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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공안집 1 스크랩 417칙 조주구자 趙州狗子
검산 추천 0 조회 80 17.05.15 13: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417칙 조주구자 趙州狗子


[본칙]

어떤 학인이 조주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있다.”

“있다고 한다면 어째서 저 가죽 포대 속에 들어갔습니까?” “그 놈이 알면

서도 고의로 범했기 때문이다.” 또 어떤 학인이 조주에게 물었다. “개에

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1) “모든 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는데, 개에

게는 어째서 없습니까?” “그 놈은 업식(業識)이 있기 때문이다.”2)

趙州因僧問,“ 狗子還有佛性也無?” 師云,“ 有.” 僧云,“ 旣

有, 爲什?却撞入者箇皮袋?” 師云, “爲他知而故犯.” 又有

僧問,“ 狗子還有佛性也無?” 師云,“ 無.” 僧云,“ 一切衆生

皆有佛性, 狗子爲什?却無?” 師云,“ 爲伊有業識在.”

1) 본래 조주의 문답에는 ‘없다’는 대답과 ‘있다’는 대답이 공존하지 않는다.『趙州

   語錄』古尊宿語錄13 卍118 p.314a8에는 ‘없다’고 한 문답만 나온다. 후대의 간화

   선사들은 이 문답에 화두로서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두 가지 상반되는 대답을

   묶어 놓았고, 대부분 유·무의 긴장 속에서 이 화두를 풀이한다. 이 본칙은『宏智

   廣錄』권2 大48 p.20a20에 나오는 문장에 따르고 있다.

2)『趙州語錄』에는 “위로는 모든 부처님과 아래로는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

   이 있다.”(上至諸佛, 下至?子, 皆有佛性.)라고 되어 있다. ‘업식’에도 ‘성(性)’자를

   붙여 불성과 업식성을 대비시켰다.


[설화]

선수행자들3)은 이 공안을 두고 여러 가지 방도로 헤아린다. 어떤 자들

은 ‘조주의 무자(無字)는 세상의 납자들이 즐겨 공부하는 화두이기는 하

지만 천착4)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라고 하니, 이 말이 옳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 대체로 본분을 깨달은 종사들이 드러내는 언구들은 그 하나하

나가 모두 구멍 없는 쇠망치5)와 같으니 어찌 천착할 여지가 있겠는가! 다

른 언구들은 차치하고 무자와 같은 공안 또한 무수하게 많다. 어찌 공안만

그렇겠는가! 말투까지 다르지 않은 것들도 매우 많다. 예를 들면 위산(?

山)이 ‘모든 중생에게는 본래 불성이 없다’6)라고 한 말도 그와 같다. 또한

어떤 고덕(古德)에게 학인이 ‘저의 불성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묻자 ‘가

거라, 가! 그대에게는 불성이 없다’라고 말한 경우도 있다.7) 또한 어떤 고

덕에게 학인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묻자 ‘누구

에게 있느냐?’라고 되물은 예도 그러하다.8) 다른 것에 대하여는 이러니저

러니 마구 말하면서, 이것[佛性]에 대해서는 어떤 이유로 천착할 수 없다

는 것일까? 이것에 대해서는 천착할 수 없는데, 다른 것에 대해서는 천착

할 수 있다는 뜻일까? 또한 어떤 선지식은 ‘나는 불성이 있는 줄 안다’라

고 스스로 생각하고, 학인들에게 ‘조주가 없다고 한 말은 마치 한 자루의

취모검(吹毛劍)과 같다’라고 한 다음, 마침내 소리 높여 ‘조주의 뒤를 따르

지 마라’고 하거나 ‘지금 당장 알아차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하기

도 한다. 옳기는 옳지만 이러한 견해는 신발을 신고 발바닥을 긁으려는 것

과 같아서9) 조주의 본의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 밖의 잡다한 말들

이야 입에 올려 무엇 하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옛사람이 말

하지 않았던가? ‘(조주는) 나귀 똥을 가지고 있다가 (천착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것을 눈알과 바꾸어 주었다.’10) 만약 ‘없다’고 말한 뜻을 이

해했다면 곧 ‘있다’고 말한 뜻도 이해할 것이다. 옛사람은 이러한 결정적

인 순간에 도달하여 “달 속의 계수나무를 베어 없애면, 밝은 달빛이 더욱

많이 쏟아지리라”11)라고 말한다.

禪和家商量紛?, 有云, ‘趙州無字, 天下衲僧話頭, 穿鑿無

分.’ 不道不是. 大凡本分宗師, 所發言句, 一一如無孔鐵鎚,

豈有穿鑿分! 諸餘言句且置, 無字一般公案, 又無數也. 豈徒

公案一般! 語勢亦無異地頗多. 如?山云, ‘一切衆生, 本無佛

性.’ 又古德因僧問,‘ 如何是學人佛性?’ 云,‘ 去! 去! 汝無佛

性.’ 又有古德因僧問,‘ 如何是眞如佛性?’ 答云,‘ 誰有?’ 於

彼, 胡說亂說;於此, 爲什?穿鑿不得? 旣於此穿鑿不得, 於

彼還曾解穿鑿得?? 又有知識自謂知有, 對學人云,‘ 趙州道

無, 是一柄吹毛.’ 遂高聲云,‘ 無隨後!’ 又云,‘ 直下會取好.’

是則也是, 是隔靴搔痒, 且沒交涉. 自餘駁雜之說, 何足掛齒牙

間哉! 然則如之何? 古人豈不云乎? 驢糞逢人換眼珠. 若會得

無, 便會得道箇有. 古人, 到這時節道,“ 斫却月中桂, 淸光應

更多.”

3) 선화가(禪和家). 선화자(禪和子)와 같은 말로 선승(禪僧)·납승(衲僧)을 뜻하며,

   ‘家’는 복수를 나타낸다.

