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해 보이는군,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나는 이룰수 없는 일이고! 행복하세요, 가족분들!”
어느 토요일 아침, 정균은 여전히 두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호반을 조깅하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속도를 줄였다.
호반에서 아기 유모차를 밀며 담소하는 젊은 부부와, 어느 정도 큰 아이들과는 따로 노는듯 대략 40대 정도로 보이는 중년 부부가 손을 잡고 산책을 하는 것을 목격하자, 미국의 팔로스 버디스 해변에서의 비장한 선언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속력을 올리며 내달렸다.
“캐더링 음식이 방금 도착했다고 하니 내려가 봅시다”
대형 독서모임의 리더인 지역 문학가 박선생이 폐회를 선언하고 사람들을 모아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달온 음식들을 가져오자고 말한다.
강원도 춘천시의 낡은 상가 건물의 2층에는 '춘천시 작가협의회'라는 작은 간판이 달려 있었고 여기서 서로의 지식과 교양을 뽐내는 열기가 내려앉으며 독서토론모임은 끝이 났다.
다섯개의 각각 작은 방에서 예닐곱명 정도의 멤버들이 쏟아져 나오며 두달 동안 함께한 독서클럽 멤버들은 저마다 아래로 내려가 배달 음식과 음료수와 주류들을 받아 올라오고 있었고 몇몇 여성 회원들은 대형 사무실 테이블에 보를 씌우고 회식자리를 셋팅하고 있다.
정균도 내려가서 음식을 가지고 올라와 테이블에 놓았다.
반주를 겸한 식사가 시작되자 이번 멤버들끼리의 못다한 이야기들, 서로의 이야기들과 여러 가십들을 나누고 있었다.
의도한 것인지 의도하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정균의 옆자리에는 유성하라는 여자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지만 수시로 정균의 분위기를 스캔하려 했다.
순간적이지만 먼 테이블에 앉은 다른 그룹의 두세명 정도의 젊은 30대 초반의 미혼 여성들은 모르는 척하면서도 두 사람의 분위기를 하나씩 하나씩 입력하는 듯 했다.
정균은 사람들의 분위기에 발맞추어 밝게 대화에 스며 들고 있었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성하가 정균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채선생님, 제 잔도 한잔 받아 주세요”
“어, 나 술고래 아닌데”
“다른 분들 잔은 잘도 받더만요”
“그럼 제가 먼저 따라드릴께요”
이것은 성하가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도 정균의 행위를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서로 잔을 따라주었다.
한잔 들이킨 성하는 정균에게 살짝 따지는 말투로 그전 일을 추궁했다.
“제 독주회때 우리 쎌 멤버들 다 오셨는데 채선생님만 안 오셨더라구요”
“전 클래식은 젬병이라......들으면 잠이 옵니다. 그냥 잠만 자는게 아니라 코까지 골게 되지요. 어찌 해보려 해도 되질 않아요. 민폐가 될까봐서리”
“쾌활하고 경쾌한 곡부터 오프닝을 한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그러면 다음달에 열리는 저희 춘천시관현악단 연주회 티켓 얻어 드릴께요. 오프닝 곡으로 절대 잠이 오지 않는 천국과 지옥서곡으로 준비 중이에요. 그리고 피아노 협연에 조xx이 오기로 되어 있어요. 무료티켓 아무나 드리는거 아니에요”
정균은 옆자리의 성하에게서 나는 익숙한 체취, 꽃내음을 살짝 머금은 미스-디올 향수 냄새에 이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디올 브랜드 향수는 전 부인 솔희가 선호하는 브랜드였고 결혼기념일이나 솔희의 생일 때 디올 브랜드 것을 골라야 했기에 나름 일가견이 있었다.
솔희가 즐겨 뿌리던 향수와 같은 향수를 뿌린 여인, 그것도 고등학교에서부터 콘서바토리까지 똑같은 학교를 다닌 여인이 옆에 있다는건 그에게 잊고 있던 트라우마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사랑하는 아내 솔희에게 버림받은 정균은 한동안 정신적 방랑과 자학을 일삼핬지만 미국이민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뒤 마음을 다 잡았다.
