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고향 마을과 뒷동산
최균희
내 고향은 산과 들과 바다가 함께 어우러진 곳, 호남평야와 변산반도와 서해바다가 자리한 전북 부안이다. 내가 태어난 마을은 부안읍 변두리, 부안 경찰서 뒤쪽 행안면에 속해 있다. 고향을 떠나온 지도 벌써 사십년이 훨씬 넘었다. 이제는 그곳에 내가 기억하는 어른들이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몇 분 남지 않았다.
그래도 이따금씩 고향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그 마을 근처에 우리 부모님 산소가 있기 때문이다. 최씨 문중의 널따란 선산이 정읍에 두 곳이나 있지만 어머니는 본인이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마을의 양지바른 곳에 눕고 싶다는 유언을 하셨다.
두 아들은 일찍 출가 시켜 마음이 놓였지만 하나 뿐인 외딸이 시집갈 생각은 안하고 학교에 나가며 글을 쓴다고 교육과 문학 두 곳에다만 정신을 쏟고 있을 때 어머닌 무척 애를 태우셨다. 어머니는 가까운 텃밭에 목화를 가꾸어 햇볕 잘 날을 골라 눈부시게 하얀 목화솜을 평상 위에 펼쳐 말리신 뒤, 티끌하나 없이 손질하여 자루마다 가득가득 목화솜을 담아놓으셨다. 막내딸이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이라도 하겠다면 즉시 혼수 이불과 담요에 사랑을 가득 채워 함께 넣어줄 생각이었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혼자되시어 평생을 삼남매의 뒷바라지만 하시다가 홀연히 떠나신 우리 어머니, 그 동안 하늘나라에서 두 분의 만남을 기다리고 계셨던 아버님의 유골을 곁에 모셔다가 어머니가 해마다 목화를 가꾸시던 그 밭에 향나무들로 둘러싸인 아담한 산소를 만들어 후손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옆에 ‘부모님 영전에’ 바치는 내 어설픈 시비까지 세워놓았다.
나보다 일곱 살 위인 작은 오빠가 이른 살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부모님의 산소는 그 근방 일대에서 가장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제는 아흔에 가까운 연세의 큰오빠마저 서울에 살고 계시기에, 다른 사람에게 주변의 밭을 일구어 먹는 조건으로 산소를 관리하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지난해와 올해처럼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조하는 상황에서 함께 모여 제사를 지낼 수도 없는 처지다. 얼마 전 가정의 달 오월에 나는 남편과 함께 자동차 뒤 트럭에 제사 음식을 가득 싣고 부모님 산소를 찾아가 차례를 지냈다.
오랜만에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물론 작은 오빠가 사시던 집이 그 동네에 있고, 올케도 살아계시기에 항상 반갑게 맞이해 준다. 마을 이장도 오빠의 친구라서 절대로 낯설지는 않다. 언제나 평화롭고 정이 넘치는 내 고향 마을이다. 마을 옆에 농공단지가 생기고 나서 교통수단도 매우 편리해졌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마을로 거듭 발전하고 있다. 요즈음엔 마을 골목길 담벼락에 여러 종류의 민화를 그려놓고 있었다. 시멘트 담을 헐어버리고 꽃동산을 만들어 마당과 안채가 환히 보이는 집이 더욱 눈길을 끌었지만, 그 민화들 옆에 내가 쓴 시 ‘마실 골목길’이 적혀 있고, 그 마을에서 태어나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후배 김요한 장군과 내 사진을 넣은 짧은 약력들이 함께 게재되어 있는 걸 발견했다. 물론 비바람이 불고 세월이 가면 흐릿하게 사라질 벽화지만 그래도 내 고향 마을에서 얼마간이라도 나를 기억할 수 있도록 자료를 담아주신 정성에 마음이 찌릿해 왔다.
그곳에서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마을 뒷동산으로 향했다.
언제나 그리운 고향 마을을 떠올리면 동시에 떠오르는 것이 뒷동산의 커다란 노송이었다. 그 크기와 모습이 속리산 법주사의 정이품송과 비슷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우리들의 유일한 놀이터는 바로 마을 뒷동산의 노송 주변이었다. 소나무 아랫부분은 아이들 대여섯 명이 손에 손을 잡고 안아도 모자랄 정도의 아름드리 굵은 몸체였다. 그토록 큰 나무가 비스듬히 기울어져서 아이들이 쉽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등을 내주고, 수많은 가지들을 동서남북으로 쭉쭉 뻗쳐 전체적으로는 둥근 원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사시사철 푸른 빛에 그 의젓함이 내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지 않았을까.
그 가지 중에서도 특히 옆으로 길게 뻗쳐 있는 나뭇가지에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해서 새끼줄로 튼튼하게 엮어 매달아 놓은 그네가 흔들흔들 항상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 아이들은 수시로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건너 뛰어다니며 숨바꼭질과 술래 잡기를 했고, 계집애들은 그네를 타며 하늘 높이 올라 이웃 마을까지 들리게 환호를 지르다가 곧 싫증이 나면, 나무 아래서 고무줄놀이와 소꿉놀이로 한나절을 훌쩍 넘겼다.
지게를 지고 짐을 나르던 아저씨와 밭을 매던 아주머니들도 이따금씩 땀을 식히기 위해 소나무 끝자락에 자리한 모정에서 새참을 먹고, 잠깐씩 드러누워 쉬었다 가곤했다. 뜨거운 한여름에도 노송 아래는 산들바람이 수시로 불어와 부채도 필요 없었다.
어른들은 그 노송을 당산나무라고 불렀다. 명절은 물론이고 마을에 애경사가 있을 때는 나무에 색색으로 된 띠를 두른 뒤, 맛있는 음식을 차려 놓고 두 손으로 싹싹 비는 일도 많았다. 그때만 해도 어른들은 그 당산나무가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나도 그 당산나무 옆 작은 등걸에 걸터앉아 책을 읽던 때가 너무도 행복했던 것 같다. 내가 줄곧 고향 마을 뒷동산의 노송과 제제의 오렌지나무를 똑같게 여기는 것도 어쩌면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만큼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 탓이리라.
그런데 그토록 아늑한 분위가 속에서 우리 마을을 지켜주던 노송이 벌써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동네 뒤쪽으로 생길 때 함께 없어졌다고 들었다. 읍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서 공장 건물들이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뒷동산 한쪽이 고스란히 사라지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왜 그 노송을 지키지 못했을까? 하지만 나부터 오래 전에 고향을 떠나왔고, 지금 그 노송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불현 듯 몇 십년 후에라도 아이들이 찾아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그런 소나무 놀이터를 어느 곳에든 만들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더 늦기 전에 말이다.
최균희 약력
1971년 한국기독교아동문학 동화 ‘빨간 털구두’ 당선
197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 ‘아기 참새’ 당선
1992년 현대문학 3월호 '목화솜 이불‘로 등단
동화집 《아기 참새》 《동전 한 닢의 편지》 《꽹과리 소년》 《나비를 달아줄게》외 20여권, 동시집《아이와 달맞이꽃》, 장편소설《평양기생학교 스캔들》 등
한국문학예술상, 한국아동문학창작상, PEN문학상, 상상탐구작가상, 김영일아동문학상 등 수상
(사)어린이문화진흥회 이사장, 국제펜한국본부 부이사장,
한국여성문학인회 자문위원, 계간문예작가회 자문위원, 한국아동문학인협회 자문위원, 한국동요작사작곡가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