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우리역사의 비밀의 문무님의 글 입니다.) 고려사 및 왕조실록 및 고려 말 또는 근대조선 시대 유학자님들의 글 모음을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많습니다. 초등학교시절부터 국사과목에서부터 시작한 반도의 옛 선대의 역사 얘기는 오십 여년이 지난 지금도 반도에 있었다고 똑 같은 이야기를 가르치고, 배우고 있습니다. 단 한 번의 의심도 하지 않았고, 외침은 수없이 당했지만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으로써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수천 년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단일민족으로, 백의민족으로 이어져 왔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쫑긋 세우고 졸음을 참아가며 배웠습니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여러 세대들은 지금도 그 가르침에 당당한 자랑스러움에 어깨를 세우고 목에 힘을 주며, 외칠 것입니다. 어느 날 수학여행이라는 설레 임에 백제의 고도 “부여”를 갖다오고서부터 어린 마음은 고민에 휩싸였습니다. 600 년, 700 년을 한결같이 이어져 왔다는 백제의 왕도였다는 <부여>가 왜 이리도 초라한 것인가 ? 초라하지 못해 안스러울 정도였으니 당시에 받은 충격은 쾌 컷던 모양이었습니다. 경주 ! 그 찬란한 천년의 고도 ! 경주가 1945년 해방 후의 모습은 조그마한 읍 정도도 안 되었다니......... 분명히 고려 때도 삼경 또는 오경중의 하나였으며 근대조선 시대 역시 찬란한 옛 역사를 자랑했다는 천년 고도 경주 .......... ! 삼국을 통일하고, 그 유명한 김유신 장군을 배우고, 외교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는 김춘추.......천년을 이어온 왕도가 왜 이리도 촌스럽다 못해 폐허와 무엇이 다른가. 그 유명한 박혁거세로부터 경순왕까지 수많은 왕들, 태자 및 왕자 그리고 공주, 그 이하 문무대신, 지방장관들........ 아마도 천년을 이어온 신라 땅 어디든지 삽질 몇 번만 하면 찬란한 유물에 농사지을 땅도 없으리라. 왕의 그 가족과 수비대 및 서울(왕도 즉 경주)의 수많은 백성들이 천년을 이어 살았을 텐데 그들은 다 어디에서 살았을까. 왕궁은 어디에 있으며, 성곽은 어디에 있었을까. 백만 명이 넘게 살았다는 천년고도 경주! 일천여 년이 지난 현재 2006. 4. 14일 현재의 경주 인구는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 ? 그 수많은 높으신 왕들의, 공주의, 문무 대신들의 묘지 및 왕릉은 다 어디에 있길레 몇 기의 왕릉만이 보존되고 있는 것일까 .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나...........하늘의 운수를 다해 경순왕을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신라를 보면서 느끼는 마음은 한마디로 “사기 당한 기분”이었습니다. (1) 高麗史43卷-世家43-恭愍王 右丞相汪廣洋又致書曰: " 因元政不綱群雄 起各擁兵衆分據土疆. 我聖上乘時啓運奮興⋆淮右肇基江左命將四征削平群雄. 陳友諒竊據湖湘妄稱大漢明貞據有川蜀僭號大夏. 是以,聖上統御六師親臨湖廣. 其陳氏勢窮力屈率衆就降. 去年春命中山侯穎川侯等摠率師旅水陸 進直川蜀. 明氏力不能* {支}* {銜}璧請命. 皆已欽蒙聖恩特加赦宥保全其生然揆之以理不可使久處京師,今令各將家屬,往王國閑居,如可則留之,其不可則仍發廻還! 尙冀裁度." * 冀기는 王畿왕기=京畿경기를 뜻한다. ------------------------------------------------------------------------------------ 高麗史43卷-世家43-恭愍王6-21-37-1372 乙丑陳理明昇等男婦共二十七人入京. 理昇詣闕. 王出御報平廳. 理昇拜于階上王坐受之. 禮訖坐於使臣之下. 昇年十八,理年二十二. ▲ 이 기록의 “明昇명승”은 대륙 사천성에서 “大夏대하”를 건국한 명옥진의 아들이다. 주원장이 이를 토벌하고 이들을 고려로 보냈다는 것이다. 물론 “明史명사”의 기록에도 있다. 과연 고려와 주원장의 관계는 무엇인가 ? 다음 기록에는 명승을 고려에서 중신의 딸과 혼인까지 시킨다는 것이다. 즉 ▲ (高麗史44卷-世家44-恭愍王7)에 “辛卯明昇娶摠郞尹熙宗女. 王賜米四十石布一千匹”. (明史,列傳第十一, 陳友諒 張士誠 方國珍 明玉珍편을 보면 “陳友諒진우량”편을 보면 “洪武五年,理及歸義侯明升並徙高麗” 이라 했고, 明玉珍명옥진편을 보면 (중략) “明年徙升於高麗”。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주원장은 진우량의 아들 및 명옥진의 아들(황제를 칭)과 그 휘하 가족들을 모두 고려로 보내 살도록 했으며, 고려 조정에서는 그 아들에게 대신의 딸과 혼인케 하여 잘 살 수 있도록 해줬다는 말이다. 명사 본기를 보자. 四年(홍무). 秋七月辛亥 , 徐 達 練 兵 山 西 。辛 酉 ,傅 友 德 下 成 都 ,四 川 平 。乙 丑 ,⋆明 昇 至 京 師 ,封 歸 義 侯 라 했고, “五 年 春 正 月 乙 丑 ,徙 陳 理 、明 昇 於 高 麗” 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명승은 경사에 이르렀다. 귀의후에 봉하여 졌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글에서 “경사”란 어느 나라의 경사였는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2) 高麗史134卷-列傳47-辛禑2 七月以張夏爲各道山城巡審使我太祖以門下贊成事爲東北面都指揮使時胡拔都虜掠東北面人民而去以太祖世管其道軍務威信素著遣以慰撫.帝平定雲南發遣梁王家屬安置濟州. 禑遣密直司使柳藩如 京師賀表曰: "大春秋之一統運啓中邦整雷霆之六師威加南極捷音遠播喜氣旁騰. 竊以虞書載有苗之征漢史記交趾之擊盖其執迷而干紀故乃聲罪而致討 爾雲南濱於海 妄謂險遠之足恃敢肆跳梁而不恭爰出睿謀偉矣萬全之擧克平 俗赫然一怒而安息馬投戈超今邁古玆盖陛下重華 德光武同符. 告厥成功混車書 宇之內屈此群醜置 虜海島之中是宜 之消益慰神人之望. 伏念臣幸逢昭代欣聞凱歌攝政釐東雖阻駿奔之列陳詩美上聊申燕賀之誠." ▶ 상기의 “梁王양왕”은 “파잡라와이밀”이며, 원의 세조(쿠빌라이)의 五子로써 雲南王운남왕 “홀가치”의 후손으로 "양왕“에 봉해졌던 인물이다. 이해하기 힘든 이 사건은 고려사에는 고려군이 운남지역을 정벌하고 그곳을 통치하던 ”양왕 및 그 가솔“들을 포로로 잡아 고려 땅인 ”제주“에 안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明史에서는 홍무14년12월 壬 申 ,元 梁 王 把 匝 剌 瓦 爾 密 走 普 寧 自 殺 。이라 기록하여 원의 ”양왕“이 ”보녕현“으로 도주했다가 자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기록이 진실인 것인가. (3)고려사절요. 성종 임오 원년(982)........ (중략) 於是,値金雞自滅之期,乘丙鹿再興之運,不離鄕井,便作闕庭,定遼浿之驚波,得秦韓之舊地,十有九載,統一寰瀛,可謂功莫高矣(중략). 이에 금계(金鷄 신라)가 스스로 멸망하는 시기를 만나고 병록 (丙鹿 려(麗))이 다시 일어나는 운수를 타서 향리(鄕里 송악(松岳))를 떠나지 않고 문득 그대로 대궐이 되어, 요수ㆍ패수[遼, 浿]의 놀란 물결을 안정시키고 진한(秦韓 진한(辰韓))의 옛 땅을 얻어서 19년 만에 천하를 통일하였으니 이보다 높은 공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이렇게 최승로는 성종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말하고 있는데 한반도에서는 참으로 이해키 어려운 구절이 있습니다. ① <요수 및 패수의 놀란 물결을 안정시키고> ; 현재 한국의 사학자님들의 해설대로라면 한반도 개경에 황도를 둔 고려에서 볼 때에 <대동강과 한강, 또는 압록강 등의 놀란 물결을 안정시키고>, 이렇게 기록해야 정상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당시의 사정이 다르다 할지라도 당시의 요수는 고려의 강역이 될 수 없었음에도 굳이 <요수와 패수의 놀란 물결을 안정시키고>라는 문구를 황제에게 올리는 상소문에 썼다는 것은 당시의 요수와 패수가 고려의 강역 안에 있었으며, 그만큼 고려 또는 대외적으로 상징적인 하천이었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현재의 요녕성 요수를 옛 요수 또는 요하라 했을 때 그곳을 언제 누구에게 빼앗겼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입니다. 