그것은 1년 이상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일중독자처럼 일에 몰두하며 한편으로는 아침 조깅과 더불어 저녁때는 킥복싱 도장에 등록해 스트레스를 풀며 그곳에서 역기를 부지런히 들어 올렸으며 주말에는 자전거를 타고 강원도 곳곳의 산야를 내달렸다.
솔희의 화려한 말발 혹은 때아닌 갑작스러운 일갈과 날카로운 고성 앞에서 바보같이 말도 못하고 하잘 것 없는 논리로 박살났던 경험을 떠올리며 정균은 그 지역의 가장 큰 독서 모임에 들어갔다.
문학, 자기계발, 처세, 역사, 상식, 과학 등 전 분야의 책을 리더가 정해주고, 매번 그룹을 짜서 바꿔준다.
지역문학가인 박학동 선생이 이끄는 이곳은 대략 35여명의 회원을 거느린 곳으로 6~7명이 다섯개의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책 한권 떼고 새 책을 손에 잡게 될 때마다 매번 소속 그룹이 달라졌기 때문에 은근히 새로운 사람들에게 적응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사회생활에도 도움이 되었다.
석달전 미국에서 장기 체류를 청산한 유성하라는 33세의 여성이 모임에 새로운 멤버로 추가되었다.
그녀는 별다른 무늬도 디자인도 없는 모노톤의 정장 투피스 차림으로 첫 모임에 나왔지만 꽤 값나가고 인지도있는 명품옷을 입은 것은 누구나 알아볼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유성하라고 해요. 서울 출신이고 7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어요. 서울의 oo예중과 예고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G콘서바토리 연주박사를 마쳤습니다.”
“와아~~”
“엄청난 음악가가 오셨네?”
“거기 정xx 나온대쟎아?”
“그러면 미국에 남으시지 그러셨어! 기회가 더 많을텐데”
“음, 텍사스 주립교향악단 단원으로 있었는데 신분상 미국체류연장이 안되어 귀국길을 알아보다 운좋게 춘천시 관현악단 1바이올린 수석으로 오게 되었구요, 춘천음대에 출강하고 렛슨생 몇 명 선별해서 가르치고 있어요. 춘천으로 오니깐 너무나 사람들도 좋고 산책할 곳도 많고, 이것저것 대도시만큼 있을건 다 있고 해서 여기에 눌러앉을까해요. 저 이제부터 춘천사람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여러분”
“그럼요, 일자리 있고 맘붙일만하면 고향이지, 환영해요!
"자아!! 이제부터 춘천아가씨!”
유성하가 적절한 미모와 몸매에 고학력자다운 매너를 선보이는 인사를 하자 많은 회원들은 성하에게 각별한 관심을 내보이며 환영해 주었다.
표면적으로 정균도 성하를 환영해 주었지만 그닥 관심도 없었고, 더더군다나 솔희와 똑같은 학교의 루틴을 밟은 직속후배라는 점이며 예술현장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피대상으로 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성하가 정균에게 적잖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시점부터 정균은 상당히 심적 부담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책 한권씩 마칠때마다 성하와 다른 그룹으로 바뀌길 원했다.
한국에서 시작한 정균의 건축설계사업은 성공가도를 달렸고 서울과 춘천, 다른 도시를 오가며 생활했지만 일정한 궤도에 올라서부터는 서울출장 등을 자제하며 지역 쪽 일거리에 전념했다.
홀로 사는 단독주택을 고급지게 장식하고 국산이지만 비싼 차를 두 대나 구입하고 고가의 산악자전거를 구입해서 라이딩을 했다.
그의 몸은 30대 초반보다 더 다부져갔다.
이러한 정균에게 알게 모르게 여성들의 은밀하거나 때로는 노골적인 접근이 간간이 있었다.
외모뿐 아니라 직업이나 학력도 만만치 않은 여성들이었건만 정균은 이들과 간단한 차담만 하고는 더 이상 가까워지는데 장벽을 치며 친한 지인으로 남기만을 원했다.
자신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 그리고 세상 다가진 것 같았던 결혼과, 실제로는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풀려간 결혼생활, 그 종지부 사건을 돌아보며 정균은 자신이 결혼생활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내 존중의 결과는 일방적 유기로, 머슴소리 듣더라도 아내를 지켜주고자 했던 사랑은 혼외정사로, 알콩달콩 대화하려 했던 시도는 사납고 날카로운 금속성 고함으로 돌아왔고, 끝모를 인내와 헌신은 당당한 이혼요구로 돌아왔다.
