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1:1-11, 막 11:1-11, 눅 19:28-38, 요 12:12-19> 매인 자를 풀어라, 매인 나귀와 나귀새끼, 예루살렘 입성, 겸손한 왕 예수, 호산나 다윗의 자손
<배경설명>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사건은 십자가 사건이 있는 고난의 주간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셀렘 성으로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가가는 우연히, 갑자기, 억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안에서 예수님의 자발적인 순종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롬 5:19)
[히브리서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 오늘날 우리들도 이런 순종하는 마음으로 사역을 해야 합니다. 좋은 곳, 편안한 곳, 대접 받는 곳, 화려한 곳만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기다리는 오지일지라도 가라면 기꺼이 가야하는 것입니다. 배목사님처럼 봉화에 성주에 가라면 가애하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배목사님의 봉화 생활은 모든 것이 불편합니다. LPG 불판, 전자레인지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깥에서 불을 지피면서 음식을 해먹습니다. 참으로 광야와 같은 곳입니다.
▶ 오늘 말씀의 내용을 한번 연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게서, 그렇게 많은 기적과 이사를 행하신 예수님께서 백마, 자색마는 타지 않으실지라도 적어도 말은 타시고 들어가야 하는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사람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예수님과 어울리지 않는 예수님의 신분과 조화되지 않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 오늘날 우리들은 사역에서 능력이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이 다가오고, 재정적으로 넉넉해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좋은 차 타는 일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나귀새끼 위에 편안한 안장도 아닌 사람들의 겉 옷을 깔고 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는 길에는 사람들의 겉 옷과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깔아놓고 있습니다. 대로를 만들어 다니는 왕의 행차에 비하면 너무 나 초라한 모습입니다. 나뭇가지는 종려나무 가지일 것입니다 (요 12:13) 그런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또 많은 사람들은 나귀새끼를 타고 가는 예수님 앞뒤를 따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를 외치고 있습니다
“호산나”는 “비옵나니 우리를 구원하소서, 오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
이런 모습은 세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① 종려나무는 승리를 상징하므로 예수님을 승리의 왕으로 따르고 맞이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② 그리고 요한복음12장을 보면, 그 따르는 무리들이 누군가 하면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표적을 보았던 자들로부터 증언한 것들을 들었던 자들입니다 (9-18). 그러므로 자기들도 죽음에서 구원해 달라는 외침인 것입니다.
③ 또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달라는 외침이기도 합니다.
▶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는 것은 “겸손한 왕”이시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예수님 오시기 500여년 전에 이미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그러나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나귀새끼가 아니라 참으로 백마를 탄 하늘에 있는 군대들과 함께 백마를 타고 심판자로 오실 것입니다 (계 19:11).
2. <예루살렘 성 입성을 위하여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매인 나귀와 나귀새끼를 끌어 오라고 하십니다>
2~3절의 내용입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맞은 편 마을에 나귀가 매여 있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보내서 “주가 쓰겠다”하면 나귀 주인이 즉시 끌고 가라고 하실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지식이 한이 없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골로새서 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자라면 누가 그의 말씀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주가 쓰시겠다” 하면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내어놓아야 하는 분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재물을, 더 나아가 내 인생 전체를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나귀의 주인과 같이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드린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들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영생을 얻고, 현세에서도 더 풍족한 재정도 주실 것입니다 (막 10:29-30)
[막 1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2)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내어 드리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1) 오늘 말씀 속에서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다른 병행구절인 막 11:1-11, 눅 19:28-38, 요 12:12-19에서는 나귀 새끼가 매인 것으로 나옵니다.
오늘 말씀 마태복음에서는 어미 나귀가 묶여 있고 그 새끼는 그 어미와 함께 있는 모습으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왜, 차이가 날까요? 병행 구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셨으므로 나귀 새끼에 초점을 맞어 기록하였고, 마태복음은 그 상황을 더 상세하게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실제는 어미 나귀가 매여 있고 새끼는 어미와 함께 있는 모습일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의 말씀을 근거로 어미 나귀가 매여 있고 새끼는 어미 나귀와 함께 있는 모습으로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 나귀는 성경적으로 소와 양과 같이 사람들의 재산이며, 사람과 물건을 태워 나르는 운반수단입니다.
