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2:1)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원어중심 성경강의 나훔 25번째, ‘파괴하는 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나훔서의 구조>
나훔서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했죠, 서론부가 1장 1절~8절까지고, 1장 9절~끝까지가 본론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론부의 표제와 여호와의 공의와 권능을 강조하고 있고, 그리고 본론부에서는 니느웨에 대한 멸망의 심판 예언을 하고 있다고 했죠. 그리고 본론부 자체는 네 단원으로 나눌 수가 있어요.
<본론부 분석> 1:9 - 3:19
1장9절에서 15절까지 첫 번째 문단이죠, 이중 대조 예언이라고 했죠, 니느웨 멸망과 남유다 구원의 이중 대조 예언이 두 번에 걸쳐서 나오고 있죠. 그리고 2 문단이 2장 1절~13절까지예요. 그래서 심판 집행 과정의 주요 장면을 묘사하고 있고, 그걸 통해서 심판의 양상을 예언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2 문단은 2장 전체인 거죠. 그리고 3문단이 3장 1절~7절까지, 니느웨의 만국을 향한 폭력과 기만을 지적하고 있고, 그리고 만국 앞에서 니느웨의 심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문단이 3장 8절~끝까지, 19절까지, 그래서 니느웨가 강성하지만 그러나 결국은 허망하게 멸망할 것이다라는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부터 공부하게 될 2 문단을 보면요, 2 문단을 또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어요.
<제 2문단의 내용 분해> 2:1-13
제2 문단 내용 분해라는 표가 보이시죠? 1절~2절이 여호와의 심판 대행자들의 공격이 예고되고 있고 그리고 이스라엘의 영광이 회복된다라는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절~12절까지, 그래서 여호와의 심판 대행자인 이방 군대에 의해서 니느웨가 멸망하는 과정이 세밀하게 묘사가 되고 있고요. 그리고 13절, 마지막 절에 니느웨의 심판 양상의 핵심 사항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2 문단을 이렇게 나누어 볼 수가 있고요.
근데 우리가 지금 공부하게 되는 2장이 그 니느웨를 정복하기 위해서 대적들이 몰려오잖아요. 그들의 성이 정복되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이러한 사건들이, 이거는 미래의 일이에요, 예언이란 말이죠. 근데 미래의 일인데, 마치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생중계를 하듯이 아주 세밀하게, 그리고 생동감 있게 자세하게 묘사가 되고 있는 거예요. 굉장히 특이하죠.
근데 오늘 공부하는 2장 1절을 보면 이 내용 자체가 굉장히 특이해요. 왜냐하면, 니느웨 대한 심판의 말씀을, 나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대언하고 있단 말이죠. 근데 지금 나훔 선지자가 하는 말씀이 지금 특이하죠.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다’ 그러니까 ‘너는 산성을 지키고 길을 파수하고 네 허리를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하라’. 특이하죠, 지금 니느웨는 심판을 받아야 할 자인데, 마치 당부하듯이 걱정해 주듯이 말하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이 구절을 보면서 어떤 신학자들은, 이스라엘을 괴롭혀온 앗수르가 심판을 받는데, 왜 나훔 선지자가 마치, 자기가 앗수르의 파수꾼인 것처럼 이렇게 소식을 전하고 있느냐, 이건 참 이해할 수 없다라고 보는 거죠. 그래서 2장 1절이, 앗수르가 아니라 유다를 향한 말씀이 아니냐, 이렇게 보기도 한단 말이에요. 보기에 따라서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죠. 이러한 견해는 바로 다음에 2절이 유다에 대해서 언급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유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까 일견 그렇게 또 보이기도 한단 말이에요. 그렇지만 실제로 대적들이 쳐들어와서 성을 공격하고 파괴하고 이런 그 모습이 3절~ 6절 사이에 언급되는데, 그 대상이 니느웨라고 분명히 말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1절이 니느웨가 아니라 유다에 대한 말씀이다라고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은 거죠. 조금 앞뒤가 안 맞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2장 1절은 하나님의 어떤 뜻이 담겨 있는 거고, 근데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하는 거는 신학자들의 견해인 거고,
우리는 이해하기가 쉽죠. 앗수르는 우리니까, 우리라는 걸 이해하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으니까. 이거는 굉장히 하나님의 성도에 대한 어떤 그런 구원의 말씀이 계속 일관성 있게, 우리에게 다가온단 말이죠. 앗수르는 우리란 말이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걸 우리는 이해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신학자들처럼 어렵거나 혼란을 느끼지는 않는단 말이죠. 본문을 보겠습니다.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다'라고 해요. '파괴하는 자' 이거는 이제 ‘메피츠’라고 합니다. 메피츠, 그게 푸츠라는 단어 ‘푸츠’, ‘흩어지다, 흐르다’ 이 동사의 히필 분사형이에요. 그래서 ‘흩어지게 하는 자’예요. 그러니까 푸츠라는 단어는 흩어지다라는 뜻으로 주로 쓰여요. 그리고 이 단어는 성경에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쓰일 때 주로 하나님이 징계하시고 그래서 열방의 침입을 받아서 멸망하고 세상으로 흩어지게 될 때 주로 쓰인 단어란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이 디아스포라가 되는 거죠. 신명기 4장 27절에도 보면,
(신 4:27) 여호와께서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 보내실 그 여러 민족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 라고 하죠. 그리고
(신 28:24) 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 곳에서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했던 목석 우상을 섬길 것이라 라고 해요. 그리고
(사 24:1)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시리니] 라고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흩으신다고 해요. 그때 주로 쓰는 단어가 '푸츠'란 말이에요. 근데 알고 보면 이 앗수르라는 나라 자체가, 역사 속에서 보면 이스라엘을 흩어지게 하는 자의 역할을 했었죠. 그래서 주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을 멸망을 시켰잖아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고 가잖아요. 끌고 가서 다른 나라들에다가 흩어지게 해버렸죠. 그래서 디아스포라를 만들었잖아요. 근데 그러했던 앗수르가, 자기가 이제 흩어지게 되는 자에 의해서 흩어지게 생긴 거죠. 공격을 받아서 완전히 멸망하고 백성들은 흩어지게 되는 그런 운명을 이제 맞게 된 거죠. 그러면 앗수르를 흩어지게 하는 자는, 역사 속에서는 바벨론이 앗수르를 멸망시키죠. 그래서 니느웨가 갈대아 사람들, 이 바벨론에게 멸망이 되는 거죠. 그게 주전 612년이고요, 그리고 이제 얼마 안 있어서, 하란과 나머지 주요 도시들이 함락되면서 그게 600한 5년 경쯤 되는데, 그러면서 이제 앗수르가 완전히 멸망하는 거죠. 창세기 11장 4절부터 합독하시겠습니다.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의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 11:8-9)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흩었다’는 말이 나오고 있죠, ‘푸츠’. '그 성읍과 탑을 건설하자'고해요. 이 바벨탑 쌓는 일은, 그런 일이 있었겠죠, 그래서 홍수 이후니까 인간들이 홍수를 더 겪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그 성을 쌓자, 그리고 탑을 높게 하늘까지 닿게 하자 이렇게 했다고 하는 거죠. 그걸 흔히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적해서 바벨탑을 쌓았던 그런 일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지만은, 이게 사실은 우리가 일상에서 하고 있는 일이에요, 바벨탑을 쌓는 일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선을 행하시죠, 새 성전 지으시는 ‘선’, ‘에르곤 아가토스’를 행하신단 말예요. 그래서 말씀을 주셔서 옛 성전인 우리의 그 두 마음, 옛 마음, 옛 사람을 허물어 버리시는 그 일을 하고 계신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를 위하여’라고 한단 말이에요. 여기 성경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우리를 위하여 만들자고 해요. 우리를 위하여 나 스스로, 나를 위하여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그게 하나님의 에르곤 아가토스, 하나님의 성전을 만드시는 그 선에 대항해서, 내가 내 천국 만들어보겠다라는 그런 시도인 거죠.