정균은 자신의 더 어린 시절부터의 과거를 돌아보며 솔희를 이해하게 되었다.
솔희가 기약없이 보스톤으로 홀로 떠난 뒤로부터 의심과 분노와 초조 속에 고통받던 시기, 이혼통보를 받고서야 차라리 잘됐다고 자위했을 정도의 그 사건들은 이제 먼 옛날의 꿈처럼 멀어졌다.
정균은 솔희라는 존재가 그저 에고가 강하고 자기중심적인 생물학적 암컷이며 고깃덩어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로 인해 솔희의 목소리와 얼굴 윤곽마저도 떠오르지 않게 되자 더 이상 솔희를 미워하지 않게 되었고, 용서하게 되었다.
아니, 용서고 뭐고 그런 단어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는 그냥 본능대로 움직이는 고깃덩어리일 뿐이야. 거기에 목숨바친 나는 무언가에 씌었던거고)
하지만 못을 뽑아도 못자리와 흉터가 남듯이, 이제 정균에게는 결혼이라는 행위 속에서 남자가 가져야할 책임과 헌신을 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못했다.
그는 적절히 나쁜 남자가 되어 아내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조절하고, 가끔은 무심하고 가끔은 내멋대로 움직이는게 부부관계를 지탱하는 힘이라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만약 사랑하는 여자가 생긴다면 정균은 자기가 첫 결혼에서 솔희에게 헌신적이었던 것처럼 그 여자에게도 그리 할 수밖에 없고, 그런 방법 이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헌신적 사랑이란 결국 배신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고 그는 굳게 믿었기에 역설적으로 정균은 재혼을 포기해 버렸다.
한적한 주말 오후에 스며드는 고독, 그리고 40이 되었으면 줄어들거라고 생각도 했건만 여전히 한밤중이나 새벽에 치솟는 성욕만 절제한다면 인생의 리스크를 피하며 살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또한 아무리 성욕이 솟았을때 아내가 옆에 있어도 원하는대로 해소가 불가능하다고 그는 믿는다.
그것은 모종의 이유로 아내가 섹스를 거부하거나 남편의 횟수를 조절시킴으로써 모종의 댓가와 흥정하려 할 것이라는 것을 그는 솔희와의 결혼생활 체험에서 알고 있었다.
“채선생님을 뵐때마다 뭔가의 사연을 간직한 분 같아 보여요”
“제가요? 저 그냥 허당입니다. 쪼끔 여유있게 사는 공돌이 출신의 개인사업가일뿐이죠”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정리하는데 성하는 꿀벌처럼 일하며 청소를 주도했다.
정균은 그녀의 그 단체 생활 속에서의 성실한 활동에도 별로 감흥이 없었다.
모든 정리를 마치고 내려와 주차장으로 가는데 어느덧 성하가 옆에 와 있었고 성하는 정균에게 그런 도발적인 질문을 한 것이다.
“미국생활 오래 하셨다고 해서 저도 함께 대화할 거리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대화의 어느 주제에 가면 말이 끊기거나 피하시는 인상을 받았어요”
“내가 미국에서 왔다는건 누가...!”
“박회장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처음 여기 가입할려고 전화를 드렸더니 멤버들 자랑이 대단하시던데 특히 채선생님에 대해 알려주셨어요”
(젠장할, 박회장도 은근 주책이네, 별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사 굳이 비밀로 할 것도 아니지만 이 낯설은 듯 하면서도 낯설지 않은 여자가 그의 옛 행적을 알고 있다는 것은 불쾌했다.
“저, 일곱 살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어요. 그러다 음에만 예민해진게 아니라 사물을 받아들이는데 남들보다 몇십배는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육감마저 생기더군요. 채선생님이 발표하실 때 들어보면 문화예술에 대한 식견이 남다른 분이라는걸 알수 있었죠. 그런데 음악에 관심이 없다는건 무슨 사연이 있는 듯 느껴요”
“하하하! 유선생님!, 킬리만잘로산 정상의 사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갈퀴를 휘날리며 산아래 초원 세상을 바라보는 그 장엄한 모습이 삶을 고민하고 자연의 위대함을 감상하는게 아니라 낮부터 배가 불러 포만감에 빠져 졸고 있는 것에 불과해요. 아, 그리고 제가 7살이나 위니깐 아저씨라고 부르세요, 전 그게 편합니다.”
