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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에세이포럼
22기-6차시
일시 : 2024년 3월 26일 (화) 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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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 제 목 | 작 가 | 편수 | 합평 담당 |
1 | 주방에서 언제까지 | 이경자 | 1 | 예수백 |
2 | 늙으니 좋다 | 배정순 | 4 | 이혜경 |
3 | 가짜 돈 | 김연희 | 3 | 권춘애 |
4 | 사람과 양심 | 민창현 | 5 | 김순향 |
5 |
합평순서 / 권춘애 김순향 김선애 김연희 김인옥 민창현
박동조 박희자 배정순 예수백 이경자 이혜경
1. 주방에서 언제까지/이경자1
1. 요즘은 무엇을 좀 만들어 먹기가 쉽지 않다. 친구들은 밥하기 귀찮다고 햇반으로 대신하고 찬은 반찬 가게에서 사먹으면 된다고 한다. 외식을 하거나 온 라인을 통해 음식을 불러 먹을 수도 있고, 반쯤 조리된 것을 주문해서 끓이기만 하면 되는 편리한 세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이지, 나는 그렇게는 할 수가 없다.
2. 나이가 들면 먹는 것도 소식을 하고 반찬도 간소하게 먹게 된다. 나는 하루 두 끼 만 먹는다. 음식에 연연해하지도 않거니와 식사는 꼭 밥을 먹어야 한다는 고집스러움이 있는 것도 아니다. 먹는 음식도 인체에 필요한 영양의 균형이 어긋나지 않도록 하면 된다.
3. 그런데 그렇게 식탐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나를 주방으로 가게 하는 것은 오로지 남편 때문이다. 남편은 보통의 아내들이 싫어하는 삼식이다. 외식하기 보다는 집 밥을 좋아 하는 사람이다. 주방에서 장시간 음식을 만들며 끙끙거리는 나를 보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늘 상 말하지만 어찌 간장과 김치만 먹고 살 수 있겠는가.
4. 젊었을 때 남편은 직장에서, 나는 나의 일에 매여서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제대로 기억이 없다. 퉁퉁 불은 라면마저도 먹을 시간을 놓치기 일쑤였고 그저 생존할 정도로 먹고 살아온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왜 그러고 살았는지 스스로 딱하고, 미련스러운 삶이 아니었나 싶다.
5. 나도 남편도 오랫동안 하던 일을 접고 이제는 자유로워졌다. 그동안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못한 것에 대한 한을 풀어볼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다. 내 눈으로 보고 식품재료를 사고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재미가 솔솔 했다. 지난 날 그렇게 바쁘게 살아오면서도 간장 된장 고추장은 내 손으로 만들었고 김장도 담갔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일 년 농사를 짓는 것과 같아서 매일 매일 새로운 음식을 만드는 묘미는 없었다.
6. 나는 음식의 맛에 민감하다. 외식을 할 때면 그 음식의 재료, 간, 조미료 등에서 맛이 금세 혀끝에 전달이 된다. 어떤 맛인지를 느끼게 되면 집에 와서 만들어 보기도 하고 또 새로운 방법으로 만들어 먹어보기도 한다.
7. 오늘 아침에는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멸치볶음만 하려고 했다. 그런데 냉장고 문을 연 순간 사다놓은 재료들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톳과 두 부, 부추와 땡초, 봄볕에 살이 통통 오른 실파 등이 선택해 주기를 기다렸다. 맨 처음 멸치 볶음부터 시작했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다진 마늘과 양파를 넣고 볶다가 나머지 양념을 넣고 끓여서 지룩해졌을 때 땡초를 넣고 그 다음 멸치를 넣어 두루두루 양념을 무친 후 마지막으로 통깨를 솔솔 뿌린다. 윤기가 자르르 하고 옷이 잘 입혀진 멸치 볶음을 접시에 담았다. 나머지 재료들은 차례차례로 데치고, 무치고, 땡초 부추전을 굽고 생대구탕을 끓여서 올려놓으니 거룩한 밥상이 차려졌다.