4) 穿鑿. 화두에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분별에 분별을 거듭하며 파고드

   는 것. 원래 구멍을 뚫는다는 뜻에서 비롯하여 멋대로 근거를 끌어다가 한 가지

   사실 또는 주장을 억지로 꿰맞춘다는 뜻으로 쓰인다. 간화선에서는 본래부터

   어떤 맛도 없는 몰자미(沒滋味)한 화두를 놓고 어떤 맛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

   며 그것을 추구하는 그릇된 태도를 말한다. “단지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화두

   를 살피기 바랍니다. 이렇게 헤아려도 옳지 않으며 저렇게 헤아려도 옳지 않은

   것이니 결코 갖가지 분별로 천착하며 교묘한 견해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천

   착하며 일으키는 교묘한 견해는 모두 허망한 것으로 생사윤회의 원인을 증장시

   킬 뿐입니다.”(『眞覺語錄』「示奇侍郞」韓6 p.38b11. 請只看狗子無佛性語. 

   左來也不是, 右來也不是. 切忌種種穿鑿巧見. 穿鑿巧見, 皆虛妄也, 增長生死而已.)

5) 무공철추(無孔鐵鎚). 자루를 박아 넣을 구멍이 없어 써먹지 못하는 쇠망치. 어떤

   분별의 수단도 통하지 않아 천착할 수 없는 화두를 비유하는 말이다.『大慧語錄』

   권9 大47 p.846b13,『禪要』「示信翁居士洪上舍」卍122 p.712a16 등에 나온다.

6)『仰山語錄』大47 p.583a25에는 “?山示衆云, ‘一切衆生, 皆無佛性.’”이라고 되어

   있다.

7) 고제(古堤)선사의 말이다.『仰山語錄』大47 p.585c1. “낭주의 고제화상은 평상

   시에 학인들이 찾아오면 매번 ‘가라! 그대에게는 불성이 없다!’라고 말했고, 학

   인들은 아무 대꾸도 못했다. 대답하는 자가 있더라도 본래의 뜻과 일치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景德傳燈錄』권9 大51 p.270a17. 朗州古堤和?, 尋常見僧

   來, 每云, ‘去! 汝無佛性.’ 僧無對. 或有對者, 莫契其旨.)

8) 연화지원(演化知遠)과 보자(報慈)선사 사이의 문답이다. “수주 호국사의 수증선

   사〈소산의 법제자〉가 연화대사를 따라 호남의 보자사에 있을 때, 보자선사가 

   법좌에 오르자 연화가 나와서 물었다. ‘진여불성이란 무엇입니까?’ 보자가 ‘누구

   에게 없느냐?’라고 되물었으나 연화는 그 뜻을 깨닫지 못했다. 마침내 좀 더 자세

   한 가르침을 청하자 보자가 말했다. ‘묻기만 하면 대답해 주겠다.’ 연화가 앞의

   질문을 그대로 하자 보자는 ‘누구에게 있느냐?’라고 되물었는데, 연화가 이 말을

   듣자마자 그 뜻을 깨달았다.”(『頌古聯珠通集』권34 卍115 p.435a11. 隨州護

   國守澄禪師〈嗣疏山〉, 因演化大師, 在湖南報慈, 値慈陞堂次, 化出問, ‘如何是

   眞如佛性?’ 慈云, ‘誰無?’ 化不契. 遂請益師, 師曰, ‘汝但問來.’ 化理前問. 師曰, 

   ‘誰有?’ 化於言下契悟.)

9) 불성이 있다는 것을 미리 보호막으로 전제하고 말하므로 마치 가려운 부위가

   신발에 가려 있어 긁어도 소용없는 것과 같이 문제의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10) 굉지정각(宏智正覺)이 무자 화두에 대하여 읊은 게송 중 한 구절로 아래에 제시

    된다.『宏智廣錄』권1 大48 p.17b18 참조. “나귀의 똥은 쓸모없고 지극히 천한 

    물건인 까닭에 쓸모없는 무공철추(無孔鐵鎚)에 비유된다. 열 가지 종류의 잘못된

    이해[看話十種病]는 비록 궁극적인 구절이 나타날 소식이기는 하지만 모두 의

    근(意根)에서 홀연히 세운 알음알이를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무공철추로써 하

    나하나 바꾸어주는 것이다. 조사가 이미 ‘무공철추에 대해서는 결코 이러니저

    러니 말할 여지가 없다’라고 하였으니 공부하는 자들은 절대로 궁극적인 구절

    에서 열 가지 종류의 삿된 이해를 하여 분별하려 들지 말고, 모름지기 정신을 흔

    들어 번뇌망상을 털어 없앤 다음 있는 힘을 다하여 화두를 들고 ‘이것은 무엇인

    가?’라고 살펴야 한다. 이것이 무자(無字)만을 드는 공부이다.”(『禪文手鏡』

   「無字揀病論科解」韓10 p.524c12. 驢糞是無用至賤物故, 以比無用之無孔鐵鎚

    也. 以十種錯解, 雖是末後句消息, 皆未脫意根撞立之識情故, 以無孔鎚, 一一換

    却也. 祖師旣云, 無孔鎚則必無揷?分, 學者切勿以末後句中十種邪解, 擬議計較, 

    直須??精神, 盡力提?看, ‘是箇什??’ 此單提無字.)

11) 두보(杜甫)의 시에 나오는 구절. 본서 181則 주석18) 참조. 굉지정각(宏智正覺)

    이 즐겨 사용했다.『宏智廣錄』권4 大48 p.40c16 참조.


대홍보은(大洪報恩)의 송 1


있고 또 있어 그 있는 길에는,

꽃도 있고 더불어 술도 있네.

하루 걸리는 길을 열흘의 일정으로 나누어 가다가,12)

남극성이 북두칠성에 매달린 모습을 앉아서 보노라.13)

大洪恩頌,“ 有有有路上, 有花兼有酒. 一程分作十程行, 坐看

南星懸北斗.”

12) 꽃구경도 하고 술도 마시며 여유롭게 간다는 뜻으로 ‘불성이 있다’는 유(有)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긍정을 나타낸다.

