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권의 기원 (太極拳起源)
중국 무술은 유파(流派)와 계보(系譜)를 대단히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각 유파와 전승
계보에 따라 서로 뚜렷이 다른 개성을 나타내면서 발전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태극권에서도 본질적인 내용은 같지만, 유파별 또는 계보별로 각기 독특한 창의성이 가미되어
외형상이나 기법의 변화면에서 서로 다른 맛이 있다.
태극권을 수련하는 입장에서 보면, 유파별로 손 모양, 자세, 기법 변화, 힘을 사용하는 법 등 모든 면에서
서로 차이가 있으므로 난해하고 헷갈리기 마련이지만,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음식 맛이 다른 별미를 고루
먹어 보고 자기 구미에 맞는 것을 고를 수 있다는 색다른 재미도 느낄 수 있다.
태극권에서도 유파와 계보별로 자기들이야말로 가장 우수하고 정통적인 태극권의 진수를 갖추고 있다고
자랑하며 자부심도 대단하다.
태극권을 바르게 수련하려면 우선 정통 문파의 면모가 온전한 기예를 익혀야 한다. 태극권과 같은 정교한
무술은 정통 주류의 계보를 벗어날수록 애매 모호한 상태로 변질되기 쉬운 때문이다.
또한 정통 문파의 진수를 바르게 전수받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떤 무술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내적 수련을 중시하는 태극권에서는 단지 권술(拳術)에만 능한
사람을 명수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좋은 스승'이란 뛰어난 기예, 내적 수양, 학문 등을 고루 갖춘
사람을 일컫는다.
태극권은 단순히 치고 받는 기격(技擊)이 아니라 도(道)를 구현하는 수행이며, 내적 수련이 없는 외적
단련만으로는 결코 높은 경지에 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학자에게는 좋은 스승을 선택하는 일도 쉽지 않은데, 그 이유는 태극권에 대한 안목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정통 주류의 명가들이 시연한 동작 사진들을 눈으로 익혀 두거나, 태극권에 대한 기초 지식을 읽어두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여기서는 태극권의 기원과 유파의 내력을 이해하기 쉽도록 명인들의 일화를 중심으로 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1. 태극권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
태극권을 언제, 어디서, 누가, 처음 시작하였는지에 관해서 지금까지 많은 연구와 발표와 학설이
제기되었지만, 모두 확증을 얻지는 못했다.
이러한 기원설 중에는 도가(道家)의 신선(神仙)이나 역사적으로 이름난 영웅 또는 위인을 시조로
삼은 위설(僞設)이 많은데, 아직까지도 날조된 전설을 고집하는 사람이 많다.
태극권의 역사상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은, 근대 테극권의 원류지가 중국 하남성 온현의
진가구(陳家溝)이며, 태극권의 진씨(陳氏) 일족들에게 전승되어 오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태극권의 창시설은 대단히 구구한 편이지만, 다음 네가지 설이 가장 널리 주장되고 있다.
1) 장삼풍(張三豊) 창시설 : 무당산의 도가선인(道家仙人)
송(宋)나라 때 호북성(湖北省) 무당산(武當山0에 장삼풍이라는 도가선인이 있었다.
그는 송나라 말기부터 명(明)나라 초기에 걸쳐서 수백 세나 장수했다고 한다.
그는 요동 태생으로 이름은 전일(全一), 호는 삼풍(三豊)이며 소박한 차림에 몸집이 크고 눈은 둥글고
귀가 크며 수염은 바늘 같았다.
매일 한 끼의 식사를 했으며, 여름이고 겨울이고 겉옷 하나만으로 지냈다고 전한다.
주야로 책을 읽고 수행을 쌓아 하루에 천리를 달렸으며, 만년에 무당산에 은거하였으므로 태극권을
'무당파 권법'이라고 한다.
장삼풍은 꿈에 신선으로부터 권법을 전수받았다고도 하고, 무당산 속에서 뱀과 학의 싸움을 보고
무술의 비결을 깨달았다고도 한다.
그는 청년 시기에 이미 소림권을 익혔으며, 나이들면서는 무당산에 은거하여 달밤에는 검무(劍舞)로서
정신을 기르고 어두운 밤에는 권법을 익혀 정(精)을 길렀으며, 바람부는 밤에는 산에 올라 기(氣)를
늘리고, 비오는 밤에는 서재에서 책을 읽어 마음을 밝히며, 자시(子時)에는 정좌로서 성(性)을 보았다 한다.