8. 주방에서 세 시간 넘게 반찬을 만들다 보니 매우 힘이 들었다. 겨우 세 시간 일한 것이 무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냐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다리가 불편한 나에겐 그 시간은 꽤 길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이것저것 곁들여 하다 보니 시간이 길게 늘어졌다. 종아리가 뻣뻣해 지더니 오른쪽 셋째 넷째 발가락이 딱 달라붙어서 기역자로 굳어져 버렸다. 거기에다 엄지와 검지의 관절에 통증이 왔다.
9. 마침 오전 산행을 하고 돌아 온 남편은 밥상을 보고 얼굴이 환해졌다. 상위에서 숟가락이 얼마나 빠르게 오르내리는지 보는 내가 더 신이 났다.
남편은 “당신이 주방에서 조금만 꼼지락 거리면 이리도 반찬이 맛있고 가지 수도 많은데.”한다.
다리에 쥐가 나서 발가락이 붙고, 손가락이 아프도록 음식을 만들었는데 조금만 꼼지락거리면 된다는 말에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는 남편에게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참말로 저리도 행복해 하는 얼굴을 보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주방을 들락거려야 할 것 같다. 내가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있을 때 까지.
2. 늙으니 좋다 /배정순4
1. 문인들의 종교 모임을 만드는 자리였다. 모임을 주선하신 분이 돌아가며 자신의 자랑하는 시간을 갖자고 하셨다.자기 소개라는 말 대신 자랑하는 시간을 갖자고 하신 건 첫 모임에서 오는 서먹한 풀어주기 위함인 것 같다.
그 의도는 맞아떨어졌다. 처음 만난 자리임에도 다들 자기 자랑 하기에 스스럼없이 없다. 소수의 사람은 간단한 자기소개로 끝내는데, 대부분 오뉴월 엿가락 늘어지듯 화려한 스펙 들어내기에 부지하세월이다. 하긴, 간단한 자기소개로 끝냈다면 첫 만남에서 오는 서먹함은 그대로였을 것이다.
2. 어느 단체 회장을 맡고 있다는 분은 외모로 보아 고희를 넘긴 분 같은데,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 장학금 받으며 공부한다고 용기를 부추겼다. 박수를 보낼 일이지만, 따라 해야겠다거나 부러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람마다 제 나름의 그릇이 있다는 소신에 흔들림이 없다.
3. 건너 건너오던 순번이 내 옆자리에 멎었다. 나무가 나이테로 살아온 연륜을 말하듯, 옆에 분은 겉 태에서부터 예술적 아우라가 범상치 않았다. 자신의 작품 가치를 높이는 일이라면 거리 장소 불문, 부산 서울까지 찾아 나선다고 했다. 전공 분야 외에 사진, 문학, 음악에도 소질을 발휘해 사진은 작가로서 이미 국내를 벗어나 외국에서도 상당한 수상 경력이 있다고 했다. 이분의 열정에 감히 자랑한다는 얕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4. 드디어 내 차례였다. 자랑거리가 없다. 이전 같으면 벌써 남의 화려한 스펙 앞에 기가 죽어 덜덜 떨 일인데 덤덤했다. 첫 모임에 나를 소개하는 자리이니 건너뛸 순 없고, ‘그래, 있는 그대로 하면 될 일, 무지가 부끄러운 일은 아니니까.’ 하는 마음이었다.
5. “나는 글 쓴 이력이 꽤 되지만 사실 글솜씨라야 그저 그렇다. 다른 분야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배움이 짧은 건 가난한 산골 태생이니 합당한 이유가 되지만, 결혼 후 공부할 기회가 있는데 하지 않은 건 애초 공부에 소질이 없단 말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남편 퇴직 후가 고비였다. 멀쩡한 두 사람이 얼굴 맞대고 놀기란 나날이 사막이었다. 견디다 못한 내가 사막을 탈출, 요양보호사로 행로를 넓혔다. 그 대가로 내 손에 돈이 들어왔고, 내 노력으로 번 돈이니 기 한 번 못 펴고 산 나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6. 뭘 할까, 망설이다가 찾은 게 글공부였다. 장소가 부산이니 주경야독임에도 그때처럼 삶이 보람 있고 즐거운 적은 없었다. 그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다짐 했다. 앞으로의 여생은 내가 좋아하는 글공부 하며 살기로.