13) 남극성과 북두칠성은 각각 유(有)·무(無) 중 어느 한편을 상징한다. 유(有) 안에

    무(無)까지 포괄한다는 뜻이다.


[설화]

‘있고 또 있어’라 운운한 말은 유(有)의 구절이다. 유(有)도 있고 무(無)

도 있으니 ‘꽃도 있고 술도 있다’고 한 말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하루 걸

리는 길을 열흘의 일정으로 나누어 간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불성이 ‘있

다’는 것을 벗어나서 불성이 ‘없다’는 말도 있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大洪:有有云云者, 有句. 有有有無, 所謂有花有酒. 故云,‘ 一

程分作十程行也.’ 然則有佛性外, 無無佛性也.


대홍보은의 송 2


없고 또 없어 그 없는 상자에는,

칼도 없고 또한 책도 없다네.

세 차례 낙양에 들어갔으나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14)

몸을 돌려 동정호 위로 날아갔다네.

又頌,“ 無無無匣中, 無劒又無書. 三入洛陽人不識, ?身飛過

洞庭湖.”

14) 여동빈(呂洞賓)과 관련된 말이다. 대홍보은의 네 번째 게송 〈설화〉 참조. 여동빈

    이라는 존재를 알 수 있는 검도 없고 그 비책을 적은 책도 없듯이, 불성이 없다

    는 무(無)의 입장을 나타낸다.


[설화]

‘없고 또 없다’는 말은 무(無)의 구절이다. 유도 없고 무도 없으니 ‘칼도

없고 또한 책도 없다’라고 한 말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세 차례 낙양에 들

어갔으나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라고 한 것이다. 곧 불성이 ‘없다’는

것을 벗어나서 불성이 ‘있다’는 말도 있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無無無者, 無句. 無有無無, 所謂無劒無書. 故三入落陽人不識

云云. 則無佛性外, 無有佛性.


대홍보은의 송 3


있다고 했다가 없다 하고 없다 했다가 다시 있다 하며,

백 년 묵은 요괴가 허망하게 입을 열고 지껄이네.

한 구절이 바람 앞에 천둥같이 크게 울려 퍼지니,

우물 안 개구리 울음이 한밤에 사자의 포효와 같도다.

又頌,“ 有復無無復有, 百年妖怪虛開口. 一句當風震若雷, 井

蛙半夜同哮吼.”


[설화]

있다고 했다가 없다 하고 없다 했다가 다시 있다 하며:중간의 구절이다. 다음 게

송 중 ‘없다고 했다가 있다 하고 있다 했다가 다시 없다고 한다’는 구절도

같은 맥락이다.

백 년 묵은 ~ 입을 열고 지껄이네:있다는 말이나 없다는 말이나 모두 요괴

가 입을 열고 하는 말이라는 뜻이다.

한 구절이 ~ 울려 퍼지니:있거나 없는 그 어느 편에도 물들지 않은 한 구

절을 가리킨다.

우물 안 개구리 ~ 포효와 같도다:유의 구절과 무의 구절을 따라서 나온 것

으로 이것은 두 구절을 모두 비추어 긍정하면서 동시에 모두 차단하여 부

정하는 것이다.

有復無無復有者, 中間也. 下無復有有復無, 亦同也. 百年至口

者, 有無是妖怪開口也. 一句云云者, 不涉有無底一句也. 井蛙

云云者, 有句無句, 隨逐而出, 此雙照雙遮也.


대홍보은의 송 4


없다고 했다가 있다 하고 있다 했다가 다시 없다고 했거늘,

무슨 까닭으로 사람들은 자호15)를 찾아가 배우려 하는가?16)

천 리 사방이 똑같은 가풍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니,

주장자 한 자루에 두 사람이 함께 몸을 의지하는구나.

又頌,“ 無復有有復無, 何事人來訪子湖. 千里同風無足道, 一

條杖子兩人扶.”

15) 자호이종(子湖利?)을 가리킨다. 자호(紫胡)라고도 쓴다. 남전보원(南泉普願)의

    제자로서 본분을 비유하는 방편으로 개[狗]를 제시했다. 자호가 실제로 개를 길

    렀던 것은 아니고, 모든 것을 남김없이 물어 죽이고 파고들어올 여지를 남기지

    않는 부정의 수단으로써 개 짖는 소리를 내거나 ‘개를 조심하라!’라는 화두를

    제시한 것이다. “어느 날 법좌에 올라앉아 대중에게 말했다. ‘자호에게는 개 한

    마리가 있다. 위로는 사람의 머리를 물고, 중간에서는 심장을 물며, 아래로는 다

    리를 문다. 머뭇거리다가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어떤 학인이 ‘자호의 개 한 마

    리는 어떤 것입니까?’라고 묻자 자호가 ‘멍! 멍!’ 하고 짖는 소리를 냈다. 임제 문

    하의 두 학인이 법을 물으러 와서 막 발을 올리는 순간 자호가 ‘개를 조심해라!’

    하고 소리 질렀다. 두 학인이 고개를 돌려 살피자 자호는 방장으로 돌아갔다.”

   (『景德傳燈錄』권10 p.278c19. “一日, 上堂, 示衆曰, ‘子湖有一隻狗. 上取人頭, 

    中取人心, 下取人足. 擬議卽喪身失命.’ 僧問, ‘如何是子湖一隻狗?’ 師曰, ‘?! ?!’ 

    臨濟下二僧, 到參方揭簾, 師曰, ‘看狗!’ 二僧廻顧, 師歸方丈.)

16) 조주와 자호는 모두 남전보원의 제자이다. 조주가 이미 유와 무를 모두 말했는

    데, 무(無)만 내세우는 자호를 찾아가 배울 필요가 무엇인지 되묻는 말이다. 이

    하의 3구와 4구에 따르면, 이들의 수단은 다르지만 똑같은 가풍에 근거하고 있

    다는 뜻이다.


