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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신비를 자랑하는 진천농다리가 위치한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구곡리의 옛 지명)마을에 지난 11월 27일 역사에 길이 남을 뜻 깊은 제막 행사가 있었다.
‘농다리 원형복원 사적비’와 ‘구산동 상산임씨 천년세거비 제막식’이 거행된 이날 행사에는 정우택 충청북도지사, 김종률 국회의원을 비롯한 박종섭 진천부군수, 오봉석 진천군의회의장, 남명수 진천문화원장, 정일 전 재경 괴산군민회장, 신응현 농다리보존회장, 임상은 상산임씨화수회장을 비롯해 각 사회기관 단체장과 학계, 지역주민등 400여명이 참석해 뜻깊은 자리를 축하했다.
제막식은 진천국악협회의 국악공연을 시작으로 경과보고에 이어 제막, 비문낭독, 기념사, 축사 순으로 많은 환영과 축하속에 성대하게 개최되었으며, 마을 주민들은 모처럼 오신 소중한 손님들을 모시기 위해 맛깔난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여 풍요롭고 인심 좋은 구산동 마을의 넉넉함을 보여 주웠다.
이곳 구곡리 옛 마을의 이름은 구산동으로 안굴테, 박굴테로 불러 오다가 행정마을로 명칭이 바뀌면서 내구, 외구 마을에서 1970년대 내구마을이 내구, 중리로 나눠져 3개의 자연부락으로 300여명의 주민들이 농업을 중심으로 한 가정처럼 살아오고 있다.
‘구산동 상산임씨 천년세거지’(龜山洞 常山林氏 千年世居地)는 진천의 토성인 상산(진천의 옛 이름)임씨 문중이 집단을 이루며 천백여 성상을 한결같이 살아오고 있는 마을로 이는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에서도 유래가 드문 유서 깊은 곳으로 이를 널리 알리고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고져 천년세거비를 건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구산동 상산임씨 천년세거비의 비문은 충북대학교 교수 신호철 문학박사가 지었으며 비문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구산동은 충북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에 위치한 마을로서, 상산임씨의 선조가 이곳에서 거주(居住)하기 시작(始作)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백여성상(千百餘星霜) 동안 임씨문중 후손들이 집성촌(集成村)을 이루고 있어 그 유래를 밝히고자 한다.
이 마을 구산동은 고려(高麗) 왕건(王建) 태조(太祖)를 도와 건국(建國)에 큰 공(功)을 세워 태조 원년(元年) (서기918년) 6월에 군(軍)을 통솔(統率)하는 병부령(兵部令)에 제수(除授)되신 흥화부원군(興和府院君) 충숙공(忠肅公) 상산백(常山伯) 휘(諱) 희(曦)의 선조(先祖)때부터 터전을 잡으신 이래 천백여성상을 세거 해온 상산임씨 집성촌(集成村)이다.
태조(王建)는 서기 922년 12월에는 왕자(王子) 무(武)를 태자(太子)로 책봉(冊封)하고 병부령 임 희의 딸을 태자비(太子妃)로 삼으니 이분이 2대 혜종왕비(惠宗王妃)의화왕후(義和王后) 임씨이다.
공(諱 曦)께서는 중앙(中央) 조정(朝廷)의 활동(活動) 못지않게 향리(鄕里)인 이곳 구산동에도 많은 업적(業績)을 남기셨으니 바로 세금천(洗錦川)의 농다리를 건설하신 것이다.
이 지역의 옛 문헌인 상산지『常山誌』와 조선환여승람『朝鮮環與勝覽』에 의하면, 고려초(高麗初)에 임장군(林將軍)이 음양(陰陽)을 배합(配合)하여 자주 빛 돌로 상응(上應) 28수를 따라 28간으로 농다리를 축조(築造)하였다고 명시(明示)되어있으니, 여기에 보이는 임장군은 바로 굴티마을의 대호족이셨던 공(公)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 이후에도 공의 후손(後孫)이신 임연(林衍)장군께서도 고려 고종(高宗)과 원종조(元宗朝)에 고려의 자주독립(自主獨立)을 위해 대몽항쟁(對蒙抗爭)에 커다란 공을 남기셨으니, 바로 무인정권(武人政權)의 최고 집권자이시며 판도판서겸교정별감(版圖判書兼敎定別監)을 지낸 장렬공(莊烈公) 휘 연장군(衍將軍)이 그 분이시다.
