業障)들을 타파하게 되면은 소승 2과(小乘 二課)는 성취한다는 거죠, 성문(聲聞), 연각(緣覺).
그리고 나머지 이제, 마음적으로. 이 절깐에는 이판사판(理判事判)이라 그러는데. 어떠한 일을,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참회하는 데 있어서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이 있습니다. 이참(理懺)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속으로 깊이 뉘우치는 것을 이참(理懺)이라 그러고. 사참(事懺)은. 물질적으로 배상을 하든지. 또, 육체적으로 징역을 살든지, 이렇게 참회하는 것을 사참(事懺)이라고 합니다. 그래, 잡히는 참회를 사참(事懺)이라 하고, 안 보이는 곳까지 이렇게 참회하는 것을 이참(理懺)이라고 이렇게 됩니다. 이참(理懺), 사참(事懺)이 되어야 진정한 참회가 되는 거죠. 마음은 하나도 안 뉘우치고, 변상만 해 줬다, 해 가지고, 100원? 뭐 100만원이라 하까요, 그럼. 100만원어치 손해를 끼쳤으니까 100만원만 갚아준다, 해 가지고 진정한 참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죠.
그래서 이승(二乘)에서는 사참(事懺)만 이렇게 가능하다, 하지마는 이 보살도(菩薩道), 6바라밀(六波羅蜜)을 행하고 대자대비(大慈大悲)를 행해서 나가려면 마음 안에도 흔적이 남지 않아야 되기 때문에, 그 때는 이참(理懺)까지 돼야 되는 거죠. 이업장(理業障), 이치적인 업장(業障)까지도 녹아져야 6바라밀(六波羅蜜)이 수행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입으로만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바라밀이라고, 반야 바라밀이라고 늘상 얘기하지마는, 그렇게 행하는 사람은 이, 인류 역사에 있어 가지고 거의 없다고 봐야 됩니다. 왜? 오로지 사는 모습을 보면 탐·진·치·만·의·견(貪嗔癡慢疑見), 이 여섯 가지로 살아가지, 교만하고 의심하고 서로 헐뜯고 시기·질투하는, 그런 온갖 번뇌 속에 살아가면서 그 6바라밀(六波羅蜜)을 얘기하니까 참, 우스운 얘기죠. -누가 그렇습니까? 난 왜 이리 근지럽노, 없는 머리가.
漸得入道(점득입도)는
그래 가지고. 점차점차 입도(入道)는. 점득입도(漸得入道)라. ‘입(入)’이라 하는 것은 ‘증입(證入)한다.’ ‘깨닫는다’, ‘얻을 득[得]자(字)’하고 다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도(道)를 깨달아 드는 것은 마치 어떠냐?
如彼大雲(여피대운)이 雨於一切 卉木叢林(우어일체 훼목총림)과 及諸藥草(급제약초)어든
비유하면, 저 큰~ 구름이. 일체에 비를 내려서. 여기 ‘비내릴 우[雨]자(字)’는 동사로 쓰여진 거예요. 명사 ‘비 우[雨]자(字)’가 아니라. 일체에 비 내려서. ‘비 내리다.’는 동사예요. 일체의 훼목총림(卉木叢林)과. 훼목(卉木). 저 풀과 나무와 또, 뭡니까? 모든 약초에 비를 내리거든.
如其種性(여기종성)하야
마치 그 갖가지, 종자(種子), 그 성품 있는 것, 그것들이
具足蒙潤(구족몽윤)하야 各得生長(각득생장)하나니라
모두 다 입는다, 이거야. 윤택함을 입어서. 각기 생장(生長)함을 얻는 거와 같다.
그러니까 조금 전에 말씀을 드렸어요. 성문(聲聞)하고 연각(緣覺)하고 보살(菩薩)하고··· 그렇죠? 사람들, 수행하는 데는 다~ 그런 차제(次第)가 있다는 거.