그러나 나귀를 사람으로 비유할 때도 있습니다. 야곱이 잇사갈을 예언할 때 끓어앉은 건장한 나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일에 대해서 들나귀 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점술가 발람의 이야기에서는 나귀가 사람처럼 말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49:14]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창세기 16: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
▶ 그래서 오늘 매인 나귀와 그 새끼는 풀어져 쓰임을 받는 모습은 마치 사람이 매여 있었는데 이제는 풀어져 주의 일에 쓰임을 받는 모습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어미인 매인 나귀는 부모와 조상들을 상징하고, 그 새끼는 자녀와 후손들을 상징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뭔가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나 조상들이 뭔가에 직접적으로 매여 있는데, 비록 직접적으로 매여 있지는 않지만 매인 것처럼 영향을 받고 있는 자녀들이나 후손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라 하겠습니다.
▶ 그러면 우리가 무엇에 매여 있을까요?
죄와 관련된 매임입니다. 죄에 매여 있는 것이요, 죄의 영향력에 매여 있는 모습입니다. 나귀의 주인은 나귀를 매어 놓았습니다. 이와 같이 그동안 우리들의 주인 행세를 하던 사탄은 우리들을 묶어 놓았습니다. 사탄이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 또 사람들은 SOUL TIE로 매여 있기도 합니다.
성경은 부모나 조상들의 죄가 후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 조상들의 죄를 후손들이 담당하게 된다.
[민수기 14:18]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민수기에서는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겠다고 합니다.
조상들의 죄에 대한 보응을 삼사대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갚다”(파카드)는 것은 원어적으로 “세다, 계수하다, 시찰하다” 입니다. 그러므로 삼사대의 자식에게 까지 셈을 하듯이 따져서 조상의 죄값을 모두 다 갚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 마 18:24절에 나오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말씀을 보더라도 사실 우리 자신이 지은 죄가 너무 크서 다 갚을 수 없습니다. 시편 49장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 49:8]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누가복음 12:59절, 예레미아애가 5:7절에서도 동일한 개념의 말슴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12:59]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레미야애가 5:7]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예레미아 선지자는 조상들이 죄를 범하고 지금은 다 죽고 었어졌지만 그들의 죄악을 후손들이 담당 (짐을 지우다)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결론적으로 우리들의 죄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② 각자의 죄는 각자가 담당한다
에스겔서에서는 이와 반대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겔 18: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앞에서 말씀하신 것과 다르게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어 이가 시다고 아들의 이가 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혼이 하나님께 속했으므로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조상들의 죄값을 후손들이 담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③ 그러면 조상들의 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 말씀하셨을까요?
[마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눅 11:50]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의 피흘린 죄에 대하여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지자들에게 행한 조상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너희들에게 돌아가고 담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억울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누가복음 11:47]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누가복음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들 조상들이 지은 죄와 그들이 지은 죄가 같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상들이 지은 죄를 동일하게 후손인 너희들이 동일하게 짓고 있는 것은 죄의 유전, 죄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후손들이 동일한 죄값을 치루게 되는 것입니다.
▶ 바울도 동일하게 조상들의 죄를 그들이 짓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 이사야 선지자도 조상들의 죄와 후손들의 죄가 한가지라고 선언합니다.
[이사야 65:7] 너희의 죄악과 너희 조상들의 죄악은 한 가지니 그들이 산 위에서 분향하며 작은 산 위에서 나를 능욕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먼저 그들의 행위를 헤아리고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 동일한 죄의 유전, 조상들의 죄의 영향력이 작동함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조상들의 죄의 열매가 후손들의 죄의 열매가 같은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 예, 가족력 같은 것들, 단명 같은 것들, 자살 같은 것들
죄를 짓지 마세요, 우리들의 죄가 후손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미칩니다. 후손들이 나쁜 열매를 따 먹게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자 했던 그들은 자신들의 죄값을 후손들이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줄도 모르고 이렇게 빌라도에게 대답을 합니다.
[마 27: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 조상들의 죄가 후손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모습이 오늘 매인 어미 나귀와 나귀 새끼의 모습이 아닙니까?
새끼는 분명히 매이지 않았는데 매인 어미처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 또 다른 이야기이지만 결혼을 해서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창세기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부모 주변에 나귀 새끼처럼 맴돌고 있으면 안됩니다. 비록 부모는 묶여있다고 할지라도 자녀는 멀리 떠나 주를 위하여 더 큰 세계를 경험해야 합니다.
3. <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매인 나귀를 풀어놓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답은 예수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하나로 풀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순종했고, 주인도 순종했습니다. 그들의 순종의 문제는 남아 있지만 예수님 말씀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나귀가 매임에서 풀어져 주님의 구원 사역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 이 부분에 있어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여기서 “조상이 물려준“ 이란 헬라어 단어가 ”파트로파라도토스“인데 ”아버지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조상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뜻입니다.