이어 상산임씨의 가문(家門)이 더욱 번창(繁昌)하게 되었으니, 고려말 삼한삼중대국문하시중판서리사(高麗末 三韓三重大匡門下侍中判典理司) 휘 지(智)께서도 가문을 빛내시고 조선초(朝鮮初)에 이르러서도 세조대왕(世祖大王) 직위(卽位)에 항거(抗拒)하신 증의정부사(贈議政府事) 휘 수경(秀卿)의 충절(忠節)과 선조조 임진왜란(宣祖朝 壬辰倭亂)의 대란(大亂)에도 어모장군(禦侮將軍) 휘 수전(秀筌)과 그의 자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 휘 현(賢) 부자(父子)분의 충신문(忠臣門)이 방여(旌閭)되여 상산임씨의 천년세거지가 돋보이고 있다.
위와 같이 천백여성상을 지켜 온 한 문중 집성촌(集成村)으로서 옛 기지를 지켜온 구산동 마을은 살기 좋은 자연경관에 터를 잡은 선조님들의 혜안(慧眼)이 깊었으며 흥화부원군의 귀풍(遺風)이 변함없이 상전(相傳)하고 있음으로 그 후손(後孫)이 더욱 번창(繁昌)하고 있음을 밝혀 두는 바이다. 라고 쓰여 있다.
또한 이날 함께 제막했던 ‘농다리원형복원 사적비’는 여러 농다리 관련단체(농다리보존회, 농다리지킴이회, 구산동향우회)에서 진천군과 충청북도에 수년간 요청하여 마침내 금년 8월에 25간에서 28간으로 원형복원돼 그 의미를 간직하고져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10여개월만에 건수하게 되었다.
이 또한 비문에는 1800년대 초에 편찬된 진천의 가장 오래된 향토지인 ‘상산지’의 내용을 인용하여「900여년전 임장군이 하늘의 별자리 28수를 응용하여 세금천에 자줏빛 돌을 이용 28간으로 축조했다」라는 기록를 담고 있다.
이로 인해 진천농다리는 역사적으로 문화재적 가치를 더욱 인정받게 되었으며, 조상들의 슬기로움을 엿보게 되었고 머지않아 중부권 최고의 관광명소로 발돋움 되여 살기 좋은 생거진천을 널리 알리는데 독특한 효자 노릇을 함은 물론 지역 발전에도 큰 기대가 되리라 생각한다.
이렇듯 구산동 마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충신, 열녀, 효자의 뜻을 기리는 정려들이 세워져 있으며, 농다리와 함께 천백여년의 세월을 함께해온 흔적이 여기저기 숨겨져 있고 많은 전설과 설화 또한 이 마을의 역사를 가늠케 하고 있다.
진천에서 구곡리 마을에 들어서게 되면 우측으로 제일 먼저 눈에 띄이는게 외구에 자리하고 있는 태종(太宗)때 판한성부사(判漢成府事)를 지낸 최유경부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효자정문(孝子旌門)”이 있으며, 좌측으로는 조선(朝鮮) 헌종(憲宗)때 호조참판( 戶曹參判) 임대철의 처 은진 송씨(恩津宋氏)의 열행(烈行)을 기리기 위한 “열녀정문(孝子旌門)” 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내구마을로 들어서게 되면 충의문(忠義門) 장렬사(莊烈祠)가 보인다.
장렬사는 ‘구산동 상산임씨 천년세거비’ 비문에서도 밝혔듯이 고려 무인집권기 권신 임연(林衍)을 비롯하여 상산임씨의 시조인 흥화부원군(興和府院君) 충숙공(忠肅公) 상산백(常山伯) 임 희(林 曦), 조선시대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낸 임 구(林 球)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또한 농다리에 가장 인접한 중리 마을 입구에는 조선 경종(景宗) 원년에 건립한 부자충신문(父子忠臣門)이 있는데, 이 정문은 형조참의(刑曹參議) 임수전(林秀筌)과 공조참의(工曹參議) 임 현(林 賢)의 두 부자의 충의를 기리기 위한 문으로 충·효·예의 정려가 세워진 곳은 이 마을뿐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싶다.
이에 주민들은 마을 자랑과 더불어 이를 보존하기 위해 구산정을 세워 마을 덕목으로 삼고 후손에게 전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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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정(龜山亭)
구산정(龜山亭)은 예로부터 산자(山紫) 수명(水明)하고, 농 다리와 소습천(消濕泉) 등 주변 경관(景觀)이 아름다우며, 충·효·예(忠孝禮)를 숭상(崇尙)하는 충신열녀(忠臣烈女) 등이 배출(輩出)된 충효의 고장으로서 인심(人心)이 후덕(厚德)하며 웃어른을 공경(恭敬)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며 이웃과 서로 화목(和睦)하는 경로효친사상(敬老孝親思想)이 투철(透徹)하여, 우리 마을을 찾는 분들과 이 고장을 이어갈 후손(後孫)들에게, 애향심(愛鄕心)과 경로 효친정신을 이어가는 향토(鄕土)의 전당(殿堂)으로 가꾸어 우리의 긍지(矜持)를 드높이는 삶의 터전으로 삼고자한다.