‘성’은 ‘이르’라고 하고요, 그리고 ‘탑’은 ‘미그달’이라고 해요. 그걸 ‘바나’하자고 해요. 미그달은 ‘가달’이라는 단어에서 온 거예요. 그래서 ‘높게 하는 거, 위대한 것’이란 말이에요. 이거는 십자가의 의미가 있는 거예요. 성은, 이르는, 성전의 의미가 있죠. 그걸 '내가 세운다'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내 성전을 세우겠다'. 가인이 에녹성을 쌓듯이, 우리가 율법의 성을 쌓고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나만의 성을 계속 만들어가잖아요, 구축해 가잖아요. 그래서 그것이 내 마음에 드는 상태로 이렇게 지어지고, 유지가 될 때, 그걸 만족이라고 하고 그걸 행복이라고 하잖아요. 거기에서 어긋나면 괴로워하고, 또 그 상태로 가고 싶어 하고, 이건 하나님의 뜻과 전혀 관계가 없고, 온전히 내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로 따진단 말이에요. 그 일을 우리는 일상에서 하고 있단 말이죠.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의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로쉬'란 말이에요, '미그달'의 로쉬, 그걸 '하늘에 닿게 한다'라고, 하늘에 닿게 한다는 게 ‘로쉬’인데 ‘머리’란 말이에요. '내가 머리 되겠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나를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제하고 내 힘 내 노력으로 내 천국 만들겠다, 이렇게 하고 있는 게 우리가 일상에서 하고 있는 일인 거예요.
그 '미그달'이란 말이 아까 '가달'에서 나왔다고 했죠, 점점점 커지는 거예요, 위대하게 되는 거, 강해지는 거. 그거는 성전이어야 되는데, 십자가여야 되는데, 근데 그걸 내가 나를 위해서 그걸 키워나가겠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흩으셔야 되는 거죠. 그걸 키우면 점점점 커지면 커지고 자란단 말이에요. 가달 하면 어떻게 되냐면, 씨가 떨어지고 자라게 되면, 새가 깃드는 나무가 된다고 하시죠. 그게 십자가란 말이죠. 새가 깃든단 말이에요, 하늘 백성 깃드는 나무가 되는 거죠.
(시 61:3)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예, 망대 ‘망대’가 ‘미그달’이란 말이죠. 그리고 ‘견고하다’는 거는 ‘오즈’, 그 능력의 망대다, 능력의 십자가다라고 하는 거예요.
(창 11: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고 스스로 내 천국, 내 구원, 내가 이루어 보겠다라고 하는 그 상황에서 하나님이 오시는 거죠. 지금 내 안에 하나님이 오시는 것 같은 거예요. '하나님이 오신다'라고 하는 거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신다'는 거예요. 계시라고 하죠, 자기를 계시해 주시면 하나님을 우리가 깨닫게 되는 거죠. 하나님이 ‘내려오셔요’, ‘야라드’. 그러니까 '그들의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신다'라고 하는데, 우리 안의 그 율법, 그걸 살피러 오시는 듯한 그런 모습을 보여주시는데, 그게 하나님이 우리 안에 존재의 하강으로서 우리 안에 오시는 거죠.
(출 3: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출애굽기 3장 8절에서도 주님이 ‘내가 내려간다’라고 하잖아요. 내려가서 너희를 가나안 땅으로 데려간다라고 하죠. 그때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뭘 하고 있었어요? 하나님이 내려오신다라고 할 때 이스라엘이 한 일은
(출 1: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고’ 있었던 거죠. 예 건축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바벨탑을 쌓듯이 건축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로를 위하여’라고 하는데, 그게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바로는 나잖아요.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고’ 있는 거죠. '성'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이르'예요, 성읍. ‘국고성’ 이라고 할 때는 ‘이르 미스케나’라고 하는데, 비돔, ‘비돔’은 ‘피톰’이라고 해요. ‘정의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국고성이라는 건, 유사시에 대비해서 식량과 무기를 비축해 두는 성읍이죠. 그리고 '라암세스'라고 하는데 이 ‘라’가 ‘애굽의 태양신’이잖아요, ‘태양신이 그를 창조했다’라는 뜻이에요, ‘라암세스’가. 그러니까 ‘태양신의 아들’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시죠, 보물은, 보물의 내용은 그리스도잖아요. 십일조라고 했죠. 그리스도, 십자가, 하나님의 그 뜻, 사랑이란 말이죠. 말라기에서 ‘십일조를 창고에 드려라’라고 했죠, ‘창고’가 ‘베트 하 오차르’라고 했잖아요. ‘오차르’ 보물의 집 보물의 성전을 ‘창고’라고 번역을 한 거예요. ‘하 오차르’, 그 ‘보물의 집, 보물의 성전’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성전은 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보물의 성전, 보물이 담기는 성전, 그리스도가 담기는 성전, 진리 십일조, 그 십자가 진리가 담기는 성전이 나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십일조를 창고에 드려라'라는 말씀은 '그 보물인 그리스도, 그 십자가 진리를 잘 깨닫고 너희 안에 간직하라'라는 그런 말씀인 거죠.
그렇지만 우리는 복음서에서 보듯이 창고를 짓고 만족하는 부자란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필요로 하는 거, 이 땅에서 원하는 거를 그 소유를 쌓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거죠. 그러한 상태, 나를 위한 상태, 나를 위해서 뭔가를 쌓는 상태가 종인 거죠, 노예인 거죠. 애굽의 노예 생활이 그거 가르쳐주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애굽이 있고, 애굽 안에 이스라엘이 있는데, 그건 전부 나란 말이에요, 내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는 자가, 애굽의 상태로 노예 생활하는 거. 그러니까 출애굽이라는 거는 율법의 종 노릇에서 빠져나온 일인 거고, 거기서 벗어나는 게 십자가라는 거예요, 십자가 진리라는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거죠. 갈라디아서 2장 20절 합독하시겠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하죠. 사도 바울이 실제로 못 박힌 게 아니죠, 십자가 진리를 깨달은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에 못박혀야 된다, 죽어야 된다라고 하는 거는, 실제로 우리가 목숨을 끊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 진리를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두 마음을 멈추는 거란 말이에요. 두 마음의 작용, 그 탐심과 정욕을 멈추는 거, 그걸 탐심과 정욕이라고 해요, 두 마음이 발동하는 거. 근데 우리는 늘 그 상태죠, 두 마음이 작용하잖아요.
