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급살병과 태을주' 책을 건네면 제목이 너무 세다는 느낌을 받는 것 같습니다. 어떤 후배는 내놓고 심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더군요. 아마 전에 상제님신앙했던 곳에서 개벽을 너무 강조했던 분위기에 대한 강한 반작용인 듯 했습니다. '선배가 살아있는 동안 급살병이 평생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게 위기감을 조성하면 태을도가 이전의 OO와 다를 게 뭐가 있냐'는 등의 얘기를 하더군요.
맞습니다. 급살병이 오늘 올 지 내일 올 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 살아생전에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급살병을 개벽이란 이름으로 그동안 증산계열 종단에서는 아주 촉급하게 사람들을 몰아채면서 일상의 모든 것을 거의다 내려놓게 만든 것도 사실이구요.
그래서 태을도에서는 출범 직후에는 '강증산과 태을도'를 통해서 진리의 줄기를 올바로 세우는 데 주력했고, 이후 '태을도인의 길' 상하권부터 시작해 '태을도', '태을도인의 노래'를 연이어 내면서 본격적으로 상제님진리의 보편성을 알리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열심히 정명(正名)작업을 해왔습니다.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행적과 말씀속에 깃든 원 뜻이 온전히 밝혀지기를 바랬고, 그것이 급살병이 도래하기 전 태을도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2003년도 말에 출간했던 '용봉서신'책도 사람들에게 일상의 편지처럼 담담하게 상제님말씀에 담긴 정신이 전해졌으면 하는 바램으로 '용봉서신'이란 제목을 붙였고, 부제 또한 그 취지를 더욱 분명히 하여 '-개벽을 넘어 영원으로 도통을 넘어 일상으로-'라고 붙였더랬습니다. 이제는 개벽신앙에서 벗어나 상제님말씀속에서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적 요소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 도통에 매달려 일상을 팽개친 도인들이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와 현실속에 차분히 착근해서 생활신앙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던거지요.
지금도 태을도에 입도하신 분들께 항상 일상생활을 충실히 할 것, 가정과 직장생활, 또는 학업을 잘 꾸려나갈 것을 신신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상제님진리속에서 개벽이라든가 급살병같은, 일상생활을 위협할 만한 요소들을 다 없애야 하는걸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상제님 존재 자체가 이미 보편성의 상징이자 (이 땅에 오셨다는 것 자체가) 특수성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벽이나 급살병을 도외시한다면 그건 상제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지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크나큰 우를 범하는 것이며, 개벽이나 급살병은 상제님진리의 핵심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동안 증산계열 종단들의 지도자들이 사건의 급박성만 강조하여 그를 이용한 맹목적인 복종과 재산헌납 등을 강요한 폐해가 너무나 컸기에, 사람들이 거기에 질려서 아예 그 쪽은 쳐다보지도 않으려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고 상제님께서 이 땅에 오신 원 취지를 망각하면 결코 안됩니다. 개벽은 분명히 오는 것이고 급살병으로 사람들을 감평하여 정리한다는 것은 상제님께서 누누히 공표하신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상제님께서 개벽과 급살병의 상황만 일러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맞이함에 있어 아주 단순하면서도 냉정한 감평의 기준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러도 오셨다는 거지요. 바로 '마음 닦고 태을주를 많이 읽으라.'는 것인데, 예전의 대부분의 선배신앙인들은 태을주 수행으로 쉽게 개안할 수 있었다는 경험과 함께 개벽과 급살병이라는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파천황의 '상황'에 치중하느라 정말로 중요한 이 '마음닦고 태을주를 읽는다'는 의미를 제대로 천착하여 궁구하려는 작업이 드물었고, 우리들 또한 새로운 진리를 접한다는 기쁨과 그 내용의 낯섬에 선배들의 신앙형태를 그대로 답습하다 보니 그 폐해까지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폐해가 컸다고 상제님진리가 훼손될 수도 없는 것이고, 개벽과 급살병이 오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급살병의 정리기준이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는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급살병은 언젠가 터집니다.