7. 인간의 본성인가? 얼마 안 가 주제도 모르고 공모전을 통해 내 실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함량 미달이어서인지, 아니면 남을 딛고 올라서려는 동기가 불순해서인지 글 문이 막혔다. 몇 번 투고 하다가 스트레스만 가중될 뿐,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님을 깨달았다. 내가 쓸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쉬운 글 쓰기로 선회하면서 평정심을 찾았다. 그렇게 쓴 글을 모아 이태 전에 책을 묶어 나눴다. 나의 하찮은 글을 누가 읽어주랴 싶었는데, 의외로 자신의 삶 같다며 공감한다는 인사를 많이 받았다.”
8. 이렇게 자랑을 마무리했다. 말주변이 없어 제대로 표현 못 해 그렇지, 떨려서 할 말 못 한 것 같진 않았다. 남 앞에 설 때 고질적인 떨림 증상이 사라진 건 나이 들어가면서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방증이 아닐까. 아니면 늙음에서 오는 여유일까?
9. 늙는 걸 환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노년의 들머리인 갱년기, 내 인생의 끝인가 싶었다. 몸도 마음도 생활 여건도 폭풍 전야처럼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지나고 보니 알겠다. 농부가 오래 경작한 논에 땅심을 돋우기 위해 개토하듯, 노년의 삶을 풍요롭게 살기 위한 통과 의례였음을.
10. 새로운 삶의 시작, 하얀 도화지 위에 어떤 그림을 그릴까. 이 시기는 수고한 나에게 조물주가 내린 선물 같은 시간이다. 누구를 위한 삶이 아닌, 나를 위한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 보리라. 사람은 생을 다 할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인식은 평생 공부해야 한다는 촉매제 이자 몸을 낮추게 하는 방어기제였다. 결코 억울해할 일이 아니었다. 글공부는 책을 가까이하는 일이니 노년의 삶엔 금상첨화다. 스펙을 쌓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지만, 진정 나를 돌아보고, 찢긴 마음을 아우르는 위로의 장이다. 유한한 삶이기에 순간순간이 아깝고기껍다.
11. 어느 블로그에 ‘아~ 늙으니까 참 좋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늙음이 아니면 어찌 맛보리!’. 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지금 내 삶이 그렇다. 살아오면서 마음이 이렇게 여유로워 보긴 처음이다.
3. 가짜 돈 /김연희3
1. 김 할머니는 치매로 입소하신 분이다. 할머니는 베게 밑에나 침대 시트 밑에 돈을 숨겨두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할머니는 며칠 동안 박 요양보호사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박 직원이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가지고 있는 돈을 빌려주었는데 안 갚는다는 이유다. 직원은 어르신한테 돈 빌린 적이 없다고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돈 줄 때까지 따라다닐 것이라 했다.
2. 할머니의 망상은 이제 돈에 꽂혔다. 망상은 치매의 많은 증상 중 한 가지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믿는 것이다. 직원은 할머니에게 돈을 빌린 적이 없으니, 할머니의 주장은 망상으로 인한 것이다. 얼마 전에는 아끼든 옷을 담당 직원이 가져갔다고 하였다. 아들이 첫 월급 받아 사준 것인데 저것이 도둑질해 갔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은 어떻게 대체할 수 없어서 직원을 다른 부서에 배치하고 나서야 할머니의 망상을 잠재울 수 있었다.