15. 如來說法(여래설법)은 一相一味(일상일미)니
부처님이 이렇게 숱한 방편으로, 많이 이렇게 설법하지마는. 실제로는 한결같은 한 가지 모양뿐이고, 한 가지 맛뿐입니다. 그러니까 불교가 너무 쉽죠. 이 불교 강의는 공부 안 해도 됩니다. 이 불교 책 보는 거, 너무 쉬워요. 쉽지요?, 여러분들도. 이, 어려우면요, 사람이 아니예요. (웃음) 부처님의 설법은 너무나 간단하다, 이거야. 몇 가지기 때문에? 비록 뭐, 8만 4천 법문이 있더라도 오직? 바닷물은? 짜다. 한 맛이거든, 그렇죠? 꿀은, 이 나라·저 나라, 어떤 나라, 꿀을 먹어 보더라도? 달다. 부처님 설법은, 무슨 설법 듣더라도? 마음뿐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그거보다 더 쉬운 게 어딨습니까, 너무 쉽잖아요, 그렇죠? (얼른 대답이 안 나오자 안타까워 하시며) 그냥 쉽다고 수긍하세요, 쉽지요? (우렁차게, 예~) 그리 해야 어렵던 것도 쉽게 풀립니다. 되는 집은 복이 없어도 “나는 복 많다·복 많다·복 많다.” 해 가지고 복이, 저절로 굴러 오는데. 복이 실제적으로 많은 사람인데도 “나는 복 없다·복 없다.” 이러면 어때요? 나가 버려요. 쉽지요? (다시 작게, 예) 예.
所謂解脫相(소위해탈상)이며
소위(所謂).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법은 뭣이냐? 해탈상(解脫相)이다. 어디에 얽매이는, 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에 얽매이는 바가 없다는 거죠.
離相滅相(이상멸상)이라
이상(離相)이다. 이(離). 떠났다, 이거죠. 어떤 번뇌, 속진번뇌(俗塵煩惱)에 화합되지 않는 거. 멸상(滅相)이라. 멸상(滅相)이라. 이, 생사가 완전히 끝나 버렸다. 이 생멸법(生滅法)이 끝나 버리니까 멸상(滅相)이라. 그러니까 이, 해탈상(解脫相)니·이상(離相)이니·멸상(滅相)이니, ‘상[相]자(字)’ 뒤에 붙은 거는? 상(相)으로부터 해탈됐다. 어떤 상(相)? 마음의 모양으로부터. 간단하잖아요. 이상(離相). 어떤 상(相)으로부터 떠났다, 어떤 상(相)? 마음의 상(相). 무슨 마음의 상(相)? 망상의 상(相). 아시겠죠? 망념의 상(相). 이거보다 더 쉬운 게 어딨습니까? 벗어났다[離]든지·해탈했다[解脫]든지·없어졌다[滅]든지, 이런 것은 전부다? 똑같은 말이지요. 예? 참 대답도 제대로 못 해. 그냥 “예”만 하세요, 앞으로. (예) 다 아시지요? (예~) 예, “예”만 하시면 됩니다.
究竟至於一切種智(구경지어일체종지)하나니
그래서 구경(究竟)에는. 마침내. 지(至). 이르른다. 구경(究竟)에는 마침내, 끝까지 가 보면 어디에 일체종지(一切種智)에 이르게 된다.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다른 말로 인격화 시키면? “부처”라고 하지요. 이걸 갖다가 법리(法理)화 시키면? “일체종지(一切種智)”라 그러죠. 어디든지 모르는 게 없으니까, 일체종(一切種)에 다~ 지혜를 갖췄으니까, 무불통지(無不通知)죠.
其有衆生(기유중생)이 聞如來法(문여래법)하고
그 어떤 중생이. 여래(如來)의 법문을 듣고는
若持讀誦(약지독송)커나
만약에 수지(手持)하고 독송(讀誦)하거나. 근데 왜 약지독송(若持讀誦)이라 이렇게, 수지(手持)를, ‘수[手]자(字)’를 빼버렸냐면 글자 넉자배기를 톡톡톡, 떼다 보니까 생략된 거예요, 그렇죠? 글자 운(韻) 맞추기 위해서 그런 거는 살짝살짝 집어넣어서 해석하면 더 편하죠. 만약에 수지독송(手持讀誦)하거나
如說修行(여설수행)하면
설하신 바와 같이. 여~실(如實)하게. 설하신 바와 같이 수행한다면은. 여법(如法)하게 수행한다면은.