고려가 삼한의 옛 땅을 모두 거둬 <삼한 통일>을 이뤘다는 기록이 있지만 “요수지역”을 잃어버렸다는 기록은 없다는 점입니다. 다른 이들을 비난하고 싶은 의도는 아니지만 모 싸이트에 들어가 봤더니 요하를 압록강이라 하고 그 위치를 발해만으로 유입되는 요수=요하에 비정하고 고구려에 대한 여러 지명을 그 주위에 고정시켜 열심히 설명하는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열성적인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문제는 요수 또는 요하, 패수등은 수경주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 수경주에 기록되어 있는 하천은 대륙 중원의 것을 설명한 것이지 당시에 존재치도 않았던 요녕성의 요수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대륙 중원의 물줄기를 설명한 것이지 동북삼성 지역의 물줄기를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대륙의 요수, 또는 요하 및 패수등은 중원대륙의 것이 따로 존재하고, 조선의 역사 해설에서만 이용되는 요수 또는 요하, 패수가 따로 따로 존재했다는 말인데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웃기는 얘기지요. 요수 또는 요하를 요녕성에 있다고 한다면 사기 및 한서, 후한서를 위시한 대륙의 역사서를 편찬한 사가들은 사기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역사서라는 삼국사기를 비롯해 여러 역사서의 내용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대륙 사서 어디에 요수 또는 요하가 요녕성에 있었다고 했는가. 또한 반대로 대륙사서의 기록은 요수 또는 요하는 중원의 서북방지대에 있었다고 했다. 원전을 비난하기 앞서 자신의 역사 지식이 모자람을 한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주장과 다르다 하여 삼국사기의 저자를 사대주의자로 몰아붙이는 이런 행위는 절대 옳지 않다고 봅니다. (현재의 우리가 고정관념의 틀 속에 빠져, 세뇌되어 그 내용을 이해 못하는 것을 7,8 백년전의 저자를 욕한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역사 인식이 교육이라는 틀 속에 억매여 일제시대로 부터 지금까지 반도내의 조선에 관한 것만 배우고, 가르친 결과가 조선의 , 우리 자신들의 옛 선조들을 비난하는 결과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삼국사기 원전의 내용이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내용과 똑 같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으며, 삼국사기 내용을 보면 그 내용을 전개하는 곳이 반도 내라는 그 어떤 한정적인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그 원전의 내용을 해설하는 해설자들의 입맛에 따라 다르게 하다 보니 엉뚱하게도 저자가 욕을 먹고 있는 형편입니다. ② 위의 기록에서 <得秦韓之舊地 : 진한의 옛 땅을 얻었다>는 내용을 보자. 한반도에서 태조 왕건은 신라 땅 즉 진한(辰韓) 땅을 얻었지 그 땅이 진한(秦韓: 秦은 진시황제의 진나라) 땅일 수는 없다. 대륙사서의 진한(辰韓)에 대한 기록은 이 진한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그 어떤 기록도 없습니다. 문제는 사가들이 진한에 대해 해설를 할 때 원전과 다르게 반도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원전과 다르게 반도의 동남부에 있다고 할까, 그것은 식민사관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사학자들이 현 열도를 천황의 위대한 제국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신라를 그 근거인양 고증(증거)인양 끌어들인 것입니다. 만약에 반도 동남부 지방에 신라가 없었다면 열도의 2,600년 황기의 역사는 조작극이라는 사실이 백일하에 들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본의 학자들은 그 어떤 일이 있다 하더라도 신라가 반도의 동남부에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21세기 현재의 일본은 열도에 있습니다. 그러나 옛 역사서에 기록되어진 “왜” 및 “일본”은 지금의 열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가들이 무엇 때문에 진한(辰韓)를 구태여 진한(秦韓)이라 했겠습니까. 옛 역사서를 편찬하는 사가들이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 했을 때는 걸 맞는 이유와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며, 사가들이 장난삼아 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결론을 도출한다면 진한(秦韓)은 시황제의 후국(後國)이라는 것입니다. 즉 6국을 멸하고 통일을 하였지만 수십 년 후에 다시 이들에 의해 진(秦)나라는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왕족 및 여타 진인(秦人)들이 보복을, 난을 피해 이리 저리로 이동하며 살아가게 되었으며, 이는 곧 진한으로 변천되는 과정의 일부분인 것입니다. 이러한 진한은 결코 반도의 동남부에 없었다는 것이 올바른 역사 인식입니다.(전회에 설명한 신라의 옛 기록을 참고하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③ 또한 <統一寰瀛>이라는 내용을 보자. 寰은 畿內(기내)지역을 의미하는 “기내(畿內)환”자다. 즉 옛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영지를 말하는 것이다. 기내 지역 및 큰 대해(사방의 광활한 땅) 즉 천하를 통일했다는 말이다. 한반도 어느 곳에 천자가 다스리던 “기내지역”이 있었는가 ? 한반도를 통일 했다고 해서 천하를 통일했다고 할 수 있는가 ? 위의 고려사절요는 분명히 근대조선 초에 편찬된 고려에 관한 역사서이다. 이러한 역사서속에 이러한 기록이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인 것이다. (4) 성종. 을유 4년(985)............① 幽薊之地,中朝土疆,晉漢多故,戎醜盜據........유주(幽州)ㆍ계구(薊丘)의 땅은 중국의 영토인데 후진(後晉)ㆍ후한(後漢) 때 변고가 많아서 융적(戎狄 거란)이 빼앗아 점거하게 되었다. ▲ 위의 기록을 믿는다면 유주와 계(어양)의 땅은 중조(中朝 : 중국 : 중앙의 나라 : 중원지역의 왕조)의 땅이라는 얘기다. 