3. 어르신은 젊은 날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일수놀이’를 했다고 한다. 고리대금업이 아니더라도 옛날에는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있었다. 돈을 빌려주고 일정 금액을 매일 받는 것을 ‘일수’라고 한다. 은행에서 돈을 대출하려면 절차가 복잡하고 조건도 까다로워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서 돈을 빌려 사용했다. 가끔 할머니는 “돈을 빌려주고 어려워서 봐주고, 떼먹고 도망가서 못 받고 한 돈만 해도 집 몇 채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4. 김 할머니는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한 기억 어디쯤 가 있는가 보다. 특정 직원을 콕 찍어서 말하는 것을 보면 돈을 빌려준 사람과 닮은 점이 있는 것 같다. 치매 환자는 지워진 최근 기억 때문에 혼란스럽다. 돈을 받은 기억은 지워졌고 빌려준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 닮은 누군가에게 빌려주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치매 환자의 왜곡된 기억은 정신의학의 망상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
5. 만 원짜리 가짜 돈을 만들었다. 지폐를 똑같이 만드는 것은 위법이다. 현 지폐보다 작게 복사했다. 돈의 뒷면에는 이면지 도장을 찍었다. 특정 어르신의 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작은 글씨로 어르신의 이름도 적었다. 정상인이 보면 진짜 돈이 아님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대체로 어르신들은 시력이 좋지 않아 작은 글씨는 보이지 않음으로 가짜 돈을 알아보지는 못한다.
6. 어르신에게 가짜 돈 삼만 원을 건넸다. 어르신은 “내가 빌려준 것은 이만 원이니 이만 원만 받겠다.” 하면서 한 장은 돌려주셨다. 가짜 돈을 받아 든 할머니는 베게 속이나 이불속 어딘가에 또 돈을 숨길 것이다. 그 돈은 사용할 수 없다. 할머니는 가짜 돈을 보관하고 있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을 것이다.
7. 요양원을 운영하면서 “노인들에게 진짜 돈은 연금이다”라는 말을 나는 자주 했다. 연금은 매달 나오는 돈으로 자녀들이나 친지들이 한꺼번에 가져갈 수 없는 돈이다. 아무리 현금이나 부동산이 많아도 치매가 오면 재산은 관리할 수 없게 된다. 현금이나 부동산은 자녀들이나 친지에게 상속된다. 상속받은 현금이나 부동산은 부양비용으로 사용해야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몇 년 사이에 사라질 수 있다. 반면 연금은 당사자가 죽을 때까지 나오는 현금이다.
8. 요양원의 비용은 장기 요양보험이 실시되어 입소자의 경제 사항에 따라 본인 부담 비용을 납부하게 된다. 그 외 개인 의복이나 미용, 영양제 등은 개인 부담이 된다. 매월 나오는 연금으로 입소비를 내고 개인 기호품을 구매할 정도면 족하다. 물론 대부분의 자녀들이 상속이 없어도 부양을 잘 하고 있다. 하지만 간혹 상속 받고 최소한의 입소비만 겨우 내고 돌보지 않는 경우도 있다.
9. 어떤 때는 연금도 사용하지 못하는 돈이 되는 경우도 있다. 백세가 넘은 어떤 어르신은 가까운 가족이 없어 동생의 손자가 보호자로 되어 있다. 어르신 앞으로 매달 연금이 나오지만 어르신은 그 돈을 사용할 수 없다. 어르신은 가족이 없어서 입소비도 면제된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진짜 돈이 통장에 쌓여가지만 변변한 외출복 하나 없다. 얼마 전에는 영양제와 유산균을 드시고 싶다고 했지만 손자는 바쁘다는 이유로 얼굴 한번 보지를 못했다.
10. 진짜 돈이 있어도 사용하지 못한다면 가짜 돈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삶의 질을 유지하는 데는 진짜 돈이 필요하다. 백세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극복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장수 시대 만일 치매가 오더라도 삶의 질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길 기도해 본다.
4. 사람과 양심 - 민창현 5
1.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매일 쏟아져 나오는 기사가 모두 사람에 대한 것들이다. 만나서 하는 대화도 사람이 빠지지 않는다. 세상이란 게 사람들이 모여서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곳이니 당연한 이야기겠다.
2. 평소 사람이란 단어가 특별하게 와닿지 않은 이유다. 이처럼 매일 접하는 '사람'이란 단어가 요즘같이 크게 다가온 적이 없다. 테오도르 제리코의 그림 '메두사 호의 뗏목'을 보고나서다.
3. 사람은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이라고 한다. 생각, 언어, 도구, 사회. 이들 단어들이야말로 사람을 잘 설명하는 말이다. 이들 중 일부를 특성으로 가지고 있는 동물도 있지만 모두를 가진 것은 사람밖에 없다.