所得功德(소득공덕)은 不自覺知(부자각지)니라
그 소득공덕은 그 스스로도 알지 못할 정도로 많다, 이 말이야. 스스로, 그러니까 마치 이게 우리가 <법화경> 보는 것이 스스로 비 맞아 가지고 스스로 자라는 저, 온갖 풀과 같고, 온갖 나무와 같다, 는 거죠. 근데 나무가 저 자라는 거 모르고, 풀이 저 자라는 걸 모르고, 우리가? 우리 태어난 걸 모르고. 우리 마음이? 우리 마음이 넓어지고 대자대비하고 지혜로워지는 것을, 느끼지는 못하지마는 우리는 그렇게 가고 있다는 거죠, 이렇게. 훈습(薰習)이 되면서. 근데 왜, 결석하고 빠지냐? 이거지. 그 사람들이 복이 없잖아? 우리, 세상에 복 중에 가장 맑은 복이? 청복(淸福). 청복(淸福)보다 더 좋은 복이? 용복(龍福)이라고 있어요. (웃음) 아니~,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중에서 11가지 짐승은 다 잡아 먹을 수 있지만, 용(龍)은? 잡아먹을 수 없어요. 용(龍)이 제일 세상에 훌륭한 거 같애, 그렇죠? ‘용(龍) 자(字)’는 다 스타 아닙니까? 한 용운 스님. 백 용성 스님, 성 룡, 이 소룡··· (조 용필) 조 용필도 한문은 다른데··· 여하튼 ‘용(龍) 자(字)’만 넣으면 용(龍)되는 거야. 용(龍) 안 될 수가 없는 거야.
그래, 요 부자각지(不自覺知)라는 말은 그런 말입니다. 알게 모르게, 그 법문만 들었다, 하면은? 그러니까 역재이근(歷在耳根)하면은. 만약 귀에만 스쳐서 들어 놓으면은. 영원히 도(道)의 종자가 되어 가지고. 불락악취(不落惡趣)라. 3악도(三惡道)에 안 떨어진다, 그랬어요. 부실인신(不失人身)이라. 사람의 몸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거죠. [역재이근(歷在耳根) 영위도종(永爲道種) 세세 불락악취(世世 不落惡趣) 생생 부실인신(生生 不失人身)] 해탈과. 윤회를 멸할 수 있는 해탈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은 <청림회>에서 꾸준하게, 자기가 느는 것도 모르게 <법화경> 한번씩 보는 것이 엄청, 소득공덕이 있습니다. 이게 실제 상황입니다. 이게, 실제 상황이라고요. 눈앞에서 이게, 밥 한 그릇·국 한 그릇이 실제 상황 같지마는 그거는 환망(幻妄)과 같습니다, 사실은. 이게 아승지겁(阿僧祗劫)을 두고 돌아야되는. 진실로 실상(實相)을 얘기하는데, 이거는 귀에 안 들어온다고. 왜 안 들어오냐? 탐·진·치(貪嗔癡)에 눈이 어둡기 때문에 안 들어와요. 머리 깎고 이래 가지고, 아이도 없고, 어마이도 없고 이렇게 살면은. 불쌍하게 보는 거야. 이빨 다 빠져있제, 머리도 빠져있제··· 제가 뭐, 있는 거, 몇 개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어요.
16. 所以者何(소이자하)오
이 뜻이 어떠하냐?
唯有如來(유유여래)가 知此衆生(지차중생)의 種相體性(종상체성)호대
오직 여래(如來)께서 이 일체 중생의 종상(種相). 그 종자(種子)·종자(種子)마다, 그 모양마다. 그 체성(體性). 근성(根性)이죠. 그 바탕의 성품을 아시고는
念何事(념하사)와 思何事(사하사)와
어떠한 일을 염(念)하고 어떠한 일을 생각[思]하고. 방금 내가 뭐라 했죠? 염(念)하고, 생각[思]하고, 이랬습니까? ‘염(念)’이라는 것은 이 이래적(***)으로 살짝 올라오는 생각이라면은. ‘사(思)’라는 것은 깊이 생각을 가지쳐서 번거롭게 사유하는 것을 ‘사(思)’라고 하죠. 통째, 총체적으로는 ‘염(念)’이라 한다면은 분각적(?分各的?)으로는 각지(?各地?)·각지(?各地?) 구분해서 얘기하면은 ‘사(思)’라고 얘기하죠.
짚단 한 뭉치가 있으면은 ‘염(念)’이라고 한다면은. 그 짚단을 낱낱이 뜯어서, 짚 하나를 헤아려 본다면은 ‘사(思)’가 되는 거죠.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이 나락이, 한 타락이 있으면은 그거는 ‘염(念)’이라고 한다면은. 그 나락, 하나하나에 대해서, 요거는 까만 콩, 까만 놈, 요 놈은 흰 놈, 해서 구분할 수 있잖아요? 그렇죠? 낱알 하나씩. 그런 게 ‘사(思)’라 그래요, ‘사(思)’. 이렇게 강의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작은 소리로, 용학스님) 큰 소리로 하세요, 큰 소리로. 녹음 안 돼요, 그래 가지고. (웃음)
修何事(수하사)며
‘수(修)’라고 하는 것은 그 ‘염(念)’과 ‘사(思)’를 통해서 수행, 실천하는 것이죠. ‘염(念)’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이 바깥에 피부 정도, 와 닿는다, 그러면. ‘사(思)’라는 것은 -낮에 얘기하듯이.- 뼛 속까지 들어온, 그러한 정도. 그러고 이 피부와 뼛 속까지 안쪽으로 익어진 것이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수행(修行). 행위, 조작을 ‘수(修)’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실천. 수행(修行), 실천. 수행(修行), 실천.
