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열린아동문학> 2014 여름, 61호 / 이 계절에 심은 동시 나무
관조를 통해 분별을 넘어선 시적 감응
글 박예분
어린이는 독립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존재이며, 사회와 국가는 어린이들에게 최소한의 생존권. 보호권. 발달권, 참여권을 보장해 주어야 하고 어린이들은 이를 누릴 권리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어른이 동시를 써서 어린이들에게 읽히는 것은 발달권에 속한다. 그야말로 동시의 책임이 막중하다. 이에 동시를 쓰는 나로서는 늘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이들의 발달과 정서에 딱 맞는 동시를 쓰기 위해, 어린이들이 안고 있는 희로애락의 감정과 그 안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해결점을 찾아내고, 그를 짧은 동시에 담아내어 어린이들로부터 깊은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아예 어린아이가 되었다. 어린아이들이 엄마의 품속으로 파고들 듯 나도 어린이들의 마음속으로 파고 들어야했다. 그렇게 하여 얻은 동시지만 어린이들로부터 설득력과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면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삶을 더욱 생하게 하는 동시 쓰기에 빠져 있다.
고백, 동시는 나의 숨구멍
나는 IMF 외환금융위기 이후 물질적 결핍과 위축에 제대로 숨도 술 수 없는 시간을 보냈다. 일상의 대인관계나 미래에 대한 설계와 꿈 등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하루하루 지옥 같은 일상의 시간이 때때로 흘렀고, 그에 따라 그동안 알게 모르게 학습 된 밝고 맑은 긍정의 세계관이 부정 혹은 의심되는 의식의 굴절을 경험해야 했다. 그럼에도 세속적인 생활을 감당해야 하는 세 아이들 둔 엄마의 삶은 간단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이러한 역경이 나로 하여금 어린 시절 동심으로 환원되는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인간의 마음이나 삶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모든 대상을 규정하고 재단하려는 어른 특유의 과잉된 관념과 허위의식이 그런 실체적인 경험에 의해서 많은 부분 벗겨지기 시작했다. 즉,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형성된 의식이 의심과 실제 경험을 통해서 깨어지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직관을 형성시켜준 것이다. 이러한 직관은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꿈을 관통했다. 나는 아이들의 또랑또랑한 눈망울 속에서 까마득히 잊고 지낸 어린 시절 꿈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순간 아이들과 함께 꿈을 키워 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그래, 다시 시작이다. 나는 지금 10살이다!”
그후 나는 동시를 쓰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움직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아이들의 언어로 아이들의 마음을 읽었다. 작고 하찮은 것들을 귀히 여기에 되었고, 모든 사물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물질적 결핍이 가져다주는 불편과 정서적 불안은 나에게 사물에 대한 통찰력을 키워주었다. 나는 마주치는 모든 대상을 생명의 근본으로 보았다. 하늘과 땅, 그 안에서 내가 안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우주의 흐름에 맡기며 위안을 얻었고 나는 운명의 변화를 믿었다. 동시는 어둠 속에 빛이었고, 나의 숨구멍이었다.
창작, 관조를 통한 시적 감응
각박한 현실을 견뎌야 했던 나는 늘 간절히 염원했다. 그 소망은 동시 창작에 꿈과 희망으로 드러났다. 동시 「하늘의 별따기」 「나는 알지요」 「희망이네 가정조사」 「나는 홍시야」
「덩이」 「돌탑」 「못생긴 사과」 「시루 속 콩나물」 「물, 너처럼」 등이다. 이 시들은 시적 감응의 발현이 대상과 나를 일치시켜 본질에 다가선ㄴ 관조에 두고 있다. 그리하여 타자를 내면화하여 궁극적으로 타자의 입을 통해 내가 바라는 어떤 가치를 말해왔다.