그는 언제나 학과 원숭이를 데리고 산을 돌아다녔다. 학은 그의 앞에서 숲 속으로 숨는 원숭이를 잡아
주고, 주인이 걷는 길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때로는 큰 뱀을 만나기도 했는데, 그 때는
장선인이 뱀과 싸웠다. 뱀이 장선인에게 달려들면, 그는 왼손으로 뱀의 목을 잡으면서 오른손으로
아래서 위로 뱀의 몸을 젖혔다. 이것이 태극권의 야마분종 초식으로서 단번에 큰 뱀의 몸이 찢어져
주위는 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또 산중에서 호랑이의 습격을 받는 일도 있었는데, 이때 장선인이
사용한 초식은 만궁사호(彎弓射虎)로서 단숨에 호랑이는 복부가 파열되었다고 한다. 그는 눈 위를
걸어도 발자국이 없을 정도록 몸이 가벼우면서도, 집채만한 바위를 한 손으로 들어 던지는 괴력의
소유자였다고도 한다.
장삼풍은 뱀과 학의 싸움에서 터득한 비결로써 강렬한 성질의 소림권을 연구하여 유연한
내가권(內家拳)으로 만들었고, 이것이 후에 하남성 진가구(陳家溝)에 전해졌다고 하는데,
이 설은 주로 양가(楊家) 태극권파에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저명한 무술사 고증가이자 권법가인 당호(唐豪:1897~1959)의 상세한 조사 연구에
의하면, 이것은 자기 문파를 확립시켜기 위한 위설로서, 태극권 발상지인 하남성 진가구에는 전혀
이러한 전설이 없었다고 한다.
1930년에 당호는, 소림파와 무당파의 완고한 자기 주장이 무술의 상호 발전을 저해하는 것을
개탄하여, 각종 문헌을 연구하고 현지 조사를 병행하여 이를 검증한 후 '소림무당고'(少林武當考)를
저술했는데, 여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장삼풍에 대한 사료(史料)에서는, 장삼풍을 명나라 사람이라고도 하고 또는 송나라 사람이라고도
하므로 어느 때 사람인지 불분명하다. 설령 실존 인물이라 하더라도, 어떤 사료에도 장삼풍과 권법을
연관시키는 기록은 없었다." 근래 중국의 무술사 학계에서는, 장삼풍을 태극권의 시조라고 하는 설은
전설일 뿐 학문적으로는 전혀 고려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있다.
장삼풍이 뱀과 학의 싸움에서 터득한 비결로서 강렬한 소림권을 연구하여 유연한 내가권으로
만들었으며, 이것이 후에 하남성 온현 진가구에 전해졌다고 주장하는 학설이다. 주로 양가태극권파에서
주장하고 있으나, 사적(史的)으로 장삼풍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어렵고, 장삼풍과 권법과 연관된
어떤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근래 중국의 무술사 학계에서는 장삼풍 창시설을 학문적으로는 전혀
고려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2) 왕종악(王宗岳) 창시설 : 태극권보(太極拳譜)의 저자
왕종악은 청 건륭 때 산서성 사람이다. '음부창보 서문'에 의하면 문무에 정통하고 의학과 도가 서적 및
병서 등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으며 창술과 도술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태극권가들 사이에서
귀중한 자료로 여겨지는 '태극권보'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청 건륭 55년(1790) 하남성 낙양과
개봉에 거주하며 글씨를 업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왕종악이 진가구 방문이전부터
이미 진가구에 태극권이 전승되어 오고 있었음이 증명되므로 그가 태극권의 창시자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청(淸)나라 건륭(乾隆) 때 산서성 사람으로 왕종악이라는 문무의 달인이 있었는데, 의학과 도가(道家)
서적 및 병사(兵書)에 이르기까지 온갖 책에 정통하고 있는 데다가 창술(槍術)과 도술(刀術)에도
능하였으며, 태극권 연구가들 사이에 귀중한 자료로 여기고 있는 '태극권보'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는 청나라 건륭 55년(1790)에 하남성 낙양에 있었던 흔적이 있고, 그로부터 5년 후에는 같은
하남성의 개봉에 거주하며 글씨를 업으로 삼았던 기록이 있다.
낙양과 개봉은 진가구와 거리가 매우 가깝고, 왕종악이 진가구와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그가 남긴 '춘추도잔보'(春秋刀殘譜)와 '타수가'(打手歌)의 한 구절이 진가구에 전해진 '진구춘추도보
'(陳溝春秋刀譜)와 진가 태극권 '타수가'와 일치된다는 점이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왕종악이 진가구를 방문했을 때 그 곳 사람들과 권법에 대한 토론을
벌였는데, 진가구 사람들은 왕종악의 논의에 불만을 품고 시합을 청했다고 한다.