어떠한 일을 염(念)하고, 어떠한 일을 사(思)하고, 어떠한 것을 수(修)하며
云何念(운하념)과 云何思(운하사)와 云何修(운하수)며
어떻게 또 염(念)하고, 어떻게 생각[思]하고, 어떻게 닦아야[修] 되느냐? 여기서는 이제, 저걸 얘기하는 거죠. 어떠한 방법. 바른 방법을, 8정도(八正道)를 삿된 방법으로 닦으면 안 된다는 거죠. 이, 정사(正邪)를 얘기하는 거예요, 정사(正邪). 그래, 여기서는 뭐, 대·소승법을 닦아야 된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뒤에 또 나오네요.
以何法念(이하법념)과 以何法思(이하법사)와 以何法修(이하법수)며
앞에 ‘법[法]자(字)’가 붙어 있는 거는 구체적인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닦는 방법, 있잖아요? 사마타(samatha)와 비파사나(vipassana), 하는 방법, 있지요? 대·소승의 그런,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이런 방법, 있잖아요? 고런 게 이제 붙으면은 뭐가 됩니까? ‘법[法]’이 되잖아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어떠한 법념(法念)과 어떠한 법사(法思)와 어떠한 법수(法修)로써. 법수(法修). 법수(法修)는 넘어가겠습니다. 해석이 안 되네.
以何法得何法(이하법득하법)이니라
또 이하법(以何法). 어떠한 법으로써. 득하법(得何法). 어떠한 법을 얻겠습니까? 그건 뭐 아까 말씀드렸듯이. 성문(聲聞)은 4제(四諦)로 얻고. 보살(菩薩)은, 대승(大乘)은 6바라밀(六波羅蜜)로 하고. 연각(緣覺)은 12연기(十二 緣起)로 한다. 요런 식으로 이제 말씀드렸어요.
17. 衆生(중생)이 住於種種之地(주어종종지지)를
중생이 갖가지 경지에 머무르면서
唯有如來(유유여래)이 如實見之(여실견지)하야
오직 여래(如來)께서 여실히 그걸 보시고.
明了無礙(명료무애)호대
명료(明了)하야. 분명하게, 또록또록하게 중생들의 그런 근기를 여래(如來)께서 다 훑어보시고. 누구는 연각(緣覺)쯤 되겠다·누구는 성문(聲聞)이쯤 되겠다·누구는 보살(菩薩)쯤 되겠다·누구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누구는 축생이겠다, 이까지 명료(明了)하게 딱, 꿰뚫어 보시고 무애(無礙)하되. 아~무 장애가 없다. 부처님이 다 알아보시고는. 다 알아보시는 것이 있되. 마치, 어때요?
如彼卉木叢林(여피훼목총림)과 諸藥草等(제약초등)이
저 풀과 나무와 빽빽한 숲과, 모든 제약초(諸藥草)등이
而不自知 上中下性(이부자제상중하성)이니라
이부자지(而不自知). 자지(自知)라고 읽으면 안 돼요. ‘자제(自知)’라고 읽어야 돼요, 자제(自知). 스스로 상·중·하(上中下)의 근성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남들이 봐서 다 아는 거지, 아는 사람이나 안다, 이런 얘기죠.
18. 如來 知是一相一味之法(여래 지시일상일미지법)하나니
여래(如來)께서는 이 일상일미(一相一味)의 법을 아시나니.
말하자면, 일상일미(一相一味)의 법이 뭡니까? 앞에서 한 번 말씀드렸지요? 너무 어렵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부처님께서 설명하시는 거예요.
所謂解脫相(소위해탈상)이며 離相滅相(이상멸상)이며
이른바, 해탈상(解脫相)이며 또, 이상(離相)이며 멸상(滅相)이다. 사실은 앞에서는 정지(正智). 바른 지혜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 이러면은. 여기서는 이제 다시 한 번 더 언급 하는 거는 이 지혜의 실상(實相)을 가지고 진실된 본모습을 또 한번, 강조하는 겁니다.