유주지방에 요동도 포함되었으며, 이곳은 주무왕 <발>이 상(은)을 멸하고 <기자>를 조선의 영토에 조선왕으로 봉한 <조선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유주는 그 후대에 고구려와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왔으며, 그 위치가 현 하북성 동쪽지방을 말한다고 현재의 역사학자들은 해설을 하고 있으나, 옛 역사서 원전을 들여다보면 하북성 및 그 동쪽지방과는 전혀 관계없는 중원의 북방 지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발해지역에 유주도 포함되며, 그 발해지역은 북해의 남쪽지대를 말하는 것이며, 유주의 상곡군은 섬서성 서북 황하의 북쪽지대 내몽고 오원의 북쪽에 있었다는 옛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옛 자치통감이나 두우의 통전 및 한서 및 후한서등 여타 사서를 능가하는 그 어떤 옛 기록도 없다. 따라서 옛 기록은 유주 또는 상곡군 및 요동지방은 섬서 서북방 지대 및 북부지대의 황하 남,북안지대와 황하의 동, 서안 지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곳에 있던 유주 및 계지역을 거란(요)들이 빼앗아 그곳에서 거주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거란의 발흥지는 동북삼성 지역이 아니라 바로 이 황하의 서북안지대로부터 시작(발흥지를 말함)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거란 즉 요는 여진의 금에 의해 무너지고, 그 나머지 무리들은 그들의 고향인 신강성 지역으로 도망을 가 그곳에서 거주하며 지냈는데 후세에 사가들은 이들을 가리켜 “흑요”라 했다). 이러한 이들을 동북삼성 지역에서 시원한다 고 하는 역사 해설은 식민사관과 황국사관의 시발점에서 역사를 해설하는 것이며, 현 대륙의 민족사관과 결합해서 만들어낸 작품(소설)이라는 것이다. (현 중국이나 일본의 학자들이야 자신들의 국가를 위해서 그런다지만 대한민국의 훌륭하신 사가님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들과 함께 어울려 역사 아닌 소설을 쓰고 계시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무슨 영광을 누려 보려고, 어떤 권력을 갖고 싶어서 이러하시는지 도무지 그 속내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제 식민지 시절을, 광복후 육십년, 국사 교육을 가르친 지 칠, 팔십년이면 욕심을 차릴 만큼 차렸을 텐데.... 이러함에도 21세기 오늘까지도 대한민국은 일제 식민지 생활 연속의 역사교육을 받고 있으니 이 어찌된 일입니까. 그들의 단결력과 권력과 밀착하여 행세하는 그 접착력은 “순간접착제”보다도 더 강력하여 떨어질 줄 모르니..... 책임은 국민 개개인에게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최고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있다고 해야 될 것인가. 아니면 민족 전체 구성원에게 있다고 해야 될 것인가. ② <先是,契丹,伐女眞,路由我境,女眞,謂我,導敵搆禍, 貢馬于宋,因誣譖高麗,與契丹,倚爲勢援,摽掠生口> : 이보다 전에 거란이 여진을 칠 때, 지나는 길이 우리(我)국경을 경유하기 때문에 여진은 우리가 적(거란)을 통하게 하여 불행을 만들었다고 이해를 할 수 없다며. 송 나라에 말을 바치고 이어 상소(무고)하기를, "고려가 거란과 함께 서로 성원하며 백성을 약탈한다." 하였다. ▲ (위의 기록은 고려가 대륙에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단서를 갖고 있는 글귀이다). 고려가 현재의 반도 개성에 황도를 두고, 압록강을 경계로 또는 요녕성 및 길림성 일부를 강역으로 했다 하더라도 위의 기록은 반도 고려의 입장에서는 너무 황당한 내용이다. 여진이 강성해 지기 시작하자 요(거란)에서는 군사를 보내 여러 차례에 걸쳐 여진을 쳤다. 이 때의 상황이다. 문제는 요(거란)가 여진을 치려면 당연히 여진의 땅으로 출정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런데 여진의 땅을 가려면 “고려의 땅”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보면 여진이 거란 즉 요로 가려 해도 “고려의 땅”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고려가 대륙의 중원의 서북방지역 및 북방지역을 걸터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위의 글에서 요(거란)가 중원의 서북지대에 있었다고 설명을 했으니 여진 역시 이 주위에 있었으며, 고려의 강역이 이들과의 국경 지대에 맞물려 있었다는 얘기다. 후대에 몽고의 징기스칸이 “금(여진)을 정복키 위해 육반 산맥(녕하성을 남북으로 걸쳐있는 산맥이며, 주봉은 육반산으로 해발 3,500m이다)을 넘어오다가 병으로 죽었다,” 는 역사적인 사건을 상기 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금 즉 여진의 왕도가 현재의 해설대로 동북삼성 지역 또는 하북성이나 산서성쯤에 있었다고 한다면 몽고의 징기스칸이 그 험하고 험한 육반산맥을 넘어 금(여진)을 치려했을까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아래의 설명은 <네이버> 백과사전의 설명이다. 【<롱산[山]산맥이라고도 한다. 진령[秦嶺]산맥의 일부로 주봉은 륭덕[隆德] 북동쪽 16km 지점에 위치하는 육반산(3,500m)이다. 해발고도3,000m를 넘는 능선이 길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관중[關中], 즉 위수[渭水] 분지를 서역(西域)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막는 자연의 장벽으로 중요시되어 왔으며, 1227년에 칭기즈칸이 금(金)나라를 정복하러 나섰다가 이 산록에서 병사하고, 1258년에 송(宋)나라의 군대가 원(元)나라 헌종(憲宗)의 군대를 이곳에서 요격하다가 패배한 역사적 고사가 있다. 근년에 이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청수하[淸水河]의 개발을 추진하여, 심가하[沈家河]댐을 건설하였다 】 이럴진대 어떻게 고려가 한반도에 있으면서 거란과 여진의 국경과 맞물려 있어 길을 빌려 줄 수 있었을까. 이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본시 고려의 강역은 반도가 아니다” 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이때 송나라의 강역에 대한 것은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본문을 보면 “유주 및 계주의 땅은 중조(中朝)의 영토인데” 라고 했다. 중조란 중앙조정이란 말이다. 국가의 이름으로 중국이란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이 <중조>의 의미는 무엇일까. 고려 사절요에서 말하는 <중조>는 바로 중앙조정으로서 관내도 및 왕기천리를 통치하던 중앙의 왕국을 말하는 것이 된다. 이는 결코 국가의 이름으로 <중국>이란 명칭은 존재치 않으며, 어떤 기록에도 존재치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의 틀을 다시 짜야 한다는 말이다. ③ <況契丹,介居遼海之外,復有二河之阻,無路可從(중략)> : 더구나 거란은 요해(遼海) 밖에 끼어 살며 또 두 하수(河水)에 가로막혀 있으므로 서로 왕래 길이 없는데다가(중략). ▲ (요(거란)는 요해 밖에 끼여(介) 거하고 있으며) 에서 우리는 그동안 통상적으로 遼海(요해)하면 요녕성과 요수를 떠 올린다. 이렇게 교육이란 무서운 것이다. 나뿐 의미로 본다면 “세뇌”다. 遼는 <멀 요)자다. 또한 2 개의 하수(河水)에 가로 막혀 있다(阻)를 보자. 두 개의 河는 어디에 있는 것을 말함인가. 첫 번째는 당연히 河水(황하)다. 둘째는 임황수(臨潢水)를 말한다. 현재의 해설대로 동북삼성 지역 요녕성의 요수와 혼하 사이라는 해설을 위치를 바꿔 섬서 서북방 요수(요하=황하)와 그 요수(황하)의 지류인 황수로 한다면 딱 들어맞는 얘기다. 