[설화]

무슨 까닭으로 사람들은 자호를 찾아 배우려 하는가:몸을 상하고 목숨을 잃지

않을 수 없으므로 찾아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세 차례 낙양에 들어갔다:양문공(楊文公)17)의『담원(談苑)』에 따르면, 여동

빈(呂洞賓)은 (養生을 위한) 검술을 터득하고 있었는데, 백여 세가 되도록

모습이 어린아이와 같았고 걸음걸이는 가볍고 빨랐으며 스스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고 한다. “아침에 백월(百越)지방을 떠나 저녁에 삼오(三

吳)지방으로 가고, 소매 속에 푸른 뱀18)을 감추어 두었으니 담력이 대단하

다. 세 차례 낙양에 들어갔으나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몸을 돌려

동정호 위로 날아갔다네.19)”

17) 974~1020. 북송(北宋) 진종(眞宗) 때 관리인 양억(楊億). 자(字)는 대년(大年)이

    고, 문공은 시호(諡號)이다. 광혜원련(廣慧元璉)의 재가 제자이자 시인이다. 이

    곳의 이야기는 『宋史』 권457에 나온다.

18) 청사(靑蛇). 보검(寶劍) 또는 일반적으로 칼을 비유하는 말이다.

19)『說?』권62하,『類說』권53 등에 나온다.


何事人來訪子湖者, 未免喪身失命也, 然則不須訪也. 三入落

陽. 楊文公, 談花20)□, 呂洞賓有劒術, 年百餘歲, 貌如?兒, 行

步徑疾, 自有詠云,“ 朝辭百越暮三吳, 袖裏靑蛇膽氣?. 三入

落陽人不識, ?身飛過洞庭湖.”

20) ‘花’는 ‘苑’의 오자.


천복본일(薦福本逸)의 송


불성이 있다고도 하고 불성이 없다고도 하며,

바른 것을 뒤집고 뒤집힌 것을 바르게 세우네.

맑은 못에 비친 달을 짓밟아 없애고,

눈금 없는 저울을 꺾어 부러뜨려라!

물속에서 불을 피우고,

허공에다 말뚝을 박는군.

눈먼 거북이 죽은 뱀 갉아먹는 것과 비교하랴!

위아래 어금니를 꽉 다물어야 하리라.21)

〈이 스님의 송은 다음 문답, 즉 어떤 학인이 조주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

고 묻자 ‘있다’라 하고 다른 학인의 똑같은 물음에는 ‘없다’고 하며 ‘그 놈은 업식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에 근거한 것이다. 또, 어떤 학인이 흥선(興善)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있다.” “화상에게도 있습니까?” “나는 없다.” “모든 중생이 누구나 불

성이 있는데, 화상은 무엇 때문에 유독 없습니까?” “나는 모든 중생이 아니다.”22)〉

薦福逸頌,“ 有佛性無佛性, 正却倒倒却正. 踏破澄潭月, 拗折

無星秤! 火向水中燃, ?從空裏釘. 肯類盲龜?死蛇! 一對牙

關緊?定.” 〈此師擧錄,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至爲有業識在. 又僧

問興善, “狗子還有佛性也無?” 善云, “有.” 僧云, “和尙還有否?” 善云, “我無.”

僧云,“ 一切衆生皆有佛性, 和尙因何獨無?” 善云,“ 我非一切衆生.”〉

21) 연못에 비친 달은 건져 올릴 수 없고 눈금 없는 저울은 물건의 무게를 헤아리는

    도구가 되지 못한다. 유와 무라는 조주의 말은 바로 그와 같이 어떤 분별의 근거

    도 가지지 않는 몰자미(沒滋味)한 화두이다. 달그림자를 그대로 믿고 잡으려 하

    거나 저울 눈금을 실물과 혼동하여 사유하는 것은 유와 무라는 말에서 자미(滋

    味)를 조작해 내어 죽은 말[死句]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화두로서의 무와 유

    는 그것을 낚아채려는 헛된 분별을 만나면 활발하게 움직이며 꿈틀거리는 독사

    와 다르지 않다. 확정된 통로를 가지고 있는 언어를 파먹고 사는 보통의 분별이

    포착한 상대는 전혀 위험하지 않은 죽은 뱀과 다르지 않다. 어느 한편의 격(格)

    에도 안주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유와 무를 번갈아 다룰 수 있는 종사의 솜씨라

    야 살아 있는 독사를 희롱하는 면모라 할 수 있다.

22) 뒤의 문답은『景德傳燈錄』권7「興善惟寬傳」大51 p.255a18 등에 나온다.


보령수의 송


젊어서는 배워서 이해했으나 근본에 어두웠고,

늙어서는 여전히 있다 없다는 분별에 막혔다네.

오래된 불상 순금인데 누가 그 색 분별하리오?

미혹된 상태로 기지를 부리며 오락가락 주저하네.

주저하지 마라!

있다고 하거나 없다고 하거나 그 이외엔 없노라.

保寧秀頌, “小年學解昧宗途, 老倒依還滯有無. 古佛純金誰辯

色? 惑爲機智競躊躇. 莫躊躇! 話有談無須是渠.”


천동정각(天童正覺)의 송 1


개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고,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도 하네.

곧은 낚시는 원래 목숨 버리려는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인데,23)

냄새에 현혹되어 따라다니고 향기를 찾는 납자들은24)

시끄럽게 지껄이며 분별하여 말을 하는구나.

모든 물건을 펼쳐 놓고 큰 점포를 열었으니,

주인이 애초에 신중하지 못했다고 욕하지 마라.

약간의 티를 거짓으로 가리켜 옥을 되찾아 돌아가니,

진나라 왕은 인상여(藺相如)의 속마음을 알지 못했네.25)

天童覺頌,“ 狗子佛性有, 狗子佛性無. 直釣元求負命魚, 逐氣

尋香雲水客, ??雜雜作分疏. 平展演大鋪舒, 莫怪?家不愼

初. 指點瑕疵還奪璧, 奏王不識藺相如.”