究竟涅槃(구경열반)인
맞잖아요, 요, 실상(實相)이. 실상(實相)은 뭐다? 무상(無相)이다. 진리는? 비동(非動)이다. 진리는 움직이지 않고, 실상(實相)은 모양이 없는 것[無相]이죠. 그 실상(實相)은 무슨 실상(實相)입니까? 진실한 모양이? 마음의 실상(實相), 그렇지요? (묵묵부답) 아이, 또 까먹었네. 맞지 않습니까? (예~). 예, “예”만 하시면 됩니다.
제가 이 강의하는 법 중에, 교섭법 중에 그게 하나 있어요. 무조건, 한 사람, 이렇게 얘기하면 그 사람은 ‘뭐뭐’, 탁, 시켜 놔요, 학인(學人)들한테. 어려우니까. 그러면, “내가 무슨 얘기하면 너는 무조건 ‘8지 보살(八地 菩薩)’만 얘기해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무생법인(無生法忍), 몇 지(地)에 얻노?”//“8집[八地]니다.”//“아유, 잘한다.”
“색자재(色自在)가 몇 지(地)지?”//“8집[八地]니다.”
“미세 번뇌를 뚫고 들어갈 때 제일 첫 번째는 몇 지(地)야?”//“8집[八地]니다.”
무조건 “8지(八地)”만 하면 100점이야, 100점. 그래, 또 다른 학인(學人)들은 다른 걸, 하나 가르쳐 놓습니다. 그러면 어떨 것 같아요? 강의하면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8지(八地)”만 하면 되고, 무슨 말을 하더라도 “무념(無念)”이라고 하면 되고, 무슨 말을 하더라도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제가 이렇게 어떤 질문을 던지더라도, 그 학생은 답을 맞추게 되어 있어요. 어떤 날은, “자성청정(自性淸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뭐 때문에?” “자성청정(自性淸淨).” 계~속 그거만 하다 보면, 한 1년 하면은, 그 학인(學人)만 아는 게 아니고, 전체 다가 같이, 아주 쉽게 이렇게 알아지는 거라.
이게 문제를 내서 남을 곤란에 빠뜨려서, 함정에 빠뜨리고, 이런 거는 중생이 할 짓이 아니예요. 그건 탐·진·치(貪嗔癡)가 붙어 있는 그런 문제지고. 이, 시험이라는 건 즐거워야지··· 그렇습니까? (예~) 간단하잖아요. (웃음) 이렇게 간단해. 그, 8지 보살(八地 菩薩)에서 무생법인(無生法忍) 얻습니다~. (예~) 거 봐, 너무 잘 아시네.
常寂滅相(상적멸상)이라
항상 적멸(寂滅)한 모양이라.
終歸於空(종귀어공)하나니
마침내 공(空)에 돌아가나니. 이, ‘공(空)에 돌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여러분들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모든 기억들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씀드리며는 ‘식신연령(識神緣影)’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법진연령(法塵緣影)’. 제법(除法)의 티끌을 반연(攀緣)해 있는 영(影). 그림자다, 이 말이야. 지금 여러분들 기억 속에서 활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생각은, 뭐만 있냐 이러면. 지금 이 순간의 ‘현전일념(現前一念)’뿐입니다. 나머지의 내 생각들은 전부 다 사장(死藏)되어 있는 거라고 보면 됩니다. 그걸 갖다가 ‘떨어질 락[落]자(字)’ ‘실을 사[謝]자(字)’ 써 가지고 ‘낙사진(落謝塵)’이라고도 얘길 합니다. 그거에 사로잡혀 가지고 자기의 아상(我相)을 지금, 내세우고 있습니다. 내가 선생인데 뭔, 스님이 저런 소리하노? 뭔 소린가, 모르겠다. 전부 그, 낙사진(落謝塵).
여기서, ‘마침내 공(空)에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이제까지 쌓아오던 모든 업장식신(業障識神)의 그런 그림자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상태. 한 생각도 있지 않은, 무념무상(無念無相)의 절일체(絶一切)의 경지. 그것을 여기에, 종귀어공(終歸於空)이라. 여실한, 진실된 진공(眞空)에 들어간다, 이런 말입니다. 아시겠죠?
그러니까 이 경지에 올라가면은. 이 한 경지에서는 모~든 게 탕진(蕩盡)되는 된. 그 유흥비로 탕진하다는 거는 좋은 말이 아니지. 여기서, 자기 식신(識神)이 완전히 탕진(蕩盡)되어 버리는 거라. 허허탕탕하게, 진(盡). 다~ 해버렸다는 거라. 그, 악업의 종자(種子)를 완전히 씨를 말려 가지고, 아주 그냥, 한 알도 남겨 놓지 않은, 그러한 상태가 되는 거라.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어디로 돌아갑니까? 실상(實相)의 진공(眞空)으로 돌아가는 거라. 실상(實相)은 아까, 모양이 있다·없다? 무상(無相).
