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원시 성신한의원 황 연 규
강제 한일합방 후에 국가제도를 일본식제도로 하였고 마을의 이름과 사람의 이름도 일본식
으로 바꾸어 살도록 강요되었다. 이 틈바구니에서 일본은 조선을 일본지방의 일부분으로
간주해 그들의 제도를 시행했는데 의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 의사제도의 모방과 메이지 유신과 함께 파생된 침사, 구사 등의 유사의료행위가 일본인
들의 침략과 함께 일본 지방제도로 도입돼 시행되었다.
한국은 당시 ‘내침의’로 불리던 일부의 외과의사는 양의학적 교육을 통해 양의사가 되기
도 하였고(예: 피병준) 일부는 당시 일제의 강제 한의사 격하에 해당하는 ‘의생’
(예: 대부분의 한의사, 典醫 김동석)으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또, 일본에서 한국으로 온 일본인 침사들이 일본의 지방제도에 의해 침술업을 하기도 하였다.
일본식 제도가 시작된 의생(한의사)은 100% 조선인이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인 1945년 12월
까지 대한민국에서 침사 구사의 회장은 전부 일본인이었는데 根本介藏에서 板野理一郞
으로 이어진다. 해방 이후 1946년 3월 대한침구의사회 최초의 한국인 회장은 한의사 이태산
(한의사 번호 466번)이었으며 이후에는 일제시대 일본인 밑에 있던 부회장 황진서가 회장을
맡았다.
사실 오늘날 침사, 구사라고 말하는 단체는 일본의 제도인데 전라남도를 살펴보면 1917년
침사 23명(한국인 5명), 구사 23명(한국인 4명)이었으며 순수 한국인으로 구성된 의생은
581명이었다. 하지만 1939년에는 일본의 지방제도의 일부에서 파생된 침사, 구사들은
침사 47명, 구사 40명으로 일제의 시책에 의해 증가한 방면 ‘한의사 도태정책’에 의한
한의사는 347명(40.38% 감소)으로 줄어들었다.
침구학은 일제시대에도 한의사(의생)단체의 노력을 볼 수 있는데 당시 대표적 儒醫 석곡
이규준 학파(소문학파)와 연관된 1920년대 영소학회 (회장 한의사 안효식과 회원 전석붕,
방주혁 등)와 『수진자해 의경정의』등에서 볼 수 있다. 회원인 방주혁(의생번호 5번)은
한의사, 독립운동가, 정치가로 유명한데 구한말 侍醫로서 구한말 태의원 경을 지낸
이종찬 前국회의원의 증조부 이유승과 아들인 태의원 부제조를 지낸 이시영과 친밀했으며
해방 후에는 이시영의 민주당 정치고문으로 대한한의사협회 고문으로 대한민국 정치
사에도 주요한 인물이다.
또, 일제시대 한의학 교과서에 해당하는 한의사 지석영(의생번호 6번) 校閱 성주봉 編輯
의 『한방 의학 강습서』에도 침구학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남채우의
『청낭결』에도 한의사로서 침구학 관련 집필이 있다.
1950년대 경희대 전신의 한의대에서는 ‘침구학을 배우지 않았다’라는 허위사실을 유포
하는 일부 일제 잔재의 침사의 행위는 명예훼손에 해당 하는데, 사실 당시 학교를
다닌 한의사들에게 전화통화만 하여도 간단히 확인된다.
당시 침구학 담당 교수인 이창빈교수는 ‘6.25 전쟁’ 당시 부산 피난시절에 원광대 교수와
학자로서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일제시대 침구학에 연구를 하였던 경기도 前회장
전석붕이 있고 돌팔이들이 침구사로 알고 있는 ‘낙원동 갑자원 한의원’의 강효웅한의사
가 있으며 경희대, 원광대 교수분들로 이어지는 학문적 계파를 볼 수 있다.
또, 침구학 담당교수인 안정후 교수는 『(자율신경 부조증의 조절과) 침향의 향기』,
『침구기초학』등의 서적과 부항요법 등의 논문을 저술하였는데 최근에도 경남한의사회
에서는 재편집하여 연구하고 있는 서적이다. 당시 한의대 내과학 교수인 김장헌은 침구학
에 능통하였으며 『영소침구경』의 저술에 관여하였다. 이외에도 52년 부산에서 경락학
을 강의한 손봉호가 있다.
1950년대 대한한의사협회의 ‘동양의학회 학술원’에서는 침구과에 이창빈, 강효웅
(갑자원 한의원), 홍종헌(천부 한의원), 홍순승(행림한의원, 행림학원 이사, 『홍가정진비전』
저자, 대한한의사협회 당시 고문)등의 임원진이 있었는데 강효웅은 일제시대 의생(한의사)
에 합격하여 황해도 사리원에서 서울 낙원동으로 사람들에게 침으로 ‘神人’으로 불리었으며
일제시대에는 일본의 궁성에 초청되어 치료하기도 하였다. 52년 경희한의대 전신의 재단
감사와 서울시한의사회 이사를 역임했으며 그의 동생 원광대 한의학과 강순수교수와
가족들은 한의사로서 활동하고 있다. 강순수 교수는 『내 삶의 단상』에 그의 형 강효웅에
관해 기술하였다.
이외에도 50년대 침구학에 명성이 있는 한의사로 동양의약대학부속(경희대 전신)
한방병원인 만화당한의원의 권영준교수가 있다.
1960년대 이전의 경우에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검정고시’ 출신자 중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 한의사들은 침구학 교육을 받았는데 50년대에서 60년대 경희대 출신자들은 침구학
교육을 통해 정식으로 교육을 받았다. 대표적인 예로는 『대한한의사협회 40년사』에 53년
도 졸업생의 성적증명서가 있는데 학과내용을 살펴보면 침구학, 진단학, 산부인과, 내과
, 소아과 등의 과목을 배웠는데 당시 졸업생인 원로분들의 증언과 문서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사실 유사의료업이란 ‘일제 식민지 정책의 잔재’에 해당하는 규정으로 기존 일본제도의
기득권자(일제시대 제도 퇴출)를 위해 남겨둔 사문화된 법률을 다시 일제 잔재를 부활
시키려는 의도로써 이해하기 힘들다.
의생(한의사)의 경우 일제시대에는 도서 벽지의 진료활동을 위해 명맥을 유지하였고
과거 60년대에는 무의면의 의료 취약지구 해소책을 위해 ‘동원한의사’로 한의사의
희생을 강요했으며 63년 한의대가 6년제가 확립되면서 민족의학을 묵묵히 발전시켜왔다.
한의사로서 일본제도(침사 구사 제도)의 부활을 요구하는 세력을 보니 4월 28일날 이순신
장군의 생신에 대한해협을 ‘현해탄(일본영토 공식지명 : げんかいなだ)’으로 부르면서
독도를 ‘우리 땅’이라고 하는 일부 언론의 태도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아 씁쓸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