4. 이외에 무엇인가 더 추가되어야 한다면 어떤 것이어야 더 사람답다고 할까. 양심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양심이 있어야 한다. 양심이란 무엇인가.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을 말한다.
5. 어떤 상황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양심이라는 도덕적 규범과 인간의 본연의 욕망이 함께 투쟁한다. 어느 쪽이 우세한가에 따라 행동이 결정되고 그 결과에 대해 양심이 있다 없다고 이야기 한다.
6. 물질적으로 모든 게 풍족하고, 시간적으로 넉넉하다면 유치원에서 배운 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내 것을 마음껏 나누고 양보하고 도우며 여유있게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7. 만일, 이런 상황이 사라지고 정반대의 극한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면 사람들의 행동이 어떻게 변할까. 극단적인 예이지만 망망대해에서 배가 난파하여 먹을 것도 얼마 없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지극히 불안한 상황이 된다면 말이다.
8.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인간이 행동했는가에 대한 몇 가지 실 사례가 있다. 하나는 테오도르 제리코의 그림 '메두사 호의 뗏목'으로 더 이름이 난 사건이다. 프랑스 해군 전함 메두사 호는 1816.7.2일 모리타니 해안에서 풍랑으로 좌초되어 난파된다. 선원 중 150여 명이 급조한 뗏목을 타고 탈출한다.
9. 뗏목과 연결한 구명보트에 타고 있던 선장은 뗏목 때문에 위험을 느끼고 연결 줄을 끊어버려 뗏목은 표류하게 된다. 표류 13일 만에 아르고스 호에 의해 구조되는데 살아남은 사람은 15명뿐이었다. 이들은 인육을 먹으며 연명했다.
10. 여기서 우리의 양심은 두 가지를 만난다. 첫째는 혼자 살기 위해 밧줄을 끊어 수많은 사람을 처참하게 죽도록 만든 선장의 행위다. 선장 쇼마르는 귀국해서도 왕의 친분을 이용해서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이에 대해서는 대부분 사람들은 선장의 행위는 양심에 반하는 행위라고 별 의심 없이 생각할 것이다.
11. 둘째는 인육을 섭취한 것에 대해서이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면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살기를 원한다. 인간의 본질적인 삶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이 사건에서 죽은 자의 것만 먹었는지 산 자의 것도 포함되었는지는 명확지 않으나 만일 죽은 자의 것만이라면 어떻게 생각이 될까. 생명의 연장을 위한 선택지가 없는 부득이한 선택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양심으로 재단할 상황은 아니지 않는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12. 그렇다면 이 경우는 어떻게 생각되어야 할까. 우리가 잘 아는 소설 '모비딕'의 소재가 된 포경선 에식스 후와 향유고래 모카딕에 대한 실화다. 에식스 오는 1819.8.12일 당시 미국의 포경 전진 기지인 넨터킷을 출발한다. 출항 석달 뒤 고래떼를 발견하나 고래가 일등항해사 체이스의 보트를 산산조각 내어 버린다.
13. 나흘 뒤 향유고래 떼를 발견하고 작살을 꽂는데 작살 맞은 향유고래가 꼬리치는 바람에 보트가 손상된다. 모선인 에식스 호로 돌아와 수리를 하던 중 거대한 향유고래가 에식스를 들이받아 배는 침몰한다.
14. 탈출한 스무 명의 선원들은 한 달 후에 무인도인 핸더슨 섬에 도착하나 물과 식량의 고갈로 일주일 후 보트 세 개로 나눠타고 다시 출발한다. 일주일이 더 지나자 굶주린 선원들이 하나 둘 죽어 나간다. 중순부터 식량이 떨어지자 생존자들은 누가 희생자가 될 것인지 제비를 뽑아 인육을 먹는다.
15. 생존에 대한 기본적인 욕망은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뛰어넘게 한다. 하지만 극한 상황에서도 타이태닉호 침몰 시 살신성인한 많은 신사들처럼 양심을 잃지 않는 모습이 바로 우리가 원하는 사람다움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