천백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구곡리 마을은 가는 곳 마다 역사의 흔적과 다양한 전설을 간직한 채 테마 여행지로도 유명한 고장이기에 몇 곳을 둘러보며 소개해 보기로 한다.
농다리전시관을 방문하게 되면 조상들의 슬기로운 지혜를 느낄 수 있으며, 농다리의 역사성과 우수성, 아름다운 농다리 모습을 담고 있는 사계사진과 한국의 옛 다리, 세계의 유명한 다리, 농다리에 얽힌 전설 등을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고 살기 좋은 생거진천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다양하게 꾸며 놓고 있다.
전시관 앞에는 상산임씨 선조들의 업적이 담긴 비석거리가 있으며, 이곳에 선바위가 있는데 옛날 임장군이 이 바위에 손가락으로 “구산동(龜山洞)”이라 썼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이순신장군의 거북선에 반발을 느껴 구(龜-거북구)자를 구(九-아홉)자로 고쳐 현재 구곡리(九谷里)라 쓰이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구곡리 중리 마을에서 약 100여미터 떨어진 세금천변 에는 세습바위가 있는데, 소습천(消濕泉)으로 불리기도 하며, 세종대왕께서 안질 치료차 초정에 가시는 도중 이곳을 지날 때 이 샘물을 마시었다고 하여 어수천(御水泉)이라고도 불리는 약수터가 있다.
이 세습바위는 산비탈에 있으며 반석은 品(품)자 형으로 반석 사이에서 용출되는 샘물은 연중 마르는 법이 없으며, 풍습과 안질에 좋다고 하여 예전부터 피서객들이 줄을 잇고 있으며, 최근에 이 또한 원형복원이 되자 약수물을 뜨러 많은 관광객이 즐겨 찾는 명소로 탈바꿈 되었다.
그리고 상산팔경(常山八景)중 제1경으로 손꼽히는 농다리 ‘농암모설(籠岩暮雪)’은 상산임씨 선조들의 숨결이 담겨있는 문화유산으로 이곳 주민들은 1976년 12월 20일 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제 제28호로 지정되기까지 보수해가며 지켜왔음은 물론, 이웃 마을과 농토를 경작하기 위해 통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더욱 애착을 갖고 지금까지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농다리는 매우 흥미로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곳을 건너는 아낙네들은 아들을 낳을 수 있고, 노인들이 이 다리를 건너면 무병장수 할 수 있다고 전해져 내려오며, 재앙을 예고하기도 하고,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땐 울기도 한다는 신비의 다리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편 농다리 건너 도랑에 있는 바위를 오르다 보면 농다리를 놓은 임장군의 발자국과 말 발자국, 지팡이 자국 이라며 전해지는 곳도 있는데, 위치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찾기가 매우 힘든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산책로를 따라 약 150여 미터 거닐면 살고개 정상에 서낭당이 있는데 조그마한 돌탑을 쌓고 소원을 빌기도 한다.
바로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산속에 거대한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게 된다.
이 호수는 미호천 초평 저수지 중류에 속하는 곳 인데 빼어난 경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우며,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을 연상케 한다.
이 거대한 호수가 생기기 전에는 초평면 죽정내 라는 마을과 넓은 농경지가 있었는데, 물에 잠기기전 상류로 이주하여 현 화산리(붕어마을) 라는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이 마을 역시 상산임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곳의 지명을 보면 물길을 따라 선배, 스승배, 학배, 장배라고 붙여져 있는데, 여기서 바로 지명에 ‘배’라는 공통점이 있다.
옛 선인들이 언젠가는 배가 뜰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하는데, 1983년에 미호천 개발 사업으로 댐을 만들어 농토가 물속에 잠기고 실제로 배가 뜨게 되었다.
이렇듯 상산임씨 세거지 주변에는 아름다운 경관과 역사의 흔적이 살아 있어 테마 여행지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진천의 토성으로 문백면 구곡리, 평산리, 은탄리와 초평면 화산리, 이월, 덕산, 증평 남차리, 경기도 고양, 경기도 안성 등에 터전을 잡고 있다. [자료제공 : 상산임씨화수회]
첫댓글 좋은 사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