그래서 내 마음에 드는가 안 드는가, 내 마음에 드는 상태인가 아닌가,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과 대화를 할 때도, 내 마음에 드는 가 아닌가, 이익이 되는 가 아닌가. 자존심을 건드려도 나의 손해예요, 그래서 기분이 나쁘면 그러면 그건 악이라는 거죠. 좋고 나쁜 걸 계속 판단한단 말이에요. 그걸 주장하지 않는 거, 그 상태 좋고 나쁜 걸 판단하지 않고, 나의 그 탐심, 정욕을 주장하지 않게 되는 걸,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선하신 한마음을 깨달은 거예요, 그 뜻이 뭔지를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말씀을 하나님이 나에게 행하시는 '에르곤 아가토스로' 깨닫는 거예요. 나를 죽여서 살리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 성전 만드시는 뜻, 옛 사람 죽이고 새 사람으로 만드는, 옛 성전 허물고 새 성전 짓는, 그 선으로 깨닫는 거죠.
'탐심과 정욕을 주장한다'라고 하는 거는, 보이는 걸 보이는 대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 '파님'이라고 하잖아요. 나타내 보여주신 것들을 그걸 그대로 믿어버리면, 그걸 그대로 보면서 이게 내 가족이지. 가족도 보이는 대로 보면 그게 내 생명과 같잖아요. 이것들이 잘못되면 큰일 나죠. 잘 되면 기분 좋고, 그게 전부 나란 말이에요. 나에게 진리를 깨달으라고 주신 것들이란 말이죠. 그리고 나에게 일도 주시고 어떤 여러 가지 사건 사고들도 주시고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많은 어떤 기후나 우주 만물들이 이렇게 작용을 하고 있는데 운행을 하고 있고, 뭔가 일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비도 오고, 눈도 오고, 날씨가 추웠다가, 더웠다가 전부 하고 있는데 이것들을 내 탐심으로 보면, 두 마음으로 보면 내 마음에 드는가 안 드는가, 날씨가 왜 이렇게 추워 이렇게 더워, 나의 유익 중심으로 두 마음으로 판단해서 이게 좋은가 나쁜가 이것만 계속 판단하고 있단 말이죠. 그걸 탐심과 정욕을 주장한다라고 하는 거죠.
우리에게 주신 그 파님, 그 부모 자식, 형제, 자매, 전토, 그 모든 것, 관계, 소유, 모든 것, 그 속에 하나님 나라에 그 진리를 담아서 주셨단 말이죠. 그거 가르쳐 주시려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 주시려고. 근데 그걸 보이는 대로 보면서 자기를 만족시키고 높여주는 것 이걸로 이제 보려고 애쓰고 그리고 그렇게 만들려고 애쓰는 거 이거, 이거 하는 거를 멈추는 거 이게 두 마음이 멈추는,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하는 거고, 탐심과 정욕이 멈춘다라고 하는 거죠. 주장하지 않게 되는 거죠, 탐심과 정욕을.
그래서 진리를 알게 되면 그래서 주장과 고집이 없어지는 거예요. 점점 자기를 주장하지 않게 되는 거예요. 드러내지 않고, 고집하지 않고, 모든 걸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누군가가 뭔가 주장하면 '당신이 옳소'라고 그냥 해버려요. '이거 아닌데'라고 옛날에 주장했잖아요, 이거 아닌데. 근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냔 말이에요. 그 안에 하나님의 진리가 없다면, 그리고 내가 그걸 가르쳐줘도 그가 모른다면, 굳이 선악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우열이 없어지는 거란 말이에요, 주장이 없어진다는 거는 그런 거예요. 이전에는 내가 내 뜻을 관철시키지 않으면 내가 밑으로 내려가는 게 된단 말이요. 그래서 내가 우위에 서지 못하고 열등한 자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판단을 하게 되고 조급함을 느꼈단 말이에요. 그게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더 잘 나고 높아져야 한다는 강박도 없어지는 거예요. 그냥 밑으로 깔려버리는 거예요. '나를 밟고 올라가시라'라고 하는 거예요.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단 말이에요. 그 천지가 나잖아요, 하늘과 땅이 전부 나란 말이에요. 나를 말씀으로 창조하세요. 진리를 모르는 땅이었던 나에게, 말씀을 주심으로써 내가 진리를 아는 자, 하늘로 지어져 가는 거란 말이죠. 근데 진리를 알아서 하늘이 되면 땅을 비웃나요? 나무라나요, 책망 하나요? 그건 비교가 있는 거고, 우열이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 여전히 땅이라는 거예요. 여전히 내가 남아 있는 상태가 땅이고 율법이란 말이죠.
내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으니까, 그러면은 모든 것이 다 나인 거란 말이에요.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모든 건 하나님 안에 있잖아요. 그럼 전부 내 안에 있는 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것들이 모든 관계가 다 나로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나누어지지 않고 하나가 되고, 한마음이 되는 거고, 너와 내가 없고 모두가 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 옆에 사람들이나 존재들을 보면, 그 속에서 나를 보는 거지, '왜 그랬어'라고 책망하고, 나랑 구별 지으려고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 모습 속에서 그냥 나를 바라보고, 그 속에서 깨달아지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배우는 거예요. 그리고 찬송하는 거예요. 감사하고 찬송하는 거, 아 저게 내 모습이구나.
진리 안에서는 희로애락이 없단 말이에요. 거리낌도 없고 오직 배움과 깨달음만 있는 거예요, 진리 안에서는. 배워서 깨달으면 감사하고 찬송하는 거죠. 그래서 아들 된 자는 항상 기뻐하면서 찬송하는 거란 말이죠. 항상 기뻐하라고 하시잖아요. 이건 하라고 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진리를 알 때만, 하나님 뜻을 알 때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구나, 나를 죽여주시는 말씀이구나' 이걸 알아야 되는 거예요. 죽여 주시는 일이 기쁘고 감사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죽는 게 즐거워야 되는 거예요. 그때 기뻐할 수 있는 거죠. 그게 아니면은 항상 괴롭죠.
예 그렇지만 아들 된 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때문에 나를 죽여서 살리시는 그 뜻이 사랑이라는 걸 안단 말이에요. 그 사랑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모든 게 다 사랑이 되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너와 나라는 피아의 구분이 없어지는 상태가 되는 거예요. 너와 내가 있기 때문에 대적이 있단 말이에요. 근데 너와 내가 없고, 전부 나란 말이에요. 그러면은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으로 보이니까 모든 게 다 하나님인 거죠. 어리고 보잘 것 없고 해도 다 하나님으로 보이게 돼 있다니까요. 그러면은 그 속에서 진리를 깨닫고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송할 수가 있게 되는 거죠. 스가랴서 13장 7절 합독하시겠습니다.
(슥 13: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 흩어지려니와 ]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다
'흩어진다’, ‘푸츠'가 되는 거죠, 푸츠. ‘칼아 깨어서 내 목자를 치라’라고해요. '라아'의 분사형이죠, 그래서 '로이'라고 해요. 이 그게 원형은 '라아'예요. ‘라아’가 ‘풀을 뜯기다, 먹이다, 사귀다, 친구가 되다’. 그러니까 나에게 양식을 주고 그리고 사귐이 있고 친구가 되는 그가 우리의 목자인 거죠. 여기서 내 목자, 나라는 건 하나님이신 거죠. '그를 치라'라고 해요. ‘치라’는 말은 ‘나카’예요, 나카. 쳐서 죽여라, 반석을 치듯이, 반석 치는 게 나카잖아요. '쳐서 죽여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진대요', 푸츠,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차아르'라고 해요, 작은 자들 ‘차아르’, ‘하찮다, 비천하다’라고 하는데 원형이, 이게 분사형이죠 이것도. 이게 이제 성도의 이름인 거죠, 하찮은 자예요, 작아진 자, 높아진 자가 아니라, 바벨탑을 쌓으면서 높아지는 그런 율법의 존재가 아니라, 그걸 버리고 하나님의 그 뜻, 십자가 진리를 깨닫고 작아진 자, 가난한 자인 거죠. 다 털린 자인 거예요. 자기의 두 마음이 털리면은 한 마음만 남죠, 그가 가난한 자인 거예요. 두 마음일 때 부자라고 하는 거고 한마음이면 가난한 자라고 하는 거죠. 그 위에 그 ‘위에는 손을 드리운다’ 손, 손은 ‘야드’라고 합니다. 이 손이 ‘능력, 본능’을 뜻하는 거예요.