이것은 요사(遼史) 지리지 오경도편을 보면 된다. (5) 성종 신묘 10년(991).........逐鴨綠江外女眞於白頭山外,居之 ........압록강 밖의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내쫓아 그곳에 살게 하였다. ▲ 위의 설명을 보면 ; 압록강 외, 백두산 외라는 것은 이해키 어려운 말이다. 즉 압록강 밖에서 사는 여진을 내 쫐아(逐), 백두산 밖으로 나가 살게 했다는 말인데, 이게 웃기는 말인 것이 압록강은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서남 방향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따라서 우리는 그동안 이 강을 경계로 하여 반도와 중국의 국경선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압록강 밖은 중국 땅이요, 백두산 밖은 중국 땅이다.(현재의 역사 해설로 보면). 그렇다면 압록강 밖 즉 서쪽에 거주하던 여진을 천 여리 동북쪽 백두산 밖으로 내쳤다는 얘기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기록은 안한 만도 못한 것이다. 현 역사 해설을 봤을 때는, 그러나 옛 기록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압록강 및 백두산>이 한곳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압록강 밖의 여진을 쫐아 내어 더 멀리 북쪽에 있던 백두산 밖에서 살수 있도록 해줬다는 것이다. (6) 현종.기미10년(1019)..........徙江南州縣丁戶,以實象山,伊川,遂安,新恩,峽溪,牛峯等縣.........강남(江南) 주ㆍ현의 정호(丁戶)를 옮겨 상산현(象山縣)ㆍ이천현(伊川縣 강원 이천)ㆍ수안현(遂安縣)ㆍ신은현(新恩縣)ㆍ협계현(峽溪縣)ㆍ우봉현(牛峯縣 황해 금천(金川)) 등에 채웠다. 위의 기록은 분명히 반도에서 오백년 가까운 긴 세월의 왕조를 영위했다는 고려의 역사 기록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반도 내에 어느 지역이 <강남지역>이란 말인가. 압록강의 남쪽도 강의 남쪽이요, 대동강 남쪽도 강의 남쪽이며, 임진강의 남쪽도 강의 남쪽이며, 한강의 남쪽도 강의 남쪽지방이다. 그렇다면 <강남>은 어느 지역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본인은 여기서 <강남>이란 양자강 남쪽지대에 살고 있던 주. 현의 정호들을 다른 주. 현으로 옮겼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7) 현종. 병인 17년(1026).........契丹,遣使院判官耶律骨打,來請假途,將如東北女眞不許。 거란이 어원판관(御院判官) 야율골타(耶律骨打)를 보내와서, 길을 빌려 장차 동북 여진으로 가기를 청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 동북삼성 및 하북성 또는 그 서쪽지역에 있었다는 거란이 동북쪽으로 진군하는 데에 고려가 길을 막고 있었다면 고려의 영토는 동북삼성 지역의 북부지방까지도 고려의 영토였다는 의미다. 그러나 거란이 동북삼성 또는 하북성 쯤에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해설자들이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뿐이다. 거란과 중국과의 경계지역은 중원의 서북방 지대이며, 대륙에 고려가 중원의 북부지대에 걸터앉아 있었기 때문에 동북으로 나아가려면 고려의 허락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고려를 한반도에 놓고 그 어떠한 명분을 내세워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8) 현종, 기사 20년(1029)...........以朔方道登溟州管內十九縣,竝被蕃賊侵擾,特蠲租賦.......삭방도(朔方道)의 등주(登州 함남 안변(安邊))ㆍ명주(溟州 강원 강릉(江陵)) 관내 19현이 모두 번적(蕃賊)의 침략을 당했으므로 특별히 조(租)와 부역을 감면하였다. ▲ <한족은 소수민족을 가리키는데 일찍이 번(蕃)에 포위되어 소멸되었다>라는 구절에서 <번蕃>이란 중국(중원=장안 또는 낙양)을 둘러싸고 있는 사이(四夷)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기록을 위의 고려사절요 기록과 대입해 보면 고려가 바로 중국이었다는 결론밖에 그 어떤 결론도 나올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고려가 바로 <중국>이었으므로 주위의 四夷사이를 호칭하는 <蕃賊번적)이라는 용어를 쓸 수가 있는 것이지. 한반도에 있었다는 고려 스스로 <번蕃>이기 때문에 이런 기록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고려가 중국이었을 때는 <번적>이란 말을 쓸 수가 있다. (사이는 동이, 남만, 북융, 서융을 가리킵니다) (9) 命參知政事李可道,左僕射異膺甫,御史大夫皇甫兪義,尙書左丞黃周亮,徵丁夫二十三萬八千九百三十八人,工匠八千四百五十人,築開京羅城,先是,平章事姜邯贊,以京都無城郭,請築之,可道初定城基,令人持傘環立,登高而進退之,均其闊狹,周一萬六百六十步,高二十七尺,廊屋四千九百一十間。 참지정사 이가도(李可道)ㆍ좌복야 이응보(異膺甫)ㆍ어사대부 황보유의(皇甫兪義)ㆍ상서좌승(尙書左丞) 황주량(黃周亮)에게 명하여 정부(丁夫) 23만 8천 9백 38명과 공장(工匠) 8천 4백 50명을 징발하여 개경(開京)의 나성(羅城 성의 외곽 또는 외성(外城))을 쌓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평장사 강감찬이, 서울에 성곽이 없기 때문에 성곽을 쌓도록 청하였다. 이가도가 처음에 성 터를 정해 놓고 사람을 시켜 일산을 들고 빙 둘러서게 하고는 자기가 높은 데 올라서, 둘러선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기도 하고 뒤로 물러가게 하기도 하여 그 넓이를 고르게 하니 둘레가 1만 6백 60보이고 높이가 27척이며, 낭옥(廊屋)이 4천 9백 10칸이었다. ▲ 고려가 반도에 있었다고 했을 때 위의 기록을 보고 생각해 보자. 황도의 <나성>을 쌓는데 장정 238,938명을 동원했으며, 기술자 8,450명을 징발하였다고 한다면 고려의 인구는 얼마였겠는가를 상상해 보라는 것이다. <고려도경>을 보면 군졸이 600,000명 이었다고 했다. 이러한 옛 기록을 보면 고려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그 몇 배의 강역과 인구를 가지고 있었던 대국이었다는 것이다. 나성의 둘레가 10,660 보였다면 간단히 계산해서 1보가 1m로 계산해도 10,660m이다. 이는 11km라는 애기다. 또한 높이가 27척이라면 5.5m라는 애기며, 낭옥(넓은 복도 또는 행랑채)이 4,910칸이었다는 것이다 (1보가 1m라는 것은 쉽게 이해키 위해 사용하였음). 상상해 보자. 위의 둘레 및 성의 높이 등을...........이렇게 엄청난 성곽이 한반도 개경에 있었다고 했을 때, 그 개경 즉 고려의 황도는 근대조선이 개국하고 나서야 황도로써의 기능이 폐지되었다. 결국 현재로부터 600년 전만 하더라도 한반도 개성에는 어마어마한 황성이 있었으며, 내성 및 외성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후에 병란 및 여타 사건들로 말미암아 축소되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엄청난 규모의 유적은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근대조선시대의 대규모 전쟁사는 호란과 임란이 있을 뿐인데, 호 및 왜의 목적이 조선에 쳐들어 와서 옛 고려의 궁전을 파괴하는 것이었다면 몰라도 그들의 목적이 조선을 굴복시키기 위한 침략이었다면 전쟁 속에 방화, 약탈등은 기본적인 침략행위 속에 수반되는 피해이지만 성을 파괴하고 그 주춧돌을 본국으로 가져갔을 리는 만무한 것이다. 