왕종악은 하는 수 없이 실력으로 맞서서 그들 모두에게 이겼으므로, 진가구 사람들은 왕종악의 실력이
뛰어남을 인정하고 가르침을 청하였다고 전해진다.
왕종악은 진가구 사람들의 간청에 따라 그 곳에 머물면서 자기의 권법을 전했다. 문하생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는 장발(蔣發)이라는 사람으로서, 그가 진가구에 태극권의 모든 것을 전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왕종악이 낙양에 체재하면서 진가구를 방문했다고 추정되는 것은 건륭 55년경이지만, 진가구에
전해 오는 역대 조상들의 기록인 '진씨가승(陳氏家乘) 또는 '진씨가보(陳氏家譜)에 의하면, 그 당시
이미 진가구에는 권법이 전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왕종악이 태극권의
창시자라고 인정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무술에 흥미가 있었던 왕종악이 진가구 권법의 소문을 듣고 권법을 배우러 갔을 수도 있고,
또 진가구에 있었던 권법이 왕종악의 도움으로 더욱 교묘해졌을 수도 있다.
현재 하남성 진가구 진식 태극권의 4대 권사(拳師)이며 진가 태극권의 대가로서 필자와 의형제 사이인
주천재(朱天才)와 함께 이전에 태극권의 운류에 대한 토론을 하였을때, 장발이 진가구에 태극권을
전했다는 설에 대해서 그는 이의를 제기하였다.
주천재는 진가구에 옛부터 전해 오는 진씨 9대 진왕정의 초상화에서 진왕정이 앉아 있고 그의 배후에
시립해 있는 장발의 모습을 지적하며, 스승이 제자 등 뒤에 시립한다는 것은 관습상으로도
어불성설이므로, 장발이 진가구에 태극권을 전했다는 이야기는 허구하고 역설한 바 있다.
3) 진복(陳卜) 창시설 : 진가구(陳家溝)의 시조
진가 16대손 '진흠'의 '진씨태극권도설'과 18대손 진적보(陳績甫)의 '진씨태극권입문총해(陳氏太極拳
入門總解)'에서 주장하고 있다. 고증가들 사이에서 대부분 부정되고 있으나, 진복이 진씨 일족을
이끌고 하남성 진가구로 오기전에 살았던 산서성 홍동현에서 전해지는 권법과 진가구 태극권의
공통점이 많은 것을 근거로하여 이를 지지하는 학자들도 있다.
진가 16대손인 진금(陳金)은 그의 저서 '진씨태극도설'(陳氏太極拳圖說)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다.
"시조 진복(陳卜)은 음양이 개합하여 온몸에 운행되는 법을 음식을 소화시키는 법으로 자손에게
가르쳤는데, 그 법은 태극의 원리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에 '태극권'(太極拳)이라고 이름하였다.
또한 18대손인 진적보(陳績甫)의 '진씨태극권총해'(陳氏太極拳總解)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진가구에서 서쪽으로 10리 부근에 '청풍령'이라는 산이 있고, 그 곳에 많은 도둑이 있어 자주 마을에
내려와 노략질을 하였으므로 관가에서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나 일찍부터 태극권에 정통하고 있던 진가구 시조 진복이 결연히 일어나서 마을의 용사 수백
명을 이끌고 도둑의 소굴에 쳐들어가 이를 토벌하고 평화를 정착시켰으므로, 그 후 많은 사람들이
배우러 오게 되어 마을 안에 도장이 설립되고 태극권을 보급하게 되었다."
진복의 태극권 창시설은 고증가들 사이에서는 대부분 부정되고 있지만, 진복이 진씨 일족을 이끌고
하북성 진가구로 오기 전에 살고 있었던 산서성 홍동현 대괴수촌에서 전해지는 권법과 진가구
(태극권의 원류지)의 태극권의 공통점이 많은 것을 근거로하여 이를 지지하는 논문 발표들도 있다.
4) 진왕정(陳王廷) 창시설 : 기효신서(紀效新書)와 황정경 연구
진가구 9대손인 진왕정(陳王廷)은 명말 지방학교 학생인 문상생이었으며 청초에는 무상생이었다.
그가 명말(明末) 척계광(戚繼光)이 쓴 기효신서(紀效新書)의 32세 권법과 도교(道敎) 경전인
황정경(黃庭經)의 원리를 더해 태극권 창시했다는 학설이다. 이에 관련된 기록이 '진씨가승',
'온현지', '회경부지' 등에 의해 뒷받침되었으므로 무술사 고증가들에 의해 가장 유력한 학설로
지지되고 있다.