그러니까 여기 뭐라 그래요? 공(空)이라고 하고. 종귀(終歸), 이랬는데.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마칠 종[終]자(字)’를 ‘구경(究竟)’이라고 얘기해요. 그러니까 구경열반(究竟涅槃)이야. -미래야, 시간이 우예 되노? 7시에 마치나? (7시 30분) 시간이 많이 없네. (책장을 급히 넘기시며) 이런 설명하다가 안 되겠다, 퍼뜩퍼뜩하자. 요런 거. 설명하면 더 좋은데, 사실은, 그죠? 그렇지만, 이 ‘공(空)에 돌아간다.’ 해 가지고 완전히 없는, 단공(但空)에, 단멸(斷滅)에 떨어지는 거는 아니예요.
佛知是已(불지시이)하시고
부처님께서 이러한 것을 아시고는
觀 衆生心欲(관중생심욕)하사
중생의 마음의 욕망과 근기를 다~ 관(觀)하고. 저는 이 ‘관[觀]자(字)’를 설명할 때, 어떻다 그랬습니까? 창호지에다가 바늘구멍 하나, 뚫어놓고, 문에다가 눈을 바짝, 붙여야 볼 수 있는 것을, 그것을 ‘관(觀)’이라 그랬습니다. 어설프게 멀리서 바라보는 거는? ‘견(見)’한다, 이 정도로 볼 수 있죠. ‘관(觀)’이라는 거는 그렇게 보는 겁니다. 보석상에서 이렇게 밝은, 이런 상태라 하더라도, 더 세밀하게 보려고 하면 어때요? (이마를 가리키시며) 여기, 헤드라이트 하나 켜고, 그죠? 그 돋보기 같은 거, 들이 대 가지고, 다이아몬드 컷팅된 거, 보잖습니까? 그런 것을, ‘관(觀)한다.’, 이거야. 세밀하게. 육안으로 도저히 분별 안 되는 거, 보통 우리의 의식의 세계로서는 분별이 안 되는 것을 ‘관(觀)한다’고 할 때는. 고요~한 삼매 속에서 통찰되는 지혜로서, 이 실상(實相)을, 이 생멸법(生滅法)을 살펴 나가는 것을 ‘관(觀)’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도 여기서 ‘관(觀)’이라고 할 때는, 엑스레이[X-ray]처럼 그 놈 속의 똥이, 변빈지·아닌지, 까지 확 뚫어보는 거죠. 중생심의 그런 욕망을 관(觀)하시어.
而將護之(이장호지)일새
장차 호지(護之)하고자. 호(護). 뭐, 가피(加被), 이런 걸 내리려고
是故(시고)로
이러한 까닭으로
不卽爲說一切種智(부즉위설일체종지)어늘
곧 위하여,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설한 것은 아니거늘.
汝等迦葉(여등가섭)이 甚爲希有(심위희유)하사
그런데 참 희유(希有)하다. 가섭이. 도저히 축생같은 너희들이 어떻게, 매우 희유(希有)하구나. 이 말을 다 알아듣고.
能知如來(능지여래)이 隨宜說法(수의설법)하야
무슨 말을? 여래(如來)의 수의(隨宜). 의당함을 따른다[隨宜]는 것은 근기 따라서 설법하는 것을, 여래(如來)께서 근기를 따라서 설법하는 것을 너희들이, 어찌 너희가, 축생 같은 너희가 다 알아듣노? 이런 말을 했어요.
能信能受(능신능수)하나니
그리고 또, 능신능수(能信能受)라. 이 때 ‘능[能]자(字)’는 조동사로 새길 수도 있고, 부사로 새길 수도 있어요. 부사로 새기며는. 동사에 붙어 있는 말이니까 ‘능히’, 이렇게 새기는 것이고. 조동사로 새기며는, 가능 조동사로 새기며는. ‘믿을 수 있고, 수지할 수 있는’. 이렇게 마, 묻어져서 새겨지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어떻게 새기더라도, 틀린 것은? 없어요. 그 사람, 방법에 따라서 다른거죠.
所以者何(소이자하)오
까닭, 소이자(所以者). 그 까닭이라는 것이. 하(何)오. 어떠하냐?