설사 황궁은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하자. 그러나 그 엄청난 규모의 성곽 및 유적은 지금 어디에서 낮잠을 자고 있어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기록에만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다른 나라의 옛 왕조시대의 건축물 등은 지금도 그 위용을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데 반도내의 옛 왕조들의 건축물만이 병란으로,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하면서 기록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병란으로 치면 대륙은 단 일 년도 적의 침입이 없었던 적이 없다. 이러함에도 옛 왕조들의 수많은 유적들은 다 무엇인가. 이 모두가 19세기, 20세기 초에 모조품으로 만들어낸 것인가. 반도내의 유물, 유적은 어떤 이유와 명분을 내세운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이한 것들 뿐이다. 이러함에도 반도 내에서 수천 년 찬란한 조선의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 (10) 문종. 경인 4년(1050)............中書省奏曰,關內潟,州,縣,前歲不登,民有飢色,請發司倉,公廨粟,以助耕耘,其貧不能自存者,發義倉,以賑,從之。 중서성이 아뢰기를, "관내(關內) 서도(潟)의 주ㆍ현은 지난해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니, 사창(司倉) 공해(公廨)의 곡식을 풀어서 농사 짓는 양민을 도와주고 가난하여 능히 자활할 수 없는 사람은 의창을 열어 구제해 주소서." 하니, 따랐다. ▲ 관내도라면 지금의 한반도 평양지방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이 현 사학계의 역사 해설이다. 그러나 위의 기록을 보자. 관내도에서 <서도의 주, 현>을 말하고 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반도의 관내도 위치에서 <서도>라면 설마하니, 대동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 즉 바다 속에 <관내 서도>도 있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평양 북쪽지방을 <서도>라 했다면 이 또한 조상을 욕보이는 무식한 자들이다. (11) 문종. 정유 11년(1057)..........三月,契丹,遣天德軍節度使蕭繼從,左千牛衛大將軍王守拙,來冊王,爲兼尙書令,加食邑五千戶,食實封二百戶,幷賜冠服,車輅,銀器,匹段,鞍馬,弓箭等物,王,率百官,受冊于南郊,又遣利州管內觀察使蕭素,司農卿紫德滋,來,冊王太子,爲順義軍節度使,朔武等州觀察處置等使,崇祿大夫,檢校太尉同中書門下平章事,使持節朔州諸軍事,行朔州刺史,上柱國,三韓國公,食邑三千戶,食實封五百戶,太子,率宮官百僚,詣南郊,受冊,王,潛幸觀禮。 3월에 거란이 천덕군절도사(天德軍節度使) 소계종(蕭繼從)과 좌천우위대장군(左千牛衛大將軍) 왕수졸(王守拙)을 보내와 왕을 겸상서령(兼尙書令)으로 책봉하고 식읍 5천호 식실봉 2백호를 더 주며, 또한 관복과 거로(車輅)ㆍ은그릇ㆍ비단ㆍ안마(鞍馬)와 활ㆍ화살 등의 물건을 아울러 하사하니,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남교(南郊)에서 책봉을 받았다. 또 이주관내관찰사(利州管內觀察使) 소소(蕭素)와 사농경(司農卿) 시덕자(柴德滋)를 보내와 왕태자를 순의군절도사 삭무등주관 찰처치등사 숭록대부 검교태위 동중서문하 평장사 사지절삭주제군사 행삭주자사 상주국 삼한국공 식읍 3천호 식실봉 5백호(順義軍節度使朔武等州觀察處置等使崇祿大夫檢校太尉同中書門下平章事使持節朔州諸軍事行朔州刺史上柱國三韓國公食邑三千戶食實封五百戶)로 책봉하였다. 태자가 궁관(宮官 태자궁에 소속된 관원)과 백관을 거느리고 남교에 나아가서 책봉을 받았는데, 왕이 몰래 행차하여 예식을 구경하였다. ▲ 천덕군(天德軍)은 한반도 북부나 동북삼성 지역에 있던 요 즉 거란의 행정 조직이 아니다. <천덕군>은 현 하북성 북경으로부터 서쪽으로 3, 4천리를 가야 하는 내몽고 즉 녕하성 북부지대의 황하 북안에 있던 대동천 및 대동성이 있던 곳을 말한다. 즉 요 태조가 당항족을 파하고 설치한 곳이며, 옛 진나라 장성의 유적이 있는 곳이다. 당나라 때 설치한 중수항성이 있는 곳이다. 아래는 요사 지리지 서경도편이다.(참조) <天 德 軍 , 本 中 受 降 城 。 唐 開 元 中 廢 橫 塞 軍 , 置 天 安 軍 於 大 同 川 。 乾 元 中 改 天 德 軍 , 移 永 濟 柵 , 今 治 是 也。 太 祖 平 党 項 , 遂 破 天 德 , 盡 掠 吏 民 以 東 。 後 置 招 討 司, 漸 成 井 邑 , 乃 以 國 族 為 天 德 軍 節 度 使 。✦有 黃 河 、 黑 山 峪 、 廬 城 、 威 塞 軍 、 秦 長 城 、 唐 長 城 ; 又 有 牟 那 山 , 鉗 耳 觜 城 在 其 北 >。 따라서 이러한 곳에 있던 천덕군 절도사 <소계종>이 고려에 사신으로 올 때는 고려와 거란의 접경지대 및 고려의 황성과 요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천덕군의 남쪽 또는 동쪽 또는 동남쪽 지역에 고려가 있었으니 사절단으로 올수 있는 것이지, 만약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고 황도가 개경이라 했을 때는 천덕군 절도사가 개경까지 사신으로 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이곳은 요 태조가 당항족을 파하고 설치한 곳이라고 할 때, 요태조가 동북삼성 지역에서 시원 한다는 해설은 사기다. 요 태조가 동북삼성 지역에서 시원할 때 그 주위의 부족들을 공격, 복속시키기 위해서 동분서주할 때이며, 그곳으로부터 4 천리 이상 서쪽지역의 당항족을 당시에 파했다는 해설은 언어도단이다. ◈ 금과 고려, 송과의 통로는 하동과 산북이다 부제 ; 고려왕조의 대륙 이야기(제2편) 12) 신해 25년(1071)..............夏四月,西女眞,酋長奴于達等十人,來獻土物各賜職,麻胡達等十八人,來獻土物,加歸德將軍,賜例物。 여름 4월에 서여진 추장 노우달(奴亏達) 등 1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각각 직위를 내려주고, 마호달(麻胡達) 등 18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귀덕 장군으로 올렸으며 전례에 따라 물품을 내려주었다. ▲ 위의 기록으로 보면 <귀덕 장군, 귀의 장군, 유원장군>등 많은 장군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는 고려가 동북면, 서북면의 번족의 추장들에게 내린 것이다. 결국 고려는 황제국 이었으며, 여타 제국들은 제후국이었다는 얘기다. 이것은 고려가 주위의 동북면 및 서북면의 종족들을 “번”이라 했다는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고려는 바로 중국 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 스스로가 <번>인데 같은 <번>끼리 관작을 올려주고, 허락할 아무런 권한도,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13) 인종. 무신 6년(1128)............貴國,又恐金人,亦由此遣使,然金人,自破契丹後,皆由河東山北,通使必不由此而來..............(중략. 고려사절요 참조) ▲ 위의 기록은 ㉮ 송에서 고려왕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과 ㉯ 고려왕이 송에게 보낸 답서의 내용이다. 이곳에는 고려 한반도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이때의 상황은 금에 의해 북송의 두 황제가 끌려갔다. 