진가구 9대 손인 진왕정은 하남성 온현 진가구에 있는 하급 관료의 집에서 태어났다. 진가 일족의
내력을 적은 '진씨가승'(陳氏家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왕정(陳王廷)은 자를 주정
(奏庭)이라 하고, 명나라 말의 문상생(文庠生:지방 학교 학생)이며 청나라 초기에는 무상생(武庠生)
이었다. 산동의 무술 명수로 뭇 도적 천 여명을 소탕했으며, 진가구 권법과 도창술(刀槍術)의 창시자이다."
그가 남긴 시(詩)에도 권법을 고안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오호라.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어
위험을 무릅쓰고 비적을 소탕하여 나라의 상도 받았지만, 모든 게 허무한 일이구나.
다만 '황정경(黃庭勁:도가 경전) 한 권을 가지고 한가할 때면 권법을 창안하고 바쁠 때는 농사일을
하며, 제자를 가르쳐서 용과 호랑이로 만든다네."
그는 무용(武勇)이 뛰어나 무용담이 많이 전해졌는데, 하남성 온현 지방의 사건을 기록한
'온현지(溫縣志) 및 '회경부지'(懷慶府志)에도 "1644년에 도적의 무리가 황하를 건너 쳐들어왔을 때
진왕정이 의용군을 이끌고 이를 막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하남성 등봉현의 관가에서 백성들에게 무리한 세금을 강요하여 반란을 일으킨 지방 무관
급제자인 이제우(李際遇)가 군인들을 데리고 숭산 소림사의 산체에서 농성할 때, 이제우와 친구
사이인 진왕정이 이를 제지하기 위하여 숭산에 올라 갔다고 한다. 그러므로 반란군은 왕정에게
소낙비처럼 많은 화살을 쏘아 보냈지만, 그는 날아오는 화살을 모조리 피하였으므로 반란군이
크게 놀랐으며, 사태가 수습된 이후에는 반란군의 일원이었던 장발을 제자로 삼았다고 한다.
진왕정보다 50여년 앞의 인물로, 왜구(倭寇)를 평정하여 유명해진 척계광(戚繼光) 장군은 군사를
조련하기 위해서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저술했는데, 이 책의 '권경,첩요편'에 있는 32세 권법이
기법의 명칭이나 가결(歌訣:권법의 비결을 표현한 노래) 방면에서 태극권과 공통된 것이 많았다.
그 때문에 무술 고증가 당호(唐豪)는 "진왕정은 '기효신서'의 권법에 황정경의 원리를 더해 태극권을
창시한 것으로 본다."는 학설을 주장했는데, 현재 학계에서는 이 진왕정 창시설이 가장 널리 지지
받고 있는 편이다.
태극권의 발전
진가구에서 태극권은 문외불출의 비전으로 전해 왔으나 14대 진장흥陳長興) 때 진씨 가문이
경영하는 약재상에 고용된 하북성 영년현 출신의 양로선(楊露禪)이 진장흥으로부터 진가구 전통
투로인 노가식을 배워 나중에 북경에 나가 황족, 문인, 학자들에게 지도하였다. 양로선 이후 삼대에
걸쳐 진가구의 태극권을 개량 발전시켰으며 이로서 양가태극권이 발생하였다.
->
동향인 무우양(武禹襄)이 양로선에게 이를 배우고 후에 다시 진가구의 진청평(陳靑萍)에게
가르침을 받아 나중에 무가태극권을 제정하였다.
또한 무우양의 조카 이역여에게 태극권을 배운 사람으로 학위진이 있는데, 그에게 다시 전수
받은 손록당(孫祿堂)은 형의권과 팔괘장의 장점을 융합하여 손가태극권을 제정하였다.
양로선과 차남 양반후로부터 배운 황실 호위 전우(全佑)는 이를 그의 아들 오감천(吳鑑泉)에게
전해주었는데 이것이 후에 오가태극권으로 발전하였다.
이로서 일반적으로 태극권의 사대유파라고 하면 진, 양, 오, 손식 태극권을 꼽고, 오대유파라고
하면 여기에 무가 태극권을 포함한다. 근대 태극권의 여러 유파는 한가지에서 나온 것으로
본질적으로 그 내용은 일치하며, 각 유파별로 뚜렷한 외형적 특징을 가지고 개성 있는 발전을
해 오고 있다.
(출처/태극권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