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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이 책] 『뻔뻔한 시대, 한 줌의 정치』 경향신문 2012-07-14 (토)
철학자 이진경의 첫 시사 평론집
대학 밖 대안 연구공동체의 시초 ‘수유너머’ 활동과 <철학과 굴뚝청소부> <노마디즘> 등의 책으로 널리 알려진 철학자 이진경이 최초로 낸 시사정치 평론집이다.
저자는 권력을 쥔 자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지배’라고 말한다. 폭압적인 체제에서는 지배만이 존재한다. 돈과 효율성만이 유일한 가치로 자리매김한 것도 다른 의미에서의 ‘지배’다. 그래도 보이지 않는 것들, 한 줌도 안 되는 것들이 조금씩 체제에 균열을 내는 행동을 그는 ‘한 줌의 정치’라고 이름 붙였다. 그것은 김진숙의 타워크레인에도, 이주노동자 미누의 빨간 목장갑에도, 쫓겨나는 철거민 아이의 눈물에도 배어 있다. 과거 군사정권은 ‘민족을 위한 구국의 결단’이라는 위선적 구호라도 붙였다. 이명박 정부는 노골적으로 사적 이득을 추구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함의 시대’를 열었다. 저자는 그런 가운데서도 ‘한 줌의 정치’가 결코 소멸하지 않고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의 폭을 확대한다고 말한다.
‘닥치고 정치’ ‘닥치고 경제’만이 능사일까?
위선마저 사라진 뻔뻔한 시대의 피로감
저자는 현재 우리 사회를 ‘뻔뻔함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규정한다. 이는 현 정부를 비판적으로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다. 사회 일반을 관통하는 정서나 행동에도 뻔뻔함이 만연하다고 본다. 즉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가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인사를 대신하는 사회, 자신의 이득만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어떤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 후안무치의 사회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위선적일지언정, 타인을 위한 일이라거나 모두를 위한 일이라는 식의 그 어떤 명분에도 연연하지 않고 자신만의 목적을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렸다.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리고 정치는 이런 세태에 어떻게 일조했는가.
이른바 ‘747성장 공약’을 내건 ‘경제대통령’ 이명박이 집권한 이래, 우리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정치적 사건을 겪었다. 수많은 시민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행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4대강사업, 비극적인 용산 철거민 참사, 시대를 역행하는 방송 통제, 대한민국을 깜짝 놀라게 한 소위 정권 실세의 민간인 불법사찰, 구제역 확산 방지를 명분으로 시행된 350만 마리의 가축 도살, 코믹 정치쇼의 진수를 보여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반대,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사업… 저자는 이 모든 사건에서 현 정권의 정치미학인 ‘뻔뻔함’이 작동한다고 말한다. 그 강령은 지금은 정부의 정책을 반대하지만 막상 추진이 되고 나면 모두 언제 그랬냐는 듯 지지하고 좋아할 것이라고, 두고 보면 알 것이라고 말하며 그 어떤 비판과 우려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태도다. 그러나 우리가 그에 대해 느끼는 것이라고는 피로와 염증뿐이다.
우리, 중천을 떠도는 자들: ‘한 줌’들의 정치를 위하여
지금처럼 “정치가 모든 것의 전면에 자리잡은 시대, 정치에 관심이 없던 사람도 정치를 피해가기 어려운 시대, 광고만큼 정치 뉴스가 우리 눈과 귀로 밀려드는 시대. ‘닥치고 정치’ ‘닥치고 투표’를 외치는” 시대는 없었다. 갖가지 정치적 이슈로 어지러울 지경이다. 저자는 이러한 시대에 진정한 정치란 무엇인지 물으며 “한 줌의 정치”를 제시한다. 이 책에서 명확히 구분하는바 ‘지배’와 ‘정치’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비판을 무시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한 것이 지배라면, 다수와 소수 사이의 간극과 불화를 인식하고 그 불화를 통해 지배적인 것이 배재한 것을 지배적인 것 안에 끌어들이는 포용력이 정치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한 줌의 정치”란 무엇인가.