이에 송은 장강 하류로 천도하고 새로운 남송시대를 열은 바로 그 때의 정황이다. 송에서는 뱃길로 금에 있는 두 왕을 데려 올수 있도록 고려에게 요청하는 글이며, 전에 송에서 고려에게 길을 빌려 달라는 요청에 고려가 하락치 않자, 또 요청하는 글이다. <'금나라로 가는 도로가 험난하여 갈 수 없다.' 하나 조종 조 때 금나라의 사람이 귀국의 사자를 따라 입공한 적이 있었으니 당시에는 길이 개통되어 있었으며 다닐 수 없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귀국은 또한 금나라의 사람들도 이 길을 통행할까 염려할 듯하나 금나라의 사람이 거란을 파한 뒤부터는 모두 하동(河東)과 산북(山北)을 경유하여 사절이 왕래하니 반드시 이 길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며, 만일 귀국이 금나라의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문제를 일으킬까 염려하겠지만 응성(應誠) 등이 이번에 사절로 오는데 비무장 인원 1백 10명으로 다만 국서와 예물을 가지고 가서 강화를 하려는 것이며 싸움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 귀국에서는 다만 길을 인도하여 사절의 일행이 국경에 이르러 먼저 금나라 사람에게 보고하여 그 가부를 듣고 혹 인원수를 줄이라 하면 모든 것을 하자는 대로 따를 것이니, 이것으로 문제가 생길 것이 없을 것입니다.> ▲ 이 글을 보면 금과 고려 또는 송가 왕래하는 길은 <하동과 산북을 경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동(河東)은 전국시 양나라에 하동지방이 있었으며, “맹자의 양 혜왕 상”을 보면 ; 황하가 경유하는 산서 서경(山西 西境)지대라고 못 박고 있으며, 옛 산서경내(山西 境內)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하동”은 황하가 내몽고에서 남쪽으로 꺽여 섬서와 산서의 성계를 흐르는 지역의 동쪽 즉 산서 황하 유역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 산북(山北)은 종남산의 북쪽을 칭한다. 산남은 종남 및 태화산의 남쪽지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기록을 보지 않아도 산북지방은 그 북쪽지방을 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고려가 어디에 있었으며, 금나라가 어느 곳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려는 대륙의 중원지방에, 금나라는 이 고려의 서북내지 북쪽지방에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고려왕이 남송의 왕에게 보낸 답서 내용 중에 “송에게 길을 빌려 주어 금나라로 들어가게 한다면 그들(금나라) 역시 우리(고려)에게 길을 빌려 달라고 할 것인바. 한번 길을 열어주면 그들의 부탁 역시 거절할 수 없는 것인바, 이것은 고려에게 위험한 일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다. 또 바닷길이 편할 줄 알아 길을 열어주면 우리나라(고려) 역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고, ①회남(淮南)지역과 ②양절(兩浙)지방의 연해(緣海)지역도 그들(금)이 넘보게 되는 우려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으로 답장을 썼다는 것이다. ① 회남(淮南)지역은 회수의 남쪽지방을 말하는 것으로 서쪽으로는 한강, 남쪽으로 장강, 북쪽으로는 회수까지를 말한다. ② 양절(兩浙)지방은 절동 및 절서지역을 말한다. 즉 전당강(錢塘江)의 남쪽이 절동이요, 전당강의 북쪽이 절서지역이다. 오대사 “오월세가”를 보면 <錢氏兼有兩浙>이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송에게 고려가 금으로 가는 길을 한번 터주면, 금에서도 길을 터 달라는 요청을 할 것이며, 이는 고려가 위험에 빠질 염려도 되고, 또한 대륙 동남부의 강소 남부 및 절강성 등지와 그 해안가를 금나라가 넘볼 수도 있으니 길을 터 줄 수 없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고려라는 국가가 현 역사 해설대로 한반도에 있었을 때 송나라가 고려에게 길을 빌려 달라고 애걸복걸할 이유도 없거니와 또 하동과 산북을 통해 금나라로 갈 아무런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고려의 북쪽에 금나라가 있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를 한반도에 놓고는 고려사 및 고려 사절요등 고려 역사서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의 금나라는 섬서 장안의 서북쪽지역 및 북쪽지역에 있었다. 이래야만 하동 및 산북지역에서 금으로 갈수 있다. ≪여진이 거란 즉 요를 파하고 금으로 칭, 건국되었기 때문에 금의 도읍지는 동북삼성 지역이 될 수 없으며, 금의 왕도 회령부는 황하의 서쪽지대에서 서북지대 간(사이)에 있었다고 보아야 하며, 실제 역사서 원문을 보아도 그렇다. 이는 징기스칸이 금을 정복하기 위해 륙반산맥(녕하성과 감숙성 사이)을 넘어오다 병사했다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 또 뱃길로 두 왕(금에게 항복한 후 끌려간 송의 휘종과 흠종을 말하는 것임)을 모셔오겠다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이 아닌 황하에 배를 띄워 데려온다는 것으로 해석해야지 있지도 않았던 반도 고려를 놓고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해설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고려가 대륙의 요충지 중원지방(황하의 서쪽 및 중원 및 동쪽지방)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송이 고려의 북쪽에 있던 금나라로 갈려면 고려의 영토를 통과해야 되는 것이다. 이러함에도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엉터리 역사 해설을 언제까지 계속할 곳인가 ? (14) 同..........與金國,疆場相接,知情僞甚熟,今使節,由此而往,則猜疑生隙,禍不旋踵,假令使節,由此往彼,彼,必由此復禮,又況其國,東濱大海,尤善水戰,彼,托以復禮,審知淮淅形勢,萬一具戰艦,浮海而下,擊其不意,竊恐北苦陸戰,南苦水戰,首尾受敵,爲患必鉅,事至於此,雖悔可追,小國,所以不獲奉詔者,天地洞鑑,不敢飾辭,雖曠日持久,更不敢他議,仍選日,請附回表,應嗽,答曰,貴國君臣,必以爲有害而不從,只欲使人還歸,是,終不許也,遂不受附表,例贈宴幣衣對禮物,亦皆不納而去。................ ▲ 위의 글 역시 송에게 보내는 답서 내용이다. 한반도 개성에 왕도를 정하고 있었다는 고려의 왕이 송나라 왕에게 보낸 답장이다. 고려는 금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면서, 회수와 절강의 사정을 금나라가 상세히 알고 나면 전함을 준비하여 쳐들어오면 고려는 북쪽으로는 보병, 기병에게 시달린 것이요(육전), 회수 및 영절지방에서는 수병들에게(수전) 시달린 것이니 머리와 꼬리가 위험해 질수 있으므로 안 된다는 것이다. “고려의 머리와 꼬리(首尾)가 위험해 질수 있다”는 이러한 설명을 보고도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다고 막무가내로 주장하고, 역사 해설을 한다면 올바른 역사 찿기는 요원한 일이며, 속된 말로 물 건너 간 것이다. 이러한 기록대로 고려의 영토를 따라가면 “고려가 바로 중국이었으며, 명나라는 고려의 지방 제후국이다. 