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이란(Iran)의 역사-이란인의 형성과 메디아 시대
이란인의 형성과 메디아 시대
이란 고원에 인류가 정착한 것은 아주 오래된 일이다. 아리아인은 이합집산을 거치는데 스키타이족, 메디아족, 이란족(페르시아인들) 등이 모두 아리아인의 한 갈래이다.
초창기 이란은 아리아인, 즉 이란족들은 당시 그 땅을 정복했던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나 바빌로니아에 맞서 싸우는 용병 노릇을 하였으며, 곧 원주민들을 제치고 고원을 장악해 '이란'(아리아인의 땅)을 세운다. 기원전 7세기 쯤, 이란인들의 일파인 메디아인들이 아시리아로부터 독립해 남부 이란과 소아시아에 걸쳐 메디아 왕국 (기원전 708년 ~ 기원전 550년)을 세워, 이란인이 세운 최초의 왕조였지만, 중앙 집권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부족 연합체에 그치고 말았다고 한다.
아리아인이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한 것은 기원전 621년 메디아 왕국의 아스티아게스 왕 때로, 아스티아게스는 바빌론과 연합해 아시리아를 무너뜨리고 메소포타미아의 북부 지역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메디아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연안의 '비옥한 초승달', 즉 오늘날의 이라크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신 바빌로니아 왕국에 맞섰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
바빌로니아의 나보니두스 왕은 이란 남부 아케메네스 왕조 (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 와 동맹을 맺어 메디아를 정벌하였고, 아케메네스는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인 키루스 2세(Cyrus the Great)가 연 왕조다. 아스티아게스는 아시리아를 무너뜨리기 위해 바빌론과 손잡았다가 훗날 바빌론에 망했고, 키루스는 바빌론과 연합해 메디아를 무너뜨리더니 급기야는 바빌론에 칼을 돌렸다. 키루스는 주변 부족 국가들을 통합해 동으로는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 서로는 힌두쿠시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기원전 539년 바빌로니아를 정벌한다. 한때의 동맹이던 나보니두스는 폐위됐다.
키루스 2세는 아주 관대한 정책을 펼쳐 피정복민의 관습과 신앙을 지켜줬다. 오히려 피압박 민족들에게 '해방자'로 추앙됐다고 하는데, 바로 성경에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바빌로니아에 노예로 잡혀 있던 유태인들('바빌론 유수')을 해방시켜준 것이 바로 이 왕이다. 구약 에스라와 이사야에는 '고레스 왕'으로 표기돼 있다. 키루스는 이란인들에게는 아주 위대한 왕, 너그럽고 지략이 뛰어난 왕으로 각인되어 있다고 한다. 키루스 2세는 이집트마저 정복하길 원했지만 당대에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의 소망을 이뤄준 것은 아들 캄비세스 2세였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스스로 이집트 27왕조의 파라오가 되었으나 왕이 이집트에 가 있는 동안 정작 이란에서는 쿠데타 기도와 혼란이 벌어졌고, 캄비세스 2세는 에티오피아 원정이 실패한 뒤 자살했다.
캄비세스 2세 사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즉위한 다리우스 1세는 인도 북부에서 오늘날의 불가리아 남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헬레네스(그리스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시대가 온 것이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를 최초로 건설했다 하니, 수에즈 운하의 원형이 그 옛날에 만들어졌던 셈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거대 제국을 페르시아라고 불렀는데, 파르시어를 쓰는 사람들의 땅이란 얘기다. 이것을 유래로, 이란어를 파르시라고 한다. 그러니 '이란 제국'이 맞는 말이지만 지금은 '페르시아'가 일반화된 용어로 자리를 잡았다. 메디아를 필두로 줄줄이 이어진 왕국들을 모두 '페르시아'라 하고, 메디아 왕조, 아케메네스 왕조 식으로 '왕조'를 붙여 구분하니 뿌리는 다 똑같다.
