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8:1~4(11) 주여 원하시면 2022.9.4.
오페라(opera)라는 음악 장르가 있습니다. 오페라는 음악을 중심으로 한 종합 무대 예술인데, 등장하는 사람들이 말로 대화를 하면서 중간에 독창, 중창, 합창 등을 부르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한국말로 번역 하면 가극(歌劇)이라는 말도 됩니다.
오페라의 꽃을 피운, 오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를 선택하라고 말하면, 대부분 음악에 조예가 깊은 분들은 ‘주세페 베르디(1813-1901)’를 말합니다. 베르디는 이탈리아를 넘어 세계 오페라 사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입니다. 베르디는 오페라의 거인 또는 오페라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대의 오페라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베르디는 1813년에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납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베르디는 좋은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입니다. 7살 때부터 교회에서 오르간을 배워 10살 때부터 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됩니다. 음악에 재능을 보인 베르디는 부유한 상인이자 아마추어 음악가였던 안토니오 바레치의 도움을 받아 음악을 더 공부하게 됩니다.
작곡가 베르디가 처음으로 오페라를 작곡하여 플로랜스에서 연주를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모였습니다. 연주가 마치자 모든 사람이 갈채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르디는 환호하는 관중에는 관심이 없고,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자신을 믿고 아낌없는 후원하면서 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지지해 주었던 바레치였습니다. 베르디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끌어 주었던 정신적 멘토 바레치의 격려가 더 중요하였던 것입니다.
베르디가 바라보았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들에게도 필요한 모습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응원하고 박수를 친다고 해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온전한 성공이 아닙니다. 내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나를 이해하고 이끌어 주신다면 성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자기 주관이 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세운 목적과 목표가 분명히 있지만,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이 무슨 말로 속삭이면 그냥 그 말에 넘어 갑니다. 자신이 세운 주관을 내팽개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따라갑니다. 이런 분들은 인생을 참으로 피곤하세 사시는 분들입니다.
집안에 냉장고나 가전제품을 들여 놓을 때도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눈치만 봅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을 전혀 듣지 않는 옹고집도 문제지만, 너무 귀라 얇아서 자신의 주관을 잃어 버리는 것도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신앙새활에는 자신이 세운 주관이 뚜렷하게 있어야 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고 나를 이렇게 이끌어 주시니 내가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는 것을 내가 채워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이런 신앙의 논지를 가진 분들은 행복한 신앙행활을 하는 분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모습에 관심을 두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이것에 초점을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인의 초점은 오로지 하나님 뿐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요구에 어떻게 대응하면서 채워나갈 것인가? 신앙인은 이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오늘 본문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다 마친 후 마을로 내려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수만명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눈앞에서 벌어진 엄청난 기적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때에 산상수훈을 듣지 못한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성경은 이 사람을 두고 나병환자라고 말합니다. 문둥병자였던 이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산에서 내려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렸다고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가장 먼저 던진 말이 무엇일까요?
2절,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나병환자는 주님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나병환자가 주님에게 한 말을 자세히 보세요. 주님이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면, 즉 나를 고치려고 하는 주님의 의지가 있다면, 아무도 고치지 못하는 나의 문둥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NIV성경에서는 ‘Lord, if you are willing(당신의 의지가 있다면), you can make me clean.(당신은 나를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 ’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문둥병자는 나를 고치려고 하는 예수님의 마음과 의지만 있다면 내가 깨끗하게 된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문둥병에서 나음을 받고 싶다고 내 마음대로 병에서 고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고쳐 주시기를 원하신다면, 나를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병환자의 신앙고백입니다. 내 생각과 내 고집과 내 판단이 분명이 있지만,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뜻과 주님의 판단을 먼저 따르고 존중하겠다는 고백입니다. 나를 아무것도 아니고 주님이 전부라는 고백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응하시나요?
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할렐루야)
이 때 예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말이 떨어지자 말자 그 즉시 문둥병 환자는 깨끗해집니다.
본문에 두 번의 원한다는 말이 등장합니다. 보통 영어성경에서 ‘내가 원한다(i want)’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모두 의지를 뜻하는 willing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병환자는 주님에게 ‘Lord, if you are willing(당신의 의지가 있다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에 예수님은‘I am willing(내가 기꺼이)’원하는 모습으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한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신앙의 이정표를 잡아 주는 말과 행동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원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원하지 아니하면 되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원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에게 간구해도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원하실 때에 그대로 이루어지고 주님이 원할 때에 그대로 주어지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병환자는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뜻대로 간구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고침 받을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고침 받는 것이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주님께서 진실로 원하시는 것인지를 묻는 모습입니다.
주님을 향한 여러분의 간구와 소원은 어떻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면’이라는 신앙고백으로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주여, 원하시면’ 이란 고백은 어떤 행동을 수반하는 믿음일까요?