(왕상 18: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능력, 손’이란 말이에요, ‘야드’가 엘리야에게 임했대요, 그게 능력이 임했다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손을 능력이라고 해요, 성경에서 손. 그러니까 하나님이 손을 뻗어서, 하나님이 영이시니까 손이 있는 게 아니죠. 그렇지만 그 손을 뻗어서 그 작은 자들 위에 드리운다라고 하는 거고, 그 손에 능력이 있다라고 말씀하시죠. 근데 이 손은 십자가에 박히는 손을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손에 능력이 있다'라고 하는 말은 결국은 '십자가의 능력이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인거에요.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능력이란 말이죠.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말씀, '스타우로스'의 '로고스', 말씀, 십자가 진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십자가 진리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인데 여기에 ‘멘’이라는 말이 있어요, ‘진실로’. ‘아폴뤼미’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모리아’, ‘어리석음’이다라고 하는 거죠. 이거는 십자가 진리를 몰라서 십자가를 향해서 감히 어리석다고 하는 자는 멸망할 것이고,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니까 능력 받아서 구원받는다라는 그런 의미로 들려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비웃다가 멸망한다'라는 그런 의미가 들어있는 걸로 흔히 보는데, 이거는 내 이야기하는 거예요 전부, 성경은 전부 내 이야기란 말이에요. 내가 그 십자가 진리를 비웃다가 멸망하는 자인 거예요. 지금도 그러고 있잖아요, 내 뜻대로 판단하고 있고. 그러니까 '멘', '진실로, 반드시' 멸망해야 되는 거죠. 십자가의 죽음을 죽는 거란 말이에요. 십자가에서 죽는 거예요. 그걸 '아폴뤼미'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는 게 하나님의 능력이다'라고 하는 거에요.
(마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잃는다'는 말이 '아폴뤼미'에요. 목숨 ‘목숨’은 이제 ‘프쉬케’죠, 프쉬케는 육적인 목숨이잖아요. 생명이 아니죠, ‘조에’의 ‘생명’이 아니라 육적인 목숨이죠. 보이는 것, 보이는 것을 부모, 자식, 형제, 자매, 전토, 내 것, 내 자존심, 내 소유, 내 자랑, 전부, 그거 찾는 자는 멸망할 것이요. 우리가 그거 찾고 있잖아요. 그래서 '멘, 반드시' '십자가에서 멸망할 것이요', 이건 저주가 아니죠, 복음이죠. 우리가 그러고 있는데 그렇지만 십자가에서 죽여주신다라고 하는 거예요, 반드시 '멘'.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헤네카’라고해요 헤네카, 헤네카가 ‘~때문에, ~를 위하여’ 그러니까 ‘~인하여’죠. 나를 인하여 자기 목숨 그 프쉬케 잃는 게 얻는 거다, 생명 얻는 거다라고 하는 거죠.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헤네카'란 말이에요. '헤네카 디카이오쉬네', 그러니까 무슨 정의를 위해서 순교하거나 고난을 받는 게 복이 있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디카이오쉬네’ ‘의’로 인해서. 의는 예수 그리스도시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박해를 받는다, 십자가에서 죽는 거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은 것과 같은 이야기란 말이에요. 순교나 기독교 박해 이야기가 아니라, 그거 아니라는 건 바로 다음 줄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마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거짓’, ‘푸슈도마이’란 말이에요, 거짓말하는 거. 그리고 악한 말을 한다라는 거는 ‘포네로스’ ‘악’을 ‘에포’, ‘말하는 거’, 악, 포네로스는 율법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율법을 말하는 거, 말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오시면 무슨 일이 일어나요? 주님이 나에게 오시면 진리의 말씀을 알게 되죠, 그러면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게 되는 거죠.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거는 선악의 두 마음이, 나의 그 두 마음이 하나님의 한마음으로 항상 선하신 한마음이 된다는 거죠. 말이 바뀌는 거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선은 성전 만드는 선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항상 선하신 하나님의 한마음이 된다라고 하는 건, 일상에 주시는 모든 말씀이 나를 죽여서 새 성전 만들어 주신 말씀으로 깨닫게 되는 거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이걸 위해서 주시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바꿔서 이야기하면 성도는 그것 때문에 살고 있는 거예요. 다른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지기 위해서, 그전에는 죽기 위해서, 십자가 죽음을 죽기 위해서 있는 거란 말이에요, 성도는. 그러니까 인생의 목적이, 행복도 아니고, 성공도 아니고, 죽는 거란 말이에요, 십자가 죽음을 죽는 거. 영혼 속에서는 우리의 인생은 잠깐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거는 곧 사라질 것들이에요. 그럼 하나님이 굳이 영혼 속에 계신 하나님이 굳이 왜 인생을 살게 하셨겠냔 말이에요.
이 땅에서 열심히 쌓고 쌓고 쌓다가 결국은 무로 돌아가는데,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이걸 위해서 주신 거고, 그 주신 인생이고, 주신 말씀들을 우리가 살고 있고 겪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가 주는 건 전부 그거예요. 그럼 그거를 진리의 말씀으로 받으면, 우리가 말씀을 먹는 거고, 양육을 받는 거고, 장성하게 되는 거란 말이죠. 그 말씀을 받기 위해서, 이게 주님 때문에, 받아서 내가 죽는 게, 이게 주님으로 인해서 목숨을 잃은 일이고,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일이란 말이에요, 같은 일인 거예요. 의를 위해서 박해받는 게, 나로 인해서 목숨 잃은 거, 헤네카, 주님으로 인해서 목숨을 잃은 것, 같은 거란 말이죠. 그걸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푸츠, 흩어주신다라고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26장 31절 합독하시겠습니다.
(마 26:31)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앞에서 나온 스가랴서를 인용하신 말씀이죠.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세요.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해요. 너희가 나를 버린다라고 했는데, 이거는 '나를'이라고 번역하면 안 돼요, 엔, ‘엔’이라는 전치사가 있어요, 그러니까 ‘엔 에모이’니까, ‘내 안에서’라는 거죠. '에고'가 여격이라서 '에모이'라고 하는데, 에모이, '엔 에모이'. 그러니까 '내 안에서'.