페르시아에 정복된 그리스 식민도시들은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아테네가 여기 끼어들어서 전쟁이 난다. 다리우스 1세가 쳐들어와 3차에 걸친 전쟁이 벌어진다. 다리우스의 1차 원정은 폭풍으로 실패했고, 2차 원정에서는 유명한 '마라톤 전투'로 퇴각한다. 헤로도토스는 마라톤 전투를 대서특필했지만 페르시아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도 않았던 전투였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들은 헤로도투스의 기록이 당시 병력규모로 미뤄 과장되어 있을 소지가 높다고 지적한다.
다리우스 1세는 3차 원정을 준비하던 중에 숨졌다. 뒤를 이은 인물은 전임자 만큼이나 명성을 떨쳤던 크세르크세스 1세이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의 원정대도 살라미스 해협에서 아테네 해군에게 궤멸됨으로써 10여년에 걸친 원정을 실패한다. 전쟁의 패배, 결말은 '국력 쇠퇴'다. 피정복민들이 크세르크세스 사후 줄지어 반란을 일으키고 지배층은 분열됐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메디아 왕조와 달리 중앙 집권 체제와 사회·경제적 토대를 갖춘 명실상부한 제국을 만들었다. 당시의 행정과 치안, 세금 제도 등을 담은 상세한 기록들이 전해온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촘촘한 도로망과 국가가 운영하는 역마 제도이다. 전국 어느 곳에건 보름 이내에 중앙 정부의 뜻이 전달될 수 있었다고 한다. 제국의 수도인 수사에서 지금의 터키 북쪽 리디아 속주까지 고속도로가 연결되어 있었고, 이 네트워크는 속주들의 반란을 막는 안보 시스템이기도 했다.
헬레니즘 왕조의 통치
아케메네스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멸망한다. 알렉산더가 바빌론 땅에서 후계자 없이 사망한 뒤 광대한 영토는 휘하 장군 4명이 나눠 가졌다. 그들 중 이란을 지배했던 것은 셀레우코스 1세 장군이었다. 셀레우코스와 그 후손들이 이끈 왕조를 셀레우코스 왕조(기원전 312년 - 기원전 247년)라고 부른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왕조는 지배구조를 만들기도 전에 반란에 시달렸다. 현재의 타지키스탄 지역인 파르스(Fars) 지방(Farsi, 즉 페르시아어의 어원이 됐던)에서는 반(半) 유목민인 파르티아족(이란족과 스키타이족의 혼혈)이 셀레우코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파르티아 왕조(기원전 247년 -기원후 224년) 를 세웠다. 반란 지도자 아르사케스(Arsaces)의 이름을 따서 "아르사크 왕조"(Arsacid)라고도 한다.
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
파르티아 왕조는 미트라다테스 2세(Mithradates II, 기원전 123년-기원전 87년) 치세 때 세력을 확장해 인도와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장악, 로마 공화정과 상대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이란의 직물(페르시아 카펫)이 동서양을 오갔다. 지배층은 조로아스터교를 숭배했지만 대중들에게까지 퍼지지는 못했다고 한다. 파르티아는 주변국들에 비하면 신분 이동의 통로가 열려있는 비교적 개방된 사회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파르티아족의 출신지인 파르타브(Parthav) 지방의 언어인 파흘라비어(Pahlavi)가 공용어로 사용됐는데,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으로 붕괴된 파흘라비 왕조(팔레비 왕조)는 여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파르티아가 500년 가까이 존속됐음에도 불구하고 뒤이은 사산 왕조(Sassan, 224-652)가 조직적으로 전대의 유산을 파괴했기 때문에 역사 복원이 잘 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산은 이란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파르티아를 무너뜨린 아르다시르 1세는 스스로를 사산의 후계자라고 칭했기 때문에 그의 왕조에 '사산조'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르다쉬르는 집권 뒤 파르티아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지방 귀족들을 통제, 전국을 12개 주로 나눈 중앙 집권 체제를 만든다. 조로아스터 신관의 아들이었던 그는 조로아스터 교를 국교로 지정했고 정교 일치의 강력한 집권 체제를 추구했다. 그러나 아들 샤푸르 1세(Shapur I)는 종교에 지나치게 심취해 승려들에게 정치를 맡기는 우를 범한다.