"어머머?!"
그 순간 자존심이 상한 듯한 성하의 눈에는 황당하고 썰렁하다는 반응이 스쳐지나갔다.
정균은 역시 딴따라년들의 예민한 심성이 그렇지하고 속으로 생각했고 이 상태를 벗어나길 원했다.
성하의 속마음은 모르겠지만 그녀는 정균에게 목례를 한뒤 자기의 차로 돌아갔다.
많은 이들은 두 사람의 이런 티격태격하는 대화를 목격한 상태였다.
“아이고 채사장님, 저 박학동입니다! 오늘 점심식사 약속있나요?”
“아, 박회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오늘 저 한가해서 고민중이었는데 마침 잘되었네요.”
어느날 11시에 독서클럽 회장이 정균에게 전화를 넣었는데 대부분의 연락과 공지는 단톡방으로 하던 것을 감안한다면 예사롭지가 않았다.
정균의 사무실 근방에 즐비한 닭갈비집중의 한곳, 장작불에 소금구이 닭갈비가 타는 내음이 술한잔을 불러오는 듯 한 곳에 이들은 자리를 잡았다.
60대 초반의 시인이며 수필가인 박학동 선생과 정균은 마주 앉아 장작불 위의 닭갈비를 구우며 닭계장 국을 떠먹고 있었다.
어느덧 분위기가 무르익자 박회장은 뻔한 레파토리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우리 채소장님, 이제 불혹이신데.........새 가정 생각해 보아야하는거 아닙니까?”
“후우...........한번 해봤으면 그걸로 되었죠, 뭘 그 귀챦은걸 두 번이나 합니까?”
정균은 진짜 결혼도 귀챦았고 박회장이 운을 떼는 내용도 모두 귀챦다는 듯이 막걸리잔을 들이켰다.
“그래도 내가 한 이십몇년 더 살았으니 말인데요, 귀챦지만 아웅다웅하면서 사는게 없이 사는것보단 낫습디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관계를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여자가 없어서라기보다는......멋진 여성들이야 우리 클럽에도 꽤 돼죠. 하지만,”
그러자 박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번뜩이며 정균의 말을 가로막고 드디어 하고픈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이 낮술을 겸한 만남의 목적이 여기에 있다는 듯이.
“우리 클럽에 약국하시는 J양 아시죠? 집안도 좋고 조신하시고......춘천 제일여고 가정교사인 O선생님, 어디 가도 꿀릴 것 없는 신붓감들이고 그분들끼리 서로 은근히 경쟁하면서 채소장님 눈에 들고 싶어하는거 저는 리더로서 예민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최근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 일류 음악원 최고과정을 마치고 미국의 유명 오케스트라 생활까지 경험한뒤 춘천시 관현악단 수석으로 영입된 유성하양도 그렇고요”
“네네, 다 훌륭한 여성들이고 나름의 짝이 있겠죠. 그런 감정들이야 언제든지 누구에게도 들수 있는거고 시간이 해결해 주겠죠”
“어허.......채소장님, 이래서야.......! 그 분들 나이가 지금 30이 넘었어요. 출산을 하기 위해서라도 서둘러야하는 분들이고.......무엇보다 난 회장으로서 여성들끼리의 질투나 견제로 인해서 공동체 분위기가 와해된다던지 갑자기 누가 탈퇴한다던지 그런 위험을 피해야 합니다. 그런 고민을 하다보니 의외로 해결법은 간단하다 이겁니다”
“무슨 말씀인지는 잘 알겠어요. 제가 누구랑 맺어지게 되면 제게 마음을 주었던 여성은 이 클럽을 나가게 되겠죠. 차라리 제가 나가면 그럴 일은 없겠군요. 클럽에는 평화가 찾아올 것이고요”
“아이고야, 그게 아니고 말이지요........!”
"자, 그럼 우리 한잔해요, 박회장님!"
이 둘은 막걸리잔을 부딛치며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하려 애썼다.