그리고 연이어서 뭐가 나오냐면, ‘엔 호 뉙스’라고 해요. ‘뉙스’, ‘밤’이죠, ‘밤 안에서’ 그러니까 ‘내 안에서, 밤 안에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밤에 나를 버린다'라고 할 때 '오늘 밤에 나를'이, 엔이라는 전치사 두 개로 연결돼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 안에서, 밤 안에서'. '이 밤'이니까 지시 대명사가 있긴 해요. '타우테'라고 하는데, 이거는 이제 중요하지 않으니까 '밤 안에서'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내 안'이, 곧 '밤 안'인 거예요. 같은 말인 거예요. 나는 예수죠. 그리스도가 아니시고, 말씀이 육신 되어 오신 분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 안'에 있는 게 곧 '밤 안'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버린다’라고 했는데 버린다는 말이 ‘스칸달리조’, '실족할 것이다'라는 거예요. 버리는 게 아니라 실족하는 거예요. 빛이 없는 때잖아요, 밤. 주님이 말씀이 육신 되어 오셨어요. 육신은 보이는 말씀이죠. 그러니까 율법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 안에 그리스도로 주님이 보이지 않는 말씀으로 오셔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되어 주셔야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 안에서는 밤이기 때문에 실족한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가 오늘 밤에 다 나를 버릴 거야', 이거는 '이 나쁜 놈들 너희가 오늘 밤에 다 나 버리고 도망갈 거지'라고 미리 야단치시는 게 아니라, '너희는 내 안에 있으면, 밤에 있는 거고, 율법 안에 있는 거고, 그러면 실족할 수밖에 없다'. 이거 가르쳐주시는 거예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목자를 치잖아요. 십자가에서 죽이잖아요. 그러면 양의 떼가 흩어지는 거죠. ‘디아스코르피조’, ‘흩뿌리다, 분산하다, 낭비하다’ 그러니까 바벨탑에서 흩어버리듯이 흩어버리시는 거예요. 누가복음 15장 11절 합독하겠습니다.
(눅 15:11-14)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두 아들’이라고 하죠, 두 아들. 두 아들이라고 하면 뭐라고 했죠? 예수와 그리스도, 예수와 그리스도 이야기하는 거예요. 둘째가 말한대요. 둘째는 ‘네오스’라고 해요, ‘새로운’. 새로운 이니까 예수와 그리스도 중에 그리스도인 거예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되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해요. ‘분깃, 메로스’라고 해요, ‘부분’. 주님의 분깃은 우리죠? 우리가 주님 옆구리에서 나왔잖아요. ‘메로스’ ‘분깃’, 그거 달라.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라고 하는 거죠.
아버지가 살림을 나눠줘요. ‘비오스’라고요. 비오스가 마가복음 12장 24절에 보면
(막 12: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넣었더니까,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 생명 전체. 그의 육적인 생명, 육적인 목숨 전체를 넣었다라고 하는 거예요. 육적인 목숨을 이야기하는 거죠. 생명은 생명인데 육적인 거 ‘비오스’를 줬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그러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원래 진리이신 그리스도이신 주님이 몸을 입고 오시는 거란 말이에요. 율법이 되어서 오시는 거예요.
(눅 15: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먼 나라, 마크로스’라고요. 먼 나라니까 하늘에서 먼 나라, 나. 내 안에 오시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가 하늘에서 멀잖아요. 진리에서 머니까 내가 먼 나라예요. 진리에서 먼 나에게 오셨는데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아소토스, 낭비적으로, 방탕하게’. 이게 ‘허랑방탕하여’라고 번역한 거고요.
재산을 ‘우시아, 재산’을 ‘디아스 코르피’죠. 이게 ‘흩뿌리다’라는 거예요. 낭비하다는 의미가 있는데 흩뿌리다, 본래 의미는. 그러니까 우리에게 뭘 주신 거예요? 재산, 재산이란 말이에요.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온 거는 말씀이죠. 말씀을 받아서 우리에게 주신 거란 말이에요. 그게 방탕하게 낭비한 게 되는 거예요. 말씀을 받으면 우리가 잘 깨달아야 되는데, 그럼 낭비한 게 아닌데 우리가 통 못 알아먹잖아요. 그럼 완전히 날린 거죠. 알아먹지도 못한 우리에게 아까운 진리를 낭비하신 거란 말이죠.
근데 그 말씀을 우리에게 ‘디아스 코르피’죠, 콩나물 주듯이, 물이 낭비되는 것 같지만 뿌리신단 말이에요. 뿌린 말씀은 율법이기 때문에 낭비가 되는 거예요. 또 낭비가 되어야 되는 거죠.
(눅 15: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예, 이거 어디서 본 그림이죠? 온 나라에 흉년이 들었어요. 애굽 이야기하는 거죠. 예 창세기에서 요셉의 일을 다시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 나라, 우리 안에 크게 흉년이 들어 기근이 들은 거예요.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생겼다는 거예요.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비로소’ 비로소라는 말이 ‘아르코마이’죠. 아르코마이가 ‘시작하다, 통치하다’는 뜻이고 ‘궁핍하다’는 말은 ‘휘스테레오’. 이 ‘부족하다’는 뜻인데 ‘너무 늦게 오다, 부족하다’.
이 ‘아르코’라는 말이 칠십인역에서 할랄의 역어로 쓰여요. ’할랄’이 ‘시작하다’라는 뜻인데 ‘꿰뚫다’라는 뜻이에요.
’부족하여’, ‘휘스테리오, 부족하다’ 그랬죠? 율법으로는 부족해요. 그래서 찔림을 받는 거란 말이에요. 그리스도 예수가 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씀을 비로소 궁핍한지라라는 그 말씀 속에 담아주신 거죠. 그리스도 예수가 되기 위해서 율법으로는 부족하니까 십자가에서 죽어주셨다라고 하는 거죠.
그게 낭비하는 것 같지만 그게 우리에게 뿌려지는 일이기도 한 거죠.
그러니까 오늘 ‘파괴하는 자’가 ‘푸츠하는 자’인데 푸츠하는 자는 ‘뿌리는 자’인 거에요. 진리를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라는 이야기인 거예요. 그러니까 파괴하는 자는 곧 우리에게 진리 주시는 분 맞는 말이죠. 진리를 주면 우리의 옛 사람이 파괴되니까, 역시 맞는 말인 거예요. 사도행전 5장 36절부터 합독 하시겠습니다.
(행 5:36-37) 36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흩어졌다’에요. 흩어져 없어졌고 흩어졌대요. 이게 흩어져 없어졌다는 말은 ‘디알뤼오’라고 하고요. 그리고 37절에 ‘흩어졌다’는 말은 ‘푸츠’의 역어로 쓰이는 말이죠, ‘디아스 코르피조’가 되는 거죠. 이 ‘디알뤼오’도 ‘디아’와 ‘리오’가 합쳐진 말인데 이게 이것도 칠십인역에서 ‘푸츠’의 역어로 쓰여요. 디아스코피조도 칠십인역에서 푸츠의 역어로 쓰이고 이 ‘디알리오’도 푸츠의 역어로 쓰이는 거예요.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라고 해요. ‘드다’, 드다는 ‘듀다스’라고 헬라어 ‘듀다스’라고 하는데 이 의미가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또 있죠? 성경에서. 사도행전에 나오는데 혹시 여기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사람은 '마디아'예요. 이 드다가 히브리어 이름이 마디아예요, 같은 이름인 거예요. 역사가 요셉 푸스에 따르면 드다가 파두스 총독 때 일어난 거짓 메시아다라고 해요. 그래서 자기가 엘리아다 이러면서 자기가 말 한마디만 하면 요단 강물이 나누어지고 자기는 마른 땅을 밟고 건넌다, 막 이렇게 사람들을 현혹시킨 거죠. 그러다가 총독한테 걸려서 로마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거예요.