23) 화두는 물어도 걸리지 않는 곧은 낚싯바늘과 같다. 있다고 하건 없다고 하건 그

    어느 편도 되씹으며 생각할 의미가 없는 말인데, 그렇게 분별하며 자기 본분의

    목숨을 등진 사람들이 걸려드는 것이다. 바늘의 꼬부라진 부분을 잘라 곧게 만

    든 낚싯바늘을 던져 놓고 ‘목숨을 버린 놈들은 걸려들어라!’라고 했던 강태공

    (姜太公)의 말에서 비롯된다. 주어진 말에 얽매여 본분의 목숨을 잃는 것을 ‘목

    숨을 버리려는 물고기’에 비유한다. “강상(姜尙:姜太公)이 겨우 연명하던 시기

    에 곧은 낚싯바늘로 위수의 물고기를 낚았다. 미끼용 먹이를 쓰지도 않고 수면

    에서 세 척쯤 떨어진 높이로 낚싯대를 드리우고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목숨을

    버린 놈들은 걸려들어라!’”(『武王伐紂平話』 권중. 姜尙因命守時, 直鉤釣渭水

    之魚. 不用香餌之食, 離水面三尺, 尙自言曰, ‘負命者上釣來!’)

24) 냄새와 향기는 유와 무라는 말에 들어 있는 갖가지 속박된 관념을 가리킨다.

25) 무라고 했다가 유라고 뒤집고, 유라고 했다가 무라고 뒤집는다. 이와 같이 유와

    무를 주었다가 다시 빼앗음으로써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도록 하는 수단을 나타

    내기 위한 고사이다. 이 고사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변화(卞和)라는 사람이

    초(楚)나라 형산(荊山)에서 귀중한 옥을 캐었는데, 당시 초나라보다 강대국이었

    던 진(秦)나라의 소왕(昭王)이 이 옥을 탐하여 15개의 성과 바꾸자고 속여 가져

    오도록 했다. 이때 초나라에서 보낸 사신 인상여(藺相如)가 옥에 있는 흠을 가리

    켜 보여주겠다고 기지를 부려 되찾아왔다. 아무 흠이 없으므로 이 옥을 완벽(完

    璧)이라 하고, 성과 바꿀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여 연성지벽(連城之璧)이라고도

    하며, 형산옥 또는 화씨벽(和氏璧)이라고도 한다.


천동정각의 송 2


조주가 있다고도 말하고 없다고도 말하였기에,

개의 불성에 대해 세상에서 갖가지로 분별하여 말하네.

아는 체하여 부끄러운 표정을 짓느니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낫다.

조주의 마음은 진실하였으니 두 가지로 거칠게 나눈 말을 이상하게 여

기지 마라.26)

700갑자27)를 산 선의 달인28)

나귀 똥29)을 가지고 있다가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그것을 눈알과 바

꾸어 주었다.

又頌,“ 趙州道有, 趙州道無, 狗子佛性, 天下分疎. 面赤不如

語直, 心眞莫怪言?. 七百甲子老禪伯, 驢糞逢人換眼珠.”

26) ‘있다’·‘없다’라는 두 가지로 나누어 어느 편에도 의지하지 못하도록 한 것에 이

    공안의 비결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마음은 진실하였다고 한 것은 (비록 있다·

    없다 양단으로 갈라서 말했지만 사실은) 잡을 여지가 없는 둥글둥글한 쇠망치[無

    孔鐵鎚]를 주려 한 조주의 뜻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거칠다’고 말한 것이다. (있

    다거나 없다거나 어느 편에서도) 종적을 잃도록 만드는 조주의 비결은 희롱하는

    말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진실한 것이기 때문이다.”(『禪文手鏡』「無字揀病論

    科解」韓10 p.524c11. 心眞, 意在無孔鎚, 故言?. 迷?訣, 似是戱談故.)

27) 조주는 약 120세를 살았고(778~897), 1년에 60갑자(甲子)가 6번 있으므로 약 720

    번의 60갑자를 보낸 것이다.

28) 선백(禪伯).『祖庭事苑』권2 卍113 p.40b2에 따르면, ‘백’은 존칭이며 후백(厚伯)

    의 백과 같다고 한다. 마치 시(詩)에 능한 자를 시백(詩伯)이라 하듯이 선에 능

    통한 달인을 일컫는다.

29) 주석10) 참조.


[설화]

천동의 두 게송은 유라고 하거나 무라고 하거나 모두 옥을 되찾아 오고

나귀 똥으로 눈알을 바꾸어 주는 것과 같은 수단이라는 뜻이다.

天童二頌, 道有道無, 皆是還奪璧, 驢糞換眼珠.


법진수일(法眞守一)의 송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도 하고,

개에게 불성이 있다고도 하네.

처음부터 이 양극단으로 갈라 내달릴 뿐,

한 발의 화살로 두 관문을 맞히지 못하니,

업식이 이전 그대로여서 다시 개가 되었네.30)

法眞一頌,“ 狗子佛性無, 狗子佛性有. 從來只向兩頭走, 未能

一鏃破雙關, 業識依前還作狗.”

30) 업식이 있기 때문에 불성이 없다는 논리는 무자 화두를 타파하는 핵심적인 계

    기가 되지 못한다. 불성의 유·무라는 양극단이 모두 관문이듯이 업식의 유·무

    또한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라 의미를 확정할 수 없는 관문이다. 아래 진정극문

    의 게송의 취지도 마찬가지이다.


진정극문(眞淨克文)의 송


업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 말,

누가 뜻이 깊지 않다고 하는가!

바다가 마르면 결국 밑바닥이 드러나지만,

사람은 죽어도 그 속마음을 알 수 없다네.

眞淨文頌,“ 言有業識在, 誰云意不深! 海枯終見底, 人死不

知心.”