1. ‘주님의 능력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1981년 4월 토드 휴스턴(todd huston)이란 20세의 미국 청년이 수상스키 경주를 마치고 스키로프를 풀다 배에 달린 프로펠러에 다리가 말려 들어가 버렸습니다. 결국 한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에 의지하여 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절망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이 청년은 기도합니다. “하나님, 포기할 수 없는 내 인생에 아직도 남아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내가 살아야 할 모습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캘리포니아 재활병원 의학센터에 상담원으로 취직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은 장애인, 손발을 잃어버린 이들을 돕고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일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기도를 하다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하나님은 캘리포니아주, 몬타나주, 뉴멕시코 주 등을 보여 주시며 각 주마다 그 주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의족을 달고 이런 산에 올라간다는 말은 곧 죽는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거부 합니다. 그 후 같은 꿈이 계속 꾸어집니다. 그리고 결정합니다. “하나님, 의족으로도 50개 주마다 최고로 높은 산에 올라가라 하시면 제가 시도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저와 같은 장애인들에게 놀라운 꿈이 될 것입니다. 도전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미국 50개 주의 최고봉들을 의족으로 정복하기로 결심합니다. 1994년 6월1일 드디어 알라스카 주의 매킨리 봉에서부터 최고봉들을 향한 그의 정복 여행은 시작됩니다. 여러 차례 생사고비를 넘기고 위험천만한 상황을 만납니다.
산 하나를 올라갔다 내려오면 수많은 기자들이 ‘어째서 이런 모험을 하며 무모한 일에 도전하십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이에 토드는 대답합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가능성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도전이 장애인들에게 꿈과 용기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드디어 그는 정복의 여정을 출발한 지 66일째 되던 날, 하와이의 마흐나키아 정상에 우뚝 섰습니다. 그는 미국의 50개 주마다 산 정상을 다 정복해 버린 것입니다. 그는 산 정상에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장면이 미국의 TV에 방영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나병환자 역시 육체에 가장 큰 약점을 가진 사람입니다. 나병은 바로 죽는 병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시간을 끌면서 손가락 발가락 하나하나가 서서히 덜어져 나가 죽는 너무나 무서운 병입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치료할 방법이 전혀 없는 나병을 두고 ‘하늘이 내린 벌이라 해서 천형(天刑)’이라 불렀습니다.
이런 천형에 걸린 나병환자는 자신에게 큰 문제가 있었지만 주님을 찾아 갑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주님에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병 고침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습니까? 어떠한 난관이 앞에 놓여 있습니까? 내 앞에 놓여진 문제로 인하여 밥맛을 잃어버리고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걱정거리가 있으신가요? 그렇더라도 낙심하여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악의 상황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시며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당시 나병환자들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방문할 수 없었습니다. 마을 외각 한적한 곳에 따로 머물렀습니다. 나병환자가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 오게 되면, 사람들은 돌을 들어 던지면서 나병환자를 쫓아 내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한 나병환자는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찾아옵니다. 이러한 나병환자의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자신의 병을 고쳐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그로 하여금 담대하게 주님 앞에 나올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정말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어떤 문제인지 아십니까? 문제가 있어도 주님에게 나아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으면서 주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기도하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은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제가 있어도 주님의 능력을 믿고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을 주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여러분들의 원하는 것들을 이루게 하실 줄로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2. 주님의 사랑을 구하는 모습이 주님을 원하는 모습입니다
미국 남북 전쟁 때의 일입니다. 북군 병사들이 전우의 시체를 메고 묻을 곳을 찾아다니다가 외딴 지역에 있는 교회 하나를 발견합니다. 들어가 목사님에게 동료의 시체를 교회묘지에 묻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북군 병사를 남부군 병사들이 다니는 교회 묘지에 묻을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똑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북군과 남군이 서로 정치적 성향 때문에 총부리를 겨눈 안타까운 시대상황이었습니다.
북군 병사들은 하는 수 없이 동료의 시체를 교회묘지 밖에 가매장했다가 나중에 다시 찾아가겠다고 말하자 교회는 허락을 합니다. 병사들은 동료의 시체를 교회 묘지밖에 안장하고 돌아갑니다. 얼마 후 병사들이 다시 와보니, 가매장한 묘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교회에서 북군 병사들이 돌아가고 밤새도록 고민하다가,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교회묘지 울타리를 옮긴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교회묘지 울타리를 가매장한 묘 밖으로 다시 둘러 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북군 병사의 시체를 남군교회묘지 안으로 들어오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북군과 남군이 분리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흑인 노예 해방이라는 문제로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다.
오늘 본문과 동일한 상황이 마가복음 1장에 나옵니다. 막 1:41절에는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의 ‘민망히 여기셨다’는 말은 영어성경에는‘filled with compassion’이라 번역되었습니다. 이는 ‘연민으로 가득찬’이란 말입니다. 즉 나병환자를 보는 주님의 마음이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심정으로 가득 찼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가 겪고 있는 아픔과 고통을 모두 아셨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외로이 살고 있는 그를 보았습니다. 하루하루 서서히 죽어가는 그의 육체를 보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나병환자가 드리는 신앙고백을 통해서 사랑의 마음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가 ‘주여 원하시면’이라 고백하며 사랑과 긍휼을 구할 때, 주님은 사랑의 손을 즉시 내밀어 그의 문둥병 상처 위에 가져다 댑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명령합니다.
우리 또한 나의 문제로 하나님에게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사랑의 손길로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나의 문제를 풀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고백은 어떠하십니까? ‘주여, 원하시면’의 고백입니까? 아니면 ‘내가 원하면’의 고백입니까?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하십니까? 고침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리하면 주님께 믿음으로 맡기십시오. 반드시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끝내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 말씀하시는 것에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의지하십시오. 부디 ‘나의 원함’이 아니라 ‘주여, 원하시면’의 신앙고백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말씀하시면’이라는 복음송가로 마무리하면서 은혜를 새기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