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 註] 풍수서를 읽다보면 신화(神話)시대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예컨대 하도(河圖)와 선천팔괘(先天八卦)를 만들어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게 해준 복희씨(伏羲氏), 지남차(指南車)를 만들어 나경패철의 효시가 된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와 치우(蚩尤), 낙서(洛書)와 후천팔괘(後天八卦)를 만들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게 해준 문왕(文王) 등이다. 제28회 올림픽이 열렸던 아테네를 '신화의 땅' '신들의 도시'라고 부르는 것처럼 어떤 국가나 민족을 막론하고 역사의 시작은 신화에서 비롯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는 단군신화(檀君神話)에서 출발하고, 중국의 역사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신화로부터 서술되고 있다. 이처럼 고대사(古代史)의 기점은 신화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통례다. 신화시대란 역사가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의 시대다. 신화란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인간 영웅들의 이야기를 신들의 세계로 각색한 것이다. 따라서 실존성 여부는 확실하게 입증할 수 없지만 실존 인물일 가능성은 크다. 신화없는 민족은 없다. 우리는 10월3일을 개천절(開天節)로 정하고 국가공휴일로 지정했다. 단군신화를 신봉하며 민족의 조상으로 받들어 사직단이나 첨성단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다. 풍수서에 등장하는 복희씨, 황제헌원, 치우 등도 역사 이전의 신화적 인물이므로 그들이 만들었다는 선천팔괘(先天八卦)·후천팔괘(後天八卦)·지남차(指南車) 등의 원리를 확실하게 입증할 수는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복희씨(伏羲氏) 출생에 관한 신화 ①
중국 서북쪽 수천만 리 되는 곳에 '화서씨(華胥氏)의 나라'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다. 어찌나 멀리 있는지 걸어서든 말을 타든 배를 타든 결코 갈 수 없는 곳이다. 다만 마음으로만 갈 수 있는 나라였다. 이곳은 그야말로 극락으로 부를만한 나라였다. 정부나 통치자도 없고, 백성들도 욕망이나 욕심이 없이 모든 것을 자연에 따르기만 했다. 사람들의 수명이 길었고 아름답고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물속에 들어가도 빠질 염려가 없었고, 불 속에 들어가도 타질 않았다. 공중에서도 땅을 딛은 듯이 걸을 수 있었으며, 구름과 안개도 그들의 시선을 가리지 못했다. 인간과 신의 중간쯤 되는 사람들만 사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의 나라였다. 이 나라가 중국 서북쪽에 위치하므로 조선(朝鮮)이라는 설도 있다.
이 낙원에 이름은 없고 그저 '화서씨'라고만 불리는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하루는 그녀가 동쪽에 있는 나무가 우거지고 경치가 아름다운 뇌택(雷澤)이라는 호수가에 가서 놀고 있었다. 그녀는 우연히 물가에 찍혀있는 한 거인의 발자국을 보게 되었다. 이상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소녀는 자신 발로 거인의 발자국을 밟아보았다. 그러자 기인한 느낌이 들었다. 곧 임신을 하게 된 것이다. 얼마 후 사내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복희였다.
뇌신(雷神)의 아들로 태어난 복희는 봄을 다스리는 동방의 상제가 되어 인류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수목의 생장을 주관했는데 번개가 나무에 떨어지자 불이 일어났다. 이 불로 동물을 익혀 먹게 하자 사람들은 배탈이 나지 않았다. 우레가 지난 뒤 숲에서 불이 일어나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고, 이 불로 고기를 굽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포희( 羲)라고도 불렀다. 그러자 그의 신하 망씨(芒氏)는 그물로 새 잡는 법을 고안 해냈다.
또한 복희는 팔괘(八卦)를 그려 세상 만물을 표시할 수 있게 해주었다. 건(乾 )은 하늘을 대표하고, 곤(坤 )은 땅을 대표하며, 감(坎 )은 물을, 이(離 )는 불을, 간(艮 )은 산을, 진(震 )은 천둥, 손(巽 )은 바람, 태(兌 )는 연못을 대표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세상이 어떻게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일상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기록할 수 있었다고 한다. 복희씨에게는 복비(宓妃)라고 하는 예쁜 딸이 있었는데 어느날 낙수(洛水)를 건너다가 그만 물에 빠져 죽어 낙수의 여신이 되었다.