솔직히 정균은 자신을 짝사랑하는 여성들이 있다는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하나같이 어디 내놓아서 꿀릴것이 없는 여성들이었다.
그녀들이 수도권에만 살았어도 최소 대기업 대리나 과장급들과 매칭될수 있는 조건들이기도 했다.
그는 앞으로의 처신과 그녀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가 고민이긴 했지만 당장의 좋은 기분을 즐기기로 했다.
격랑을 겪으면서 정균이 그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오늘과 이 순간에 충실하자는 것이었다.
솔희와의 결혼생활이 비극이었던 것은, 불확실한 미래의 행복에 현재의 자원 모든 것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정균은 짙은 곤색 광택의 팔리세이드를 몰고 퇴근길을 재촉했다.
샤워를 마친뒤 정균은 저녁식사를 간단하게 한뒤, 버번 위스키를 꺼내 쉐이커에 얼음과 바나나 리큐어를 넣고 이리저리 흔들어 댄다.
마지막으로 바나나를 썰어 장식을 한뒤 살짝 입에 대어보니 부드럽고 달달한 향이 독한 위스키향과 어우러져 그의 기분을 좋게 한다.
“크으..........이 순간의 행복이지, 바로!”
그 한잔을 음미하고 비운 뒤에는 다른 잔에 잘게 부순 얼음을 채우고 레몬 필을 짜서 넣은 온더락 비슷한 칵테일을 완성했다.
살짝 몸에 열기가 올라오자 정균은 테라스 문을 열어 재꼈다.
실내로 들어오는 가을의 산들바람을 타고 컴퓨터 기계음같은게 함께 유입되었다.
띵동!
그때 식탁에 올려 놓은 휴대폰에 이메일이 들어왔다는 알람이 들어왔다.
정균은 휴대폰의 이메일 알람을 눌러보니 믿지 못할 송신자의 이름에 경악했다.
“왜 이 여자는 6년이나 돼서 연락이지? 그때 돈 한푼도 안가져가겠다고 포기해놓고, 생활이 어려워졌나? 합의 이혼이라도 유책배우자는 그쪽이니 그쪽 어려운건 내 알바 아니지”
여자에 대한 불신과 냉담으로 가득차 있던 정균은 휴대폰을 닫고 냉소했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서재로 가서 컴퓨터를 켜서 솔희의 이메일을 오픈했다.
전달할 물건이 있다는 것과 물어볼 말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진짜 어려워진 모양이네?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나서 팔을 못 쓰게 되었을지도. 그때 공통 구좌 5만불있던거 포기한 전적이 있으니 딱 그만큼 입금시켜줘서 보내야겠군)
정균은 정말 솔희가 그에게 돈을 구하기 위해 연락하는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솔희에 대한 증오심과 섭섭함과 배신감이 사라진 정균은 매너있게 대하기로 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한번 만나 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분명 살도 찌고 했으리라.
정균은 바로 답장을 했다.
[[난 춘천에서 나날이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어. 혼자만의 생활에 행복을 느끼게끔 적응했으니깐.
강선생님 부부에게 내가 당신과 보스톤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고 말한건 거짓말 맞아.
그렇게 해서라도 그 집에 애착을 느낀 부부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으니깐.
암튼 오게 되면 연락해.
호반 식당들은 대개 해물탕집이 많지만 당신이 회 좋아하는걸 아니깐 00활어스시집에 예약걸어 놓을께.
혹시라도 무슨 일있지 모르니깐 010-xxxx-9401 이 번호 저장해 놓고]]
그는 미사여구 따위는 모두 생략하고 딱딱 할말만 써서 솔희에게 답장을 보냈다.
바로 2층으로 올라간 정균은 씻고 잠자리로 들었다.
솔희의 갑작스러운 이메일에 당장은 아무런 감흥도 반가움도 느낄수 없었던 그는 두잔의 칵테일 기운 속에 점점 잠으로 빠져들었다.
|
첫댓글 애인 기다리 듯이
목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 ㅋ
기다려 주시는것 감사합니다. 제가 전업작가가 아니라 제 개인적인 일들을 하면서 구상도 하고 다듬고 하는데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오래 걸린 시간많큼 잼있게
잘 보았습니다 .
감사합니다 .
그럼 다음회도 기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늘 읽어져심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