오조법연(五祖法演)31)의 송

31) 오조법연(1024~1104)은 무자 화두에 대하여 최초로 간화선의 방식으로 궁구하

    는 방법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게송을 읊은 선사이다. 뒤에 이에 대한 상당법문

    이 나온다.


조주가 드러낸 칼날이여!

서릿발같이 싸늘한 빛 번득이네.

다시 어떤 뜻이냐고 묻는다면,

몸을 갈라 두 토막을 내리라.

白雲演頌,“ 趙州露刃劒! 寒霜光??. 更擬問如何, 分身作

兩段.”


대혜종고(大慧宗? : 경산종고)의 송


학인이 개의 불성을 묻자,

조주는 없다고 대답했다네.

그 자리에서 달마의 후손을 파멸시키는 족속32)일지라도,

아직은 대장부답지 못하도다.33)

徑山?頌,“ 有問狗佛性, 趙州答曰無. 言下滅胡族, 猶爲不

丈夫.”

32) 멸호족(滅胡族). 멸호종족(滅胡種族)과 같은 말. ‘호종’은 부처나 달마의 종자를

    가리킨다. 곧 불교도 또는 선종의 후손을 나타낸다.

33) 선종의 후손을 파멸시키는 무리들의 기개도 무(無)라고 대답한 조주의 선기(禪

    機)와 비교하면 아직 대장부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죽암사규(竹菴士珪)의 송


선덕문(宣德門) 앞을 지나다가,

고개 돌리자마자 화를 불러들였네.34)

만일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란다면,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앉아 있어라.

竹庵珪頌,“ 宣德門前過, 廻頭便招禍. 若要無事時, 且歸屋

裏坐.”

34) 선덕문은 임금이 사는 궁전의 문[宮門]을 말한다. 금문(禁門)이라고도 하는데, 임

    금이 거처하기에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금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궁전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수상한 자로 의심을 받고 화를 당하듯이, 유와 무로 제시한

    관문에 대하여 분별하려는 순간 벌써 그 본질에서 어긋난다는 뜻을 나타낸다.


[설화]

선덕문이란 금문을 가리킨다.

竹菴:宣德門者, 禁門也.


육왕개심(育王介諶)의 송


천 길 바다 속의 물고기 머리에 뿔이 났고,

만 길 절벽 위에서 호랑이가 휘파람을 부네.

우습다, 조주가 개의 불성이 없다고 한 말이여!

달을 향해 맑은 허공에 대고 개가 짖으리라.

育王諶頌, “千尋浪底魚生角, 萬?崖頭虎嘯風. 却笑趙州無佛

性! 猶能向月吠晴空.”


[설화]

1구는 불성이 있음에 철저한 것을 나타내고, 2구는 불성이 없음에 철저

한 것을 나타낸다. 3구에서는 조주가 ‘불성이 없다’고 한 말이 ‘불성이 있

다’는 말에 상대하여 한 말이므로 불성이 있음은 불성이 없음이며, 있거나

없거나 그 어느 하나가 다른 것과 짝이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우습다

고 한 것이다.

맑은 허공에 대고 개가 짖는다:‘가을에는 개가 짖고 봄에는 닭이 운다’35)

옛말에 따른다.

育王:一句, 有佛性到底也, 二句, 無佛性到底也. 三句, 趙州

無佛性, 對有佛性言也, 故有佛性, 還是無佛性, 有無未能絶對

故, 可笑也. 吠晴空者, 古云,‘ 中秋犬吠, 春日鷄鳴.’

35) 안락한 세월을 나타내는 말 중 하나. 이 말을 선문답으로 활용한 예가 『景德傳

    燈錄』권8「石霜大善傳」大51 p.259c22에 보인다. “‘불법의 근본적인 뜻은 무엇

    입니까?’ ‘봄날에는 닭이 운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가을에는 개가 짖는다.’”

    (僧問, ‘如何是佛法大意?’ 師云, ‘春日鷄鳴.’ 僧云, ‘學人不會.’ 師云, ‘中秋犬吠.’)


밀암함걸(密庵咸傑)의 송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니,

사람을 죽이고 목숨을 상하게 하는구나.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백천 가지이지만,

삿된 것으로 인하여 정도를 깨우치리라.36)

密庵傑頌,“ 狗子無佛性, 殺人便傷命. 楚痛百千般, 因邪却

打正.”

36) ‘불성이 없다’라는 화두를 삿된 것이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했으며, 이것을 관문

    으로 삼아 궁구하면 그 뜻을 타파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무위자의 송


불성이 개에게는 없다고 분명하게 말했는데,

제방에서는 무슨 까닭에 굳이 관념과 형상을 추구할까?

여전히 흙덩어리를 쫓고 냄새에서 찾으니,37)

어찌 자호의 개를 도울 위풍이 있겠는가!38)

無爲子頌,“ 佛性明言狗子無, 諸方何事强名摸? 尙猶?塊尋

香氣, 豈有威風助紫胡!”

37) 흙덩이를 던진 사람을 물지 않고 흙덩이를 쫓는 어리석은 개에 비유한 말. 여기

    서는 무라는 표면적인 언어의 맥락에서 단서를 잡아 화두의 관문을 타파하려는

    시도를 나타낸다. “모든 범부가 오로지 결과만 보고 그 조건이 되는 인연을 살

    필 줄 모르는데, 마치 개가 자기에게 던져진 흙덩이를 물려 쫓아가고 던진 사람

    을 쫓지 않는 것과 같다.”(『大般涅槃經』권25 大12 p.516b12. 一切凡夫, 惟

    觀於果, 不觀因緣, 如犬逐塊, 不逐於人.)

38) 남의 말에서 단서를 찾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곧바로 당사자를 물어버리는 자호

    의 개와 대비시키고 있다. “흙덩이를 쫓고 냄새에서 찾는다면 뛰어난 개가 아니

    다.”(『五燈全書』권61「空相珪章」卍141 p.311b12. 逐塊尋香, 未爲好狗.)


열재거사의 송


조주는 사농의 인장을 위조하여 찍고 따라갔으나,39)

날은 저물고 길은 막혀 되돌아왔다네.