복희가 인류를 다시 만들었다는 신화 ②
어느 날 하늘의 뇌공(雷公)이 노하여 인간 세상에 엄청난 재해를 가져다 주는 비를 뿌렸다. 이때 어느 한 사내가 큰 재앙이 곧 닥치라는 것을 예감하였다. 그는 쇠스랑과 쇠철장을 미리 만들어 놓고 처마 밑에 서서 누군가를 침착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에 먹구름은 점점 짙어지고 천둥소리가 연이어 들리더니, 번개가 치고 무너져내리는 듯한 큰 우뢰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푸른 얼굴의 뇌공이 손에 도끼를 들고 지붕에서 날아 내려왔다. 뇌공의 눈은 사납게 빛나는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이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은 사내는 재빠르게 쇠스랑을 휘둘러서 단번에 뇌공의 허리를 찔렀다. 그리고 쇠철장 속에 넣어서는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사내는 재해를 가져다주는 뇌공을 죽여 젖갈을 담기로 했다. 그래야 더 이상의 재앙이 없기 때문이다. 향료를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아이들에게 뇌공을 잘 지키라 했다. 그리고 절대로 물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사내가 떠나자 뇌공은 거짓으로 신음하는 척하며 고통스런 모습을 지어보였다. 아이들이 달려와 왜 신음하느냐고 물었다. 뇌공은 목이 마르므로 물 한그릇만 달라고 사정을 했다.
남자아이는 절대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으나, 여자아이는 너무 가여워 물 몇 방울을 뇌공의 입속에 넣어주었다. 그러자 뇌공은 쇠철장을 뚫고 땅이 무너지는 듯한 큰 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이들이 놀라자 뇌공은 급히 이빨 하나를 뽑아 아이들에게 주며 말했다. "어서 이것을 땅속에 심어라. 만일에 재난을 당하게 되면 거기서 열린 열매 속에 숨어라." 말을 마치자 뇌공은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로 높이 날아가 버렸다.
집에 돌아온 아빠는 뇌공이 도망친 것을 보고 곧 재난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급히 쇠로 된 배 한 척을 만들었다. 아이들도 뇌공이 준 이빨을 땅속에 묻었다. 그러자 새싹이 솟아나더니 쑥쑥 자라나서 단 하루 만에 꽂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열매를 따서 반을 가른다음 속을 모두 파내자 두 아이가 누워있을 만한 호리박이 되었다.
바로 그때 날씨가 갑자기 변하더니 스산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곧 어두운 하늘에서 미친 듯이 비가 쏟아져 내렸다. 땅에는 물이 넘쳐 홍수가 나서 집이고 산이고 모두 물에 잠기었다. 아이들은 호리박 속에 숨었고, 아빠는 자신이 만든 쇠배 속에 올랐다. 높게 넘실거리는 파도를 타고 이리저리 표류하게 되었다. 홍수는 갈수록 심해져 물길이 하늘까지 닿았다. 하늘의 문에 이르게 된 사내는 뱃머리에 선채 문을 탕탕 치며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그 소리에 놀란 천신(天神)들은 놀라 급히 수신(水神)에게 물을 빼라고 명을 내렸다.
수신이 명령대로 행하자 순식간에 비바람이 멈추고 홍수가 끝나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물이 빠지자 사내와 아이들은 하늘에서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쇠배를 탄 아빠는 급히 떨어지는 바람에 배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죽고 말았다. 그러나 아이들이 탄 호리박은 부드럽게 천천히 떨어지면서 한 군데도 다치지 않았다. 하늘까지 차오르던 홍수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자 대지 위에 살던 인류는 모두 죽어버렸다. 두 아이만 살아남게 되었으니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들 둘에게는 본래 이름이 없었으나 호리박 속에 살아남았다고 하여 이름을 복희(伏羲)라 하게 되었다. 복희란 포희(匏羲) 즉 호로(瓠蘆)를 뜻한다. 그래서 남자아이는 복희가, 여자아이는 복희매라 했으니, 바로 '호리박 오빠' '호리박 누이'라는 뜻이다. 비록 대지에서 인류가 사라져버렸으나 이들 남매들은 열심히 일하면 즐겁고 걱정없이 살았다. 시간이 유수같이 흘러 어느덧 그들은 모두 어른이 되었다. 오빠는 동생과 결혼하고 싶었으나 동생은 친형제끼리 결혼할 수 없다며 원치 않았다. 그러나 오빠가 자꾸자꾸 원하니까 동생도 거절만 할 수가 없어서 둘은 결국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다.
부부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동생은 둥근 공처럼 생긴 살덩어리를 하나 낳았다. 기이하다고 생각된 그들은 하늘나라로 가서 천신께 여쭈어 보려고 하였다. 당시에는 하늘과 땅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하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가 있었다. 중간쯤 올라갔을 때 갑자기 바람이 불면서 살덩어리가 찢어지더니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땅에 떨어져 모두 사람이 되었다. 나뭇잎에 떨어진 것은 엽(葉)씨 성을 갖게 되었고, 나무 위에 떨어진 것은 목(木)씨 성을 갖는 등, 살덩어리들이 떨어진 곳의 사물 이름을 성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인류가 다시 생겨나게 되었으며, 복희 부부는 인류를 다시 만든 시조가 되었다. 반고가 인류의 시조가 되었던 것과 비슷해서 복희가 반고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참고도서 : 위엔커(袁珂) 저 / 전인초·김선자 역, 『중국고대신화』, 1992,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