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들머리; 경기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
오늘의 날머리; 경기 철원군 동송읍 대위리 대위리검문소
*차탄천 ; [ 車灘川 , Chatancheon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을 흐르는 하천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연천 남쪽 5리에 있는데, 물의 근원은 강원도 철원부 서쪽 고을파(古乙坡)이고 남으로 흘러 양주(楊州) 유탄(楡灘)으로 유입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도 이와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광여도』, 『여지도』에는 연천 남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으로 표기되었으며, 『팔도군현지도』, 『조선팔도지도』에서는 한탄강과 합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곡리에서 한탄강과 합류한다. 순우리말로 수레여울이라고 불린다.
신탄리에서 역고드름 입구 까지 3.77km
백마고지
백마고지에 대하여
**백마고지 ; [ 白馬高地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북서쪽으로 약 12㎞ 지점에 있는 해발 395m의 고지로서 군사적 관례에 따라 395고지라고도 한다. 6·25전쟁 때 국군과 중공군이 이 고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심한 포격으로 산등성이가 허옇게 벗겨져서 하늘에서 내려보면 마치 백마(白馬)가 쓰러져 누운 듯한 형상을 하였으므로 '백마고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1951년 7월 정전회담이 시작되어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시점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기로 정한 뒤 한국·유엔군과 북한·중공군 양측은 조금이라도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백마고지는 중부전선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철의 삼각지대(철원·김화·평강)'의 하나인 철원평야와 서울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당시 김종오(金鐘五) 소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9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백마고지 일대에 2000여 발의 포탄을 투하하며 공격을 개시하였다. 중공군은 제38군 예하의 제112·113·114사단의 약 4만 5000명의 병사를 동원하였으며, 아군은 제9사단 예하의 제28·29·30연대를 비롯하여 경장비 제51연대, 53전차중대, 제1포병단 등의 국군과 제5공군, 제73전차대대, 제49·제213·955 포병대대 등의 미군이 맞서 싸웠다.
10월 6일에서 10월 15일까지 열흘간 24차례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혈전을 치른 끝에 제9사단이 중공군을 격퇴하고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21만 9954발의 포탄을, 중공군은 5만 5000발의 포탄을 발사한 것으로 기록된다. 중공군은 1만여 명이 사상자 또는 포로가 되었고 제38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고 후방으로 물러났다. 제9사단도 34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이 전투의 승리로 백마부대로 불리게 되었다.
이 전투의 대승으로 휴전을 앞두고 군사적 요지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유엔군은 정전회담에서 계속 유리한 입장을 지킬 수 있었다. 이 전투를 기념하여 백마고지 정상에 기념관과 전적비, 호국영령 충혼비가 건립되어 있으며, 해마다 10월 16일을 전승(戰勝) 기념일로 삼아 민·관·군 합동 위령제를 거행하고 있다.
*소이산
"철원군 철원읍에 위치한 소이산은 해발 362m의 낮은 산이다. 고도는 높지 않아도 소이산 정상에 서면 백마고지, 철원역, 제2땅굴, 노동당사 등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지난 60여년 간 민간 통행이 금지되었던 군사지역으로 곳곳에 군사시설을 볼 수 있다. 해발고도가 낮기 때문에 정상까지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으면서도 정상에서의 전망이 빼어난 곳이다. 전쟁이후에 지뢰지대가 설치되고, 아이러니하게도 약 60여 년 간의 민간인 출입통제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생태계와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다. ‘지뢰밭이 지킨 평화의 숲’이라는 타이틀은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뢰지대가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주의표시가 되어있는 곳으로는 절대로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2012년에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이 조성되었다.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은 지뢰꽃길, 생태숲길, 봉수대 오름길로 나뉘어 있으며 정상까지 가려면 봉수대 오름길을 지나야 한다. (출처 : 강원도청)"
철원 노동당사 ; [ 鐵原 勞動黨舍 ]
요약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官田里)에 있는 옛 조선노동당의 철원군 당사 건물. 국가등록문화재 제22호이다.
1946년 초 북한 땅이었을 때 철원군 조선노동당에서 시공하여 그해 말에 완공한 러시아식 건물이다. 1,850㎡의 면적에 지상 3층의 무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현재 1층은 각방 구조가 남아 있으나, 2층은 3층이 내려앉는 바람에 허물어져 골조만 남아 있다.