호랑이로 착각하여 쏘아40) 화살깃까지 박혔고,

잘못 찍은 점이 도리어 파리 모양이 되었네.

悅齋居士頌, “趙州倒用司農印, 日暮途窮且逆行. 射虎不眞俄

沒羽, 忽然誤點却成蠅.”

39) 도용사농인(倒用司農印). 사농(司農)이란 한(韓)나라 구경(九卿) 가운데 농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벼슬. 시급한 상황에 대응하여 적절하게 변화하는 꾀를 비

    유한다.『舊唐書』권128「段秀實傳」에 나오는 고사에 따른다.

40) 본서 184則 주석51) 이광(李廣)의 고사 참조.


[설화]

잘못 찍은 점이 도리어 파리 모양이 되었네:조비(曹丕)41)가 손권(孫權)을 위

해 병풍에 그림을 그리다가 먹물이 잘못 떨어져 파리 모양이 되었는데,

손권이 살아 있는 파리로 알고 손을 들어 털었다는 고사를 인용한 구절

이다.42)

悅齋:誤點却成蠅者, 曹丕爲孫權?扇, 誤點成蠅, 權以爲生

蠅, 擧手拂之.

41) 조비가 아니라,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화가 조불흥(曹不興)이 맞다.

42)『曆代名?記』「曹不興」참조.


취암수지(翠?守芝)의 염


“있다고도 말하고 없다고도 말하여 하나의 내기 판에 이기는 패가 두

개인 격이 되었으니, 이제 어떻게 말하겠는가?”

翠?芝拈,“ 說有說無, 兩彩一賽, 如今作?生道?”


[설화]

유와 무 그대로인 상태에서 말하라는 것일까? 아니면 유와 무를 벗어난

상태에서 말하라는 것일까?43)

翠巖:卽有無而道耶? 離有無而道耶?

43) 그대로인 상태는 즉(卽), 벗어난 상태는 리(離). 즉과 리를 모두 의문으로 만들

    어 즉도 아니고 리도 아닌 것이 화두의 본래 본질이다. 곧 유와 무를 모두 벗어

    나지도 않고 유와 무 그대로 일치하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 본서 181則「百丈再

    參」에 대표적인 사례가 나온다.


광령조의 상당


이 공안을 제기하고 ‘업식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구절에 이르러 말

했다. “이 공안에 대한 총림의 비판은 매우 많다. 혹은 ‘개한테서 무슨 불

성을 찾는가? 질문하는 자는 불성이 없었다’라 하고, 혹은 ‘풍자하는 말로

그를 대한 것이다’라고도 하며, 혹은 두 손을 펼쳐 보이기도 한다. 또한 어

떤 학인이 수산주(修山主)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수

산주가 ‘있다’라고 대답했다.” ‘알면서 고의로 범했다’라고 한 구절에 대해

말했다. “대중들이여, 질문은 똑같았는데 조주는 어째서 ‘없다’고 대답했

고 수산주는 어째서 ‘있다’고 대답했을까? 대중들 중에는 ‘종사들이 하는

말이란 시기에 따라 적절히 응하는 것이므로 없다고 한 말도 옳고 있다고

한 말도 옳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유와 무 어느 편에도 떨어지지 않고

유와 무의 중간에 있다’라고 말하기도 하며, 혹은 ‘『열반경』에서 부처님

께서 불성이 있다고 설하기도 했고, 또한 불성이 없다고 설하기도 했다’44)

라 말하기도 하고, 혹은 ‘그대가 다만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스스로 주재하

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만약 모두들 이와 같

이 이해한다면 이는 모두 불성이 성스럽다는 생각에 마음이 얽매이고, 식

(識)에는 법이라는 티끌이 붙어 있어 무라고 말할 때는 무에 집착하고 유

라고 말할 때는 유에 집착하는 꼴이 되니, 두 가지 모두 한편에 제쳐 두는

것만 못할 것이다. 정법안45)을 만약 이와 같이 헤아린다면 달마대사가

인도로부터 와서 전한 가르침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조주노인46)과 수산주화상에게도 굴욕을 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아는 체하며 부끄러운 표정을 짓느니 솔

직하게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낫다.”47)

廣靈祖, 上堂, 擧此話, 〈至〉有業識在, 師云,“ 此箇公案, 叢林

批判甚多. 或云,‘ 狗子討甚佛性? 問者無佛性.’ 或云,‘ 是冷

語對伊.’ 或乃展開兩手. 又有僧問修山主,‘ 狗子還有佛性也

無?’ 主云,‘ 有.’” 〈至〉知而故犯,“ 大衆, 問旣一般, 趙州爲甚

答無, 山主爲甚答有? 衆中道,‘ 宗師家出語, 臨時應用, 說無

也得, 說有也得.’ 或云,‘ 不落有無, 在有無中閒.’ 或云,‘ 涅

槃經, 佛自說有性, 又說無性.’ 或云, ‘汝但承當取, 自作主

宰.’ 若?如此解會, 盡是情存聖量, 識附法塵, 說無時着無, 說

有時着有, 不若都盧撥在一邊. 正法眼藏, 若伊?商量, 祖師西

來, 大殺無補, 亦乃屈他趙州老人, 山主和尙. 且如何卽是?”

良久云,“ 面赤不如語直.”

44)『大般涅槃經』권26 大12 p.521b5.

45) 正法眼藏. 진리를 보는 바른 눈. 조주가 있다고 한 말이나 없다고 한 말이나 모

    두 정법안장에서 나온 것이다.

46) 老人. 존경하는 사람에게 붙이는 말.

47) 굉지정각(宏智正覺)의 말을 활용한 것.


[설화]

천동이 읊은 두 게송과 동일한 뜻이다.