근데 요셉푸스가 말한 '나'는 가말리엘이 지금 이야기한 거잖아요. 좀 전에 읽은 거는 가말리엘이 이야기할 때는 주 후 30년 경이란 말이에요. 주님이 돌아가신 그쯤이니까. 그러니까 그때보다는 나중의 인물이에요. 한 10년 이상 10년 15년 후대의 인물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같은 인물이 아닐 거다라고 보고 있고요. 그래서 드다가 이름이 마디아니까, 헤롯 왕이 성전 기둥에 뭔가 설치하고 파괴하고 이런 적이 있었단 말이에요. 그때 폭동을 일으켰다가 화형을 당한 마디아가 아닌가 이렇게 보기도 해요. 어쨌든 그런 의견들이 있다는 거고,
드다가 일어나요. 드다의 의미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선물. 선물인 어떤 이가 일어났는데 '아니스테이' 이게 '아나'라는 말과 '히스테미'라는 말이 합쳐진 거예요. 그러니까 하늘로 섰다, 하늘로 섰다. '히스테미, 섰다'라는 거는 십자가로 선 거죠. 십자가 그 진리로 우뚝 선 거예요. 십자가로 선 거예요.
'스스로 선전하매'라고 하는데, 이게 '레고, 말하는데' 뭐라고 하냐면 '티스 헤아우트'라고 해요. 그러니까 '내가 누군지를 말했다'라고 하는 거, 내가 누군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했죠. 그분이 하나님의 그 선물이신 그분이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어떤 이가 오셔서 하늘로 우뚝 섰어요. 진리로 우뚝 서고, 내가 누군지를 말했다라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면서. 그러니까 십자가에 죽는 것 자체가 내가 누군지를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십자가 죽음을 죽으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자는 죽을 수가 없고 오직 십자가에서 죽는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에요. 성도도 역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증명할 수가 있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죽어야겠죠. 죽어서 증명을 십자가에 죽는다는 말은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그 두 마음 두 마음의 그 탐심, 정욕 이게 이제 한마음이 되는 거라고 했죠. 자기의 그 두 마음 선악의 두 마음 판단을 버리는 거, 그게 버리는 게 자기가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 버리고 싶다고 해서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주시는 거라고 했죠. 그러니까 오직 은혜로 죽을 수가 있고 결국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있고 그러니까 결국 그걸 아는 아들은 감사하고 찬송밖에 안 나오는 거예요. 자랑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서 뭐라고 이제 지적하거나 나무랄 수도 없는 거죠.
은혜 아니면 그렇게 깨달을 수도 없단 말이죠. 그 십자가의 죽음이 뭔지도 알 수가 없고 그 말씀 그 진리의 말씀을 주셔서 나를 죽여가신다는 것도 깨닫지 못해요. 오직 나의 그 뜻, 나의 정욕만 나의 탐심만 드러나는 거죠. 그래서 내 마음에 드는 거 안 드는 것만 나타나고 내 마음에 안 들면 혼내고 속내고 화내고 이러면서 괴로워하는 거죠. 그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상태로, 그게 천국이 아닌 상태인 거죠, 그거 자체가 이미.
그러니까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 자체 그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말하는 거예요.누가는 두다의 일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고 있단 말이에요. 복음은 하나님이 자기를 죽여서 자기 백성 구원하는 거죠.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거를 말씀하셨단 말이에요. 그리고 성도 또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내가 누구라는 걸 말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사백, 사십이란 말이에요. 그 진리를 위해서 사십년 광야를 간 것과 같은 이야기인 거죠. '사백 명이나 따른다'는 것도 그 '호세이 테트라코시오이'라고요. 사백인 것처럼, 사백과 같이, 사십이라는 얘기예요. '넷의 성전을 완성하는 그 사백처럼 그 사람이 따르다. '프로스 클리노'라고 해요. 이게 '속하다, 가입하다'인데, '프로스' '뭐 뭣을 향해서', '클리노' '의지하다'라고 하는 거예요, 의지하다, '클리노'. '머리 둘 곳 없다'라고 할 때 이거 나눠 쓴단 말이에요, 클리노. 그러니까 그리스도 그 십자가를 의지하는 거죠. '그를 향해서 의지한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가 죽임을 당하매'에, '아나이레오'라고요. 이게 '위로' '아나'라는 말과 '하이레오마이'라는 말이 합쳐진 거예요. 그러니까 '위로 취해졌다, 하늘로 취해졌다'. 우리가 이제 공중으로 들려서 주님을 만난다고 하잖아요, 그 얘기란 말이죠. 취해지는 거예요, 하늘로 취해지는 거, 진리로 취해지는 거.
그래서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서 없어졌다'라고 하는 거죠. '디알뤼오' '흩어지게 됐다'라고 하는 거. 그리고 '흩어져서 없어졌다'라고 하죠. '없어졌다'는 말은 또 다른 말이에요. 이게 '기노마이' '뭐가 되다'라는 거죠, '에이스 우데이스. '우데이스'가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것 안으로 되었다라고 하는데 이게 없음이 됐다라는 겁니다, 우데이스, 아무것도 아닌, 낫씽, 아무것도 아님이 되었다. 창세기 5장 24절에도 보면,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게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란 말이 '아인'이에요, '없음이 됐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에서 없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세상인데 내가 나의 두 마음이 삭제가 되면 내가 없어지는 거예요. 내가 없음이 되는 거고 그게 세상에서 없음이 되는 거고 하나님과 하나 됐으니까 하늘이 되는 거죠. 세상에 있지 않고 하늘이 되는 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라고 할 때는 '할라크'라고 해요. 그 십자가의 길로 갔다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 '라카흐'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취해서 데려갔다'. 이게 아까 앞에서 나온 '아나이레오'의 의미인 거죠, '아나이레오, 취해졌다, 위로 취해졌다'. 하나님이 그를 취해갔다는 게 아나이레오와 같은 말인 거죠.
(행 5: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이제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데, '갈릴리에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깨어 따르게 하다가'. 가말리엘이 이제 함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면 나타날 것이고 아니면 조용해질 것이다라는 그런 의미에서 두 가지 예를 든 거예요. 가말리엘이 자기의 뜻으로 이야기했겠지만 성경은 또 그걸 가져다가 진리를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는 거죠.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다'라고 할 때도 이게 '디아스 코르피죠', '푸츠'의 의미죠. '호적 할 때'라는 건 '아포그라페'라고 해요, 아포그라페. 이게 누가복음 2장 1절에서
(눅 2: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라고 하죠.
이때 베들레헴으로 가다가 주님이 태어나는 거죠. 이때 갈릴리 유다가 이 호적이 호적 조사하는 게 세금 징수를 위한 거니까, '이거는 하나님 백성의 도리가 아니다' 이러면서 갈릴리 유다가 일어난 거예요. 그래서 이제 민족주의적인 운동을 한 일이 있었죠.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깨워서 따르게 하다가'라고요, 갈릴리. '갈릴리'란 말은 '갈릴'이죠. 히브리어로 이게 '원, 순회'라는 거예요, 도는 거.
그리고 유다, 유다는 '예후다' 예후다는 '야다'라는 말을 써 왔어요. 그래서 이게 창세기 29장 35절에는,
(창 29: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이게 '야다'란 말이에요, 야다 '안다'는 뜻의 야다. 그럼 이제 글자가 다른 거예요, 야다. 그러니까 '야다' 하기 때문에 '유다'라고 한 거예요. 야다, 예후다라고 하는데 야다에서 온 말인 거죠. 창세기 49장 8절에도 보면
(창 49:8-9) 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유다야 너는 내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라고 하죠. 그러니까 '찬송하는 자'이면서 '찬송을 받는 자'라는 거예요, 유다가. 그리고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라고 하죠, 9절에. 유다는 사자 새끼다라고 할 때 유다 지파의 사자로 오는 주님을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10절에도 보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않고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지팡이, 십자가란 말이에요. '십자가가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메시아가 오시기까지 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지금 유다, 갈릴리 유다라고 하는 거는 '갈릴, 원'이라고 했죠. '순회'라고 했죠? 이게 성령의 운행하심을 이야기하는 그런 단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의 뜻이 담긴 유다, 하나님의 찬송인 그분.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갈릴리 유다도. 아모스 5장 24절 보면요.
