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삼국지 30
(평설 인물삼국지 )
7. 도겸: 원술-공손찬 연합에 가담해 조조와 대결하다
인물평: 원술-공손찬 연합에 가담해 조조와 대결하다
도겸은 관료출신의 군벌이다. 조정에서 2차 황건적의 난으로 혼란에 빠진 서주를 수습하기 위해 그를 서주자사에 임명했다. 천하대란이 일어나자 전국적으로 무장집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각각의 주와 군, 현은 현직 지방관을 중심으로 군벌화 하는 경향이 있었다. 처음부터 본의에 의해 군벌이 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원대한 비전이나 목표가 없었다. 그는 일정한 방향성이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여기에 붙었다 저기에 붙었다 했다. 당시 전형적인 지방 군벌의 행태였다. 도겸은 당시 세력이 가장 강성했던 원술-공손찬 연합에 붙어 원소-조조의 동맹세력과 대립하다가 조조와 철천지 원수지간이 되고 말았다. 서주의 참극이 벌어지게 된 배경이다.
삼국지연의에서 도겸은 유학자 출신의 덕망 있는 관료와 같은 인상이다. 그러나 그는 황보숭과 장온의 부장이 되어 서량 반군 토벌에 참여하는 등 만만찮은 군사적 경험을 지녔다. 조정에서 혼란에 빠진 서주를 진압하라는 임무를 도겸에게 맡긴 것만 보아도 그가 상당한 무략의 소유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싯적 도겸은 늘 골목대장이 되어 전쟁놀이를 즐겼다 한다. 삼국지연의는 유비가 그의 지위를 계승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도덕군자로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도겸은 초반부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는 서주에 침입한 황건적을 격파해 주를 안정시키는데 성공했다. 그의 통치시절 서주는 백성들이 부유하고 양곡이 넉넉했다. 예주, 청주 등 인근지역에서 난민들이 몰려들어 주의 세력이 더욱 강성해졌다. 도겸은 서주의 명사 조욱과 왕랑을 종사로 초빙했는데, 이들은 그에게 산동반군에 가담하지 말고 오로지 중앙의 조정을 섬길 것을 권유했다. 도겸은 서주, 청주 인근의 몇몇 태수들과 힘을 합쳐 하남에서 근왕병을 일으킨 주전을 지원했다. 주전이 실패한 후에도 도겸은 꼬박꼬박 조정에 공물을 바쳐가면서 한나라 황실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도겸의 행보가 갑자기 꼬이기 시작했다. 그를 보좌해 바른 길로 인도하던 조욱과 왕랑이 각각 광릉태수, 회계태수에 임명되어 떠나간 후, 도겸은 조굉 등과 같이 남을 헐뜯기 잘하는 소인배들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형벌이 불공정해져서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등 서주의 통치가 엉망이 되었다. 도겸은 또 눈앞의 이익만을 노려 도적떼의 우두머리인 작융(笮融), 궐선(闕宣)과 같은 흉악한 악당들과 연합했다. 도겸은 또 자신의 안전을 위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원술의 진영에 합류했다.
원술은 원소와 대결을 벌이고 있던 공손찬을 돕기 위해 도겸에게 연주 동군 발건현에 주둔하면서 원소의 배후를 압박하게 했다. 공손찬 역시 단경과 유비를 보내 도겸과 협력하게 했다. 이때부터 도겸은 유비와 한패였던 셈이다. 조조가 자신의 영역에 침입한 도겸을 공격해 격퇴했다. 조조와 도겸은 서로 숙적이 되었다. 조조가 멀리 피난 했던 부친 조숭 일가를 맞아들이려고 했을 때, 도겸이 부하를 보내 조조의 일가족을 납치하려 했던 이유였다.
도겸으로 인해 일가족 몰살을 당한 조조는 2차례 서주를 침략해 대대적인 양민 학살을 벌였다. 안정되고 풍요했던 서주는 도겸의 어리석은 행동에 의해 개짖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졌다. 이 와중에 도겸은 6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서주는 지원병을 끌고 온 유비의 소유가 되어다. 도겸으로선 패가망신을 면한 것만도 다행이었다. 뚜렷한 목표와 방향도 없이 여기에 붙었다 저기에 붙었던 관료 출신 군벌의 최후치고는 말이다.