廣靈:天童二頌同義


오조법연의 상당


이 공안을 제기하고 말했다. “대중들이여! 그대들은 평상시에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 노승은 평상시에 단지 ‘무(無)’라는 글자만 들 뿐 다

른 궁리는 하지 않는다. 그대들이 이 한 글자만 뚫는다면 세상 사람 그 누

구도 그대들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뚫겠는가? 이

미 훤하게 뚫은 사람이 있는가? 있다면 나와서 말해 보라. 나는 그대들이

‘있다’고 말하기를 바라지도 않고, ‘없다’고 말하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있

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대들

은 어떻게 말하겠는가? 안녕히들 계시오!”

白雲演, 上堂, 擧此話云, “大衆! ?諸人尋常作?生會? 老

僧尋常, 只擧無字便休. ?若透得者一?字, 天下人不奈?

何. ?諸人作?生透? 還有透得徹底?? 有則出來道看. 我也

不要?道有, 也不要?道無, 也不要?道不有不無. ?作?生

道? ?重!”


[설화]

유라고 말하거나 무라고 말하거나,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고 말하거

나 이 모든 것이 분별하는 인식[情識]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니, 가지와 덩

굴에 다시 가지와 덩굴을 덧붙여 복잡하게 만드는 짓이다. 이것들을 떠나

서 어떻게 꿰뚫을 것인가?48)

白雲:道有道無, 道不有不無, 皆是情識邊事, 枝蔓上更加枝

蔓, 離此如何透得?

48) 유와 무, 불유불무 등이 모두 쓸데없이 복잡한 말을 덧붙이는 것에 불과하므로

    이 모든 언어의 형식을 벗어나서 무자를 꿰뚫어야 한다는 뜻이다.


육왕불지(育王佛智)의 상당


이 공안을 제기하고 말했다. “한 방울의 물이 모든 강물을 혼탁하게 만

들고, 한 번의 망치질로 온갖 구멍을 뚫는다. 만약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

알아차렸다면 조주노인의 뜻뿐만 아니라 대장경 전체의 교설까지 한순간

에 밝혀졌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다시 눈 위에 서리를 덧붙여

쓸모없는 짓을 하듯이 거듭 해설을 달아 주리라.” 이어서 말했다. “개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니 바다 밑의 기린이 크게 울부짖을 일이고, 개에게 불성

이 없다고 하니 혀로 수미산을 밀어내려는 꼴이다. 눈꽃이 산꼭대기를 아

무리 뒤덮는다 해도, 푸른 하늘에는 여전히 달이 홀로 밝으리라. 홀로 밝

은 달이여, 천태산의 즐률나무에서 산호가 자란다.”

育王智, 上堂, 擧此話云,“ 一滴混千江, 一鎚開衆竅. 若向聲

前薦得, 不但趙州老人, 一大藏敎, 一時明破. 其或未然, 更向

雪上加霜, 重爲注破.” 乃云, “狗子佛性有, 海底麒麟大哮吼;

狗子佛性無, 舌頭着須彌盧. 任使雪花封岳頂, 碧天依舊月

輪孤. 月輪孤, 天台?栗長珊瑚.”


[설화]

‘한 방울의 물이 모든 강물을 혼탁하게 만든다’라는 말은 불성이 있다는

구절을 나타내고, ‘한 번의 망치질로 온갖 구멍을 뚫는다’라는 말은 불성

이 없다는 구절을 나타낸다.

‘개에게 불성이 있다고 ~ 울부짖을 일이다’라는 말에서 바다는 지혜의

바다요 기린은 상서로운 존재로서 또한 (유와 무를) 수컷과 암컷처럼 대

치시킨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깨달았다는 분별을 잊으면, 깨달은 그대로

불성이다’49)라고 하였다. ‘크게 울부짖을 일’이란 대단히 두려움을 주는 것

이니 범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 수미산을 밀어

내려는 꼴이다’라는 구절에서 혀로 수미산을 밀어내려는 꼴이란 지혜의

산 앞에 나타난 불성을 나타내며, 그것을 밀어낸다는 것은 그대로 남겨 두

지 않는다는 뜻이다.

‘눈꽃이 산꼭대기를 뒤덮는다’는 말은 산이 높이 치솟아 험하며 몹시 춥

다는 뜻이니 불성이 없음을 나타낸다. ‘아무리 ~해도’[任使]라 한 것은 다

음 구절을 부각시키기 위한 말이다. ‘푸른 하늘에는~’라 한 말은 예전 그

대로 변함없이 불성이 분명히 있다는 뜻이다. ‘천태산의 즐률나무에서~’

라는 말에서 천태산은 불성이 없다는 뜻을 나타내고, 산호는 불성이 있다

는 뜻을 나타낸다.

育王:一滴混千江者, 有佛性也;一鎚開衆竅者, 無佛性也.

狗子至哮吼者, 海則智之海, ??卽瑞物, 亦雌雄也. 他處云,

‘忘知於覺, 覺則佛性.’ 大哮吼, 則甚可怖畏, 不可犯干也. 狗

子至彌盧者, 舌頭著須彌, 則智之山前, 所出佛性也, 著

則不存也. 雪花封嶽頂者, 高危?峻, 寒威威地, 卽無佛性也.

任使者, 復起下文也. 碧天云云者, 依前是佛性更分?也. 天台

云云者, 天台則無佛性, 珊瑚則有佛性也.

49) 운문문언(雲門文偃)의 말.『雲門廣錄』권중 大47 p.559b2.


죽암사규의 상당


어떤 학인이 이 공안을 제기하고 “그 뜻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물었

다. 죽암이 말했다. “한번 뱀에게 물리면 끊어진 두레박 끈을 보고도 무서

워한다.”

竹庵珪, 上堂, 僧擧問此話, “意旨如何?” 師云, “一度着蛇咬,

?見斷井索.”


[설화]

불성이 있다는 말에서 의문을 가지면 불성이 없다는 말에서도 의문이

없을 수 없으니, 불성이 있다는 말에 대하여 의문이 없어야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터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竹菴:有佛性處有疑, 無佛性處亦不無疑也. 若有佛性處無疑,

可得無佛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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