諸佛世尊(제불세존)의 隨宜說法(수의설법)은
모든 부처님, 세존(世尊)이 수의(隨宜). 의당함, 마땅함, 수기(隨機), 근기를 따라서. 똑같지요? 근기를 따라서, 의당함을 따라서 법을 설하신 것은
難解難知(난해난지)니라
거기 줄 긋죠. 왜 어렵습니까? 참 이해하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 왜 그렇냐면. 우리는 탐·진·치(貪嗔癡)에 가로 막혀 있어서 그래요. 그 장애로 가로막혀 있으니까. 그래서. 저기 134쪽에, 제일 윗줄에 보면 그렇습니다. 이제장애(離諸障礙)하고. 모든 장애(障礙)를 여의고, 이 대목이 나왔잖습니까? 모든 장애(障礙)라는 것이 바로, 탐·진·치(貪嗔癡)로부터 벌어지는 모든 번뇌고, 거기에 끄달려 다니는, 안쪽으로 숨어 있는 우리의 아상(我相), 아만(我慢)같은 것들이죠. 교만 같은 것들.
19.爾時世尊(이시세존)이 欲 重宣此義(욕중선차의)하사 而說偈言(이설게언)하사대
열아홉 번째. 그 때 세존(世尊)께서 ‘욕(欲)’은 이제, 이것도 조동사죠. ‘선[宣]자(字)’를 받쳐주는 조동사예요. 중선(重宣).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해서, 하고자 해서. ‘펴시고자 할 때’, 그 받쳐주는 말이예요. 이설게언(而說偈言)하사대. 그러니까 마당 쓸고 돈 줍고. <법화경> 배우고. 한문 문법 조금씩 배우고. (웃음) 문법, 하지 마까요? 문법 해 버리니까 군더더기 같아요, 경전이. 무겁지도 않고. 사람도 가벼운데 강의까지 가벼워 놓으니까. 이런 걸 뭐라고 합니까? 설상가상(雪上加霜).
이시세존(爾時世尊)께서 다시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偈頌)으로서 말씀하셨다. 중선(重宣). 다른 말로, 게송(偈頌)으로 하셨으니까, 요런 것을 중송(重頌)이라 한다, 중송(重頌). 게송(偈頌)에는 크게 2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외로울 고[孤]자(字)’ ‘일어날 기[起]자(字)’, 고기송(孤起頌). 그냥 운문으로만 이렇게 쭈~욱 해 놓은 부처님 말씀, 있잖아요? 그런 건 고기송(孤起頌)이라. 저 혼자 있는 것이고. 이, 중송(重頌)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 산문으로 얘기한 것을 다시 뒤에 운문으로 요약정리해서 한번더 얘기하니까 ‘거듭 중[重]자(字)’써서 중복해서 게송(偈頌)을 읊는다고 중송(重頌)이라고 합니다. 가타(gatha, 伽他)·게타(偈陀), 그런 식으로 인도 쪽에는 그렇게 얘기하죠?
20. 破有法王(파유법왕)이 出現世間(출현세간)하야
파유(破有). 유(有)를 파(破)하는 법왕(法王)이. 유(有)를 파(破)하는 법왕(法王)이 누굽니까?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이 때 ‘유(有)’라고 하는 것은 ‘망유(妄有)’라. 망령되이 있는 것을 파(破)한다. 망령되이 있는 것이 뭡니까? 망령된 생각을 가지고 망령된 경계를 짓는, 그러한 사상을 파(破)하는 사람, 부처님이지요? 그렇지요? 파 망유(破 妄有)해서. 망상분별을 없애 버리면 뭐가 됩니까? 막히고 응체(凝滯) 되어 있는 것이 다 제거가 되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파유법왕(破有法王)’은 부처님을 아~주 칭송해 놓은 그런 말씀이죠.
부처님께서 출현(出現). 세간에, 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隨衆生欲(수중생욕)하야 種種說法(종종설법)하나니라
중생의 그런 욕망과 근기를 따라서. 종종으로 법을 설하셨나니라.