일화: 조숭일가 살해 사건
조조가 연주목인 된 후 가장 처음 주목한 것은 고향인 패국 초현을 떠나 동쪽 바닷가 끝으로 피난해 있던 조숭 일가를 불러오는 일이었다. 때는 난세라 군벌과 도적떼가 날뛰어 웬만한 호족들도 가문을 지키기 어려웠다. 산동반군이 분열되고 동탁이 보낸 이각, 곽사의 무리가 예주까지 약탈하고 다니자, 태위 출신의 막대한 거부였던 조숭은 고향을 떠나 청주 낭야군으로 피난했다. 그런데 청주는 공손찬의 부장 전해의 세력권하에 놓여 있었다. 원술-공손찬 세력과 대립하고 있던 원소 진영의 남방 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조조로서는 부친과 가족을 적의 수중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조조가 사람을 보내 조숭일가를 낭야에서 맞아들였다. 그런데 낭야군에서 조조의 근거지인 견성으로 오려면 태산군의 화현을 거쳐야만 했다. 화현은 태산의 자락에 있는 현으로서 지형이 험했다. 조숭일가가 화현에 도착했을 때.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조숭일가가 모두 피살되어 버린 것이다.
연의든 정사든 조숭 일가를 죽이고 재물을 약탈해 달아난 자가 도겸의 부하 도위 장개라는 자였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일치한다. 그런데 어떤 경위로 장개가 조숭일가와 동행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완전히 의견이 엇갈린다. 삼국지연의에 의하면 도겸이 평소에 세력이 강한 조조와 친분을 쌓기를 원했기에 낭야에서 돌아오는 조숭일가를 서주에서 맞아들인 다음, 선의에서 부하 장개에게 호위를 맡겼는데 이 자가 원래 황건적 출신이라 물욕이 생겨 조숭일가를 참살했다고 한다. 조숭은 처음부터 선의였고 조숭일가의 죽음에는 전혀 책임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전혀 사실과 다르다. 우선 도겸은 조조와 이미 몇 차례 무력 충돌을 벌인 바 있는 숙적관계였지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다. 원술 진영에 속한 도겸이 원소 진영의 장수인 조조와 친분을 쌓기를 원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또 낭야에서 연주로 가는 데 서주의 영역을 거칠필요가 없었다. 낭야에서 당시 도겸의 치소가 있었던 담성을 들렀다가 다시 태산군의 북쪽 자락인 화현으로 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정확한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 두 차례 조조의 근거지인 동군을 침입했다가 패퇴한 도겸은 조조의 보복이 두려웠다. 때마친 연주로 가는 조숭일가가 태산군의 화현을 거쳐간다는 정보를 입수한 도겸은 수하 장수 장개를 시켜 납치해 오게 했다. 원래 태산군의 화현, 비현 지역은 일찍이 도겸이 궐선의 세력과 연합하여 점령했던 곳으로 도겸의 영향권 내에 있었다. 장개는 화현 인근에서 조숭일가를 붙잡았다. 그런데 이 작자는 원래 궐선의 부하였던 자로 도적 출신이었다. 그때 조숭은 재산이 막대해 값나가는 물건을 싫은 수레만도 백여 대가 넘었다. 재물에 눈이 어두어진 장개가 조숭일가를 죽이고 재물을 약탈해 달아난 것이 사건의 진상이다. 도겸의 의도가 조숭일가를 죽이는 것은 아니었다 해도 그의 책임이 없다 할 수 없었다. 당초 포로로 잡아 인질로 삼으려다가 본의 아니게 사건이 커졌더라도 조숭일가의 죽음에 근본적 원인제공자로서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조조가 도겸을 범인으로 지목해 서주를 공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짓말
삼국지연의에서는 도겸이 무려 3번이나 유비에게 서주를 양보한다. 처음 만났을 때, 조조가 철수했을 때, 자신이 임종하기 전. 그때마다 덕망이 있는 유비는 남의 기업을 빼앗을 수 없다고 거절한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도겸은 한 번도 유비에게 서주를 양보한 적이 없었다. 그가 죽자 마땅한 대안이 없었던 미축, 진등 등 서주의 관리들이 유비를 추대했을 뿐이다. 조조의 학살극을 목격한 이들은 누구든 조조의 침략으로부터 서주를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서주를 지원하러 와 있었으며 공손찬의 든든한 후원을 받고 있던 유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