또 명승과 진리를 주원장이 고려로 보낸 것은 자신 즉 주원장이 이들을 함부로 처리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주원장이 토발한 것은 중조(중앙 조정 즉 고려)의 명으로 토벌한 것이며, 중조(고려)의 명으로 잠시 주원장이 데리고 있다가 이들의 처리 명령을 받고 고려의 황도로 보낸 것이 되는 것이다. (15) 고종. 병자 3년(1216)...........北界兵馬使獨孤靖,奏,金兵三萬,與契丹戰于開州館,不克奔潰,退守大夫營,初,契丹遺種金山王子,金始王子,以其黨鵝兒乞奴二人爲將,脅河朔之民,自稱大遼收國王,建元天成,蒙古,大擧伐之,二王子,席卷而東。 북계 병마사(北界兵馬使) 독고정(獨孤靖)이 아뢰기를, "금 나라의 군사 3만 명이 거란과 개주관(開州館)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 물러와서 대부영(大夫營)을 지킵니다.." 하였다. 처음에 거란의 유종(遺種)인 금산왕자(金山王子)와 금시왕자(金始王子)가 그의 무리 아아(鵝兒)ㆍ걸로(乞奴) 두 사람을 장수로 삼아 하삭(河朔 황하(黃河)이북)의 백성을 위협하여 스스로 대요.수국왕(大遼.收國王)이라 일컫고, 연호를 천성(天成)이라 하였다. 몽고에서 군사를 크게 일으켜 이를 치니, 두 왕자가 닥치는 대로 공략하며 동쪽으로 들어왔다. ▲<河朔하삭>이란 黃河황하의 북쪽지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황하의 어느 곳의 북쪽을 <아삭河朔>이라 했을까. 하남성의 황하 북쪽지방 즉 산서성 그리고 하북성 지역을 <朔삭>지방으로 기록하거나 표현한 기록은 없다. 대륙사서의 기록으로 보면 <삭>지방은 산서성 서북 및 섬서성 북방, 내몽고 지대를 칭하는 것으로 보면 무난할 것이다. 따라서 <하삭>지방은 산서성 북방 지대의 서쪽지역 및 섬서성 북부지대, 녕하성 중북부 이북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 지역에서 거란 병과 여진의 금나라 병이 한판 붙었던 사건을 고려의 북계 병마사가 조정에 보고를 한 것이지, 만약에 고려가 반도에 있었다고 할 때는 북계 병마사가 이러한 일을 알 수 없으며, 한참 후에나 소문으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16) 원종. 경신 원년(1260).............二月,以濟州副使羅得璜,兼防護使,朝議濟州,海外臣鎭,宋商島倭,無時往來,宜特遣防護別監,以備非常,然不可別置防護,遂鎰璜,兼之。 2월에 제주 부사 나득황(羅得璜)으로 방호사를 겸하게 하였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제주는 바다 밖의 큰 진(鎭)으로 송나라 상인과 왜놈이 때 없이 왕래하니, 특별히 방호별감을 보내어 비상사태를 예방하여야 하나, 따로 방호별감을 둘 수는 없다." 하고, 드디어 나득황으로 겸하게 하였다. ▲ 정말 이해하기 힘든 기록이다. 한반도 제주도에 왜놈과 송 상인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린다는 것이 과연 현 한반도 제주도를 칭하는 것으로 본다면 정신 나간 자들이다. 21세기 현재에도 가고 싶다하여 시도 때도 없이 갈수 없는 곳이 제주다. 바다라는 큰 장애물이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말하는 제주는 현 제주도가 될 수 없다. 제주는 송과 고려와 왜의 강역이 겹쳐지는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삼국의 상인들이 득실댔던 것이지, 육지에서 며칠씩 배를 타고 가야하는 한반도 제주에 상인들이 득실댈 이유도 없거니와 상인은 이익을 보고 달려든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반도 제주라고 해설하는 것은 역사서를 모독하는 자들이다. (17) 충숙왕. 신유 8년.............秋七月,上王至西蕃獨知里,寄書崔有渰,權溥,許有全,趙簡等云,予以命數之奇,罹玆憂患,孑爾一身,跋涉萬五千里,向于吐蕃,辱我社稷,多矣,寢不安枕,食不知味,想諸國老,亦勞心焦思,冞增惶愧,國王,年少無知,向之憚我群小,必幸我如此,肆其姦巧,焉知不問我父子乎,幸諸國老,同心協力,數奏于帝,俾予速還。 가을 7월에 상왕이 서번(西蕃)의 독지리(獨知里)에 이르러 최유엄(崔有渰)ㆍ권부(權溥)ㆍ허유전(許有全)ㆍ조간(趙簡) 등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내가 운명이 기구하여 이 환난(患難)을 당하였다. 외로운 한 몸이 1만 5천 리의 노정을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토번으로 왔으니, 우리의 사직(社稷)을 욕되게 함이 많다. 잠을 자도 잠자리가 편안하지 아니하며, 음식을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하겠다. 생각하건대, 여러 국로(國老)들도 노심초사(勞心焦思)하리니 더욱 황송하고 부끄럽다. 국왕이, 나이가 어려서 철을 모르므로, 전일에 나를 꺼리던 여러 소인들이 반드시 내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다행하게 여기어, 간교(姦巧)한 짓을 함부로 할 것이니, 우리 부자 사이를 이간하지 않는다고 어찌 알겠는가. 여러 국로들은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모아서 황제에게 자주하여 내가 빨리 돌아가게 해 달라." 하였다. ▲ 위의 기록에서 보다시피 신강성 토노번 지역을 <서번西蕃> 이라 칭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에 수없이 등장하는 <북번> 및 <동번> 그리고 <서번>은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 이제는 감이 잡힐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역사는 왜곡되어 반도라는 좁은 울타리 속으로 내몰렸던 것이다. 동번이 쳐들어와 동계에 침입했다는 등 많은 기록들을 한반도를 기준해서 반도의 북부 함남, 함북지방의 해안가로 동번들이 들어온 것처럼 우리의 훌륭하신 학자님들은 열을 내며, 침을 뛰기며 해설을 하시지만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역사관인지를 빨리 깨달았으면 좋으련만 ! 서번이 토번이라면 동번은, 또 북번은 이 얼마나 황당한 기록인가, 고려를 반도에 놓고는 옛 기록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고려는 대륙의 요충지에 있었으니까. (18) 충숙왕. 경오 17년..........王,尙關西王焦八長女,是爲德寧公主。 왕이 관서왕(關西王) 초팔(焦八)의 맏딸에게 장가들었다. 이 사람이 덕령공주(德寧公主)이다. ▲ 이 얼마나 황당한 기록인가. 그러나 생각해 보자. 현재의 반도에서 바라 볼 때는 황당한 기록일 수 있으나, 당시의 고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기록이 아니겠는가. 한반도에서 <관서지방>은 어디를 말함이며, 또 관서지방에 제후국이 있었다는 역사 해설은 금시초문이다. 더불어 관서지방에 관서왕이 따로 존재해 있었다는 식의 해설은 처음이다. 따라서 고려가 반도에 없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관서지방(關西地方)은 <함곡관의 서쪽지대를 말하는 것으로 섬서 및 감숙의 두성 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려는 대륙의 중원지대 즉 황하의 동서남북지대를 통치하고 있었다고 보면 올바른 역사 인식일 것이다. 즉 고려는 중조(중앙조정)로서 각각의 지역에 왕 ❰후(侯) 또는 공(公) 또는 (君)❱이 있어 지역을 다스렸고, 이 제후들을 중조(중앙조정)에서 통치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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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는 중고등학교 사회를 가르치는 강사입니다. 그전에는 고등학교 교사이었습니다.많은 것을 배우고 괜히 부끄럽습니다.감사합니다.