21. 如來尊重(여래존중)하며 智慧深遠(지혜심원)하야
여래(如來)의 존중(尊重)하며. 이게 뭔 말이고? 여래(如來)는 존귀하고 중하며. 지혜가 깊고도 원대해서
久黙斯要(구묵사요)하고 不務速說(불무속설)하나니
‘이 사[斯]자(字)’죠, 이 사[斯]자(字)’. 대명삽니다, 지시 대명사. 이 요긴한 것[斯要]을 오랫동안 묵묵히, 하고. 또 힘써서 빨리 설하려고도 말씀하지 아니했다. 속효심(速效心)이라 그래요, 빨리 효과 보려는 거는. 달마 대사께서 9년간, <소림사>에서 면벽(面壁)을 하시면서 그릇이 될만한 제자를 기다렸고. 역대 제대 조사들이 다 그렇죠.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서, 7일간 이제, 엄관(掩關)이라 그러죠. 마갈엄관지시절(摩竭掩關之時節), 그렇게. 일주일 동안, 깨치고 나서 가만~히 이렇게 생각해 보니까 깨친 이 얘기를, 일반 중생들에게 얘기해 봤자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여러분들이 있었으면 안, 알아들었겠습니까, 그렇죠? (웃음) 예, 하라니까 왜 웃어. (예~) 우리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만났다 여기 다시 온 거, 같애요? 근데 대중은 와 이래 죽어 버렸습니까? 부처님도, 와 이래 못났노? (웃음) 재래영산지회(?再來靈山之會?)라. 그 뭐 이렇게 해서, 부처님도 우리한테 고맙게 생각하셔야 되요. 우리 없으면 부처님 우짤낀데? 이 순간에 여러분들이, <청림회>가 계시고. 제가 이 자리에 있고. 이래서 불법(佛法)은 미미하지마는 면면하게 이어집니다. 우리 하는 일이 보통, 작은 일이 아니예요. 너무 큰일입니다, 이게. 이렇게 자부심이 있어야 됩니다, 자부심이. 그래, 부처님도 고맙다고 저한테 꿈에서 얘기해 놓고 가셨어요. (웃음) 당신, 고맙게 생각 안 하시겠어요? 아니, 자식이 어디 가 가지고. 다른 짓 안 하고, 열심히 해서 직장 생활하고 돈 벌고 안 아프고, 이렇게 해 주면, 고맙잖아요? 고맙잖아요? 그래, 자식이 자꾸 엉뚱한 짓 하고, 불교 공부 안 하면 어떨 것 같애요? 불교 공부 아니라, 어디 딴 짓하고 돌아다니면 걱정 되잖아요? 그래, 우리는 부처님 걱정 안 끼쳐 드리려고, 요 순간, 이렇게 앉아 있는 거라. 이게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선분 상에서 보이지 않는 점이지마는, 이렇게 한 점을 찍고 우리는 강의하면서 가는 거예요. 이게 부처님 은혜를 갚는 길입니다. 근데 왜 결석하누? 요로 결석 생겼는가, 신장 결석 생겼는가, 결석을 왜 해요?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결석하지. 가문의 영광···, 이런 얘기를 자꾸 안 들으셨나 봐요. 예.
그 오랫동안 묵묵히 요긴한 것[斯要]을 가지고 꾸~욱 참고 계셨던 것은. 이 속효심(速效心). 빨리 일을 해 버리면은, 어때요? 알아듣지도 못하고 엉뚱하게 뭐. 천천~히 얘기했으면은 그 사람이 이익도 챙기고 열반도 증득하고, 그럴 텐데. 너무 일찍 줘 버리고 나면, 유산 물려 줘 버리면? 홀딱 다 까먹고 부도 나 버리잖아요? 그런 경우를, 옆에서, 주변에서 저는 종종 봤습니다. 여러분들도 보셨지요? 자식들이 일찍 조르고~·조르고 해 가지고 뭐 한다 해 가지고, 부모가 일찍 물려주고 나니까. 홀딱 말아 먹어 가지고 부모 고생·저 고생·처가 고생···, 다 하더라고, 보니까. 온 집안이 계속 고생해요. 그런 것처럼 부처님도 근기가 아니면은··· 저도 그렇습니다. 사실 여기 와서 설법하고 이런 거는 제가 힘이 없기 때문에··· 만약에 제가 도(道)를 이제 깨친다, 그 도리가 제한테 있다, 그러면. 제자들을 이렇~게 쳐다보고. 법을 감당할만한 사람이 아니면은 진실다운 얘기는 무덤까지, 다비장까지 내 가져 가더라도, 입을 한 마디도 안 열고 내, 그냥 가져가겠어요. 차라리 저 놈한테 일러 줘 가지고 사기 치는 것보다는 내가 차라리 가져가서, 가져가는 게 훨씬 부처님을 위하는 것이고, 일반 중생을 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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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_()()()_
가을햇살님! 수고하셨습니다.._()()()_
_()()()_
가을햇살님! 고맙습니다..._()()()_
精進 의 의미.... 감사드립니다. _()()()_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