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1월 23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영조 연간에 병마절도사 손진민(孫鎭民)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아들 상룡(相龍)이 택지를 확장하고 건물을 증축하여 지금의 주택이 조성되었다. 1910년 일제의 압박을 받은 후손 손기학(孫基學)이 이 집을 팔았는데 1960년대 초 손기혁이 다시 사들여 현재의 소유자가 되었다. 영남지방 상류고가의 특징을 보이며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하여 담장과 중문으로 경계를 지었다. 안채는 넓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북쪽에 남향으로 정침(正寢)이 있고 좌우에 곳간과 행랑방을 둔 별채가 있다. 정침 맞은편에 별동(別棟)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정침은 7칸 2열의 팔작지붕으로 고격(古格)이 풍기는 양반가옥으로 가운데 2칸 대청과 2칸 큰방이 있다. 왼쪽에 부엌이, 오른쪽에 건넌방이 있다. 부엌은 기명대(器皿臺), 찬간 등의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다. 안채 오른쪽에 자리잡은 사랑채는 북쪽으로 팔작지붕 4칸 2열 정당(正堂)이 남향으로 앉았고 건넌편 입구에 행랑방이 좌우에 붙은 대문채가 있고 사랑 마당은 수석이 조화를 이룬 정원이다. 집터가 죽서(竹西) 제일의 명당이라는 평판이 있어서인지 손진민 부자 외에도 손수원(孫綏遠)·손량석(孫亮錫)·손규헌(孫珪憲) 등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장수를 배출한 명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