헐.. 이거 맞는거 같기도 해요 그럼...도대체 땅덩어리를 얼마나 뺏어쳐먹었단 소리지..ㄱ- 중국은??
싸이에 퍼 올려서 광장에 올려놨습니다. 좀 많은 일반인들이 알고서 우리나라의 진짜 역사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해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도대체 역사책이 얼마나 더러워졌길래 그 큰 땅들이 손톱만해지냐...
상당히 상세하게 연구하셨네요.............
감사합니다..잘읽엇습니다. 글로 고려의 영토를 되새기니 이제 확실히 감이오네요. 허황된 꿈일지는몰라도 이 사실을 이 세상에 알리고 그것을 알게하는것이 제 꿈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바꿔보고싶네요....좋은정보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정말 무서운 현실이지요 우리 민족 참역사 사학자님들의 승리를 기원합니다.식민사학자들은 물러가야합니다 만천하에 잘못을 용서빌고 진역사를 고해야 합니다
극소수의 이익을 위하여 자존과 명분을 져버린 저 더러운 식민사학자들과 위정자들 그리고 그의 잔당들을 위하여 "부관참시운동"을 전개하여 민족과 역사앞에서 참된 죄값을 치루도록 합시다! "부관참시"-연산군이 한명회의 묘를 파서 행한 벌
열심히 퍼뜨리고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알고서도 고치지 못한다면 다 죽어야 겠지요! 스스로.
저그거 역사만화책에서 본것같은데 ,,, ㅋ
그럼 질문 있어요....고려가 대륙에 있었다고 인정!!! 그럼 그많던 고려 백성은 왜 만주에 별로 없죠!!! 이것이 문제인데...고려는 조선족 여진 말갈 몽골 여러민족의 연합국가라는 예기죠!! 그런데 조선이 생기면서 조선족만 독립했다 머 이런이야기 입니까???
오...대단한 고려다...너무 자랑스럽다...
쪽바리들이 다 물러간게 아닙니다. 전에 어르신 말씀하시기를...한반도에서 태어난 왜족과 왜족혼혈들의 상당수가 일본열도로 해방후에 가지않고 기독교장로 이승만의 도움하에 호적을 고쳐서 한국인 이름과 성씨로 바꾸고 한국인행세를 하고있다고 들었습니다. 즉 우리가 알고있는 친일파들의 상당수는 왜족의 혼혈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이들이 바로 현재의 주입식 세뇌교육을 강제하는 핵심인물들 같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역사교육은 왜족의 식민사관교육의 연장일 뿐입니다.
우리조상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찾는건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조상은 대륙의 패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현 대륙과 중앙아시아,카스피해,흑해연안까지 우리조상들의 흔적이 광범위하게 남아있습니다; 동이족은 대대로 세계의 지배자였습니다. 불과 200년 전까지만 해도 말이죠..
고려백성이 현 만주에도 남아있죠..바로 조선족들이 고려의 후손들입니다. 이게 후대에 조선의 영역이 되면서 조선족으로 불리운 것 뿐이죠...또 현재 지나의 국민들중에도 고려의 후손들이 많습니다. 단지 수십년동안 공산당에 세뇌되서 자신들의 뿌리가 한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한족이라는 이름자체가 동이족의 또다른 명칭을 도용한 것입니다. 고구려의 또다른 이름이 바로 "한"일 뿐입니다.
우리의 큰역사가 보잘것없이 축소되어있는 현 상황을 생각할때마다 한숨이 나옵니다
윗 글이 정론인가요?? 문헌사적으로 얘기한다면 맞을지 모르지만 고고학적 사료는 생각해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것인지?? 단지 문헌사적으로만 본다면 위에서 언급한거와 같이 어떻게 해석하는냐에 따라 달라지는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문헌사료는 일부분만 사용한 것인데, 제대로 보려면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고 이해해야하는거 아닌가요?? 승리자의 역사란 말이 있듯이 많은 왜곡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기에 고고학적 사료가 첨부 된다면 더욱 진실에 가까울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문헌사의 각각의 해석은 일부 감정적인 부분이 들어가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고려의 영토였던 곳이 현재 모두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로 접근이나 발굴이 힘든데 어떻게요? 꼭 반대쪽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긍정족으로 접근해보세요. 얼마 전에 유럽에서 중국인들이 공부하던 <고려사> 필사본이 발견되었는데 복사본이라도 구해서 공부해봤으면 좋겠네요. 해석할만한 한자실력도 없지만...
연구하신분 정말 대단하십니다.우리역사가 바로 섰으면 좋겠습니다
(1) 高麗史43卷-世家43-恭愍王
右丞相汪廣洋又致書曰: " 因元政不綱群雄 起各擁兵衆分據土疆. 我聖上乘時啓運奮興?淮右肇基江左命將四征削平群雄. 陳友諒竊據湖湘妄稱大漢明貞據有川蜀僭號大夏. 是以,聖上統御六師親臨湖廣. 其陳氏勢窮力屈率衆就降. 去年春命中山侯穎川侯等摠率師旅水陸 進直川蜀. 明氏力不能* {支}* {銜}璧請命. 皆已欽蒙聖恩特加赦宥保全其生然揆之以理不可使久處京師,今令各將家屬,往王國閑居,如可則留之,其不可則仍發廻還! 尙冀裁度."
* 冀기는 王畿왕기=京畿경기를 뜻한다.
/冀는 중국 하북성 남부의 冀州를 뜻하는 것이지 경기의 뜻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