조상이 물려주는 헛된 행실이 있는데 이것을 대속하는 것은 금이나 은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되었다. 예수님의 피로써 조상들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 누가 묶여 있습니까?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의 피가 뿌려지면 풀어지고 사용되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 이제 우리들이 매인 나귀를 풀어놓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상들의 죄와 자기의 죄로 인하여 많은 부분 묶여 있음이 분명합니다. 또한 직접적으로 묶이지 않았지만 매인 어미 주위를 맴도는 나귀 새끼처럼 간접적인 묶인 자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예수님의 권세로, 능력으로, 말씀으로 풀어 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나아가면 그 누구도 막지 못하고 풀어지는 것입니다.
→ 매인 나귀를 푸는 것은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권세, 능력으로 풀지만 그 일에 사용된 이는 제자들이 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생명을 얻었지만 여전히 죽음의 영향력 인 베와 수건으로 감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제자들에게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요 11:44)
풀어 놓는 것은 우리들의 사역입니다. 그 권세는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우리는 순종할 뿐입니다.
특별히 조상들의 매임을 먼저 풀어I 합니다.
→ 다니엘도 이것을 알고 조상들의 죄를 먼저 자복했습니다.
[단 9:20]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우리들이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나아갈 때 모든 묶임에서 풀어지는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주님이 그 사람의 주인됨을 선포하면 되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할 때 첫 번재 주신 능력이 “더러운 귀신을 쫓는 능력”입니다.
[마태복음 10: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마가복음 6: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칠십인 제자들에게도 그런 능력을 주셨습니다.
[눅 10: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믿는 자 모두에게 이런 권세가 따르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4. <그들이 풀어져야 사용되어 집니다>
오늘 말씀의 매인 나귀는 풀려져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에 사용되어졌습니다. 풀리지 아니하면 사용되어질 수 없습니다.
풀어지니 나귀와 같은 사람도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수많은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풀어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내신다는 비방을 받고도 참으로 많이 하신 사역이 축사입니다.
그 나귀 새끼가 사용되어지니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연결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이 나귀처럼 사용되어 질 때 결국 구원의 열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5. <우리가 나귀 새끼처럼 사용될 때 주의할 부분이 있습니다>
1)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에수님께서 겸손하셔서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나귀 새끼의 이미지는 “작은 자, 겸손한 자, 낮은 자”의 모습입니다.
겸손한 자를 사용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들 같으면 어미를 탈 텐데 그렇지 않으신 예수님은 겸손한 자, 작은 자, 낮은 자를 쓰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만한자를 미워하시고 멀리하십니다.
조금 주님 앞에 쓰임을 받는다고 교만을 떨면 예수님 그 나귀에서 내리십니다.
2) 내 뜻대로 움직이면 안됩니다. 주님 뜻대로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나귀가 이리가야 하겠다고 뒤돌아 가서도 안됩니다. 옆으로 가서도 안됩니다. 길이 좋지 않다고 좋은 길 골라서 가서도 안됩니다. 주님 이끄시는대로 그저 가면 됩니다.
3) 불평하면 안됩니다.
왜 이렇게 무겁냐고? 왜 이렇게 사역이 힘이 드냐고? 안장을 놓아야지 그냥 옷가지 얻으니 너무 배긴다고? 너무 앞에 탓어요, 뒤에 타세요, 중간에 타세요, 뭐좀 먹고 갑시다. 목이 마릅니다 등등
4) 오직 영광은 주님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찬송하리로다를 외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니 마치 자기에게 그러는 줄 알고 고개를 쳐들고 영광 받으면 안됩니다.
자기에세 능력이 나타나는 것도 자기에게 그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마치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영광 받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가오고 높여 주니 마치 자기가 주님인 것처럼 행동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고개를 쳐 드는 순간 예수님은 땅에 떨어져 사명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우리들은 오늘 매인 나귀처럼, 나귀 새끼처럼 묶여 있습니다. 그러면 사용될 수 없습니다. 풀어놓아 져야 쓰임을 받습니다. 먼저 자신이 풀어지고 이제는 제자가 되어 다른 사람을 풀어놓아 다니게 하는 사역에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됩니다. 제자들이 주인이 순종하면 됩니다. 주님에게 쓰임 받는 것은 결국 구원의 열매를 맺는 사역입니다.
아무튼 조상들의 죄, 나의 죄로부터 그 영향력으로부터 풀어져 겸손하게 사용되는 자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