폭군 나르세의 시대를 지나 사산조의 10대 왕인 샤푸르 2세가 즉위한다. '샤푸르 대왕'이라고 불리는 이 왕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즉위, 상당기간 섭정을 거쳤다. 70년 동안 재위하면서 주변국들을 복속시키고 승려들의 특권을 없애 왕권을 강화했다. 샤푸르 2세에서부터 바흐람 5세, 카바드 1세 등으로 이어지는 기간은 사산조의 전성기였다. 페르시아는 정치 사회적, 경제적으로 크게 부흥해, 뒷날 아랍인들에게 멸망하기까지 '르네상스'를 맞는다.
사산조의 역사는 로마 제국과 그의 뒤를 이은 비잔티움 제국과의 싸움을 빼놓을 수 없다. 로마와 갈등했던 이유는 아르메니아 지배권 문제였다고 하는데, 아르메니아는 지금도 이슬람권에 둘러싸인 기독교 국가로 남아 있다. 옛 소비에트 연방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들 중에서 유일하게 제법 자본주의적인 변신을 했는가 하면, 유대인에 버금가는 '로비 능력'으로 미국 내에서도 말빨 센 이민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로버트 카플란은 밉살스런 저작 '타타르로 가는 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의 '이란 공포증'에 대해 설을 풀었는데, 양국의 역사가 오랜 만큼 적대심도 깊다. 아르메니아는 근대에 들어와 터키(오스만 투르크)에서도 숱하게 학살됐으니 슬픈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하지만 사산조는 파르티아에 대면 신분 이동이 제한되어 있었지만 기독교도가 특별히 박해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사산조와 로마 제국의 싸움은 역시나 '양대 제국의 패권 싸움'으로 봐야 할 것이다.
사산조의 수도는 바그다드 근처에 있는 크테시폰인데, 당시에 이미 20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대도시였다. 크테시폰은 바그다드의 건립자 아부 자파르 알만수르(압바스 왕조의 2대 칼리프)에 의해 파괴됐고 크테시폰의 건축물들은 바그다드의 건축 자재로 이용됐다고 한다.
아랍족의 융성과 중세 이란
아랍족은 이란인들보다 문화적으로 뒤처져 있던 사막의 유목 민족이었다. 아랍족이 페르시아를 제치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등장 이후였다.
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반도를 장악한 뒤 이슬람 군대가 가장 먼저 전쟁을 건 대상도 바로 페르시아였다. 무함마드 사후 초대 칼리프로 취임한 아부 바크르(Abu Bakr)는 서쪽으로는 비잔티움 제국, 동쪽으로는 사산 제국을 향해 정벌의 칼날을 돌린다. 650년 아랍군은 크테시폰을 점령하고, 이듬해에는 사산군을 대파하면서 이란 전역을 장악했다. 정통 칼리프(650-661)가 멸망한 뒤 이란에는 우마위야 왕조(661-750)와 압바스 왕조(750-821)가 대를 이어받았다.
사산조의 후예인 다부예흐(Dabooyeh)가 망국의 유민들을 모아서 작은 나라를 세우긴 했지만 페르시아의 후계자로 보기엔 미약하다(다만 이들은 이슬람 개종 후에도 독자적인 국가를 유지, 950년간이나 지속됐다고 한다). 압바스 왕조 말기, 이란 땅에서는 반란이 줄을 잇는다. 사파르(Saffarids), 사만(Samanids), 가즈나(Ghaznavids), 부이(Buyids) 등 자잘한 왕조들이 명멸했던 시기(821-1055)를 이란의 막간(Iranian Intermezzo)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슬람교 포교 과정에서 무슬림이 보여준 관용은 잘 알려져 있다. 이란에서는 주로 도시 거주민을 중심으로 개종이 급속히 진행됐다. 이란인의 개종이 빨랐던 것은, 지역적 역사적 종교적 속성상 조로아스터교가 이슬람교와 유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란을 정복한 아랍인들은 페르시아의 제도와 문화를 물려받았다. 특히 제국의 운영체제를 많이 배웠다. 서방 이슬람 학자인 버나드 루이스에 따르면 "이란은 처음부터 제국이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고대 페르시아 시절부터 이란은 제국을 이끌어왔고, 전제군주제에 익숙해 있다는 말이다. 이란의 군주인 샤 (Shah)는 (루이스에 따르면) 이집트의 파라오, 중국의 황제와 비견되는 절대 군주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일례로 페르도우시(Ferdowsi, 935- ?)