(암 5: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이게 '갈랄'이라는 단어, '갈릴리'가 갈랄에서 온 단어인데 이게 '흐르게 한다'는 말이 '구르다, 굴리다'라는 뜻의 '갈랄'이란 말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역사하심, 성령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갈릴리 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니스테미', '위로 일어났다'라고 하는 거죠. '히스테미', '하늘로 진리로 섰다, 십자가에 죽음을 죽었다'라고 하는 거죠.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백성을 꿰어서 따르게 한다, 이 꾀어서 따르게 한다는 말이 '아피스테미'이에요. '일어난다'는 말은 앞에 '아니스테미'이고, '깨어서 따르게 한다'고 하는데 백성을 '오피소 아우토스'라고 해요. 그 뒤로, 그 뒤로 따르게 한다. '오피소'가 '뒤로'라는 말이죠. '오피소 무' 이러면 '나를 따르라' 이런 뜻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뒤로 백성을 '아피스테미' 이게 '유혹했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백성을 떠나도록 돌아서도록 만든 거예요. 돌아섰는데 어디로 돌아서냐면 율법에서 돌아서도록 하는 거예요. 백성들을 율법에서 돌아서도록 '아피스테미' 돌아서도록 꿰다가 그도 망했다. '망했다'는 말이 '아폴림'이에요. 그래서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다. '디아스 코르피조'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이제 주님이 오셔서 하신 그 일을 또 역시 이제 그대로 보여준 그 일이란 말이에요.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디아스 코르피조', 흩어졌는데 그에게 '페이도' 따르던 자는, 페이도 아까도 나왔었죠 '깨닫다'란 뜻이죠. 설득된 모든 자, 깨달은 모든 자가 '디아스 코르피조', 흩어졌는데 이게 지금 사도행전 1장 8절에 그 내용이란 말이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너희 안에 들어오면 그러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그 손, 손의 그 능력. 손은 결국 십자가, 십자가의 능력을 받고 그리고 이게 너희가 권능을 받는 게 아니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는 권능이라고 했죠? 권능이 임하면 그러면 너희가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이렇게 디아스 코르피조, '뿌려진다'라고 하는 거예요.
흩어진다, 이게 '푸츠'인 거죠, 푸츠. 이 디아스 코르피조는 푸츠의 역어로 쓰이면서 칠십인역에서 푸츠의 역어로 쓰이면서 '자라'의 역어로도 쓰여요, 자라. '자라'가 '씨를 뿌리다'잖아요. 그러니까 '푸츠' '뿌려진다'라는 거는 '씨를 뿌린다'는 의미이기도 한 거예요. 그리스도께서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지는데 목자 없는 양이 되는 게 아니라 목자께서 그리스도가 되셔서 양들의 안으로 들어오시고 양들은 씨, 진리가 되어서 뿌려지게 되는 거란 말이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른다'라고 하는데 주님이 하신 일이죠. 이게 전부 주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이야기한 거란 말이에요. 우리가 가야 되는 길이 아니라, 전도의 길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이게 전부 예수님이 하신 일이에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을 '주님이 가셨다'는 말이에요.
예루살렘에서 옛 성전을 뒤집어 엎으셨잖아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켜 세우겠다'라고 하셨죠. 그래서 성전된 자기 몸을 죽이는 십자가 복음을 가르쳐 주시고 그리고 유대 관원 니고데모에게 십자가 복음을 가르쳐 주셨죠. '위로부터 거듭나야 된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 '겐나오 아노데이'라고 했잖아요. '위로부터 거듭나라 그래야 하나님 나라가 된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위로부터 거듭나는 거 그게 십자가 복음인 거죠.
그리고 또 한 발 나가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죠. 그래서 주님께서 그 여자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말라'고 자기를 내어주신 거죠. 우리란 말이에요. 전부 우리 이야기하는 걸 이렇게 내어주시면서 사마리아 이방인인 나에게까지 오시고 그리고 마침내 '땅 끝' '에스카토스 호 게'란 말이에요. '땅 위의 맨 끝', 에스카토스가 '맨 끝'이고 가장 갓이었고.
아까 '차르'라고 했죠? 그 '하찮은 자’ 그 '작은 자’에게 '내 손이 들이온다'라고 했잖아요. 가장 작고 가장 가치 없는 땅. 십자가에 박아가지고 바벨탑 쌓고 높아지고 거대한 커진 자가 아니라 가장 작은 자 낮은 자 십자가에 박아서 낮추고 낮추어서 멸시를 받게 되는 땅, 나에게 오시는 거란 말이에요. 십자가 진리의 복음이 전파가 되는 거죠. 그렇게 가장 작은 땅. 땅 끝은 나란 말이에요. 가장 가치 없는 작아진 나, 그에게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증인이 된다'라고 하는데 이 '된다'는 말이 에이미 동사를 써요. 근데 이게 '에세스데'라고 해요, 에세스데. 에세스대가 뭐냐면 이 에이미 동사의 명령법 현재 능동태 이인칭 복수예요. 중요한 건 명령법이라는 거예요, 명령법. 명령법으로 쓰였어요. 그러니까 '증인이 되라'라는 의미도 돼요. 그리고 또 이 '에세스데'란 말 자체가 미래형으로도 쓰여요. '너희는 될 것이다'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두 가지로 볼 수가 있는 단어예요. '에세스데'가 우연인지 아니면은 뜻이 있으셔서 이렇게 보이게 하셨겠죠.
그러니까 이게 '스칸달론'이란 말이에요. '걸림돌'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이걸 명령형으로 보니까 '복음을 전파해야 된다'라는 그 필연적 임무를 지우는 지상명령이 되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물론 전해야죠, 전하는데 그 복음은 뭘 하라고 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명령은, 하나님의 명령은 항상 내가 해준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이에요. '너희는 못한다'예요. 그래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는 거고 우리의 능력은 전혀 없고 우리는 능력이 안 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시는 전적인 은혜, 완전한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는 거고 그래서 우리는 면목 없이 하나님의 그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하는 자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 아들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복음이에요.
우리가 뭘 해야 된다면, 뭘 못하면 어떻게 할 거냔 말이에요. 하라고 한 거 못하면 조금만 하면 된다. 그것도 못할 수도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뭔가를 지우는 거는 그거는 율법이란 말이에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인 거예요. 전부 주님이 다 해주시는 거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다 해서 우리에게 전가해 주시는 게 그게 구원이고 복음이란 말이죠. 예 그러니까 너희는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봐야 되는 거예요.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렇게 만들어주시는 거예요. 우리는 죽어 있었어요.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고 마른 뼈고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신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십자가 복음 관심도 없었어요. '왜 내가 죽어야 돼?' 반항만 하고 있었죠.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서 우리를 진리를 아는 자로 차츰차츰 만들어 가신 거란 말이에요. 끌어오신 거예요. 하나님 다 하신 거예요. 내가 한 거 없다니까요.