마음닦고 상제님께서 주신 태을주를 읽는 것이 급살병의 유일한 법방입니다.
때가 되어 태을도에서 '급살병과 태을주'라는 책을 내면서 일반인들이 보기에 부정적인 제목을 단 것은, 일반사람들에게 위기감을 조성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상제님신앙인들에게 마음닦고 태을주를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태을주를 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가 이천 년전에 중동의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최후의 심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최후의 심판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 몸을 바쳐서 예수가 외쳤습니다. 최후의 심판날, 그 심판의 기준을 인간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말이지요. 무려 이천 년전에 말입니다.
상제님께서 진멸지경에 놓인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이 땅에 몸소 오셨습니다. 유불선 삼교를 다 동원하고 아무리하여도 모두다 건져살리기 어렵다고 벽을 향해 돌아누워 흐느껴 우셨던 상제님이십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상제님과의 인연줄을 만들어 급살병이 돌 때 그 손길을 잡아주고자 초장봉기지세로 난법이 벌려져가도록 길 열어놓으신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어언 백여 년전에 말입니다.
석가불로부터도 삼천 년, 우리 조상들의 미륵신앙으로 보면 천여 년이 훨씬 지났습니다. 예수로부터 본다해도 충분히 긴 시간이고, 상제님의 '풍류주세 백년진'에 의해 고수부님으로부터 난법판이 벌려져나간 지 어언 백 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이 충분히 깨여서 열매를 맺을 때가 되었다 싶은 때라고 봐야겠지요.
이제 추수기에 접어들어 상제님과 고수부님으로부터 추수운의 천명을 받은 태을도에서, 마음을 밝히고 태을을 밝히고 태을주 수행법을 밝혀 상제님의 자식들을 거두어들이고자 합니다. 기존의 난법판 속에서 상제님과의 인연줄을 만들어두었던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소중한 자식들을 말이지요.
상제님과 고수부님을 버리지 않고, 내 존재를 믿으며, 생명의 근본을 찾기를 포기하지 않고, 마음의 중요성을 익히 깨달았다면, 모두가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소중한 자식들입니다. 생장염장 사의의 자연지리속에서, 선천 오만 년 윤회환생해오면서 지금 이 자리, 여러분이 서있는 그 자리가 바로 여러분의 최후의 인연자리입니다. 선천 오만 년을 마감하는 마지막 인연자리입니다. 상제님의 자식인 여러분들은 지금 그 자리의 인연을 태을도를 통해 도연으로 승화시켜 후천으로 다같이 넘겨야 하는 막중한 사명도 아울러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자신을 믿고, 지금의 인연을 소중히 하며, 근본을 찾아 태을을 붙드십시오. 자기의 진짜 마음을 찾으십시오.
마음닦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상제님께서 '마음바꾸기가 죽기보다 어렵다'고 하셨겠습니까. 지금 당장, 생활속에서 부지런히 마음닦기를 실천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제님께서도 '때가 가까울 수록 마음닦기가 급하다'고 하셨습니다.
태을주수행도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태을주 수기가 한꺼번에 돌 때, 선천에서 받아나온 이 육신으로 그 충격을 감당하면서 생명줄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버티려면 최소한 삼십만 독은 해야한다는 게 성지순례때 뵈었던 평생신앙해온 어르신들의 한결같은 말씀이셨습니다. 상제님께선 '오는 잠 적게 자고 태을주를 많이 읽으라'고 신신당부하셨지요.
바른 마음으로,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선심후주'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마음닦고'-'태을주 읽으라'가 될 수 밖에요.
상제님의 진리는 보편성과 특수성이 내 속에서 아울러 조화를 이룰 때 진정한 상제님진리로 완성됩니다.
상제님을 어디서 아셨든 간에 여러분 모두,
시천주 봉태을의 태을도인이 되어 천지부모님의 도자로서 후천인간으로 완성되기를,
자기 주변의 속연들을 남김없이 도연으로 챙겨 다같이 후천으로 넘어가시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