이러한 통찰과 시적 대상과의 일체감에 따른 감응은 잃어버렸던 나의 동심에 터보엔진을 달아주었다. 한 개인의 지난한 삶을 뛰어 넘어 사회 보편적 가치에 호응하는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2003년 가을, 태풍 ‘매미’가 전국을 강타했다.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수확을 앞둔 농가와 해안가 사람들이 큰 타격을 입고 망영자실해 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그들의 상처가 남의 일 같지 않았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나의 주요 작품 가운데 하나인 「솟대」는 이렇듯 대상을 조용히 꿰뚫어 보고 그와 일체감에 이르는 관조에 의해 조각되었다. 나는 그해 태풍으로 어려움에 처한 농부의 마음을 공감하며 아주 먼 옛날의 농경사회를 떠올렸다. 그 시대를 살았던 조상들은 오로지 자연에 의지하고 순응하면서 어떻게 살아왔을까. 거대한 자연 앞에서 나무나 작고 힘없이 무너지는 인간의 나약한 생을 어디에 매어두고 이어갔을까. 농사를 짓는 일은 예나지금이나 자연에 기댈 수밖에 없으므로 달리 방법이 없었고, 나 또한 그들의 아픔을 같이 하는 길이 달리 없었다. 오로지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일 뿐이었다. 땅에 사는 인간의 소원을 하늘에 전하는 매개 역할을 하던 ‘솟대’처럼 기도하고 싶었다. 이는 곧 시적으로 감응했다. 긴 장대 끝에 앉아 있는 오리와 자신을 일체시키자 여러 질문을 던지게 되었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어들이 하나 둘 결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동시 「솟대」가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나의 초기 동시들은 개인의 소망이나 희망 또는 개체화된 존재에 국한된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그 꿈은 비단 자신만을 위한 꿈이 아니었다. 자기를 가장 사랑해주는 가족을 위한 꿈이기도 하고, 곁에 있는 친구를 위한 꿈이기도 하고, 저 멀리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꿈이기도 했다. 그 바탕은 바로 사랑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다. 주로 「꿈 이야기」 「여행지에서」 「4일 동안 못보니까」 「우리 집 여왕」 「꽃물들이기」 「우리 집 수탉」 「엄마의 날개」 「어버이날 편지」 「시래깃국」 「우체국에서」 「도돌이표 아저씨」 「매미와 삼촌」 「엄마의 지갑에는」 「길에서 만난 엄마」 「줄이기와 뻥튀기」 「문패」 「주운 돈」 「종이상자집」 「빈병 줍는 할머니」 「엄마 없는 집」 「팔 하나인 우리 할머니」 「김밥 아줌마」 「꼬꼬닭 심부름」 「타작마당」 등이 있다.
이후에 주제와 심상이 좀 더 확장되었다. 이는 어린아이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관심의 대상을 자신에서 가족으로, 가족에서 교유 등 사회적 요인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과 같았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책상머리에 앉아서 어린이를 짐작하며 쓰는 안일한 동시는 과감히 버렸다.
교육현장에서 어린이들과 두이굴면서 그들의 생활 범위인 어머니. 가정. 친구. 학교. 학원 등에서 어린이와 함께 호흡하는 동시를 쓰려고 노력했다.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고,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문제로 고민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가슴에 쌓인 것들을 쏟아내는 대로 나는 그들이 마음을 읽어주었다. 생각이 많은 어린이들은 무한한 호기심을 갖고 있어서 질문도 많았다.나는 되도록 어린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어린이들의 고민 거리는 자시 자신에서부터 친구, 가족, 학교 놀이 등이 대부분이다. 「괜찮아 잘했어 참 잘했어」 「볍씨 하나」 「칭찬 스티커」 「친구야, 친구야」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이라면」 「친구야, 네 이름은?」 「새끼손가락 걸었다」 「정말 얄미워」 「달걀로 바위치기」 「마침표」 「몰래 방귀」 「마음의 열쇠」 「시소놀이」 「방패연」 「동물학교 시험」 「구봉이는 내 친구」 「새 학년」 등이 있다.
동시의 토대인 동심의 상상력과 확장범위는 무한하다. 어쩌면 실생활에서 억압되고 고착화환 어른들보다 넓고 다양하다. 나의 동심의 확장은 위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결국 나 자신과 그를 둘러싼 가족과 사회는 물론이고, 그를 모두 포괄하는 자연, 즉 우주와 긴밀하게 통섭한다. 시적 감응에 의한 창조행위란 일종의 인식전환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전환은 인간의 내면고 조응하는 외부의 힘이 작용할 때 비로소 하나의 실체로 그 진면목을 드러낸다.
따라서 동시의 대상은 동심의 상상력만큼이나 다양하고 넓다. 박목월이 ‘동시란 세상의 모든 것과 친구로 사귀는 일’이라고 말한 것처럼 나 또한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동시를 쓰면서 모든 사물과 자연에게 말을 거는 즐거운 버릇이 몸에 배었다. 「함께 사는 일」 「걷지 않으면 몰라」 「잡초」 「물구나무선 의자의 말」 「억울한 까치」 「매미 허물」 「열매」 「나무야, 나무야」 「한치」 「고물상」 「잘 가, 햄스터」 「옆집 고양이」 「엄마가 된 진순이」 「경기전 나무거북이」 등이다.
나는 전주한옥마을 이목대에서 「매미 허물」을 처음 보았다. 비각 앞에 있는 커다란 벚나무의 줄기에 바퀴벌레 같은 곤충들이 세 줄로 줄지어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속이 텅 비었고 등에 갈라진 흔적이 보였다. 그때서야 바로 매미허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한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가 떼를 지어 한 나무에 붙어 있는 게 신기했다. 마치 노부부만 사는 집 방벽에 다닥다닥 걸린 액자 같았다. 객지에 사는 자식들을 향한 그리움을 사진으로 달래는 노인들이 모습이 더올랐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알맹이는 다 떠나고 껍데기만 붙들고 사는 노인들은 곧 나의 부모님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매미허물이 나의 가슴에 들어왔다.