그거 내가 했다라고 주장하는 거는 복음이 아니란 말이죠. 진리가 아니고 아들이 아니란 말이죠. 오직 은혜라는 걸 아는 거예요. 아들이 그거 알고 감사하는 거라니까요. 그때 기뻐할 수가 있는 거예요. 항상 기뻐하는 거예요. '뭐 했다'라고, '내가 뭐 했는데 왜 안 해주세요?'! 화만 나죠, 기분 나쁘고 속상하고. 왜 하나님은 이것도 안 해주셔요? 이렇게 간다니까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하나님이 다 해주시는 거예요. 전적인 은혜란 말이에요. 전적인 은혜가 아니면 그거는 복음이 아니에요. 그래서 뭘 해야 된다, 자꾸 뭘 하라고 하는데, 하라는 거 없어요 성경에는. 하나님이 하셔요. 못하는 거 확인하라는 거예요. 명령은 못하는 거 확인하고 내가 해준다예요. 명령법은 하나님이 해주신 대로 바꿔서 읽어야 되는 거예요.
자, 본문으로 가서요. '이렇게 파괴하는 자', 진리를 우리에게 주어서 파괴하는 자, 십자가 복음을 주어서 나의 옛 사람을 죽여주시는. '그가 너를 치러 올라왔다. '너를 치러'라고 하는데 이게 '알 파님'이에요. '파님', '껍데기'. 네가 껍데기로 보는 거 그거 없애주러 왔다라고 하시는 거죠.
근데 '올라왔다'라고 하는데 이 '올라온 거'는 물론 바벨론의 군대들이 올라온 거지만, 이 '올라왔다'는 말은 '알라'라는 말. '알라'는 '올라'에서 온 말이죠. 번제물로 번제단에 올라가는 거 그걸 '알라'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이 번제물이 되기 위해서 십자가에 올라갔다'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너는 산성을 지키며 귀를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라고 하는 거에요..
이게 동사들이 4개가 나오는데 하나는 부정사예요. 그러니까 3개가 본동사인데 전부 명령형이고 전부 강조형이에요. 그러니까 '반드시 그렇게 하라'라고 하는 거죠. 근데 명령형은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이 해주신다. 그러니까 '반드시 내가 해주신다'라고 하는 거죠.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쇄하며' 이거는 '산성을 지키도록 길을 파쇄하다'라는 뜻이 그러니까 '지킨다'는 말은 부정사예요. 지키도록 길을 파수하라. 반드시 파수하라.
그러니까 중요한 건, 다 중요한데, 중요한 건 산성이죠. 산성을 지키기 위해서 '귀를 파수하고 그리고 허리를 견고히 묶고 힘을 크게 굳게 하라'라고 하시니까 지금 중요한 건 뭐예요? 산성이란 말 산성, 성전이란 말이에요. 나라는 성전을 지키기 위해서 '나차'를 보호하기 위해서 지키도록 그 길을 파쇄하고 '데레크' 주님의 그 길이죠.
'나만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길을 지켜라'. '차파’라고 해요, '차파' '둘러보다, 지켜보다, 망보다'라고 해요. '반드시 지켜라'라고 하는 거죠. 이게 '차파'라는 말이 에스겔서 3장 17절에 보면요.
(겔 3: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파수꾼에 쓰인 단어예요. 그러니까 차파하는 자, 분사형으로 쓰이면 '파수꾼'이 되는 거죠.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이거는 지금 주님께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인 거죠.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그러니까 파수꾼으로 세운 거는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이게 파수꾼은 지금 성전 지키는 자잖아요. '성전을 지키는 거'는 '말'이라는 거죠. '내 입의 말을 듣고 그들을 대신해서 깨우치라', '말을 주라'라고 하는 거죠. '내 허리를 견고히 묶고'. 허리, 허리는 출애굽기 12장 11절에 보면,
(출 12: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허리에 띠를 띠고', 띠는 진리의 허리띠죠. 그러니까 '진리로 견고히 묶어라'라고 하는 거죠. 열왕기상 18장 46절, 아까 나왔죠?
(왕상 18: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라고 해요, '허리를 동이고'. '능력'은 '야드'였잖아요. '손이 임하매', '능력이 임하매'. 능력이 임하니까, 하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임하니까, 십자가의 진리가 임하니까, 그 진리로 허리를 동이는, 엘리아가 하는 거죠. 그런 일을 하는 거죠.
(사 11: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에 띠를 삼으리라
'체데크' '의'란 말입니다. '의로 허리띠를 삼고 성실로 그의 몸에 띠를 삼으리라'. '에무나' '견고함' 이게 '신실함, 믿음', 믿음 이야기하는 거죠. 아멘이잖아요. '에무나'가 '아멘'에서 나온 단어란 말이에요, 진리, 믿음. 진리를 뜻하는 단어인 거죠. '신실'이라는 말 자체가 '진실, 진리'를 뜻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 진리로 허리를 견고히 묶어라'라고 하는 거죠, '진리를 꼭 붙잡으라'라고 하는 거죠.
그리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하라'. '힘', '코아흐'. '아메츠' '강하다, 담대하다'예요. 여기 신명기 31장 23절에
(신 31:23)b 강하고 담대하라 라고 하죠. 이게 '담대하라'가 '아메츠'예요.
그리고 '강하다'는 말이 앞에서 나온 '그 허리를 견고히 묶어라'라고 할 때 '하자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하자크'가 '강하라'라고 하는 단어예요.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이 이제 '하자크 아메츠' 이게 그대로 나오고 있는 거죠. '너는 지금 강하고 담대하라'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니까 파괴하는 자, 씨뿌리는 자가 우리에게 오시니까 '강하고 담대하라'. '그 진리로 강하고 담대하라'라고 하시는 거죠.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는 건 십자가에서 하나 되는 거죠. 그때 성도는 오직 그때 강하고 담대할 수가 있는 거죠. 에스겔서 11장 16절 합독하시겠습니다.
(겔 11:16)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예, 하나님이 우리를 흩으시지만, '흩으신 그곳에서', ''푸츠’하신 곳에서 ‘성소가 되신다'고 하는 거죠. 흐트신 곳에서 성소가 되요. 성소는 우리 안이잖아요, 우리 안에 성소, 하나님 나라 이루어 주신다라고 하는 거죠. 하나님은 바벨탑 쌓고 견고한 그 니느웨 쌓고 그렇게 살면서 내 천국 내가 만들겠다고 하는 우리 안에 바벨탑 쌓는 자들을 흩으셨다는 거는 내 안에 율법을 흩으셨다는 거예요. 그 흐트신 그곳에 그 자리를 율법 쫓아내고 하나님 나라로 만드시는 거란 말이, 하나님이 흩으시는 일이 그 진리의 씨를 심고 자라게 하시는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라고 하시는 건 '하나님과 십자가에 하나 되라'라고 하시는 거고 '하나님의 그 증인 되라, 내가 너 증인 만들어 주겠다'라고 하시는 그 말씀인 거죠.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 잘 찾으시고, 잘 내 안에서 발견하시고,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증인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흩으신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 되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바벨탑 쌓고 인의 성 쌓고 살면서 내 천국 이루고 싶어 하는 그 뜻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뜻을 흩어주시고 우리를 하나님 아들 만드시는 그 일을 위해서 번제단의 제물까지 낮아지시니 감사합니다. 그 뜻 알고 하나님 증인 되길 간절히 소망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