지배적인 가치에 반하는 가치, 지배적인 사고방식에 반하는 사고방식이 그것일 게다. 돈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돈이 안 되기에 가치 없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 인간의 숫자로 모든 것이 계산되는 시대에 인간의 범위에서 벗어나기에 계산할 이유가 없고 특별히 셀 필요마저 느끼지 않는 것, 아니 권력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권력과는 거리가 멀기에 ‘소소하고’ ‘미천해’ 보이는 것이 그것이다. (…) 한 줌도 안 되는 것들이 지배적인 것과 대결하며 만드는 이 거리를, 그 간극을 만드는 한 줌에 지나지 않는 것들의 존재와 활동을 나는 ‘한 줌의 정치’라고 명명하고 싶다. _프롤로그 「한 줌의 정치를 위하여」에서
‘한 줌의 세력’이 지배적 가치에 반하여 만드는 정치적 여백이야말로 정치라는 말에 제대로 값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유령과 같이 존재해도 눈에 보이지 않던 이들의 존재가 비로소 제모습을 드러내는 선언이기도 하다.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 한진중공업 사태 해결을 촉구하며 309일간 타워크레인에서 농성하던 김진숙의 사투, 아무도 주목하지 않아도 매주 수요일 열렸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천 번의 집회, 한국인의 순혈주의에 파열을 내는 이주 노동자들의 외침은 그러한 한 줌의 정치이자 존재선언이다. 이들이 만드는 지배세력과의 불화가 바로 ‘진짜’ 정치다.
정치가 재난이 된 시대, 뻔뻔함이 미덕이 된 사회
이곳에서 우리는 모두 ‘외부세력’이다!
용산이나 두리반, 카페 마리의 철거민들, 쌍용자동차와 한진중공업의 노동자들, 아직도 ‘손무덤’이 현재 시제인 이주 노동자들, 반값등록금을 외치며 알바 시간을 피해 수업을 들어야 하는 대학생들,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청년 실업자들… 이명박 정권하에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이들의 목록은 수도 없이 늘어났다. 인간뿐만이 아니다. 4대강 사업으로 콘크리트 아래 묻힌 수많은 생명들, 방역이란 이름으로 처분된 소 돼지 등 한국 사회에서 힘없는 것들의 절망은 점차 일상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오히려 그 어떤 때보다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증폭시키고 첨예하게 만드는 역설을 연출했다. 우리는 ‘박혜경과 레몬트리공작단’, 송경동 시인과 희망버스,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이 만든 무시할 수 없는 파고를 목격했다.
타인의 어려움에 공명해, 안정되고 편안한 자리에서 벗어나 추방의 지대로 들어간 외부세력은 또다른 외부자를 그들의 세력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절망의 시대를 조금씩 희망의 시대로 바꾸어나갔다. 저자가 말하는 대로 “희망이란 있지도 않은 안락한 세상에 대한 꿈이 아니다. 도처에 널린 죽지도 못하는 장소를 직시하고 그 중천에 매달린 죽음 같은 절망을 정확하게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타인의 문제가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 내 어버이의, 내 형제의, 내 아이의,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그들에게 기꺼이 힘이 되어주려는 ‘외부세력’의 등장은 이 뻔뻔한 시대에서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근대인의 초상
한편 이 책은 정치사회적 이슈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일상적 풍경에 담긴 함의를 반성적으로 살펴본다. 우리 사회에서 ‘방역’이란 이름의 거대한 소 돼지 학살이 어떻게 자행됐는지 면역 관념의 변천사를 통해 알려주며,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사육되는 동물이나 인간에게 어떻게 하면 죽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사는 실험동물 이야기를 통해 근대의 생명논리를 비판적으로 묻는다. 인간과 생명의 관계만이 아니다. 자연도태나 약육강식과 같은 다윈의 진화론이 어떻게 맬서스의 인구론과 연결되었는지 보여줌으로써 우월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비정함이 사실은 진리가 아닌 시대적 패러다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당연하다고 믿는 것 중 그 어느 것도 당연하지 않다. 다만 지배적인 논리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책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상의 불편한 진실과 근본적으로 마주보기 시작할 것을 권한다. 그러할 때만이 비로소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이 생성되어 현실의 모순이 지닌 처참하거나 혹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세태를 매섭게 풍자하는 글이 선사하는 매력은 여기에 있다.
지은이 이진경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서구의 근대적 주거공간에 관한 공간사회학적 연구」라는 논문으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nomadist.org)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박태호라는 이름으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
전태일의 유령, 광주시민의 유령과 더불어 공부하고 전투하며 1980년대를 보내던 중 이진경이란 필명으로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을 썼고 그 책이 허명을 얻은 덕분에 본명은 잃어버렸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시작해 그 첫 결과물로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발표했다. 이후 자본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이중의 혁명을 꿈꾸며 쓴 책들이, 『맑스주의와 근대성』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수학의 몽상』『철학의 모험』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10편의 영화』 등이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새로운 혁명의 꿈속에서 마르크스, 푸코, 들뢰즈·가타리 등과 함께 사유하며 『노마디즘』『철학의 외부』 『자본을 넘어선 자본』 『미-래의 맑스주의』 『외부, 사유의 정치학』 『역사의 공간』 등을 썼다. 『코뮨주의』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을 쓰면서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바닥 없는 심연 속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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