의 유명한 서사시 《샤나메》(‘왕들의 책’이라는 뜻) 영역본은 샤(Shah)와 왕(King)을 구분하고 있다. 이란의 샤를 ‘왕중의 왕’이라 하는 것을 보면, 당대 페르샤인의 자부심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아랍 지배 뒤에도 이란인이 관료로 많이 등용됐고, 교육을 비롯한 철학, 문학, 법학, 의학 등 학문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아랍어가 공식 언어가 됐지만, 이란의 민중은 페르샤어(파르시)를 지켰다. 특히 샤나메를 비롯한 페르샤의 서사시는 유명하다. 파르시에서 파생된 말은 인도는 물론이고 아프간을 비롯해 '-스탄'으로 끝나는 대부분 나라에서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이방에서 온 점령 왕조들
압바스 왕조는 9세기 무렵부터 투르크 전사들을 용병으로 불러모았다. 왕조가 쇠하자 칼리프는 상징적인 종교지도자로 전락하고, 투르크 전사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중 돋보이는 것은 셀주크 투르크(1037-1220)다. 이들은 오늘날의 아프간 지역, 즉 이란의 동쪽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이란을 장악했다. 이스파한을 중심으로 밑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이라크와 시리아에 이르는 땅이 아랍족에 이어 다시 투르크족의 지배를 받게 됐다. 당시 셀주크에 저항했던 이들이, 테헤란 근교 알무트에 근거지를 뒀던 '이스마일 암살단'이다. 이들은 알무트 일대를 장악하고 셀주크 왕조의 주요 인사들을 암살했는데, 이들이 해시시를 흡입했다는 데에서 영어 단어 ‘암살(assassin)’이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훗날 이들의 존재는 시아파 무슬림, 즉 이란인들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사례로 악용되기도 한다.
셀주크 투르크는 1219년 몽골족에게 무너진다. 칸의 후예들은 페르샤 전역을 황폐화했다. 후세 입장에서 보자면 대규모 학살보다 더 안타까운 것이 문화유산의 파괴다.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 칸은 이란 땅에 일 한국을 세웠는데, 가잔(Ghazan) 칸 치세(1295-1304)에 다시 역내 부흥이 이뤄진다. 그러나 1335년 아부 사이드(Abu Said) 칸이 숨진 뒤 한국은 결국 사분오열한다.
이란 북동부에서 칭기즈의 후예 중 강성했던 티무르가 제국 건설에 나선다. 티무르는 1381년 이란을 침공하고, 북인도와 서역, 소아시아에 이르는 제국을 세웠다. 페르샤 천년 고도 시라즈와 이스파한은 다시 초토화됐다. 티무르 제국은 1405년 티무르 사후 급속히 쇠퇴했고, 1501년까지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티무르 치하의 이란 북서부에는 사피 알딘이라는 이슬람 셰이크(이슬람에는 원래 성직자 혹은 사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 옮기기 힘들다)가 추종집단을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당시 이단으로 배척받던 쉬아파들인 이들은 순니파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해왔다. 1499년 이 집단의 지배권을 장악한 이스마일이 정복 전쟁을 일으킨다. 이스마일은 곧 이란 전역을 통일하고, 1501년 타브리즈(Tabriz)를 수도로 사파비 왕조(Safavid, 1501-1736)를 수립한다.
이로써 이란은 652년 아랍족 침입 이후 1,000년 만에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난다. 오랜 이민족 통치로 이란인들은 반외세 심리와 이방인에 대한 환대라는 상반되는 의식 구조를 갖게 됐다는 분석도 있고, 또 오랜 전제군주정과 외세 통치로 인해 절대 권력에 굴종하는 공포 심리가 체질화됐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어도 이란은 지리적인 틀에서 이란 고원이라는 땅 안에 언제나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슬람 학자들은 이란이 외세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결코 땅과 나라 이름을 잃은 적은 없었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