매미는 나무 기둥 속에 하얗고 길쭉길쭉한 알을 낳는다. 애벌레가 알을 깨고 나와 땅속으로들어가서 나무의 즙을 먹고 살며 네 번 정도 허물을 벗는다. 허물을 벗을 때마다 몸이 자라고 색깔도 진해져서 땅 위로 올라올 때는 어른매미와 거의 비슷해진다. 땅 위로 올라온 매미는 캄캄한 밤에 나무 위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고 마지막 허물을 벗는다. 먼저 머리가 나오고 다리와 날개를 뺀 다음 허물을 완전히 벗는다. 몸과 날개가 다 말라서 단단해지고 쪼글쪼글하던 날개도 완전히 다 펴진다. 그리고 짝을 찾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울어댄다.
결국 아기매미들을 키운 건 매미 엄마가 아니라 나무였다. 나무가 수많은 매미들의 생명을 거둔 것이다. 매미가 허물을 벗고 새로 태어날 수 있도록 선뜻 생명의 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그 은혜 잊지 못해 매미는 자신을 키워 준 나무를 ‘엄마나무’라고 표시해 두고 멀리 여행을 떠났다.
매미가 나뭇가지에 ‘제 허물 벗어 놓고’라고 표현한 것은 이면에 동음이의어를 염두에 두었다. 생태적인 매미의 허물과 다른 ‘그릇된 실수, 과실’ 등의 의미를 담았다. 부모는 자식의 과오까지도 다 덮어주고 품어 안아주는 존재 아니던가. 나는 이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 삶을 모색하는 「누구나」 「송ㅅ리」 「겨울 허수아비」 「고인돌 앞에서」 등을 시로 형상화했다.
밥값, 제대로 하는 동시를 꿈꾸며
동시는 내게 줄곧 ‘따뜻한 밥 그릇’이 되어 주었다. 동시로 등단해서 일명 생계형 밥벌이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집 근처 문화이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일간지 <어린이동아>에 글쓰기 교실을, 독서기관 <아이북랜드>에 행복한 독서논술 칼럼을 연재하였다. 그 덕분에 자잘한 원고청탁과 작은 강의들이 꼬리를 물어 입에 근근이 풀칠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동시는 내 삶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도록 무언의 힘을 주었고, 내게 문학에 대한 새로운 꿈과 희망을 주었다. 모시고 살던 시모님이 하늘로 떠난 후, 나는 아동문학에 대한 갈증과 깊이를 더하기 위해 ‘아동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문예창작학’을 전공했다. 동시는 IMF 이후 현실적 압박감에 쓰러질 것 같은 나를 벌떡 일으켜 세워주는 ‘힘센 밥그릇’이 되어 주었다.
또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도서관협회 후원으로 최명희문학관 파견작가(2009~2013년)와 인후시립도서관(2011) 파견작가로 선정되어 동시로 문학 강연을 하는 동안 내 가슴은 늘 풍요로웠다. 학교와 도서관에서 ‘어린이 시인교실’을 통해 어린이들과 교감하고, 구순의 어르신들까지 수용의 폭을 넓혀 동시로 마음을 열고 공감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나는 가슴으로 낳은 내 새끼들이 세상에 나가 밝은 빛을 받으며 맣은 어린이들에게 사랑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윤이현 시인과 함께 동시읽는모임 전주지부를 발족하고(2005년) 동시의 저변확대에도 힘썼다. 이를 통해 나는 동시가 그 어떤 문학 장르보다 더 싱싱하고 힘이 세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는 누구나 동심의 시간을 거쳐 왔기에 전 세대를 아우르는 문학이다. 그래서 전주 MBC 방송국 <여성시대>에 매주 좋은 동시 3편씩을 5년 넘게 소개하고 이다. 내게 동시집을 보내주신 분들게 이 자리를 통해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동시집 잘 받았다는 인사를 더러 전하지 못했지만, 방송에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했음을 알리며 양해를 구한다.
나는 동시를 쓰면서 기초적인 문장 강화를 한 덕분에 그림책 원고를 비교적 수월하게 쓸 수 있었다. 그것은 동시가 지닌 간결성과 리듬감이다. 이후, 그림책 원고를 다수 출간하면서 거기에 살을 붙여 단편동화를 쓰고 풀롯을 익혀 역사동화책을 출간하였다. 또한 전북일보 객원기자로 일하면서 우리 역사의 뼈아픈 이야기를 논픽션으로 재구성하였다. 이는 역사의 비화로 묻힐 수 있는 이야기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이처럼 동시는 내게 문학의 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든든한 밥 그릇’이 되어 주었고, 나를 더욱 나답게 살 수 있도록 ‘당당한 밥 그릇’으로 이끌어 주었다. 나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동시 「내버려 둬」 에 나오는 강아지처럼 밥값 잘하는 동시를 쓸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사료 한 줌씩 얻어먹고 제 밥값을 다하기 위해 낯선 사람을 보면 무섭게 짖어대는 강아지처럼 나도 어린이들의 정서적 발달권을 돕는 동시를 낳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밥값 잘하는 강아지처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한다면, 세월호 침몰사고와 같은 대형 참사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심장을 통해 온몸에 피가 돌 듯 창조의 주체로써 시적형상화에 문학적 깊이를 더하여 시작에 심혈을 기울 것이다. 밥값 제대로 하는 동시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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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출처 : 2014년 <열린아동문학> 여름 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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