1층 구조를 보면 몇 개의 방은 공간이 매우 협소해 1~2명이 사용하였거나 취조실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6·25전쟁의 참화로 검게 그을린 3층 건물의 앞뒤엔 포탄과 총탄 자국이 촘촘하다.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으로 1개 리(里)당 쌀 200가마씩 거두었고, 지역 주민들로부터 강제 모금과 노동력 동원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내부 작업은 비밀유지를 위해 공산당원 이외에는 동원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8·15광복 후부터 6·25전쟁이 일어나기까지 공산치하에서 반공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잡혀 와서 고문과 무자비한 학살을 당하였다. 당사 뒤편에 설치된 방공호에서 사람의 유골과 실탄, 철사줄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그때의 참상을 알 수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이곳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기도 하였으며, KBS 열린음악회가 녹화되기도 하였다.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3-2번지 외 4필지에 있다
*도피안사(철원)
통일신라 경문왕 5년(865년) 도선국사가 높이 91cm의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을 제조 철원읍 율리리에 소재한 안양사에 봉안하기 위하여 여러 승려들과 같이 가다가 잠시 쉬고 있을 때 이 불상이 갑자기 없어져 그 부근 일대를 찾다가 현위치에 그 불상이 안좌한 자세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이 불상을 모셨다 한다. 당시 철조불상이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에 이르러렀다 하여 절이름이 도피안사로 명명되었으며 절내에는 도선국사가 제조한 국보 제63호인 철조비로사나불좌상과 보물 제 223호로 지정된 높이 4.1m의 화강암 재료로 된 3층 석탑이 보존되어 있다. 전에는 민간인출입통제구역으로 민간인 출입이 제한되었으나, 현재는 누구나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칠만암 ; [ 七萬巖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한탄강 상류에 있는 자연 경승지.
칠만암(七萬巖)은 강원도 철원군에 있는 정자연, 송대소, 직탕폭포, 고석정 및 순담과 더불어 철원 지역의 한탄강을 대표하는 명승지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에 속하여 있으나 인근 마을의 공통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조선 광해군 때 철원 출신으로서 명나라 구원병의 좌영장으로 출정하여 후금 군대와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전사한 충무공 김응하 장군이 청년 시절 무예를 닦던 곳이다. 김응하 장군의 용마에 얽힌 「김응하 장군의 용마」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칠만암은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주변 경치가 마치 수만 개의 바위를 한곳에 모아 놓은 것처럼 기묘한 조화를 이루는 데서 유래되었다.
칠만암은 크기가 큰 화강암 바위들이 많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탄강의 여러 화강암 지대의 화강암보다 더 뾰족하고 거칠고 투박한 것을 관찰할 수 있다. 화강암의 모양은 마치 급속히 냉각되어 기괴하게 생긴 현무암 같이 보이기도 한다. 칠만암 전체 화강암 군락의 크기는 약 300m에 달하며, 가장 큰 화강암은 약 50m에 달한다. 주변에 공룡의 발 같이 생긴 기괴한 모양을 한 바위가 있는데, 그 넓이가 약 20m로 추정된다. 화강암은 현무암 용암이 넘치기 전 원래 한탄강 기저에 있던 것이 물과 바람에 침식되어 드러난 것이다. 가장 높은 화강암 바위에서 상류 쪽을 바라보면 비교적 확 트인 개활지 바닥에 갖가지 모양의 돌들이 깔려 있다. 대부분 화강암 지역이 그러하듯이 강 양쪽 절벽은 그리 경사가 급하지 않다. 화강암에 절리가 생긴 곳에는 돌단풍과 군데군데 짙은 녹색의 이끼도 뒤덮여 있다. 거대 화강암 옆으로 흐르는 강물은 깊이 4~5m 정도로 추정된다.
칠만암은 일제 강점기 철원공립보통학교를 비롯한 인근 초등학교의 단골 소풍지였다. 여름만 되면 원근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더위를 피해 천렵을 하며 하루를 보내던 장소이다. 6·25전쟁 후 DMZ와 민통선이 생기면서 출입 통제지역이 되어 아무도 접근할 수 없었다. 지금도 지역 주민들의 안내를 받아야만 접근할 수 있다. 직탕에서 상류 쪽으로 한여울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금월동과 강회동 마을이 나오며, 조금 더 북쪽으로 걸으면 왼쪽으로 대위리 마을이 보이고 야트막한 전차 방어벽이 나온다. 전차방어벽이 1970~1980년대에는 민통선 역할을 하여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현재 강 건너편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상사리[송호동]에 초대형 군 포 사격장이 들어서 칠만암의 자연환경이 파괴될 가능성에 대하여 우려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